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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자유의 날개짓

2007.01.26 22:5301.26

hybris님의 "명조호텔 1907-8호"는 이 한 편으로는 완결성은 떨어지지만 분위기랑 캐릭터는 잘 잡아서 재밌었습니다. 연작 소설이라 할 지라도 각 한 편이 단편으로 읽히길 바란다면 좀 더 한 작품 내 완결성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지금 이 상태로는 프롤로그처럼 읽힙니다.

"라의 날"은 감정적으로 끌리기는 하나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대상, 다른 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이질감이라는 소재는 재밌었는데 독자에게 그 점을 공감시키는 게 부족했습니다. 상황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게 독자에게 정서적으로 무언가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는데 디테일이 좀 더 생생하게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합니다.
제목은 '라의 날'이고, ‘라의 날’은 성별이 바뀌는 날인데 이야기 자체에서는 성별이 아닌 종과 종, 그리고 마음을 나누면 된다고 생각했던 사랑의 육체성이 더 중요하게 부각되어 겉돌았습니다. 하지만 재밌는 소재였던 만큼 다음 글이 기다려집니다.


이니 군님의 "신 협객전"은 이야기의 템포 조절 능력, 구성 능력 등은 뛰어나나, 독창성과 큰 틀을 다른 곳에서 빌려온 부분이 너무 컸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 실력 등이 상당한 만큼 순수 창작물을 볼 기회가 오길 바랍니다.


현서님의 “산행”은 2인칭 서술과 키워드를 넣은 글을 연습한 걸로 보이고 좀 더 연습하시길 바랍니다.


아키님의 "저주 받은 검"은 많이 보이는 이야기 전형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구체적인 디테일이 살아 있지도 않고, 독창성이 묻어나지도 않으며, 말 한 마디로 모든 게 해결되어 버려 설득력도 약했습니다.


roland님의 "어떤 기차 여행"은 무의미한 인물이 많았습니다. 그 인물들의 구구한 사연을 한 사람씩 다 읊어줬으면 단편은 아니었겠지만 더 재밌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분위기도 잘 살렸고, 이야기도 문장도 구성력도 좋지만, 이야기 자체에 별 재미가 없었습니다.
1인칭인데 화자가 깨달은 것이 지문으로 설명되기 전에 대사로 먼저 나갈 경우 독자는 배신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독자는 화자를 통해 화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 겪었던 것, 보는 것을 다 전해 듣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툭 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말로 꺼내게 되는 게 낯설어보이는 건 1인칭 시점의 실패가 아닌가 싶습니다.


“해충”은 일단 재미가 없었습니다. 초반에 시간을 들여 묘사한 것에 비해 인물들이 후반에 너무 맥없이 사라지고 (이건 “어떤 기차 여행”과 같은 문제점으로 보입니다.) 앞에서 기대치를 준 것에 비해 절정이 뭉뚱그러져서 넘어갔습니다. 아무리 진리는 '순간적으로 깨닫는다'지만 결말도 너무 뜬금이 없었습니다. 최소한의 복선이나 암시 없이 던져진 결말은 반전이라기보다는 배신에 가깝습니다.


귀우혁님의 “월광”은 달빛을 소재로 화자의 소망을 노래한 시였습니다. 표현들이 예쁘지만 진부했다는 게 아쉽습니다.


문영님의 "엄마, 사랑해요."는 진부한데다 마지막에 사진 하나로 모든 것을 유추한 후 말로 풀어나가 설득력이 약했습니다. 전반부에 평화로우면서도 위태로운 느낌을 살렸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화룡님의 “여우”는 어린 왕자의 교훈'이 중요한 거였다면 어린 왕자를 중점으로 해서 그 빈 자리나 다른 해석을 보여 주든가 이것저것 복합적인 패러디가 주였으면 소재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주었어야 합니다. 재밌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화룡님의 "자유의 날개짓"은 일단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제목에서 너무 노골적으로 보여줘 작품에 대한 기대치를 많이 깎았습니다. 서두에 쓴 글쓴이의 말 역시 그렇고요.
일단 화룡님은 대체로 오프닝을 꼭 아주 밀접히 연관되지 않은 '씬'으로 시작하시는데, 이건 초반 진입 장벽을 꽤 높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밀도/리듬 조절이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너무 길고, 그나마 재미도 없습니다. 용들의 공중 전투씬이라는 건 꽤 박진감 넘칠 수 있는 장면이고 그 장면을 통해, 독자에게 자연스레 용들을 이용해 싸우는 것에 자연스러운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장면인데도 아무런 감흥이 없이 지루했습니다. 하지만 결말의 반전이 작품 내내 지배하고 있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으며,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잘 쓴 글이었습니다. 44호 독자우수단편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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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쓰면서 가장 힘겨웠던 글입니다. 쓰면서도 몇번이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고 중얼거렸지만, 디립다 뜯어고치고 나서도 이모양입니다. 제가 글을 끌어나가기 보다는 글에게 제가 끌려다녔다고나 할까. 그래도 끝까지 써내려간 이유는 '프리 윌리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였습니다.


[단편] 자유의 날개짓

Copyright ã 2006 by박 찬일(Chaneel Park)
Nickname 화룡
All rights reserved

1.

귓가에서 찢어지는 바람 소리만이 요란했지만 소년은 그 가운데서 조금 다른 바람 소리를 들었다. 직감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내는 무언가가 쏜살같이 머리 위를 스쳐지나갔다. 쏜살같이, 그 표현은 참 적당한 표현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쏘아낸 화살이었으니까.

죽을 뻔 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소년은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방향을 돌렸다. 용이란 참 놀라운 생물이었다. 용기사도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용과 용기사의 교감은 용이 하늘에 몸을 맡기고 바람을 희롱하는 감각을 그대로 용기사에게 전하였다. 그리하여 용기사는 비행을 이해했고, 용과 용기사의 교감을 통하여 용기사의 의지는 용에게 전달된다. 그 교감의 중간 위치에 있는, 용의 목덜미에 새겨진 길들임의 표식이 한순간 강렬한 빛을 내뿜고 용은 급격히 방향을 틀어 적을 향해 날아들었다.

용기사라는 거창한 직함을 이름 앞에 달고 있는 열여섯 살 소년은 오른 손에 든 창을 놓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중력의 법칙에 따라 땅으로 떨어지면서도 관성의 법칙을 충실히 이행한 투창은 용이 날던 속도 그대로 날아갔다. 용이 나는 속도는 몹시 빨랐고, 소년의 용은 그 중에서도 특히 빠른 편이었다. 그 창은 불운한 궁수에게 죽음의 선고가 되었을 터였다.

용과 소년은 일체가 되어 바람을 갈랐다. 하늘은 바다보다도 드넓었으며 바다보다도 심하게 요동치는 파도의 연회장이었다. 용의 감각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용기사는 몰아치는 공기의 심술과 바람의 요동을 견딜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용이 그 모든 것들을 뚫고, 때로는 바람 부는 대로 몸을 내맡기는 격렬한 비행을 견딜 수가 없을 터였다. 그러나 용기사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해야 했고, 비행에 덧붙여 전투를 이행할 수 있어야 했다. 머리 위의 그림자를 느낀 소년은 고삐를 양손으로 거머쥐며 몸을 틀었다. 용이 거체를 뒤집었다.

한순간 세상이 핑그르르 돌았다. 땅과 하늘이 위아래를 바꾸었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의 틈새로 무엇인가가 꽂아내리는 벼락처럼 소년의 옆을 지나쳐갔다. 격렬하고 빠른 비행은 끊임없이 몰아닥치는 거센 바람을 의미했고, 숨쉬기조차 쉽지 않은 그 속에서 말이란 의미를 잃은 통신수단이었다. 눈과 육감만이 상대의 의사를 받아들였고, 제한된 의사소통의 수단을 토대로 소년은 방금의 기습을 시도한 적 용기사가 어떤 욕을 입에 담았는지 추측해 보았다. 생각나는 것은 고작 ‘젠장’ 뿐이었다.

반응이 늦었다면 용의 발톱 사이에 꿰여 죽었을 소년은, 한발 빠른 회피기동으로 이제는 상대를 자신의 밑에 두는 이득을 얻었다. 상대보다 높은 고도로 올라가 위에서 내리꽂는 공격은 용기사들 사이에선 필살의 일격이라 할 만큼 강수였지만 상대가 회피할 경우 상대보다 아래 쪽에 위치할 위험이 있었다. 정말 뛰어난 용기사라면 내리꽂는 정도를 조절해 상대의 꽁무니를 잡을 수도 있었지만 상대는 운이 없었던지 아니면 실력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소년은 용에게 몸을 바싹 붙이고 한손에 창을 쥐었다.

옆으로 몸을 기울인 소년은 창을 수직으로 던졌다. 적 용기사는 아까 소년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의 회피기동으로 창을 피했다. 적의 용은 햇빛을 받아 은빛 비늘을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같은 색의 눈부신 날개가 더욱 넓게 펼쳐지며 용은 몸을 옆으로 돌렸고 하늘에서 몸을 옆으로 돌리는 그 행위는 아름다웠다. 용과 용기사의 기이한 교감을 생각하면 그것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과 소년의 용은 무자비했다.

