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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천지를 주재하시고 사방천하의 모든 생령을 주재하시는 위대한 왕 아민 이븐 하미드의 치세와 기사에 대한 기록이라.


2. 그의 권능이 크시매 그의 선한 통치가 사방으로 뻗어나가 위대한 땅 아수랏의 모든 강역에 이르니라. 북으로는 사철 추운 바람에 모든 것이 얼어붙어 투명한 얼음과 하얀 눈으로 치장된 순록의 강역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붉은 태양이 모든 것을 쬐고 말려 오직 모래만 남아 바람을 타고 파도를 만들어 사방에 눈들 곳 없게 하는 땅에 이르니라. 동쪽으로는 아침마다 해를 건져 올리는 바다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저녁에 달이 올라오는 깊고 거대한 우물까지 이르렀으니 그 사이에 사는 모든 왕의 생령들과 신하들에게도 성덕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더라.


3.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는 건장하고 강대하여 당금에 대적할 자 없는 역사라, 한 손에 베틀 체 같은 백향목의 창 자루를 잡으시고 그 위에 황금과 구리로 덧씌운 철창을    끼우시니 그 창 앞에 만군이 부서지며 열왕이 쓰러졌도다. 또 한 손엔 가죽 다섯 겹을 씌우고 구리와 청동으로 장식한 방패를 들었으니 왕국의 누구도 왕의 방패를 끼고   창을 잡을  용사가 없도다.


4. 그 용모는 저 멀리 페슈앗의 눈 덮인 봉우리처럼 곧고 날카로우며 장대한 힐라만의 바다처럼 넓은 가슴과 등을 지니고 있었으니, 앉으면 한 마리의 사자와 같고 일어서면 거대한 삼나무와 같아 위엄과 정의로움이 충만하더라. 별처럼 빛나는 눈이 넓은 이마 아래 좌정하며 천하의 지혜를 모두 갖추었고, 강인한 산 뿌리처럼 뻗어 일어선  코 아래 무성한 수염은 갈라진 틈이 없었더라. 그의 수염은 길고 부드러우니 그의 사람을 받은 여인들과 친지들의 뺨을 비단처럼 어루만지도다.


5.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는 영민하고 담대하며 천하의 모든 방략과 지혜를 갖추었으니 당세에 그와 같이 천지의 도리를 논할 학자가 드물며 그와 함께 법을 만들고 백성들을   위해 토론할 율사가 궁전에 존재치 않았음이라. 지고한 왕은 천하에 영을 내려 위대한 지자와 선지자와 선견자들을 불러 왕국의 부흥과 백성의 번영을 위해 일할 것을  명하였으나 불려온 이와 자청해 나선 이 모두 왕의 고명한 지식에 턱없이 모자랄 뿐이더라.


6.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는 그 출생의 난 시와 어미의 해산 때 부르짖은 소리를 기억하였으며 거룩하고 위대한 열조의 첫 왕 아흐라마의 일대기부터 아버지 하미드 이븐 알 사무드의 연대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대지략을 외우며 기억하고 있더라.


7. 왕은 천지의 움직임과 별들의 길을 알며 바람의 나가고 들어오는 방향과 파도의 움직임과 떠 있는 배들의 자리를 알고, 군사의 들고 일어남과 뱀들의 산란이 어디서 오고 행하는   지를 보지 않고 알 수 있도다. 하늘의 창고가 열려 비가 내림을 알고 미풍의 소리를 듣고 봄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짐작하였으니, 가히 성군의 총명이 그 열조의 성덕에 인하여   만개한 것이라 칭하더라. 만세를 되풀이해 외치며 그 이름의 길함과 그 용모의 신성함에 대해 열조의 찬양이 있었으니, 이 모든 것은 아수랏의 부와 권능이 함께함이라.


