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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브리타

kangbomb

브리타, 지난 번 업로드한 데이터는 잘 받았어요. 뷸론 행성의 해양 산맥은 정말 장관이더군요. 관자놀이의 소켓이 얼얼할 지경이었어요. 처음에는 나와 기억과 유전 정보를 공유하는 페어(pair)인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고민했어요. 동료들처럼 식별 넘버로 부르는 건 왠지 딱딱하게 들리니까요.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지어주느라 꽤 오랜 시간을 할애했죠.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브리타는 사실 성간 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시트콤의 등장인물에서 따온 거예요. 브리타가 지어준 ‘윤’이라는 이름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끝에 니은 발음이 머리를 살짝 울리는게 좋거든요. 여기선 아무도 그렇게 불러주지 않는다는 게 아쉽긴 해도요.

편지를 쓰는 게 조금 익숙해지고 있어요. 당신이 편지를 처음 보내왔을 때는 정말 놀랐어요. 규정 위반은 아니었지만 페어들이 서로 메시지를 주고 받는다는 건 어쨌든 전례가 없는 일이니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페어가 어떤 사람일지 저도 딱히 궁금해 하진 않았어요. 주기적으로 기억 데이터를 서로 공유하니까 이미 상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기억 데이터에 정서나 감정을 포함시키지 않는 건 용량 때문이라고들 하죠. 말로는 한 단어지만, 그 강렬하고 복잡한 감정을 로데이터(raw data)화하면 중첩된 기억 데이터가 엮여 정보값이 어마어마해지겠죠. 그러니 영구적으로 뇌에 저장된다면 몸에 큰 무리가 갈 거예요. 그게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요. 전뇌 데이터 기술이 개발되기 전 사람들이 그 야만의 시대를 계속 지속한 것도, 혹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망각의 특성 덕분이겠죠. 망각의 이로운 점을 말하는 격언도 문화권마다 있었던 걸 보면요.

감정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이런 의문도 들어요. 우리를 만든 생식 인간들이 우리들의 감정을 다소 둔하게 설계했으면서도, 감정의 발현이나 발달 자체는 막지 않은 건 분명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요. 성취에 대한 갈망, 모르는 걸 알고 싶다는 호기심을 연료 삼아 연구성과를 높인다는 이유 말고도, 탐사에 방해가 될 이런 의문들을 왜 계속 하게 두는지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답이 될만한 그런 이유요. 이 메시지도 다 훔쳐 보고 있을 게 분명한데 말이죠.

브리타와 편지를 받으면서 확실히 기억은 자아의 구성요소 중 극히 일부분이란 걸 새삼 느꼈어요. 우린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면서 자랐지만 결국은 다른 사람이잖아요. 오해는 말아요. 전 브리타가 저랑 다른 사람이라는 게 좋으니까요. 정식 탐사 인력이 되기 전, 상황 판단력 테스트 때 브리타가 보여준 과감한 결정이나, 구시대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브리타도 내 말에 동의할 거예요. 저보다 브리타가 훨씬 용감하고 흥미로운 사람이에요. 제 생체 식별 주소를 찾아내서 먼저 처음 메시지를 보낸 것도 브리타였으니까요. 저도 브리타를 닮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쑥스러우니까 이만 줄일 게요.


브리타가 추천해준 대로 성간시대 이전 편지 자료를 좀 찾아봤어요. 옛날 편지들을 보면 서론이 길더라구요. 궁금하지도 않는 안부를 묻기도 하고, 요즘 뭘 하고 있는지 중요하지도 않은 정보를 꼭 앞에 늘어놓더라구요. 일종의 형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쓸데없는 일상으로 시작할게요. (어차피 오늘치 제 데이터를 다운로드한다면 다 알겠지만요.) 오늘은 유기체 스캐너가 작동을 멈춰서 잠깐 소동이 있었어요. 여기 생물들은 누가 자기를 지켜보는 게 무척 싫은가 봐요. 하긴 누군들 좋아하겠어요? 저도 생식 인간들이 멀리 화성 구석에서 우리 탐사용 인력의 기억을 들여보는 걸 상상할 때마다 몸서리쳐지는 걸요. 덕분에 연구 일정에도 차질이 생길 테죠. 뷸론 행성에 페어가 있는 다른 동료에게 들었는데 거긴 해저 생물들때문에 골치라면서요? 1 킬로미터짜리 장어가 탐사선을 종종 집어삼킨다 해도, 물이라곤 한 방울도 찾아보기 힘든 이 행성보다는 나을 거예요. 바다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맨눈으로 생물을 볼 수만 있다면 원이 없겠어요. 여기 나룬 행성의 동물은 가시광선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파장으로도 잡히지 않는 영역에 있거든요. 겨우 개발한 유기체 스캐너로 물질대사의 흔적 정도만 잡은 게 전부죠. 그리고 마치 우리를 놀리듯이 그 흔적은 계속 갱신되고 있으니 멸종하거나 떠난 것도 아니에요. 스캐너를 고장 낸 게 이들 탓인지는 아직 단정지을 수 없지만 그게 맞다면 이 행성의 생물들은 다들 무척 부끄럼이 많은 것 같아요. 온갖 관측 장비를 써도 도무지 아무 단서도 안 주거든요. 개체 수는 얼마나 되는지.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번식하는지, 울음소리와 냄새는 어떤지. 단지 거기 있다는 것만 알 뿐이죠.

