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후보작 무림제일고

2016.01.31 23:2501.31

무림제일고


clancy


하늘은 푸르고 높아 소년들의 맘을 들뜨게 하고 마구간의 말들은 토실토실 살을 찌우는 계절이 익어가고 있었다. 2학기도 중반을 넘어서자 1학년 교실안도 한껏 들뜨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선택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아, 뭐하냐?”


책상에 앉아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선우현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 것은 같은 반의 진강이었다. 선우현이 읽던 책을 살피던 그가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야, 갑자기 웬 철수철피(鐵手鐵皮). 설마 외경과 가려고?”


동기의 질문에 겸연쩍은 듯 인중을 매만지며 현은 책을 덮어버린다.


“응, 그냥 심심해서 읽어보는 거야.”


“오올, 역시 우등생은 다르네. 하긴 내경과 선배들 중에도 외공을 익히는 사람도 더러 있더라. 뭐니 뭐니 해도 요즘 대세는 짐승남이라나. 흐흐흐.”


음흉한 표정의 진강이 현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그의 말처럼 내경과와 외경과로의 진로 선택을 앞둔 1학년 2학기였다. 이 시점에 지금껏 수행한 과목이 아닌 다른 전공의 책을 들춰보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었다. 다음해인 2학년 1학기 까지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두어 전과를 허락하기도 한다는 여타 허접한 학교들과는 달리 이들이 다니는 무제고(武第高)는 한번 정해진 전공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없다고 봐야 한다. 명실공이 전국 최고 진학률을 자랑하는 명문인 만큼 경쟁 또한 치열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 같은 녀석이 외경과 간다고 강짜부리면 재밌긴 하겠다.”


진강은 그런 경우 벌어질 사태를 상상해 보는지 장난스런 얼굴로 키득거리며 말했다. 중학교부터 시작하여 국내 최고의 명문인 무제고에 진학한 지금까지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은 선우현 같은 인재가 정할 선택지는 이미 하나의 길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국민의 정서함양과 건강한 신체의 단련이라는 목표 하에 재정된 국민수련헌장에서 의무교육과정으로 보장한 중등학교 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일반 지식과 함께 무공의 기초, 그리고 내공을 기르기 위한 호흡법을 위주로 하는 기본 수련법을 배운다. 이후 학생들의 고교진학 시점부터는 개인의 역량에 따른 차별적 교과과정의 선택이 이루어진다. 중등학교만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일반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필부들이 있다면 그 위로 병장기의 운용과 진법, 지휘법을 중점으로 익혀 군경의 중간간부로 성장하는 군관학교 진학자들이 있다. 그리고 개중 보다 뛰어난 자질과 두뇌로 선발과정을 뚫은 이들이 진학하는 곳이 바로 고등학교였다. 그동안 착실히 쌓아온 자신들의 공력을 운용하는 방법과 함께 전공별로 특화된 무공을 익혀 국가인증 무예자격을 획득하고 더 나아가 대학진학을 하는 것이 고등교육의 목표였다.


“너는 좋겠다. 외경과로 빠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강진은 책상에 걸터앉더니 궁둥이를 뒤로 빼고 가부좌를 틀어 운기조식을 위한 기본자세를 취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내경과로 진학할 성적은 되면서 무슨 한숨이야.”


현은 그런 친구에게 면박을 주었다.


“아니라니까, 얘기 못 들었냐? 요 근래 내경과로 사람이 너무 몰려서 올해는 정원을 줄인다는 소문. 그렇게 되면 나 같은 어중이들은 간당간당 한단 말이야. 아오, 망할 행정부 놈들 무슨 교육 정책을 해마다 바꾸고 지랄이야.”

 

강진은 수초도 이어가질 못한 채 제 성을 못 이기고 가부좌를 풀며 언성을 높였다. 잠시나마 강진의 단전에 모였던 기운이 스르르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현은 자기 안에서 운용하던 기의 흐름을 마저 정리했다. 아무래도 고고히 내력을 다스리는 일은 미루고 친구의 수다에 응해줘야 할 분위기였던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너 정도면 분명 원하는 전공으로 갈 거야.”


“말은 쉽지. 너 같은 우등생은 모를 거다. 여기가 얼마나 박 터지는 경쟁인지.”


다시 한숨, 강진의 모습을 보며 현은 내심 따라서 긴 숨을 내쉬었다. 외공과 내공을 각각 주로 하는 외경과와 내경과를 선택하는 일은 그들에게 분명 중요한 일이었다. 그 선택이 이후의 평생을 좌우한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공과 외공은 그 수련과 운용, 그리고 극의의 다름만큼이나 전공 선택 후의 진로에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몸의 단련과 외경 즉, 엑소에너지를 수련하는 외공의 경우 수련자들의 건장한 체구에서 느껴지듯 강력한 육체의 힘과 체술 연마가 주가 된다. 때문에 주로 몸을 써야하는 직종들로 나아가는데 각 문파의 사범으로 가거나 군경의 고등간부로 성장하는 경우가 그나마 성공하는 케이스였다. 반면에 지적인 능력과 정신력의 수련에 집중함으로서 체내의 내경, 엔도우에너지를 수련하는 내경과 진학은 소위 엘리트 코스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9대 문파 산하의 대학 총장들, 현 정부의 장관 등 학계와 정재계의 요직들 대다수가 내경과 출신이란 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때문에 전공 선택의 시기가 되면 내경과로 몰리는 학생들의 경쟁이 치열해진다. 더군다나 그렇게 정해진 길에 따라 수련을 거쳐 대학과정까지 마칠 즈음에는 신체 자체가 각각의 수련법에 따라 환골하기 때문에 그때에 다시 타 전공을 수련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는 일이기에 흥미로 이론을 연구하거나 타 전공의 잡기술을 배우는 정도 이상 나아가는 이는 없었다. 때문에 외경의 상급 수련서인 철수철피를 들춰보는 선우현의 행동은 오해를 낳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뻘짓 그만하고 애들이랑 무도관에 가자. 전국대회 출전자 선발 결승전을 한다더라.”


“그게 오늘이었나?”


“그래, 관심 좀 가져라. 너도 결국엔 나가야 할 텐데.”


진강은 뚱한 태도로 일관하는 친구를 보며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면서 타박을 했다. 1년에 한 차례 10월에 열리는 전국학생무술대회는 모든 학생들의 로망이었다. 이름 그대로 전국에서 알아주는 고수들이 모여 서로의 기예를 겨루는 대회의 우승자에게는 상금과 대통령 표창, 더불어 서울대 특례입학의 기회까지 주어진다. 한 마디로 출세가도가 보장되는 것이다.


강진과 함께 무도관 내부로 들어선 선우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학교 내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무도관 건물 내부는 두 개의 연습장과 5개 국제규격 대련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교내에 큰 행사가 있을 적에는 경기장이 치워지고 강당으로도 쓰인다. 입학식 역시 이곳에서 이루어졌지만 이후 여름방학 무렵 우연한 사고로 내부수리를 하면서 전면적으로 리모델링을 한 덕분에 그들에겐 느낌이 많이 달랐다.

선우현 일행이 느지막이 들어섰을 적엔 이미 실내는 모여든 인파로 가득했다. 무제고 교직원과 학생은 물론이요 인근 학교의 학생과 교사들 그리고 정부기관과 기업 측에서 찾아온 스카우트까지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룬 것이다.


“대단하지 않냐! 이 열기, 땀 냄새 그리고 엄청나 기운들! 이거야 말로 사나이의 로망이지.”


흥분한 진강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경기장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경기장 안은 사람들이 뿜어내는 기운으로 들끓고 있었다. 아직 자신의 내력을 컨트롤하는 데 미숙한 사춘기 고교생들은 들뜬 마음에 조금씩 그 힘을 몸 밖으로 방출하고 있었고 미미하나마 새어나온 기운들이 합쳐져 커다란 흐름을 형성한 채 경기장 안을 떠도는 것이 느껴졌다. 선천적으로 기가 약하거나 수련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단지 그 흐름 속에 몸을 맡긴 채 서있는 것으로도 기절을 할 지경이었다.


“현아 저기 저 사람 보이냐? 스탠드 상석에 교감 선생님 옆자리 사람 말이야. 흑의 입은 아저씨. 삼룡전자 인재개발부 강 이사야. 전국대회에서 삼룡에 스카우트되면 초봉이 억에 가깝다더라. 요즘은 정계나 문파로 가는 거보다 삼룡이 더 인기잖아.”


그의 말에 선우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삼룡은 인간의 공력을 전기 에너지로 전환하는 ETE(Energy to Electricity) 기술을 세계 최초 개발함으로 거대하게 성장한 글로벌 기업이었다. 한국은 물론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삼룡의 ETE 특허가 쓰이지 않는 곳은 없었다. 휴대폰부터 전기 자동차까지 기존의 소모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기술은 무공해 친환경 기술로 지구를 살리고 있다는 평가를 얻으며 승승장구 중이었다.


“우리 사촌 형이 작년에 삼룡에 취업했거든. 외공 사업부 연구직으로. 첫 달에 바로 자차 구입하더라. 그것도 2인승 스포츠로. 고효율 전환 장치가 달려서 형의 외공만으로도 제로백이......”


강진의 삼룡 찬양은 이후로 한참을 이어졌다. 하지만 선우현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무도관 반대편에 마련된 대련장 양쪽 코너에서 결승 시합을 준비하는 두 인물이 그의 관심을 잡아끈다. 백의를 두르고 선 쪽은 여성이라 해도 믿을 만큼 호리한 체구에 장신의 사내였다. 뽀얀 피부에 짙은 눈썹, 수밀도를 연상시키는 도톰한 입술까지. 내공 중에서도 사내의 양기를 억누르는 무공인 환화심법을 연마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혈기 왕성한 사내들인지라 좀처럼 택하지 않는 수련법이지만 그만큼이나 빠른 공력의 증진과 태생적 희귀성으로 취업엔 보다 유리한 부류이기도 했다.

