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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채널(The Channel)

2006.12.29 23:3012.29

블루베리님의 “하얀 나그네”는 한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적인 의문사와 신화적인 거인의 조각을 대응시켜, 죽음을 초월한 한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짚어 보려고 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서술하는 데 어느 한 관점을 선택하고 하나는 버렸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듭니다. 신화를 처음에 드러내 놓고 시작했다면, 신화의 의미를 파고들 수 있도록 나그네 쪽에 좀 더 초점을 주었어야 했습니다. 의문사의 원인으로 나그네를 의심하는 여자애의 시점으로 가려고 했다면, 이 모든 일의 실제 배후이자 원인이자 현상인 그 신화를 앞에서 밝히지 말고, 여자애가 아는 만큼 독자도 알게 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철학적인 깊이를 가진 것도, 거대한 사건을 직면한 아이의 성장담도 아닌 어정쩡한 작품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뇰님의 “카르마폴리스”는 전쟁으로 큰 참화가 일어나고 난 후 먼 미래에 다르마와 카르마 개념을 바탕으로 새롭게 세워진 통제 사회를 다스리는 자와, 그자가 사회를 무너뜨릴 불꽃의 씨앗이 될 사람과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이러한 통제 사회가 낯익다는 점을 뒤로 미뤄두고라도, 이 이야기는 보여 주어야 할 부분을 보여 주지 못함으로써 동의나 감정 이입을 끌어내는 데에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점은 마스터의 시점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의 갈등을 끌어내는 축, 그러므로 이야기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감옥에 갇힌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세계와 마스터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다른지, 왜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지가 와닿지 않고서는 이야기는 공허하게 울릴 뿐입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대변하는 상황이 무엇인지, 그것을 말해 줄 수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정하고 거기에 정당한 비중을 둔 후에, 그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이전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자신부터 확실히 알아야겠지요.

“크로노스의 미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과 길 속의 미로에 갇힌 한 사람과 그 출구를 안내하려는 사람의 우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시간, 길, 미로와 같은 이미지는 오랜 옛날부터 인류가 즐겨 사용하던 상징이자 사유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새로운 함의를 이끌어내거나 적어도 새로운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도록 외피를 바꾸기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쓴 길이라고 작가는 후기에 덧붙였지만, 교훈을 주는 글, 적어도 삶의 어떤 면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빚으려 하는 글은 힘을 뺀 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몹시 힘을 주어 강조하고 그 이유를 설득해 보는 건 어떨는지요.


박문희님의 “쿠”는 역시 먼 미래 지구를 지배한 다른 종족의 손에 실험대상으로 태어나고 길러진 인간 쿠의 이야기입니다.
흥미로운 소재이며 많은 이야기로 뻗어나갈 수 있는 씨앗을 간직한 부분에서 끝난 점이 아쉽습니다. 사육되는 인간을 다루는 다른 미래물과 구별될 수 있는 지점을 다 보여 주지 못한 느낌이기도 합니다. 발상을 더 발전시켜서 소재를 이렇게 저렇게 변화시켜 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JINSUG님의 “죽거나 혹은 진실해지거나”는 사람이 살면서 아무 생각 없이 관용적으로 내뱉게 되는 진실이 아닌 말들을 경쾌하게 꼬집은 꽁트입니다.
세 가지 소원류와 마찬가지로 뚜렷한 이유 없이 시작해서 허무하게 끝나긴 하지만, 경쾌하면서도 거짓말과 진실과 관용적인 말과 겉치레에 대해서 잠깐 꼬집어 주는 글이었습니다.


현서님의 “은빛꽃”은 은으로 변해 버린 꽃을 피우기로 약속한 왕의 고민을, 여러 사람이 실패하다가 그 꽃의 본질에 가장 어울리는 일을 해 준 소박한 꽃집 청년이 해결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한 가지 문제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이야기 방식, 소재 등이 기존 동화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다만 마무리를, 교훈이나 주제 의식을 꼬집으려는 의문이 아니라 끝까지 동화적으로 처리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현서님의 “까마귀 기르기”는 죽음을 사람들 가슴 속에 자라는 까마귀로 형상화하여 신화적인 이미지로 엮은 단편입니다.
후기에서 밝힌 영화를 추천단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영화가 이 글에 얼마나 짙은 영향을 드리웠는지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강렬한 인상을 받고 나서 쓴 글은 오히려 그 인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강렬한 화두와 계기는 작가 속에서 다른 것으로 체현되지 않으면 굳이 다른 인간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습니다.


현서님의 “카프카에게 바치는 짧은 우화-낙엽”은 잎새가 태어나서 낙엽이 되기까지를 짧게 잡아낸 작품입니다.