같은 순간 소년의 용도 똑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고 있었고, 소년은 왼손에 큰 랜스를 쥐고 있었다. 소년의 용이 처음 보였던 회피기동이 회전하며 오른쪽 위로 치솟는 회피였다면, 지금의 것은 회전하며 오른쪽 아래로 내리꽂는 추적기동이라 불려야 마땅했다.

소년의 힘은 아마도 또래의 그것에 비해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용의 속도라는 것은 소년에게 벼락과도 같은 힘을 부여했다. 살짝 옆으로 비껴가며 랜스를 갖다대었을 뿐인데 랜스는 은빛 용의 몸을 파고들었다. 충격, 거친 저항, 요동, 미끄러짐, 뜻밖의 또다른 충격, 손을 타고 전해지는 전율스런 감촉. 터져나오는 피. 그 거체를 적당히 겨냥한 것이었지만 운이 좋았다. 다음 일격을 쉽게 먹일 수 있도록 용의 비행을 저해할 만한 약간의 부상을 남기는 정도를 의도했던 것인데, 랜스는 용의 겉가죽을 훑으며 튕겨올라 용기사의 허리를 꿰어버린 것이다. 어깨가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랜스를 놓아버리는 타이밍이 약간 빨랐던 것이 운좋은 결과의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용기사와의 교감이 엉망이 되었을 은룡은 몸을 뒤틀며 소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용기사의 몸에서 터져나온 피가 하늘에 붉은 궤적을 그리며 남았지만 소년은 그 궤적을 쫓지 않았다.

눈앞에 닥쳐오는 또다른 용의 기세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검은색 동체가 육중한 흑룡이 부딪쳐 들어왔다. 회피기동의 틈이 없었다. 상대는 그야말로 전력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충돌의 한순간 파공성 사이로 상대의 부르짖음이 들렸다. “네놈이!” 격렬한 진동으로 몸이 흔들리고, 소년은 자신이 하늘로 튕겨올랐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몸을 비틀어 정면충돌을 피한 소년의 용은 대신 목덜미부터 옆구리에 이르는 긴 상처를 얻었고 동시에 안장을 매어 둔 끈과 고리들이 모두 끊어져 안장이 하늘로 튕겨올랐다. 소년은 안장에 견고히 묶여 있었고 용의 오른켠에 묶인 끈들이 아직 안장을 용에 매달아 놓고 있었지만 이미 정상적인 조종은 불가능했다.

안장에 매달린 체 거꾸로 뒤집어졌기에 용이 받아들이는 감각과 소년의 눈이 보는 풍경의 부조리가 끔직한 두통과 혼란을 가져왔다. 용이 입은 상처에서 밀려오는 고통은 혼란을 가중시켰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뒤쪽에서는 흑룡과 흑룡의 용기사가 괴성을 지르며 쫓아오고 있었다. 한순간의 틈도 없이 바로 방향을 전환해 되쫓는 흑룡의 돌격은 죽음을 예감케 했다.

그러나 흑룡의 돌격은 또다른 흑룡에게 저지당했다. 아래쪽에서부터 치고올라온 또다른 흑룡이 몸으로 부딪치며 소년에게 달려들던 흑룡을 저지한 것이다. 소년은 눈을 감았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그 와중에도 헐떡이는 심장은 한 가지 의지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살아야 한다.

하강, 지표로 가까워 지는 것. 뒤집혀 매달린 소년의 기준과 똑바로 날고 있는 용의 기준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눈을 감았어도 어지러움은 극도로 더해가고, 귓가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겨우 겨우 짜내어 용에게 전달한 의지라고는 ‘천천히’, 하나 뿐이었다.

숙련된 용기사의 제어를 받는 용은 사뿐히 지면에 안착한다. 용기사의 제어를 받지 못하는 용은 추락한다. 방향감각이 혼란에 빠질 경우 용기사와 용의 교감은 용기사 뿐 아니라 용마저 혼란시킨다. 소년의 용은 날개를 한껏 펴고 천천히 내려오긴 했으나 몸을 뻣뻣히 한 체 땅바닥에 부딪쳐갔다.

털렁, 털렁, 털렁. 소년은 몇 번이나 튕겨올랐다 떨어져 내렸다. 안장에 매인 몸이 아니었다면 아예 멀리 튕겨 날아가련만, 소년은 땅과 용의 몸과 하늘에 부딪치며 정신을 잃었다. 용기사와 용의 추락은 병사들을 멀어지게 했고, 대신 다른 이들을 불러들였다.

“라이드, 라이드! 정신 차려라! 눈 떠!”
“… 리곤?”

소년, 라이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소년은 두통이 가셨음을 깨달았다. 그는 어느새 들것에 눕혀져 있었고 낯익은 얼굴이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용기사 보조, 리곤은 능숙한 솜씨로 용기사와 용의 교감을 해제시켰다. 용의 상처에서 오는 고통과 방향감각의 혼란에서 오는 두통은 깨끗이 사라졌다. 대신에 전신에서 밀려오는 욱신거리는 아픔이 소년의 감각을 지배했다.

“스핏… 스핏은?”
“스피리어트는 멀쩡해. 녀석은 용이라구. 너처럼 허약하지 않단 말이지.”

리곤은 흰 이가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그 사이 소년의 몸은 들것에 고정되었고, 리곤을 따라온 의무대원들은 들 것을 들어올렸다. 리곤은 들것의 곁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많이 다쳤지?”

라이드의 질문에 리곤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힐끗 스피리어트 쪽을 돌아보았다. 소년의 푸른 용은 병사들이 도와 수레에 옮겨 싣고 있었다. 지치고 늘어진 모습이긴 했지만, 용의 기준으로 볼 때 스피리어트는 멀쩡했다. 무엇보다도, 노란 눈은 여전히 생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저 상처, 교감으로 느끼기에는 중상이었겠지만 용에게는 이삼일 쉬면 나을 상처라구. 그보다 네가 걱정이다.”
“스핏 말고, 쟈리울 말이야.”

리곤의 두툼한 입술이 한 일자로 다물어졌다. 평소의 수다스런 성격에 비하여 볼 때, 그는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킬 작정인 듯 해 보였다.

“내가 피엘 누나를 죽였잖아. 쟈리울, 추락하는 것 같았는데.”
“죽었을걸.”
“… 쟈리울도? 그렇게 높이 날고 있는 중은 아니었어.”

리곤은 때때로 자신의 동생같이 느껴지는 라이드에게 매몰찬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용기사 보조였다. 그는 용과 용기사를 잘 이해했고, 따라서 보통 사람처럼 얼버무릴 수 없었다. 용과 용기사의 최후에 익숙하지 못한 소년은 그것을 용기사 보조를 통해 배워야만 했다. 한두 번이 아닌, 무수히 많은 횟수를.

“잘 알겠지만, 용기사의 죽음은 용에게 명령의 부재 이상을 가져와.”
“… 응.”
“용기사가 죽을 때, 용기사는 무시무시하게 많은 상념을 남겨. 그것은 아직 끊어지지 않은 교감을 통해 용에게 전달되고, 용은 그 모든 상념들속에서 괴로워하게되지. 그리고 추락해. 스피리어트의 추락에서 느꼈겠지. 용기사의 명령을 받지 못하는 용은 엉망진창의 착륙을 하지. 용기사가 죽었을 때, 용의 혼란은 극도에 달해. 그 추락을 견디는 용은 극히 드물어.”
“전에 리곤이 말해주었지. 스핏에게는 전에 다른 주인이 있었다고.”
“응.”
“그 주인은 죽었지만 스핏은 살았어.”

라이드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용의 감각을 받아들이는 것을 도와주는 각성제는 감정의 발현을 상당히 억누르는 효과를 가진다. 아주 격한 어떤 감정이 아닌 이상 각성제의 효과를 뛰어넘을 만큼 강하게 표출될 수 없었다. 어린 라이드가 슬퍼하면서도 무덤덤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각성제의 덕분이었다.

“스피리어트의 경우는 운이 좋았지. 두 번째 주인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경우는 흔치 않거든. 스피리어트는 오래 살 거야. 너처럼 좋은 녀석이 새 주인이 되었으니.”

라이드는 곧 의무반이 대기하는 천막으로 옮겨졌고 부상자에 대한 치료가 시작되었다. 라이드도 리곤도 더 이상 대화할 수 없었다.



2.

“여어, 라이드. 몸은 좀 어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털이 덥수룩한 장한이었다. 척 보기에도 근육으로 단련된 몸이 다부졌는데, 일반적으로 몸이 가벼운 편인 용기사들 중에는 특이하게도 체구가 큰 편이었다.

“무리카리!”

라이드는 반가움에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또래보다도 체구가 작은 데다 헐렁거리는 흰색 환자복까지 입고 있는 라이드가 용기사는 물론이거니와 보통 사람들보다도 체구가 큰 무리카리와 용기사식 인사법을 하는 모습은 몹시 애처로와 보였다. 용기사식 인사법은 서로의 어깨에 오른 손을 얹고 두 번 두드리는 것인데, 다른 사람들과 이 인사를 하기 위해서 라이드는 매번 발돋움을 해야 했고, 무리카리의 경우에는 무리카리가 무릎을 좀 굽혀야 했다.

