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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검은 빵

2015.08.31 23:5608.31

검은 빵

 

 

 


 

 

  어느 마을에서는 어느 아버지와 어느 아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검은 빵을 배낭에 넣어주려고 했고, 아들은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기어코 검은 빵을 아들 배낭 깊숙한 곳에 넣은 후, 먹기 싫으면 먹을 필요 없다고, 챙기기라도 챙겨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과는 전혀 무관하게도.

 

 녹색 드래곤 다웅이 서쪽 하늘에서 날아와 엔빌 성을 공격할 때, 엔빌 성 주민들을 포함한 거대한 군중은 갓 튀긴 치킨에 맥주를 한 잔 하며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덩치 큰 드래곤이 날아오는 장면도, 공들인 성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장면도, 살면서 잘 보기 힘든 박진감 넘치는 광경이었고, 막으려 해봤자 막을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일이 30년에 한 번씩 정확한 날짜에 맞춰 반복된 일이었고 다웅이 부수는 것이 오직, 엔빌 성의 동쪽 구역에 있는 도서관 뿐이었다는 것도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식량창고나 보물창고를 털어갔다면 몰라도 (틀림없이 세금이 오른다.) 도서관의 책쯤이야 살면서 별 도움도 안 되는 것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한 것이다. 부서진 성이야 뭐 다시 건설하면 되고, (그나마도 부서지는 부분이 도서관뿐이니까 고치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읽지도 않을 책이야 뭐, 적당히 두껍고 표지가 예쁜 책들을 다시 좀 채워 넣으면 되니까, 여유만만인 것이다.

  여유만만인 사람들은 어차피 30년에 한 번 쳐들어 올 드래곤을 어떻게 이용할 수 없을까, 생각했고, 그 끝에 나온 것이 녹색 드래곤 축제였다. 주민들의 의견서가 제출되자, 엔빌 성의 영주는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그 말에 설득 당했고, 30년에 한 번씩 오는 드래곤이 가장 효율적으로 책을 가져갈 수 있게 성을 리모델링했다. 도서관을 성의 가장 외곽 쪽으로 옮긴 것이다. 이는 다웅이 가장 빠르게 책을 가져감으로써 도서관 외의 부분이 파괴되는 일을 막았으며, 동시에 관중들이 무자비한 책 약탈자를 잘 구경할 수 있게 만든 뛰어난 조치였다. 영주의 뜻을 잘 파악한 건축가들은 30년 후 쯤이면 딱 무너질 만한 자재들로 건물을 지었으며, 주민들은 30년에 한 번씩 물건 값을 네 다섯 배로 올렸다.

  지금 치킨에 맥주를 뜯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 자신이 신나게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드래곤을 사육하는 동물원은 어디에도 없었고, 드래곤을 한 번쯤 보고는 싶었으니까, 그리고 구경은 실제로 만족스러웠기에 관광객은 모두 드래곤 축제가 괜찮은 축제라고 생각했다. 자기야 여기 데려와줘서 고마워,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였다.

  이 일은 녹색 드래곤 다웅에게도 꽤 괜찮은 일이었다. 다웅은 굉장한 독서광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드래곤이었고, 수명이 오천년 정도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달리 할 일이 없을만큼 시간이 남아돌았기 때문이었다. 독서광인 그는 30년에 한 번씩 책들을 대거 구했는데, 자신의 동굴 코앞에 있는 엔빌 성을 노렸고, 공격할 때마다 귀찮고 지리멸렬한 공격을 받아야했다.

  이는 꽤 성가신 일이었고, 이런 일들이 사라졌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지만 꽤 나쁘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축제는 성황리에 끝났다. 드래곤이 날아와 성을 부수는 장면은 일생에 걸쳐 잘 보기 힘든 일이었고, 커플에겐 사랑을, 부모와 아이에겐 교훈을, 술주정뱅이에겐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이 실제론 아무것도 아니란 깨달음을 줬다. 맥주집의 드레이븐 씨는 평소의 세 배가 넘는 수입을 올려 기분이 좋았고, 삼류 작가 마가렛 드 피니는 자신의 책도 도난당했다는 것을 기뻐했다. 두 번째 인쇄 때는 드래곤도 읽은 소설이란 문구를 띠지에 꼭 새기리라고 결심했다. 모든 일이 행복하게 마무리 지어졌다.

