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후보작 악몽

2016.03.01 00:4003.01

1.
전원의 햇살은 따뜻했다. 집 바깥에서 쬐었다면 따가웠을 햇볕은 집 위에 설치한 강화유리판을 투과하며 열적외선으로 바뀐 채 부지 내로 들어왔다. 요즘은 오존층 문제로 인해 장기간 머무는 곳이라면 이런 식의 광차폐막은 필수적이다. 빈촌의 주거들은 유리 대신 비닐 등을 차폐막으로 삼지만 사실 그네들이 사용하는 저가 비닐은 자외선을 그대로 투과시킨다.
부지의 경계를 표시하는 담장은 아직 꽃이 피지 않은 파장화 덩굴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그 담장 아래 그늘에는 파리하가 누워 있다. 파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골든 리트리버이다. 새끼일 때 데려와서 어느새 육년 동안 기르고 있는데 요즘은 늙어서 그런지 거의 잠만 잔다.
그 곁에 내 어린 아들 무바시르가 정원의 잔디 위에서 자기보다 큰 짐볼을 굴리면서 뛰어 놀고 있다.
파리하는 땅바닥에서 머리도 들지 않은 채 무바시르가 혼자 깔깔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을 바라만보고 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선심 쓰듯 꼬리나 좀 흔들어 주는 것이다.
“커피 좀 마실래, 라드하?”
내 아내, 샤단이 거실로 들어오며 묻는다. 샤단은 어머니로부터 페르시아계의 유전적 혈통을 이어받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터키석 색깔의 눈이 인상적인 여자다.
커피는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모로 저었다. 샤단은 머그잔 위에 드리퍼를 올리고 커피 필터를 찾기 위해 싱크대 수납장을 뒤졌다. 그렇게 얼마간 뒤적거리더니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고 찬장 높은 데 올려놓은 여분의 커피필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라드하?”
나는 웃으면서 보던 책을 덮었다. 샤단은 나보다 머리 두 개 정도가 작다. 그래서 나는 쉽게 닿을 수 있는 높이라도 샤단은 그렇지 못해 곤란할 때가 많았다.
어렵지 않게 커피필터가 든 갈색 봉투를 하나 끄집어 내 샤단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런 샤단의 청록색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차가우면서도, 동시에 그 안쪽으로부터 온기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눈이었다.
나는 샤단을 껴안았다.
정원에서 무바시르가 넘어지는 것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칭얼대며 울듯하다가 파리하가 뛰어와 코를 들이밀며 일어나는 것을 돕자 금세 기분을 풀고 웃기 시작한다.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는 평화로운 날이었다.
가끔은 사치스럽게도 지루하고 방점 없는 생활이라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이런 삶은 단순히 인간의 권리라는 공허한 말로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공황과 자연재해 등으로 이전보다 삶의 질이 더욱 낮아진 남아시아에서는 특히나 그랬다.
단 한 가지, 쉬이 떨쳐낼 수 없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지만.
그것은 악몽이었다.
 
2.
이 세계는 차갑고, 단단하다. 이 세계는 명시적인 언어가 아닌 인상으로만 지각되어 농밀한 이미지로 내 폐부 깊숙한 곳을 두드린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원시적인 철근콘크리트 건물들이 크레타의 미궁을 구성하는 벽처럼 시계를 가리고 있다. 신화 속의 미궁 중심에 있는 것이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 먹는 우두인신의 괴물인 것처럼 이 차가운 콘크리트와 전선으로 이루어진 거리에 들어오니 마치 절망으로 차 있는 무저갱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나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으며,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 춥고 허기지다.
골목에서 남루한 옷차림으로 배회하는 사람이 있다. 앞을 가로막고 먹을 것을 달라고 애타게 말을 걸어본다. 그러나 내 발화는 온전한 형체를 이루지 못한 채 두서없이 튀어나와 하얗고 악취 나는 입김 사이에서 공허하게 맴돌기만 할 뿐이다. 남자가 나를 보더니 알 수 없는 언어로 무어라 지껄인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계통의 말이었다. 나는 먹을 것을 쥐어 입으로 가져가는 흉내를 낸다. 남자는 무심하게 나를 지나쳐 제 갈 길을 간다.
길가의 쓰레기통을 뒤져 원래 뭐였는지도 알 수 없는 유기물을 뱃속으로 들여보낸다. 혀에서 맛이 느껴지는 것이 괴로워 최대한 입에 침을 모은 상태에서 한 번에 알약 먹듯이 목으로 넘기는 것이다.
이것은 꿈이다. 이상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명징하게 깨닫고 있다. 꿈에서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면 꿈의 법칙과 이미지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이 꿈은 무거운 사슬처럼 제한적인 법칙에 고착되어 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뇌리에 또렷하다. 나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으며,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 어서 이 꿈에서 깨고 싶다.
 
3.
“또 그 꿈이야?”
샤단이 수건으로 내 이마에서 식은땀을 닦아 주면서 묻는다. 그러고 나서 나를 껴안았다. 서로의 맨살이 닿으면서 뜨겁게 느껴질 정도의 체온이 전달된다. 안온함이 몸을 나른하게 하였다. 이렇게 영원히 있고 싶었다.
