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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작 유통기한 보는 여자

2017.07.31 15:1407.31

유통기한 보는 여자

– 이니 군 –

여자가 직장을 다니는 이유는, 오로지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여자의 직업은 매장의 물품의 상태와 유통기한을 확인하는 총 검수원이었다. 말 그대로 매장에 있는 모든 물건들의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데도 매대에 놓여진 물건들을 적발하여 폐기한 뒤 본사에 목록을 작성하여 보고하는 일이었다. 그녀가 다니는 회사는 유기농 물품만을 다루어야 하는 법인으로 등록되어 있었으므로 명분상으로는 몹시 중요한 직책이었다. 법적으로 유기농을 명시한 매장은 유기농 또는 최소 무농약 물품을 일정 비율 이상 취급해야 했고, 이를 어기거나 유통기한을 넘긴 물건들이 매대에 놓인 사실이 적발될 시 장기간의 영업 금지를 당해야 했다. 처음 그녀를 채용했을 때, 중년의 면접관은 느물느물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우리 회사의 얼굴처럼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시게 되는 겁니다. 하루종일 한 매장의 모든 물건을 봐야 하는 일이었기에 어렵다기보다는 힘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전문성보다는 끈기와 체력이 필요했다. 게다가 매일매일 하나의 매장만 출근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여자는 한 지역을 할당받아 그 지역의 모든 매장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월초에 한 매장으로부터 출발하여 지역의 모든 매장을 한 차례 순회하고 나면 다시 다음달 초쯤에는 처음 시작했던 매장으로 돌아오게 되는, 나른한 순환이었다.

본사의 사규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각 매장에는 검수원의 방문 일정을 알려주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불시에 검사를 실시하여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직원들의 업무 태도의 긴장을 더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가볍게 목례를 하며 매장에 들어온 뒤, 사무실 한 켠에서 준비해온 가운과 마스크와 흰 장갑을 착용하고 있노라면 어느 매장이든 부랴부랴 분주해지기 마련이었다. 계산대의 시급직원 부인들이 매장 담당자에게 보고를 하는 사이에, 정육 담당과 수산 담당과 시식 담당 직원들은 미처 빠뜨린 머릿수건과 마스크와 위생장갑을 찾느라 바빴고, 젊은 대학생 시급직원들은 평소 소홀했던 매대를 황급히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묵묵히 매대 한 쪽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여자의 일은 단순하고 고요하게 되풀이되었다. 속도나 박자가 변할 이유가 없었다. 음악으로 치면 한 음을 영원히 끊기지 않도록 누르는 일과 같았다. 모든 물건들을 들어올리고 내려놓는 그녀의 팔동작조차 정확하게 반복되었다. 여자는 각 품목의 유통기한이 찍혀 있는 위치조차 모두 알고 있었다. 유통기한을 확인한 뒤에는 가볍게 손으로 쓸거나 눌러서 내용물에 이상이 없는지 살폈다. 신선식품의 경우에는 훨씬 더 쉬워서, 유통기한이나 포장일자를 채 보기도 전에 단지 가볍게 들어올려 손끝에 걸리는 무게만으로도 이상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여자는 고객들을 위한 카트 하나를 항시 제 곁에 두었고, 그 중 이상이 있는 품목들을 따로 쌓아두었다. 카트 바구니 위의 물건들이 점점 많아질수록, 심지어 그녀가 카트를 하나 더 달라고 조용히 부탁할 때에 매장 점장과 팀원과 시급직원들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녀가 작성한 보고서는 향후 이 매장의 평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한 종류의 단순 노동만 한다지만 그녀가 다니는 회사는 이 분야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어 이름을 얻은 곳이었다. 그래서 한 매장의 모든 품목을 다 보고 나면, 식사도 거른 채 퇴근할 때가 되곤 했다. 그녀는 일을 하는 동안 심지어 물조차도 잘 마시지 않았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소리를 죽여가며 분주할 매장 직원들의 모습도 싫었지만, 멋모르고 식사를 하려던 때에 흔히 듣는 ‘어유, 참 예쁘게도 생기셨다, 이런 일 할 것 같지가 않아.’ 라는 말도 부담스러웠다. 여자의 생김새에 꼭 어울릴 다른 일이 있다는 확신과 압박을, 여자는 굳이 떠안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그저 조용히, 자신이 먹고 살만큼의 돈을 받기 위해 계약한 업무만을 수행하고 싶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하루는, 퇴근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면허도 자동차도 없는 그녀는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그래서 저녁을 먹기에는 다소 늦은 시간에 비로소 어두운 집 안으로 혼자 들어왔다. 만약 아버지가 있었다면 흔히 듣는 남자의 고집 때문에 억지로라도 거실에 불을 켜놓고 우리 가족 모두가 옹기종기 앉아 있게 되었을까, 여자는 자신의 방에 짐을 내려놓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짐이라봐야 그 날 검수했던 매장에서 가져온 폐기물들이었다. 사진을 찍고 목록을 작성하기 위해서 가져오는 물건들이었다. 여자의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남동생은 남동생대로 각자 자신의 삶을 사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으나 설사 집에 있다 한들 그녀의 방 안까지 오는 일은 드물었다. 여자는 아버지가 없는 가족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지 늘 궁금했다.

여자가 업무를 보고 글을 쓰기 위해 켜놓은 노트북 화면만이 늘 방 안 구석을 밝혔다. 푸르스름한 불빛이 어둠을 타고 흠결없이 매끄러운 여자의 이마 아래로 떨어졌다. 여자는 어둠 속에 스스로를 혼자 두는 것을 좋아했다. 뭘 하든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여자는 가져온 폐기물품들의 바코드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목록과 가격을 작성했다. 회사 내부망의 전자결재 시스템에 올린 뒤에야 비로소 그녀는 늦은 밤과 이른 새벽 사이에, 하루 한 끼의 식사를 먹었다. 라면, 삼각김밥, 혹은 도시락 등의 소박하고 간결한 식사였다. 어쩌다 여자의 어머니가 잠에서 깨어 문이라도 열고 나면, 여자의 식습관에 혀를 차며 몇 마디 던지곤 했다. 정적은 깨졌지만 여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작고 고운 분홍빛 입술로 삼각김밥의 끄트머리를 깨물거나, 아직 덜 익은 라면의 한 입 끝을 조심스럽게 입 안으로 마저 빨아들였다. 마치 먹는 소리조차도 고요한 어둠을 깨뜨릴까 두렵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결국 여자의 어머니는, 침침하게 뜬 눈으로, 원, 기지배도, 불이나 켜고 먹든가, 하며 도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한 뒤에는 커피로 입가심을 하며 글을 썼다. 이 일이야말로 여자가 가장 힘겨워하면서도 좋아하는, 하루의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다. 차라리 원고지는 뚫어지기라도 하지. 여자는 하얀 워드프로세서 속 커서가 혼자 지치지도 않고 깜빡거릴 때마다 그렿게 생각을 했다. 전기가 계속 공급되는 한, 커서는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어서 자신을 일하게 해달라고 보챌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여자가 생각하는 시간의 바깥 속에서, 낮밤을 가리지 않고 느닷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늘 피곤한 모습이었고, 늘 화를 내었다. 넌 도대체 뭐하는 년이야, 옛날 같았음 벌써 시집갔어, 없는 살림에 대학까지 보내놨더니 글쓴답시고 허송세월, 이 년아, 사람 구실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자식 노릇이 그렇게 쉬운 줄 알어?

내가 언제 아버지 자식으로 나게 해달랬나요. 여자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버지는 마치 자신이 여자를 대학에 보낸 듯이 굴었지만, 사실은 그녀가 어렵게 돈을 모아서 갔다. 그것도 한 살 터울 남동생의 학비가 모자라 여자는 결국 가고 싶었던 학교도, 과에도 가지 못했다. 여자는 항상 글을 쓰고 싶었고, 대학만 가면 글쓰는 법을 제대로 배워서 보란듯이 작가로 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여자는 가난한 살림에 도움이 되기 위해 전문대 회계학과에 진학했다. 학생식당의 밥값조차 아끼려고 변변찮은 도시락을 두 개씩 싸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여자의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미안하구나, 겨우 그 한 마디를 여자의 가녀린 등에 꽂았다. 뒤따라 걷던 남자들이 꼭 한 번은 은근슬쩍 앞질러 여자의 얼굴을 확인케 하던, 곡선이 곱게 떨어지는 가녀린 등이었다. 워후, 대박. 남자들의 휘파람 소리, 자기들만의 키득거리는 소리들은, 다시 여자의 등 뒤로 멀어져갔다. 다시 그 소리들이 앞질러 오기 전에, 여자는 서둘러 학교 강의실로 향하곤 했다. 근데 쟤는 왜 맨날 똑같은 옷만 입어? 책만 저렇게 읽는데, 성적은 왜 맨날 저래? 라는 말이 들려올까봐 무서웠다. 여자는 재미도 흥미도 없는 공부를 마라톤하듯 악착같이 따라가며 언젠가 언젠가 아버지에게 바짝, 달끝 같은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내가 언제 아버지 자식으로 나게 해달랬나요! 라고 쏘아붙일 날을 고대했다. 보란듯이 책을 써서 보란듯이 멋진 소설가나 시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여자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여자의 가슴에는 늘 미처 털어놓지 못한 말들이 문장이 되지 못하고 용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만약 지금의 일을 하는데, 조금이라도 나은 역량을 보인다면, 그건 전부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이야, 여자는 그런 문장을 두드려 놓고 어이가 없어서 쓰게 웃었다. 정작 여자가 가장 많은 말을 꽂아주고 싶었던 아버지는, 늘 그렇듯이 여자의 시간 바깥에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어머니는 여자의 아버지가 어디 갔는지 설명하지 않았고, 여자도 남동생도 굳이 묻지 않았다. 그 것이 아버지가 없게 된 가족들의 일상이었다.