  마무리 지어졌다, 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아서, 절대로 도난당해선 안 되는 책이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영주는 어느 날 깨닫게 된다. 그 책은 어둠의 예언서, '수배움의 바르돌'이었다.

  수배움의 바르돌, 약칭 바르돌로 불리는 이 예언서는 사용자가 알고 싶어하는 미래를 다 알려주는 힘을 가진 보물이였다. 단, 엄연히 마서였기에, 주인을 스스로 선택하는 성질이 있었다. 선택받은 사람은 아무 문제없이 알고 싶은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선택받지 않은 사람이 읽으려고 하면.......

  잠이 왔다.

  엔빌 성의 영주만 해도 읽으려고 하다 잠이 너무 와서, 알고 싶은 것은 조금도 읽지 못한채 책장을 펴자마자, 잠들어버리곤 했다. 자신이 읽을 수 없었기에 잊고 있었지만, 어쨌든 보물은 보물, 비싸게 팔아먹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우연히 사겠다는 상인이 나타나 팔려다, 깨닫게 된 것이다. 바르돌이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무리 생각해도 범인이 될 만한 것은 녹색 드래곤 다웅 뿐이었다. 하지만 다웅인 것을 알아도 그에게서 바르돌을 되찾을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드래곤을 토벌하려면 병력이 필요했고, 병력을 움직이는 것엔 돈이 들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돈을 쓰는 것은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생각을 하다보면 답이 나오는 법인지, 고심하던 엔빌 영주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용사 지망생들을 이용하자. 바글바글 거리는 용사 지망생들에게 용사의 칭호와 가신으로의 임명을 약속하면, 분명 공짜로 싸워줄 싸구려 병력을 엄청나게 모을 수 있을 거야!'

  엔빌 영주는 당장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예언서를 훔쳐간 마룡, 다웅을 해치우고 예언서를 되찾아 올 용사를 모집하는 전단지를 전국 곳곳에 뿌린 것이다. 녹색 드래곤 축제가 사라질 것을 염려한, 몇몇 (간뎅이가 부은) 엔빌 성의 주민들이 '유리할 때는 성룡이고 불리할 때는 마룡이냐'나, '그깟 예언서가 우선이냐 지역경제가 우선이냐'와 같은 피켓을 들고, 대들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피켓으론 기사들이 입은 강철갑옷을 뚫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만 쓸 줄 알았던 강철장검이 자신들에게 겨누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잠깐이었다. 전단지를 보고 온 엄청난 수의 용사지망생이 성에 유입되자, 반대의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철부지 용사지망생들은 금전감각이 전혀 없었다. 무기점 주인 퍼거슨 아저씨는 5실버짜리 장검을 10실버에 팔았다. 그리고 다시 되팔러 오면 2실버 50쿠퍼에 매입했다. 멍청이 용사지망생들은 그게 당연한 줄 알았고, 영주에 대한 주민들의 칭송소리는 끝없이 높아졌다.

 

  엔빌 성에 온 용사지망생들 중에는 딤도르란 이름의 청년이 있었다. 그는 갈색의 짧은 머리에 심록색 눈, 오똑한 코를 가지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준수한 외모지만, 용사가 되기엔 너무 흔한 얼굴이었다. 검술실력도 뛰어난 편이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마법은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용사지망생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그만의 장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근래에 보기 드문 자기주도형 용사지망생이었다는 점에 있다.

  자기주도형 용사지망생, 이 칭호는 우연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용사지망생에게 붙여지는 칭호였다. 항상 스스로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것, 발전을 위해 생각을 하고, 노력을 한다는 것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자기주도형 용사지망생들은 한 번 졌던 상대한테 이겼다. 한 번 이겼던 상대에겐 틈을 주지 않았다,  

  다른 모든 칭호는 노력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노력하는 마음 그 자체를 노력으로 얻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오직 우연만이 자기주도형 용사지망생을 만들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우연이 있으면, 필연도 있는 법. 세상 모든 엄마들의 극한, 극성엄마들은 자식을 자기주도형 용사지망생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몇몇 엄마들은 실제로 그것을 성공했다.