샤단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곁에서 속삭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뭉툭하고 희미한 잡음이 섞여있는 것 같은 소리.
아마 내 품에 얼굴을 묻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자기는 멀리 떠나지만 마음만은 이어져 있어. 내 마음도 무바시르의 마음도 자기랑 함께 있을 거야. 빨리 돌아와 줘야 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샤단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4.
나는 다시 꿈속의 콘크리트 정원을 배회한다. 일전에 보고 악몽을 꾸었던 샤이닝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국립 문학원에서 제휴한 교사연수를 갔을 때 장르소설을 통한 문화부흥의 주요한 예 중 하나로서 참가자들끼리 강당에 모여서 본 기억이 난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스탠리 큐브릭이 영상화한 것이었는데, 마지막에 두 명의 등장인물이 눈 덮인 미로를 헤매고 다니는 장면이 나왔다. 어째 꿈속의 내가 그와 비슷한 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때처럼 쓰레기통을 통해 내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허기를 채운다. 심리적 허기라는 개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사람은 신체적 포만감과 삶에 대한 만족감을 동시에 느껴야 비로소 허기라는 감각이 충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지금의 내 삶이 불만족스럽지 않다. 샤단과 무바시르, 파리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가 없으니까. 가끔 모험에 대한 유아적인 꿈을 꿀 때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꿈속에 투영될 만큼 강력한 갈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슨 문제일까. 어렴풋이 떠오를 듯도 하지만 어쩐지 의식의 가장 밑바닥에서 다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 있다. 기억해야 할까. 하지만 왜인지 두렵다.
큰 길은 비교적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주워 먹을 것도 여기 저기 있었다. 이곳은 피부색이 다른 인종들이 섞여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 터 같았다. 몇 걸음 걸을 때마다 사위에서 새로운 언어가 튀어나온다. 모두가 근심어린 얼굴과 더러운 행색을 하고 추위를 피하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 얘기하고 있다.
“저거, 노제비 아녀?”
누군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에 얼마나 머물렀을까, 비루한 면면을 하고 있는 군중 사이에서 추격자의 모습이 보였다. 두 명이다. 하나는 덩치가 크고 암회색 양복을 입고 있다. 인상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오른쪽 눈이 의안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른 체격에 검은 양복. 땡땡이 넥타이가 두드러져 보인다.
그들이 그 순간 나를 보았다. 거의 반사적으로 두려움이 엄습했다. 화급하게 가장 가까운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시야가 벽에 가려지기 직전 추격자들이 힘없이 낭창거리는 사람들을 갈대 치우듯이 밀치며 곧장 나에게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기운이 없어 빠르게 도망칠 수 없었기에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최대한 방향을 자주 틀면서 따돌리려 하였다. 번화한 큰길에서 벗어나 건물더미의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수록 더욱더 비참한 삶의 편린이 펼쳐졌다. 어떤 구역에서는 각기 나름의 이유로 고통 받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기질적인 얼굴을 하고는 마치 건물과 동화되기를 원하는 듯이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열린 공간이 나타났다 싶었는데 누군가가 오른쪽에서 내 옷깃을 낚아챈다. 돌아보니 한쪽 눈이 완전히 돌아가고 턱에 수염이 온통 덥수룩한 남자였다. 남자는 내 얼굴 가까이 자기 얼굴을 들이민 다음 알 수 없는 언어로 뭐라고 지껄인다. 하는 꼴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몸에 기운이 없어 쉽지 않았다. 눈알을 바쁘게 굴려보았다. 이 남자 말고도 영혼이 없는 표정을 한 다양한 인종의 남자들이 공터 여기저기 고사한 나무처럼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야, 너 어디서 왔어?”
그들 무리 사이에서 누군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 말을 걸어왔다. 그 말이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맞췄다. 이곳의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행색을 한 특징 없는 남자가 헤진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 있었다.
“너 서울말 알아들어? 어느 나라 사람이야?”
나는 이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 내 모국어와 닮은 점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 언어체계를 낯설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저간의 사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꿈의 논리가 비약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만연해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아마 이 남자가 사용하는 언어는 진짜 ‘서울말’이 아닐 것이다.
서울에 대해서는 들어본 기억이 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연계해서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독재국가는 낙후된 국민복지와, 북극의 제트기류가 유인이 된 기상이변이 복합적인 요인으로 작용함으로서 현재 몰락한 상태이며, 중국과 미국이 영토분쟁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들었다.
서울말을 한다는 남자는 길게 자란 내 머리를 올리고 내 얼굴을 확인했다.
“이란곈가?”
남자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는 페르시아어로 다시 말을 걸었다.
“페르시아어는 알아들어? 난 조지아에서 왔어. 너 어느 나라에서 왔어?”
페르시아어는 말할 수 있었다. 모국의 공용어는 아니었지만, 나라 이름 자체가 페르시아어로 지어졌고, 샤단이 페르시아어를 하기 때문이다.
“타프트압카스트”
남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은근히 경계하던 태도가 빠르게 사라졌다.