사막이 싹을 틔워내려 애쓰듯, 메마른 가슴에서 문장보다 피가 먼저 솟을까 싶어 아찔할 때, 여자는 술을 마셨다. 쩍지게 차려 걸판지게 마시는 술상은 아니었다. 그저 혼자 조용히 커피 마시듯 마시는 술이었다. 천원짜리 네 장이면 메마른 가슴에 비가 내렸다. 안주감은 늘 많았다. 구슬처럼 도톰하고 매끄러운 관자놀이가 첫 잔에 녹듯이 발그레해지면, 여자는 울렁거리는 손끝으로, 이제는 쓸데없게 된 폐기물품들을 풀어헤치곤 했다. 말이 폐기물이제, 유통기한 지나도 먹는데는 문제 없시야, 나는 항시 싸가서 반찬 해묵었제, 그것도 솔찬이 돈잉게. 하여간 젊은 처녀가 야무져부러야, 아주 싸악싹 잘 챙겨간당게. 그녀의 동그란 어깨 뒤로 매장 시급직 여사들의 빈정거림이 들으란 듯 빗방울처럼 떨어져내렸다. 만약 여자가 물건들을 적발해내지 않았으면, 그 폐기물품들은 매대에 얌전히 앉아 있다가 여자의 가족과는 다른, 정겨운 어느 가족의 저녁밥상이나 혹은 어린 자녀들의 도시락 반찬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여자는 그저 맡겨진 일을 했을 뿐이다. 여자는 봉지를 벗기고 모든 폐기 물품들을 살폈다. 그 때 폐기 물품들은, 폐기된 것들이 아니라, 단지 시간이 깊게 지나간 음식들이었다. 여자가 알 수 없는 시간의 변화를 온 몸으로 견뎌낸 음식들에게 애틋한 감정이 들었다. 남겨진 채 버려진 음식들이 왠지 자신처럼 느껴지었다.

언제부터 폐기 물품들을 안주삼아 먹기 시작했는지는 여자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면 유통기한이 지난지 얼마 안되는 햄 통조림의 짭쪼름한 향이 여자의 뱃속 깊이 도사린 식욕을 긁어 올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폐기라고 부르기에, 다지고 뭉쳐진 통조림 안의 살점들은 어둠 속에서도 몹시 붉고 단단해보였다. 여자는 처음으로 맹렬한 식욕을 느꼈다. 쓰고 뜨거운 소주를 조심스레 넘기고, 젓가락도 없이, 가느다란 풀줄기 같은 하얀 손가락으로 햄덩어리의 모서리 끝을 살짝 비틀어 떼어내었다. 미끌미끌한 기름기가 손에서 입으로 넘어갈 때 여자는 뿌리를 알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포장지 속에서 퍽퍽해진 과자들도, 기름기가 물처럼 옅어진 참치 통조림이나 연어 통조림도, 학창시절 여자와 남동생과 그들의 어머니가 전염병처럼 함께 달고 다녔던 멍이 든 사과도, 곰팡이가 눈꽃처럼 피어 물러진 귤과 버섯도, 바싹 말라비틀어지고 딱딱해진 레몬도, 전부 그녀의 입에 들어갔다.

그 중에서 여자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시간이 오래 지나 완전히 변색되고 물러버린 오이였다. 여자가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여자는 밀봉한 신선식품 봉지 내에서 습기가 생겨 무르는 부패의 과정이 무척 신기했었다. 여자에게 일을 알려준, 곧 퇴직할 늙수그레한 부인은, 이미 잔뜩 물러서 오이지처럼 변해버린 오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물기가 있죠. 시간이 지나면서 과육이 물러지고 무너지면서 안에 있는 물기가 밖으로 밀려나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썩어가는 과정이죠. 아, 그 때 여자는 곧 더 늙어버릴 여자의 말에 크게 감동받아 몇 번이고 한숨을 몰아 쉬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는 물기가 있어서 눈물처럼 바깥으로 습기를 밀어내는 것이구나. 그 날 밤 여자는, 한 잔의 술도 밥도 먹지 않고 미친듯이 몇 편의 시를 썼다. 여자는 온 몸과 마음을 불태우며 썼던 시들이 혹평조차 받지 못하고 공모전에서 떨어졌을 때 마음껏 울었고, 자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밀려나오는 눈물이 이렇게 많은 거라고 애써 자위했다. 여자는 밭고랑처럼 잔뜩 패인 주름 사이로 검버섯까지 피어 물기라곤 하나도 없을, 자신의 선임 검수원처럼 늙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다잡았다. 여자는 기필코 꽃 같은 글을 써서 숲처럼 피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여자는, 복수를 이루기 위해 곰의 쓸개를 핥고, 장작더미 위에서 잤다는 옛 왕들처럼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맛에도 먼저 혀를 내밀곤 했다. 그녀가 모르는 아주 작은 것들이라도 모조리 문장으로 끌어안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었다. 이미 물기에 완전히 삭혀진 오이 살점은, 맛을 느끼기도 전에 따뜻하게 녹아서 이미 씹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 때쯤에야 여자의 식습관을 알게 된 남동생은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누나, 미쳐도 곱게 미쳐, 술이 무슨 소독제야? 용케 탈도 안 난다, 비꼬았다. 그러나 여자에게 있어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을 먹는 일은, 스스로에게 허락된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어떻게든 꿈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확인이었고, 또한 버림받은 것들을 버리지 않으려는 마음의 온기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미 내 몸이 된 것들이 나를 아프게 할 리가 없어, 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아무 탈도 나지 않았다. 여자는 병원은커녕 화장실 한 번 가지 않고 탈없이 늘 글쓰는데 매진할 수 있었다. 여자가 노트북 앞에서 늘 골몰해 있다 술기운에 잠드는 새벽 나절, 아침 일찍 일을 나가는 어머니와 남동생은 그 때서야 졸린 눈을 비비며 무거운 머리를 이고 출근하였다. 세 명의 가족은 이렇게 분리되어 있었다. 여자는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의 무게가 더없이 좋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화분에서 마침내 잎이 열린 꽃처럼, 지금 이 삶을 토대로, 남들에게 인정받는 좋은 글을 쓰는 일이었다. 언젠가 끝나고 말 기한이 있다는 사실은, 삶을 부여받은 모든 생명들의 운명일 터였다. 어느 밝아오는 새벽에 여자는 그 문장을 쓰고 가슴이 먹먹해서 오래오래 그 문장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유통기한이 언제인지 알지 못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며 글을 쓰려고 노력할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유통기한이 끝나기 전에, 어서 자신이 어떤 결과물을 내놓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여자가 승진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결국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아주 막역하다고는 할 수 없는 대학 동기의 장례식장이었다. 3대 일간지의 한 면을 장식할만큼 제법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정작 여자에게는 가물가물한 얼굴이었다. 조문한답시고 찾아온 동문동창들도 비슷할 터였다. 사실 여자는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았으나 부고 연락을 대신 받은 여자의 어머니가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어머니의 강팍한 손길에 여자의 윤기 있는 길고 검은 머리칼이 차라락 소리를 내며 춤을 추었다. 이 년아, 그런 디라도 가야 사람들허구 안면이라도 틀 거 아녀, 페엥생 방구석 귀신으로 혼자 술만 처먹다 죽을텨? 그 동안 한번도 쉰 적이 없어 정기 휴무 날짜를 바꾸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정작 어려운 일은, 망자의 얼굴조차 흐릿한 판에 장례식장에 아는 얼굴이 있을리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예를 표했는지도 모른 채 황망히 절하고 황망히 부의금을 내었다. 그제서야 몇몇 어렴풋한 얼굴들이 보여 겨우 합석을 했다. 얼굴은 옛 기억의 가장자리에 걸쳐져 있는듯도 했으나 몸뚱이는 모두 낯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간 각종 물품의 상태를 살펴온 여자의 눈에는 시간의 변화들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칠팔년만에 만나는 동기들은 다들 같은 방식으로 나이를 먹었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생기없는 얼굴로 배만 나왔고, 여자들은 화장으로도 삶에 지쳐 흐려진 안색을 가리기 어려웠다. 기껏해야 다들 서른 안팎일텐데 이렇게 몸부터 먼저 나이를 먹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먼저 늙어 몸이 따라가는 것인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의 몸과 마음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내가 단번에 알아낼텐데. 여자는 혼자 생각하곤 혼자 싱겁게 웃다가 혹시나 싶어 메모지에 메모해두었다. 오늘은 이 문장으로부터 글 쓰는 연습을 시작해볼까 싶었다.

