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다수파

– 이나경 –

 아빠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드문드문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이 아빠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아빠도 자리에 앉았지요. 늦도록 잔업을 하는 사람들이 층마다 대여섯 명씩은 있었습니다. 끼니를 못 챙길 정도로 업무에 치이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는 야근수당을 타고자 귀가를 미루는 사람들이었어요. 아빠도 그중 하나였고요. 그 시절의 아빠는 집에 가서도 그다지 할 일이 없었거든요. 엄마를 만나고부터는 늘 제일 먼저 사무실에서 탈출했지만요.

 책상 왼편에 들쭉날쭉하게 쌓인 서류철을 얼마간 뒤적거리던 아빠는 소설책을 펼치고서 더 이상 그것들에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웹툰으로 관심을 옮기기 전까지, 그러니까 도서대여점 시대가 몰락하기 전까지 아빠는 시중의 무협지를 모조리 섭렵했다고 자랑한 적이 있어요. 그날도 아빠는 티백으로 우려낸 녹차를 홀짝거리며 강호의 안개 낀 대나무 숲을 훌훌 날아다녔어요. 거기엔 하늘을 찌르는 빌딩 숲도 숨 막히는 지하철도 없겠지요.

 “상식 씨.”

 북슬북슬 투박한 손이 아빠의 어깨를 툭 건드렸습니다. 아빠는 하마터면 차를 엎지를 뻔했어요. 돌아보니 경완 씨가 헤죽거리고 있었습니다.

 “놀라기는. 집에 가서 편하게 읽잖고.”

 “아, 형님. 가는 길에 반납하려고요.”

 “나도 본 거네. 가만있자, 9권이면 하선랑이 죽던가?”

 “하선랑이 죽어요?”

 무심코 실언한 경완 씨는 아빠만큼이나 당황하여 횡설수설했습니다.

 “농담이야, 농담.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야. 아니, 그보다 영원히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태어났으면 언제든 반드시 죽으니까. 에… 그나저나 뭐 좀 물어보려고 왔는데, 혹시 상식 씨도 그거 했어?”

 “뭘 해요?”

 “설문 말이야. 요새 TV나 라디오나 광고 엄청 때리는 거.”

 아닌 게 아니라 얼마 전부터 거국적으로 설문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세계일주 크루즈 여행권을 위시해 각종 크고 작은 경품을 내건 것으로도 모자라 편의점에서 소책자를 무료로 배포하면서까지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었어요.

 “왜요, 위에서 무슨 공문 내려왔어요? 하지 말래요?”

 “공문은 무슨. 중간에 막히는 문제가 있어서 물어보려고 했지.”

 “막히는 문제?”

 “막힌다기보다는… 뭐랄까, 질문이 묘하게 까다로워.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 개가 좋냐, 고양이가 좋냐. 죄다 이런 식이라니까. 어때, 상식 씨라면 뭘 고를 거야?”

 “까다로울 것도 없구먼. 그냥 형님 좋아하는 걸로 골라요. 물어서 하면 설문조사하는 의미가 없지.”

 “천국은 있다, 없다.”

 “나, 원. 뭘 그리 쩔쩔 매요? 모태신앙이라면서?”

 경완 씨는 아빠에게 핀잔만 들은 채 소득 없이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아빠는 하선랑의 안위가 걱정되어 나이 많은 동료에게 조금 쌀쌀맞게 굴었던 거예요.

 왈가닥 하선랑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와 주인공의 품에 안긴 것은 11권의 말미였습니다. 이 장대한 서사시에서 하선랑이 맡은 배역은 아주 사소했지만 그녀의 죽음은 이야기 전체에서 막대한 위력을 발휘했어요. 그로 인해 시종 미적지근하게 굴던 주인공은 복수를 다짐하며 무림에 투신했고, 아빠는 비로소 설문에 참여하기로 결심했으니까요.


우리 아빠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빠가 종종 무용담처럼 늘어놓던 학창 시절의 일화란 기껏해야 방송반에 짓궂은 제목의 팝송을 신청했다든가 골목에서 마주친 불량배로부터 달아났다든가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자질구레한 사건을 많이도 늘어놓지만 어째 강력한 한 방이 없습니다. 수학여행에서 엉뚱한 버스를 탄 이야기는 마무리가 싱겁고요,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이야기는 사설이 길어 영 지루하지요. 대학생이 되고도 추억담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통기타에, 미팅에, 최루탄에… 하여간 거창하기만 할 뿐이고 큰 감흥은 없어요. 각색을 한 것이 그 모양이라면 정말이지 구제불능입니다. 군대 이야기는 하나마나겠지요.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철없는 대학생 아빠도 슬슬 장래를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애초에 점수에 맞춰 간 대학인지라 무역학을 전공했다고 하여 아빠에게 무역업에 관한 뚜렷한 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달리 배운 게 없으니 직장을 구할 때에도 전공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처럼 아빠도 결국 무역업체에 입사했어요. 아주 이름난 회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 사이에서는 제법 견실하다고 평가받는 곳이었지요.

 그런데 입사한 지 한 해가 지나자마자 갑자기 회사가 부도났습니다. 그 회사를 추천하던 사람들이 잔뜩 곪은 속사정까지는 몰랐던 거예요. 밤을 지새우며 무던히 애를 쓴 직원들의 고생이 무색하게도 한번 주저앉은 회사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두 달치 밀린 월급은 영영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직원들 중 아빠는 그나마 나이도 젊고 부양할 가족도 없어서 타격이 적은 편이었어요. 타격이 적다는 것은 그러나 아빠에게 새로운 타격이 되었습니다. 주변이 온통 위로받을 사람으로 넘쳐나서 아빠 몫으로 남은 위로가 없었거든요. 아빠는 그때 처음으로 세상의 냉엄함을 느꼈다고 해요.

 졸지에 실업자가 된 아빠는 다른 직장에 문을 두드리는 대신 도서관에 다니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취업 시장에 왠지 주눅이 든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군인이었던 할아버지의 강권을 거역하지 못했던 거예요. 이듬해 치른 9급 공무원 시험에서 아빠는 턱걸이로 합격을 했습니다. 그렇게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적어도 최후까지 버텨줄 직장을 얻었지요. 수년이 흘러 제가 태어나던 해에 우리나라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대사건이 일어났으니 회사가 일찌감치 망한 것을 아빠는 액땜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고요.

 하지만 말단 공무원의 봉급이란 역시 성에 안 차는 것도 사실입니다. 봉급의 대부분은 적금으로 빠져나가고 아빠 손에 실제로 쥐어지는 액수는 처량할 정도였대요. 때문에 아빠는 실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는 달밤에도 사무실의 부윰한 형광 불빛 아래서 독서에 탐닉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소소한 행복의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설문을 작성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아빠는 편의점에서 설문 내용이 인쇄된 주황색 소책자를 받아왔습니다. 문고본 크기로 중철 제본된 얄팍한 책자였는데 응모 요령 및 주의사항과 경품 광고 등을 제외하면 본문 분량은 스무 페이지도 되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내용이야 익히 알다시피 작성자의 선택을 요하는 것이었지요. 세밀하다면 세밀하겠거니와 구차하다면 구차하다 할 만한 질문들이 빼곡히 있었습니다. 선뜻 답을 고르기 어려운 질문도 간혹 있었지만 어쨌든 아빠는 빈칸을 모두 채웠고, 동봉되어 있던 봉투에 OMR 답안지를 넣어 출근길에 발송했습니다.