JINSUG님의 “마피아 게임”은 극한까지 몰린 세 사람의 이야기로, 게임 룰이 실제로 일어난 상황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룰에 따라 극한까지 몰린 상황에서 세 사람의 대처는 상세하게 따라가고 있으나, 이러한 게임이 벌어진 상황이나 주변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아, 이것 자체가 사이코드라마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극한 상황을 그린다는 것 외에 작가의 의도를 읽기 힘든 것은, 상황을 전체에서 바라보지 않고 한 당사자의 입장으로만 철저히 바라보았기 때문일 듯합니다.
극한을 다룰 때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극한까지 가는 과정에 독자를 동참시키는 것입니다. 독자는 주인공 또는 인물과 함께 걸어가고 숨이 가빠지며 극한에 자신을 몰입시킵니다. 또 하나는 극한을 객체로 두고 모든 상황을 관조하듯이 조망하는 것입니다. 일반인이란 극한을 체험하기 힘든 상황일 경우가 많으므로, 이러한 관점 또한 독자에게 공조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두 가지 외에도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떤 방법이든 의도는 마찬가지입니다. 극한, 극점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해 또는 강렬한 인상이라도 획득하지 못한 극한은 독자에게 무의미하게 잊혀집니다.
재미있는 소재, 빛나는 한 순간을 포착했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가장 신선하고 돋보이게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심하는 게 작가의 당연한 자세일 것입니다.


화룡님의 “선택”은 징병되어서 끌려갔다가, 패배가 뻔한 싸움에 앞서 두 가지 다른 선택을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처음에 상황 A와 B로 나뉘어서, 마치 한때 인기코너였던 인생극장과 같이 두 상황이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그리고 아무런 설명 없이 두 이야기는 마무리에서 합쳐집니다. 상황 A와 B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A에서 도주를 택한 주인공은 B에서 도주를 택하지 않은 자신에 대산 보상금을 받습니다. 이것은 한 상황은 거짓이고, 두 가지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은 시간차가 있는 한 가지 상황이었다는 트릭으로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 어떤 문학적 장치나 환상적인 리얼리티로 인해 두 가지 상황과 이야기가 한 가지로 합쳐진 거라면, 처음과 끝을 잡아매 주는, 일관성을 부여해 주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어떤 선택이 용기 있는 선택이었는지를 묻는 것이 이 글의 주제라면, 구조를 좀 더 치밀하게 짜고, 두 상황의 대비를 좀 더 치열하게 했어야 했다고 봅니다. 일단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기까지 도입부가 지나치게 깁니다. 선택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었는가, 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가만 인지시키고 되도록 짧게 가는 것이 글의 몰입도를 위해 나을 듯합니다. 또한 두 대비되는 상황이 별 연계나 특별한 계기 없이 장면전환되는 것도 글의 긴장도를 떨어뜨립니다. 혼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면, 아니, 그전에 두 가지 선택을 다 보여 주려고 하는 상황에서는 두 가지 선택이 모두 장단이 있으며, 어느 쪽을 택하면 어느 쪽은 가질 수 없는 필연적인 비극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에게든 선택은 너무나 쉬운 일이니까요. 좋은 것과 나쁜 것 중 좋은 것을 택하긴 어렵지 않지만, 좋은 것 둘 중 하나를 고르기, 나쁜 것 둘 중 하나를 고르기,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일장일단이 있는 두 가지 중 하나를 고르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두 가지 선택이 단선적으로만 대비가 된다면, 다중적인 대비가 되는 지점을 돋보이게 해 주지 않는다면 선택과 대비의 전개는 의미가 없습니다.


화룡님의 “무기를 부수는 자”는 원한에 차서 괴물이 되어 버린 사람과 그에 맞서 도시를 지켜내려고 하는 권력자, 그리고 양쪽을 매개하는 화자인 방랑자 콤비의 이야기입니다.
앞서 “선택”에서도 지적한 문제점이지만, 도입부까지 상당히 길고, 본 이야기와 아주 큰 상관관계가 없어 지루함에 대한 보상이 없습니다. 분명히 전개는 유려하고,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초석을 깔기 위한 작업이라는 것이 보임에도, 기대보다는 느슨하고 느립니다. 시선을 잡아끌 수 있는 다른 장치를 마련하든지, 본 이야기와 연관관계를 가져서 끝까지 읽었을 때에도 의미가 있도록 치밀한 계산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이야기를 읽는 내내 사소하게 걸리적거리는데, 괴물을 만나 이야기를 듣기까지는 상세하나 정작 중요한 그들의 사연은 화자의 감정을 이유로 회피한다거나, S시의 화려함과 아름다움과 그렇게 만들기까지 흘린 피와 땀과 그래서 포기하지 못하는 시장의 집착은 보여주되 그가 가진 자신감이나 도박에 대한 불신까지는 납득시키지 못할 만큼 미묘한 선에서 대화와 설명이 머문다거나, 정작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아주 사소한 한마디에서 결말이 얼렁뚱땅 맺어져 버린다는 점 등이 대표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이라이트, 강조를 주어야 할 부분과 하이라이트를 위해 지나가거나 축소해야 할 부분에 대한 훈련, 또는 중심축이 되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세워야 하는 지지대들을 충분히 헤아려서 탄탄하게 세우는 작업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이 작품의 경우 방랑자나 바드 등 당사자가 아닌 화자를 내세워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는 것에 대해서도 더 신경을 써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화자가 어떻게 해서 양쪽 입장을 다 이해하고 전달하고, 달리 말하면 이야기의 전모를 어떻게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가가 1인칭 관찰자 시점의 관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전달하려고만 한다면 굳이 1인칭의 화자가, 그것도 전통적으로 편견에 얽매이지 않으며 급박한 상황의 조커로 활약하는 방랑자를 쓸 필요는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작가 자신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를 덧입혀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그 화자의 특징이나 화자를 통해 더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했다면 더 맛깔나는 글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무기를 삼키는 괴물의 선명한 이미지나, 막판 전투씬에서 보여 준 집중력이나 처절함은 상당히 좋았습니다. 약간 뜬금없고 싱거운 마무리를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잘 끌고 나갔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건필을 기원하며, 이달의 우수단편으로 선정합니다.