“뭐야, 멀쩡히 돌아다니는걸 보니 크게 다쳤다는 건 리곤의 농담인 모양이로군?”
“크게 다친 건 아니에요. 몸 여기저기에 멍이 좀 들고, 근육이 좀 당겨서 움직일 때 아프긴 한데, 뭐 그리 심하진 않아요. 누워서 쉬는 게 최고라고는 하는데 따분해서 죽을 맛이에요.”
“그래? 그럼 잘 됐군. 지금 바람탑 가는 길인데 같이 가자.”
“바람탑이요? 리곤이 아직은 안된다고 했는데…”

그 말에 무리카리는 문 밖을 내다보고는 과장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라이드에게 씩 웃어 주었다.

“리곤 녀석 지금 없어.”

라이드는 약간 주저하면서도 끝내는 무리카리를 따라 바람탑으로 가게 되었다. 무리카리가 시켰다고 하면 리곤도 화를 내며 무리카리를 탓하지, 라이드를 탓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도 큰 이유였다.

바람탑은 성의 서쪽에 있었고 라이드와 무리카리는 이십여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먼 길은 아니었지만 몸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은 라이드에게는 좀 힘든 길이었다. 무리카리는 그것을 생각해 평소보다 천천히 걸었다.

“무리카리, 이번엔 고마웠어요.”
“응? 아아, 전투때?”

무리카리는 예의 그 사람 좋은 웃음을 한번 짓더니 코를 문질렀다. 쑥스러울 때면 항상 나오는 버릇이었다.

“루크 그 녀석, 자기 덩치에 맞는 상대를 골라야지. 나보다도 큰 덩치가 우리 귀염둥이 라이드를 공격하게 내버려 둘 수 있나.”

무리카리의 왼쪽 손목에는 이어붙임의 표식이 그려져 있었기에 라이드는 슬퍼졌다. 표식술사가 새기는 표식은 무엇이든 표식이 새겨진 자의 수명을 조금씩 깎아먹는다. 그 수명을 원동력 삼아, 표식은 새겨진 표식의 모양대로 힘을 발휘했다. 이어붙임의 표식은 잘려진 것을 붙이는 것이다.

“무리카리가 살았으면, 루크 형은 죽었겠군요.”
“응. 내 손목이랑 녀석 목이랑 바꿨어.”

무리카리는 평이한 어조로 그렇게 대답했다. 라이드에게도 그건 이미 짐작했던 일이었다.
안장을 매는 끈이 끊어져 몸이 뒤집혀 꼼짝할 수 없던 라이드에게 달려들던 루크의 돌격을 저지한 것은 무리카리였다. 몸통으로 부딪쳐 싸우는 접근전은 용기사들끼리도 무기를 부딪칠 뿐 아니라 용들도 서로를 물어뜯고 앞발로 할퀴고 꼬리로 후려치는 난전이었다. 패자는 물론 승자조차도 심한 상처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용기사들이 기피하는 전투방식의 하나였다. 그런 싸움이 일어났고, 무리카리가 살아있다면 상대였던 루크는 필히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라이드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으려 노력했지만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는 나오지 않는 숨을 쥐어짜서 겨우겨우 말을 만들었다.

“우리는 한 쌍의 연인을 사이좋게 죽였군요. 나는 피엘 누나를, 무리카리는 루크 형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 화낼거냐?”
“… 아뇨.”
“그래, 너도 이해하겠지. 용기사란 그런거다. 동맹국가의 용기사는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지. 어린 너에게 주의를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만, 동맹국가는 언제든지 적으로 돌아설 수 있는 거다.”

라이드는 치밀어오르는 슬픔을 억눌렀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 몸이 휘청거렸다. 무리카리의 눈에도 언뜻 슬픔이 어려 있었다. 하늘은 너무나도 파랗고 아름다운데 소년에게는 날개가 없었다. 라이드는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3.

바람탑은 일반적인 탑과는 조금 모양새가 달랐다. 다른 모든 생김새는 차치하고서라도, 매 층마다 뚫려있는 큼지막한 구멍들은 보통의 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혹자는 그 이름과 연관지어 그것이 통풍을 위한 구멍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할테지만, 조금이라도 바람탑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구멍들의 쓰임새 역시 잘 알았다. 이 도시에 살면서 바람탑의 구멍들로 날개를 펼친 용이 드나드는 것을 못 본 이는 드무니까 말이다.

“라이드? 네가 왜 여기에?”

리곤의 놀란 얼굴과 맞닥뜨린 라이드는 당황하여 무리카리의 뒤로 숨었다. 리곤이 어이없다는 투로 한마디 하려는 차에 무리카리가 코를 매만지며 말했다.

“용기사가 용을 방문하러 왔는데 안 될 건 또 뭐야?”
“라이드는 아직 한참 쉬어야 돼! 또 네 녀석이 꼬드겼지?”
“꼬드기다니, 또 날 나쁜 놈으로 모는군? 라이드는 튼튼하다구. 누워있으면 엉덩이에 종기가 돋는 체질이란 말야. 맞지?”

라이드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다가 리곤의 성난 눈길에 다시금 무리카리 뒤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리곤이 성이 났건 말건 무리카리는 예의 태평한 얼굴로 계속 지껄여 대었다.

“튼튼한 우리야 그렇다 쳐도 연약하고 귀여운 우리 아가용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몹시 걱정이 되어서 어디 쉬고 있을 수가 있나? 자면서도 다뭄 생각, 밥 먹다가도 다뭄 생각. 아, 라이드는 스피리어트 생각을 했고 말야.”
“너같이 태평한놈이 잘도 그랬겠다! 알았으니까 그만 시끄럽게 하고 올라가 봐. 용들이야 멀쩡하지만 네놈 헛소리를 듣다간 내가 쓰러지겠어.”

무리카리는 씨익 미소짓더니 리곤의 어깨를 한번 쳐 주었다. 리곤은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는 라이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라이드는 잠시 목을 움츠렸지만 리곤의 부드러운 손길에 안심했다.

“라이드. 용을 걱정하는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너 자신의 몸부터 걱정해야지. 오늘은 봐주겠지만, 내일부터는 정말로 침대에 누워 있어. 사나흘 쉬면 완벽히 나을 테니 그때까지 조금만 참으란 말이야.”
“응.”

라이드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 근육이 결리고 몹시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리곤은 그런 라이드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옆구리에 든 두툼한 서류뭉치를 추스려 들었다.

“위에는 앙시 님이 표식점검 하고 계시니까 너무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걱정 마. 라이드는 착한 아이니까.”
“너 말이야, 너! 라이드 말고!”

리곤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쿵쿵거리며 바람탑을 나갔고, 무리카리는 코를 한번 문지르고는 계단으로 갔다. 바람탑은 여덟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창고였다. 용기사의 무기, 용의 안장을 비롯한 온갖 용구, 용의 먹이가 될 식량 등등 용과 용기사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창고에 비치되어 있었다. 5층부터 8층까지에는 한 층에 두 마리씩 용이 살고 있었다.

무리카리의 다뭄과 라이드의 스피리어트는 둘 다 6층에 있었다. 한참을 걸려 좁은 계단을 올라가 6층의 문을 열면 커다랗고 둥그런 방이 나온다. 탑 내부는 매우 넓은 편이었는데,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탑의 가운데는 바닥이 없고, 큰 도르래가 설치되어 용의 식량이나 부상당한 용을 싣는 데 쓰이기 때문이었다. 벽의 한켠은 벽이 없이 사각의 구멍이 뚫려 있고 그리로부터 바람이 들어왔다. 그 벽으로부터 양 옆에는 용들이 있었다.

“다뭄! 잘 있었냐?”

6층에 들어서자마자 무리카리는 환성을 지르며 자신의 용에게로 달려갔다. 라이드는 다뭄과 무리카리의 재회를 지켜보기보다는 자신의 용을 만나기를 원했다.

“안녕, 스핏. 나야.”

다정하게 말을 걸자 푸른 비늘을 가진 용이 눈을 떴다. 스피리어트의 노란 눈을 처음 보는 이라면 머리가 삐쭉 설 만큼 섬칫한 눈이었지만 라이드는 그 눈을 좋아했다. 사람에게서는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생명력이 여느 보석보다도 반짝이는 큰 눈에 가득했다. 익숙해지면 누구라도 그 눈의 아름다움에 매료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 눈에 라이드의 모습이 담기자 용은 이미 냄새와 기척으로 알아차린 자신의 주인을 확인하고 반가움을 표시한다. 용이 길게 목을 뻗어 라이드의 앞에 머리를 대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푸르륵, 스으으. 용은 가볍게 콧김을 뿜으며 라이드의 말에 반응한다. 라이드는 그것이 괜찮다는 뜻이리라고 여겼다. 콧등에 손을 얹자 용은 가만히 머리를 내리더니 부드럽게 라이드의 다리를 밀어올렸다. 라이드도 거부하지 않았고, 라이드는 용의 이마에 얹혀 들어올려졌다. 용의 머리는 그리 넓지 않아 떨어지지 않으려면 중심을 잘 잡아야 했다.

용은 목을 틀어 라이드를 목덜미 언저리에 내려주었다. 안장은 없었지만 그렇게 용의 위에 올라타는데 익숙한 라이드는 적당히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 자리에 앉자 목덜미 즈음부터 옆구리, 뒷다리 근처까지 이어지는 긴 상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많이 아팠지, 스핏?”