남자는 친근감을 표시하려는 듯이 미소 지으며 오른손을 내 어깨에 얹고 가볍게 두드렸다.
“불쌍한 새끼. 그래, 약이라도 해야지. 한 번 빠는 데 천원, 열 개 묶음으로 사면 천원 빼 줄게.”
남자는 왼손으로 돈을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난, 돈 없어. 약하려고 온 거 아냐.”
“약을 안 빨아? 빨 거 같이 생겨 놓고. 여긴 왜 왔어, 그럼?”
“그냥 지나가던 길이야. 놔 줘.”
남자는 어깨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뚱한 표정으로 한 동안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안 할 거면 꺼져.”
남자는 내 뒤편을 향해 낯선 언어로 뭐라 말했다. 그러자 나를 붙잡고 있던 사람이 내 목덜미를 쥐고 있던 손을 풀고는, 내 등을 거칠게 밀어 들어왔던 길로 다시 향하게 했다. 뒤를 돌아 일별하니 이 장소가 막힌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의 길만이 이 공터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조심스레 모퉁이를 돌았다. 외길의 두 번째 모퉁이를 돌아 갈림길을 마주했을 때 정면에서 추격자들이 걸어오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덩치가 작은 쪽이 나를 보았다. 나에게 시선을 고정해두고 덩치 큰 쪽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난 곧바로 뒤로 돌아 외길을 거슬러갔다. 첫 번째 모퉁이를 돌았을 때 공터에서 나온 또 다른 남자 하나를 마주쳤다. 그가 나를 보더니 두 손으로 내 위팔을 붙잡고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내 얼굴에 고정하기 위해 고개를 계속해서 갸웃거렸다.
“돈 좀 있어? 돈이 떨어졌어. 난 카라치에서 왔어. 타프트압카스트도 여러 번 가봤어.”
우르두어였다. 내가 발버둥치자 남자는 나를 놓고는 손을 내밀었다.
“돈 좀 줘. 나중에 갚을게.”
“줄 테니까 따라와.”
이렇게 말하고 다시 공터로 뛰기 시작했다. 남자가 내 뒤를 따라왔다.
공터에 헐떡거리며 도착하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내 뒤를 따라오던 남자가 외쳤다.
“얘 돈 있대. 얘가 내 돈 줄 거야.”
뒤를 보니 추격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몸이라도 숨기기 위해 공터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돈을 달라던 남자가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니며 보챘다.
“이따 줄게. 저리가 제발.”
“나 손 떨려. 바로 해야 돼.”
공터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여기 방금 들어온 새끼 못 봤어?”
‘서울말’이었다.
“돈 줘, 돈.”
돌이라도 던져 쫓아내려고 주위를 살폈다. 그때 탈출로가 눈에 들어왔다. 건물의 그늘 속에 숨겨져 있어 입구에서는 검게만 보였던 부분에 아주 좁은 길이 있었다. 사실 길로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건물 두 채 사이에 난 틈이라고 부르는 게 정확할 정도로 비좁은 경로였다. 하지만 지체할 수 없었다. 네 발로 기어가서 오른쪽 몸부터 우겨넣었다. 나쁘지 않았다. 꿈속에서 내 몸은 극도로 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가 벽에 걸렸다.
“어디가! 야! 돈 준다고 했잖아!”
남자가 내 옷의 팔 부분을 잡고 늘어졌다. 그 순간 공터가 빛으로 밝아졌다.
“저기 있다!”
공터 입구 쪽에 떠 있는 광원으로부터 추격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을 내는 기기를 손에 든 추격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눈이 부신 가운데 유난히 두드러지는 땡땡이 넥타이를 볼 수 있었다.
“저리 비켜!”
추격자가 나를 붙잡고 있던 남자를 거칠게 밀쳤다. 남자가 내 옷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넘어졌다.
“도망 그만 가고, 이리 나와.”
난 온 힘을 다해 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코끝이 휘다 결국 부러졌다. 고통으로 반쯤은 비명이라 할 수 있는 신음을 질렀지만, 발을 바쁘게 움직여 순식간에 좁은 틈의 한복판으로 끼어들어갔다.
추격자들이 욕설을 날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지만 왼쪽 뺨의 피부에 닿는 기류가 세차게 바뀌는 것으로 추격자 중 하나가 틈에 팔을 넣고 휘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될 거 아냐!”
통증과는 별개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꿈속에서 사는 인물이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꼴이 참으로 우스웠기 때문이다. 이들이 돈을 가진다고 해서 파코라를 사 먹을 일도 없을 텐데 말이다.
추격자들은 계속해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 꿈속에는 내재된 법칙이 있었고, 그 법칙 때문에 콘크리트를 통과할 수 없는 그네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욕설과 저주밖에 없었다.
추격자들이 따라야 하는 법칙에 채권추심법도 포함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웃음은 끊임없이 이어져서 발작이라도 터진 것처럼 주체하기 힘들게 되었다. 한바탕 웃는 와중에도 어쩐지 건조하고, 냉한 웃음이라 생각했다.