8. 만 백성의 아버지요 어진 어머니시라. 천하만민의 찬양함이 백향목과 금으로 수놓아진 드넓은 궁궐의 벽에서 매일 울려 퍼지고, 이맘은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의 강녕을 위한 기도를 매일 일출에 맞춰 올렸더라. 아수랏의 사시사철은 풍족하고 풍성하니 때맞춰 내리는 비와 바람이 곡식과 가축을 살찌우더라. 아민 이븐 하미드의 치세 십년이라,  그 동안 아수랏의 백성은 땅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먹지 않았고 벽에서 활을 꺼내 줄을 걸어본 적이 없더라.  


9. 천하에 장려한 아민 이븐 하미드의 궁궐에는 아름다운 무희 칠십과 시중드는 가희 오십이 밤낮을 시봉하며 왕을 즐겁게 하며, 단련된 무장 칠백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위대한 재상 다섯이 그를 보위하고 시종하며 천하의 일을 맡아서 하니 아민 이븐 하미드의 손이 번거롭지 아니하더라. 그러나 사람들은 위대한 왕의 권세와 능력을 모두 아나니, 나라의 기틀이 마치 수레바퀴의 굴러감과 베틀의 직조처럼 맞물려 돌아가니 한 치의 어그러짐이 없더라.



2

1. 이 일은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의 기이한 여정에 대한 기록이라. 위대한 아수랏의 지고자 아민 이븐 하미드가 어느 날 밤 한 여인을 꿈에서 만났더라. 마치 험산준령의 고봉에 쌓인 백설 같은 흰 옷을 몸에 두르고 검은 눈을 번득이는 여인이 어느 순간 왕 앞에 서 있더라. 그 여인의 미모는 세상의 것이 아니고 그 말투 또한 세상의 것이 아니더라. 여인이 말하며 손을 뻗어 왕의 이마를 잡고 혀를 들고 가슴을 손으로 어루만지니, 그 용모와 행동 또한 범상함이 존재하지 않더라.


2. 이미 천하사방에서 모인 가희와 무희들의 용모를 알고, 그들의 아리따움을 사랑하는 왕이었지만 왕은 백의의 여인을 초견할 때 연애하니 그 행동의 기이함이 사람이 아님을 알았더라. 왕이 여인의 손을 잡으려 할 새 불현듯 일진광풍이 불며 왕이 눈을 뜰 수 없는지라. 정신을 수습하여 보니 여인은 온데간데 없고 왕은 홀로 침실에 있으니 이것이 곧 꿈이라. 왕은 일어서 떠 있는 달과 떠오를 해를 보며 점을 치니 이것이 어쩐 징조인지 현몽(現夢)일지 알고자 함이라. 그러나 어느 것에도 점괘가 나오지 않더라.


3. 날이 밝자 위대한 왕은 재상 다섯을 불러 어제 꾼 꿈에 대한 해몽을 요구하였으나 재상들은 그 뜻이 무엇인지 알 지 못하는지라. 재상들이 모여 가로되

위대한 왕이시여. 그 꿈이 무엇인지 저희는 해몽할 능력이 없사오니, 천하에 알려진 현자들을 다시 초빙하며 뜻을 물으심이 지당한 줄 아뢰오.”

하지만 왕은 이를 가납하지 않으니, 이미 왕은 자신보다 뛰어난 현자가 없음을 앎이더라. 이에 다섯 재상 중 가장 연로한 자가 부복하고 일어서 무릎을 꿇기를 다섯 차례 하며 말하기를


4. “당금천하에 전하의 오성을 넘어설 현자가 없음이니, 해몽을 할 자 찾는 것이 지난하나이다. 그러나 지고한 대왕께 감히 품신하오니, 저 멀리 남쪽 메마른 모래 사막에 수행자가 하나 있으니 그에게 가서 꿈을 말하며 뜻을 찾음이 어떨까 하옵니다.”