반면 반대편에 청색 도복을 입은 자는 정반대의 외형이었다. 우락부락하다 못해 거추장스러워 보일 정도의 근육을 갑옷처럼 두르고 봉두난발을 한 사내는 온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도드라질 정도로 선명한 피부색은 뭔가를 칠한 게 아닌 진신 본래의 빛이었다. 외경 중에서도 최고로 쳐주는 혈홍괴수를 수련한 자들의 몸에서 나타나는 홍화(紅化) 현상이다.

환화심법과 혈홍괴수, 내경과 외경이란 근본 외에도 여러모로 대조되는 조합이었다.


“흥미롭군.”


선우현은 대련장으로 다가서며 혼잣말을 했다. 두 사내가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여러 가지 로 대립되는 구도 때문이었다. 졸업 후의 진로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전투 역량에 있어서도 외공과 내공은 격이 다르기 마련이다. 수련 초반엔 외경이 앞서가지만 고교 레벨만 되어도 내가의 우등생을 외경으로 맞서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게 상식이었다. 때문에 이런 식의 통합 대회에서 최종 1인을 선발하는 결승전엔 보통 내공을 수련한 이들끼리만 남아 대련하는 것이 일반적임에도 외경을 수련한 학생이 생존해 내경과 부닥친다는 것이 그가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이유 중 하나요, 여성처럼 슬림한 몸과 야차에 가까운 거구란 외관의 차이가 둘이요, 짧은 기간에 급하게 공력을 끌어올리는 환화심법과 오랜 기간 꾸준하고 지루한 수련을 통해야 경지에 이른다는 혈홍괴수란 수련 방식의 차이가 세 번째 이유였다.


“얌마, 사람이 말하는데 그냥 가냐? 뭐 보고 그래.”


어느 새 옆으로 쫓아온 진강이 현의 시선을 쫓는다.


“오! 저 둘이 붙다니 네가 관심을 가질 법도 하다. 귀한 구경하겠는데.”


“유명한 사람들이야?”


“넌 정말 공부 외엔 관심이 없구나. 이 형님이 소중한 정보를 알려줄 테니 잘 들어. 흰옷이 내공과 3학년 수석, 명문 남궁가의 자제이신 남궁가빈. 그리고 청색이 외공과에서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라 평가받는 풍운아, 강철 호랑이 표철호! 결국은 저 둘이 결승에서 붙게 되었구나.”


친구의 설명을 들으며 선우현은 대련장을 바라보았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 준비를 위한 움직임들이 부산한 가운데 두 선수는 경기장 양 끝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 모두 고수다운 여유가 풍긴다. 표철호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양쪽이 은연중에 뿜어내는 상반된 기운은 가늘게 응축이 되어 뻗어나가더니 경기장 정중앙에서 마주쳐 뒤엉켰다. 이미 둘 사이의 기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표철호 선배 피부색 좀 봐라. 아무리 혈괴장 수련자라지만 저 나이에 벌써 저 정도의 성취를 이루다니 엄청난 거지. 내공과 사람들도 저 사람 만큼은 한 수 접고 들어간다는 이야기도 있어.”


“외공이란 본디 시간과의 싸움인 것을……. 상상을 초월한 수련을 했겠구나.”


진강의 말에 동의하며 현은 시험 삼아 자신의 내력을 일주시킨다. 제대로 뚫리지 않은 혈맥들 덕에 턱턱 부닥치는 느낌이 전해진다. 자신의 미숙함을 실감하며 그는 쓴웃음 지었다. 기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라면 이 정도로도 대단한 성취일 것이다. 하지만 무대 위 선배들의 체내외를 흐르는 기운은 그러한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이것이 고수이고 전국 최고의 자리를 위한 자격인가 싶었다. 내공 역시 외공에 비해 성취가 빠르다 하여도 내력을 쌓기 위한 절대적 시간이란 게 필요하다. 이를 위해 고교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토납법을 기초로 한 갖가지 수련법과 단련법으로 내공을 축적한다. 그렇게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 결국 잠을 자는 시간을 아껴가면서 수련을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인지라 내공과 진급을 위해선 삼당사락이란 유행어가 돈 적도 있었다. 근래에 들어선 보다 효율적으로 내력을 높이는 방법들이 개발되면서 그러한 노력은 기본이요 신기술을 빨리 그리고 보다 먼저 접하는 것 역시 중요해졌다. 어릴 적 점혈을 통해 미리부터 혈도를 확보하는가 하면 영약을 취해 억지로 기력을 증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경우라도 고액이 든다는 점은 만사공통이었다. 더군다나 무재, 즉 내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서의 자질은 유전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는 터인지라 세대가 갈수록 고소득 가정의 자녀가 자연스레 보다 쉽게 무공을 익혀 고학력자가 되고 다시 고소득자가 되어 아래로부터의 상승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권력의 세습 문제도 최근엔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었다.

그런 현실에서 표철호의 이른 성장은 이례적이면서도 고무적일 터였다. 내공도 아닌 외공으로 저리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태생적 자질 때문인가, 아니면 재력 때문인가 것도 아니면 상상을 초월한 개인의 노력 때문인가. 선우현은 무척 궁금해졌다.


“표철호 선배 집안은 돈 좀 있나보지?”


그의 질문에 진강이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다.


“아니, 무슨 얘긴지는 알겠다만 그런 거 아니야. 표 선배 집안은 진짜 평범한 중산층이거든. 꼼수가 아니라 오로지 의지와 노력으로 이룬 성과란 거지. 그래서 더 대단한 거고. 뭐 돌연변이 아니냐는 농담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구나.”


새삼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감탄하던 선우현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변했다.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북이 울리자 장내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짧은 찰나 그는 이상한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


‘살기?’


무도관 실내 어디에선가 음험하고 살벌한 기운이 강하게 폭발했다. 일순간의 일이었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느끼지 못한 모양이지만 개중 예민한 몇몇은 묘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보였다.


“야, 나 화장실 좀.”


자리를 뜨려는 선우현을 보고 강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야, 이제부터 시작인데 그걸 못 참냐?”


“미안, 너무 급해서.”


난처한 표정을 연기하며 빠져나온 그는 조금 전 살기가 느껴진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교내의 중요한 행사이고 외부 인사들도 초청된 자리이기에 무도관 곳곳에는 사설업체에서 파견된 경비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 그들이기에 살기를 감지하는 일은 익숙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를 확인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정위치에 자리한 유니폼 차림의 경비원들은 미동도 않고 있었다. 살기를 위험으로 판단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애초에 감지조차 제대로 못했다는 얘기다. 크기로만 치면 미미했고 게다가 워낙 찰나의 순간이었으니 후자의 가능성을 배재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라면 이는 자칫 위험한 상황으로 커질 싹이 될 지도 모른다. 배움의 전당이라지만 학교란 공간은 약육강식 경쟁의 장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런 스트레스를 끝내 이기지 못하는 이들도 왕왕 생겨난다.


현은 작년 지방에서 있었던 교내 집단난사 사건을 떠올렸다. 학업 스트레스와 왕따를 이기지 못한 학생이 학교식당에 암기를 숨겨 들어와 마구 발사한 비극이었다. ETE 시스템을 개조한 장치로 미약하나마 강기를 실은 채 발사된 암기들은 식당 안에 있던 교직원과 학생 27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조금 전의 살기가 그런 참사의 서막이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인파를 헤치고 무도관 한쪽의 기둥 근처에 도착한 그는 주변을 살폈다. 감이 맞는다면 분명 이 근처에서 살기가 뿜어졌다. 하지만 기운을 뿜어낸 장본인은 이미 이동을 했는지 이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여 수상한 이가 없는지 주변을 살피던 현은 문득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나이는 서른을 넘겼을까, 세월이 느껴지는 외모에선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양끝이 치솟은 짙은 눈썹, 곧고 날렵한 콧대에 굳게 다문 입술까지. 쾌남이라 할 만한 얼굴 가운데 형형한 안광이 스멀거린다. 고수였다. 누구일까? 교직원은 아니고 유니폼이 아닌 사복인 것으로 보아 경비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외빈이라기엔 차림이 너무 수수하다. 아무래도 수상하다. 선우현은 조심스레 공력을 운용해 오른손에 기를 모았다. 여차하면 여기서 권을 주고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순간 작년의 암기난사 사건이 다시 떠올랐다. 저자도 무기를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움찔 걸음을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상대가 쏘아 보낸 무형의 기운 때문인지도 모른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사내는 홀연히 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간 무대 위에서 시작된 경기에 흥분한 관객들이 열띤 응원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뿜어내는 기운의 색이 한층 짙어진 탓에 상대의 기운을 쫓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찜찜한 기분을 뒤로 한 채 그는 다시 경기장 쪽으로 향했다.


* * *


시합은 시작부터 범상치 않았다.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두 선수 모두 앞으로 튀어나갔던 것이다. 3년을 함께 수학한 처지이니 상대에 대한 분석은 이미 완료된 터. 누가 하나라도 더 상대의 수를 예측하느냐의 싸움이었다. 학생시합에선 안전을 위해 일체의 무기는 허용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공수를 번갈아 주고받는 둘에게선 살벌한 기운이 느껴졌다.