roland님의 “낙원”은 계급으로 철저히 나뉜 도시에서 지하로 탈출한 하급 시민이 낙원을 꿈꾸다 좌절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roland님의 글을 이제까지 몇 편 지켜보았지만, 기본적인 갈등 구도가 언제나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인공이 있고, 주인공이 행동하게 만드는 원인 또는 원흉이 되는 여자가 있으며, 주인공보다 월등하거나 심지어 주인공을 손에 쥐고 있고 무엇보다도 여자의 주인이기도 한 안타고니스트가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단순화시켜 놓고 본다면 세상에 이렇게 조합할 수 없는 관계가 더 적을 정도이기 때문에 문제는 이 세 축 사이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가, 갈등은 무엇인가, 이 갈등이 어떻게 전개되어 끝에 이르는가가 중요할 것이고, 이런 점이 다르다면 같은 관계 양상으로도 얼마든지 다른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또한 이런 점이 얼마나 설득력 있고 구체적인가가 소설의 재미를 좌우하는 큰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낙원”은 그런 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지상과 지하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상식에 비추어 볼 때 급수가 나눠져 각각의 처우가 매우 상이한 지상과 지상에서 도주하거나 피난 온 사람들이 사는 지하라고 알 수 있을 뿐, 전체적으로 배경이 희끄무레한 느낌입니다. 지상에서 겪은 고생의 기억은 주인공과 상대 여인에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는 사실이므로 좀 더 구체적으로 강조해 주었어도 좋았을 것입니다. 주인공에게는 그런 기억마저도 딛고 도망가려고 하는 장벽으로서, 상대 여인에게는 죽어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족쇄로 작용하니까요. 반전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여자의 배신과 주인의 응징, 주인공의 분노로 이어지는 마무리에 힘이 없는 것은 그 상황에서 각자의 입장에 이입하거나 동의하거나 반대할 만한 기준도 근거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통보와 그에 따른 분노, 그리고 파멸로 이어지는 마무리는 그래서 별 인상을 남기지 못합니다. “언제나 함께이기를”보다 못한 점, 아쉬운 점이 그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roland님의 글은 언제나 이야기를 풍성하게 꾸미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보입니다. 건필하세요.


refrain님의 “버스”는 버스를 매개로 해서 만나고, 소중한 시간을 가꾼 연인이 감췄던 현실 앞에서 갈라지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사랑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기억으로 남으며, 특히 오래도록 남는 찬란한 순간들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버스와 빛의 다리라는 부분은 그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사랑과 글은 다릅니다. 어떤 경험이 있더라도 글은 그것을 정제하여 밀도 높게 타인에게 전달하는 표현 형태입니다. 그중에서도 사랑 이야기는 특히 어렵습니다. 사랑 이야기가 누구에게나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어디에나 사랑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이미 웬만한 이야기를 해선 진부하고 의미를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일이 일어나고 인물 사이의 관계가 변해 가는 모습을 잡아서 설득력 있게 독자에게 보여 주기도 몹시 힘듭니다. “버스”의 경우 사랑에 빠진 것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헤어진 것 또한 갑작스럽고 독자에게 이입할 여지나 준비할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의 독백이 아니라 소설이 되기 위해서 군더더기를 줄이고 공을 들여야 할 부분을 확실히 구분해 주셨으면 합니다. 감정에 관련된 이야기라고 해도,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분위기가 아니라 사건과 인물의 반응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개성입니다. 아주 작은 부분이 특별해서 가치 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Inkholic 님의 “Channel"은 무의식을 자극하는 범인의 기법에 희생자가 된 형사의 이야기입니다.
재미있고 착실하게 전개된 이야기이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일단 이런 종류 살인 기법이 이제는 상당히 보편화된 소재이기 때문에, 범인이나 수법을 짐작하기가 쉽다는 점입니다. 특히 활자만이 아니라 영상 매체를 통해 이러한 수법은 진부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소재와 범죄 수법이 아닌, 형사가 그 덫에 걸렸다는 점, 덫에 걸린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가 하는 결정적인 단서는 프롤로그를 통해 너무 친절히 짐작 가능하게 해 두어서 중반 이후 뒤를 궁금하게 하는 호기심이 상당히 반감됩니다. 물론 파멸적인 결말을 예비하기 위하여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초석을 다지는 것도 의미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액자로 처리하기에는 액자 속 본 이야기가 “의문-완전하지 않은 해결 - 새로운 실마리의 등장과 반전 -결말”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구조라는 것이 동떨어진 듯합니다.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는 독백이고, 실제로 영상 기록을 통해서 남기는 거라고 하지만, 본 이야기는 3인칭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차이점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일 겁니다. 결말의 파괴성과 폐쇄성, 이야기 자체의 꽉 찬 구조를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구조나 결말 중 어느 한쪽을 조율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꼭 필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약간 아쉬운 것은, 결말의 의외성입니다. 이런 종류의 글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이 스즈키 코지의 링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러 가지 공포스러운 이미지보다 가장 그 결말이 충격적이었던 점은 영원한 복제의 두려움이었습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야만 하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무한히 퍼져나가는 공포. 그 발상 때문에 결말도 깔끔하면서도 그 뒤로 꺼림칙한 상을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경우 살인지령과 결말이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꼭 고쳐야 할 부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부분의 신선함이나 개방성만 좀 더 보완했다면 더 흥미진진한 글이 되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욕심내지 않고 차분한 전개 속에서 기대한 만큼의 즐거움을 주는 글이었습니다. 건필을 기원하며, 이번 달 우수단편으로 선정합니다.