용기사 보조가 길들임의 표식을 활성화시켜 교감을 극대화시키지 않아도 용과 용기사는 어느정도 교감할 수 있었다. 용기사 보조의 도움 없이 얼마나 용과 교감할 수 있는 가는 용기사의 실력을 가르는 중요한 척도 중의 하나였다.

라이드와 스피리어트의 교감은 발군의 것이었다. 용기사의 조건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용과의 교감능력이었다. 전투능력은 훈련으로 키울 수 있지만 용과의 교감은 타고나는 것이었다. 어린 소년인 라이드가 용기사로 발탁된 것도 보기 드물 정도로 뛰어난 용과의 교감능력 때문이었다. 칠년째 생사를 함께해온 다뭄과 무리키라도 스피리어트와 라이드에 비하면 서먹서먹한 관계로 여겨질 정도였다.

라이드는 용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깨어지고 벗겨진 비늘들이 일렬로 늘어선 밑에는 아직 덜 굳어진 새 비늘이 돋고 있었다. 새 비늘이 완전해 질 때 쯤이면 깨어진 비늘들은 모두 떨어져 나가고 상처는 흔적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라이드는 그 상처의 고통을 기억했다. 칼날이 자신의 몸을 베고 지나가는 고통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용과 용기사는 아픔마저 공유했고 용기사는 용만큼 강인하지 않았다.

“상처 입을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라이드는 속삭였다. 스피리어트는 라이드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을 때면 그의 얼굴 가까이로 머리를 가져가 부드러운 숨을 내뿜었다. 용이 사람의 언어를 직접적으로 알아듣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스피리어트는 단지 라이드가 나직히 읊조리는 그 음조에 반응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허나 라이드는 한번도 스피리어트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의심한 적이 없었다.

“너도 나도 싸울 일 없이 하늘을 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스피리어트는 거체를 꿈틀거려 자세를 바꾸었다. 스피리어트의 노란 눈이 열린 벽을 향했다. 바람을 막아주던 스피리어트가 자세를 바꾸자 라이드는 열린 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세차지 않으나 차가운 바람이 라이드의 머리를 훑었다. 라이드는 그 바람도 싫어하지 않았다. 바람탑으로 들어오는 바람에서는 하늘의 냄새가 났다. 그것은 비행의 냄새였다.

“아, 지금이라도 날 수 있으면 좋겠어. 답답해. 잠깐만 날면 참 좋을텐데.”

스피리어트는 대답하듯이 날개를 움찔거렸다. 철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요란했다. 라이드는 구속되어있는 스피리어트의 날개를 슬프게 바라보았다. 접힌 날개를 펼칠 수 없도록 가죽으로 된 덮개를 씌우고 그것을 쇠사슬로 감아 자물쇠를 채워 놓았다. 라이드는 그것을 용에 대한 탄압이라고 생각했다. 용의 날개는 폭풍도 견딜 만큼 강인하지만 동시에 바람의 미묘한 흐름까지도 느끼도록 섬세했다. 그것을 쇠사슬로 억제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처사였다.

“리곤에게 가서 열쇠를 달라고 하면 혼나겠지?”

라이드는 자기가 말해놓고는 혼자 웃어버렸다. 리곤은 당장 잡아먹을 듯한 표정이 되어 라이드를 집어다 침대에 꽁꽁 묶어둘 것이다. 스피리어트는 목을 감아 등에 머리를 얹었다. 그 자세는 스피리어트도 편했고, 안장 없는 맨등에 올라탄 라이드도 기대기 편한 자세였다.

라이드는 스피리어트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고는 누웠다.

“저기, 무리카리.”
“응?”

무리카리도 다뭄의 위에 비슷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그와 라이드는 고개만 돌려 눈을 마주쳤다. 체구가 큰 무리카리라면 보통의 용의 맨등에 그렇게 눕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흑룡은 용들 중 가장 덩치가 큰 종류였다.

“무리카리도 날고 싶죠?”
“당연하지. 좀이 쑤셔 죽겠다고.”
“헤헤. 그런데 왜 다뭄이에요?”
“뭐가?”
“왜 이름을 다뭄이라고 지었어요?”

무리카리는 손가락으로 다뭄을 한번 가리켜 보고는 웃었다.

“검은색이잖아. 내 고향에서 ‘다뭄’은 ‘검다’ 라는 뜻이야. 뭐 대단한 것을 기대한거야?”
“에이, 그게 뭐야. 저라면 좀 더 멋진 이름을 생각했을 거에요.”
“흐응, 그래?”

라이드는 스피리어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짙은 푸른 색을 머금은 비늘은 매끄럽고 광택이 났다. 라이드가 문득 물었다.

“파란 색은 뭐라고 해요?”
“에비루.”
“에이, 영 아닌데요. 그냥 스피리어트가 낫겠네.”
“스피리어트의 이름이 마음에 안드냐?”

라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그래요. 이왕이면 내가 이름을 지어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럼 지금부터라도 이름을 바꿔 불러.”
“에이, 그것도 이상해요. 지금까지 계속 스핏이라고 불러왔는데.”
“맞는 말이다. 이름을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야.”

무리카리가 아니었다. 남자답게 굵으면서도 쾌활한 무리카리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카랑카랑한 목소리. 라이드와 무리카리는 그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머리와 수염이 반백으로 변한 장년의 사내가 걸어들어왔다.

“아까부터 밑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나더니 자네들이었군. 둘 다 부상으로 당분간 요양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요양이라니요, 뭘. 라이드나 저나 이렇게 멀쩡한 걸요.”
“라이드 군이야 의사 소관이니 그렇다 치고, 무리카리 자네는 내 환자인데 무슨 소리 하는 건가. 표식이 안정화 될 때 까지 다른 표식 근처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 표식끼리 부딪치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제가 한 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구요.”

표식술사 앙시는 미간을 좁혔지만 무리카리를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무리카리가 좀 유별나긴 했지만 용기사라는 인물들의 면면이 하나같이 조금씩 독특한 데가 있었다. 표식술사는 다른 일도 많이 했지만 용에게 길들임의 표식을 새기고 관리하는 것은 표식술사들의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게다가 표식술사가 되려면 견습기간동안 용기사 보조의 일을 해야 했으니 용기사들의 성격에는 익숙해질 수 밖에 없었다.

“리곤 녀석이 들여보내 주던가?”
“그러니 들어왔지요.”
“쯧. 그 녀석 화난 얼굴이 눈에 선하군. 아무튼 간에 표식 점검하겠으니 다리좀 치우게.”

앙시는 다뭄의 곁으로 가 계단을 올랐다. 바퀴가 달려 움직이기도 하는, 말하자면 간이 사다리에 가까운 그것은 용기사가 용의 위에 탑승할때 사용되는 것이었다. 바퀴가 달려 있어 좀 불안정했지만 앙시는 노구에도 익숙하게 그 위로 올라갔다. 다뭄에 올라타지는 않고, 그렇게 다뭄의 목덜미에 있는 표식을 조사하는 것이다.

“뭐 멀쩡하군. 자네는 어떤가?”

무리카리는 히죽 웃으며 손목을 흔들어 보였다. 이어짐의 표식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용에게 새기는 길들임의 표식은 만약에라도 지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예 은으로 표식을 만들어 용의 목덜미에 박아넣었다. 하지만 사람의 피부는 용의 비늘처럼 단단하지 않았고 용처럼 커다랗지도 않았기에 은으로 된 표식을 박아넣는 것은 무리였다. 대신에 사람에게는 특별한 표식술사의 염료로 문신을 새기기 마련이었다.

“표식 위에 상처를 입으면 즉시 말해. 바로 고쳐야 하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한 이틀 정도는 주의해. 표식이 안정화 되었다고 장담할 수 없어.”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앙시는 들고 있던 서류에 무엇인가를 적어넣더니 이번엔 스피리어트와 라이드의 곁으로 왔다.

“스핏, 몸을 돌려.”

라이드가 속삭이자 스피리어트는 몸체를 크게 틀어 앙시 곁으로 목덜미를 가져다 대었다. 계단을 올라서던 앙시의 얼굴에 약간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자네의 교감능력은 늘 날 놀라게 하는군.”
“헤헤, 스핏이 말을 잘 듣는 거에요.”

앙시는 잠시 스피리어트의 위에 새겨진 표식을 만져보았다. 은으로 만들어진 복잡한 형태의 문양인 표식이 혹시 손상을 입지 않았는지 면밀히 확인해 본 그는 그 위에 손을 얹고 몇가지 간단한 명령을 내렸다. 스피리어트는 표식술사의 명령에 복종해 꼬리를 바짝 세우기도 하고 목을 이리저리 틀어보기도 했다. 앙시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류에 ‘상태 양호’ 라고 적어넣었다.

“라이드군.”
“예?”
“자네의 교감능력은 점점 커지는 것 같군. 잘 하면 표식술사의 도움이나 각성제 없이도 비행할 수 있겠어.”
“정말요?”
“그래. 하지만 그리 좋아할 것은 못 돼. 교감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나다고 해서 좋은 꼴을 보는 건 아니지. 여기 봐, 스피리어트의 표식을.”