그러다 여자를 두고 나눈 몇 마디의 말이, 귓가에 날카롭게 닿았다. 만약 그 말에 칼날이 달렸다면, 하얀 치즈처럼 곱고 말캉말캉한 여자의 귓불은 뭉텅 두 조각으로 쪼개지고 말았을 터였다. 근데 쟤 걔 맞지? 맨날 책만 읽던. 맞네, 어휴, 얼굴 하얀 거봐, 어째 쟤는 나이도 안 먹냐, 그때 그대로다, 야. 쟤 요즘 뭐한대냐? 그제서야 겨우 주위 시선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술기운에 얼굴이 육개장 국물처럼 붉어진 남자들은, 게슴츠레한 눈을 숨길 생각도 않고 여자의 얼굴과 몸을 핥듯이 쳐다보았다. 여자가 낮에 애써 피하고 싶었던 시급직 부인들의 눈빛, 그리고 창고 담당 시급직 대학생들과 또한 그들을 통솔하고 이끄는 매장 점장의 눈빛과 같은 굴곡과 무게를 지닌 눈빛들이었다. 여자는 도망치고 싶었다. 만약 그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그러고 말았을 터였다.

씨빠, 혜즈이가 그리 죽을 줄 뉘 알았노.

혜즈이, 라는 말에 문득 여자의 머릿속 한켠이 밝아졌다. 몇몇 동창들도 겨우 아아, 하는 얼굴이었다. 혜즈이, 는 곧 혜정이로 연결되었다. 오랫동안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해왔으나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고, 집에 남는 찬밥과 김치 있으면 제발 좀 나눠달라는 메모를, 유서라기엔 삶이 너무 절박해서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문장을 남기고 굶어죽어 신문에까지 그 죽음이 기록된 궁핍한 동창의 이름은 혜정이었다. 맞아, 혜정이었어. 그러자 이미 오래 전에 잊어버리고 있었던, 귀가길에서 혜정과 나누었던 몇 마디 말도 겨우 가슴 속에서 살아났다. 넌 그래도 예뻐서 좋겠다, 지금도 우리 뒤편에서 남자들이 너한테 말이라도 붙여보려고 쫄랑쫄랑 쫓아오잖아, 난 뭐 영화판에서 사는 수밖에 없으니까. 영화판에서 사는 수밖에 없다던 혜정은, 그러나 영화판에는 들어가지도 못해서 굶어죽은 것일까. 그 때서야 여자는 겨우 혜정을 기억해냈고, 또한 혜정이 형, 형 하면서 자주 어울려 다니곤 했었던 한 남자에게까지 기억이 닿았다. 예술가 티를 내려는지 빵모자에 구레나룻과 턱수염을 이어지도록 멋지게 기르고, 유행따라 동그란 안경을 써서 세련된 멋이 있는 사십대 무렵의 사내였다. 그 때는 지금보다 젊은 티가 났었다.

서 감독님 맞으시죠, 이런 자리에서 정말 죄송하지만 너무 좋아하는 분이라서요, 싸인하고 사진 좀……. 헤정과 어찌 알게된 사이인지, 학교 다니던 시절의 혜정과 여자처럼 어린 티가 나는 여대생들 두엇이 슬쩍 말을 붙였다. 서 감독은 야수처럼 그녀들을 노려보았다. 치우쏘 마, 상가 아잉교, 요즘 아들은 이래 예의가 음노, 학교에서 뭐 배와, 대체, 씨빠, 취업하는 기나 가르치나. 대놓고 면박을 당한 여대생들은 입술 끝으로 욕을 흘리며 돌아가버렸다. 누군가 취기 가득한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위세 좋네, 서 감독, 역시 칸 영화제야. 주디 닥치라, 씨빠, 지금 기분 개 좆 같다 아이가, 미친년이, 넘우 집에 찬밥 김치 달라 걸구칠라 카모, 왜 내한테 전화 한 통 안했나 말다. 야야, 서 감독아, 그게 우째 니 잘못이고? 맞아, 혜정이 자존심이 좀 쎘냐? 아무리 전 남친에 영화판 동료였어도 어디 그게 쉬운 일이었겠어? 지역과 시간을 넘나드는 말들 속에서 기억 하나 가슴 속에서 명료해졌다. 오래 전, 혜정이 서 감독과 형, 형 하며 서로 어울려 다녔을 때, 혹시 저 남자와 인사라도 하게 된다면, 나도 저 남자의 영화에 지나가는 인물로라도 등장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아예 잊어버렸지만 적어도 당시의 그녀에게 영화감독은 글쓰는 사람만큼이나 신비했고, 미묘한 예술의 세계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비범한 이처럼 보였다. 그런 사람들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혜정이, 그녀의 세계가 부러웠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혜정은 죽고, 서 감독은 살아있다. 혜정은 비참하고 비루한 명예를 얻었고, 서 감독은 슬픔 속에서도 찬란히 빛났다. 여자는 손가락을 빗삼아 물미역처럼 검고 찬란한 머릿결만 쓸어내리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일어섰다. 도저히 마음이 어지럽고 답답해서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집에 들어가 노트북을 켜고 첫 화면을 대할 때까지, 이 복잡함이 그대로 이어지기만 한다면, 한 올 한 올 풀어서 좋은 글이 나올지도 몰랐다. 그녀가 서둘러 낮은 굽 구두에 아기처럼 보들보들 귀여운 발가락을 꿰었을 때, 뒤에서 성큼성큼 커다란 발소리와 그림자가 여자를 덮쳤다.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여자는 하마터면 앞으로 볼썽사납게 넘어질뻔했다.

봇쏘, 그 옛날에, 혜즈이 친구 맞지예? 와, 진짜 안 변하싰네, 내 모르겠습니꺼, 내 혜즈이 친구, 서……. 그가 자기 이름을 소개하기도 전에 여자가 황급히 말을 잘랐다. 네, 알아요, 서 감독님, 유명하신 분. 아이고, 맞네예, 혹시나 내캉 잘못 밨나 싶어가. 올만임더. 기왕지사 좋은 자리에서 봬야됐을낀데, 가씨나가 뭐하러 이래 사단을 내가……. 서 감독에게서 술에 젖은 남자의 냄새가 훅 끼쳤다. 여자는 반사적으로 뒤로 주춤 물러났고, 그 순간 키가 늘씬하게 큰 서 감독의 민망함이 여자의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아이고, 죄송함도, 내가 경황이 읎어가…….. 그는 재빨리 품을 뒤져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언제든 연락주쏘, 이래 만난것도 인연인데 한번 보입시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왜요? 아, 아이, 뭐, 벨 뜻은 엄꼬예, 뭐, 에이 씨빠, 혜즈이 빙시 같은거 그동안 어예 지냈나 얘기라도 들어야 안되겠십니꺼. 내도 뭐 영화한다꼬 미쳐가꼬, 이 나라 저 나라 뱅기 타고 빠알빨 돌아다니기나 했지, 같이 영화하는 친구 하나 살피지도 못한기, 후회막급이라예. 아, 예. 여자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저는 감독님보다 혜정이를 더 모르는데요, 라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여자의 가슴 속에서, 영화감독이야, 영화감독이라구! 접해보고 싶어, 이야기 나눠 보고 싶어! 예술하는 사람이란, 과연 예술하는 사람이란! 메아리가 쳤기 때문임을, 여자도 나중에서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 감독의 명함을 받고 돌아오던 날, 여자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잡살 하나 없이 매끈한, 유리 같은 옆구리를 돌려가며 침대만 문대다 결국 날이 밝았다. 원래도 잠을 깊게 드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토록 가물가물하던 혜정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눈이 작게 찢어지고, 광대가 높게 튀어나오고 입도 귀에 걸린다 싶을 정도로 컸었다. 활기가 옹골졌던 젊은 얼굴이 어찌 변하여 쓸쓸하게 죽었을까. 여자는 그 날 밤 내내 겁에 질려 있었다. 나 이렇게 살다 굶어죽는 걸까, 이렇게 살다 얼어죽는 걸까. 여자는 자신이 굶어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언제나 비운이 가득하게 스스로 먼저 자신을 끝내지 않을까 싶었던 상상뿐이었다. 혜정의 부고가 알려준 죽음의 냄새는, 하필 몹시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더 슬프고 두렵고 비참했다. 그녀의 유통기한이 바로 옆에서 초시계처럼 재깍재깍 그녀의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서 감독과 몇 번의 어색한 문자와 통화 끝에 시사회에 초청받게 되자 여자는 마냥 기뻐하거나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혜정의 장례식장이 생각나면서, 낯설고 낯선 곳에 혼자 가는 두려움을 더는 겪고 싶지 않았다. TV에서나 보던 배우들, 평론가들 틈에 끼어 내용도 잘 모르는 영화를 우두커니 보는 시간을 혼자 견디기는 어려울 터였다. 누구랑 가지. 생각이 많아진 여자의 노동은 처음으로 자주 어긋났다. 가장 가벼운 커피 여과지조차 제대로 들지 못해 몇 번이고 손아귀에서 미끄러졌다. 자꾸만 허리를 굽혀 커피여과지를 줍는 그 순간에도 여자의 머리 속은 우주처럼 돌아갔지만, 몇 안 되는 인간 관계에서 쉽게 답이 나올리 없었다. 남동생에게 도움을 청한들 긴 설명을 해야하겠고, 어머니 귀에 들어간다면 당장 퇴근길에 여자를 주저앉히며 글케 유명한 남자믄 빨리 잡아서 시집가부러!성화일 터였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울렸다.