선정을 축하드리며 mirror에게 쪽지로 연락 가능한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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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holic


                                  
  Prologue.


  에이프릴, 내 딸아. 아빠의 마지막 말을 이렇게 영상으로 전하는 것
을 용서해다오. 이걸 볼 때쯤이면 너는 아마 대부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거다. 아빠의 동료 형사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너를 붙잡고 괴롭
혔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그들은 내가 어째서 방아쇠를 당겼는지
끝내 알 수 없을 거다. 사실 나는 누군가 그 사정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란다. 하지만 너만큼은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
로 목숨을 끊어버린 나 때문에 네가 흘릴 눈물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
지는 것 같지만 딸아,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사랑하는 에이프릴. 지금부터 내가 남기는 말을 잘 듣거라. 네 아빠
가 자살하는 이유는 삶을 비관해서도, 내 죄책감이 버거워서도 아니란
다.

  그것은 너를 내 목숨보다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1.





  "뇌사인데 뇌사가 아니라니?"

  뉴욕경시청 의문사 전담반의 데커드 파르손은 보고서를 들고 있던 검
시관의 콧잔등을 노려보며 윽박질렀다. 검시관 핀셀은 경찰수첩보다
수배전단에 붙어 있어야 더 어울릴 듯한 데커드의 험악한 인상에 기가
눌리긴 했지만, 책상 위로 비치는 홀로그램을 가리키며 또박또박 말했
다.

  "반장님도 알다시피, 지난 2025년부터 뇌사의 거의 모든 원인이 판명
났지요. 그래서 원인 불명의 뇌사란 표현은 10년이 넘도록 쓰지 않았
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써야겠다?"

  데커드의 물음에 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홀로그램에 떠오
른 사진과 도표들 중에서 세 구의 시신들 부분을 가리켰다.

  "저희 검시진들이 아무리 파고 들어도 이건 모르겠더군요. 시신들의
상태를 봤을 때는 분명히 뇌사 상태가 분명한데……."

  데커드는 핀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이동시켰다. 무당벌레 모양
의 홀로그램 플레이어가 재생하는 입체적 디스플레이. 그곳에는 기묘
하게 그려진 도표 세 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핀셀은 계속 이어 말했다.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은, 미묘한 느낌의 뇌파가 느껴지고 있습니다.
굉장히 깊은 수면에 이르렀을 때의 반응과 비슷한데, 그것과도 정확히
일치하진 않고. 아무튼 이런 증상은 처음 봅니다."

  결국 검시진에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얘기였다. 데커드는 미간
을 거칠게 문지르고는 핀셀의 허여멀건한 얼굴을 노려보다가, 그에게
선 더 얻어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았네. 병원으로 돌아가서 일 보게, 핀셀."

  핀셀이 문을 박차고 나감과 동시에 라울 핏치 형사가 반장실로 들어
섰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재빠른 몸놀림을 가진 라울은 데커드에게
있어  든든한 파트너임과 동시에, 친동생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뇌사가 아니랍니까?"

  데커드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라울의 물음에 대답했다.

  "차라리 그러면 다행이게. 도통 모르겠다는군."

  라울은 데커드의 책상에 조금 다가서서 무언가 찾아내겠다는 듯이 홀
로그램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불빛 아래 입체 도형과 사진
을 그려내고 있는 홀로그램은 시신의 상태와 사건 경위를 세심하게 드
러내고 있었다.

  사건은 뉴욕의 프링글스 타운에서 일어났다. 3일전 거의 비슷한 시각
에 돌연사로 추정되는 세 구의 시체가 보고되었는데, 세 구 모두 급격
한 충격을 받고 뇌기능이 정지한 상태였으며 침입 흔적 같은 것은 발견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 명중 어느 한 명도 평소 삶을 비관한다거나
우울증을 앓은 기록도 없어 자살이라 보기에도, 타살이라 보기에도 애
매한 사건이었다. 데커드 파르손 경감이 홀로그램 플레이어의 렌즈를
노려보는 이유는 사건이 미궁 속에 빠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렌즈에
게 부숴버리겠다고 협박하면 저 놈이 답을 내놓을까? 잠시 실없던 생각
을 한 데커드의 귀로 라울의 탄식이 들려왔다.

  "이거 독특한데요. 의문사를 조사하다보면 별의별 경우를 다 보게 되
지만, 뇌파가 살아 있는 뇌사 환자라니."