 다음 달 말일로 설문이 마감되었고 이윽고 경품 추첨 행사가 진행되었어요. 배포가 작은 아빠는 세계 일주 티켓이나 고급 세단 같은 건 감히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다만 100명에게 준다는 백화점 상품권 10만 원권 정도라면 가능성이 있겠다고 내심 기대했다지요. 설문에 참여한 국민이 2,500만 명에 육박한다는 기사를 읽기 전까지 말이에요. 주요 일간지에 일제히 실린 경품 당첨번호 목록에 아빠의 책자에 할당된 번호는 빠져 있었습니다. 하다못해 백만 명에게 발송된 캔커피 교환권조차 아빠는 받지 못했어요. 아까운 시간만 들였다고 분개한 것도 아주 잠시였을 뿐 다른 사람들처럼 아빠도 더 이상 설문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계절이 세 번 바뀌어 연말이 되었습니다.

 어느 쓸쓸한 월요일 저녁에 아빠는 여느 때처럼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몸을 녹일 심산이었어요. 그런데 집 앞 골목에서 아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오상식 씨?”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전봇대 옆에서 말쑥하게 정장을 빼입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빠 또래로 보였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실례지만 오상식 씨 맞으십니까?”

 “그런데요. 누구시죠?”

 “이제야 뵙는군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최한기라고 합니다. 수도 그룹에서 나왔고요.”

 아빠는 한기 씨가 내미는 명함을 조심스럽게 건네받았습니다. 살짝 스친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어요. 후미진 골목에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남자의 코끝과 귓불이 몹시도 빨갰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봄에 대국민 설문에 참여하셨지요? 그 일로 찾아왔습니다.”

 남자는 아빠가 설문에 대한 기억을 미처 끄집어내기도 전에 말을 이었습니다.

 “저희 측에서 대대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것이 바로 오상식 씨 같은 분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길게 말씀드릴 것도 없이 오상식 씨가 바로 저희 그룹의 미래이십니다.”

 그때까지 아빠는 한 번도 스스로 특별하다거나 평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아예 해본 적이 없었다는 얘기예요. 만약 설문에 자신이 특별한지 평범한지를 고르는 항목이 있었다면 아빠는 특별하다는 선택지에 체크했겠지만요.

 하지만 아빠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빠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었지요.


아빠는 심야의 불청객을 차마 떨치지 못해 근처 호프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월요일의 주점은 한산했습니다. 더벅머리 대학생들이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지요. 대학생 중 하나가 최근에 실연을 당했는지 이따금 고성이 들렸는데 대화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어요. 아빠와 한기 씨는 구석자리에 앉았습니다. 아빠는 생맥주를 두 잔 주문했어요. 호프집을 나올 때까지 한기 씨 몫의 잔은 전혀 줄지 않았지요.

 “죄송합니다. 전화나 우편으로 말씀 드릴 내용은 아니라 이렇게 불쑥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실은 일전에도 한번 왔었는데 이렇게 늦게까지 근무하시는 줄 몰라서 허탕을 쳤거든요. 오늘은 작심하고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하얗게 김 서린 안경을 벗어놓고 한기 씨는 시린 양손을 비비댔습니다.

 “설문 때문에 오셨다고 했지요? 저 같은 사람을 찾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아, 그렇죠. 날이 늦었으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아빠가 채근하자 한기 씨는 테이블에 바싹 다가앉았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사내 제안제도라는 걸 운영합니다. 저희 그룹도 마찬가지지요. 새로운 아이템의 발굴이랄지 기존 업무의 절차 개선방안에 대한 건의랄지, 하여간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제안하도록 하는 겁니다. 제안이 채택되면 제안자는 합당한 보너스를 받고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번 설문은 제 아이디어였습니다.”

 한기 씨의 제안서를 검토한 사람 대부분은 그것을 장난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실없는 제안은 일주일에도 서너 건씩 보고되었고 그런 것들은 중간에 커트되곤 했어요. 소위 예선 탈락인 셈이지요. 그런데 언젠가의 회의에서 그것이 문제로 지적된 것입니다. 잔뜩 진노한 회장은 소중한 의견을 한 건도 빠뜨리지 말고 상부에 올리도록 지시했습니다. 아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업무 소관을 그룹 싱크탱크인 전략기획실로 이관했어요.

 전략기획실 커뮤니케이션팀의 염진홍 팀장은 창업주 회장의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젊은 혈기에 혁신을 부르짖으면서도 마땅한 방안이 없어 고심하던 참이었어요. 그의 자리를 거쳐 간 두 형님들은 어느새 주요 계열사의 사장직을 맡아 선방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변변한 실적을 내지 못한 동생으로서는 억울하기도 했을 거예요. 형님들은 그저 호황기를 잘 탔을 뿐이니까요.

 그런 염 팀장이었기에 도박이나 다름없는 제안서를 주목한 것입니다.

 염 팀장은 아이디어만 발탁한 게 아니었습니다. 한기 씨도 더불어 전략기획실로 소속을 옮겼지요. 모호한 프로젝트이니만큼 제안자를 곁에 두는 편이 안심이었을 테니까요. 한기 씨 입장에선 튼튼한 동아줄이 내려온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저는 그룹이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물론 사업을 하다 보면 성장곡선이 주춤해지는 시기가 있어요. 지금 하는 영역에서 더 빼먹을 게 없는 시기 말이에요. 그럴 땐 사업을 확장해야겠죠. 그러니까 제 말은, 그 자체를 두고 나쁘다고 할 순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손댄다고 그만큼 수익이 나는 게 아니거든요. 실속 없는 짓이지요. 오상식 씨는 그룹들이 무작정 영역을 넓히는 근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빠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한기 씨도 딱히 대답을 요구한 건 아니었는지 즉시 말을 이었어요.

 “그건 확신이 없어섭니다. 뭘 해야 돈이 벌리고 뭘 하면 손실을 보는지 모르니까 이것저것 찔러보는 거예요. 마치 경마장의 모든 말에게 베팅하는 것과 같죠. 틀림없이 우승마를 맞히기야 하겠지만 나머지 뒤처진 말들에 대해서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어요. 따도 적게 따고 잃어도 적게 잃자는 전략입니다. 굴지의 그룹이 쪼잔한 짓이나 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분탕질을 하니까 기업 생태계가 엉망이 되지요. 세간에서 저희를 대하는 시선도 곱지 않고요.”

 한기 씨가 잠시 목을 가다듬는 틈을 타서 아빠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어요.

 “상황이 그렇다는 정도로 알아두시고, 요컨대 제 제안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알자. 해야 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들을 미리 알아내자. 그런 연유로 설문을 하게 된 거예요.”

 아빠는 설문 책자를 채우고 있던 수백 개의 시시콜콜한 질문 가운데 수도 그룹을 연상케 하거나 기업의 활로를 묻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습니다. 설문은 낮과 밤, 산과 바다, 야구와 축구, 수학과 영어, 물냉면과 비빔냉면, 짜장면과 짬뽕 따위의 선택지를 끝없이 늘어놓을 뿐이었어요. 고작 그런 질문을 미끼로 삼아 미래에 대한 확신을 낚을 수 있다고? 순간 아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서브리미널 효과였습니다. 서브리미널 효과란 인지할 수 없는 자극을 통해 대상의 잠재의식에 영향을 끼쳐 답을 유도하는 기법이에요. 잘은 몰라도 설문을 작성하는 과정에 그런 비슷한 실험을 당했다고 생각한 거지요. 하지만 어떻게?

 “오상식 씨.”