추격자가 던진 빛에 의해 만들어져 벽면을 기어 다니는 명암의 농밀함이 너무도 생생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코의 통증도, 피부에 와 닿는 한기도, 이곳에서 나와 접촉했던 인간들의 체취, 감촉, 반응도. 너무나 생생한, 그래서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독특한 꿈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답은 존재한다. 언젠가 자각몽이라는 개념에 들어본 적이 있다. 꿈속에서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는데, 인지기능이 높은 사람일수록 자각몽을 꿀 확률이 높다고 하였다. 꿈을 꾸는 도중에는 모든 것이 생생하고 진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분명 현실과는 어긋나있는 부분이 있고, 인지기능이 발달된 사람일수록 그 허구의 틈을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자각몽을 꾸기 용이하다는 말이었다.
현실의 나는 타프트압카스트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있다. 내가 이리도 춥고 외롭고 연고 없는 곳에서 홀로 분투하고 있다는 것, 이게 꿈을 꿈으로서 지각하게 하는 가장 큰 ‘틈’이다. 그것이 지금 여기가 꿈의 세계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인 것이다. 이런 꿈 따위에 휘둘려서는 유익한 결실이라고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이건 악몽일 뿐이다.
불안감이 느껴졌다. 좁은 틈에 갇혀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 기억나려 했으나 정신을 집중해 억눌렀다. 악몽과 공포에 먹혀버리는 것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분기점 중 가장 최악이었다.
겨우겨우 건물의 틈을 벗어났다. 혹여 추격자들이 쫓아올까 거기서도 갈림길을 몇 번이나 지나치며 달아났다. 배가 고팠지만 큰 거리로 나가면 분명 추격자들과 마주칠 공산이 커질 것이다. 몸에 힘이 없었다. 마치 포우의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한참 동안 관 안에 신경이 곤두선 채로 들어가 있던 탓에 기운이 죄다 빠져버린 것 같았다.
녹두로 만든 걸쭉하고 따뜻한 달 한 그릇이 그리웠다.
난 길거리에 쭈그려 앉았다. 어서 꿈에서 깨고 싶다. 샤단과 무바시르, 파리하가 보고 싶다.
 
5.
눈을 떴을 때는 정원의 그늘이었다. 티크의 녹음이 습한 바람을 받으며 너울거렸다. 이곳에서 조금만 가면 바다가 펼쳐져 있다. 해안지방은 내륙에 비해 여름의 기온은 낮았지만 언제나 모든 곳에 습한 기운이 서려있다. 그럼에도 비는, 이제는 자주 오지 않는다.
 
6.
“라드하?”
샤단이 나를 깨웠다. 난 정원이 아닌 방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방금 그건 꿈속의 꿈이었던 것일까?
방은 어두웠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무와 같은 흑암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더스 강을 연중 사람이 걸어서 건널 수 있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입니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주파수를 잘못 잡아 백색소음이 많이 섞인 광석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낡고 멀게 느껴지는 소리였다. 일전에 샤단이 영문 모를 소리를 했을 때와 같았다.
‘운하의 물을 사이에 둔 분쟁이 펀잡에서 시작되어 파키스탄 전체로 번진 것도 오래 전 일이죠.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여름의 몬순을 더 이상 비와 연관시키지 않았습니다.’
“무슨 소리야? 뭐 틀었어?”
“응?”
내가 묻자 샤단이 스탠드를 켰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샤단이 예의 푸른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난 화급히 손을 뻗어 샤단의 뺨을 만졌다. 분명 진짜처럼 느껴졌다. 질감, 밀도 그 모든 것이.
“왜 그래?”
샤단이 자기 뺨에 놓인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치면서 물어왔다. 당연하지. 샤단은 진짜니까.
“우리 집에 물 많지?”
샤단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갑자기.”
샤단은 침대에서 일어서더니 나이트가운을 챙겨 입고 방 밖으로 나갔다.
‘소란스러운 세계정세에 편승하여 극단화된 이슬람 근본주의가 파키스탄 정부를 전복시켰고, 핵무기를 손에 넣었습니다.’
“누구야?”
하고 불러왔지만, 복도의 어둠 속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방의 옷장을 열어보았다. 라디오를 든 부기맨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이 이슬람국가, 서방국가, 인도를 향해 곧 선전포고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역병처럼 번져갔습니다.’
침대 밑에도,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수상한 사람이나 기계 같은 건 없었다.
‘이곳, 타프트압카스트에 갇힌 우리는 우리 머리 위에서 커져가는 광기를 아연히 바라보며 두려워할 뿐이었습니다.’
“왜 그래, 대체?”
샤단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문간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는 물이 든 컵이 들려 있다.
“무라바트는 잘 있어?”
“자고 있지. 그런데 이러다 깨겠어.”
‘그러나 냉전 시대에 소련과 친하게 지내던 인도 덕분에 우리의 우방이 된 미국이 있었습니다.’
방 한가운데 서서 방의 모든 곳을 샅샅이 일별했으나 수상한 물체 따위는 찾을 수 없었다.
‘그네들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일어난 소요의 틈을 치고 들어갈 궁리를 하느라 바빠 보였지만 그만큼 아라비아해의 통제권에도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안 자? 내일 아침부터 수업 있잖아.”