  라울의 말 그대로였다. 뉴욕경시청의 의문사 전담반인 데커드와 라울
은 조사중에 온통 희한한 경우와 맞닥뜨려야 했다. 느닷없이 온몸의 혈
관에서 피가 빨려 나온 채 사망한 시체도 있었고, 순식간에 피부가 돌
처럼 굳어버려 하반신이 산산조각난 시체도 있었다. 굉장히 드물긴 하
지만 인체가 스스로 발화해 몸만 타버리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하지
만 그 사건들은 모두 발생 원인이 분명하게 밝혀졌던 사건들이었다.

  "자네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세 명의 공통점은 없었나?"

  라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없습니다. 프링글스 타운에 살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사는 곳
도 멀리 떨어져 있고, 직업이나 출생 배경의 연관성도 없더라고요."

  "그런가."

  데커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끊고 지냈던 담배가 또다시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담배를 입에 물일은 없을
것이다. 데커드의 하나뿐인 딸 에이프릴이 엄하게 금지시켰기 때문이
다. 데커드는 실궂게 손가락을 부비적거렸다.

  "반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라울이 뭔가 발견한 듯 홀로그램 한 구석을 가리켰다. 데커드는 벌떡
몸을 일으켜 책상 위로 기울였다. 파트너가 무언가를 찾아낸 것이다.

  "공통점이 있긴 있는데요?"

  "뭔가?"

  "돌연사한 세 명의 남녀 모두…… 하이비전(Highvision)을 켠 채 죽었
군요."

  "하이비전?"

  라울의 말대로 홀로그램에 투영된 자료들에는 분명히 하이비전 시청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세 명 모두 방 안에 두뇌활동이 느껴지지 않
으면 자동으로 전원이 꺼지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이 출
동했을 때는 그 점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자동 시스템을 너무 믿은
나머지 간혹 생기는 실수였다.

  "하이비전이라……, 그럼 세 명 다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에 죽었다
는 말인가?"

  "아마도 그렇겠죠. 중요한 건 어떤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느냐지
만."

  데커드는 의자에 덮여져 있던 자켓을 집어들며 말했다.

  "그거야 현장에 가 보면 알겠지. 자, 가자구!"

  마치 먹이를 발견한 버팔로처럼 데커드가 반장실을 박차고 나갔다.
라울은 허겁지겁 홀로그램 플레이어를 종료시키곤 그의 뒤를 따라 나
섰다. 어쨌든 조그만 단서가 생겼으니 그것을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뉴욕경시청 의문사 전담반이 출동하는 순간이었다.    





  2.



    

  데커드와 라울의 발걸음은 임펠리버 맨션의 7302호 앞에 멈춰섰다.
아무 문양과 특징이 없었던 밋밋한 문에서 희미한 기계음과 동시에 레
이저가 쏘아져 나왔다. 정확히 데커드와 라울의 안구를 향한 레이저였
다. 나타났을 때와 거의 동시에 레이저가 사라진 후 세라믹 재질의 문
에 문자가 표시되기 시작했다.

  '데커스 파르손, 라울 핏치. 출입 가능.'

  안구가 드러내는 신상정보를 읽은 보안시스템이 데커드와 라울의 신
분과 뉴욕경시청에서 내린 수색영장을 인식하는데 걸린 시간은 데커드
가 잠시 눈을 비빈 시간보다 더 짧았다. 이윽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출입문이 열렸다.

  생체반응을 인식한 내부시스템이 이미 환하게 조명을 밝혀놓고 있었
다.

  "지미 앤더슨의 맨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천장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 라울은 잠시 움찔했다. 처음 듣는 목소
리와 억양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음성 커스터마이
즈에 유명가수나 영화배우의 육성을 합성시키곤 한다. 연예인의 말버
릇까지도 그대로 재현해내는 음성 시스템을 보면 그 주인의 취향까지
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희생자였던 지미 앤더슨의 맨션
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라울에겐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반장님. 이거 누구의 목소리죠? 들어 보니 중년 남자인 것 같은
데……. 요새 이런 목소리의 배우가 어디 나오지?"

  데커드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울의 물음
에 대한 대답은 천장에서 울려왔다.

  "이 목소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목소립니다. 20세기 후반의 서부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 등장하는 이스트우드의 육성이죠."

  라울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카우보이라. 이 남자 꽤나 고전적인 취향을 가졌나본데요."

  "직업이 뭐라고 했지? 통신회사 직원?"

  "네, 홍보 쪽을 담당했던 모양인데요. 직장에서도 크게 두드러지는 점
은 없었던 사람 같습니다."

  "하긴. 요새 누가 카우보이 얘기에 심취하겠어, 안 봐도 뻔하군. 그나
저나 어느 쪽이야?"

  데커드의 물음에 라울은 재빨리 가구가 배치되어 있지 않은 벽면을
찾았다. 소파의 맞은 편 벽면이 아무런 장식 없이 깨끗한 것을 볼 수 있
었다.

  "어이, 카우보이. 하이비전을 좀 켜보겠나?"

  라울의 질문에 시스템이 곧바로 대답했다.

  "어느 분에게 맞출까요?"

  시청자의 취향을 자동으로 인식해 프로그램을 틀어주는 하이비전의
시스템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만약 시청자가 두 명 이상일 경우 시스템
이 그 대상을 물어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미 앤더슨의 취향으로."