 얼이 빠져 있는 아빠를 한기 씨가 불렀습니다. 그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대외비입니다. 다른 데서 함부로 발설하시면 저희 입장이 아주 난처해져요. 설령 오상식 씨가 저희 계획에 동참하지 않더라도 오늘 일은 불문에 부치셔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상식 씨에게 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어요. 저희는 이미 리스크를 가득 안고 시작한 일이라 신중할 수밖에 없는 것을 양해 바랍니다. 자, 그럼 이야기를 계속해도 될까요?”

 아빠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기 씨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축구보다 야구를 좋아한다는 것을 오상식 씨가 알고 있다면 핫도그를 팔러 야구장 앞으로 가겠지요? 또, 사람들이 핫도그보다는 뻥튀기를 선호한다면 야구장에서 뻥튀기를 파는 게 현명할 테고요.”

 야구와 축구? 핫도그와 뻥튀기?

 “그럼 혹시 그 설문이….”

 “아뇨, 이건 그냥 예를 든 것입니다. 책자에 있던 선택지는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에요.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설문의 목적은 특정 인물을 찾는 것이었지요. 처음에 저희는 막연히 스무 명쯤 될 것으로 짐작했는데 막상 결과를 확인하니 남은 건 여덟 명뿐이었습니다. 오상식 씨도 그중 하나입니다.”

 “제, 제가 뭘 했길래…?”

 아빠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오상식 씨가 고른 답안이 다수가 선택한 답과 같았습니다. 그뿐이에요.”

 퍽 간결한 대답이었지만 아빠는 그 말의 의미를 한참이나 헤아렸습니다. 그러고도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주 세심하게 질문을 골랐지요.

 “그게 왜요?”

 “말 그대로입니다. 오상식 씨가 설문 참가자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더 선호된 답을 골랐다는 말이지요. 그것도 무려 300번이나요.”

 “……그게 왜요?”

 설명이 더 필요했습니다.

 “어, 이건 보통일이 아닙니다. 따로 정답이 없는 질문이었고 답안을 취합할 때까지는 저희 쪽에서도 어떤 항목이 다수가 되고 어떤 항목이 소수가 될지도 알 수 없었지요. 응답자가 그런 계산을 할 이유도 전혀 없었고요. 아시다시피 순수하게 개인의 선호를 묻는 설문이었으니까요. 아무튼 그 결과 모든 작성자들이 저마다 취향을 드러냈습니다. 다수에 속한 경우가 훨씬 많았겠지만 상대적으로 덜 선호된 항목에도 적어도 한 번씩은 체크했지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무조건 배제했습니다. 응답자의 성별이나 연령별, 지역별로 가려내는 문제도 중간중간 넣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이천오백삼십만 명을 차례차례 걸러내니 여덟 명만 끝까지 남은 겁니다. 한결같이 다수의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죠. 우리가 찾은 게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술을 마시던 대학생들이 문득 이상한 멜로디에 억박적박한 화음으로 노래 비슷한 것을 외쳤어요. 그 바람에 대화의 맥이 끊겼고 아빠와 한기 씨는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학생들의 기세가 시그러질 즈음 아빠가 물었습니다.

 “대강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요, 그런 사람들을 찾아서 뭘 어쩌시려는 겁니까?”

 “소비자란 변덕스러운 집단입니다. 소비자의 취향을 파악하려거든 그들에게 일일이 물어보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저는 세상 어딘가에 항상 다수파에 속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만 확보하면 일이 훨씬 수월해지지 않겠습니까? 그게 제 아이디어의 요지입니다. 오상식 씨의 이름이 끝까지 남은 것은 그저 우연이 겹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300번이나 반복된 우연이라면 이미 필연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물론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비논리의 극치예요. 하지만 소비자의 변덕 또한 다를 바 없지요.”

 한기 씨가 잠시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맥주잔을 만지작거렸습니다.

 “이제 저희 팀이 할 일은 검증된 자문단을 모아 미래로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컨대 제품의 디자인이나 색상 같은 것, 나아가 더 큰 범주의 무언가를 물을 수도 있겠지요. 그거야 저희가 고민할 부분이고요. 아무튼 각종 결정을 앞두고 여덟 분께 의견을 구할 겁니다. 물론 사례는 충분히 해드리겠습니다. 건당 50만 원이 즉석에서 현금으로 지급될 거예요. 법에 저촉되는 부분은 일절 없습니다. 모두에게 이득이에요. 저희는 시행착오를 줄여서 좋고 여러분은 용돈벌이가 생겨서 좋죠.”

 “하지만 제가 틀린 선택을 하면요? 저 때문에 손해를 볼 수도 있잖아요?”

 “300번 연속으로 다수의 편에 섰던 사람이 그 다음번에 때마침 소수 취향을 드러낸다고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대비해야죠. 한 번이라도 예상이 틀리면 즉시 아웃입니다. 그렇다고 책임을 묻진 않을 테지만요. 단지 가욋돈을 벌 기회가 영영 사라질 뿐이에요.”

 문득 아빠는 거대 자본을 들인 프로젝트치고는 너무 주먹구구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혹시 이렇게 꾀어서 사기를 치려는 건가? 그래서 얼른 떠오르는 대로 질문을 던졌지요.

 “여덟 명의 의견이 갈리면 누구 말을 듣나요?”

 “당연히 다수 의견에 따라야겠지만 설문을 다시 하거나 모든 의견을 반영할 수도 있습니다. 사안에 따라 대처를 달리할 겁니다.”

 “저희 답안에 따라 나머지 선택지는 폐기 처분된다면 제가 옳은 답을 골랐는지 어떻게 아나요? 축구장에서 핫도그를 팔아봐야 야구장에서 뻥튀기를 파는 편이 낫다는 걸 알 거 아닙니까?”

 “지당하십니다만 앞으로 저희가 드리는 질문지를 보시면 그런 말씀을 못 하실 겁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아빠는 한기 씨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용처는커녕 존재조차 몰랐던 재능을 손수 발굴해 그것을 빌리는 데 대가를 치르겠다고 하니 딱히 거절할 까닭이 없겠지요.


아빠와 한기 씨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만났습니다. 이변이 없는 한 약속은 매월 셋째 주의 목요일 점심으로 잡혔어요.

 처음에 아빠는 다른 자문단을 함께 만나는 것으로 짐작했는데 막상 약속 장소에는 한기 씨 혼자 나와 있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안 오십니까?”

 “네, 다른 분들과도 개별적으로 접촉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용건은 같지 않나요? 번거로울 텐데 한 번에 처리하시지….”

 “괜찮습니다. 보안상 서로에 대해 모르는 편이 나아요.”

 아빠가 보기에 한기 씨는 그렇게까지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지만 유독 보안만큼은 깐깐하게 구는 느낌이었습니다. 약속 장소만 해도 그랬습니다.

 “그럼 그날 제가 수도 그룹 쪽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전략기획실이면 본사에 계시지요?”

 통화 내내 한기 씨가 아빠의 편의를 많이 봐주고 있다는 생각에 아빠는 약간 핀치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하나쯤은 한기 씨 수고를 덜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타이밍을 재다가 그렇게 말한 거예요.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반응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그러실 것까진 없습니다. 제가….”

 “아뇨, 아뇨. 저는 진짜로 괜찮은데.”

 어색한 침묵이 아주 잠깐 전화선에 머물렀습니다. 그런 뒤에 한기 씨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어요.

 “실은 제가 평소부터 찜해 두었던 요리가 있어서 그럽니다. 이번엔 제 쪽에서 대접하는 것이니 장소까지 책임지도록 해주시지요.”

 대번에 아빠의 기세가 꺾였고, 한기 씨는 생소한 음식점 이름을 대며 주소를 불러주었습니다. 한산한 주택가의 단정한 일식집이었습니다.

 “여기 뭐가 맛있나요?”