인간들이 이 생물의 겸손함을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우리가 하는 연구도 애초에 필요 없었을 텐데 생각을 해요. 기록을 보면 과거의 생식 인간들은 어찌나 과시적이었는지, 단 한 종족이 생태계 전체를 망칠 수 있다는 사실에도 죄책감 대신 자부심을 느꼈던 것 같아요. 사실 아직 거기서 못 벗어난 걸지도요. ‘황폐화된 지구나 다른 행성의 적대적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게끔 유전자 단위로 인간을 재설계한다’는 발상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우리가 이 먼 곳의 낯설고 이상한 생물들의 생태를 연구하는 이유기도 하니, 이 발상에 의문을 갖는 건 곧 우리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갖는 게 되겠네요. 상이한 환경의 행성에 사는 탐사 인력 페어들이 경험을 서로 공유하면서 통찰력과 포용적 사고를 증진시킨다 하더라도 과연 인공 진화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까요? 유전자 공학 기술이 요 60년 동안 꽤 빨리 발전하긴 했어도, 인류 멸종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치고는 좀 막막한 걸요. 테라포밍은 지금 기술론 아무리 빨라도 300년 이상 걸리니 논외고, 망가지기 전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행성을 찾으려니 도저히 찾을 수 없다지만, 이 정도 단계면 그냥 멸종하는 게 이치에 맞지 않을까요. 제가 이 일을 즐긴다는 것과는 별개로 생식인간들의 파괴적인 생존방식에는 동의 할 수 없어요. 제가 조물주라면 설계 단계에서 뭔가 실수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며 자책을 했겠죠.


브리타를 알게 된 후 제가 가장 많이 변했다고 느끼는 때가 언제인지 알아요? 전에는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사실들에 의문을 제기할 때예요. 어쩌면 당연하겠죠. 모든 탐사 인원이 그렇듯 콜로니 존속과 임무에 필요한 지식을 다운로드 받은 채 배정됐으니 저의 호기심은 콜로니 외부 생태계와 생물들을 향할 뿐, 콜로니나 우리의 존재 자체에 관해선 제 생각이란 걸 가질 틈도,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왜 생식 인간들이 이런 의문을 억누르지 않는지도 의문이에요. 왜 생식인들은 우리를, 수명이 자기네의 4분의 1도 안 되는 유사 인간 유기체를 만드는 비효율적인 결정을 내렸을까요? 안드로이드가 훨씬 나았을 텐데요. 우리의 감정을 설계 단계에서 없애지 않고 굳이 남긴 것과 같은 이유일까요? 최대한 자기네들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만이 목적이었을까요? 그냥 탐사 인력들의 기억 메모리를 한꺼번에 취합하면 될 텐데, 굳이 페어 시스템을 고집하는 이유는요? 답 못할 질문들만 많아지는 밤이네요 저는 탐사 인원 중에 성취도가 높은 편도 아니었는데 이런 의문들이 갑작스럽게 가지를 치기 시작한 걸 보면, 뇌 활동에 변화가 일어난 게 분명해요. 아무래도 탐사 인원들의 대뇌피질에 특정한 조건에서만 잠금이 해제되는 락(lock)을 걸어 놓았을 테고, 저는 그 조건을 달성한 거겠죠. 정황상 브리타가 변수네요. 뭘 한 건지 모르지만 고마워요.