먼저 기세를 잡은 것은 역시나 내공을 익힌 가빈 쪽이었다. 재빠른 발놀림으로 순식간에 상대와 거리를 좁히는가 싶더니 양팔을 옆으로 벌리며 장을 날렸다. 활짝 펼친 그의 손바닥에서 순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무형의 내공이 뿜어져 나갔다. 강한 기운이 빠르게 허공을 이동하며 만들어내는 신기루였다. 그 정도의 공격이라면 응당 피하는 것이 정석, 하지만 외공의 달인은 양팔을 가로지른 채 앞으로 뻗어 그대로 가빈의 수를 받아냈다.


‘꽝!’


기와 기의 충돌은 요란한 소닉붐을 일으켰다. 앞으로 내딛은 표철호의 왼발 근처가 움푹 패이며 흙먼지가 일었고 튕겨져 나온 둘의 내공이 사방으로 물결쳐 퍼져나갔다. 현은 자신의 옆에서 꺄꺄 소리를 질러대던 여중생 하나가 그대로 졸도하는 것을 황급히 잡아주었다. 그들이 뿜어낸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놓고 만 것이다. 소녀의 손에는 ‘남궁가빈 내 신랑’이라 적힌 작은 플랫카드가 들려있었다. 고수의 경지에 오른 선배들에게 친위대라 불리는 팬클럽이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던 터였다. 하지만 실제로 보긴 처음이었다. 진짜로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싶은 생각에 신기해하며 그가 소녀의 뺨을 톡톡 두드려 깨우고 있으려니 경비원 한 명이 다가와선 안전한 후방으로 소녀를 데려갔다.

그 사이 남궁가빈과 표철호의 대결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이번엔 표철호의 공세였다. 혈홍괴수 특유의 빠르고 역동적인 움직임이 이어지며 상대를 공격해 들어간다. 가빈의 전략은 회피였다. 그는 상대의 기를 미리 읽고 움직임을 예측하며 아슬아슬하게 철호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조금씩 뒤로 밀리는 것만은 어쩌지 못했는지 채 몇 수가 오가기도 전에 그만 코너에 몰리고 말았다.


“잘한다, 표철호! 내공과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줘!”


어디선가 철호를 응원하는 남자들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마도 외공과 3학년들일 것이다. 한쪽에선 애가 탄 여자들의 걱정스런 한탄이 이어졌다.


“오빠, 힘내세요! 빨리 피해요.”


현은 두 선수 사이의 또 다른 대조 점을 발견하곤 쓴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짐승돌이 유행이라지만 역시 시뻘건 근육 대장을 좋아하는 여성층은 얄팍하기 마련이다.


“꺄아아, 어떡해 너무 멋져!”


다시 여자들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궁지에 몰려있던 가빈이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움직임으로 미끄러지듯 지면 위를 움직여 위기를 빠져나온 것이다. 발을 움직이지도 않은 채 움직이는 기술, 경공의 일종이었다. 가빈 역시 뛰어난 고수란 것을 알 수 있게 만드는 장면이다. 동시에 여심을 울리는 아름다운 광경이기도 했다.

위기를 빠져나와 전열을 가다듬은 가빈은 다시금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남궁가의 비전으로 알려진 영화권(英花拳)이었다. 봄날 흐드러지는 꽃 그림자처럼 빠르게 내뻗는 가빈의 권이 여럿으로 나뉘는 착시가 벌어졌다. 모두가 허상이면서 동시에 모든 상에 공력이 실린 공격이다. 표철호는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키며 전신의 기를 방출해 공격을 막아냈다. 초식을 활용해 보호막을 둘러치는 기초적인 호신강기였다. 기초라지만 십 수 년을 수련한 어른들도 쉽사리 구사하지 못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기대를 뛰어넘는 둘의 대결에 관중들은 간만의 눈 호강을 즐기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나 혀를 내두르며 시합을 지켜보던 선우현은 문득 경기장 아래에 선 사내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였다. 조금 전 살기를 감지했던 기둥 아래에서 사라진 정체불명의 남자. 별다른 기운이 감지된 것도 아닌데 그가 눈에 들어온 건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근처에 모여 선 사람 중 유일하게 그의 시선만이 경기장이 아닌 관객들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수상해.’


의심을 지우지 못한 현은 슬금슬금 사내가 선 곳으로 향했다. 워낙 빼곡하게 들어선 인파를 헤쳐 나가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맘 같아선 외력을 운용해 밀어내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자신이 경비들 손에 끌려 밖으로 옮겨질 것이다. 뭐, 긴급한 상황에선 주의를 끌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해도 되겠구나란 생각을 하며 그는 차곡차곡 한 걸음씩 전진했다. 순간 다시금 날카로운 살기가 그의 뒤통수를 간질였다. 이번엔 위였다. 놀라 뒤를 돌아보니 높다란 무도관 천장을 가로지르는 구조물 사이로 무언가 검은 것이 휙하니 움직이는 게 보였다. 위치를 확인한 현이 다시 조금 전 사내가 선 곳을 보니 이번에도 그는 먼저 사라지고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갈피를 못 잡은 채 그는 급한 대로 근처에 선 경비원 쪽으로 향했다.


“저기요, 방금 못 느끼셨어요?”


그의 질문에 상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무슨 소리냐, 장난치려는 거면 지금이라도 그만 두는 게 좋을 거다.”


“아니요, 방금 전에 저쪽에서 살기가 느껴졌다고요.”


고개를 내저으며 지붕 쪽을 가리키는 선우현의 모습에도 경비원은 석상마냥 선 채로 바라볼 뿐이었다.


“살기라, 이 짓만 5년 째 하는 내가 못 느낀 기운을 너가 느꼈다고? 미안하지만 몇 살이냐. 2학년?”


“1학년입니다.”


그의 대답에 거구의 경비원은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그래, 너 때엔 세상이 다 아래로 보이겠지. 고작해야 외공이나 수련한 경비 아저씨 보다야 이런 무제고에 진학한 자신이 더 능력 있을 거 같고. 그런데 꼬마야 세상이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내가 여기 그냥 서서 돈 받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절루 가서 경기나 마저 봐.”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멘트를 곧 뱉어낼 것 같은 표정으로 손을 내젓는 경비의 태도에 현은 쀼루퉁한 얼굴로 인파를 향해 되돌아섰다. 그리곤 제 자리로 돌아가는 척 하면서 그는 주위를 살폈다. 안쪽 기둥 뒤로 천장까지 이어지는 소방용 비상사다리가 보였다.


‘저거다!’


사다리 근처로 살금살금 다가간 현은 경비들의 눈을 피해 빠르게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공력을 살짝 운용하자 13m 높이의 천정까지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경기장 상부는 격자모양의 철골이 거미줄처럼 가로지르며 하중을 지탱하고 있었다. 현은 아래를 살피며 조금 전 살기를 느꼈던 지점을 가늠했다. 순간 뜨거운 기운이 확 아래에서 치밀어 오르며 그를 감쌌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선우현은 발을 헛디디며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크흑!”


팔이 치켜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선우현은 자신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음을 깨달았다. 위를 올려다보니 추락 진전의 그를 잽싸게 잡아채 목숨을 구해준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아까 보았던 의문의 사내였다. 현을 기둥 위로 끌어올리며 그의 입이 열렸다.


“사람, 귀찮게 하는 학생이구나. 여긴 어떻게 올라온 거냐?”


“그야 사다리를 타고…….”


“그런 걸 물은 게 아니지 않느냐. 어떻게 이곳을 알고 올라왔느냐는 거지.”


아마도 살기에 대해 묻는 것이리라. 현은 혼란스런 정신을 가다듬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우선 조금 전 자신을 실족하게 만든 뜨거운 기운의 파악이 먼저였다. 그것은 아래에서 터져 올라온 사람들의 열기였다. 경기장 쪽을 보니 갑작스럽게 기운이 치솟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각의 경기장 한쪽에 백의를 입은 사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청코너, 홍안의 외공과 천재가 기어이 내공과 대표를 이긴 것이다. 적어도 결승에서 이런 승부가 난 것은 교내 토너먼트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딴 데 정신 팔지 말고 대답을 하거라. 왜 여기까지 올라온 거냐?”


짙은 눈썹의 사내는 현의 머리를 잡고 강제로 돌려 자신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그러는 아저씨부터 말씀해 보시죠.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아까부터 살기가 느껴지는 곳마다 그쪽 모습이 보이는 건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 같은데요.”


“살기? 그럼 기운을 느끼고 찾아왔다는 거냐.”


상대는 짐짓 놀라더니 신중한 얼굴로 한동안 선우현의 차림새를 살폈다. 뚫어져라 자신을 훑어보는 사내의 시선에 현은 괜히 무안해져 고개를 돌렸다.


“진짜냐. 그 미미한 살기를 진짜로 감지했다는 게. 그것도 두 번 모두.”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어려서부터 촉이 좋아서 기를 감지하는 건 잘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잘 하는 수준이……. 아니 그보다. 반, 번하고 이름을 말해봐라.”


사내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드는 것을 본 현은 그제야 의구심이 풀린 듯 어깨를 떨어트리며 순순히 답을 했다.


“1학년 5반, 24번 선우현입니다. 감찰부에서 나오셨군요.”


손에 든 웨어러블 태블릿으로 무제고 학생부를 열람해 선우현의 신원을 확인한 상대는 기계를 도로 접어 넣으면서 피식 웃었다.


“장비만 보고도 알아챈 거냐. 눈썰미가 좋구나. 그래, 감찰부에서 파견 나온 수사관 고훈 이라고 한다. 1학년 수석이라 그런지 실력이 좋구나.”


태블릿 데이터엔 현의 신상은 물론 성적 정보까지 조회가 되는 모양이었다.


“수사관께서 여긴 무슨 일이시죠. 테러라도 예고된 건가요.”