 한참 두리번거리던 아빠가 한기 씨에게 물었습니다. 한기 씨는 아빠를 빤히 쳐다보다가 지난번의 통화를 떠올리고는 빙긋 웃었습니다.

 “사실 저도 이 동네는 처음입니다. 단지 지리적으로 이쪽 부근에서 뵙는 게 서로 좋을 것 같아서요.”

 한기 씨가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건 가급적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분들도 그렇지만 상식 씨도 우리 그룹에 있어서 더없이 소중한 자원이거든요. 어, 자원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그리 좋진 않군요. 설문조사에 들인 비용이 고스란히 여덟 분의 몸값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귀중한 분들일지 이해되시죠? 쉽게 말해 VIP 취급을 받으시는 겁니다. 다른 기업이 눈치를 채고 상식 씨나 다른 분들을 가로챈다면 재앙이나 다름없겠지요. 그러니 저희로서는 비밀 유지에 각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룹 내에서도 이번 프로젝트의 세부사항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예요.”

 아빠가 단어를 떠올리느라 허둥지둥했습니다.

 “저기, 그… 스파이… 산업스파이 때문인가요?”

 “재계에 암약하는 스파이가 얼마나 많은지 아마 짐작도 못 하실 겁니다. 아예 산업스파이만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에이전시가 따로 있을 정도예요. 그날도 도청이 우려되어 자세한 설명은 못 드리고 대충 둘러댔던 겁니다. 도청이나 미행은 예사고 때에 따라서는 절도를 하거나 교묘하게 위장 살인까지 저지르거든요.”

 “사, 살인…?”

 “과로며 우울증이며… 직책이 높을수록 지병이 훈장처럼 들러붙거든요. 자살로 꾸미기 간편하죠. 하지만 그런 건 아주 드문 경우입니다. 상식 씨 같은 외부인사는 안심하셔도 좋아요.”

 “네에….”

 음식은 그럭저럭 먹을 만했지만 멀리서 찾아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식사를 마칠 즈음 한기 씨는 서류가방에서 출력물을 꺼냈습니다.

 “방식은 지난번 설문과 동일합니다. 마음이 가는 쪽에 표시해 주세요.”

 아빠가 건네받은 것은 제품의 사진이었습니다. 첫 번째 페이지에는 세 종류의 무선전화기 모델이 세 종류 있었는데 다른 것은 색상뿐이었습니다. A안은 흰색, B안은 회색, C안은 검정색이었어요. 조금 머뭇거리던 아빠는 결국 하나를 골랐습니다. 다음 페이지에는 자전거 사진 세 장이 나란히 있었어요. 심지어 그건 수도 그룹의 제품이 아니었는데 역시 색상이 달랐습니다. 한 장 더 넘기니 세 가지 색상의 모자 사진이 있었고요. 그런 식으로 총 스무 가지 제품의 색상을 선택했어요.

 “여기서 제가 고르는 색상만 출시되는 겁니까? 보통은 여러 색상이 다 나오지 않나요?”

 “이것들은 이미 출시가 되었습니다. 아직 자문단의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으니 확인을 하려는 겁니다. 색상별 판매량과 작성하신 답안을 비교하려는 거예요. 그런 뒤에 확신이 생기면 본격적으로 일을 맡기겠지요. 그러니 오늘 설문은 최종 테스트쯤으로 여기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틀리면 끝이겠군요?”

 “그렇게 되면 저도 끝입니다.”

 한기 씨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습니다. 아빠는 그 말의 의미를 나중에야 알았어요.

 “자, 그럼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살펴 들어가십시오.”

 “다음에도 이쪽 동네에서 보나요?”

 “다음이 있다면요. 하지만 메뉴는 바꾸는 게 좋겠군요.”

 그로부터 한 달 뒤에 아빠는 다시 한기 씨의 전화를 받았고 약속을 잡았으며 식사를 마치고 새로운 설문에 답했습니다. 한 달 뒤에도, 그 한 달 뒤에도요. 정말로 아빠에게 신묘한 재주가 있는지 이후로도 약속은 끊이지 않았어요. 사례도 착실히 지급되었고요.

 한기 씨가 내미는 설문은 대개 ‘이런 게 있다면 사겠다, 사지 않겠다’를 묻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상세 질문은 아빠를 질리게 할 정도였지요. 수도 그룹은 아빠의 취향을 낱낱이 해부했습니다. 이런 것까지 묻나 싶은 자질구레한 질문이 있는가 하면 이런 것까지 묻나 싶은 중대한 질문도 있었지요. 그러나 무엇을 묻든 아빠가 내리는 신탁은 번번이 다수 취향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무협지나 웹툰 말고 아빠가 진짜로 끊지 못한 것은 박카스였습니다. 중독자들이 으레 그렇듯 한병 두병 마시던 것이 어느새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거예요. 그래도 주변 사람들은 아빠의 자양강장제 중독에 대해 알지 못했을 거예요. 오래전에 아빠가 박카스를 연거푸 들이켜는 걸 보고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했대요. 시답잖고 악의 없는 그 말이 아빠의 내면에 거대한 수치감의 파문을 일으켰나 봅니다. 그날 이후 박카스는 집에서만 마신다는 규칙을 정하고 남들 앞에서는 초인적인 자제력을 발휘했거든요. 그러다 정 참기 어려우면 몰래 약국으로 달려가 얼른 한 병 마시고 돌아왔다지요.

 그런데 이제 아빠에게 작은 여흥이 생겼습니다. 한기 씨와 헤어진 뒤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약국에 들르는 것이었지요. 그곳은 여느 약국과는 달랐습니다. 아니, 약국이야 별다를 것이 없었고 그저 아빠의 기분이 남달랐던 거예요. 주변에는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지갑은 두둑해졌으니 피서라도 온 기분으로 소위 길티 플레저를 누렸겠지요.

 자문단으로 활동한 지 근 일 년째 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아빠는 어깨에 묻은 눈을 떨어내며 역 앞 약국에 들어섰어요.

 “박카스 두 병만 주세요. 아니, 세 병.”

 미리 밝히자면 약국 카운터를 지키던 사람은 우리 엄마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할 때까지 임시로 고모네 약국에서 일을 돕고 있었어요. 암중모색의 기간이 한없이 연장되기는 했지만요.

 “여기요.”

 아빠는 우선 가볍게 한 병 해치울 요량으로 능숙히 뚜껑을 땄습니다. 그런 뒤에 저로서는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는 음료를 입 안 가득히 들이부었지요. 그런데 쿨렁쿨렁 쏟아지는 액체의 느낌이 여느 때와 사뭇 달랐어요.

 “웩!”

 그것은 박카스가 아니었습니다. 약국에서 팔고 단단한 병에 들었다는 점 외에는 박카스와 딱히 공통점이랄 게 없는 물건이었지요.

 “이봐요! 이거 쌍화탕이잖아!”

 “어머, 죄송해요.”

 대신 변명을 좀 하겠습니다. 그날 엄마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엄마를 둘러싼 몇 가지 근심들이 회전목마처럼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답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카운터에 턱을 괴고 앉아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던 거예요.

 “깜빡 실수했어요. 죄송합니다.”

 엄마가 허리를 굽혀 연신 사과했어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눈물 한 줄기가 그만 엄마의 뺨에서 또르르 구른 거예요. 송구한 마음에 맺힌 눈물은 결코 아니겠으나 아빠로서는 다른 가능성을 떠올릴 수 없었지요.

 “어? 왜, 왜 울지? 왜 이래요?”

 당황한 아빠를 앞에 둔 채 엄마는 급기야 얼굴을 파묻고 흑흑 흐느꼈습니다.