어째 오늘은 평소랑 영 다르시네요. 낮고 거친 목소리가 그런 여자의 귀를 톡 건드렸다. 목소리에 돌기가 있다면, 안마기처럼 우툴두툴해서 귓구멍을 벅벅 긁어댈 듯했다. 여자는 떨어뜨린 여과지를 줍다가 오후의 그림자처럼 큰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하얀 가운에 모자를 썼고, 온 몸에서 담배 냄새와 고기 비린내가 났다. 정육코너의 젊은 직원이었다. 곱슬거리는 머리칼에 염색이 빠져 붉은 기가 살짝 남은, 여자보다 좀 더 어린 축의 남자였다. 여자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알 수 없어 어색하게 웃었다. 아, 네. 오늘 몸이 좀 안 좋네요. 평소에 식사를 안하셔서 그런 거 아니에요? 저 이 매장 온지 다섯 달 됐는데, 여기 와서 일하시면서 한번도 식사하시는거 본 적 없어요. 다른 매장에서도 똑같이 하시는거 아니에요? 아,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괜찮으시면 고기 몇 근 끊어다 드세요, 몸보신엔 육고기만한게 없다니까요. 남자는 속없이 벌쭉 웃었다. 눈도 코도 입도 동굴처럼 큰 사내였다. 구겨진 곳 하나 없이 활달했다. 여자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정육코너의 남자는 휘파람을 불면서 정육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여자는 멀거니 그만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자의 눈길을 명백히 의식한듯, 마치 춤추기 전의 광대처럼 앞치마의 멜빵을 한 번 쫘악 튕겨주고, 도마 옆에 놓은 칼을 숫돌에 썩썩 두어번 갈더니, 큼지막한 붉은 고기를 들어다 쿵 내려놓고, 눈처럼 하얗게 내려앉은 지방을 엷게 발라내기 시작했다. 커다란 칼로 지방을 발라내는 손동작과 또한 그 아래의 붉고 질기고 무거운 고깃살점을 정확히 잘라내는 칼의 각도와 속도와 움직임과 무게는 다 다를 것이라고, 여자는 막연한 짐작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투박해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매번 칼의 움직임에 가장 적합한 손의 형태를 섬세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여자는 단 한 번도 주의깊게 보지못한, 남자의 고기 써는 모습을 빨려들듯이 바라보았다. 그때는 그저 자신이 너무 지쳐서 무엇이든 다른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뭘 그렇게 빤히 보세요? 덕분에 신은 더 났네요. 아하하. 이거 제가 내는 거예요. 오늘 집에 가셔서 무 텀벙텀벙 썰어서 푹 끓여 드세요. 몸에 기운이 막 팔팔 넘칠 거예요! 목구멍 전체로 웃는 듯이 남자가 얼굴이 찢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큰 웃음을 지으며, 밀봉한 고깃덩어리를 여자에게 쓰윽 내밀 때, 여자는 비로소 남자의 명찰을 언뜻 보았다. 정육실장 윤, 그 뒤의 이름은 남자의 두터운 가슴의 옷주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그를 윤 실장으로 부르고 기억했다.

윤 실장의 목소리는 늘 기운이 넘쳤다. 덩치만큼이나 시원시원한 사내였다. 여자는 윤 실장에게 자신이 가지지 못한 힘을 보았다. 생김새나 행동 어디에도 막히거나 쩔쩔 매는 법이 없었다. 시급직 여사들이 조카뻘인 그의 듬직한 어깨를 손바닥으로 찰싹 치며, 아유, 우리 윤 실장은 워째 그리 힘이 펄펄 넘친당가? 하면 그는 또 넉살좋게 웃으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어설픈 사투리 억양으로, 아따, 이 근육 좀 보랑게요, 이두박근, 삼두박근! 고기를 먹어야 돼요, 고기를 먹어야 남자는 힘을 퐈악퐉 쓰는겨! 쩌렁쩌렁하게 과시하듯 외쳐대었다. 특히 여자가 곁에 있을 때 그는 노골적으로 흘끔거리며 더욱 과장되게 웃었다. 결국 여자도 그에게 어느 정도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란 다름아닌 그가 쓰는 말 때문이었다. 윤 실장의 정육 작업을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듯이 그가 쓰는 말의 억양과 어휘들은 모두 그녀에게 몹시 생소하였다. 음절마다 마디마다 숨결이 날뛰는 생기가 폭발할듯 넘쳐서 여자는 막연히 가슴이 뛰었다. 혹시나 싶어 정육코너 옆에 위치한 수산코너도 슬쩍 가보았지만, 무테 안경에 꼭 샌님처럼 신경질적으로 생긴 수산실장은, 긴 칼로 길쭉한 등푸른 생선의 등을 쪼오옥 가르다 말고 여자를 노려보며 여기는 검수직원이 트집잡을만한 게 없는 곳인데요? 도리어 면박을 주었으므로 여자는 쫓기는 새처럼 후다닥 뒤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쇠와 피와 죽어가는 생명이 있는 곳은, 모두 남자의 성역이었기에 그녀는 쉽게 다가갈 수 없었고, 그래서 겨우 한 마디 밀어내어, 곧 휴일인데, 수조 안의 물고기들은 누가 밥을 주죠, 하고 묻자 수산실장은 픽 웃으며 곧 죽을 놈들한테는 밥 안 줘요, 한 마디 하고는 생선의 머릿통을 칼로 따악, 떼어내버렸다.

곧 죽을 놈들. 곧 죽을 년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여자는 그 말이 꼭 자신을 지칭하는 듯이 들려 몹시 무서웠다. 여자는 그 날 새벽에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 죽은 이후에도 형광등 아래서 푸르게 빛나던 생선 눈알을 생각했다. 그녀도 조만간 밥 먹을 필요도 없이 죽음을 예고받을 것 같아 덜덜 떨었다. 글을 쓰지 못한다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늘 생각해왔던 여자였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죽은 혜정에게 다시 생각이 닿을 수밖에 없었다. 혜정은 언제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언제부터 위장을 도려내는 듯한 굶주림의 끝에서, 더이상 밥먹을 필요가 없으리란 사실을 알았을까. 혜정도 그녀처럼 시시각각 다가오는 유통기한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러니 글을 쓸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단지 윤 실장의 넉살좋은 웃음과, 시원스러운 칼질과, 그를 꼭 닮은 목소리와 말들을 생각하며 밤을 지샜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윤 실장을 따로 불러 약속을 잡았고, 혹시나 싶어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는 혹시나 이 사람이 날 이상하게 생각치는 않을까 고개를 푹 수그리고 눈치만 보았지만, 윤 실장은 뜻밖에도 소를 아예 직접 잡아오라는 업무지시를 받은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이었다. 네에,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그 날 봐요! 누나, 언제부터 내가 이 사람의 누나였지? 그녀는 알 수 없었지만 구태여 물어보지 않았다.