특별감찰부는 일반 행정기관보다 상위에 위치한 대통령 직속 감찰부서로 주로 전국형 조직범죄, 반국가범죄, 대테러리즘 등의 사건을 전담하는 부서였다. 때문에 수사관 역시 일반 군경 조직원과 달리 각 분야에 두루 능통한 엘리트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건 아니다. 여기처럼 귀빈들이 몰리는 곳은 의례적으로 파견 나오게 되어있어. 관례 같은 거지.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는 기운이 느껴져서 조사를 하던 중이었다.”


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감찰부의 엘리트와 같은 이유로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괜히 뿌듯했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수많은 사람들 중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읽어내고 활동에 옮긴 단 두 사람 중 하나인 것이다.


천정 근처를 수색해 봤으나 별다른 이상도, 살기를 발한 이가 남긴 흔적도 찾지 못했다. 감찰관은 도움은 필요 없으니 그만하고 아래로 내려가라 현을 채근했다. 하지만 호기심 가득한 학생인 현으로선 이렇게 흥미진진한 일에 쉽사리 빠지고 싶지 않았기에 끝가지 옆에 따라 붙으며 조사를 도왔다. 수색을 포기하고 널찍한 기둥 위 공간에 나란히 걸터앉은 두 사람은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경기장은 정리가 끝나고 오늘의 우승자인 외공과 학생의 시상을 위한 준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례적인 결과에 대한 장내의 흥분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채 대기를 팽팽하게 채우고 있었다.


“역시 무차별 테러가 아닐까요. 지난 번 교내 암기 난사처럼.”


현은 발아래 경기장을 살핌과 동시에 내력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감찰관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니라 단정 지을 순 없구나. 그래도 무제고 정도의 학교에서 그런 허접한 사고는 벌어지지 않을 거다. 그 사건 이후론 교내의 암기 반입을 막기 위한 조처도 강화되었으니.”


그의 말대로 난사 사건 이후 각 급 학교들은 교내로의 외부인 출입 통제를 강화하고 위험물 소지에 대한 꾸준한 단속과 예방 조치들을 강화하고 있었다. 무제고 역시 마찬가지라 아침마다 금속 탐지기를 지나야 했고 조금이라도 무기가 될 가능성이 있는 물건들은 교문에서 압수를 당했다. 하물며 외빈까지 오는 이런 큰 행사에 암기를 숨겨 들어오는 일은 불가능할 터. 그렇다면 지난 번 사건 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낮았다. 하지만 그가 느낀 살기는 분명히 존재했다. 게다가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표출한 살기다.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짧고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진하게 농축된 느낌의 기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현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찰관님, 이런 일을 하시니 살기에 대해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지.”


“살기란 것이 본디 상대를 해치려는 의도를 담은 기운의 표출이잖아요. 때문에 전쟁이나 전투 시에 종종 관찰되고, 일단 살기가 내력과 합쳐지면 일시적으로 깜냥 이상의 힘을 낼 수 있죠. 감정적 동인 없이 의도적으로 끌어내거나 아니면 반대로 억누르기 위해선 상당한 수련이 필요하고요.”


교과서에서 배운 살기에 대한 내용을 암기하듯 읊는 현의 이야기에 고훈은 피식 웃는다.


“역시 우등생이구나. 그래, 살기의 양면성이지. 표출되면 힘이 강해지지만 동시에 자신의 기의 흐름을 적에게 노출하게 되기도 한다. 때문에 암살자들은 살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훈련을 받기도 하지.”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방금 느낀 살기는 대체 무엇일까요. 어떤 이유에서든 실수로 흘렸다고 보기엔 너무 노골적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나라하게 살기를 방출한 것도 아니죠. 이 많은 이들 중에 소수만이 느꼈으니까요. 그런 식의 살기가 있다는 얘긴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는 건 상당히 수련한 인물이 매우 의도적으로 살짝만 살기를 내비췄다는 거잖아요. 그런 건 대체 어떤 경우에 벌어지는 일인가요?”


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고훈의 표정이 일순 차갑게 굳었다.


“그렇구나. 네 말이 맞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능성은. 아차!”


그는 황급히 일어서더니 태블릿과 연결된 휴대용 송수신기로 어딘가에 연락을 취했다.


“예, 고훈입니다. 위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원을 풀어서 장내를 수색해주세요. 특히 경기장을 중심으로. 수상한 인물이나 물건이 있으면 바로 저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통신을 마친 고훈에게 현이 물었다.


“미끼였군요. 감찰관님을 끌어내려고 일부러 살기를 흘렸던 거죠?”


“그럴 가능성이 높다. 당장 가봐야 하니까 너는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해라!”


말이 끝나자마자 고훈은 훌쩍 기둥 아래로 몸을 던졌다. 감찰관은 엘리트 고수답게 유려한 경공으로 철골 기둥을 톡톡 발로 차며 마치 나뭇잎 마냥 가볍게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세차게 발을 굴려 빠르게 아래로 활강했다. 그런 활강은 엄두도 못 낼 선우현은 올라올 적에 이용한 사다리를 타고 주섬주섬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선 복잡한 경우의 수들이 엇갈렸다. 범인의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일단 타깃이 무도관 중앙, 그러니까 경기장 근처임은 분명했다. 살기가 느껴진 장소는 점점 경기장 중심에서 멀어지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정예요원인 감찰관을 밖으로 유인해 진짜 목적을 이룰 시간을 벌 심산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들의 존재를 감지할 능력을 가진 이를 미리 구분해내려는 목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문제가 있다. 바로 선우현 자신이다. 테러범이 계획한 변수에 자신도 들어가 있을 리는 없었다. 즉, 뛰어난 무공 보다는 기의 흐름을 읽는 데에 뛰어난 인물을 선별하려는 공작이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인물을 골라내 유인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유인해내서 어떻게 할 생각이었을까?


‘챙!’


공격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사다리 주변을 둘러친 안전 철망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순간적인 기의 흐름을 선우현이 몇 분의 일초 차이나마 미리 인지하지 못했다면 날아든 비수는 그대로 그의 심장에 꽂혔을 것이다.


“으으.”


자신의 왼편 어깻죽지에 박힌 물체를 보고 처음 현에게 떠오른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젓가락?’


그것은 분명 젓가락으로 추정되는 나무작대기였다. 새끼손가락 굵기도 되지 않는 가벼운 나뭇조각이 마치 단단한 쇠붙이라도 되는 양 안전철망을 비집고 그의 몸에 박혔던 것이다.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고수들이나 가능한 기술이었다. 동시에 나무젓가락이라면 물품 반입이 제한된 교내에도 손쉽게 들여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잽싸게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암살자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정도의 고수라면 기를 지우는 데에도 능통할 것이다. 이러다 또 다시 어디에선가 공격이 날아올지도 모른다. 길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안전망 사이로 몸을 빼내며 고훈이 그랬든 몸을 던졌다. 하지만 경공 따위 모르는 고1짜리 그건 단지 투신일 뿐이었다. 6미터 아래로 그의 몸을 던진 순간 방금까지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또 하나의 나무젓가락이 날아와 박혔다.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가능한 공력을 운용해 몸을 보호했지만 충격은 만만치 않았다. 그가 떨어지는 모습을 본 경비원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오다가 줄 끊긴 인형처럼 풀썩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현은 있는 힘을 다해 몸을 굴려 일어났다. 적은 강했다. 그리고 목표 또한 명확했다. 자신을 죽이는 것, 적어도 여기에 자신의 발을 묶어 두는 것. 또다시 나무젓가락이 날아와 발치에 박힌다. 단단한 시멘트 바닥이 마치 두부라도 되는 약 푹 박혀버리는 젓가락의 위력에 오금이 저려왔다. 현은 아까부터 적의 위치를 찾으려 기의 흐름을 읽는 데에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좀처럼 상대의 기운이 잡히지 않았다. 관중들이 뿜어내는 열기의 흐름 속에서 공격의 순간에만 반짝 드러나는 상대의 위치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위치를 옮기고 있었다. 마치 유령을 상대하는 것만 같은 상대는 그의 사기를 꺾고 있었다. 또 다시 어디선가 날아온 젓가락이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묘하다. 대체 이 흐름은 무슨 무공인 거지?”


듣도 보도 못한 상대의 움직임에 더 이상 요행은 힘들었다. 우선은 어떻게든 적의 공격을 피해야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눈에 벽 쪽에 붙여 세워놓은 접이식 의자들이 보였다. 현은 자신의 양 다리에 기를 집중시켰다. 바닥에 모로 누운 채 몸을 숨기고 있던 기둥을 강하게 발로 찬다. 그 힘에 그의 몸이 쏘아지듯 바닥을 미끄러졌다. 철제 구조물 사이로 힘겹게 몸을 우겨넣자마자 또 다시 날아온 젓가락이 철제 의자에 푹 박혔다. 서서히 감각이 사라지는 왼팔을 축 늘어뜨린 채 그는 생각에 잠겼다. 연달아 이어진 공격들을 복기해본다. 적은 철저히 자신의 기를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공격 직전의 짧은 순간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때의 기의 흐름 역시 기이했다. 마치 허공에서 짠하고 나타나듯 강력한 기운이 모아짐과 동시에 젓가락에 실려 날아온다. 그리곤 다시 적의 흔적은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거기에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배경 속으로 숨어들어 버린다. 마치…….


“설마?”