 “저기, 울지 마요. 갑자기 소리를 지른 건 죄송합니다. 사과할게요. 화를 낸 건 아니고 저도 놀라서 그만….”

 한낮의 소란에 안쪽에 있던 고모할머니가 무슨 일인가 싶어 얼굴을 비추었습니다.

 “너 왜 울어? 왜 그래?”

 엄마 대신 아빠가 해명에 나섰습니다.

 “글쎄요, 저도 잘…. 이 분이 실수로 박카스 대신 쌍화탕을 주고선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지 뭡니까. 아, 내가 쌍화탕을 달라고 말했던가?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도 같네요. 이거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아빠는 눈물에 약한 사람이었어요. 이런 상황에서는 그저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해결책이었지요. 그리고 엄마는 겉보기와 달리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들썩이던 어깨에서 새어 나오던 흐느낌이 기묘하게 뒤틀렸어요.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대치 중이던 아빠와 고모할머니는 그 소리가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라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습니다.

 마침내 엄마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눈가가 촉촉이 젖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어요.

 “아니야, 고모. 내가 실수한 거야. 이 분은 맨날 박카스만 사 가시는데 내가 그걸 알면서도 잘못 드렸어.”

 “근데 왜 울어? 무슨 해코지라도 당했니?”

 “고모, 그건…. 어제저녁에 수경이랑 좀 다퉜거든. 나 절교당했어.”

 “왜? 둘이 죽고 못 살았잖아?”

 “그렇게 됐어. 그 얘기는 나중에 해요.”

 아빠는 오해가 풀려 안도하면서도 새로운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제가 맨날 박카스만 샀다고요?”

 “네, 오실 때마다 서너 병씩 사 드시잖아요.”

 “그걸 어떻게… 저는 여기 단골도 아닌데요. 손님들이 뭐 사는지 다 기억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박카스만 사는 손님은 기억하지요.”

 진종일 한 자리를 지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따분한 일입니다. 짬짬이 수필집을 읽거나 낱말 퍼즐을 푸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어요. 그러다 엄마는 일과를 흥미롭게 보내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그것은 손님을 관찰하는 것이었습니다. 얼굴이나 말투, 걸음새 따위를 유심히 바라보며 어울리는 별명을 찾다 보면 하루가 금세 저물곤 했지요.

 평일 점심에 가끔 들러 박카스를 홀랑 비우고 떠나가는 손님에게 엄마는 ‘드 니로’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별명은 박카스와 아무 상관도 없었어요. 단지 오른쪽 눈 아래 광대께에 큼직한 점이 있었을 뿐이니까요. 그러니까 로버트 드 니로의 점과 같은 위치에 말이에요. 결국 아빠에 관해서는 드 니로를 기억한 게 먼저고, 그 사람이 줄곧 박카스만 주문한다는 걸 기억한 게 그다음이에요. 하지만 그런 노하우를 함부로 떠벌이는 것은 서비스 종사자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겠지요.

 이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아빠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이유야 간단하지요. 자신의 중독이 들통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때 드 니로 씨가 엄마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니?”

 엄마가 손가락으로 제 배를 간질이며 물었습니다. 글쎄요. 저는 그때 그 자리에 없었으니 대답할 수 없네요.

 “꼭 박카스 때문에 온 건 아닙니다.”

 아빠는 땀을 뻘뻘 흘리며 궁색하게 변명했답니다.

 “에그머니….”

 고모할머니가 아빠와 엄마 사이에 시의적절한 감탄사를 남긴 채 슬그니 안쪽으로 사라졌습니다.

 오해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때로는 뜻밖의 인연을 엮기도 하지요. 언젠가 아빠는 이 모든 사건들이 나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빠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편 아빠는 새로 발견한 재능에 기세등등했습니다. 다음은 그 증거입니다.

 “오래전에 프랑스의 어느 왕이 아주 유명한 말을 했어. …아니, 나라야. 그건 왕이 아니라 왕비가 한 말이야. 더구나 실제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대. 그거 말고 이런 말은 못 들어 봤니? 왜, ‘짐이 곧 국가다’라고…. 그건 자기가 나라의 주인이니까 이러쿵저러쿵하지 말라는 선언이었어.”

 초등학교에 갓 들어갔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제가 아는 거라곤 빵이 없으면 아쉬운 대로 케이크를 먹으라는 달달한 제안뿐이었어요. 만화영화로 본 거라 기억하고 있었지요.

 “지금은 어때? 지금은 우리 스스로 대통령도 뽑고 국회의원이나 도지사도 직접 뽑잖아. 그래, 반장선거처럼. 이건 너도 들어봤을 거야.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왕이나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나라의 주인이지. 그런데 여기엔 어폐가 있어. 사실은 모두가 주인이 되는 건 아니란다.”

 저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그런 걸 배운 적도 없거니와 애초에 제가 한 질문과는 점점 동떨어진 대답이 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아빠 말씀은 끝까지 들어봐야 알 때가 많으니까 저는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지요.

 “우리나라 국민 중에는 이번 대통령에게 표를 주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 다른 후보를 지지하거나 아예 투표조차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그런 사람을 여전히 우리나라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빠 대답은 노-야. 동물원에 가려는 남자랑 미술관에 가려는 여자가 우연히 같은 택시를 탔다고 생각해 봐. 택시기사가 남자 말만 듣고 동물원에 간다면 여자는 억지로 동물원에 따라가는 수밖에 없겠지?”

 “그냥 각자 다른 택시를 타면 안 돼?”

 “되고말고. 하지만 그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더러 이민을 가라고 하는 꼴이잖니? 그보다는 미술관으로 가주겠다는 사람을 운전석에 앉히는 게 편하겠지?”

 “으응.”

 그 말은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될 것도 같았습니다. 엉터리 비유를 하던 아빠도 제 눈빛을 읽었는지 계속 무리수를 두었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원하는 행선지로 데려가 줄 기사를 앉히는 승객이 진짜 주인이고, 나머지는 어쩌다 보니 택시에 합승한 사람인 셈이야. 그런데 우리는 기사를 정하는 결정을 선거로 하지? 선거에서 이기려면 표를 많이 받아야 하고.”

 “근데 그게 내 이름이랑 무슨 상관이야? 자기 이름이 무슨 뜻인지 써가는 게 숙제라니깐?”

 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만 중간에 끼어들고 말았습니다. 아빠도 저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어요. 저는 팔짱을 끼고 앉아서 뚱딴지같은 설명을 마저 들어야 했지요.

 “지금까지 아빠가 탄 택시는 늘 아빠가 원하는 행선지로 갔어.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국회의원이나 시장, 도지사 등등 모두가 아빠의 선택을 받았다는 얘기야. 내가 표를 준 사람이 어김없이 당선 됐거든. 아마 앞으로도 그럴 테고.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주인은 바로 아빠 아니겠니? 다시 말해 우리나라는 아빠 거야. 그래서 네 이름을 나라라고 정한 거야. 우리 딸은 누구 거?”

 “엄마 거.”

 저의 이런 기질은 엄마를 닮았지요.

 “어허, 무엄하도다. 짐이 곧 국가니라.”

 “뭐래.”

 다수파의 세상에서 아빠는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라고 믿었습니다. 늘 그랬던 건 아니니 저의 불운이라면 하필 아빠가 만면에 의기양양을 문신처럼 두르고 다니던 시절에 태어났다는 점이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아기 이름을 그렇게 무성의하게 짓는 법이 어디 있답니까. 그나마 오주인이라든지 오다수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요?