  자기주도형 용사지망생이 되게 만든다?

  자기주도형 용사지망생이란 말은 지망생이 스스로 용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말하고, 그것은 용사지망생 스스로에게 용사가 되기 위한 동인(動因)이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의 동인은 성격이나 개성과도 같은 것, 그런 동인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것은 오직 하나 세뇌마법 밖에 없었다. 용사가 되지 않은 모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고, 용사가 된 미래에 행복의 환상을 심어주는 것. 용사가 아닌 다른 것이 되고 싶은 아들을 부정하고, 지금의 사회에서 가장 대세로 존재하는 용사의 길을 강요하는 것.

  딤도르의 엄마는 극성엄마였고, 세뇌마법을 쓸줄 아는 마법사였다. 아들이 잘 되길 바란 그녀에게 망설임은 없었고, 딤도르는 자기주도형 용사지망생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용사가 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스스로 찾았으며, 그 과정에서 엔빌 성에 일어난 변란을 듣고 엔빌 성으로 온 것이었다.

 

  딤도르는 곧장 엔빌 성에서 가장 큰 술집, '곰과 맥주'로 향했다. 술집은 정보의 집합처이자, 용사지망생들의 안식처였으며, 같이 싸울 동료를 얻을 수 있는 화합의 장소였다. 그는 그곳에서 친절하고 머리숱이 적은 술집주인에게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죄 없는 사람 수백여명을 죽이고 잡아먹은 드래곤 다웅의 끔찍한 악행에 대해 알 수 있었고, 그의 거처, 케이프 동굴의 위치와 그 주변의 몬스터 생태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번 여행을 함께 할 동료도 얻을 수 있었다. 티치스와 터디, 아이하이, 그리고 지니어스의 세 사람과 한 마리의 동료였다. 빨간 머리를 포니테일 모양으로 묶은 여마법사 아이하이는 명문 리버사우스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검증된 마법사였고, 기다란 타워실드를 등 뒤에 맨 수련기사 지니어스는 많은 용사들을 배출해낸 명문가 티치미트 가문의 차남이었다. 또한 티치스는 케이프 동굴에 바로 인접한 마을, 지폐마을에서 온 사냥꾼으로 케이프 동굴 인근의 지형지물에 대해서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그의 사냥개 터디는 모험의 위험요소로부터 일행을 보호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일행의 구성은 검사, 기사, 마법사, 궁수, 그리고 정찰견으로 접근전과 원거리 견제를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완벽한 조합을 찾아냈기에 딤도르는 오히려 초조했다. 용사지망생의 동료 역시 용사지망생이었고 용사가 되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용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동료는 결코 전투능력이 뛰어난 동료가 아니었다. 물론 최소한의 전투력은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용사 대신 죽어줄 동료였다.

  용사의 위명, 혹은 용사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지의 여부는 그 모험의 험난함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었다. 동네에 날뛰는 개떼를 물리친 것과 오크부족장을 물리친 것은 대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모험의 험난한 정도를 순위로 매기는 것이 가능할리 없었고, 사회는 자연스럽게 증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잡은 대상의 무서움으론 모험의 험난함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조금 더 극적인 것, 이슈가 될 만한 것을 원했고, 그것은 동료의 시체였다. 동료의 시체가 많으면 더 험난한 모험으로 인정하고, 동료의 시체가 없으면 대단한 모험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트롤 왕을 퇴치한 모험단이 사상자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단 이유로 용사의 이름을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더 심화되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효율적인 승리가 아니라 극적인 승리였다. 그리고 그 극적인 승리를 위해선 자기 대신 죽어줄 동료가 필요했다. 자기 대신 죽어줄 동료는 자기보다 실력이 뒤떨어지는 동료인 게 좋았다. 용사지망생들이 동료를 찾는 기준이 바뀐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딤도르는 실력이나 배경 측면에서 가장 부족했고, 동료들에게 '대신 죽어줄 동료'로 완벽하게 인식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가슴 속에서 기어나온 패배감이 그로 하여금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도록 만들었다. 술은 맛있었다. (비록 대신 죽어줄 동료로 인식되었을지언정) 그들은 딤도르와 마음이 잘 맞는 친구였고 대화는 잘 통했다. 그들은 밤새도록 같이 술을 마셨고, 이는 다음날 아침 묵직한 계산서로 돌아왔다.