5. 남쪽 메마른 모래 사막에 청정한 연못 하나가 있어, 결코 마르지 않는데, 그 곳에 작은 초목이 있어 신령함을 찾는 수행자가 하나 있더라. 그러나 그는 세속에 대한 미련이 없고 두려움도 없으니, 지고한 왕의 가르침을 받으러 땅에 나오지 않는 자라. 왕이 재상의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바로 깨달으니, 왕은 낯빛을 풀고 재상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6.” 수행자는 자신의 거처에서 움직이지 않는 이라. 내 직접 그를 찾아 여정을 물을 것이니 그대들은 정사를 게으르게 하지 말고 재판을 편벽되이 하지 말지니, 내 곧 돌아와 모든 일을 처결할 것이라.”

하니라. 이에 모든 재상이 부복하고 궁성의 모든 신하들과 귀비들이 부복하고, 성의 백성들이 부복하며 초원의 생령들이 모두 부복하는데, 왕은 그의 창 하나만을 들고 단신으로 메마른 사막을 향해 나아가니, 당금천하에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의 발걸음을 막을 장사 없음이더라.


7.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와 그의 백마는 칠일 낮 칠일 밤을 남쪽으로 달려 작은 남쪽의 궁궐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그곳에서 칠일 난 칠일 밤을 달려 더 작은 남쪽의 궁궐에서 하룻밤을 묵으니, 두 궁궐은 일찍이 그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가 때를 위해 만들어 예비한 곳이라. 그곳의 귀비와 무희 또한 각각 오십과 삼십이니 왕의 피곤함을 풀기에 부족함이 없더라.


8. 허나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가 궐에 머물 때마다 백의여인이 다시 꿈에 나오매, 그 음성과 용모가 더욱 또렷해지고 생시와 몽시가 구분이 되지 않을 지경이니, 오히려 남쪽에 다가갈수록 지고한 왕의 연애함은 커져가기만 하더라.


9. 더 작은 남쪽의 궁궐을 떠난 지고한 왕은 보름 낮밤을 달려 사막의 앞에 자리한 작디 작은 궁궐에서 몸을 눕히니, 이 곳은 원래 사막에 이르는 왕국의 첩경이라. 아리따운 무희 다섯이 그 안에서 왕을 시봉하니 왕의 여가에 불편함이 없었더라.


10. 그날 밤 다시 백의여인이 나타나니, 그제서야 왕이 입을 열어 말씀하시되

그대는 어찌하여 모습을 나타내고 말을 하지 않는가. 나는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위대한 왕이니 그대의 모습이 실로 천사의 현현이로다. 이것이 꿈임을 내 알지만 그대의 모습이 이생과 차이가 없으니 어찌 꿈이라 단언하리.”

백의여인은 그 말들 듣고 깊숙이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며 사라지니, 왕이 정신을 차린 바, 다시 아침이 되었더라.


11. 대왕은 해가 뜨기 전 식어있는 사막을 달려 이틀을 달리니, 작은 초옥 안에 수행자가 멀리서부터 왕의 기척을 듣고 일어서 문을 열고 나와 무릎 꿇고 지고한 통치자를 맞이한지라


12. 수행자가 왕께 이르되

위대한 왕이시여, 내 왜 왕께서 친히 이곳에 오셨는지 알고, 그 꿈의 뜻과 여인이 무언지 알고 있사오나 감히 말씀 드리지 못하오니 왕께서는 다시 궁으로 돌아가 만세수를 하옵소서. 그것이 왕께 내려진 팔자이며 축복이오니 여인의 꿈에 화답하지 마옵소서하니라.


13. 이에 아민 이븐 하미드가 분노하며 가로되

수행자의 변설이 오만하고 광오하다. 나는 아수랏의 생령을 관할하는 천하의 지고한 임금이라. 하늘과 땅의 힘이 내게 권능을 주었고 대지의 영이 나에게 영원한 호흡을 주었거늘 어찌 꿈을 잊고 다시 돌아가라 하는가. 강역에 걸쳐진 모든 것이 내 것 아닌 것이 없으니 그 여인 또한 내게 속하였음을 수행자는 잊지 말라.”