나는 문간으로 가서 샤단을 껴안고, 불길하게 펼쳐진 복도의 어둠을 넘겨다봤다.
샤단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저기, 나 지금 좀 불안하거든? 무슨 일인지 얘기는 좀 해줄래?”
‘펀잡족이 중심이 된 파키스탄 망명정부가 미국의 중재 하에 우리 국토 내에 세워졌습니다. 미군은 국경 방위를 지원하기 위해 주둔군을 파견했죠.’
“이 집에 누가 있는 것 같아.”
“응?”
샤단이 울먹거렸다.
‘우두머리가 몇 차례 바뀌고 노선을 크게 전환한 아프간의 극단주의자들은 파키스탄의 극단주의자들이 보이는 지나친 호전성을 조율하려하였습니다. 그렇게 균형이 맞춰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소리 들려?”
“아니, 무슨 소리. 왜 그래 진짜?”
‘모두에게 힘든 시기입니다. 그럼에도 해수담수화 장치가 곳곳에 지어졌고, 물통 속에서 흔들리는 물까지 동원해 전력을 수확하고 있습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 같은데. 잘 모르겠어.”
‘우리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려선 안 됩니다.’
나와 샤단이 소란스럽게 굴자 일층에서 자고 있던 파리하가 계단을 올라왔다. 파리하는 우리 침실 안을 향해 가볍게 짖고는 나와 샤단의 발목에 몸을 비비며 진정시키려 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파리하, 파리하.”
난 무릎을 꿇고 파리하의 따뜻한 몸을 껴안았다. 사람에게 안기는데 익숙한 파리하는 저항 없이 내가 안는 대로 얌전히 몸을 맡겼다.
‘반면, 상류층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다이달로스의 미궁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파리하의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둔중하고, 어쩐지 의지가 되는, 느긋한 맥동이었다.
‘간혹 이러한 시태에 저항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모두들 정부 전복을 시도하는 불온세력이라는 꼬리표만 달린 채 끌려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자기, 잠깐 일어나 봐.”
샤단이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일으켜 세웠다.
“아까 그거 무슨 소리야. 우리 도망쳐야 돼? 무바시르 깨워야 돼?”
‘더 이상 이 나라에서 새로운 세대는 태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남은 자들만이 영락한 터전에서 서서히 개구리처럼 삶아져가는 것입니다.’
“이 집에 이상한 게 있어. 일단 바깥으로 나가자.”
우리 둘은 복도를 지나 무바시르의 방으로 갔다. 천사 같은 무바시르. 어릴 때부터 얌전한 아이라 나와 샤단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었다. 아직 이불을 덮고 세상모르고 새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저는 타프트압카스트 북부에 있는 커피 농장의 일꾼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고단한 생활이었지만, 내 어머니는 나에게 많은 책을 읽도록 권유하셨죠. 그 덕분에 이렇게 교단에 설 수 있었습니다. 약 다섯 세기 전에 베이컨이 말했듯이, 아는 것은 힘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그 두 단어가 새어나왔다. 마치 매크로가 짜여 있는 자동인형같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나 자신도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곧장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 두 단어가 내 정신에 가한 충격은 심대했다.
“라드하?”
샤단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난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크게 비명을 질렀다. 아니, 비명이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질러져 나왔다. 내 비명소리는 내 귀에 들리지 않았으나 무바시르가 놀라 우는 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머리가 너무나 아팠다. 사위의 모든 것이 검게 변했다. 바닥이 없어지고, 난 어딘가 깊은 곳으로 끌려들어갔다.
 
7.
난 고향에 계시던 부모님이 반정부 세력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총살되었다는 전보를 받았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우리 부모님은 그런 정치적인 문제와는 인연이 없는 분들이었다. 항상 죽은 듯이 살라고 나에게 거듭 당부하던 것이 기억난다. 아마 나를 자식으로 두고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정보부의 그물망에 걸려든 것이리라.
무바시르가 움막 가운데 앉아 울고 있었다. 샤단은 한 팔로 머리를 감싸 안은 채 그늘진 곳의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오랫동안 신선한 물을 마시지 못해 피로한 상태였다. 파르하는 이제 여기에 없다. 우리 국가의 정부가 나를 정치범으로 지목한 후 안락한 생활과는 고별할 수밖에 없었다. 난 더 이상 교단에 서지 못한다. 이제는 그 사실이 기억난다.
바깥에서는 소요가 일어나고 있다. 정치경찰과 정보부가 반정부 시위에 연루된 지식인, 고위층, 재력가, 종교지도자 등을 지속적으로 살해해왔다. 대개 자살로 위장되거나 진범이 밝혀지더라도 꼬리자르기를 통해 정부와의 관련성을 위장하고 있어 아직 법리적으로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었지만 누구나 진실을 짐작할 수 있는, 그러한 상황이었다.