  "모두 다 합해서 3골드입니다."

  메뉴표에 쓰여 있는 가격대로라면 아무리 많아봐야 1골드였기에 딤도르는 주인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주인은 메뉴 표에 쓰여있는 가격은 현지민을 위한 가격이라고, 외지 손님은 세 배의 가격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반박할 만한 말을 찾지 못한 딤도르 일행이 주머니를 탈탈 털어보니 모인 돈이 딱 2골드 90실버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는 딤도르 일행의 모습에 술집주인은 그들이 돈이 없음을 깨달았고, 부족한 10실버만큼을 깎아주었다. 딤도르는 이로 인해 진정한 대인배가 무엇인지 깨닫고, 술집주인의 이름을 가슴 속 깊이 새겨두었다.

  여비를 술 마시는 것에 모두 써버린 딤도르 일행은 어쩔 수 없이, 엔빌 성의 정규토벌단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고, 엔빌 성의 명예롭고 강인한 정규토벌단에 입단하기 위해서는 악명 높은 압박식 입단시험을 받아야 했다.

 

  엔빌 성 응접실에 마련된 시험장에는 세 명의 귀족시험관이 앉아있었다. 그들이 앉아있는 의자는 응시자의 의자보다 훨씬 높았고, 그들과 응시자와의 거리는 멀었다. 테스트는 한 번에 세 명씩 치루어졌으며 테스트 줄이 하필 딤도르에서 끊어져, 아이하이와 티치스, 지니어스보다 먼저 면접을 보게 되었다. 첫 번째 응시자는 자신이 속한 가문과 몇 가지 이력을 말하고 나갔고, 면접을 받는 두 번째 응시자는 이어지는 질문세례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네는 어스 선드리스 아카데미 출신이군. 우리 토벌단에는 왜 지원했지? 이 곳이 그정도 수준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나?"

  "왜 자신감이 없이 빌빌 떨고 있지? 드래곤과의 싸움 앞에서도 떨고만 있을 생각인가?"

  질문의 내용은 하나하나 응시자의 신경을 긁는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이미 자신감을 잃어버린 응시자는 매미 날갯짓 소리만한 목소리로 '네', 혹은 '아니오'라는 단답만을 번갈아가며 하고 있었다.

  "자네 그러고보니 전쟁 때문에 부모를 잃었군. 부모도 없이 할머니에게 자란 자네가 토벌단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흐흑. 엄마아."

  억지로 버티던 두 번째 응시자는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언급에 울면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가 나가자 면접관들의 시선은 딤도르를 향해 집중되었고, 그를 향해 질문이 시작되었다. 가운데에 앉은 머리가 듬성듬성 빠진 면접관이 가장 먼저 물었다.

  "자네가 가장 잘하는 게 뭔가."

  면접관의 질문에 딤도르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검술을 잘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전 노력을 잘합니다. 부족한 점을 알았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생각을 하고 그에 대한 노력을 잘합니다."

  "그런 쓸모없는 것 말고, 토벌에 도움되는 능력 없나? "

  "전 검술을 아주 잘합니다."

  "검술을 잘한다고. 그렇군, 그러면 자네 하늘을 나는 참새를 검으로 벨 수 있나?"

  "아니오, 그건 좀."

  "새도 못 베는 검술을 익힌 주제에 드래곤을 잡겠다고? 이봐, 자네 드래곤이란 생명체에게 날개가 달려있다는 사실을 아나?"

  "검을 던져서라도......"

  가까스로 가운데의 면접관의 질문에 답하자, 왼쪽에 앉은 면접관이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왜 이 토벌단에 참가했는가."

  그야 용사가 되기 위해서죠, 라고 답하려던 딤도르는 귀족들이 명분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다른 대답을 했다.

  "사악한 마룡 다웅을 물리치고 엔빌 성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입니다."

  "솔직하지 못하군. 자네,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하나."

  "용사가 되어 편안하게 삶을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뼛속까지 썩어빠졌군. 요즘 젊은이란. 쯧쯧."