선우현은 방금 떠오른 생각을 곱씹으며 머리를 굴렸다. 그것은 분명 지금 보이는 적의 행태를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가설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가능케 만드는 전제가 될 기술의 존재여부였다. 의자 틈으로 주변을 살펴본다. 조금 전 쓰러졌던 경비원의 시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외에 도움을 청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인력은 고훈의 무전을 수신한 경비인력들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아무래도 VIP들이 몰린 중앙의 시상식 무대 쪽인 듯 보였다. 옆에 세워진 접의자 하나를 그러쥐며 현은 꿀꺽 침을 삼켰다. 시간이 없었다. 당장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방안은 단 하나 뿐이었다. 온 몸의 공력을 억지로 일주 시키자 뜨거운 열이 등줄기를 타고 머리까지 치밀어 오른다. 순간 의자를 잡아 빼며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아마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을 적이 공격을 위해 다시 기를 모으는 것이 느껴졌다. 그 방향으로 몸을 날리며 방패처럼 의자를 앞으로 내세운다. 콘크리트 바닥도 두부처럼 뚫어버리는 공격 앞에 얇은 철판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운에 맞길 수밖에, 잘만 되면 찰나의 순간이나마 벌 수 있을 것이다.


고훈은 시상식을 보기 위해 가득 몰려든 인파 사이를 힘겹게 헤쳐 나갔다. 갑작스런 상황이었고 결단을 내리기에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무엇보다 우선해서 알아내야 할 것은 상대의 목표였다. 지난 번 난사 사건과 같은 무차별 테러인지, 아니면 이곳을 찾은 외빈들을 상대로 한 요인 암살인지. 흘끔 살펴보니 요인들 옆에 경비원들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유사시에 이들은 방패 역할을 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범인을 잡는 게 중요하다. 범인은 분명 인파 속에 숨어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을 취할 생각인지 몰라도 암살의 순간 가능한 현장 근처에 자신과 같은 고수가 머물러 있지 않게 하기 위해 미끼를 던졌을 것이다. 그 사실을 눈치 채자마자 황급히 시상대 근처로 달려왔다. 그렇다는 건 이제 실행 시간이 촉박하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챘다면 조만간 일을 벌일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경기장으로의 무기 반입은 철저히 통제된다. 날붙이라도 들여오려면 허가가 필요했다. 물론 상대가 고수라면 반입이 가능한 물건들에 강기를 실어 날리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동전이나 나뭇가지 같은 것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근거리에서 경호 인력이 붙지 않은 경우에나 가능한 얘기다.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도 무공으로 단련한 사람의 몸을 뚫고 지날 정도의 강기를 투척무기에 실을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선 무기 자체가 크고 단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는 지근거리까지 다가가 직접 살수를 펴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얘기인가? 내놓으라 하는 영재들과 고수들이 모인 이곳 경기장에서 단숨에 무예가를 살해하는 권법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얘기다.

그러는 사이 경기장 위에선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국민의례가 진행되고 각 분야의 우승자들이 시상대 근처로 모이기 시작했다. 맞은편엔 격려사와 시상을 위해 초대된 교육부장관이 단상에 오르고 있었다. 양 옆으론 귀빈석을 따라 내빈들이 자리한다. 적당히 떨어뜨려 배치한 의자 옆으로는 경호원과 경비원들이 도열해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들 중 아무나 암살 대상으로 지목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모두가 중요한 요인들이다. 고훈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오감을 열고 주위의 기운을 읽어 나갔다. 미미한 살기나 수상한 기의 흐름이라도 나타나길 바라며. 순간 무대 쪽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눈을 뜨고 돌아보니 학교 측 인사들이 둘러서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군중들도 그 모습을 보았는지 여기저기 한 마디씩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소리들이 싸여 점차 커다란 웅성거림으로 변해가려는 찰나 무제고 교감이 단상으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시상식과 관련하여 중요한 변동 사항이 있기에 잠시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조금 전 끝난 결승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외경과의 표철호 선수의 금지약물이 확인되어 자격을 박탈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에 2등인 남궁가빈 선수가 이번 선발전의 우승자로…….”


일순간 경기장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남궁가빈의 우승 소식에 환호를 지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갑작스런 표철호의 탈락에 이해할 수 없다며 격하게 항의하는 이들도 있었다. 돌변한 상황에 흥분하여 어찌된 일인지 수군거리는 중도파들까지 합세하며 무도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고훈은 아찔함을 느끼며 뒤로 넘어가려는 몸을 추슬렀다. 살수의 기를 감지하려 열어놓았던 감각을 통해 군중들이 뿜어내는 기들이 일순 밀려들어왔던 탓이다. 순간 누군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뭐얏!”


반격 자세를 취하며 돌아보던 고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를 잡아챈 건 조금 전 후방에 두고 온 무제고 학생 선우현이었다.


“너는? 물러나 있으랬더니 왜 따라온 거냐. 아니 그보다 몸은 왜 이래. 무슨 일 있었냐!”



창백한 안색에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 선우현의 상태는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어깨 언저리는 검붉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다시 보니 그의 어깨를 잡았던 손등에도 둥그렇게 관통당한 상처가 보인다.


“테러가 맞아요. 범인은 일반인입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익혔더라도 매우 내력이 약한 사람들일 거예요.”


헐떡거리며 현이 전하는 말에 고훈은 고개를 절래 절래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까 느낀 살기의 크기를 너도 알잖느냐. 게다가 일반인이 이렇게 많은 고수들 틈에서 무슨 수로 일을 벌인다는 게냐.”


“이겁니다.”


그의 반박에 선우현은 품에서 무언가 꺼내 보여주었다. 얼핏 보기에 그것은 휴대 전화기처럼 보였다. 직사각형에 전면은 액정이 후면엔 ETE 시스템을 위한 패드가 붙어 있다.


“그냥 전화기잖느냐.”


의아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고훈의 모습에 선우현은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쉰다.


“아닙니다. 전화기처럼 꾸몄을 뿐. 이걸 보세요.”


현이 무언가를 누르자 찰칵 소리와 함께 기계가 접히더니 사각 파이프 모양으로 바뀌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ETE 시스템을 개조한 기계 같습니다. 사람의 기를 전기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밀도를 높여 강기로 농축시키는 기계입니다.”


그의 설명에 고훈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단 표정으로 현과 그의 손에 들린 기계를 살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십 수 년 수련한 사람들도 쉽게 만들지 못한다는 강기를 이런 작은 기계로 뚝딱 만들어낸다는 얘기냐?”


“그렇습니다. 조금 전 이 몸과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평범한 나무젓가락이 콘크리트 바닥에 박히고 두꺼운 철판을 뚫는 모습을 말입니다. 단순히 강기를 실어 보내는 수준이 아닙니다. 끌어 모을 에너지만 충분하다면 검기 수준의 공력을 실어 보낼 수 있어요.”


“정신 나간 소리. 그런 기술이 있다는 건 감찰관인 나도 들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설령 그게 가능하더라도 네 말대로라면 ETE 시스템처럼 검기를 다룰 정도의 고수가 에너지를 불어넣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냐? 그리고 애당초 1학년 학생이 이런 기계를 어디서 났다는 게야!”


선우현은 그를 다그치는 고훈에게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제 말을 믿어주세요. 저도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지만 이 기계엔 그런 기술이 들어있음은 분명합니다. 조금 전 감찰관님이 떠나시고 난 직후에 이 기계를 가진 놈에게 습격을 당했고 대치 끝에 상대를 쓰러뜨리고 기계를 빼앗아온 것일 뿐입니다.”


여전히 상대는 현의 말에 반신반의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에너지원의 문제는 아마도 ETE와는 방식이 다른 것 같아요. 사용자의 기를 흡수하는 게 아니라 주변에 떠도는 미세기운을 흡수해서 농축하는 방식 같습니다. 바꿔 말하면 바로 이곳처럼 내공을 수련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상태에서 동시에 조금씩 자신의 기를 방출하는 상황에서만 최대의 성능을 낼 수 있단 얘기겠죠. 감찰관님도 느끼고 계시죠? 지금 무도관 안을 떠도는 이 기운들 말입니다.”


고훈은 천정 골조에서 관객들이 뿜어내는 열기에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한 선우현을 구해냈던 일을 떠올렸다. 그의 말대로 저마다 조금씩 뿜어낸 기운들은 허공에 떠돌며 무도관 안을 짙게 채우고 있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 했던가. 만약 그 미약한 기력들이라도 하나하나 끌어 모아 하나의 에너지로 농축시킬 수만 있다면 실로 엄청난 공력으로 전환이 가능할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보십시오.”


그렇게 말하더니 선우현은 기계를 어깨 높이로 쳐들곤 액정 화면에 엄지를 가져댔다. 그러자 위잉 하는 낮은 구동음과 함께 손에 들린 기계가 연청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순간 고훈의 눈에 주변의 기운들이 움직임이 보였다. 마치 연무처럼 미미하게 허공을 채우던 군중들의 에너지가 마치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 사각통 모양의 기계 한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기계 내부에선 불과 수 초 사이에 어마어마한 내력이 집중되었다. 감찰관 생활 8년을 하면서 처음 보는 매우 농밀하고 강력한 기운이었다. 만약 원통 내부에 젓가락 같은 물건을 넣은 채로 발사시킨다면 조금 전 선우현이 설명한 일들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 모든 일이 스위치를 누르기만 하면 기계가 알아서 해내는 일이기 때문에 조작자의 내력은 거의 쓰이지 않는단 점이었다.


“기계만으로 이 정도의 내력을 모을 수 있다니. 범인들이 일반인일 거란 추측은 그래서 나온 게냐?”


“그런 점도 있지만 저를 습격했던 자에게서 거의 내공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격을 당할 적에도 기의 흐름으론 거의 추적이 불가능했고요. 이곳처럼 부유하는 에너지가 많은 곳에선 일반인 정도의 내력은 쉽게 가려져 버리니까요. 놈들이 노린 것도 아마 그런 부분일 겁니다.”