내가 교단에 서 있을 적에 정부가 나에게 요구한 정체성은, 교육 받지 않은 새로운 세대를 계몽하는 교육자라기보다는 암기에 능하고 권위에 순응적인 부품을 감별하는 감별사이자, 체제선전을 아웃소싱 받은 살아있는 스피커에 가까웠다.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핵심 멤버들을 상실해 존속여부 자체가 명재경각에 달린 시위대의 머리 위에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아직 경찰과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정부가 군대까지 동원할 것이라는 이야기마저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문학수업에서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이야기하며 북쪽의 극단주의와 접해 있는 타프트압카스트에 무의식적으로 만연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여성에 대한 차별과 이러한 차별의 부당함에 대한 학생들의 감수성을 키워주고 싶었으나 정부의 교육지침은 이 소설을 극단주의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프로파간다로 활용하라는 것이었다.
총성이 울렸다. 무바시르가 까무러칠 정도로 울어대며 샤단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쏜 거야?”
샤단이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곧이어 비명과 총성이 사위를 가득 채웠다. 샤단은 무바시르를 껴안으며 오른손의 손톱을 신경질적으로 씹었다.
“나쁜 놈들.”
정부가 이상으로 두고 있는 길이 잘못되었다 생각하여 소극적이지만 나름대로 저항했던 것인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알량한 내 신념을 견지하기 위해 애꿎은 가족까지 끌어들인 것 같아 마음의 부채감이 심하다.
“나가자. 도망치자.”
무바시르를 앞으로 안고, 샤단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움막 바깥으로 나오자 도망쳐 나온 시위대 일부가 엎어지고 구르며 골목의 사이사이로 사라지는 광경이 보였다. 몇몇은 총탄에 관통 당했는지 출혈이 심해 보였다.
“대한민국으로 가자, 라드하.”
샤단이 말했다. 도심 쪽에서 연발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울려왔다. 그 행위의 무게감에 비하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가볍고 경쾌하게 느껴지는 소리였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 타프트압카스트와 같은 반도국가인 대한민국은 현재 인구감소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내수경제를 떠받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민자들을 흡수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중이었다. 저출산 고령화 대책으로 중국의 한국계 소수민족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래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사업이었고, 이후 이민을 받는 대상 국가의 범위를 점차 넓히는 대신 이민자 개개인에 대한 기준을 보다 촘촘히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남아시아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그 기류에 편승할 여지가 있었다.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골목을 통해 이동하는 도중에 AK-47로 무장한 시위대 무리가 도심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꽤 큰 규모였다. 저들이 실제로 행동을 개시한다면, 오늘은 타프트압카스트의 역사 교과서에 내전 혹은 폭동 혹은 유혈혁명이 발발한 날로 기록될 것이다.
브로커의 설명에 따르면 이민 사업을 신청해 입국한 경우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밟는다고 하였다. 먼저 종교적 극단주의나 테러리즘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신변조사나 면담 등을 통해 증명한다. 그 다음으로 기초적인 지적 능력과 심리검사를 통과한 후 노동할 수 있는 신체 상태임이 확인되면, 단기 사회화 교육기관과 단기 언어 교습기관에 입소하게 된다. 이 교육과정을 수료하면 임대주택을 배정받고 임시로 일하고 소비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도심 쪽에서 포성이 울렸다. 놀라 돌아보니 건물 위로 포연과 무너진 건물이 일으킨 흙먼지가 뿌옇게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와 샤단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업무성과를 인정받고 고위층과 유창하게 소통할 수 있는 한국어능력을 습득하면 승진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비로소 영주권을 얻고 최대 세 명까지 가족초청이민을 통해 가족이라는 위치로 한국에 정착시킬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샤단이 비명을 지르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뒤를 돌아보았다. 방독면을 쓴 국방군이었다. 독을 가득 품은 검은 연기를 뒤집어쓰고, 묵시록의 네 기사들이 여러 명으로 증식이라도 한 것 같은 기세로 쇄도해오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내 원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던 장면이었다.
샤단을 잡아끌며 뛰었다. 그러나 쫒아오는 쪽이 너무나 빨랐다. 우리 둘 다 바닥에 주저앉아 담장에 바짝 붙었다. 무바시르를 가장 아래에 두고 샤단이 몸으로 감쌌다. 나는 그 위에 엎어져 샤단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추격자들은 실체 없는 유령처럼 우리를 지나쳐갔다. 대신 뒤따라온 검은 연기가 우리를 감쌌다. 그 연기는 몹시 차가웠다. 연기는 마치 차게 식은 냉기처럼, 혹은 깊은 바닷물처럼 내 몸을 짓눌렀다.
 
8.
“저기요. 일어나 보세요.”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빌었지만 말라버린 목에서 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상대는 완강했다.
한 순간 현실이 밀려들어왔다. 윙윙거리는 기계소리. 내가 그토록 내 의식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했던 실체였다. 이제는 그것이 내 바로 앞에 있다. 아무리 머리를 세차게 도리질해 봐도 떨쳐낼 수는 없었다.