머리와 가슴이 하나로 연결된 듯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윤 실장을 본 서 감독의 얼굴이 왜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지 여자는 알지 못했고 사실 눈치채지도 못했다. 나이는 좀 더 들었어도 날씬하고 세련된 서 감독에 비해 윤 실장은 몸에 맞지 않는 정장을 억지로 끼어입어서 동물원을 탈출한 곰처럼 보였다. 남자… 친구신가 보군요. 인사도 없이 서 감독이 어색한 서울말로 물어보자,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고 여자도 조그맣게, 직장… 동료예요. 역시 비슷한 억양으로 대답했다. 서 감독은 가볍게 목례하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두 사람은 지정된 자리에서 조용히 영화를 봤다. 서 감독의 속마음만큼이나 알 수 없는 영화였다. 옆을 돌아보니 윤 실장은 이미 코를 골고 있었다. 역시나 한 점 민망함도 부끄러움도 찾을 수 없는 소년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결국 민망해서 윤 실장을 툭툭 쳐서 깨우고는, 그 커다란 몸을 방패삼아 숨듯이 후다닥 시사회 자리를 빠져 나와버렸다. 차라리 오지 말 것을,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새끼, 누나 전 남친이에요? 하품을 쩌억 하고 나서 소주나 한 잔 해요, 누나. 우와, 무슨 놈의 영화가 완전 핵노잼, 하고 여자의 손목을 나꿔채어 끌고간 허름한 고깃집에서 윤 실장이 잔을 채워주며 묻는 말이었다. 누구 말이에요? 아, 그 영화 감독이요, 허여멀건한 털보 아재. 아아니, 친구 친구예요. 친구 친구? 네, 죽은 친구의 친구였어요, 그래서 보러 간거예요. 아아… 친구가 죽으셨구나. 돌아가셨구나, 도 아니고 죽으셨다고 말하면서, 커다란 머리를 조금 수그러뜨리는가 싶더니 윤 실장은 돌연 벌쭉 웃었다. 난 또, 누나가 전 남친 기 한 번 죽여주려고 저랑 같이 가자고 하신 건 줄 알았거든요. 왜 그런거 있잖아요. 꼭 가오를 잡아야만 하는 자리. 그래서 친구 새끼한테 젤 좋은 옷 빌려 입고 간건데, 에이, 살 빼야겠다, 핏이 안 받으니까 좀 그랬어요. 그런..가요. 아니에요. 잘 어울렸어요. 여자는 애매하게 웃었다. 하지만 윤 실장은 애매하지 않았다. 그는 칼질하듯이 자신있게 고기를 굽고 자르고 여자의 접시에 세심하게 놓아주기까지 하면서 분명하게 말했다. 저, 그래도 고마웠어요. 누나가 나랑 같이 가자고 해줘서. 저는 누나 일할때마다 보면서 되게 좋아했거든요. 누나 완전 예쁘잖아요. 젊음만큼이나 솔직하고 숨김없는 접근이었다. 도저히 술잔 안으로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는 그날 새벽이 오기도 전에 몹시 취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몸 위로 무게를 싣던 윤 실장의 벗은 몸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 그 자체였다.

누나, 처음이에요? 안 아프게 해드릴게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조각배도 없이 커다란 파도에 휘둘리고 쓸려가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사랑일까, 이것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일까. 여자는 알 수 없어서 몸 절반을 쪼개고 꿰뚫는듯한 고통이 왔을 때, 입술을 꾸욱 깨물고 이불을 양손으로 꼬옥 잡았다. 윤 실장의 몸은 힘이 넘쳤지만 견디기 어렵도록 무거웠다. 몸에 맞지 않는 정장을 꿰어입듯이, 그녀의 가녀린 몸 어느 한 점에, 자신의 몸을 모두 쑤셔박을 듯이 씩씩거렸다. 윤 실장이 술과 담배 냄새 섞인 입술로, 아픔을 참느라 꼭 다문 여자의 입술을 억지로 적셔 열었을때,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몸과 마음 어딘가가 분명히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알았다. 윤 실장은 여자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핥고 물고 씹어서 먹어버릴 것 같았다. 여자는 정신없이 몸을 맡기었다. 그녀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벽이 요란스럽게 지나가고, 겨우 희미하게 밝아진 방 안에서 윤 실장이 지친 사냥개처럼 잠들었을 때, 그의 등을 살펴보고, 자신의 몸을 보면서, 여자는, 그래도 내가 억지로 끌려온 것은 아니구나, 내가 기억하지 못한 내가 이 남자의 무언가를 믿고 여기까지 왔구나, 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녀의 유통기한이 잠시라도 멀어진 듯한 밤이었다.

윤 실장은, 우리 사귀는 거죠, 라는 말조차 없이 여자가 자신의 연인임을 이미 온 몸으로 표현하고 다녔다. 솔직히 여자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녀가 가는 매장마다 시급직 여사들이며 여자 매니져들이 예전과는 다르게 싱글벙글 웃으며 오메, 얌전한 줄만 알었디만 언제 글케 듬직한 총각은 꿰어찼대요이, 하는 말을 인사랍시고 걸어왔다. 지금껏 그녀가 자신의 하루를 지키던 선들이 점점 흐트러졌다. 특히 다른 매장의 정육코너 직원들, 즉 윤 실장의 동료이자 선후배일 그들이 모두 느물거리면서 축하드립니다, 형수님, 제수씨, 하며 키득거릴 때는 솔직히 화를 내고 싶었으나 그 때마다 윤 실장이 생각나서 애매한 미소로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윤 실장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버지처럼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잘 됐어, 나 혼자만 끙끙 앓지 말고, 그와 함께.

그러나 윤 실장은 그녀가 온전히 들어갈 틈이 없는 청년이었다. 항상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항상 맛있는 식당이나 그럴듯한 데이트 장소를 알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여길 예약하거나 알아내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길게 길게 쏟아내었다. 꼭 늘상 칭찬받고 싶어하는 커다란 충견 같았고, 또 그런 자신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그의 얘기를 듣는 동안 늘 술이 빠지지 않았고, 취하고 나면 역시 그의 손에 이끌려 둘만의 밤을 보내야 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쏟아낸 뒤에야 윤 실장은 만족한 표정 그대로 푹 엎어져 잠들었지만, 여자는 정말 이러한 나날들이 남녀 간의 사랑인지 알 수 없어 외로웠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윤 실장의 입과 손과 넓은 등뿐이었다.

그래서 겨우 낮에 서로 틈을 내어 커피 한 잔을 마시게 되었을 때, 여자가 조심스럽게, 나, 글을 쓰고 싶어, 내 평생 꿈이야, 라고 했을 때, 윤 실장은 대수롭지 않게, 그래요? 소설이나 시 같은거 말하는건가? 하더니, 쓰면 되죠, 재밌게 써서 나 좀 보여줘요. 하하, 나도 나와요? 라고 가볍게 말했다. 글쎄, 여자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애매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지만, 이미 그 때 이런 주제로 그와 대화할 수는 없으리라는 실망에 오랫동안 숨을 골라야 했다. 여자가 얼마나 많은 말들을 속으로 고르고 있는지도 모르고, 윤 실장은 빨대로 장난을 치며 달고 차가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겨우겨우 여자가, 그래서 말인데, 사실 요즘 나 어려워, 일하고 너랑 만나고 글까지 쓰려니 시간이 안 나오네, 나도 내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아, 라고 말하고 나서야 그녀는 처음으로 윤 실장의 다른 모습을 보았다. 윤 실장에게서는 낯선 모습이었으나, 그녀에게는 이미 아버지를 통해 익숙한 모습이기도 했다. 윤 실장에게는 작은 짜증이었을테지만, 여자는 이미 지독히 두려웠다. 왜 꼭 글을 쓰는데 내가 없어야 되죠? 내가 누나 옆에 있고, 누나가 노트북 가져와서 글을 쓰면 되잖아요, 누나는 대체 사랑이 뭐라 생각해요? 누나 똑똑하잖아요? 숨결마다 가시가 돋친 말투로 한참 동안이나 쏟아놓던 윤 실장은, 결국 끝까지 대수롭지 않은 억양으로, 숨을 쉭쉭 몰아쉬면서 말했다. 그럼 누나가 승진하면 되겠네요. 본사 정규직 되면, 칼출칼퇴 훨씬 쉽잖아요. 난 누나가 다른 데로 이직하는 건 싫어요. 차라리 누나가 우리 매장으로 아예 딱 발령이 났음 좋겠어요, 그럼 맨날 보잖아요. 결론이 났다는듯이 커피를 벌컥벌컥 시원스레 마신 뒤에 담뱃불을 붙이는 윤 실장 앞에서 여자는, 막막하여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앞에서 유통기한 운운하는 이야기를 해봐야 미친 여자 취급받을 게 뻔했다. 영자는 입을 다물었다. 두 번 다시 열지 않을 사람처럼 다물어버리었다.