 

  당연히 떨어질 줄 알았는데, 붙었다.

  다행히 한 명도 탈락하지 않은 일행과 재회한 딤도르는 토벌단을 위해 따로 마련된 숙소로 이동했다. 합격증을 보여주자, 입구에 서있던 시종장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정규 토벌단에 입단하신것을 축하드립니다. 전 숙소 안내와 편의제공을 맡은 시종장입니다. 궁금하신것 있으면 지금 물어봐주세요."

  "앞으로 토벌단의 지휘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알고 싶어요."

  아이하이의 질문에 시종장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저희 토벌단은 영명한 엔빌 성 영주님이 직접 조직했습니다. 총 지휘는 영주님의 아드님이시자, 순혈 귀족의 새 흐름이라고 평가 받는 위대하시고도 영명하신 아돌프 엔빌 준남작님이 하시고요. "

  "그거, 훌륭하군. 역시 지휘는 귀족이 맡아야지."

  지니어스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사냥꾼 티치스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고선 질문했다.

  "그럼 보수는 어떻게 되는 거요?"

  "아, 당연히 용사가 되는 분에게는 엔빌 성 영외의 영지 일부와 용사의 칭호, 그리고 가신으로 임관할 수 있는 권리와 3500골드의 상금을 드립니다. 사악한 마룡으로부터 엔빌성을 구했는데 그 정도는 드려야겠지요."

  "그럼 용사가 안 되는 인간은 어떻게 되는 겨?"

  "네?"

  "그러니까 시방 그렇게 힘든 시험을 통과하고 왔는디, 용사가 안 되는 사람은 보수가 없다는 말인겨?"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의아하군요. 그야 물론 숙식 제공은 합니다만, 용사가 될 수 있는 기회와 드래곤과의 싸움이란 귀중한 경험을 공짜로 제공하고 있는데, 용사도 되지못한 사람에게 보수를 지불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쉽게 불만을 감추지 못하는 티치스의 모습을 보던 딤도르가 나섰다.

  "그것도 그렇군요. 좋아요. 여기 저희들의 이름을 명부에 등록해야 하는 것 맞죠?"

  "네, 이름을 각각 불러주시면 됩니다. 참, 이건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 갑작스런 병력의 누실로 전투에 차질이 생기면 곤란하니, 명부에 이름을 등록한 후 갑자기 불참의사를 밝히거나 무단이탈하면 배상금 70실버를 지불해주셔야 됩니다."

  망설임 없이 자신을 포함한 나머지 동료의 이름을 모두 부르는 딤도르의 모습을 본 티치스가 외쳤다.

  "야, 니미 이게 뭐 하는 짓이여? 대가리 굴릴 시간 정돈 줘야할 거 아녀."

  "왜? 어차피 용사가 되면 그만이잖아."

 

  다음날, 엔빌성 영주의 마룡 다웅의 악행과 예언서 바르돌이 그에게 악용되었을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끔직한 일들에 대해, 성토하는 내용의 기나긴 연설로 출정식을 마친, 토벌단은 케이프 동굴이 있는 서쪽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토벌단의 위세는 대단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용사지망생의 수가 오백여명에 달했고, 아돌프 엔빌 준남작이 데리고 온 기사들이 십 여 명, 이들을 지원하는 물자가 실린 짐마차만 오십 기에 달했다.

  딤도르의 동료들은 용사 지망생으로써 저 나름대로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티치스는 전방에 대한 경계 및 정찰을, 지니어스는 아돌프 엔빌 준남작과 전략토론을, 아이하이는 토벌단의 귀여움 담당을, 딤도르는 물자 운송단의 충실한 짐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저기요. 저 이런 것 하려고 토벌단에 들어온 것 아니거든요."

  짐수레를 끌고 가던 딤도르가 앞에 말을 타고 이동 중인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것? 너 지금 수송임무를 무시하고 있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전 검사로 토벌단에 들어왔고, 전투 말고 다른 일을 하기로 한 적이."

  "정말 웃긴 놈이로군. 수송임무 또한 전투의 연장이란 것을 모르나. 자네가 그 짐마차를 끌지 않으면, 그 짐마차에 있던 군용식량 50Kg은 막사에 전달되지 않겠지. 막사에 군용식량 50Kg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자네의 동료 중 몇 명이 굶게 될 것이고 최적의 전투효율을 낼 수 없게 될 것이야."