난 눈을 떴다. 눈앞이 캄캄했다. 눈을 포함한 머리 윗부분 전체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기계를 벗고 싶다는 의미로서 약속된 신경 신호를 보내자 삽입형 BCI가 다관절 유압장치를 작동시켜 두개폐쇄형 HMD를 내 머리에서 벗겨냈다. 동시에 내 몸 전체를 구속하고 있던 제스쳐 기반 HID 또한 체표로부터 자동 탈락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디스플레이가 벗겨지고 나서야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옇다. 눈을 비비자 형체만이 겨우 보였던 인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라드하씨 맞죠? 아버지 이름은 파야즈시고. 타프트압카스트에서 3년 전에 오셨고. 이 서류에는 한국어를 일급 레벨로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네요.”
동양인의 얼굴을 한 남자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어는 한국어였다.
난 상체를 일으켰다. 고작 이 정도의 작은 움직임에도 저혈압이 몰려왔다. 한동안 이마를 부여잡고 현기증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회복한 이후에 손을 치우고 얼굴을 들자 남자는 자기 눈앞에 들고 있는 서류와 내 얼굴을 교대로 보는 행동을 몇 번 반복하더니 얼굴을 한 차례 찌푸렸다.
“사진이랑은 많이 다르시네요. 그, 라드하씨 맞죠? 일단은 주소가 여기로 되어 있네요.”
남자는 대답을 기다리려는 듯 침묵했다. 하지만 난 말할 기력조차 없었다. 대신 고개만 돌려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남자는 나에게서 언어적인 반응을 얻어내는 것을 얼마 안 가 포기했다.
“전력공사에서 나왔습니다. 전기료 미납 때문에요. 차단 전에 고지 의무가 있는데 전화가 끊겨있다고 나와서요.”
남자는 들고 있는 서류에 무언가를 기입했다.
“일전에 다른 검침원이 몇 차례 방문했다가 결국은 서면으로 여러 번 알려드린 걸로 아는데, 주택용 전기는 누진세가 적용돼서 쓸수록 요금이 많이 나갑니다. 일반용 전기랑은 다른 거예요. 고객님은 지금 4개월 정도 가정용 최대누진을 초과해서 전기를 쓰시고 계시고요, 그 이유가 저 가상현실 기기… 모델명이…, HDS-3920 때문이라는 것도 확인하셨었습니다.”
가상이라는 단어에 이어지는 확인이라는 단어, 정확히는 두 단어의 조합이 낙인처럼 가슴을 태웠다.
“처음 2개월은 요금이 제 때 납입되었는데요, 최근 2개월은 계속 체납하고 계십니다.”
그래, 이제는 빌어먹을 모든 것이 기억났다.
“그, 두 개월 치 청구서가 아직 우편함에 들어있더라고요. 만약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청구서를 수령 못하신 것이라면 납기일을 한 번 재조정해드릴 수 있습니다. 일단 지금 고지 드렸으니까, 일주일 지나고 오늘까지 요금을 납부해 주셔야 합니다.”
눈에 다시금 눈물이 맺혔다. 맺힌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듯이 맺음말을 유난히 빠르게 했다.
“만약 그때까지 요금 납부가 안 되면 납기일 다음날 자정부터 단전이 됩니다. 단전이라는 게 전기가 끊긴다는 겁니다. 오늘 고지 드렸고요, 질문 사항 있으시면 여기 제 명함…”
난 남자에게 뛰어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머리를 새하얗게 불태우고 있었다. 남자는 외마디소리를 지르면서 내 체중 때문에 뒤로 넘어졌지만 곧 반사적으로 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오랫동안 불완전기아 상태에서 누워만 지낸 나에게는 체력이 없었다. 힘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 남자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후두부를 콘크리트 바닥에 계속해서 찧었다. 남자가 내 배에 발길질을 하자 난 솜인형처럼 나가 떨어져 기기 본체에 등을 부딪쳤다.
남자는 일어나 반격하지 않았다. 대신 시뻘게진 얼굴로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서 꿈틀거리기만 했다. 고통스러운 신음, 잔뜩 일그러진 얼굴, 입가에 문 거품이 지금 남자의 상태를 표현하는 가장 두드러진 편린들이었다.
“구급차…, 너무 아파…”
기기정비에 사용하는 렌치가 손에 닿는 곳에 있었다. 머릿속이 멍하게 느껴지는 상태에서 렌치를 손에 쥐고, 바닥에서 고통 받는 남자에게로 다가가 머리를 내려쳤다.
“샤단은…”
머리를 맞은 남자가 쥐며느리를 건드렸을 때처럼 움츠러들었다.
“무바시르는…”
난 거듭해서 렌치를 남자의 머리에 내리꽂았다.
“파리하는…”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제는 원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살점이나 뼛조각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상태인 것 같았다.
“죽지 않았어.”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하다 결국 기운이 부쳐 렌치를 손에서 떨어뜨렸다. 그리고 몸에 힘이 풀려 이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남자의 머리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 상태로 끊임없이 울었다.
 
9.
사로잡혀 있었을 당시에는 근원을 찾을 수 없었던 분노가 이제는 지나갔다. 이제는 한 숨을 고르고 분노의 원천에 대해 찬찬히 관조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죄책감이었다.