 

14. 수행자가 답하여 가로되

전하의 위광과 인생을 초월하는 권능을 어찌 모르리요마는 지금 구하시는 것은 왕께서 추구하실 바 아니요, 얻지 말아야 할 바니 찾지 않으시길 원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을 취하실 요량이시거든 주황색 바다와 흰 사막을 건넌 뒤 푸른 언덕 위에 있는 은색 솥 단지 성에 들어가셔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이 멀고 험하고 그 결말이 험한 즉, 위대한 왕께서는 종의 충언을 가납하여 주옵소서.” 라 하였다.


15. 이에 왕은 수행자에게 금 한 덩이를 내리고 바로 백마를 몰아 사막의 끝 주황색 바다로 달려가더라. 수행자는 금덩이를 바닥에 버려두고 초옥으로 들어가니, 그날 이후 다시는 볕을 쐬러 밖에 나온 일이 없었더라.


 

3


1.     위대한 왕 아민 이븐 하미드는 애마를 달려 드넓은 주황색 바다 앞에 멈춰 섰도다. 주황색 바다는 모든 쓰디쓴 것과 시디 신 것의 근원이니, 천하에 어떤 것도 그 안에서 살 수 없더라. 왕은 창으로 뗏목을 만드니 창 자루는 왕과 말을 실을 수 있고, 창날은 곧게 뻗어 뗏목의 키가 되더라. 왕이 뗏목으로 황색바다를 건너매, 사흘 밤낮을 행하여 흰 사막에 도착하였더라.


2.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가 흰 사막에 도착하니, 흰 사막은 사악하고 어두운 기운의 삶터라. 흰 이리와 검은 곰과 붉은 뱀이 사방에서 아민 이븐 하미드를 보고 올라오매 위대한 왕은 말 위에 적수공권이라. 왕의 권능과 정력이 두 팔에 온전히 남아 이리 치며 저리 치니 이리와 곰과 뱀이 모두 나가 떨어지는지라. 왕이 그들을 사슬에 묶어 앞으로 끌게 하니 그들이 길 앞잡이 노릇을 하게 하더라. 그렇게 사흘 밤낮을 행하니 흰 사막이 끝나더라.


3.     흰 사막이 끝나고 푸른 언덕이 나오니, 이곳은 한번도 인적이 닿지 않음이라. 푸른 언덕에 홀로 은빛 솥 단지가 하나 있으니, 그 솥에 달린 발 받침 하나가 장성한 사내의 키보다 크더라. 능히 사내 수십이 손을 잡아도 닿지 않을 넓이에 높이는 구름을 넘어 하늘에 닿았으니, 오직 옆에 서 있는 백향목만이 그 끝에 닿을 수 있더라.


4.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는 갑옷을 던지고, 애마를 백향목에 묶고 뱀과 곰과 이리를 풀어준 뒤 백향목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사흘 낮 사흘 밤을 걸어 백향목의 끝을 올라가니, 구름이 발 아래 놓이고, 달이 이마 옆에 높이며 밤하늘의 별들이 위대한 왕께 다가와 경배하며 소리질러 가로되 오소서 가소서 계시옵소서 마소서 하며 사방에서 흔들리더라. 그제서야 왕은 솥 단지의 끝에 다다르니, 그 아래 깊이가 한이 없고, 그 아래 울렁이며 물결치는 빛의 그림자들이 보이더라.  