  라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둘이 바라보고 있던 벽면 전체에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케미 쉴즈가 등장하는 시트콤이었다. 케미 쉴즈라
면 이미 한 물 갔다고 표현하는 것조차 과분할 정도의 배우였다.

  "리모콘은 어딨지?"

  데커드의 말에 라울은 소파 어딘가 떨어져 있을 리모콘을 찾기 시작
했다. 리모콘. 그것은 거의 모든 시스템이 인간의 음성을 통해 이루어
지는 시대에 와서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물건이었다. 하이비전의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47채널의 다채로운 소리 때문에 무언가를 시청
하는 동안에는 시스템이 주인의 목소리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평화롭게 하이비전을 시청하다가 빽 하고 소리를 지르느니,
차라리 리모콘의 버튼을 누르는 쪽을 택했다.

  "찾았습니다. 어라? 이거 센서식이 아닌데요?"

  라울이 데커드에게 리모콘을 건네자 데커드는 두툼한 손으로 그것을
붙잡고는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 모델을 본 적이 있어. 이 지미라는 남자 어지간히도 골동품을 좋
아하나 본데. 이건 리모콘이 등장하기도 전의 물건이야. 텔레비전에 붙
어있던 다이얼을 재현한 거로군."

  "텔레비전이요? 그거, 멀티비전보다도 오래된 물건 아닙니까?"

  리모콘에는 사람이 손으로 돌려야만 하는 다이얼이 정 중앙에 붙어
있었다. 아마 골동품 애호가들이나 20세기 신봉자들을 위해 특별 제작
된 모델 같았다. 라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독히 불편해 보이는데요. 요새는 채널만 해도 수천 개에 이르는
데, 그 다이얼로는 고작 20번까지 밖에 고를 수 없잖습니까."

  "뭐 어떤가. 그저 20세기의 향수를 느끼고 싶어서 만든 장난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차라리 우리에겐 다행이야. 이 남자가 죽기 전에
뭘 봤는지 알 수 있잖은가."

  데커드의 손놀림에 따라 틱, 하고 다이얼이 움직였다. 그러자 케미 쉴
즈가 배를 잡고 웃는 장면이 흘러나오던 하이비전은 전혀 다른 채널을
비춰주었다. 뭔가 의미심장한 것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데커드와
라울은 실망하고야 말았다. 남자가 보고 있던 채널에선 한 여자 소프라
노가 열창하는 모습이 나올 뿐이었다. 전혀 특별할 것이 없었다.  

  "13번 채널이라. 이거 음악 전문 채널입니다. 간혹 시끄러운 가수들
이 나오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클래식을 틀어주는 채널로 알고 있는데,
설마 이걸 보다가 죽어버렸을까요?"

  "모르겠군. 이것만 봐서는. 다른 곳도 돌아보자고."





  3.





  두 번째 희생자인 패션 디자이너 이사도라 가넷의 집 역시 분위기는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이사도라가 쓰던 리모콘 역시 지미 앤
더슨 것과 비슷한 다이얼 식이었다. 리모콘을 발견한 둘은 무언가 맞
아 들어간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고, 하이비전에서 좀 전에 보던 오페
라의 클라이막스 부분이 펼쳐졌을 땐 쾌재를 부를 수 있었다. 그녀 역
시 13번 채널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샘 다라본트 뿐이군."    

  데커드의 목소리는 넘치는 그의 의욕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라울 역시 사건의 실마리가 술술 풀리는 느낌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
다. 하지만 샘 다라본트의 지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라울은 리모콘
을 바닥에 던져 부수려는 데커드를 황급히 말려야 했다.  

  "제기랄! 이건 왜 14번인 거야!"

  샘 다라본트의 리모콘은 14번에 맞춰져 있었다. 세 명의 연관성이 무
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씩씩거리는 데커드를 진정시키며 라울은 어
두운 표정으로 하이비전을 쳐다보았다. 화면에서는 중세의 갑옷을 입
은 기사들이 실감나는 칼부림을 펼치고 있었다. 14번은 영화 전문 채널
이었던 것이다. 13번 채널과는 뚜렷한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는 채널이
었다.

  "다시 미궁으로 빠지는 건가."

  데커드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라울이 대꾸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사망 시각에 방영되고 있던 프로그램의 데이터
를 수집해 놓겠습니다. 그럼 공통점이 나올지도 모르죠."

  "그래, 포기하긴 이르지. 세 명 다 하이비전을 보다가 죽은 것은 확실
하니까."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대체 어떤 영상이 사람을 뇌사 상태
에 이르도록 만든 것일까. 아니, 정확히는 뇌사 비슷한 그 불가사의한
어떤 상태이겠지. 데커드의 생각을 방해한 것은 팔목에 부착된 리스트
폰(Wristphone)의 신호음이었다.

  "전화가 왔어요, 아빠."

  딸 에이프릴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시스템이 합성한 것이긴 하지만
딸의 목소리를 듣자 데커드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
꼈다. 하지만 리스트폰이 만들어낸 홀로그램은 다급해 보이는 검시관
핀셀의 얼굴이었다. 핀셀은 뭔가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부
릅 뜨여진 눈을 하고는 말했다.

  "바, 반장님! 큰일났습니다. 시, 시체들이……."