  "아니, 그게."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수백명의 사람들을 죽인 마룡을 잡으러 가는 거라네. 이런 때 일수록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 싸움에서 패배하면 자네도 죽고 나도 죽네. 그런 만큼 조금 힘들더라도 참고 해내야 되지 않겠나."

  "그,"

  "이만큼 말했는데도 불만이 있다면 토벌단에서 나가! 불평만 많고 자기 역할 못하는 자는 우리에게 필요 없으니까. 단, 벌금을 내야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죄송합니다. 제 본분에 충실하겠습니다."

 

  훌륭하게 짐말역할을 한 딤도르는 토벌단의 간부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간부들은 딤도르에게 공을 주기 위해 그를 따로 불러서 특별한 임무를 줬다.

  "검술을 엄청나게 잘한다는 이야기가 돌더군, 딤도르군.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긴밀히 지시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게 뭐죠."

  "홍차 두 잔만 타오게나."  

 

  "오, 검술을 엄청나게 잘한다는 딤도르군. 장작을 좀 패오게."

  "오, 검술을 엄청나게 잘한다는 딤도르군. 물을 좀 길어오게."

  "오, 검술을 엄청나게 잘한다는 딤도르군, 자네라면 삽질도 잘하겠지?"

  "......."  

 

  딤도르는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단검을 던지는 기술을 훈련했다. (지난 번의 입단시험에서 지적 받은) 공중에 있는 적을 공격할 방법이 없다는 점을 보완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자기주도형 용사가 할 수 있는 것은 끝없는 자기 수양 밖에 없었다. 사라져가는 시간이 아까웠지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 꿈을 위해서라면 아까워도 아깝지 않았다. 정말로 딱 그런 느낌이었다.

 

  토벌대의 전진은 순조로웠다. 케이프 동굴에 가까워질수록 많은 몬스터와 조우하게 되었지만, 500명의 용사지망생의 힘은 강했다. 진군 중에 죽인 몬스터의 수가 천여 마리나 되었지만, 토벌대의 피해는 72명에 불과한 작은 숫자였다. 72명이 어떻게 작은 숫자일 수 있냐고 고귀한 생명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말은 물론 맞다. 사람의 생명은 고귀하다.

  그러니 그 생명조차 던진 희생은 더더욱 고귀하다. 그러면 그 고귀한 희생을 통해 탄생한 용사는 얼마나 고귀한 것이겠는가. 여러 명의 희생 끝에 탄생한 용사는 얼마나 위대한 용사겠는가. 용사지망생 500명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용사는 오직 한 사람만 탄생할 거란 사실을, 500대 1의 경쟁률 속에서 승리자는 한 명이고 나머지 499명은 그 한사람의 승리자를 빛나게 하기 위해 희생당할 거란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자신이 그 한 명이 되리라 여겼을 뿐이었다. 죽음이 찾아올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499명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었다.

  자신이 용사가 되리라고 믿는 지망생들은 어차피 용사도 되지 못할 다른 지망생들이 조금이라도 더 줄어들길 바랬다. 그리고 그 소망은 케이프 동굴에 거의 다다랐을 때 쯤 이루어졌다. 녹색 드래곤 다웅이 토벌단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토벌단이 완전한 준비를 갖추기 전에 먼저 습격해온 것이다.

  녹색 드래곤의 거대한 날개가 만들어낸 바람에 뿌리가 약한 들플들은 하늘로 솟아올랐고, 기가 약한 용사 지망생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드래곤의 포효와 함께, 어마어마한 열기를 머금은 숨결이 토벌단을 향해 쏘아졌다.

  결국 드래곤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다웅과의 전투가 40분 정도 지속되었을까.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스무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거의 싸울 수 없을 만큼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부러진 장궁을 붙잡은 채 쓰러져있는 티치스, 정신력을 모두 써 창백한 표정으로 주저 앉아있는 아이하이의 모습이 딤도르의 눈에 보였다.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소 영주 앞에서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는 지니어스의 모습이 보였다.