5.     그 때 왕의 이마에 다가온 달이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에게 절을 올리니, 가히 지상의 여인과 비교할 수 없는 미모더라. 그가 절하고 천상에 몸을 눕히며 왕께 말하여 가로되


6.     천상과 지상의 주인 아민 이븐 하미드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그대의 원정과 기사가 하늘까지 울리니 별과 달이 그대를 축복하옵니다. 바라옵건데 저 솥 안으로 들어가지 마옵소서. 저 솥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바 된 것이 아니오, 천지가 생긴 뒤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라, 그 처음과 끝을 모르는 물건이옵니다. 굳이 왕께서 저 안을 보신다면 말릴 수는 없으려니와, 저 솥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가신다면 제가 이 천공에서 내려가 성심으로 대왕을 보필할 것이오니 다시 한번 재고하여 주시기를 앙망하나이다.” 한지라


7.     왕께서 달의 말이 미쁘고 충성스러우니 그를 장하게 여긴지라. 그러나 왕의 마음 또한 결심한 바 있으니 그 굳기와 절개가 천년 세월을 버틴 암벽이요 장수한 바다거북의 껍질 같더라. 왕이 솥의 가장자리에 서서 천지사방을 둘러보니 어둔 밤하늘에 별들이 눈부시게 빛나며 저 머리 동쪽에서 햇빛이 어슴푸레 고개를 돌리더라. 대왕의 영토 아수랏의 온전히 발 아래 있으니 그 모양이 심히 보기 좋더라. 왕이 사방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떼어 솥 단지 안으로 들어가니 그 때 뭍 하늘의 별들이 탄식하며 달이 신음하는 소리가 아수랏 온 사방에 전하더라.

 


4

김만석씨,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여기는 어디인가?”

사내는 눈을 비비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백의의 여인을 쳐다보았다. 사방이 꽉 막힌 방 안에 하얀 빛 줄기들이 들어오는 광원이 머리 위에 놓여 있었다.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뭔가를 꺼내 여인이 들고 있는 석판에 적기 시작하였다.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빛 아래 서 있는 백의여인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꿈 안에서 보았던 여인이 틀림없었다. 사내는 손을 뻗어 여인의 흰 옷자락을 잡아보았다. 실제로 손에 잡히는 것이 있자, 그제서야 사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절 알아보시겠어요? 치료실이에요.”

 

치료라니. 그대를 알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도다. 내가 다쳤는가.”

 

전 김만석씨의 담당의사고요. 여기 오신지 사흘째입니다.”

김만석이라 불린 사내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침상 옆에 조촐한 창문이 하나 달려 있었고, 그를 제외하면 사방이 박혀 있는 작은 방이었다. 웅웅대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모를 울림이 사내의 가슴속을 뒤집어놓았다. 여인의 입에 알 듯 모를듯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사흘 전에 직원들이 이곳에 모셔왔습니다. 사고 때 기억 나시나요?”

       “무슨 사고 말이오?”

       “철야 근무중에 사고가 났습니다. 연말 잔업을 하시다가요.”


흰 옷의 여인은 옷에서 뭔가 작은 것을 꺼내 사내에게 전해주었다. 엉겁결에 손을 뻗은 사내가 받은 것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작은 명찰이었다. 푸른 작업복을 입은 초점 없는 사내의 얼굴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사내의 사진 아래에는 주황색과 흰색의 원이 서로 얽혀 있는 회사의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ASU 전력] 그리고 그 아래는 한 글자가 더 크게 써 있었다

[파견]


      “감전이 있어서 들어오셨고요. 화상은……다행히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어요. 같이 일하시던 동료 두 분은 돌아가셨습니다. 만석씨는 응급조치가 끝난 다음에 섬망과 환청을 호소하셔서 저희가 안정치료를 시작했고요. 폐쇄공간 화재로 상태가 심각했어요. 오늘이 사흘 째입니다. 이제 정신이 드세요?”

 

     "예?”

 

    “동료 분들 기억 나세요?”

 

    “제경이, 선구형……”

 

    “이제 기억이 나시는 모양 이네요.”

 

    “아니, 난 기억이……”

만석이라 불린 사내는 천천히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뭔가 두툼한 것이 손가락에 닿았다. 그제서야 그는 눈과 코를 제외한 전 부분을 두터운 헝겊 같은 것으로 싸매놓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억이 드시니 다행이네요. 섬망치료 때문에 한번 더 투약은 들어갈 예정이에요. 일하시는 곳이 크로스 용역이죠? 아무도 연락이 안 되는데 보호자분 어디 계십니까?