고훈은 사색이 되어 주위에 몰린 사람들을 살폈다. 만약 고수가 아니라 그저 기초적 수련만 마친 평범한 사람이 저들 속에 숨어 있다면 일일이 확인하지 않는 이상 기의 흐름만으로 위치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조금 전 조그마한 기계가 순식간에 엄청난 공력을 모으는 것을 보아선 암살 시도가 있더라도 제 시간에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감찰관님 범인은 하나가 아닐 겁니다. 아까의 습격도 서로 정반대의 방향에서 거의 동시에 공격이 날아왔어요. 고수더라도 어검술 같은 신기라도 부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훈은 막막해졌다. 현재로선 자신의 앞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대는 고딩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테러 방식엔 적절히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주변 군중들은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결승자가 바뀌었다는 발표에 사람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감정들이 격해질수록 그들이 뿜어내는 기운의 농도 역시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순간 고훈의 눈에 수상한 자가 보였다. 사람들 속에서 파리한 안색으로 한껏 웅크리고 서서 바들바들 몸을 떨며 무대 위를 노려보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군중들 사이를 물처럼 흐르듯 움직여 여자의 뒤로 접근했다.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허무할 정도로 쉬었다. 목 뒤의 마혈을 손으로 집자마자 맥없이 쓰러져 버렸던 것이다. 대기 중의 기운조차 버텨내지 못할 정도로 기가 약한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하지만 여자가 손에 단단히 쥔 채 품안에 숨기고 있던 것은 조금 전 선우현이 가져온 것과 똑같은 기계였다. 이제 더 이상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고훈은 정신을 잃은 여자를 부축하듯 끌고서 사람이 적은 무대 아래로 옮겼다. 어디선가 경비대원이 달려오자 고훈은 신분증을 보이며 여자가 테러 용의자이니 잘 감시하라는 말과 함께 범인을 인계했다.


“제 말이 맞죠. 아마 더 많은 범인들이 있을 거예요.”


힘겹게 그를 쫓아온 선우현이 바로 옆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래선 막을 방법이 없다. 아무래도 시상식을 취소하고 사람들을 대피시켜야겠어.”


“안돼요. 저들의 목적이 요인암살인지 무차별 테러인지 모르잖아요.”


소년의 주장은 적절했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섣불리 대처했다 일을 더 키울지도 모른다.


“이런 젠장. 진퇴양난이군. 이래선 도저히 시간 안에 범인을 구분할 방법이 없어.”


“아니에요,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한테 생각이 있어요. 그 기계 다시 주시겠어요?”


옆에서 주저앉아 있던 선우현이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서며 그에게 손을 벌렸다.


“방법이 있다니,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냐?”


“여름 방학 때 여기 무도관에서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배선이 잘못 연결되어 합선되면서 고압의 전류가 중앙변압기로 들어와 버렸죠. 덕분에 무도관 전체 전기시스템이 엉망이 되는 바람에 다시 복구하는 데에 한 달이 넘게 걸렸죠.”


대관절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고훈은 학생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민 손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길게 설명할 시간 없어요. 일단 주시고 정 불안하면 저를 따라오세요.”


* * *


선우현의 뒤를 쫓아 고훈이 간 곳은 무대 뒤편의 기계실이었다. 벽을 따라 계기판이 늘어서 있었고 방 한가운데에는 철망으로 둘러싸인 원통형의 장비가 보였다. 철망에 붙은 간판엔 고압주의라는 경고문구가 굵고 붉은 글자로 선명하게 씌어져 있었다.


“어쩔 생각이냐?”


“3년 전, XX터널 정전사고 기억나세요? 터널 내부의 전기시스템만이 아니라 그 안을 달리던 자동차들 까지 전부 전기 계통이 아웃 되어서 난리가 났던.”


“음, 그런 사건이 있었던 건 기억이 난다만. 그게 왜?”


현은 불편한 왼팔을 덜렁덜렁 흔들며 갑갑하다는 듯 한탄을 내뱉는다.


“감찰관 쯤 되면 다들 빠릿빠릿하신 줄 알았는데. 나중에 원인 발표했던 거 기억 못하시나 보네요. 어떤 정신 나간 내가고수 아저씨의 힘자랑이 문제였죠. 간단히 말해 터널 변압기에 대고 장풍을 쏘셨거든요. 기본적으로 외력 통제를 위해 변압기나 정류기엔 ETE 시스템이 붙어있죠. 원칙적으론 기준치 이상의 공력은 ETE 시스템에서 차단을 해야 하지만 순간적으로 엄청난 공력이 주입되면 차단되기도 전에 전력으로 전환되면서 시스템 안으로 흘러들어가요. 순간적으로 내부에 엄청난 고압이 흐르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상태에서 시스템이 폭발해버리면.”


그제야 고훈은 터널 사건의 수사결과를 기억해냈다.


“맞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


“이제 알아채셨군요. 여름 방학에 여기 무도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 모양이더군요. 그때엔 공력에 의한 게 아니라 부실 공사에 다른 합선이 원인이었던 모양이지만. 터널 사건 이후로 요즘은 ETE 시스템이 보완되었다지만 약간 손 좀 보고, 이걸 이용하면.”


선우현은 테러범들에게 압수한 기계장치를 흔들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한 번 재현할 수 있을 겁니다. EMP 현상을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일단 놈들의 시도는 막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고 난 후에 조치는 감찰관님이 알아서 해주시고요.”


고훈은 재빨리 무전 채널을 열었다. 잠시 후면 무도관 전체가 블랙아웃이 될지도 모른다. 그 전에 가능한 상세히 사후 대처 방법을 지시해야 했다. 무전으로 명령 하달이 끝나자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선우현은 기계를 꺼내 액정 위에 자신의 엄지를 얹었다. 위잉 소리와 함께 기계는 푸른빛을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배선을 조작해 차단회로를 꺼버린 변압기의 ETE 회로를 향해 조준했다. 무도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뿜어내는 기운들이 기계를 거쳐 ETE 장치로 유입되자 압축된 엄청난 양의 기운이 전기 에너지로 변환되기 시작했다. 거대한 변압기 내부에 엄청난 양의 전류가 축적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기계를 멈추고 몇 발자국 물러선 현은 이번엔 미리 준비한 동전을 손에 든 기계 안에 장전했다.


‘펑!’


내공을 실은 동전이 변압기를 때리자 폭발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내부에 축적되었던 엄청난 에너지가 일순간 전자기파의 형태로 퍼져나갔다. 이 강력한 EMP에 무도관 안의 모든 전자기기는 순식간에 기능을 멈추었다. 무도관 안은 어둠에 휩싸였다.


* * *


선우현은 병원 침상에 기대어 누운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무젓가락에 당한 팔뚝과 손바닥은 처치를 마치고 붕대를 감아 단단히 고정된 상태였다. 약기운 때문일까 노곤함과 함께 몸이 흐물흐물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맘 편히 누워있지 못하는 건 반대편 침상에 앉은 선배 때문이었다. 전신이 붉게 물든 거구의 사내는 가부좌를 한 채 눈을 감고 운기조식 중이었다. 흘끔 실눈을 뜨고 기의 흐름을 엿보니 전신을 타고 강력한 외력이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나 나이에 걸맞지 않는 엄청난 성과였다. 그런 그가 현과 함께 병원 신세를 진 사연은 병원으로 실려 오는 앰뷸런스 안에서 대강 전해 들었다. 그가 고훈과 함께 EMP를 이용해 만든 정전 직전 테러범 중 하나가 현장에 있던 교육부의 고위 공무원을 향해 암기를 날렸다. 그리고 그것을 몸으로 막아낸 것이 바로 표철호였다는 것이다. 그의 어깨에 칭칭 동여맨 붕대가 그의 영웅적 행동을 웅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건 직전에 있었던 소동이 떠올랐다. 금지약물 복용으로 우승자 자격을 상실했다는 발표. 현으로선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느끼기에 표철호의 공력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고3 학생이 그것도 외가 수련자가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은 전공을 막론하고 인정받을 일이었다. 그런 그가 우승을 위해 금지약물을 복용했다니 표철호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특히나 내가기공과 달리 외공 쪽은 약물에 의존해 공력을 상승시키는 것은 그리 효과를 보기 힘들다고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약물을 어떤 이유로 사용했던 것인지 궁금하기만 할 따름이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몸은 좀 어때?”


고훈이었다. 그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 미소와 함께 그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습니다, 감찰관님. 혈도엔 손상이 없어서 외상만 치료하면 된다고 하네요.”


“다행이구나. 고맙다고 감사부터 전해야지. 너 덕분에 큰 피해 없이 마무리가 되었어. 범인들도 대부분 잡혔다. 역시나 요인 암살이 계획이었나 보더구나, 목적은 알 길이 없지만. 추측대로 대부분이 기본적인 수련만 마친 일반인들이었다.”


“역시 그랬군요. 하지만 일당 중에 고수도 끼어 있었을 겁니다. 처음에 유인을 하던 살기는 분명 수련이 깊은 자의 것이었으니까요.”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다. 아마도 배후에서 일을 꾸민 자가 있겠지. 그런데 처음 살기를 감지했던 것도 그렇고 이후의 대처들도 그렇고 기를 읽는 능력이 뛰어나구나.”


고훈의 칭찬에 소년은 머쓱한 듯 얼굴을 붉힌다.


“어릴 적부터 기를 감지하는 건 자신 있었습니다.”


“그렇겠지, 그런 건 타고나는 거니까. 지금 나이에 그 정도 실력이라면 수련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야. 아마도 우리 감찰부 안에서도 인정받을 실력일 게다.”


“그런가요.”


선우현은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 치아를 드러내며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을 대견한 듯 바라보던 고훈은 이번엔 반대편 표철호 쪽을 보며 물었다.


“그쪽은 좀 어떤가?”