  다웅 역시 430여 명의 용사지망생과의 싸움에서 멀쩡할 순 없었다. 찢어진 날개와 가슴팍에 박힌 수십 자루의 검이 딤도르의 눈에 보였다. 치명적인 공격을 한 번만 더 할 수 있다면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석하게도 딤도르에겐 공격수단이 없었다. 검은 부러졌고, 가지고 있던 단검은 모두 던진 상태였다. 자신이 가진 단검의 개수 정돈 알고 있었기에, 뭐라도 던지려고 배낭에 손을 넣을 때, 딤도르에겐 기대감이 전혀 없었다. 동료들이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싫어, 손을 넣어 잡힌 그것을 다웅에게 있는 힘껏, 던졌다.

 

  

  그 일격에 녹색 드래곤 다웅은 쓰러졌다. 맥이 풀린 딤도르는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채 드래곤의 시체를 바라봤다. 시체에 박혀 있는 것은 검은 색 빵이었다. 드래곤의 머리에 박힌 것은 모험을 떠나는 날 아침, 아빠가 배낭에 손수 넣어준 검은 빵이었다. 배를 쫄쫄 굶는 한이 있더라도 먹기 싫어 배낭 구석에 처박아 둔 검은 빵이었다. 긴 모험 동안 조금씩 말라비틀어져 딱딱하게 굳어버린 검은 빵이었다. 먹기 싫은 마음이 겹겹이 스며들어 만들어진 마법이었다.

  

  용사가 되어야 한다. 아들아. 네가 용사가 되면 우리 가족의 형편이 나아질 거야.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검은 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야. 하얀 빵과 고기수프만 먹고 살아갈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니 꼭 용사가 되어야 한다. 알겠지? 딤도르.

 

   엄마의 간곡한 말이 떠오른 딤도르는 미소 지었다. 드디어 그 동안의 노력이 보상받은 것이다.

  "이젠 검은 빵은 안 먹어도 되요. 엄마."

  딤도르는 케이프 동굴에 들어가, 예언서 바르돌을 챙겼다. 궁금증에 한 번 펼쳐봤으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적혀있었다.

  "수배움의 바르돌이 수학의 정석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을 치료해, 동굴 안의 보물을 챙기게 했다. 넌 보물을 챙기지 않느냔 말에 딤도르는 웃으면서 용사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말했고, 딤도르의 동료들은 모두 그의 욕심없음을 칭찬했다. 아이하이는 자신이 들고 온 보물 중의 일부를 딤도르의 바지주머니에 깊숙이 밀어 넣으며, 암만 그래도 챙겨둘 건 챙겨놔, 라고 말했다.

  엔빌 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화기애애했다. 아이하이는 딤도르가 여자친구가 아직까지 없다는 것을 놀렸고, 티치스는 멧돼지를 잡아와 구웠다. 모닥불 앞에서 별을 바라보며 구워먹는 고기의 맛은 각별했다. 다소 딱딱하게 굴던 지니어스도 분위기에 취한 듯 언젠가 책에서 읽은 귀족과 평민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들려줬다. 티치스는 자신의 고향 마을인 지폐마을에 가까워지자, 시간도 많은데 자신의 집에 하룻밤 머물렀다가 가자고 말했다. 노인들은 입이 마르도록 티치스를 칭찬했고, 음식점의 아줌마는 그의 친구라 말하자 술에 마른 안주를 얹어주며 재밌게 놀다가라고 말했다.

  술상을 차려온 티치스가 말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들 먹어라."

 

  다음날 아침 딤도르는 몸이 갑갑함을 느꼈다. 이상함에 눈을 떠본 딤도르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몸이 꽁꽁 묶여있었다. 자신의 옆으로 아이하이와 지니어스가 묶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티치스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주변을 살펴보니, 티치스가 팔짱을 낀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티치스의 옆에는 지폐마을에서 본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좌우로 도열해있었다.

  "딤도르야. 내 미안하게 됐대이. 우리 마을이 촌구석아이가. 용사 한 명 정도는 탄생해야 마을도 잘 살고 내도 기분 좋을 것 같어. 용사가 된 후에 다 풀어줄게. 너무 걱정은 하지 마래이."