앙시의 손끝이 가리키는 부분은 스피리어트에 새겨진 길들임의 표식 근처였는데, 비늘 위로 희미한 흔적이 있었다. 라이드가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해하자 앙시의 주름진 입가에 뒤틀린 웃음이 맺혔다.

“전에 한번 표식이 있었던 자리지.”
“아… 그렇군요.”
“스코트도 자네처럼 교감능력이 몹시 뛰어났었지…. 아까운 친구였는데.”
“앙시!”

다뭄과 노닥거리던 무리카리가 갑자기 벽력같은 호통을 내지르자 라이드는 깜짝 놀라 앙시의 안색을 살폈다. 용기사가 몹시 귀중한 전력으로 취급받으며 높은 대우를 받지만 표식술사는 용기사보다도 더 드물며 더 귀하다. 앙시는 용기사 대장인 레오폴트보다도 높은 이였기에 무리카리의 고함은 매우 무례한 일이었던 것이다.

“왜 그러나?”
“그 이상은 말하지 마십시오.”

다행히 앙시는 그다지 화를 내고 있지는 않았다. 어딘지 무리카리를 놀리는 듯한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라이드도 알아야 할 일이네.”
“그건… 저희 용기사들이 알아서 말할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할 말이 없긴 하네만… 뭐 알았네.”

무리카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문을 모르는 라이드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무리카리는 끝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와 라이드는 아무 말도 없이 바람탑을 나왔다. 라이드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무리카리가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나중에, 네가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말해주마.”

4.

“라이드, 네가 여긴 무슨 일로?”

구름탑의 도서관은 조용했다. 특히 지금처럼 전쟁이 난 시점에서는 붐빌 이유가 없었다. 용기사 보조일을 하는 틈틈이 정식 표식술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하는 리곤이야 자주 도서관에 들리지만, 책과는 거리가 먼 편인 용기사가 도서관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다. 귀족 출신으로 용기사 대장인 레오폴트 정도나 가끔 도서관에 오는 정도였고, 놀기 좋아하는 라이드가 도서관에 오는 경우는 전무하다시피했다. 그러니 리곤이 라이드를 보고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심심해서 책이나 보려구.”

리곤은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라이드에게 보냈다. 라이드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글을 잘 읽지 못했다. 읽기는 읽는데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라, 남들은 십분이면 읽을 만한 분량을 더듬거리며 끙끙거려야 했다. 가만히 누워만 있으려니 얼마나 라이드가 심심했을까 안쓰럽기도 한 동시에 한편으로는 놈 우습기도 했다.

“어떤 책을 보려는데?”

라이드는 리곤이 들고 있는 ‘고급 표식술 실기응용 100선’ 이라고 쓰여 있는 무시무시하게 두꺼운 책을 한번 곁눈질하더니 오한이 이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라이드는 소년답게 모험소설이나 영웅담이 주로 쓰여있는 책장으로 갔다. 한참동안이나 제목들을 들여다보던 라이드는 결국 리곤의 예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책을 뽑아들었다.

“용기사 리에루트라… 네가 뭐라도 책을 보는 게 다행이긴 하다만…”
“헷. 다른 건 어려워서.”
“글쎄. 아무튼 간에 오늘 내일은 푹 쉬고, 내일 모레는 좀 일어나서 몸을 풀어둬라.”
“아, 그럼 스핏 타도 될까?”
“안돼. 지금 성밖에 적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용을 띄울 수가 없어.”
“아, 그럼…?”
“그래. 사흘 후 출전이야.”

라이드는 약간 시무룩해졌지만, 곧 다시 활짝 웃었다. 출전이건 어쨌건 스핏을 탄다는 사실이 즐거운 것이다. 라이드는 경쾌한 걸음으로 책을 안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는 리곤의 심정은 착잡했다. 아직 견습이지만 리곤은 표식술사다. 설사 전쟁에서 진다 하더라도 귀한 표식술사는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물론 웬만큼 자리도 보장된다. 그러나 용기사의 경우는 다르다. 비록 용기사가 몹시 귀하고, 항복한다면 적도 회유하러 하겠지만, 그 전에 용기사들은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야 한다.

열 여섯 살 어린 라이드도 바로 그런 용기사였다.





5.

라이드는 침대에서 뒹굴었다. 책은 고르고 골라 가장 재미있을 법한 걸 고른 거였지만 워낙에 읽는 속도가 느리다보니 흥미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무엇보다 라이드는 책에서 흥미를 느끼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아, 지겨워.”

마침내 용기사 리에루트라가 적국의 공주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피눈물을 흘리는 부분에 이르러 라이드는 책을 던져버렸다. 말하자면 그건 우스운 책이었다. 농기구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사람이 농사에 대한 책을 쓰면 농부는 비웃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용기사 리에루트라의 이야기는 진짜 용기사인 라이드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것 투성이었다.

“하나도 재미 없잖아. 다른 거나 빌려올까.”

라이드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타박상과 충격에서 오는 근육의 결림 현상은 며칠 쉬는 동안 거의 다 나았기에 몸은 정상이나 다름없었다. 책을 집어들며 옆방의 무리카리에게나 놀러갈까 생각하던 라이드는 하마터면 책 속에서 떨어진 또 하나의 얇은 책을 놓칠 뻔 했다.

“어라?”

라이드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용기사 리에루트라의 이야기가 꽤 긴 이야기이고 두꺼운 책이기도 했지만 라이드가 그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얇은 책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이라기 보다는 종이를 여러장 겹쳐놓고 구멍을 뚫어 묶어놓은, 일종의 공책이었다.

보통의 책에서 볼 수 있는 제목이 보이지 않는 공책의 오른쪽 구석에는 미려한 필체로 하나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스코트… 위더? 웨더? 이름인가?”

라이드는 그것을 펼쳤다. 직접 손으로 써 넣은 것이 분명한 글들이 종이 가득 빼곡해 라이드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렇잖아도 공부가 짧은 라이드에게 미려한 필기체는 읽기 고약한 암호문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무리 익숙치 않은 사람의 필기체라 하더라도 몇 번이나 반복되는 한 가지 단어만큼은 눈에 확 띄었다.

“스피리어트?!”


대륙력 520년 두 번째 달 1간 3일 날씨 맑음
나는 오늘 처음으로 내 용을 만났다. 표식술사들의 말에 의하면 처음에는 용과 감각을 공유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을 처음 보는 순간 알았다. 이 녀석과 나는 운명지어져 있다 라고. 내가 기라트 님을 처음 뵈었을때, 그분의 용 네버레이드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어떤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 멋진 청룡을 보는 순간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흥분을 느꼈다. 이 녀석과 앞으로 해나갈 모든 일들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 나는 이미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녀석의 이름은 스피리어트라고 지었다. 용기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부터 나의 용의 이름은 스피리어트라고 정해놓고 있었다. 이 녀석의 날렵한 몸을 보면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을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청룡은 용들 중 가장 빠르다고 하지 않는가? 돌풍만큼 잘 어울리는 이름도 없을 것이다.

대륙력 520년 두 번째 달 1간 4일 날씨 맑음
스피리어트 녀석은 내가 녀석을 좋아하는 것 만큼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와 함께 용기사가 된 잉글러는 자신의 용을 다루는데 애를 먹는 것 같다. 감각은 전해져 오는데 명령 내리기가 어렵다나?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스피리어트와 나는 몸이 닿는 순간 한 몸이 된 것 같은 기분인데 말이다.


그리고 등등등. 그 정도만 읽는 데도 라이드는 거의 땀이 흐를 정도의 고생을 했다. 스코트란 사람은 몹시 미려한 필체를 갖고 있었다. 필체가 아름답다는 것은 꽤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미끄러지는 듯 글을 흘려써도 획을 생략한 글자도 없었고 자로 댄 듯 반듯하게 열이 맞추어져 있고, 글씨의 크기와 모양도 매우 안정적이었다. 레오폴트 말고도 고등교육을 받은 용기사가 있었구나 하고 라이드는 놀랐지만 그것보다 놀란 것은 이것이 스피리어트의 전 주인의 일기장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런 게 왜 여기에?”

라이드는 스피리어트의 전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사실 용기사가 죽을 때 용이 살아남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용이 죽으면 용기사도 죽었고, 용기사가 죽으면 용도 죽었다. 물론 용기사가 용에 탑승하지 않고 죽었을 때는 용도 멀쩡하지만, 스피리어트의 전 주인은 분명 ‘전사’ 했고, 때문에 시체를 수습할 수 없었기에 무덤도 없었다.

리곤도 무리카리도 스피리어트의 전 주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몹시 꺼려했다. 금기도 아니었고, 비밀도 아니었다. 다만 꺼림칙한 주제였다. 라이드도 일부러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스피리어트의 전 주인에 대해 그리 캐물은 적이 없었다. 모든 용기사와 용의 죽음은 금기는 아니었으나 되도록 언급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캐묻지 않는다고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던 라이드는 마침내 스피리어트의 전 주인에 대해 알 수 있는 물건이 생겨 몹시 기뻐했다. 은근한 질투심도 생겼다. 자신은 스피리어트와의 이야기를 글로 남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이드는 끙끙거리며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두 페이지 째를 읽다가 코를 골며 곯아떨어지기 직전까지, 그는 용기사 교본보다도 이 얇은 일기장에 더 많은 열성을 가지고 있었다.