 질리도록 설명을 들었건만 숙제는 여전히 골칫거리였어요. 책상 앞에 앉아 공책을 펼치고도 저는 연필 쥔 손을 망설였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막막했거든요. 첫 문장을 몇 번이나 썼다 지웠는지 몰라요. 한참을 골몰하다 마침내 갈피를 잡고 또박또박한 글씨로 적어 내려갔습니다.

 ‘제 이름이 나라인 것은 우리 엄마랑 아빠가 나라를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엉터리 답은 아니었어요. 우리 엄마와 아빠는 정말로 저를 사랑했으니까요.


수도 그룹은 다방면에서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나갔습니다. 불황에도 아랑곳 않고 경쟁기업들의 추격을 크게 따돌렸어요. 아빠 말만 들어서는 정확한 기여도를 알 수 없겠지만요.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지요.

 십 년이 지나도록 담당자는 여전히 한기 아저씨였습니다. 동갑내기인 두 분은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어요. 아니, 그건 아빠의 착각이었는지도 몰라요. 사적인 이야기를 떠드는 쪽은 주로 아빠였고, 한기 아저씨는 이런저런 것들을 쾌활하게 말하긴 해도 막상 자기 이야기는 별로 들려주지 않았거든요. 아저씨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여름에도 두 분은 만났습니다.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처럼 공기가 무거운 날이었습니다. 그런 날은 그림자도 잿빛으로 찌푸리지요. 점심 메뉴는 콩국수였습니다.

 “오늘은 설문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고.”

 그런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식사 내내 아무렇지 않게 굴던 아저씨가 갑작스레 결별을 통보한 거예요. 아빠가 아저씨를 보았어요. 한기 아저씨는 아빠 시선을 피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고요.

 “결국 나도 아웃인가?”

 “넌 문제없어. 굳이 따지자면 우리가 먼저 아웃된 거지. 팀이 공중분해 됐거든.”

 “뭐? 아… 실장님 구속된 것 때문에?”

 “아무래도 그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후 그룹에는 많은 변화가 일었습니다. 후계구도가 명확하지 않던 차기 회장 자리는 둘째 아들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장남은 차남을 당해내지 못했어요. 삼남에게는 어쩌면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몇 년, 아니 몇 개월만이라도 더 회장에게 시간이 있었다면요.

 둘째 아들에게 첫째 아들은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장남은 노상 정치권이나 기웃거릴 뿐 경영에는 뜻이 없어 보였거든요. 문제는 탕아에서 총아로 거듭난 셋째 아들 염 실장이었습니다. 어느덧 그룹 전략기획실을 총괄하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새로운 회장에게는 걸림돌로 인식되었겠지요. 그 전에도 몇 번이나 자신의 실책을 지적한 동생이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 자리를 노릴 것이라고 판단한 거예요.

 새 회장은 전사적 경영쇄신을 선언하고 구조조정을 단행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몰락의 시작이었어요. 염 실장은 횡령과 배임 등 석연치 않은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한기 아저씨에 따르면 그것은 스파이의 작품이었다고 해요. 그러나 죄의 유무를 떠나서 아저씨가 꼭 쥐고 있던 동아줄이 한순간에 썩둑 끊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했지요.

 “다른 사람들은 뭐래?”

 “다른 사람 누구?”

 “자문단 사람들.”

 내내 무표정하던 한기 아저씨의 한쪽 입꼬리가 그 말에 살짝 올라갔습니다.

 “그 사람들은 진즉에 탈락했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느 날엔가 갑자기 우르르 아웃되더라고. 그게 삼 년쯤 지났을 때고 이후로는 쭉 너 혼자였어. 팀원들도 나 외에는 전부 원래 부서로 돌려보냈고. 그러니까 우리 둘이서 한 팀이었던 거야.”

 “그런 얘길 왜 지금까지….”

 아빠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이유야 뭐 보안 때문이었겠죠.

 “그렇다고는 해도 혼자서 이렇게까지 오래 버틸 줄은 몰랐다.”

 “그런데 내가 틀린 게 아니라면 계속해도 되는 거 아니야? 회사에 도움이 되는데 잘릴 이유가 없잖아.”

 “사정이 복잡한 게, 사장단은 지금도 설문에 협력하는 사람이 최소 백 명은 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렇게 생각하도록 우리 쪽에서 유도했지만 말이야. 외부인원 한 명의 의견에 수익과 직결되는 결정이 좌우된다는 게 알려지면 업무는 즉시 중단될 테니까. 선대 회장이 정초에 사주 보는 것만으로도 뒷얘기가 무성했어. 그러니 차라리 팀을 없애는 한이 있더라도 비밀은 계속 유지해야 돼. 요컨대 후일을 도모하자는 거야.”

 “올해부터는 작심하고 우리 딸 과외비나 모아볼까 했는데 이거 야단 났군.”

 아빠는 문득 아저씨가 염려되었습니다.

 “너는 어때? 괜히 불똥 튀어서 엉뚱한 데로 좌천되는 건 아니지?”

 “걱정하지 마. 달라지는 건 없어. 연락할 테니까 가끔 만나서 이렇게 식사나 하자고.”

 하지만 두 분의 약속은 간격이 점점 벌어지더니 명절 때에나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아빠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한기 아저씨가 그때 이미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단 한 번, 아저씨가 아빠를 찾아와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아저씨가 오래 짝사랑하던 소꿉친구와 긴 연애 끝에 결혼을 했고, 남매를 두 살 터울로 낳았는데 그중 큰 아이는 저와 동갑이며, 일을 그만두고 변두리 아파트 단지 상가에서 치킨집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조류독감이 발생할 때마다 휘청거리긴 해도 그럭저럭 먹고 살 정도는 된다는 이야기를요.


사람은 누구나 하나씩은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이 아빠의 지론이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빛내는 것이야 말로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재능을 찾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야. 재능이라는 녀석이 어느 구석에 웅크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거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일이 비일비재하단 말이지. 그러니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해.”

 “재능이 없는 사람은?”

 “그런 사람은 없어.”

 아빠가 단호히 대답했습니다. 아빠가 말하기를 경완 아저씨는 성대모사에 능하고 한기 아저씨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 분야에서 최고까지는 아니라도 그것은 엄연히 그분들이 지닌 재능일 테지요. 또, 엄마는 다림질에 소질이 있다고 했어요. 글쎄, 제가 보기에는 자못 심각한 척하는 아빠의 말을 한 귀로 흘려보내는 것이 엄마의 출중한 능력이지만요.

 그럼 저는 어땠을까요?

 “그건 네가 찾아야지.”

 제가 물을 때마다 아빠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제 키가 아빠 키를 추월한 지 오래인데도 아빠는 팔을 들어 제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어요.

 “반드시 찾을 거야.”

 덕분에 저는 어려서부터 안 다닌 학원이 없을 정도입니다. 가능성의 창은 누구 못지않게 활짝 열려 있었던 셈이지요. 그러나 정작 저를 향해 손짓하는 재능은 없었습니다.

 발레를 배우던 소영이는 본격적으로 발레를 시작했고, 노래방에서 놀던 유미는 연예 기획사 오디션에 합격했다지요. 학원에서 제 앞자리에 앉던 원우는 전국 수학경시대회에서 입상했어요. 저는 그들 사이에 끼어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고요. 저는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습니다. 운동도 젬병이고요. 얼굴이 예쁘장하지도 않고 리더십도 없었지요. 무얼 하든지 금방 질렸습니다. 안 다닌 학원이 없다는 것은 도중에 그만둔 학원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요컨대 저는 어중간한 학생이었어요.