분노는 이 나라에 발을 디딘 이후 꾸준히 쌓여 온 것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 나라가 나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어떤 생각으로 ‘취급’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엔 혼란스러웠지만 곧 이해했다. 펀자브인을 유전적 뿌리로 두고 있는 나의 생김새는 사회 이면에 비공식적으로 존재하는 인종적, 계급적 카스트의 최하층을 구성하고 있었다.
카스트의 최하층에는 다른 인종도 있었고, 심지어는 한국인도 있었다. 주로 나이가 많고 가난하며 병든 한국인이었다. 그네들은 오래 전 부양율이 위험 수치로 치솟은 후부터 꾸준히 자살로 세상을 등졌지만 아직도 많은 수가 현실에 남아있었다.
대한민국이 유엔 인권위로부터 지속적으로 경고를 받아온 나라라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는 2014년 타임지에도 기사가 실린 유구한 전통이었다. 나름대로 짬을 내서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소규모로 노동조합을 만들어 대응하려는 노력도 해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차가웠다.
3년 동안은 안 좋은 기억만 가득하다. 이젠 고용허가제라는 단어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 욕설과 구타, 수당 없는 초과근무에 혹사당하면서도 틈틈이 한국어를 배웠지만 승진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런 모든 것들이 남자를 죽일 이유는 되지 않는다. 난 그저 스스로의 분노를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장 마지막에 꿈의 끝자락으로부터 나를 현실로 끌어내린 데서 촉발된 단발적인 분노를.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그래서 자수하자고 결심했다.
 
“여긴 왜 이렇게 복잡해.”
추격자의 목소리였다. 정확히는 채권추심인의 목소리다. 내가 빌린 사채 빚을 독촉하러 오는 것이라는 사실도 이제는 명확히 떠올릴 수 있다.
“확실히 알아본 거 맞아?”
이제는 도저히 무언가를 할 기력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겨우 기기 곁으로 기어가 웅웅거리는 소음에 몸을 얹는 것뿐이었다. 대신 저들이 나와 남자를 발견하고 경찰을 불러줄 것이다.
“맞아. 이후에 이사했다나봐. 일도 안 나가니까 이 근처엔 아는 사람이 없었겠지.”
고생은 극심했지만, 그래도 스스로 대견하다고 생각할 만큼의 금욕적인 생활로 돈은 꽤 모았었다. 이 나라는 돈이 있다면 꽤 괜찮은 나라였다.
“이런데서 살면서 돈은 왜 그렇게 많이 빌려갔데?”
그 돈을 환전해 들고 샤단과 무바시르의 품에 선물을 안겨주는 꿈을 얼마나 필사적으로 좇았는가. 고통에서 도망치기 위해 언제나 그 이미지를 눈앞에 떠올렸다.
“몰라. 이사 가기 전에는 나름 멀쩡한 놈이었다니까 빌려줬겠지.”
하지만 그 돈은 결국 이 가상현실 기기를 사는데 통째로 들어갔다. 처음 기기를 사고 시승한 후 크게 놀랐다. 낮은 곳에 고여 있기만 했던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곳에서 과학은 어마어마하게 발전해 있었다.
“뭐 하려했는지 모르겠지만 약이라도 하는 거 아닐까?”
돈을 몽땅 쏟아 넣어 최고급 옵션은 가능한 모두 장착했다. 복셀을 이용한 지형효과니 바이노럴 효과를 사용한 스테레오 음향이니…
“걔 거기 출신이잖아.”
기기 매뉴얼에는 두개 내에 전극을 삽입하는 침습형으로 미세한 주파수까지 잡아내며, 가용한 뇌파를 전부 사용함으로서 보다 정밀하고 사용자 친화적인 반응 알고리즘을 구현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기계가 파편화된 내 정신을 읽음으로서, 내가 강하게 믿고 원망하는 방향으로 반응하는 인물들로 채워진 가짜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타프트압카스트.”
본의 아니게 꾸준히 훈련해 오던 것이라 커스터마이징은 쉬웠다. 사진 속의 샤단과 무바시르, 파리하를 기기 속에서 처음 구현하여 만났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진짜?”
원자로 구성된 현실보다는 폴리곤으로 구성된 내 가족이 나에게는 더 진실 같았다. 현실을 꿈으로, 가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집중하고 훈련한 끝에 결국은 이상향에 가 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 얼마 전에 쓰나미로 물에 잠긴 데 아냐?”
“여기다.”
문이 열렸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둘은 내 곁으로 다가와 기계를 보고는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또 얼마간 침묵.
“이런 걸 샀으니까 돈이 필요했구먼.”
“이거 꽤 좋은 거 같은데. 돈 말고 이걸로 받아도 되겠는 걸? 어차피 저 새끼 돈 못 갚을 것 같은데.”
“야, 가져가자. 그 전에 알지?”
호리호리한 쪽은 휴대폰을 들고 어딘가로 전화했다. 덩치 큰 쪽은 나에게로 다가와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법정이율을 한참 초과한 돈은 합법적으로 받아낼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상태라면 저 기기가 어떤 맥락에서 누구에게로 흘러들어갔는지를 들킬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네가 저지른 일 돌려받는 거니까 원망하지 말라고.”
별다른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곧 의식이 멀어져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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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최근에 쓴 글을 한 번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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