  데커드는 핀셀이 말을 계속 더듬도록 놔둘 성격은 결코 아니었다.

  "시체가 뭐!"

  핀셀의 두 손은 그의 통제를 벗어난 듯 제멋대로 놀고 있었다. 평소
냉정한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보통 일은 아닌 듯 했다. 어느새 곁
으로 다가온 라울 또한 심각한 얼굴로 데커드의 팔목에서 뻗어나오는
홀로그램을 지켜보고 있었다. 핀셀의 홀로그램은 쥐어짜내는 목소리
로 말을 이었다.

  "……시체들이 사라졌어요!"

  데커드와 라울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둘 모두 마치 유
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은 두 명의 귓가에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파고들었다. 화면 속의 한 중세 기사가 옆구리
에 파고든 칼날을 부여잡은 채 쓰러지고 있었다. 기사가 숨을 거두는
장면이 클로즈업으로 비쳐지는 순간 하이비전은 다시 원상태의 벽면으
로 돌아갔다. 데커드와 라울이 번개처럼 뛰쳐나가자 저절로 시스템의
전원이 꺼져버린 것이었다.





  

  4.





  "어떻게 시체들이 사라질 수가 있단 말이야!"

  병원의 통제실로 뛰쳐 들어온 데커드는 핀셀의 멱살이라도 붙잡을 기
세였다. 그런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핀셀은 대꾸하는 대신 말없이
감시 카메라가 녹화된 화면을 가리켜 보았다. 뒤따라 들어온 라울과 함
께 데커드는 모니터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데커드가 이를 부드득 갈았
다.

  "그래, 어떤 놈이 시체를 훔쳐갔는지 얼굴이나 보자구."

  그러자 핀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반장님. 아무도 시체를 훔쳐가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데커드가 또다시 뭐라고 윽박을 지르려는 순간 라울이 그의 팔을 붙
잡았다. 뒤를 돌아본 데커드의 눈에 하얗게 질린 라울의 표정이 들어왔
다.

  "저것 좀 보십시오, 반장님."

  라울의 말에 모니터로 눈길을 돌린 데커드는 헛바람을 들이키는 수밖
에 없었다. 영안실 복도를 멍한 눈길로 걸어 다니는 세 남녀. 그것은 분
명 홀로그램으로 본 시체들의 얼굴이었다. 보고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라울이 중얼거렸다.

  "제, 제 발로 걸어나갔단 말입니까? 갑자기 뇌사 상태에서 깨어났다
는 뜻인가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만약에 그
들이 뇌사에서 막 깨어났다면……."

  데커드가 핀셀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아. 이게 몇 분전 모습이지?"

  "한 40분 정도 됐습니다."

  "라울! 본청에 연락해서 당장 추적에 들어가라고 해."

  데커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울은 리스트폰의 홀로그램 플레이어
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추적 요청이 들어간지 4분 만에 응답이 돌아왔
다. 머리에 헤드셋을 낀 연락원의 홀로그램이 말했다.  

  "이사도라 가넷의 생체 반응이 발견됐습니다. 스키틀즈 타운 7번가입
니다."

  "7번가? 거기는 그녀의 자택 주소가 아닌데?"

  라울의 물음에 연락원의 홀로그램이 대답했다.

  "이혼한 전 남편의 주소입니다. 타격대를 출동시킬까요?"

  "지금 당장 보내도록 해. 스키틀즈 타운이면 여기서 가까우니 우리가
먼저 도착할 거라고 말해. 그리고 다른 두 명도 계속 수색하라고, 알았
나?"

  연락원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홀로그램은 사라졌다.

  에이프릴은 강력반 소속일 때부터 아빠가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싫
어했었다. 그렇기에 의문사 전담반으로 자진해 옮긴 것이다. 데커드는
의문사 전담반에 배정된 뒤로 거의 쓸 일이 없었던 물건인 핸드건을 점
검하며 말했다.

  "대체 이혼한 남편 집엔 왜 찾아간 거지?"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듭니다. 서두르죠, 반장님."

  두 명이 쏜살같이 통제실을 뛰쳐나갔기 때문에 핀셀은 그들에게 무언
가 말을 남길 틈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가 중얼거린 말은 혼잣말이
되어 버렸다.

  "그들이 정말로 막 깨어난 거라면…… 극도로 불안한 상태라구요."  





  5.





  이사도라의 전 남편의 저택에 도착함과 동시에 한 남자의 비명소리
가 들려왔다.

  "왜 이러는 거야, 이사도라!"

  보지 않고서도 그가 이사도라 가넷에게 공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데커드는 망설임 없이 본청에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출동지의 시스템을 차단해주기 바란다."

  데커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저택의 불이 꺼져버렸다. 경비 시스템
을 비롯한 모든 제어 시스템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데커드와 라울은
적외선 고글을 착용한 채 문을 박차고 집 안에 들어섰다.

  거실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고 그 위에 이사도라 가넷이 식칼을 든
채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칼 버려, 이사도라 가넷."

  데커드가 그녀의 등에 핸드건을 겨누며 말했다. 라울의 총구도 마찬
가지였다. 이사도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
았다. 적외선 고글로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
다.

  "칼 버리라니까!"

  그녀는 데커드의 두 번째 외침에도 칼을 놓지 않았다. 물론 거기까지
는 데커드의 예상 범위 안이었지만 그도 느닷없이 이사도라가 자신에
게 달려들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슉!