6.

“무리카리이이이이!”

무리카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라이드의 비명을 아예 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무서운 속도로 날고 있는 라이드의 목소리는 찢어지는 바람소리에 묻혀 라이드 자신조차도 듣지 못했으니까. 자신의 목이 비명으로 떨고 있는데 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아무리 외쳐도 허무로 돌아가 버린다.

라이드는 무서운 속도로 추락했다. 스피리어트의 날개는 반쯤 접혀져 바람을 갈랐다. 무리카리와 다뭄은 세 마리의 용 사이에 끼어 있었다. 무리카리가 라이드의 비명을 들었더라도 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세 마리 용의 사이에 끼어있는 다뭄이 몸을 비틀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지만 무리한 일이였다. 무리카리는 정신이 없을 것이었다. 용을 다루며 동시에 칼을 휘둘러 주변의 적들을 떨치려 했지만 적은 셋이었다.

하강은 무서운 느낌이었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공포를 들추어 내는 오싹함이 등골을 타고 흐르고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어느때보다도 크게 느껴진다. 그렇게 높이 날고 있었는데도 땅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대지가 그에게 다가왔다. 건기의 초원은 우울한 연두빛으로 메말라 있었다. 라이드는 날개를 펼쳤다. 스피리어트가 그의 의지를 따랐다.

날개에 바람이 묵직하게 안겨들고 스피리어트는 급격히 머리를 쳐들었다. 시야를 매운 대지가 갑자기 하늘로 바뀌었다. 스피리어트는 아름다운 각도로 대지를 스치며 다시금 하늘로 날아올랐다. 직각하강으로 얻은 속도는 거의 유지하고 있었다. 날개를 펄럭일 이유는 없었다. 안겨들고 부딪쳐오는 바람 사이로 빠져나가기 위해 살짝 비틀 뿐이었다. 그렇게 최고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어도, 무리카리와 그의 사이는 너무 멀었다.

으뜨득. 파공성에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폐를 쥐어짜 내뱉는 자신의 고함조차 들리지 않지만 라이드의 눈에 생생히 들어오는 그 광경에 라이드는 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했다. 검은 천조각 같은 것이 다뭄에게서 떨어져나왔다. 무자비하게 뜯겨진 날개는 낙엽처럼 팔랑거리며 저편으로 떨어져 나갔다. 날개보다 더 무거운 다뭄의 본체는 바람을 타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말라붙은 풀들이 짓뭉개지고 뿌연 먼지구름이 다뭄의 주위로 피어올랐다. 라이드는 피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다시금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용의 감각으로 가득찬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솟구쳐 들어왔다.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었다.

다뭄의 날개를 물어뜯어낸 적룡의 용기사가 무서운 속도로 쇄도하는 스피리어트를 발견한 듯 수신호를 보냈다. 세 마리의 용이 세 방향으로 갈라졌다. 날개를 잃은 용기사의 숨통을 끊느니 라이드의 돌격을 피하는 게 낫겠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날개를 잃은 용은 죽은 용이었으니까. 스피리어트는 다뭄의 위를 스치며 몸을 비틀었다. 이미 속도를 얻은 스피리어트와 라이드를 뿌리치는 것을 불가능했다. 셋 으로 나뉠 때 오른쪽으로 갔던 적룡을 쫓으며 스피리어트 역시 오른쪽으로 호선을 그렸다.

거의 속도를 잃은 체 정지했던 세 용기사들은 다시 속도를 얻으며 라이드와 스피리어트를 포위하고 싶을 것이었다. 무리카리와 다뭄이 당했던 것처럼 양 옆에서 달라붙어 움직임을 막고 위에서부터 찍어누르고 싶을 것이었다. 그들이 일정 비행 속도에 도달하기 전에 잡아야 했다. 그리고 스피리어트는 그럴 수 있을 만큼 빨랐다.

스피리어트의 위에 바짝 엎드린 듯한 자세로 라이드는 양 손 모두 고삐를 놓았다. 격렬한 전투 비행 중에는 위험한 행동이었으나 고삐 없이도 스피리어트는 그의 모든 의지를 따르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안장 옆의 랜스를 꺼내들고, 왼손은 안장 뒤를 더듬어 짧은 창을 꺼내들었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날고 있는지 무기를 꺼내 들고 벌린 양 팔을 바윗덩이 같은 바람이 내리눌렀다.

스피리어트는 단숨에 상대에게 따라붙었다. 적룡은 오른쪽으로 호선을 그리며 날다 갑작스레 왼편으로 회피기동을 시도했다. 적룡에 비해 라이드는 무리다 싶을 정도로 속도를 올리고 있었기에 그런 각도로 쫓아갈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스피리어트에게 다른 명령을 전달했다.

스피리어트는 더더욱 오른쪽으로 돌았다. 펼쳐진 날개 밑으로 무리다 싶을 정도의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용의 강인한 날개는 그 격랑을 타넘고 끝끝내 라이드 자신이 놀랄 정도로 작디 작은 원을 그리는 선회기동을 성공시켰다. 왼쪽으로 피했던 용기사는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스피리어트의 속도가 실린 투창이 적룡의 날갯죽지를 스쳤다. 두 번째 투창은 던질 필요도 없었다. 라이드는 적룡의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며 투창을 놓아버렸다. 투창은 갑옷이 없는 용기사의 등판을 꿰뚫었다.

용의 넓은 시야가 두 개의 적을 포착했다. 하나는 라이드와 같은 고도에서 측면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고 하나는 라이드보다 높은 고도에서 . 적룡을 쫓는 사이 속도를 올린 듯 쇄도해오는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같은 고도에서 돌진해오는 것은 은룡이었다. 상대의 속도가 더 붙기 전에 라이드는 결판을 내고 싶었다. 심장은 계속된 고속비행으로 부족해진 산소를 달라며 헐떡거렸다.

왼손의 투창을 자신보다 높은 고도의 용에게 던져낸 라이드는 곧바로 선회기동에 들어갔다. 완만한 반원을 그리며 선회하자 상대 은룡은 지척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찰나에 라이드는 오른팔을 내뻗었다. 랜스 격돌은 찰나의 싸움이었다. 누가 정확한 순간에 정확히 랜스를 갖다 대는가. 가공할 속도로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용기사들에게 내뻗는 힘은 무의미했다. 두 개의 랜스가 교차했다. 라이드의 것은 은빛 비늘을 가르고 용의 옆구리를 꿰뚫었고 상대의 것은 스피리어트의 비늘만을 긁어내며 튕겨나갔다.

랜스가 박히는 순간 미처 손을 놓지 못한 라이드가 뒤로 튕겨났다. 하늘이 눈에 들어오고, 스피리어트의 감각과 그의 눈이 받아들이는 시야의 괴리가 또다시 두통을 일으켰다. 부서질 것 같은 허리로 몸을 다시 일으켰다. 적은 보이지 않았다. 라이드는 뒤를 곁눈질했다. 과연, 또 하나의 적이 뒤에 있었다.

은룡과의 격돌 순간에 스피리어트의 속도를 늦추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라이드가 원하는 타이밍을 잡아내었지만 대신 뒤를 허용한 것이다. 상대를 떨치기 위해 라이드는 한 차례 회피기동을 시도했지만 상대는 문제없이 그를 따라잡았다.

상대도 청룡이었다. 이미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 그의 추격을 단순한 속도만으로 떨치기는 어려워 보였다. 스피리어트의 뒷다리에 무언가가 날아와 박혔다. 겨우 비늘을 뚫고 겉가죽에 박히는 수준이었지만 그 순간의 고통은 인간인 라이드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뒤의 상대는 망설임 없이 두 번째 투창을 내던졌다. 투창은 라이드의 종아리를 긁었다. 바지가 찢겨지고 피가 튀었다. 라이드는 오른팔로 칼을 꺼내려 했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깨가 탈구된 모양이었다. 라이드는 왼손으로 칼을 뽑아들었다. 라이드와 스피리어트가 속도를 올리면 상대도 속도를 올렸고 선회하면 따라붙었다. 피할 수 없었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쳐야 했다.

라이드는 날개를 힘껏 펼쳐내었다. 한꺼번에 안겨드는 벅찬 바람의 힘에 스피리어트는 벽에 부딪치기라도 한 듯 우뚝 멈추어서며 몸을 뒤로 비틀었다. 세상이 뒤집히고, 라이드는 칼을 휘둘렀다. 언제나 그렇듯 많은 힘은 필요하지 않았다. 추격해오는 상대의 속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용의 비늘을 가르고 들어갈 수 있도록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용기사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미처 던져내지 못한 투창이 용기사의 손에서 떨어졌다.

피분수가 바람을 적셨다. 푸른 용은 천천히 날개짓하며 바람 속을 유영했다. 창공에 있던 상대 용기사들이 물러서기 시작하자 대지에서의 전투도 멈췄다. 메마른 들판을 적시던 피분수는 그제서야 멈추었다.




7.

스피리어트는 부드럽게 땅에 내려섰고, 라이드는 안장에서 튕겨나오기라도 하듯 뛰어내렸다. 착륙도 하기 전부터 안장에 묶인 허리의 벨트를 끌러내고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카리!”