호기심의 영역이 넓어지니까 이 행성에도 더 애정을 붙이게 됐어요. 나룬 행성은 보호 슈트가 없이는 10초도 안 돼서 녹아내릴 정도로 초고온 기후에다 황폐하기 짝이 없는 곳이지만, 두 개의 소형 태양이 지기 직전 하늘 빛을 바라볼 때는 제가 마치 신화 속 유배당한 영웅이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어요. 가끔 브리타도 해저 탐사선 안에서 드넓은 바다를 한참동안 바라보던데, 그 때 무슨 생각을 했나요? (말해주지 않아도 삐치진 않을 게요.) 저는 가끔 브리타가 뭔가를 오래 응시할 때의 기억을 곱씹어보곤 해요. 브리타의 생각을 유추해보려 할 때도 있지만, 그냥 거기 저도 있는 것마냥 바라보는 걸 더 좋아해요. 그러면 브리타랑 함께 있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래서 요즘엔 메시지뿐 아니라 브리타의 기억 데이터 업로드도 무척 기다려져요. 오늘 뷸론의 바다는 어땠는지, 뭘 봤는지, 콜로니 안에선 별 일 없었는지. 오늘도 뭔가를 응시했는지.

맞다, 저번에 말한 생물 있잖아요? 논비잉(non-being)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존재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라는 의미로요. 다른 이름 후보로는 안틱스(anti-ex)도 있었는데 그건 너무 무좀약 이름같다고 기각됐죠. 동료들 중에는 논비잉을 만져봤다는 사람도 있던데, 허풍인 게 분명해요. 그 사람은 매 탐사를 모험담처럼 과장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재미있는 양반이지만 과학자로선 빵점이죠. 이 생물에 대한 가설을 나누던 중에 생식인간들이 수 천년 동안 믿어왔던 천사나 정령도 사실 논비잉같은 생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말도 나왔어요. 전 간차원(間次元) 생물이라는 새로운 생물 분류를 만들자는 의견을 냈어요. 우리가 4차원 이상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4차원에 갇혀있는 3차원의 존재라면, 논비잉은 그 이상 차원들을 인식하고 심지어 그 사이를 왕래하는 지성체라는 거죠. 예를 들자면 원의 형태도, 구의 형태도 취할 수 있는 그런 존재요. 과학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안 될 건 없죠. 이름을 붙여줬으니 그게 어떤 차원에 있던 잠깐 고개라도 내밀어 줬으면 좋겠네요. 고개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요.


논비잉 개체와 첫 접촉이 있었어요!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봐요. 시작은 논비잉이 제 꿈에 나온 거였죠. 동료들과 이 얘기를 하니 저뿐만 아니라 논비잉의 탐사를 맡은 다른 동료들 모두의 꿈에 나왔다는 거예요. 그것도 같은 날 밤에요. 더 얘기를 나눠보니 논비잉의 형태는 사람마다 다 달랐대요. 원과 구 비유를 들었던 동료의 꿈에서는 (네. 자백할게요. 그 표현은 제가 떠올린 게 아니었어요.) 사람 크기 만한 구체였다고도 하고, 누구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올리브 나무였다고도 하고, 누구는 난생 처음 보는 색깔이었다고도 했어요. 그리고 다들 왠지는 몰라도 그것이 논비잉이라는 건 확신했대요. 저도 그랬고요. 제 꿈에선 어떤 공간이었어요. 콜로니 건물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형태였어요. 반투명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벽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묘한 분자구조 무늬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게 마치 방이 숨을 쉬는 것 같았어요. 낯설었지만 동시에 제 수면포드만큼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죠. 그 방 자체가 논비잉이었고 저한테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다른 생물의 뇌파에 간섭할 정도로 강력한 뇌파를 방출하면서도 감지가 불가능하다니. 다음 꿈에선 제가 논비잉의 말을 알아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러니하게도 흥분돼서 잠이 오지 않아요.

놀라운 소식은 그뿐만이 아니에요. 동료들 사이에서 브리타와 저에 대한 소문이 돌더니, 자신의 페어와 소통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어요. 처음엔 어떻게 페어 간 메시지 송수신이 가능한지 보다도 페어와 소통한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워하는 반응이었어요. 그러다 페어와 소통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지금은 대부분이 페어와 메시지를 주고 받는 중이에요.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잖아요? 아무리 생체 식별 주소가 암호화되어 있다곤 하지만 상대의 기억 데이터 속에 온갖 단서가 있고, 상대방의 생체 식별 주소를 알고 싶다는 의사를 기억 메모리 속에 은근히 전달하면 그걸 다운로드한 상대 페어가 응답하면 되는 거죠. (이제 말하는 거지만 늦게 눈치채서 미안해요.) 그야말로 쌍방의 합의와 약간의 열의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지만 다들 그럴 필요를 못 느꼈을 거예요. 우린 새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잖아요. 생식 인간에게 물려받은 유산이자 저주죠. 전에는 유대감을 쌓을 상대로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행성 간 펜팔보다는 콜로니 동료를 택하는 게 당연했어요. 맨날 보긴 해도 어쨌든 콜로니 동료는 나와 다른 기억을 가진,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다들 페어와 특별한 유대를 쌓고 있는 걸 보니 페어 시스템은 순전히 연구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게 다시금 확신이 들어요.