  "야들아 미안타, 이왕 용사가 나오는 거 지폐마을에서 나오는게 좋은 거 아이겠나."

  "티치스야. 얼른 가그라. 빨리 용사 돼서 우리 지폐 마을 좀 살리도."

  티치스는 딤도르의 품에서 바르돌을 꺼내 엔빌성을 향해 떠났다. 지폐마을 아저씨, 아줌마들은 포박된 딤도르 일행이 못 나가도록 삼엄하게 감시했다.

 

  딤도르는 절망에 빠졌다. 용사가 되기 위해서라지만, 어제만 해도 같이 돼지고기를 구워 먹었던 티치스가 배신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고작 마을 주민들에게 자신의 노력을 빼앗기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런 식으로 뺏기기 위해 싸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마. 딤도르. 내게 다 생각이 있어."

  아이하이였다. 아이하이는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말했다. 곧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딤도르는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일단 아이하이를 믿어보기로 했다.

 

  "너희들 누꼬!"

  30분 정도 지났을까,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먼지가 가라앉자, 폭발을 일으킨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우스리버 마법 아카데미의 교복을 입은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은 아이하이의 아카데미 선배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만신창이가 된 티치스와 그의 손에 잡힌 바르돌이 보였다.

  "아이하이 괜찮아?"

  "응, 괜찮아요. 일단 나 좀 풀어줘요!"

  딤도르는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아이하이 덕분에 용사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얘들도 풀까?"

  "아니, 더 꽁꽁 묶어줘요."

  솟아났던 그 희망 가라앉았다. 아이하이는 약 올리듯 웃었다.

  "미안해, 딤도르. 사우스리버 아카데미는 이름 높은 사립 아카데미지만, 최근 용사가 탄생한 적이 없어서, 나한테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했거든. 그래도 그저 너 개인만을 위해 용사가 되는 것보다는, 내가 용사가 되는 게 더 나을 것 같지 않니?"

  아이하이는 딤도르에게 바짝 다가왔다. 뽀뽀라도 할까 싶어 봤더니, 딤도르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예전에 넣어줬던 보물을 들고 갔다.

  "미안, 이건 그래도 내 꺼였잖아."

  그러면 니 손에 있는 바르돌은 원래 니 꺼였냐고 따지려다 한심해보여 참았다. 바르돌을 든 아이하이는 엔빌성을 향해 떠났다. 사우스리버 아카데미의 여학생들은 딤도르와 지니어스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감시했다.   

 

  딤도르는 좌절했다. 용사가 되기 위해서라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과 연애기류를 타고 있던 아이하이가 배신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고작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자신의 노력을 빼앗길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마. 딤도르. 내게 이 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있어."

  지니어스였다. 지니어스는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말했다. 곧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꺄악! 다, 당신은!"

  연속적인 폭발음과 함께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란하게 부딪치는 소리와 폭발하는 소리가 어느 순간 잦아들었고, 문이 열렸다. 그 곳에는 지니어스 티치미트의 아버지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티치미트 가문의 용사인 베어리얼 티치미트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 밑에는 만신창이가 된 아이하이와 바르돌이 있었다.

  "지니어스 괜찮나."

  "괜찮습니다. 아버님."

  "일단 풀어주지. 그리고 저자는 어떻게 할 거냐."

  "같이 풀어주세요. 제 친구입니다."

  베어리얼은 지니어스를 풀어준 후, 딤도르도 풀어줬다. 딤도르는 오랫동안 묶여 있는 몸을 가볍게 풀었다. 그의 눈에 기절한 티치스와 아이하이가 보였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베어리얼은 생각에 잠긴 그를 깨우듯 단호하게 말했다.

  "지니어스 티치미트가 이번의 용사다."

  "미안해. 딤도르."

  용사에 대한 미련은 이미 없었다. 그는 반론을 제기하는 대신, 베어리얼의 눈을 마주봤다. 베어리얼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딤도르는 용사의 눈이라는 것이 따로 있으면, 바로 저런 눈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아버지의 눈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생각이 났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엔빌 성으로 향하는 지니어스의 모습을 바라보던 딤도르의 마음 속엔 하나의 강한 욕구가 피어났다.

  그것은 검은 빵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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