 줄곧 삭막한 풍경뿐이던 제 창에 처음으로 무언가 포착된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도 한 해가 지났을 때입니다. 지안이와 짝이 된 것이 계기였어요. 지안이는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교과서 귀퉁이에 몰래 낙서하곤 했는데, 슬쩍 곁눈질하니 제법 솜씨가 좋은 것 같더군요.

 우리는 아직 제대로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학기 내내 버성기게 지낼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조금 과감하게 다가가기로 한 거예요.

 “뭐 그려? 나도 좀 보여줘.”

 숫기 없는 제 짝꿍은 목덜미까지 시뻘게진 채로 경직되었습니다. 저는 어세를 약간 누그러뜨려 다시 물었어요.

 “뭐 그렸어?”

 얇은 입술을 한참이나 옴짝하던 지안이가 마지못해 실토했습니다.

 “마, 만화 캐릭터….”

 “좀 보자.”

 지안이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습니다.

 “별로 못 그려서….”

 “에이, 얼핏 보니깐 잘 그리던데?”

 묵묵부답. 짝꿍의 입이 꾹 닫혔습니다. 때마침 수업시간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어요. 순간 묘수가 떠올랐습니다.

 “만화라고 했지? 좋아, 그럼 나도 하나 그릴게. 서로 보여주는 거야.”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어요. 저는 노트 맨 뒷장에 은밀히 4컷 만화를 그렸습니다. 스토리는 방금 나눈 대화를 토대로 한 것이었어요. 특히 짝꿍인 지안카를로(가명)의 그림을 보고 놀라는 마지막 컷은 상당한 실력이 필요했는데 엉성한 제 솜씨로는 감동을 주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의도와는 달리 괴상한 그림 앞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초현실적인 마무리가 되고 말았는데 그것이 뜻밖의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곤혹스러워하며 노트를 건네받은 지안이가 만화를 보고 웃음을 터뜨린 거예요.

 그날의 작은 성취가 제 안에 있던 무언가를 깨웠습니다. 환해진 지안이 얼굴을 보며 머리가 쭈뼛해지던 것은 어쩌면 재능이 저를 발견한 신호였는지도 몰라요.

 그 뒤로 저는 만화를 몇 편 더 그렸습니다. 지안이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그것들을 호평했어요. 그럴수록 저는 만화에 더욱 매달렸지요. 그림 실력도 조금씩 나아졌어요. 저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저기, 엄마.”

 저녁식사 중에 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어요.

 “나 미술학원 다녀도 돼?”

 “미술학원? 너 예전에 다녔었잖아.”

 저는 중학교 때 미술학원에 다니다가 두 달 만에 도망치듯 그만둔 전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릅니다. 지금은 심지에 불이 붙었으니까요.

 “만화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원이 있대. 거기 다니면 안 돼?”

 “벌써 2학년인데 대학 갈 준비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냥 취미로 다니려거든….”

 “지금보다 성적 떨어지면 바로 관둘게요. 네?”

 그렇게까지 저돌적으로 나서니 엄마는 약간 놀란 듯했어요.

 “알았어. 너 제주도 가 있는 동안 아빠랑 얘기해 볼게.”

 “그럼 엄마는 허락하는 거야?”

 “대신 성적 떨어지면 끝이야.”

 “오케이. 아빠한테도 말 좀 잘해줘요.”

 이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아빠한테는 벌써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 타이밍에 굳이 털어놓을 필요가 없겠지요.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학원에 등록할 생각에 수학여행은 되레 뒷전이었어요.

 수학여행은 시작부터 조마조마했습니다. 안개가 심해 출항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간신히 배가 뜨긴 했지만 두 시간이나 지연된 후였지요. 기다리는 동안 흥이 많이 식었는데 배는 처음 타보는 거라 막상 선상에 오르니 기분이 살아나더군요. 비로소 여행을 간다는 실감이 났어요. 엄청 크고 호화로운 배 안에서 우리는 마음껏 먹고 마시고 떠들었어요. 그러다 하나둘씩 쓰러져 잠들었고요. 저도 지안카를로를 끌어안고 노루잠을 잤지요.

 밤사이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저는 열쇠 꾸러미를 한가득 들고 있었어요. 개미굴처럼 구불구불한 복도에는 문이 많았는데, 제 앞에도 자물쇠가 채워진 미닫이 철문이 있었지요. 벽에 드리운 푸른 그림자가 일렁였습니다. 저는 그 그림자로부터 달아나는 중이었어요. 손이 덜덜 떨리고 목이 바짝바짝 탔습니다. 얼른 숨어야 하는데 좀처럼 맞는 열쇠를 찾지 못했어요. 그러다 마침내 철컥, 하고 손에 걸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물쇠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어요. 저는 환희에 차서 문을 힘껏 밀었지요. 하지만 문 안쪽에 있는 것은 방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시멘트가 치덕치덕 발라져 있는 차가운 벽이었어요. 저는 망연자실한 채로 벽에 기대었습니다. 이윽고 그림자의 주인이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은….

 딩동댕, 선내 스피커에서 아침을 알리는 멜로디가 나왔습니다.

 차례로 씻고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다시 넓은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친구들은 내도록 명랑히 조잘거렸지만 저는 어쩐지 개운하지 못했습니다. 꿈 때문에 찜찜했던 거예요.

 저는 친구들에게서 벗어나 한적한 데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 도착했어? 밤늦게 출발했다더니?”

 “아직. 근데 바다라 그런지 감이 좀 머네.”

 제가 물었습니다.

 “미술학원 있잖아…. 다니지 말까?”

 “왜?”

 “괜히 돈만 낭비하는 것 같아서.”

 “돈 걱정을 네가 왜 해.”

 “나한테 소질이 없다는 걸 비싼 돈까지 들여가면서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왜, 누가 너더러 소질이 없대?”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때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어서 배가 한쪽으로 급격히 기우뚱했지요. 그 바람에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어요. 주위를 살피니 저뿐만 아니라 방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쪽 벽으로 쏠렸습니다.

 “어라?”

 전화기를 떨어뜨린 저는 정신을 좀 수습한 뒤에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습니다.

 “아빠, 배가 갑자기 기울었어. 타이타닉 같아. 이러다 가라앉는 거 아냐?”

 “근처에 승무원 없어?”

 “승무원은 안 보이고 안내방송만 나와. 현재 위치에서 이동하지 말래. 움직이면 더 위험하다고.”

 “얼마나 기울었길래…. 암초에 부딪혔나? 너는 어디 안 다쳤어?”

 “난 괜찮아. 한번 나가볼까?”

 “아니야, 움직이면 더 위험하다잖아. 거기서 좀 기다려봐. 혹시 모르니까 구명조끼는 꼭 입고.”

 “알았어요. 무슨 일 생기면 또 전화할게.”

 끊기 전에 아빠는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면 학원 다니는 거다.”

 배가 가파르게 기울어 저는 또 전화기를 놓쳤고 이번에는 다시 줍지 못했습니다. 발밑에서 물이 차올랐거든요. 4월의 시린 바다가 검푸른 아가리를 벌려 거대한 여객선을 기어이 집어삼킨 거예요. 탑승자 476명 가운데 172명은 다행히 목숨을 구제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저와 같은 운명을 맞았지요.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기 아저씨가 전화를 걸어 아빠에게 다짜고짜 만나자고 한 것은 사고가 있고 일 년이 조금 지나서였습니다.

 “미안하다. 며칠 전에 겨우 알았어. 내가 너무 무심했다.”

 수척해진 아빠에게 손을 내민 아저씨는 전보다 살이 좀 찐 상태였어요. 한눈에 보기에도 턱살이 푸짐했지요.

 “신수가 훤해졌네.”