이 가설을 확인하려면 어떻게든 생식 인간들의 반응이 필요한데 아직까지는 아무 소식이 없어서 조금 과감해져 보려해요. 생식 인간들은 속이 좁아 보이긴 해도 생각만큼 깐깐하지 않잖아요. 그들이 우리를 행성으로 보낸 것 말고는 딱히 폭력적인 통제를 가하지 않는 건 여러 이유가 있겠죠. 우선 탐사 인원들이 애초에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졌다는 게 첫째고, 둘째는 권위적 통제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는 걸 과거의 사례로 알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이 메시지를 훔쳐 읽으면서도 부글부글할 텐데 딱히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알 수 있죠. 어떻게든 실패한 윗세대와 선을 그으려 애써 쿨한 척하는 거예요. ‘나는 아버지와 달라’류의 이야기가 결국 ‘아버지는 내 안에 있었어.’ 로 끝나는 건 수백 년 전에도 이미 뻔한 거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오늘은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동료 중 하나의 쉘(shell)이 오늘 폐기됐어요. 콜로니를 감싸는 돔 표면의 패널을 고치러 나갔다가 발을 헛디뎠고, 그대로 미끄러 떨어지면서 패널 모서리에 찔려 보호 슈트가 뚫리고 말았대요. 손톱만한 구멍이었지만 열풍이 비집고 들어오기는 충분했나봐요. 동료의 쉘은 온 몸에 심한 화상을 입고는 임무 속행 불가 판정이 내려졌어요. 쉘 폐기는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죠. 이런 적대적인 환경에서는 일 주일에도 몇 번은 있는 일이니까요. 이상한 건 저의 반응이었죠. 소각용 포드에 들어간 동료의 쉘을 보니 처음 드는 감정이 밀고 들어왔어요. 이때까지 폐기된 동료는 수 없이 봤고, 심지어 저의 쉘도 폐기된 적이 몇 번 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어요. 동료는 며칠 뒤에 새 쉘에 상처 하나 없이 사고 이전까지의 전뇌 메모리를 업로드한 채로 돌아오겠죠.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소각로가 켜지는 순간 내가 알던 그 친구가 사라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다음에 제 쉘이 폐기되는 순간을 상상하니...

모든 기억 데이터와 인격이 유지된다고 해도 새 쉘에 담겨온 저는 윤이라는 사람이 맞을까요? 데이터 누락이 일어나 브리타를, 브리타가 지어준 이름을 잊지는 않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니 목 아래에서 뭔가 뜨거운 게 올라와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마치 저의 태도는 생식인간들이 영구적인 죽음을 맞이할 때랑 비슷했죠. 많은 동료들이 그런 저를 보고 당황했는데, 더 신기한 건 그 중 몇몇이 저와 따라 울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자신들이 왜 우는지도 모르는 눈치였어요. 전에 우리들의 대뇌 기능을 제한하는 락이 걸려 있고, 그걸 해제하는 조건이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했었죠? 아마 제 예상대로 자신의 페어와 감정적인 교류를 하는 것이 그 조건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브리타를 만나고 변한 것처럼 다들 변하고 있는 거예요. 성간 시대 이전 이야기들이 왜 그렇게 죽음이라는 테마에 집착했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아요. 하나의 쉘로, 하나의 기억으로 영구적인 소멸을 가정하며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생각해보니 브리타의 기억에도 동료를 폐기하는 것을 지켜보던 순간이 많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런 날 밤에는 매번 뭔가를 한참 응시하더라고요. 산소발생 장치가 숨쉬듯 내뿜는 기체를, 콜로니 바깥 얼음 바다의 수평선을. 일산화탄소 안개가 낀 하늘을. 브리타는 상냥한 사람이니 분명 저보다 더 힘들었겠죠. 함부로 짐작했다면 미안해요. 단지 브리타는 동료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브리타를 독점하고 있는 기분이라 괜히 우쭐해지긴 하는데 조금 걱정이 돼서 그랬어요. 브리타가 제 힘이 되어주는 것처럼 저도 언제든지 브리타의 힘이 되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오늘 들었던 생각들은 무척 슬펐지만, 동료들이 같이 울어준 건 그리 나쁜 경험이 아니었어요. 잠깐이었지만 동료와 함께 우는 그 순간만큼은 영원한 폐기나 망각도 두렵지 않았어요.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연결됐다는 느낌이었죠. 저도 브리타의 쓸쓸함을 덜 수 있는 존재로 연결되기를 바라요.