 

   “나를 보호할 자는 세상에 달리 없소이다.”

 

  “?”

 

  “나는 아민 이븐 하미드, 내가 세상의 주관자요.”

백의의 미인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근심 어린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여인은 재빨리 빨간 단추를 누르더니 품에서 작은 막대 하나를 꺼내 들었다.


  “김만석 선생님, 지금 여기는 성층권 바깥에 위치한 월면전력 R&D센터예요. 사흘 전에 선생님은 전력 집지판을 용접하시다가 코일위성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나서 이 자리에 오신겁니다. 구조하는 데만 40분이 걸렸어요. 다른 분들 다 돌아가시고 선생님만 잔해를 뚫고 나오신 거예요.”


여의사는 또 다른 검은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박혀있던 사방 벽 중 하나가 열리며 밝은 창문이 되어 사내의 시야 가득 들어왔다. 강렬한 태양이 커다랗게 멀리서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저 아래 파란 구슬 같은 별 하나가 발 아래쪽을 다 채운 채 떠 있었는데 그 위로 솟아오른 태양이 주황색 창문을 통해 또렷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태양의 앞에 거대한 타원형의 구체가 하나 떠 다니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듯 앞부분이 터진 채 파편이 하얗게 입구부분을 채우는데, 그 번쩍이는 타일들은 모두 은회색을 띠고 있었다. 은색의 비행체는 천천히 맴돌며 그 부서진 부분을 창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커먼 속살이 보이며 백색과 적색, 흑색의 배선들이 창자처럼 이리저리 비쭉비쭉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말없이 창밖에 사내가 바라보고 있을 때, 호출을 듣고 달려온 여인들이 백의의 여인을 둘러쌌다.

 

  “선생님, 부르셨어요?”

 

  “김만석씨 아직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어요. 진정제 한 번 더 들어가게 하시고 가수면상태 유지시켜주세요.”

 

  “보험처리가 안 되는데요.”

백의여인은 아까처럼 눈썹을 다시 찌푸리더니 자신이 부른 여인들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냥 저렇게 놔 둘 거예요? 파견직은 사람도 아닌가? 저렇게 뒀다가는 영원히 망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요. 우주섬망에 오래 노출되면 돌이킬 수 없어요.”

 

  “망상이라 하였는가?”

그 때 김만석이 조용이 여인을 돌아보며 말했고, 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순간 멈칫하며 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김만석이라 불린 사내는 화를 내거나 울부짖지 않고, 조용하고 평온한 어조로 다시 백의여인을 쳐다보았다.

 

  “나는 세상의 모든 지혜를 알며 세상의 이치를 뛰어넘은 아민 이븐 하미드다. 그대 흰 여인의 정령이여. 어찌하여 나에게 환상을 보이며 내 왕국에서 나를 벗어나게 하려 하는가?”

 

   “김만석씨. 아버지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지금 화상 입으신 걸 못 느끼시겠어요?”

 

   “내 아버지 하미드 이븐 알 사무드의 역대지략을 내가 다 알며 내 위대한 선조 아흐라마의 손에 들린 치세의 기록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도다. 그러한데 그대는 무엇을 아느냐? 이 땅에 대해 아느냐 아니면 나에 대해 아느냐? 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노라.”

 

   “지금 만석씨는 쇼크상태……”
 
김만석이라 불린 사내, 아민 이븐 하미드는 천천히 손을 들어 여인의 입을 막았다. 그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작은 방을 울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허상이고 환영이라! 달이 일찍이 내게 말해준 것처럼 이곳이 사람의 손으로 지어지지 않은 바 되었으니 오직 이것은 그대의 사특함이 보이는 마술일 뿐이라.”