라이드가 달려갔을 때 이미 다른 용기사들도 무리카리의 주변으로 모이고 있는 터였다. 리곤과 의무반이 무리카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상태는 처참했다.

추락의 상황을 잘 설명해주기라도 하듯 풀이 짓뭉개진 흔적이 길게 나 있고 용의 피가 사방으로 튀어 있었다. 다뭄의 검은 거체는 그 모든 흔적들의 가운데에 누워 있었다. 그 몸은 온통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용의 발톱이 훑어낸 자국, 칼로 베인 상처, 여기저기 박힌 투창, 오른쪽 뒷다리를 완전히 관통하고 있는 랜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처참한 것은 오른쪽 날개의 부재였다.

다뭄의 바로 곁에서는 리곤이 무리카리를 부축하고 있었다. 무리카리도 상처투성이었다. 의무대원들이 그의 곁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무리카리의 몸은 붕대가 감기지 않은 부분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감은 붕대도 어릿한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라이드, 잘 했다. 너 혼자서 셋을 물리쳤어.”
“… 무리카리는 어떻게 된 거죠?”
“지난 번 전투에서 네가 한명, 무리카리가 한명, 이렇게 둘이나 되는 용기사를 쓰러트렸지. 저들에겐 엄청난 손실이었다. 반면 우리편은 너와 무리카리가 부상을 입었지만 전장에 복귀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 12대 9가 되버린 하늘의 싸움은 우리가 얼마든지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저들은 모험을 하는 수 밖에 없었고, 각개격파를 시도한 거다. 속도가 느린 편인 무리카리와 다뭄은 좋은 목표였지…. 하지만 네가 셋을 쓰러트렸으니 이젠 11대 6이다. 하늘은 완전히 우리가 장악했어.”
“대장. 제가 물은 것은 그게 아닙니다.”

라이드는 세차게 도리질쳤다.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그런 대답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니었다. 무리카리의 상세가 어떤가를 물은 것이었다. 전략적인 원인도 전술적인 결과도 알고 싶지 않았다.

“라이드. 가만히 있어라.”
“잠깐… 무리카리는 뭘 하려는 겁니까?”
“… 다뭄을 보내주려는 거지.”

라이드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다뭄은 죽지 않아요! 저 정도 상처로는, 아직 죽지 않아요. 치료하면 낫는다고요!”
“그러나 다시는 날 수 없어.”
“표식으로, 표식으로 이어붙이면 되잖아요? 내가 가서 날개를 주워오겠어요.”
“모든 용은 이미 길들임의 표식을 갖고 있지. 하나의 생명체에는 하나의 표식만이 허락된다. 아무리 생명력이 강한 용이라도 한 개 이상의 표식은 감당하지 못해.”

무리카리가 일어났다. 비틀거리면서도 리곤의 부축을 거절한 그는 옆의 용기사가 건네주는 랜스를 받아들었다. 라이드는 새삼스럽게 쏟아지고 있는 햇빛을 느꼈다. 햇빛은 창끝에서 부서지고 용의 검은 비늘에서 부딪쳐 반짝였다.

“그만둬요! 무리카리!”

라이드가 몸부림쳤지만 레오폴트의 억센 손은 라이드의 어깨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은 비행 중이 아니었는데, 분명히 라이드의 목소리가 가 닿았을 텐데, 무리카리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힘겹게 랜스를 치켜올리며 다뭄의 앞에 섰다. 검은 용은 기운 없이 목을 쳐들었다. 다뭄의 노란 눈동자가 무리카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안, 다뭄.”

무리카리는 창을 놓쳤다. 그는 애써 그것을 다시 주워올렸다. 부상투성이의 몸으로는 랜스를 똑바로 쥐는 것조차 몹시 어려웠다. 라이드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나왔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도 돼.”
“아냐, 리곤. 이건 내가 해야 해.”

무리카리는 제멋대로 창을 놓치려는 손에 마지막 힘을 몰아넣었다. 손이, 팔이, 그리고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뭄은 그 모든 과정을 조용히 기다렸다. 무리카리는 아직 각성제의 기운이 남아 있을 때 일을 끝마치려 애썼다. 각성제의 기운이 가시면, 너무 슬퍼 일을 끝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가 끝내지 않으면 다른 자의 손에 맡겨야 하는데, 그것만은 다뭄도 원치 않을 거라 생각했다.

“라이드, 잘 봐둬라.”

억센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방법은 없었다. 옴쭉달싹 못하게 라이드를 붙잡아 놓은 체, 레오폴트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것이 용기사의 방식이다.”

무리카리의 단련된 근육이 부풀어올랐다. 흰 붕대의 여기저기가 삽시간에 짙은 붉은 색으로 물들어갔지만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창을 끌어당겼다. 기합은 없었다. 무리카리는 신음소리조차 없이 창을 꽂아넣었다. 단숨에, 고통 없이. 그것이 목적이었던 창은 여지없이 검은 비늘을 꿰뚫고 들어갔다. 목 바로 밑, 랜스를 찔러넣어 닿을 수 있는 용의 심장.

다뭄의 거체가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맥없이 허물어졌다. 무리카리의 몸이 함께 허물어졌다. 라이드는 무릎꿇었다. 스피리어트의 머리가 그를 부드럽게 밀쳤지만 라이드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8.

대륙력 522년 다섯 번째 달 2간 7일 날씨 비가 많이 옴
나는 스피리어트를 자유롭게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말을 처음 리곤에게 했을 때, 리곤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에게 열쇠를 달라고 했고, 리곤은 안된다고 했다. 대체 왜?! 작년 그가 막 용기사 보조가 되었을 때, 쩔쩔매던 그를 내가 그토록이나 도와주었는데도 그는 안된다고 했다. 그는 나를 설득하려 했다. 웃기는 일이다. 내가 스피리어트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면 그런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열쇠를 줄 수 없다면 뺏으면 그만이다. 리곤이 도서관에 갈 때를 노려야지.


대륙력 522년 다섯 번째 달 2간 8일 날씨 맑음

세상에, 리곤 녀석! 내가 어제 그 말을 꺼낸 이후로 나를 몹시 피하더니, 주변에도 말을 떠벌린 모양이었다. 대장님이 날 찾아왔었다! 대장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용을 놓아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농담이었다고 얼버무렸지만 대장님은 몇번이나 내개 당부했다.


대륙력 522년 다섯 번째 달 2간 11일 날씨 맑음

사흘 후 전투에 출전하기로 날짜가 잡혔다. 그렇다면 내일 모레 떠나면 된다. 전투를 하루 앞두고 추격해 올 수 는 없을 것이다. 전우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더 이상 스피리어트를 죽음의 위험에 빠트릴 수 없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인간의 전쟁에 용을 끌어들여 쓰는 건 잘못되었다. 용은 자유롭게, 용답게 살아야 한다. 표식술 같은 것으로 억눌러 놓을 것이 아니었다. 나는 스피리어트를 창공으로 날려보낼 것이다. 원래 녀석이 살던 그곳으로.

일기장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라이드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떨어져 종이를 적시고 잉크를 번지게 만들었지만 라이드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소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깊은 어둠 너머로 바람탑이 서 있었다.

무리카리가 다뭄을 죽였을 때부터 라이드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곳은 감옥이었다. 사슬로 얽어매인 운명을 끊어내고 싶었다. 라이드는 울면서 일기장을 덮었다. 스코트 웨더의 일기는 정신적으로 쇠약해진 라이드를 다잡아 일으켰다. 라이드는 자신이 가야할 길을 생각했다.

“스코트는 죽었어.”

소리내어 중얼거리자 그 사실은 무섭도록 빠르게 심장을 옥죄어왔다. 스코트 웨더는 죽었다. 왜? 스피리어트는 두 번째 길들임의 표식을 박은 체로 돌아와 있다. 어떻게? 두 번째 길들임의 표식을 박았다는 것은 첫 번째 길들임의 표식을 누군가 떼어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하겠어.”

스코트는 죽었다. 이 일을 시도하다가. 왜? 어떻게? 자신도 그렇게 죽을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 수 없는 일은 두려움을 일으켰다. 그러나 시도해야 했다. 스피리어트를 언제까지 쇠사슬로 얽어맬 수는 없었다. 스피리어트를 전장으로 내몰 수 없었다.

라이드는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9.

“라이드. 내 말을 들어. 그 칼 놓고 물러서.”
“열쇠를 줘요.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찌르겠어.”

리곤이 고개를 젓자 라이드는 칼을 쓱 내밀었다. 용의 비늘도 베는 칼날이었다. 사람의 피부는 쉽사리 갈라졌다. 목에서 피가 흐르자 리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라이드는 그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자신을 아껴주었던 사람. 자신을 챙겨주었던 사람.

“라이드…”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열쇠를 줘요.”

리곤의 떨리는 손이 품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철로 만든 열쇠 하나가 손에 들려 있었다. 라이드는 왼손으로 그 열쇠를 잡아챘다.

“라이드, 그만둬. 이건 잘못된 일이야.”
“한 마디만 더하면 정말로 찌르겠어요.”