기억 데이터 업데이트가 없어서 걱정했죠? 미안해요.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나룬 콜로니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모든 탐사 인원들이 자신들의 페어와 메시지를 주고 받으면서 탐사 임무는 무기한 중지됐어요. ‘중지됐다’는 표현은 사실 어폐가 있죠. 우리가 관둔 거니까요. 기억 데이터 공유도 더 이상 의무가 아니게 됐죠. 어떤 사람들은 다른 행성의 상황이나 생식 인간들의 동향 등 필요한 정보를 페어들과 교환하기 위해 여전히 사용하고 있긴 해도, 목적이 달라진 거죠. 생식인들은 분명 지켜보고 있을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네요. 자신들을 구하지 않기로 한 우리를 원망하고 있을까요? 그렇다면 유감이지만 화성에서 종족의 최후를 맞이하는 것도 썩 나쁘진 않을 거라 믿어요. 인간도 이제는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하잖아요.

논비잉에 대해 더 알아내지 못한 건 아쉽지만, 서로 아는 만큼만, 알았으면 하는 만큼만 알면 되는 거겠죠. 탐사를 중지한 건 우리에게 다른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에요. 다들 서로의 페어를 만나러 갈 생각이거든요. 그래요. 저는 브리타를 만나러 갈 거예요. 이 소식을 직접 전하고 싶어서 기억 데이터를 올리지 않은 것도 있어요. 이제 우리는 콜로니의 자원과 장비를 모으고 입자 프린터로 우주선을 건조하려 해요. 각자 페어가 있는 행성으로 가려면 여러 대가 필요할 거예요. 저는 우선 뷸론행 우주선에 동승할 탐사 인원들부터 찾으려고 해요. 준비할 게 많아요. 이제 바빠지겠죠. 곧 만날 날이 무척 기다려져요.


브리타, 연락이 뜸한 나를 용서해요. 안 좋은 소식을 전하기가 두려워서 그랬어요. 우리가 만나려면 시간이 더 있어야 할 것 같네요. 우주선들의 건조는 순조로웠어요. 하지만 뷸론에 페어가 있는 사람 수는 적고, 입자 프린터의 동력원은 한정된 탓에 뷸론에 갈 우주선까지 건조할 여력이 없었어요. 뷸론에 페어가 있는 다른 동료들과 저는 남기로 결정했어요. 최대한 많은 동료들이 페어를 만나길 바랐으니까요. 이기적으로 굴고 싶은 마음도 한 구석 있었지만 브리타가 같은 상황이었어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거란 걸 알아요. 동료들은 각자의 페어를 만난 후 다시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났어요. 며칠 동안은 조금 울적했지만 점점 다시 힘을 내보려 해요.

논비잉에 대한 연구를 다시 시작했어요. 탐사 인원들의 꿈에 처음 등장한 게 전부였지만 다들 떠나기 전 이미지 데이터를 남기고 갔으니 그걸 토대로 만든 시뮬레이션 공간에 직접 들어가 단서를 찾아보려고요. 메시지를 쓰는 지금도 꿈 공간을 렌더링하는 중이에요. 친구들의 꿈 속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라 조금 설레기도 하네요. 그 이후로 논비잉은 꿈이든 유기체 스캐너에든 등장하지 않았어요. 마치 페어를 만나러 떠난다는 우리의 계획을 멀찍이서 응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요즘은 잠이 쏟아지듯 와요. 브리타와의 재회가 유예된 상황에 대한 회피 기제일까요, 아님 논비잉이 그런 저를 위로하려 은근히 초대하는 걸까요?