승진을 하려고 마음을 먹자 특히 어머니와 남동생이 반겼다. 그려, 인자 네가 철이 드는갑다이. 여자는 더이상 대답할 여력도 없어 자기 방으로 쫓기듯 들어왔다. 여전히 켜져있는 노트북의 하얀 화면이 그날따라 견딜 수 없어서 쿵 소리가 나게 닫아버렸다. 어쨌든 윤 실장과 연애를 시작한 뒤로 그녀의 근태 평가는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 윤 실장과의 외박이 잦아지면서 출근 시간을 못 맞추는 일이 종종 생겼고, 당연히 쫓기듯이 유통기한 검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유통기한 검수를 위하여 매장이 연장 영업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결국 여자는 예전만큼 자세히 매대를 살펴보지 못했다. 게다가 윤 실장과 한 번 연결고리가 생기고 나니 매장의 다른 직원들의 이야기 또한 받아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로소 그녀는 세상을 순환하는 물처럼 돌고 도는, 사람들의 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여자는 단지 누군가와 관계를 맺음으로 해서, 순식간에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지는 이 연계의 무게가 참을 수 없이 무서웠다. 어디엔가 그 부담과 두려움을 비우고 싶었는데 윤 실장은 관심도 없었고, 예전처럼 글이라도 쓰며 풀어놓기에는 밀린 일이 너무 많아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악순환이었다. 글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데 업무 효율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 그녀는 남들 다 한다는 연애란 사랑이란 이런 것일까 종잡을 수 없어 어렵고 모호했다. 게다가 자신이 사랑받는 기분조차 들지 않아 매 일상이 씁쓸하고 재미가 없었다. 그저 늘상 쫓기듯 바쁠 뿐이었다. 그런데도 여자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은 그마저도 이제야 네가, 누나가, 철이 들었다며 또다시 대견한듯한 눈빛을 보내와서, 그만 여자는 할 수만 있다면 그 눈빛에 찔려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그런 즈음에 서 감독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하이고, 마, 미처 그때 신경을 못 씄드만은, 언제 그리 휙 가시삤습니꺼, 내사 참말 민망코 죄송시러바서. 왜 갑자기 연락이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때 그녀는 휴무일이긴 했지만 밤새 커피를 마시며 밀린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위 아래의 숫자가 반드시 톱니처럼 맞아야 하는 도표들을 비교하고, 오로지 컴퓨터만이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 명령어들을 눌러가며 쉼없이 빈 칸을 채우는 숫자들을 보고 있었다. 숫자들은 그녀가 좋아하는 말과 전혀 달랐다. 조금만 어그러져도 포용되지 않았고, 괴이한 기호로 바뀌며 삑삑 소리를 내었다. 이런 일을 해야만 정규직이 되고 승진할 수 있는 것일까, 싶어 진저리가 났다. 그러던 차에 걸려온 전화였다. 네, 죄송하지만, 제가 좀 바빠서. 하이고, 내가 이래 눈치가 음따, 죄송함도, 난중에 커피 한잔 하지예, 좋아하실만한 영화 이야기도 있꼬예. …영화요? 무심코 영화요? 라고 묻는 순간, 서 감독이 옳다구나 싶은 신난 말투로 대답했다. 하모예, 즌번처럼 막 그래 실험적인 그런 영화가 아임니더, 솔직히 즌번에 그 영화는 머 펭론가들 비우 마출라꼬 일부러 빡빡하이 만든 기고요, 이번 영화는, 아이고, 내사 뭐라 호칭해야 되노, 여튼 그 짝처럼 젊은 아가씨들, 여승들이 좋아할 그런 달달한 이야기라 안 합니까, 씨나리오도 각별히 공 들였으예, 영화는 머니머니해도 스사! 이야기가 있어야 최고 아잉교.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비적비적 새어나왔다. 아마도 그는 '여성' 을 말하고 싶었겠지만, 자꾸만 여승으로 발음되고 들리는 그 단어가 그녀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그래, 맞아, 내가 무슨 스님이야? 내가 왜 지금 여기서 내가 하기도 싫은 일 하고 있어야 해? 언제 이런 사람이랑 이런 이야기를 또 해보겠다고. 그러고보면, 윤 실장과는 책 얘기는커녕 영화 한 편도 제대로 취향에 맞춰 본 적이 없었다. 아, 진짜 누나, 그 뺀질이 새끼처럼 뭐 이런 영활 보자고 그래요. 그녀에게는 안중에도 없던 서 감독을, 윤 실장은 은근히 신경쓰는듯해 보였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솔직히 피곤했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얘기하기도 길고 성가신 일이라, 그녀는 그래, 너 원하는 거 보자, 하고 늘 선선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때마다 윤 실장은, 와, 역시 누나 짱! 최고! 하며 애교를 부렸지만, 사실은 그녀가 늘 윤 실장과 맞상대할 힘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본 영화들은, 늘 피와 욕설이 교향곡인양 길게 늘어지고, 술과 담배와 섹스로 꾸역꾸역 넘쳐났다. 그런데도 항상 윤 실장은, 으와, 끝내준다, 카타르시스! 누나, 제가 또 맛집 알아놨어요! 하며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 결국 언제부터인가, 여자는, 아버지에게 미처 못한 말처럼, 윤 실장에게도 하고픈 말을 가슴에 묻어두기 시작하였다. 왜 굳이 그런 영활 보러 가니, 너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 순간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밀어내었다. 저 지금 너무 안 좋아요, 지금 당장 커피 한 잔 할 수 있을까요.

서 감독은 저번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듯 보였다. 아이고, 아무리 그래도 이래 갑자기 보자 하실 줄은 몰랐십니도, 바쁘신 줄 알았는데. 여자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기는 했다. 서 감독의 얼굴은 들떠 있었다.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여자가 갑작스레 영화를 보러 갈 수 있겠느냐고 밑도 끝도 없이 물어봤을 때 밝게 빛나던 윤 실장의 얼굴과 비슷하게 보였다. 서 감독은 영화감독이라기보다 화가처럼 보이는 빵모자에 유행하는 동그란 안경을 끼고, 멋지게 기른 턱수염을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다소 긴장한듯 해보였다. 그 모습이 오히려 맥빠지도록 귀여워서 여자는 살풋 웃었다. 여자가 먼저 웃자 서 감독도 멍청히 따라 웃었다. 공기가 스르륵 풀렸다. 부드러워진 분위기와 함께 말문이 트인 서 감독은 그 동안 자신이 읽었던 책이며 보았던 영화, 그리고 그에 따른 자신의 감상과 앞으로 자신이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지 어떤 예술을 할 것인지를 길게 길게 쏟아놓기 시작했다. 말의 마디마다 기름을 바른 듯 미끄러지는 달변이었다. 그 날 여자는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아이고, 우리 씩사라도 해야 안 하겠십니꺼, 내가 생각도 몬하고 떠들어노니라 시간이 벌써 이래 됐다 아이가, 죄송시러바서. 서 감독이 그렇게 말했을 때야 여자는 비로소 둘 사이에 나른하게 비껴 누운 노을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모래시계처럼 가느다랗게 파인 그녀의 허리가 지끈 쑤시었다. 점심 시간부터 식사도 거르고 반나절을 종일 앉아 있었던 탓이었다. 서 감독이 놀라 따라서 벌떡 일어났다. 하이고, 제가 머 실례라도...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오늘 할 일이 좀 있었는데, 실은... 여자는 몹시 당황하여 횡설수설했다. 갑작스레 가슴이 콱 메여왔다. 어떻게 하면 서 감독에게 오늘 정말 할 일이 많았는데도, 그마저 잊을 정도로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고 그렇지만 덕분에 할 일이 생각나 버렸다고, 이젠 미룰 수 없다고, 그래서 저녁을 함께 먹고 갈 수 없지만, 그게 서 감독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이라는 긴긴 말의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서 감독이 불안하게 눈알만 뙤록뙤록 굴리니 더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겨우겨우, 아니에요, 감독님, 저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근데 일이 바빠서, 일이 바빠서, 지금 생각나서, 마치 결승띠를 끊은 마라톤 선수마냥 할딱할딱 이야기를 마치고는,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월말 보고서의 기한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날, 윤 실장의 얼굴이 대단히 좋지 않아서 여자는 무서웠고 주눅이 들었다. 아, 씨발, 진짜, 누나 뭐예요, 요즘. 저까지 형한테 엄청 깨졌잖아요. 그가 말하는 형이란, 다름아닌 여자가 속한 팀을 총괄하는 팀장이었다. 성격이 깐깐하고 트집잡기 좋아하는 중년 남자였다. 유행이 한참 지난 무테 안경을 밀어올리며 숫제 반말이었다. 아니, 뭐 연애가 엄청 좋으신가봐? 아니, 요즘처럼 결혼 안하려는 정신 나간 여자 많은 시대에 애국심 발휘해서 연애하시는 건 좋은데, 일은 제대로 하셔야지, 이게 뭐예요, 이게, 이게 보고서야? 눈이면 좀 봐요,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여자는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물러나왔고 윤 실장은 그런 그녀를 더욱 몰아세웠다. 아니, 대체 어제 뭐했어요, 보고서 쓴다고 휴무 빼놓고 나도 안 만났잖아요, 누나 승진하기 싫어요? 나랑 결혼도 하고 싶고, 글도 쓰고 싶다면서요, 아, 진짜 우리 어린애 아니잖아요, 누나가 나보다 더 철이 없으면 어떡해요. 그 순간 자신의 눈빛이 어땠는지 여자는 몹시 궁금해졌다. 윤 실장의 불퉁하던 얼굴이 아예 굳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치 냉동고 구석에서 오래 묵어 보랏빛으로 얼어붙은 고깃덩이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언제 너랑 결혼하고 싶다고 했니? 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우리 나이가, 아니, 누나 나이는 더군다나 몇인데, 누나 나랑 결혼 안할 거예요? 내가 나이가 많으면, 너랑 결혼해야 하니? 난 그렇게 말한 적도 생각한 적도 없어. 윤 실장의 얼굴이 참혹하게 파들거렸다. 금방이라도 얼굴이 빨갛게 폭발할 듯 보였다. 잠시 얘기하자고 나온 매장 뒷편 좁은 복도가 우르르 무너질 듯 휘청거렸다. 누나 진짜 개어이없네요, 누나 지금 나하고 장난쳐요? 윤 실장이 칼로 찌르듯 물었을 때 여자는 그만 등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단 하나의 대화의 싹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가슴은 말 그대로 사막, 마르고 갈라져 타버린 사막이었다. 윤 실장은 그녀를 유통기한 끝까지 몰아붙이는 절벽 위의 짐승처럼 보였다.