그의 질문에 붉은 몸의 사내는 긴 날숨과 함께 가부좌를 풀더니 감은 눈을 떴다.


“저도 별것 아닙니다. 고작 나무젓가락이 생각보다 아파서 당황하긴 했지만.”


“역시 강골이군, 듣기론 어깨뼈가 부러졌다던데.”


“뼈 부러지는 일이야 외공 수련하다보면 다반사입니다.”


흥, 코웃음을 치며 고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듣자하니 약물 복용 관련해서 직접 자백을 했다더군. 그것도 시상식 직전에 말이야. 난 이해가 가지 않더군,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자네가 말한 약물은 어지간한 테스트엔 걸리지도 않는다니까. 어째서 그랬던 거지?”


그의 말에 선우현은 놀란 토끼 눈으로 표철호 쪽을 보았다. 약물 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는데 심지어 직접 실토를 했다니 아무래도 뭔가 수상했다. 내경과의 에이스를 누르고 우승한 최초의 외공 수련자, 어쩌면 뭔가 지저분한 알력이 작용했던 거 아닐까.


“스스로에게 비겁해지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다면 대답이 되겠습니까?”


“자네다운 대답이군.”


고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타박타박 표철호의 침상으로 향했다.


“이번 일을 저지른 배후에 대해선 우리도 대강 첩보를 가지고 있어. 만민평등을 외치며 사회 전복을 꿈꾸는 사파세력들. 아마도 이번 테러도 기공 위주의 교육제도나 사회제도에 불만을 드러내려는 것이 목적이었겠지. 내공 수련을 거의 하지 않은 일반인들을 전면에 내세웠던 것도 그런 이유일 테고.”


표철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훈을 마주보며 말했다.


“글쎄요, 정치 같은 건 잘 모르지만 무슨 일만 있으면 가져다 붙이는 게 사파와 그 추종 세력들이더군요. 전가의 보도처럼 말입니다. 뭐, 감찰부에서 그렇다 하시면 사실이겠죠.”


“하하하, 외공과 출신답게 반골 기질이 있구먼.


표철호의 발치에 가서 선 고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침대를 툭툭 두드렸다.


“체포된 일당들 입에서 나온 증언 중에 자네 얘기가 나오더군. 멍청한 외공과 녀석이 승부를 이겨버려서 일이 꼬였다고. 나도 좀 이상하다 했어. 범인들이 가지고 있던 공력 응축기라고 하는 거 말이야. 공기 중에 떠도는 기운을 흡수해 응축하는 거라서 무도관 안의 사람들을 좀 더 흥분시킬 필요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실행이 너무 늦었어. 대부분 내력이 약해서 무도관의 기운에 쉽게 휩쓸릴 사람들이니까 질질 끌며 버티다간 오히려 망할 상황이었지. 시상식이 시작되어 외빈들이 모이자마자 곧장 실행에 옮기는 게 맞았을 거야.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러지 못한 건 아마도 막판에 일이 틀어져서겠지? 뭐, 덕분에 우리 쪽에선 대처할 시간을 번 셈이긴 하지만.”


둘 사이의 대화를 쫓아가던 선우현은 불안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침상 위에 앉은 표철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궁가빈 놈, 형편없더군. 내경과의 에이스니, 세기의 수재니 말만 많았지 직접 붙어보니 허망할 정도로 약했어. 처음 두 합 만에 알 수 있었지. 수들은 너무 빤해서 다다음 동작까지 읽혔고 내력은 강한 편이었지만 그걸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어. 맘만 먹으면 한 손으로 멱까지 따버릴 수 있을 것 같았지. 허망했어.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이겼더군, 계획과는 다르게 말이야.”


침대에서 내려와 병실 한쪽 구석으로 물러선 선우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맙소사, 표철호가 테러범들과 한패였다니!’


고훈은 표철호 쪽으로 한껏 몸을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남궁가빈과 접전 끝에 져준다. 그렇게 장내 분위기를 한껏 달구고 무대에서 물러나 이후에 퇴로를 확보하는 것이 임무였겠지. 명문 세도 남궁가의 자제가 우승을 했으니 어떻게든 줄을 대보겠다는 인사들이 시상식에서 그의 주변으로 몰리면 공격하기도 쉬웠을 것이고.”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몰라. 그저 도우미 역할로 나섰을 뿐이니까. 이 더러운 세상에 엿 한번 먹이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군.”


“천재라고 불리던 남자가 어째서 그런 패거리들에게 동조했나? 전국대회 출전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곧장 출셋길이 열렸을 텐데.”


외경과 최고의 천재에서 테러범으로 추락한 사내는 감찰관의 이야기에 콧방귀를 뀌었다.


“출셋길? 당신도 같은 소리를 하는 건가. 누구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 수련에 정진해서 능력을 쌓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 모두가 같은 선에서 출발해 노력한 만큼의 결승점에 도착한다는 거짓말.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있는 거지? 돈과 권력을 쥔 작자들이 하는 짓을 알면서. 어려서부터 혈도를 뚫고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영약을 음료수 마냥 들이켜고 고액의 과외에 개인지도. 출발점부터 다른데 어떻게 공정한 경쟁이 되지? 무제고 입학생 집안의 평균 소득이나 부모님 직업에 대한 통계를 본적 있나. 애초에 정해진 인간들만 에스컬레이터마냥 올라오는 자리야. 어려서부터 천재라 불리며 무제고에 진학 하겠구나 어른들의 칭찬을 들었지. 나도 노력하면 그들과 같은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꿈을 꿨어.”


표철호의 넋두리를 듣는 사이 선우현은 울컥하며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사교육, 권문세가 내에서만 전수되는 가문의 비기, 고액의 영약들. 가진 자들만 점점 더 강해지고 결국 바닥에서부터 오르는 권력의 사다리는 중간에서 뎅겅 잘려버린 채 고수와 일반인의 차이가 점점 벌어져 계급화 하는 사회현상이 문제라는 지적은 언론에서도 철마다 다루는 부분이었다. 특히나 무예에 대한 선천적 재능이나 타고나는 기골 같은 부분은 유전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세대가 거듭되면 될수록 유전적 재능 역시 편차가 생기는 생물학적 계급화에 대한 것이 최근의 이슈였다.


“2학기가 되어서 전공을 선택할 시기가 오니 분명해지더군. 그들에게 난 골칫덩어리 별종일 뿐이란 것이. 외경과로 보내자니 재능이 출중하고 그렇다고 내경과로 보내자니 천한 소생이 내경과의 탑을 먹을 것 같아 걱정이었어. 선생이란 작자들이 말이야. 어떻게든 남궁가의 아들놈을 1등자리에 앉혀야 내가 훼방이 되었던 거겠지. 그래서 외경과로 가버렸어. 내경과로 가면 벌어질 일들이 눈앞에 선했으니까.”


스르륵 표철호가 침대에서 나와 일어났다. 고훈도 위치를 옮겨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섰다.


“병원 주위에 요원들이 깔렸어. 도망쳐봤자 헛수고다.”


“도망? 곱게 자란 감찰부 도련님들이 무서울 것 같나.”


순간 표철호가 몸을 틀며 주먹을 날렸다. 고훈은 미리 끌어올린 내공을 손끝에 집중시키며 그의 손을 받아내려 했다. 아무리 고교 레벨을 벗어난 수준이라 해도 외공 수련자가 감찰관의 내력을 이겨낼 리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권과 수가 마주치는 순간 고훈의 몸이 맥없이 뒤로 튕겨나갔던 것이다.


“으윽, 어떻게 이런 일이!”


침대와 벽 사이에 끼이듯 나가떨어진 고훈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상대를 보았다. 조금 전 그의 몸에 부닥쳐온 기운은 외경이 아니었다. 분명 상대는 내공을 그것도 엘리트 감찰관인 자신의 힘에 필적하는 공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옆에서 관망하던 선우현 역시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동시에 오감으로 느껴지는 표철호의 기운 역시 믿기지 않았다.


“설마하니 외공과 내공을 동시에 수련했다는 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도 스스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주화입마를 용케 피했다손 치더라도 방금 공격은 그 기운이 정순할뿐더러 위력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외경과의 수련만 해도 초인적이라 부를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거기에 더불어 내공까지 마스터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인간에게 허락되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 건 표철호의 내공은 무엇인지 몰라도 꼼수의 결과일 것이다. 선우현은 다시금 오감을 열고 표철호의 공력의 흐름을 쫓았다.


“맙소사, 이게 가능하다니.”


마침내 표철호의 비밀을 알아낸 선우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표철호의 몸을 감싸듯 돌고 있는 외경이 전신을 일주하더니 다시금 백회혈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내경과 외경은 기가 흐르는 길이 달랐다. 그리고 수련이 깊어질수록 한쪽은 성하고 다른 쪽은 쇠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늦게야 다른 쪽을 수련하기 시작하면 처음 단련하던 혈도가 다른 쪽을 억누르려 하고 억눌리는 쪽은 반발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몸이 그것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표철호는 그 두 개의 길을 억지로 엮어 하나로 뚫어버렸다. 한 몸에 두 사람이 들어가듯 두 개의 혈도를 타고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한 거죠. 어찌 두 길이 하나로 이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선우현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고리타분한 윗것들의 규칙을 벗어나면 가능하지. 외과 수술로 혈도를 잇는 길을 만들었다. 덕분에 필요에 따라 외력과 내력을 모두 다룰 수 있을 뿐더러 남들보다 빠르게 공력을 쌓을 수 있었지.”


“그게 방금 말한 부자들의 꼼수와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현은 다시금 고함을 내지르며 표철호 쪽으로 다가섰다.


“목적을 위해선 타협도 필요한 것. 세상은 결국 힘이다. 강한 자들의 억압에서 벗어나 이 체제를 흔들려면 그만큼 내가 강해져야 하는 거야.”