안녕, 브리타. 이제 나룬 콜로니에는 저뿐이에요. 같이 남게 됐던 동료들이 영구적인 폐기를 택했어요. 동료들 각자의 페어들과 상의해서 정했대요. 어차피 동료들은 수명이 얼마 안 남아서 떠났던 동료들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때까지 쉘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거라 판단한 거예요. 이제 생식 인간들에게서 새로운 쉘을 받을 수 없으니까요. 혹시 이후에 쉘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기술을 알아낼지도 모르니 전뇌 메모리를 백업할 생각은 없냐고 물었지만 거절하더군요. 그냥 쉬고 싶대요. 혼자 남을 저를 걱정하긴 했지만 다들 쓸쓸해 보이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먼 여행을 떠나기 전처럼 설레는 표정이었죠. 저는 조금 더 해볼까 싶어요.

저도 요즘은 쉘을 거의 이용하지 않아요. 하나 남은 쉘의 피로를 줄이기 위험이기도 하지만 쉘 형태로 있으면 시간이 흐르는 감각을 몸이 오롯이 느끼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서 고안한 방법이에요. 연구용 데이터 저장용으로 만들어 놓은 대용량 양자 드라이브에 제 의식을 옮겨 놓는 거죠. 데이터 형태의 동면이랄까요. 동면이라곤 하지만 사실 잠을 자는 상태는 아니에요. 그래서 수면은 꼭 쉘 형태로 하죠. 혹시 논비잉이 또 꿈을 통해 접촉해올지도 모르니까요.

하나의 몸으로 사는 생식인들의 심정이 늘 궁금하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저는 생식인들과는 더욱 거리가 먼 존재가 돼버렸어요. 동면할 때 콜로니 전체 관리를 담당하던 연산력을 그대로 저에게 끌어와서 초당 2 엑사바이트 수준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런데도 동료들의 꿈 속에서는 별 성과가 없어요. 논비잉의 꿈은 다른 꿈들과 마찬가지로 분명 매혹적인 곳이지만 거기에는 어떤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무작위의 공간이에요. 읽어낼 수 있던 정보는 단 하나. 꿈 속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꿈 당사자의 노스탤지어와 관계됐다는 것이에요. 인큐베이터에서 배양되어 어린 시절이나 고향이 없는 우리는 과연 뭘 향수하고 있는 걸까요? 노스탤지어는 대상이 없어도 성립 가능한 걸까요?

아무튼 저는 넘치는 연산력을 이용해서 위상 네트워크에 등록된 생식 인간에 관한 모든 정보, 그야말로 모든 정보를 훑어보고 있어요. 덕분에 액세스가 금지됐던 정보들의 보안도 손쉽게 뚫을 수 있게 됐죠. 쉘로 돌아갔을 때의 제 뇌 용량에는 한계가 있으니 모든 정보를 저장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인상적인 정보들을 추려낼 뿐이죠. 이를 테면 생식 인간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콜로니, 페어 시스템, 우리를 만든 진짜 이유는 무엇인지를 유추할 만한 유관한 정보들을요. 읽어주기만을 기다리는 정보로 가득 찬 이 세상은 무척 지치네요. 피로를 느낄 몸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 지쳐요. 환통 같은 거겠죠.


브리타, 브리타, 브리타. 브리타라는 말은 이제 제 자의식을 붙잡아주는 만트라가 됐어요. 자아는 희미해지지만 성과는 있었어요. 원하던 답을 찾았거든요. 생식인들은 자신들의 멸종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고, 나중에는 피할 생각도 없었어요. 대신 자신들이 왜 실패했는지를 분석하고 있었어요. 인간은 어떻게 해도 ‘모든 유기체의 세포 속에 새겨진 명령’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건 이 때까지 인간이 수 없이 해온 자기체념적 합리화의 연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냉혹한 자기인식이기도 했죠.

처음에 인간들은 낯선 것을 두려워하도록 설계된 의식 체계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어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것도 틀리진 않았어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간단한 명제조차도, 종 차원에서 완벽한 합의에 이르는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정도였으니까요. 그후 인간들은 ‘우리가 모두 동등하게 고귀하다면 다른 지성이 있는 동물은, 지성이 없는 동물은, 식물은, 어떤 유기체는 인간이 착취해도 되는 대상인가?’라는 의문으로 인식을 확장할 때마다 기술이 그 갭을 채우길 원했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죠. 탄소 발자국을 남기지 않지만 에너지 효율은 더 높은 에너지원을, 고기 맛을 재현하는 배양육을, 부작용과 중독 없는 쾌락 유발 화합물을 만들어냈어요. 하지만 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죠.