여자의 이야기를 들은 서 감독은 물기 있는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꾸며내어 연출된 웃음인지 혹은 진심인지 여자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대부분 한국 남자들이 다 글타 아입니까, 마초, 쌍마초, 씨바, 내도 뭐 갱상도 싸나아라 뭐 그런 말할 자격이나 있을라나 모르지만서도, 또 쌩물학적 남승이 여승의 권리와 자유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기 을매나 빡신긴지 지도 안다 아입니까, 고생 많으셨으예, 이래 은어가 다르모, 으짤 수 없는 깁니더, 그동안 스로 사는 세계가 다른걸 우짤 낍니꼬, 머쓰마는 다 그냥 첨부터 죄인인기라예. 서 감독은 만날 때마다 여자의 마음 한 구석을 깊이 긁어주었다. 여자는 그 동안 그녀가 겪었던 모든 일들을 남김없이 이야기했고, 그 때마다 서 감독은 그녀의 삶에 걸려 있던 매듭과 모서리들을 하나하나 짚어주며 풀어주었는데, 얼마나 여자의 가슴에 스미듯 이야기하는지, 여자는 서 감독이 혹시 자신의 삶을 씨나리오처럼 읽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할 지경이었다. 사실 여자는 책 읽기와 쓰기를 좋아했을 뿐 체계를 갖춰 전문적으로 배웠던 적은 없었기에 서 감독이 뿜어내는 현하의 웅변에 늘 매료되었다. 그는 여자가 전혀 모르는 교향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고 다른 방식으로 연주할 수 있는 이처럼 보였다. 여자는 서 감독의 모든 말들이 좋았다. 서 감독은 항상 그녀를 모르는 곳으로 인도했다. 윤 실장이 늘상 데려가는 고깃집이나 호프집은, 여자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친숙한 곳이었지만, 서 감독과는 미술관이나 콘서트장, 박물관, 재즈 바 같은 곳을 주로 함께 다녔다. 서 감독은 마치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이 저녁을 함께 하곤 했는데, 그런 그가 데려가는 장소 역시 여자의 입장에서는 낯설고 신비한 곳일 뿐이었다. 서 감독은 여자가 모르는 모든 영역들을 편하게 누리고 있던 사내였다.

그러나 여자는 단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었다.

윤 실장과의 관계가 단번에 소원해지면서, 여자의 생활 축은 원래대로 돌아온 듯 보였다. 승진에 대한 열망과 압박은 사라졌다. 윤 실장은 여자를 늘상 태워죽일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따로 접촉을 하진 않아서, 여자의 시간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왔다. 그녀가 일을 하는 동안 주위를 맴도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을 분명히 느꼈으나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와 가슴은 온통 서 감독과 나눴던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의 언어를 생각하고, 내용을 생각했다. 여자가 수줍게, 그게 무슨 뜻이냐 물어보면, 서 감독은 또 사르르 웃으며, 아, 그기 말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모- 하면서 찰찰찰 모래 놀이하듯 설명해주었기 때문에 여자는 귀담아 들었다가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녀가 생각했던대로, 영화감독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그녀는 매순간 자신이 모르는 것들을 흠뻑 빨아들이듯 배우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를 만나고 돌아와서도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서 감독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왔지만 여자의 입장을 감안해서 항상 매장에서 다소 떨어진 길목에서 기다렸고, 그래서 늦은 시간까지 함께 이야기 나누다 그녀를 돌려보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는 온 몸에 문장이 들끓는 것 같아 몸이 달았다. 달빛마저 설레어 몰래 건드려보는, 매끈하고 가녀린 몸선 바깥으로 문장이 밀려나와 어지럽기까지 했지만 막상 하얀 배경을 마주하는 그 순간에 또다시 그 문장들은 거품처럼 순식간에 꺼져버리었다. 그녀에게 남아 있는 건 늘 서 감독의 언어뿐이었다. 누벨 바그가 무엇인지, 다다이즘이 무엇인지, 마술적 리얼리즘이 무엇인지, 영화적 언어와 문학적 언어는 어떻게 다른지, 위아래로 출렁이는 사투리 억양까지 섞어서 차라리 성대모사를 하라면 그대로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녀의 언어는 간 곳이 없었다. 윤 실장과 만나던 시절에는 그녀의 문장이 자라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의 문장을 심을 땅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우유처럼 하얀 그녀의 목을 베어내면 붉은 피 대신, 서 감독이 그녀에게 뿌린 언어들만이 퐁퐁퐁 검게 주변을 물들일 것 같았다. 윤 실장과 만나던 시절에는 유통기한이 아주 빠르게 달려오며 그녀의 목을 조여오는 기분이었지만, 서 감독과 이야기할 때는 그녀의 유통기한이 언제까지인지도 알 수 없어져버리었다. 무게는 달라지지 않았고, 불안의 방향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리었다.

그래서 서 감독이 잘 간다는 와인 바에서, 감독님, 저 요즘요, 감독님이랑 이야기 나누면서요, 제 글을 잃어버렸어요, 제 말을 잃어버렸어요. 여자가 마디마다 취기에 젖어 그렇게 말머리를 들이밀자 감독은 캬아, 하고 과장되게 웃어버렸다. 내 이래서 좋아함도, 내 이래서 맨날 본다 아입니까, 말씀하시는 기 자체가 영화라예, 내 같은 건 감독 축에도 못 낀다 아이가, 즌에는 머라셨더라? 내랑 얘기하모, 본인의 유통기한이 아예 보이지도 안는따고, 아득하다 하싰든가? 서 감독은 손뼉을 치면서 와인 잔을 채워주었다. 그날따라 여자는 색색의 와인을 마시었다. 마실 때마다 와인의 색깔이 계속 바뀌어서, 무지개를 잘라다 마시는 듯해 보였다. 여자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서 박사가 꽃망울 진 언덕 같은 그녀의 가슴골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며 입술을 가까이 대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지개가 사라졌다. 카푸치노처럼 부드럽게 감기던 흑인 재즈 가수의 목소리가 돌연 귓바퀴를 베어내듯 날카로웠다. 모든 색깔들이 까맣게 바래었다. 여자는 상체를 비틀어 빼면서 서 박사를 밀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서야 유독 눈에 잘 뜨이지도 않는 구석 자리에 앉았음을 알았다. 전 항상 여에 앉습니다, 소리가 가장 잘 모이는 곳이라서예, 말했던 서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혹시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을까, 모멸감에 등골이 파르르 떨리었다. 서 감독은 취기가 어지럽게 도는 눈동자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간 여자의 손목을 다시 나꿔채는 서 감독의 눈을 보았을 때 여자는 비로소 그가 전혀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름이 돋았다.