“그런 힘의 논리에 필부들이 설 곳은 있는 겁니까? 편법으로 취한 세력에게서 모두가 평등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세상이 오긴 하는 건가요.”


“순진하구나. 순수하고. 역시나 도련님다운 발상이야.”


표철호는 한층 더 붉어진 몸을 잔뜩 부풀리며 위협적으로 선우현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그 역시 기세에 눌리지 않은 채 당당하게 맞서서 대응했다.


“당치 않습니다. 저 역시 선배와 같은 불청객일 뿐입니다.”


“헛소리!”


표철호의 무시무시한 일격이 현을 향해 날아왔다. 현은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요란한 충격음과 함께 맥없이 뒤로 튕겨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간신히 몸을 추스른 고훈이 품에서 3단봉을 꺼내 펼쳐들었다. 손에 쥔 봉에 공력을 밀어 넣자 스멀스멀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표철호, 순순히 투항해라!”


“그런 뒤엔 어쩌시려고? 혈도를 막고 단전을 깨부숴서 무공을 폐할 건가. 그렇게 반병신이 되어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게 말이야!”


“뿌린 만큼 거두는 법.”


기합과 함께 고훈의 몸이 사위를 벗어난 살처럼 앞으로 튕겨 나갔다. 내공이 실린 3단봉이 호선을 그리며 표철호를 향했다. 그는 피할 생각도 않고 팔을 들어 올렸다. 어느 새 외문으로 일주한 내공이 고훈의 공격을 막아냈다. 내력이 실린 봉이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팔이 아니라 몸 전체가 박살이 날 위력이었지만 표의 강력한 외문기공은 보통의 권격을 막는 정도의 흔들림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감찰부 엘리트의 실력이 고작 이 정도인가?”


고훈은 난감한 표정으로 적을 노려보았다. 표철호의 공력은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고교생 레벨은 애초에 넘어섰고 일반적으로 고수라 불리는 문파의 수장들조차 그와 호각, 아니 어쩌면 수세에 몰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엔 내가 선수를 날려볼까?”


다리를 벌려 선 채 자세를 잡은 표철호가 여유를 부리며 히죽거린다. 순간 반대편 구석에서 하나의 인영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놀랍게도 그건 선우현이었다. 철호는 조소를 날리며 현을 향해 한쪽 팔을 내밀었다. 1학년생의 공격 따위 한 손으로도 충분하다는 자만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현은 허공에서 몸을 회전하는가 싶더니 상대의 팔을 휘감아 들어갔다. 현의 손이 철호의 팔뚝을 잡자 고작 한 뼘의 공간이었지만 혈홍괴수의 술로 흐르던 강기가 흩어지면서 허점이 생겼다.


“무슨 짓이냐!”


당황한 표철호가 반대편 손을 뻗어 현을 잡아채려 했으나 이번엔 고훈의 공격이 그의 동작을 봉쇄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강기가 풀린 철호의 몸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곧이어 전등이 꺼지며 병원의 전력이 순식간에 다운되었고 동시에 표철호는 발작을 일으키며 부들부들 몸을 떨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제야 병실 문이 열리며 감찰부의 요원들이 뒤늦게 방 안으로 쫓아 들어왔다.


“고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으니까 저 자식부터 체포해!”


그의 명령에 요원들은 바닥에 쓰러진 표철호에게 무공을 제한하는 구속 장치를 씌우기 시작했다.


* * *


한 차례 소동 후 고훈과 선우현은 다른 병실로 자리를 옮겼다. 1인용 병실엔 두 사람 뿐이었다. 병원의 전력은 곧 회복되어 깜빡거리며 형광등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말없이 앉아있던 고훈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까는 어떻게 된 거냐?”


“무공으론 상대가 되질 않으니 전기 쇼크를 이용해보려고 급하게 커피포트의 전깃줄에 금속판을 이어 붙였어요. 다행히 효과가 있었고.”


표철호의 일격으로 상처가 벌어져 다시 처치를 받은 현은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그것 말고.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던 부분이었는데. 아까 무도관에서 적의 기계를 빼앗을 적에도 그렇고 방금 표철호의 공격을 막고 놈의 호신강기를 뚫었을 때에도. 1학년 학생의 내가기공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때의 기의 운용, 그건 분명.”


고훈의 날카로운 지적에 선우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예, 외공이었죠. 대단한 건 아니고 철수철피의 기본식을 응용한 거였어요. 선배가 외공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으니 근접 거리에선 같은 종류의 기운으로 중화시킬 가능성이 있었으니까요. 철수철피가 기본적인 외공술이라지만 원류는 혈홍괴수랑 같다고 배웠거든요.”


“같은 문파의 무공이지. 하지만 넌 내경과 지망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 질문이었다. 아무리 기본식의 응용이었다지만 현장에서 선우현이 보여준 외공은 취미삼아 익히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수련을 해왔을 것이다.


“아까 표 선배가 그랬죠. 자신은 골칫덩어리 별종이라고. 일반 중산층이나 하류층 가문에서 그처럼 뛰어난 천재가 나오면 윗분들이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거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물론 그렇게나 심한 줄은 몰랐지만. 솔직히 열심히 정진한다면 그런 벽들은 얼마든 뛰어넘을 수 있다고도 생각했죠. 그래서 내경과를 지망했고. 사실 저희 집안은 외공을 위주로 연마해온 군관 가문이에요. 뭐 그래봤자 가장 잘 풀린 분이 중령으로 전역하셨지만. 요즘 말로 듣보잡이죠. 그런데 제가 태어난 거예요. 아버지 말로는 어릴 적부터 싹수가 달랐다나요. 하하.”


선우현은 힘없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랬군, 그래서 외공의 수련을 일찍부터 해왔던 거구나.”


“그렇죠. 하지만 고교에 진학하려면 장래를 고민할 수밖에 없더군요. 아까 선배가 저보고 도련님 운운 했던 것도 이해는 해요. 아마도 제 이름 때문이었겠죠.”


그 말에 고훈 역시 씁쓰레한 표정으로 선우현이란 이름을 곱씹었다. 선우 가문은 남궁가 만큼은 아니더라도 내가 무공 쪽에선 상당히 이름을 떨치는 집안이었다. 때문에 모르는 이들은 선우현을 두고 선우가의 방계 출신 정도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어린 시절 한 차례 개명을 통해 얻은 두 번째 이름이었다.


“우습죠, 제 성적과 선우란 앞 글자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다들 현이라고 부르는 거 말이에요. 사실 제 이름은 우현인데.”


그랬다. 사고 이후 소년의 신상을 확인한 고훈은 그의 성이 선우가 아닌 선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요즘 흔히들 사용하는 작명 방식이었다. 얼른 보기에 명문가의 친척인 듯 착각하게 만드는 이름들, 그렇게라도 첫 인상을 좋게 해보려는 하류민들의 애틋한 노력이었다. 보통은 곧 들통이 나고 말지만 선우현의 경우엔 뛰어난 재능 덕분에 모두를 속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에 나오면 금방 들통 날 이름이지. 씁쓸하지만 표철호의 주장에도 일견 수긍할 수밖에 없는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다.”


“알아요. 하지만 선입견으로 제 재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게 싫었어요.”


“내공과 외공을 모두 수련한데다 성적도 우수하고 게다가 기를 감지하는 감응력은 독보적이다. 내가 보증하건데 이대로 계속 정진한다면 너의 재능은 어딜 가든 눈에 띄게 될 거야.”


고훈은 소년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힘을 북돋아주었다.


“그럴까요, 사실 오늘 일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아요. 표철호 선배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글쎄다. 내 임무는 범인을 색출해서 잡아내는 데 까지니 이후의 일은 모른다만, 감찰부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유연하단다. 저런 인재를 그냥 썩히진 않겠지. 게다가 외경과 내경의 혈도를 이어버린다니, 그 기술을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도 알아야 할 것이고.”


그의 이야기를 듣던 소년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것을 알아챈 고훈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그건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다. 어른들의 일이야. 그보다 너 자신을 잘 돌봐야지, 어서 회복해서 학교로 돌아가야 할 것이고. 전공 선택도 해야 하고. 졸업 후 진로에 대해선 생각해둔 게 있느냐?”


“언젠가 기를 읽어내는 제 능력을 보고 어떤 어르신께서 그러시더군요. 그런 능력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부처가 있다고.”


그렇게 말하며 선우현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고훈을 바라보았다.


“하하하, 그래 그런 부서가 있지. 하지만 거기 스카우트되려면 앞으로도 엄청나게 노력해야 할 게다. 아무나 뽑는 곳이 아니니까.”


“혹시 거기도 출신이나 뒷심으로 사람을 뽑나요?”


“솔직히 아주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구나. 하지만 아까 말했지 생각하는 것보다 유연한 조직이라고.”


고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입구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춘 그는 다시 뒤를 돌아 침상에 누운 소년을 보았다.


“열심히 해봐라. 너에게만 말하자면 내 아버지도 평범한 농부였다.”


감찰관이 나간 후 닫힌 문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소년은 수줍게 웃으며 천천히 침대에 몸을 뉘였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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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냥 16.02.03 03:52 댓글

    이 세계의 다른 이야기도 궁금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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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삼혜 16.02.07 20:35 댓글

    잘 읽었습니다! 무협과 현대기술(어... 사실 미래기술이라고 해야죠...)을 조합한 것이 흥미로웠어요. 기와 전기를 결합한 방식에서 아하, 라는 재미와 '어떻게 진행될까?' 란 의구심을 동시에 느꼈고, 예비사회(고교)의 암투도 흥미로웠습니다. 이런 게 장편이라면 어떻게 될지 무척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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