양자 시뮬레이션을 통해 가능한 인류의 미래를 모두 산출한 결과, 인간은 언제나 계속 팽창, 확장하고 결국 우주를 넘어, 다중우주의 모든 것들을 모두 다 소진시키는 존재였어요. 마치 블랙홀처럼요. 유기체가 유전자를 보존, 복제하려 하는 게 죄는 아니죠.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만든 장난감을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어요. 윤리의식 체계를 어찌어찌 어렵게 개편해 지속 가능한 규모로 인구와 생태계를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두 세대가 지나면 다시 그걸 잊고, ‘더 많이, 더 빨리, 더 멀리’의 세계로 회귀했어요. 욕망을 억제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고대의 폭군을 그리워하는 인간들을 낳았고 그 다음은 다시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이 생겨났죠.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나지 않아요. 인간은 결국 자신의 욕망이 팽창하는 속도를 결코 따라잡지 못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게 편리하고픈 욕망이든,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든,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욕망이든요.

마지막으로 남은 인류는 더 이상 ‘규모의 확장’이 아닌, 대안을 보고 싶어했어요. 자의식 과잉 종족의 최후답죠. 애초에 인간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인간의 욕구 덕분이었어요. 다시 말하면 애착에 대한 강한 욕구죠. 인간은 애착이 동기가 될 때 그 과정이 얼마나 비이성적이든, 비효율적이든 이뤄내고야 말아요. 오랫동안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물불 안 가리는 것’이나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인간 불굴의 의지를 증명하는 것이라며 칭송해왔지만, 이 가치 구조가 담고 있는 추력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애착을 발현하고 증명하는 과정에서 수 많은 폭력을 정당화했죠. 애착의 대상이 공동체일 때가 가장 위험했어요. 낙오되는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 만든 허구의 시스템을 실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자, 가상의 내집단에서 낙오자를 솎아내는 아이러니가 프랙탈 무늬처럼 끝없이 반복됐어요.

그러니까 강력한 애착은 곧 인간의 정언명령이자 자원이었어요. 그리고 이제까지 인간 대부분의 문제는 자원의 분배에 관련한 거였죠. 생식인들은 모든 문제가 애착 자원이 동등하게 분배될 수 없는 인간 의식의 한계 때문이라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모든 개체가 서로 동등하고 비배타적인, 그러면서도 여전히 강렬한 애착을 형성해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결론을 내렸죠. 그렇기 위해서는 개체 수가 아주 한정되어야 하는데 이건 단순히 적은 인구 수를 유지하는 걸로는 실현이 불가능했어요. 모든 유기체가 그렇듯 수는 다시 늘 테고, 세대가 지날 수록 수정된 가치 체계는 다시 희미해질 테니까요. 그래서 생식인 최후 시대의 학자들은 세포가 복제 분열하는 유기체의 논리를 역으로 뒤집어서, 물리적 개체의 완전한 합일을 상상하게 됐어요. 내 종족, 내 국가, 내 민족, 내 혈족, ‘나’를 넘어선 정신체 간의 애착과 통합. 그건 이제까지 인간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였죠. 우리의 대뇌 활동에 제약을 걸고 이를 해제하게 했다는 건, 생식 인간 본인들은 자신의 락을 해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즉, 의식의 다음 단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잠금장치요. 인간들은 다음 세상으로 가기엔 기존의 세상을 너무 사랑했어요.

우리는 아마 쉽게 자신을 포기해버린 생식 인간의 빈곤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일지도 모르죠. 생식 인간들의 논리에는 빈 구석이 많아요. 그들은 단지 ‘시간이 더 있었다면 가능했을까.’ 그런 심정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가 모래 장난을 하듯 인간을 닮은 우리를 만들고, 인간 사회를 닮은 콜로니를 만들고, 멀리 떨어진 짝꿍을 만들고 몰래 서로를 몹시 그리워하게 만들었죠. 제가 왜 브리타를 그렇게 만나고 싶었는지 이제 이해가 가지만, 진실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게 남이 개입한 결과라는 게 조금 분하네요. 그치만 곧 멸망할 종족에게 분노를 쏟을 필요는 없죠. 브리타를 만나러 가겠다고 결정한 거나, 생식 인간들을 구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 모두 제 선택인 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호기심도 생겼고요. 다음 단계로 간 우리들이 탐사 인원들이 서로의 페어를 만난다면, 우리가 서로 만난다면, 그러면 그 때의 우리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나룬 콜로니의 소식을 듣고 난 후, 뷸론 콜로니의 상황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탐사 임무는 중지됐고 어떤 탐사 인원들은 각자 페어와 연락하며 우주선을 건조해 떠났다. 남은 소수의 인원들은 아예 거기서 생을 마치기로 했거나, 다른 콜로니에서 오기로 한 페어를 기다렸다. 브리타는 후자였다. 남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영구 폐기될 때 까지도 윤의 우주선은 오지 않았다. 브리타는 윤의 마지막 메시지를 수신하지 못했다. 뷸론 행성이 위치한 은하의 태양에서 발생한 플레어의 영향으로 뷸론 행성이 위상 네트워크 연결에서 접속이 끊긴 탓이었다. 브리타는 나룬 행성으로 가기로 했고, 직접 우주선을 건조했다.