아이고, 와 이랍니까, 내가 고마 실쑤했씀도, 용서하고 들어가쏘, 마 예쑬하는 사람들끼리 술 마시다보모, 서로 감정이 얽히가 실수할때도 있고 그란기지... 실수요? 감독님은 이런 것도 실수라고 생각하세요? 차마 가슴에 손을 넣지 않았냐고 큰소리로 말할 자신은 없었다. 술 취한 두 남녀가 다투는 일이야 다 그렇게 흔하다는 식으로 사람들의 눈빛이 금세 머물다 지나가는 일도 싫었고, 주목받는 일은 더욱 싫었다. 하지만 서 감독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먼 소리를 그래 하요, 내 억울하네, 내를 여지껏 그래 밨십니꺼, 우리 을마 전에 얘기 안했능교, 음성 언어가 있기 전에 몸짓 언어가 있고, 몸짓 언어의 코드는 서로 다르이께네 왕왕 오해도 발생할 수 있다, 내 그래 말했을낀데! 사람 의도를 가꼬 행동을 판단해야지, 결과만 갖고 그라모 억울해가 몬 사는기라! 내 서 감독이요, 서 감독! 카안 영화제 명품 감독 서 감도오오옥! 마지막에 서 감독은, 여자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유리를 잡아찢는 듯한 새된 목소리였다. 여자는 그 때 윤 실장과 함께 있던 복도를 생각했다. 안 그래도 좁은 복도가 더욱 좁아지고 무너지던 그 복도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복도 끝에서, 진짜 윤 실장이 나타났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느닷없는 출현이었다. 윤 실장은 다짜고짜 주먹을 내갈겼다. 칸 영화제 명품 감독 서 감독? 미친 새끼, 그럼 나는 명품 실장 윤 실장이다, 개새꺄, 서 감독의 안경이 피리릭 날아가고, 뒤이어 서 감독이 역시 날아가듯 그 뒤를 따랐다. 좆 같은 새끼, 어따가 개수작이야, 남의 여자한테. 누나 괜찮아요? 여자를 돌아보는 윤 실장의 얼굴을, 훗날 여자는 아주아주 혐오스럽게 묘사하게 되었다. 자신의 연인을 지켜냈다는 자신감, 그리고 모든 과거의 다툼을 용서하겠다는 식으로 넓은 가슴을 펴며 다가오는 윤 실장을, 그러나 여자는 역시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저었다. 나, 네 여자 아냐, 여긴 왜 왔니. 윤 실장의 얼굴이 잠깐 멍해지다가 다시 붉어졌다. 누나, 씨발,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해요, 걱정되어서 맨날 뒤 밟은 사람한테, 덕분에 지금. 여자는 말을 잘랐다. 너 지금 여지껏 나 따라다녔다는 거니? 그럼 걱정되는데 어떻게 해요! 너가 뭔데 내 걱정을 해! 아, 진짜 누나 왜 그래요, 누나가 내 여자가 아니면? 설마 저 새끼 여자... 아마 윤 실장이 서 감독이 여자라고 알려주려던 것은 아니었을 터이다. 여자가 서 감독과 교제 중이냐는 사실을, 본인의 혈기에 따라 강하게 물으려 했는데, 그 순간 옆구리가 지끈 쑤시며 몸이 무너졌기 때문에 차마 질문을 끝맺을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 흐트러진 숨으로 무너진 윤 실장의 거구 뒤로, 마치 액션 영화의 절정 장면을 촬영하듯, 한쪽 얼굴이 시퍼렇게 부어오른 서 감독의 모습이 드러났다. 존나 돼지 같은 새끼가, 어따 선빵을 날리노? 아, 개새끼, 얼굴에 기스 났네, 씨발 놈아, 내도 액션배우들 조질라고 운동 좀 했그든? 닌 오늘 디지따, 씹새야. 윤 실장과 다르게 서 감독은 그때쯤 술렁거리며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정말이지 흠뻑 즐기는 듯한 모양새로 발을 쭈욱 뻗어올렸다 아래로 내리그으며 빠각, 윤 실장의 정수리를 내려찍었다. 막 일어나려던 윤 실장이 그 발차기에 다시 허물어졌다. 지금까지 여자에게 한번도 들려준적 없던 욕설들을 가래침 뱉듯 퍼부으며 서 감독은 윤 실장의 커다란 몸뚱이를 걷어차고 또 걷어찼다. 아이고, 사람 죽네, 저러다, 누가 좀 말려요! 누군가 소리를 질러 서 감독이 잠깐 움찔하는 틈에 이번에는 윤 실장이 마치 영화 속에 초록색 거인처럼, 그의 두 발목을 붙잡고는 벌떡 일어나며 메다꽂아버렸다. 어떻게든 멋을 부리려는 서 감독에 비해 윤 실장의 움직임은 투박하고 곧았다. 두 남자는 곧 사랑하듯 엉기었다. 서로의 몸에 자신의 흔적을 새겨넣으려고 안달이었다. 여자는 그만 강렬히 구토하고 싶어졌다.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여자는 도망쳐버리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 여자는 바로 사표를 내었다. 중년 팀장이 느물거리며, 아이고, 설마 결혼하시나? 라고 비아냥거렸을 때 여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매장을 떠났다. 오전 내내 윤 실장의 전화가 왔지만, 여자는 그의 번호를 차단하였다. 오후에는 다시 서 감독의 전화가 쉼없이 왔지만, 그 역시 차단하였다. 여자는 그 날 저녁 바로 전화번호를 바꾸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여자는 두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윤 실장이, 서 감독이, 서너 번 그녀의 집 근처를 맴돌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들도 결국 거기까지였다. 다행히도 서로 마주친 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여자의 세상에서 두 남자는 없어졌다. 어머니와 동생이 몇 번이고 여자의 방문을 두드렸으나 여자는 문만 열어주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자의 삶은, 여자의 언어는, 오로지 그녀 스스로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곁에서 유통기한이 시한폭탄처럼 째깍째깍 달려오는 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 것도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여자는 기어이 대답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어머니와 동생을 향해 단 한 마디만을 겨우 힘겹게 내밀었다. 살려고, 나 살려고, 엄마, 얘, 나 살려고, 살고 싶어서. 그러므로 글을 쓰기 위해 직장에 들어갔지만, 결국 살려고 직장을 나온 셈이 되었다. 여자의 핏기 하나 없는 얼굴과 힘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메말라버린 말투에,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문을 닫았다.

몇 년이 지나 여자는 서울 북쪽의 조그마한 까페에 취직했다. 골목과 골목 사이를 한참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어서 설사 길을 안다고 해도 어떻게 오는 곳인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본디 연극배우 출신이라는 중년의 여자 사장은, 여자를 몹시 마음에 들어했다. 면접을 마치며 채용하겠다는 의미로, 이 공간이랑 아주 잘 어울리네요, 라는 말은, 지금까지 들어온, 예쁘다, 귀엽다, 인기 많겠다, 라는 말보다 훨씬 더 마음에 깊게 와닿았다. 적지 않은 나이에 왜 조그마한 까페에서 시급을 받으며 일하려는지도 묻지 않았다. 이 골목 바깥만 나가도, 세상 살기 참 힘들죠, 쉰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일하셔요, 손님도 많지 않구, 일하긴 편할거예요, 월급도 많지 않아서 걱정이지만. 사장이 잔잔히 웃으며 말을 건넬 때 여자의 가슴은 몹시 편해졌다. 지금까지 이만한 편안함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제서야 여자는, 불필요한 타인과의 접점이 얼마나 스스로를 누르는지 명확히 실감하였다. 그리고 잘 찾아보면, 충분히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그늘 같은 피난처가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여자는 이 곳에서 매일 청소를 하고, 원두와 기계를 점검하고, 원두를 갈아 향을 온 곳에 가득 배이게 하고,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여자는 자신의 문장을 찾아 지금껏 지나왔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삶의 맥락이란 아주 크게 다를 이유는 없겠으나 여자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삶은 여자만의 것이었다. 여자는 점점 유통기한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여유가 늘어나면서 비로소 문장을 오래 쥘 수 있었다. 여자는 아주 조금씩, 마음을 놓게 되었다.

아주 먼 훗날, 여자는 직장을 다니던 시절을 그렇게 추억하게 되었다. 오래된 옛말처럼 어떤 색에 물드느냐에 따라 자신의 색깔도 달라지게 되는데, 그때 자신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색깔에 너무 많이 물들어서 힘겨웠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신을 지켜야 했다. 무언가가 아무리 강하고 독하게 다가와도, 담담하고 무심하게, 때로는 냉정하고 잔인하게 밀어낼 수 있어야 비로소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고, 삶의 어느 영역은 바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온전히 써야 한다고, 여자는 그렇게 말하게 되기까지 아주 오랜 세월을 보내야 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 기억할만한 봄의 하루가 있었다. 여자는, 가녀린 손에 한 권의 책을 쥔 채, 반대편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주 훤칠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눈 속에 별이 들어 있는 남자였다. 모서리 하나 없이 둥글둥글한 마음이 여자에게 다가올 때, 여자는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었다. 솜사탕처럼 달고 폭신폭신하여 무게 하나 없이 깊이 녹는 사랑이었다. 그 때 여자가 그토록 신경쓰던 유통기한은 멈추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후로 아예 없어졌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자가 더 이상 유통기한을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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