 미소를 짓기 위해 아빠는 잘 쓰지 않는 근육을 움직여야 했습니다. 아저씨는 말을 아끼는 대신 아빠 손을 꼭 쥐었어요.

 정오도 되지 않았지만 아빠는 개의치 않고 술을 주문했습니다. 술병을 내주는 식당 종업원도 별로 개의치 않아했고요. 해물파전을 가운데 놓고 두 분은 한동안 묵묵히 잔을 비웠습니다. 그러다 작심한 듯 아저씨가 운을 뗐어요.

 “실은 나 회사 그만둔 지 좀 됐다. 지금은 치킨집 해.”

 아저씨는 나직이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아빠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어요. 하지만 사고 이후 아빠는 무슨 이야기를 듣더라도 놀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귀로 들어오는 소리들이 몸속 어딘가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했어요.

 “한기야.”

 문득 아빠가 메마른 음성으로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녹색 병이 죽순처럼 가지런히 테이블에 돋아 있었습니다.

 “우리들 이러는 거, 너도 지겹지?”

 “아니야. 왜 그런 소릴 해?”

 “나도 마찬가지야. 이 상황이 정말이지 지겨워.”

 “너 애쓰고 있는 거 다 알아. 내가 도움은 못 됐어도… 참, 늦었지만 이거.”

 아저씨가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아빠에게 내밀었습니다. 겉면에는 ‘근조’라고 쓰여 있었어요.

 “됐어. 마음만 받을게.”

 “잔말 말고 받아. 이거 그냥 돈 아니야. 애초에 네 돈이라고.”

 아주 예전에, 자문단에게 현금으로 사례를 지급하라는 지시를 받고부터 아저씨 마음속에는 다른 꿍꿍이가 생겼습니다. 아무 근거도 남기지 않는다면 얼마쯤은 가로채도 되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오래갈 프로젝트라는 확신이 없었던 탓도 있었겠지요. 설문조사 결과를 반신반의하기도 했고요. 결국 아빠는 받아야 할 돈의 절반만 받았습니다. 절반은 아저씨 주머니로 들어갔지요. 십 수 년이 흘러서 겨우, 뉴스에 나온 아빠 얼굴을 보고서야 그 돈을 돌려주기로 결심한 거예요.

 “지금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도로 넣어. 둘이나 키우려면 돈 많이 들 거야.”

 “그럴 거면 만나자고도 안 했다. 그러지 말고 유족들이랑 쓰는 데 보태. 끼니도 든든히 챙겨 먹고. 직장도 그만뒀다며.”

 아저씨가 완강히 버티니 아빠도 도리가 없었습니다.

 “좋아. 답례로 나도 오래된 비밀이나 들려주지.”

 아빠가 새 병을 따서 잔을 채웠습니다.

 “예전에 아웃됐다는 나머지 일곱 명 있잖아. 너는 내가 그 사람들을 떨어뜨렸다면 믿겠어?”

 “넌 그 사람들 본 적도 없잖아.”

 “들어봐. 설문지 작성할 때 내가 실수한 적이 있어. 뭘 묻는 거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아무튼 엉뚱한 답에다 체크를 한 거야. 이상하게 찜찜하더니 며칠이 지나서야 내가 질문을 잘못 이해했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 정정을 하기에는 너무 늦어서 꼼짝없이 아웃될 줄 알았지.”

 아저씨가 아빠의 잔이 빈 걸 보고 새로 채워주었습니다.

 “그런데 내심으로는 내가 쓴 답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들지 뭐냐. 어차피 따로 정답이 있는 게 아니고 다수가 고르는 게 답이 되잖아.”

 “그래서?”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처분만 기다렸지. 그런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 무사히 지나간 거야. 그래서 어쨌든 맞는 답을 골랐나보다 생각했지. 하지만 나중에 네가 말해줘서 알았어. 그때 나 대신 다른 사람들이 아웃됐던 거야. 한 번에 우르르.”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내 능력은 다수의 답이 될 만한 걸 고르는 게 아니었어. 오히려 그 반대지. 내가 고른 게 다수의 답으로 결정되는 거였다고. 이 둘이 다르다는 건 다른 일곱 명의 탈락만 봐도 알겠지?”

 한기 아저씨도 얼근히 취해 있었으므로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사이 아빠는 소주 두 잔을 더 비우고 화장실에 다녀왔지요.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물론 한 번으로 확신할 수는 없었어. 그래서 보궐선거 때 시험 삼아 가능성이 아예 없던 무소속 후보를 찍어본 거야.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이 당선되더라고. 얼마 못 가서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가 됐지만 그건 논외로 치고.”

 “말도 안 돼. 그게 어떻게 가능해?”

 “나도 모르지. 어쨌거나 나를 찾아낸 건 너잖아.”

 아빠는 길게 숨을 토했어요.

 “하지만 이게 무슨 소용일까? 다수가 고른다고 정답이 되는 건 아니지. 안내 방송이 시키는 대로 기다리라고 했더니 배에 있던 사람들이 반도 넘게 죽었어.”

 “이봐, 네 잘못이 아니잖아….”

 두 분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습니다. 다시 입을 연 건 아빠였어요.

 “우리 나라한테는 돌반지도 없어. 외환위기 때 나라를 살리려면 금이 필요하다기에 선뜻 내줬거든. 그게 두 나라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여겼으니까. 또, 이십 년도 넘게 이 나라에 봉사했지. 그런데 내 딸이 죽었는데 내가 뽑아준 작자들은, 나 때문에 당선된 자들은 나를 외면했어. 눈을 감고 귀를 닫은 채로 상황이 수습될 때까지 그저 침묵하고 있다고.”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그러더라.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댁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에 경제가 다 죽어간다고. 지겨우니까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아빠가 차분히 말했습니다.

 “난 딱히 돈을 원한 것도 아니었고 애먼 울분을 토로할 생각도 없었어. 내 슬픔은 나만의 것이고, 지금 하는 일은 오히려 산 사람을 위한 거라고 생각했지. 어째서 그런 사고가 일어났는지, 어째서 구조 작업이 엉망이었는지, 어째서 제 역할을 못 하는 사람이 중책을 맡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대처해야 다음에 같은 비극을 겪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피해를 줄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러는 걸 지겨워했지.”

 아빠가 계속 말했습니다.

 “처음엔 야속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이해가 되더라. 나와는 처지가 다르니 어쩔 수 없는 거야. 같은 상황에 처해야 비로소 내게 공감하겠지.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어. 우리가 하는 일을 지긋지긋하다 생각하기로 했다고. 물론 처음에 방송에서 지겹다고 떠들던 건 소수의견이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마음먹은 이상 이제는 다수의 생각이 됐지.”

 “그렇게 생각하지 마.”

 “아니, 그래야 돼.”

 “…….”

 “앞으로도 달라지면 안 돼. 모두 나와 같은 처지가 되어야 해. 죽은 사람은 잊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경제를 살리고 이 나라도 살려야지. 그렇게 살려낸 나라의 그늘에서 나는, 아니 우리는, 패잔병처럼 쓸쓸히 죽어가겠지. 그나마 위안이라면 아직도 다수는 천국이 있다고 믿는다는 거야. 순진하지 않아?”

 “너….”

 “한기 너도 부디 정신 바짝 차려라. 이제부터는 능력껏 살아남는 수밖에 없어. 너야 원체 신중하니까 별 탈 없겠지만…. 그래도 역시 이 돈은 네가 갖고 있는 게 좋겠지. 둘이나 키우려면 돈 많이 들 테니까.”

 아빠는 마지막 잔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저씨는 멍하니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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