그는 꼼꼼한 기술자였으나 콜로니 건물의 외벽과 콜로니 장치들로 급조한 우주선이라 내구도는 열악했고 공간 도약 연료도 충분하지 않았기에 한 번의 점프만이 가능한 우주선이 완성됐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브리타가 탄 우주선이 궤도에 오르고, 그는 점프 버튼을 누르기 전 숨을 고르고 늘 하는 것처럼 텅 빈 공허를 응시했다. 그건 어떤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단 약속이나 다짐에 가까운 같은 응시였다. 그는 버튼을 눌렀다.


급조한 우주선에는 자동 항법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브리타는 직접 위치 좌표를 계산해 입력해야 했다. 조금의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주선은 점프 중에 갈려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브리타는 우주선이 나룬 행성 궤도에 돌입할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이미 예측하고 있을 정도로 신중하고 정확한 사람이었다. 나룬 행성을 육안으로 확인한 브리타는 우주선이 나룬 행성의 궤도에 들어가기 직전 수면용 포드로 개조한 비상탈출 포드에 몸을 실었다. 우주선은 궤도 진입 때 마찰열에 부숴지고 포드가 행성 표면을 향해 발사되었다. 탈출용 포드의 외벽은 여느 행성 굴착기만큼 단단했고, 안에는 나노실리콘이 신체에 가해지는 충격을 흘려 보내기 위해 부지런히 위치를 옮기며 진동하고 있었다. 펼쳐진 낙하산이 포드의 가속력을 줄여주고 있었지만, 여전히 빠른 속도였기 때문에 콜로니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착지한 포드는 작지 않은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달궈진 포드 안에서 보호복을 입은 브리타가 나왔다. 나룬 콜로니가 육안으로 보이는 거리였다. 가벼운 뇌진탕을 느꼈음에도 브리타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브리타는 콜로니 돔 외벽에 도착했다. 그는 윤이 탐사를 마치고 콜로니로 돌아올 때의 입구가 어디인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손바닥을 돔 외벽에 대자 사람 한 명이 딱 들어갈 만한 문이 열렸다. 브리타에게 이 곳은 한 번도 와보지 않았지만 동시에 집 같은 곳이었다. 콜로니 내의 구조물들은 멀쩡한 게 별로 없었지만 그건 우려했던 운석의 충돌 때문이 아니라 인공적인 해체의 흔적이라는 것을 브리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뷸론과 상황이 비슷한 것을 보고 양가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콜로니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여기 탐사 인원들도 우주선을 성공적으로 건조했다는 안도감, 그리고 윤도 떠났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브리타는 그 중 유일하게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건물을 찾아 들어갔다. 안에는 윤이 수면 포드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브리타는 언젠가 성간 시대 이전 코덱스에서 읽은 도플갱어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난다면 죽는다는 미신이었다. 절묘하게도 브리타 또한 당장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곤히 자고 있는 자신의 도플갱어를 쳐다보며 한번도 지어보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포드를 열고 윤을 깨웠다. 윤이 눈을 뜨더니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둘은 껴안고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이 죽은 것처럼,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을 구한 것처럼 울었다. 각자의 턱이 서로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는 동안 느껴지는 심장 박동, 숨소리, 체온이 상대와 동일해지기 시작했다. 그건 일종의 동기화 과정이었다. 둘의 쉘이 점점 액화되면서 서로 들러붙고 있었다. 둘은 하나의 개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융합은 탐사인원이 도착한 다른 콜로니 곳곳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페어끼리 융합이 모두 끝나면 물리적인 실체는 완전히 사라졌다. 엔트로피가 역전된 건 아니었다. 이건 시간 차원에서 처음 관측되는 일이긴 했지만 필연적이었다. 이례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그는, 혹은 그들은 윤이 논비잉이라 부르는 존재이며, 존재였고, 존재일 것이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으며, 윤이기도 했고 브리타기도 했던 존재. 무엇이든 될 수 있으나 아무 것도 소진하거나 해치지 않는. 무한히 확장하며 모든 가능성을 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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