라이드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런 긴장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간 정신이 이상해져 버릴 것 같았다. 싸늘한 칼날은 이미 피의 맛을 보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찔러버리면? 아니, 깊게 찌를 것도 없었다. 가볍게 옆으로 긋는 것 만으로도 리곤의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 라이드는 목숨의 가벼움에 아찔함을 느꼈다. 현기증에 칼을 놓칠 것 같았다.

“미안해요, 리곤. 하지만 이럴 수 밖에 없어요. 스코트의 일기를 봤어요. 스코트는 스핏을 놓아주고 싶어했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언젠가 스피리어트는 싸우다 죽겠죠. 내가 죽인 모든 용기사들과 내가 죽인 모든 용들처럼, 스피리어트와 나도 죽겠죠. 아니면 무리카리처럼 내가 스피리어트를 찔러 죽여야 할 거에요.”

리곤이 입을 열려고 했지만 칼끝이 목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오자 리곤은 숨도 쉬지 못했다.

“차라리 당신을 죽일 수는 있어요. 하지만 스피리어트를 죽일 수는 없어요.”

그렇게 말한 라이드는,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리곤에게 한 알의 약을 건내었다. 용기사들이 먹는 각성제에는 심각하지는 않지만 몇가지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각성제를 먹은 바로 다음날 찾아오는 불면증이었다. 라이드가 리곤에게 준 약은, 그래서 모든 용기사들이 조금씩 지니고 있는 수면제였다.

“먹어요.”

칼끝이 목에 닿아 있을 때, 리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라이드는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을 가져왔다. 리곤은 아무 말도 없이 수면제를 삼켰다. 오분이 지나지 않아 리곤은 쓰러졌다. 그가 잠든 척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라이드는 리곤의 방을 나섰다.

바람탑까지의 20분 거리를 라이드는 한번도 쉬지 않고 내리 달렸다. 어제 탈구되었던 어깨는 제자리로 끼워넣었지만 한번 탈구된 어깨는 또 탈구될 위험이 있다는 경고를 받았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던가. 그러나 라이드는 달렸다.

“스핏!”

용이 눈을 번쩍 떴다. 어둠속에서 샛노란 두 개의 눈동자가 번쩍거렸다. 용이 옅은 숨을 내쉬우며 반가움을 표했다. 라이드는 스피리어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스피리어트의 반대편, 다뭄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또다시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가자, 스피리어트.”

스피리어트가 날개를 펼칠 때, 하늘의 저편이 장밋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새벽의 색은 아름다웠다. 짙은 남청색과 옅은 남청색의 하늘, 그리고 부드러운 장밋빛의 하늘이 켜켜이 쌓인 여명을 향해 라이드는 날아갔다.



10.

그들은 부드러운 초원 위에 내려앉았다. 얼마나 날아왔을까? 햇빛이 따가웠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따가웠다. 라이드는 눈물을 훔쳐내었다. 비행은 그렇게도 아름다웠고 그렇게도 즐거웠건만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라이드는 스피리어트의 목덜미를 쓰다듬고는 내려왔다.

푸른 용은 자신의 주인을 가만히 기다렸다. 라이드는 안장을 풀어내었고 고삐를 풀러내었다. 랜스 걸이까지 떼어내자 스피리어트는 완벽하게 자유의 몸으로 돌아갔다. 딱 한 가지만을 빼고는. 라이드는 스피리어트의 위로 기어올라가 은으로 된 표식을 움켜쥐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몇 번이나 손으로 그것을 잡아당겼지만 그것을 손으로 잡아뺀다는 것은 무리였다. 라이드는 칼을 들어 표식과 비늘의 틈에 칼날을 밀어넣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칼날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미안, 스핏. 좀 아플거야.”

칼날이 비늘을 후벼내고 들어가자 격렬한 고통이 라이드를 엄습했다. 한 번도, 각성제를 먹고 전투에 나설 때조차도 느껴보지 못했던 고통의 교감, 그것이 라이드를 뒤흔들었다. 너무 아파, 아파, 아파, 아파. 머릿속을 메아리치는 외침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으며 동시에 엄청나게 힘이 드는 작업이었다. 아무리 예리한 날이라 하더라도 라이드의 완력만으로 용의 겉가죽만을 얇게 도려낸다는 것은 어려웠다. 그 작업은 아주 지리한 시간이 흘렀으며 라이드는 심장이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는 끝가지 칼을 놓지 않았으며 마침내 표식을 도려내었다. 그 모든 작업의 과정 동안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엄청난 빛을 내뿜던 표식이 갑작스레 발광을 멈추었다. 라이드는 한 손으로 그 표식을 쥐고 굴러떨어졌다.

부드러운 풀이 가득 자라는 초원이었지만 역시 아팠다. 하지만 떨어진 아픔보다 더 심한 아픔이 그의 전신을 유린하고 있었다. 용이 눈을 한번 깜박였다. 그러더니 날개를 한번 펄럭였다. 길고 유연한 목을 뻗어 한차례 주위를 훑어보았다.

“날아, 스핏.”

눈물을 흘리며 라이드는 속삭였다. 용이 갑자기 날개를 펼쳤고, 그대로 땅을 박차고 하늘로 솟구쳤다. 라이드는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용은 자유로웠다. 용은 아름다웠다. 용의 비행은 진정으로 자유로웠다. 안장도, 용기사도 없기에 용은 용기사의 안정적인 자세를 위해 목을 약간 숙일 필요도 없었다.

용은 새파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어떤 대단한 용기사가 교감하고 있을 때보다도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그 강한 날개를 마음껏 펼치고 바람을 타넘었다. 용은 무한한 자유를 향해 날아갔다. 푸르디 푸른 창공, 끝없이 쏟아지는 햇빛과 바람의 노래가 용의 비행을 찬양했다.

라이드는 눈물흘렸다. 간신히 칼에 기대어 일어난 그는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용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용은 자유를 향해 날았고 과거의 굴레를 돌아보지 않았다. 은으로 만든 표식은 그의 발치에 떨어져 다른 용구들과 함께 뒹굴었다. 끝없는 창공으로 날아가는 용에게 라이드는 작별의 인사를 했다. 자유, 날개, 스피리어트. 라이드는 울었고 또 웃었다. 눈물이 끊임없이 솟는데도 미칠 듯이 유쾌한 기분이었다.

한때 스피리어트라고 불렸던 푸른 용은 미려한 곡선을 그리며 선회했다. 바람을 뚫지도, 바람을 타지도 않고 바람 그 자체가 되어 창공을 유영하는 용의 사냥 비행은 산들바람처럼 부드럽다가도 벼락처럼 날카로웠다.

스피리어트의 선회는 라이드를 놀라게 했다. 용은 되돌아오고 있었다. 아니, 되돌아오지 않았다. 스피리어트는 거기에 없었고, 한 마리 푸른 용만이 있었다. 푸른 용이 포효했다. 길들여진 용은 포효하지 않았고, 야생의 용만이 포효했다. 용의 포효가 창공을 뒤흔들었다. 소년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용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11.

‘너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없었던 것은 네가 너무 순수했기 때문이었어. 그래, 라이드. 너는 너무 순수했다. 너무 순수했기에 그만큼의 교감을 이끌어 낸 것이겠지. 네가 진실을 알았다면 그 교감은 끝장났겠지. 우리는 너같이 뛰어난 용기사를 잃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진실을 숨겼어. 아아, 라이드. 너는 왜 그렇게 순수했을까? 한 번의 의심도 하지 않았지. 마치 스코트가 그랬던 것처럼.

용과 용기사는 교감하지 않아. 용은 길들임의 표식에 의해 강제당하고, 용기사는 단지 표식과 교감해. 어떤 용도 길들여질 수 없어. 용을 길들일 수 있는 것은 생명력을 이용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 내는 우리 표식술사들의 표식 뿐이지. 너는 표식과의 교감이 너무 뛰어났고, 너의 의지는, 심지어 무의식중에 생각한 것 마저도 모두 용에게 전해졌어. 마치 용이 너를 정말로 친근해 하는 것처럼 다가오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너의 의지일 뿐이고, 네가 용을 쓰다듬을 때 용이 기분 좋다는 듯 눈을 감는 것조차 사실은 네가 용에게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진실을 너에게 말할 수 없었어.

우리는 너무 욕심을 부렸던 거야. 이미 한번 스코트를 잃었으면서, 똑같은 방식으로 너를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스피리어트에 무슨 저주라도 씌인 걸까? 우리는 이제 그 용을 다시 쫓지 않을 거야. 서식처를 아는 용을 생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지만, 그래, 상부도 두 명이나 되는 용기사를 잡아먹은 용을 다시 포획할 생각은 없는 듯 해.

너는 스피리어트에게 자유를 주었어. 축하해, 라이드. 너의 목숨은 사라졌지만, 그게 네가 생각한 스피리어트였을지, 그것은 의문이지만, 그래도 용은 자유를 얻었으니까.’

리곤은 오래도록 라이드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이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핏자국과 용구들과 저 만치 떨어져 있던 소년의 팔 하나 뿐이었다. 어쨌든 하나도 남김 없이 용에게 삼켜진 스코트보다는 나았다. 유체가 있었으니 무덤을 만들 수 있었다.

‘너도 자유를 얻은 걸까, 라이드?’

리곤은 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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