 

   “김만석씨, 당신의 이름 다시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아수전력에 들어온 크로스 용역 전기기술자예요. 위성 용접 중 사고가 났던 말이에요!”

 

   “물러나라 너 어둠의 여인이여!”

김만석의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5

1.     흰옷 입은 거미여인의 손아귀가 위대한 왕을 향해 다가오자, 왕이 창날을 잡은지라. 황금과 구리의 창날이 여인의 눈을 찌르자 여인은 복색을 드러내며 흰 옷을 벗어던지니라. 여인이 소리지르며 가로되 어둠이라 어둠이 있도다 모두가 어두워지리라말하니 사방 천하가 어둠으로 가득하더라.


2.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의 지략과 용기가 충천하니, 어둠 속에서도 불 같은 왕의 눈이 움직이는 악마들과 유혹하는 거미여인의 손과 발을 모두 보더라, 왕의 분노함이 호통이 되어 터지니 감히 그 앞에서 악마들이 대적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손을 머리 위로 뻗더라. 왕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3.     어두운 미물들아. 그대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도다. ,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의 눈을 흐리고 아름다운 소리와 용모로 나를 홀렸도다. 그러나 너희들은 내 위광을 견뎌내지 못하나니 나는 지혜롭고 강인하니 오직 진실을 보는 도다. 악마들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한 때 바람에 싸여 날아가는 검불이로다.”


4.     왕의 팔에 굳센 힘이 있어 창날로 쓰러진 악마들을 치니 모두가 소리치며 벗어나 가로되 왕이여 우리를 구하소서 우리는 어둠이니 광명을 보내지 마옵소서 하니라. 이에 왕이 두 손의 힘을 모아 거대한 솥 단지의 벽을 치니 솥이 일시에 터지며 사방으로 흩어져 자취를 감추니라. 악마들이 솥과 함께 허공에 흩어지자 달과 별이 그들에게 화살을 쏘니 모두가 고통 속에 다시 암흑으로 돌아가도다.


5.     왕이 그들을 없애고 거미여인의 목을 들고 나아가니 달과 별이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 앞에 모여 경배하며 소리치더라.


6.     위대한 왕이시여, 만세수를 누리로서. 누가 지혜를 측량하여 악인의 계궤에서 벗어날 것인가? 누가 그 손에 위대한 힘이 있어 악인의 쇠사슬을 풀 것인가? 오직 지고한 아민 이븐 하미드로다.”


7.     위대한 왕은 달을 데리고 다시 하얀 사막을 건너 주황 바다를 지난 뒤, 거대한 사막을 지나 작은 궁궐 셋을 지나 위대한 광명이 있는 아수랏의 왕궁으로 돌아오더라. 만민이 위대한 왕의 돌아옴을 기뻐하고 모든 대신과 군사들이 궁궐 앞에 모여 화답하니 천하에 이런 절경이 또한 없더라. 왕이 신하와 백성들 돌아보며 가로되


8.     내 헛된 여정 중에 참된 여인을 이렇게 만났도다. 해가 하늘에 있고 달이 또한 내 품에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사관은 내가 겪은 모은 여정을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할 것이니, 앞으로 아수랏의 혈통은 달과 아민 이븐 하미드에게서 나올 것이다.” 라 하시니라.


9.     그 날 이후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는 달을 왕후로 삼아 비옥한 아수랏을 다스리니, 그 역사가 장구하고 장구하여 백 년하고도 그 곱절의 백 년을 치리하도다.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는 인생이 누리는 모든 복락이 누리니 그 끝이 심히 영화롭고 존귀하여 세상천하 어떤 왕과도 비교할 수 없더라. 또한 그 치세가 무궁하니 달이 영원히 아수랏을 밝힘이요. 해가 아수랏에 영원히 비침이라.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는 그 사이를 영원히 거닐며 무궁토록 아수랏을 굽어살피니라. 위대한 아민 이븐 하미드의 기이한 여정에 대한 기록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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