  이사도라의 돌발 행동에 반응한 건 라울의 손가락이었다. 그의 핸드
건에서 뿜어져 나간 총탄이 이사도라의 복부를 꿰뚫는 그 찰나의 순
간, 그녀의 정면에 서 있던 데커드는 그녀의 표정을 스치듯 볼 수 있었
다.

  그것은 잔뜩 일그러진 짐승의 표정이었다.  

    



  "이사도라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고개를 다리 사이로 푹 숙인 채 라울이 물었다. 사람을 쏜 충격에 잠
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강력반 당시 숱하게 범인을 상대
해왔던 자신과 달리 라울은 실제 총격전 경험이 거의 없었다. 데커드
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목숨엔 지장이 없다는군. 혼수 상태야."

  "……남편은요?"

  "가벼운 찰과상이야. 그녀가 느닷없이 달려들어 넘어트렸다는군."

  그때서야 라울이 고개를 쳐들었다.

  "왜 그랬답니까?"

  "글쎄, 남편도 그걸 모르겠대. 뇌사 상태로 알고 있었는데 자기를 찾
아왔으니 깜짝 놀랐겠지. 그런데 문을 열어 주자마자 주방으로 뛰어들
더니 식칼을 들고 덤벼들었다고 하더라고. 예전에 함께 살았을 때도 그
런 난폭한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

  "원한일까요?"

  데커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닌 것 같아. 오히려 그 반대라더군. 둘은 조만간에 재결합을 하려
고까지 했던 모양이야. 제길. 이거야 도통 모르겠군."

  바로 그 때, 본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연락원의 홀로그램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미 앤더슨이 발견되었습니다. 폴로 다리에서 뛰어내렸다는군요."

  "자살했단 말야?"

  데커드의 물음에 연락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울이 중얼거렸다.

  "뇌사에서 깨어나자마자 한 명은 남편을 죽이러 왔고, 한 명은 느닷없
이 자살이라…… 그럼 마지막 한 명은?"

  "샘 다라본트도 지금 막 포착되었는데, 뭔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연락원은 난처해하는 표정이었다. 우물쭈물하는 것을 싫어하는 데커
드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우락부락한 눈을 홀로그램을 향해 부라렸
다. 연락원은 토해내듯이 말했다.

  "생체 반응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무언가에 탑승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자기 부상 자동차인가?"

  연락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빠른 속도입니다."

  라울이 벌떡 일어섰다.

  "파일럿이었어!"

  데커드는 그 기세에 흠칫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파일럿?"

  데커드의 물음에 라울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샘 다라본트의 직업 말입니다. 모노플레인 파일럿입니다."

  데커드는 라울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려옴을 느끼기 시작했다.

  "개인 비행기의…… 조종사라고? 미치겠구만. 이륙 장소는 어디인
가?"

  연락원이 뭔가를 들여다보는 듯 하더니 대답했다.

  "뉴욕의 변두리에 있는 이륙장입니다."

  "어디로 향하고 있나?"

  "멘토스 34번가 쪽입니다."

  "멘토스? 거기엔 또 뭐가 있는데?"

  뭔가를 눈치 챈 라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번엔 연락원도
우물쭈물 거리지 않았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입니다."

  

  

  5.



    

  "이거 얼마나 빠른가?"

  헬리곱터의 날개 소리 때문에 데커드는 파일럿에게 있는 힘껏 소리
를 질러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파일럿도 마찬가지였다.

  "걱정 마십시오! 모노 플레인은 한 방에 격추시킬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파일럿이 질문을 잘못 이해한 듯 했다. 데커드는 그의 실수
를 정정해 줄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원래 성격대로 그의 뒤통수
를 후려갈겨 주기에는 여러 가지로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식칼 들고 날뛰고, 하나는 다리에서 뛰어내리고, 나머지 하나
는 비행기로 육탄돌격?'

  헬리곱터 안이 아니라 자신의 반장실 안이었다면 분명 책상을 후려쳤
을 것이다. 그 점은 옆에 타고 있던 라울도 충분히 눈치 챌 수 있었다.

  '도무지 공통점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군!'

  혼란스러운 데커드의 머릿 속과는 상관없이 헬리곱터는 빠른 속도로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멘토스 타운의 상공을 가로질렀다. 몇 분의 시
간이 흐르고 반대쪽 하늘에서 그들이 찾고 있던 목표물이 등장했다.

  "모노플레인입니다. 격추시킬까요?"

  파일럿이 물어왔다. 데커드는 이번에도 잘못 알아들으면 헬리곱터 바
깥으로 던져버리겠다고 다짐하며 대답했다.

  "아니, 대화를 시도해보겠다."

  "알겠습니다."

  다행히 데커드가 직접 헬리곱터를 조종해야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
다. 파일럿이 건네준 것은 로켓런처가 아니라 조그만 마이크였던 것이
다. 데커드는 마이크를 빼앗듯이 가로채곤 말했다.

  "최대한 가까이 붙어서 비행해주게."

  이윽고 충분히 소리가 들릴만한 거리에서 데커드는 마이크를 통해
샘 다라본트에게 외치기 시작했다.

  "뉴욕경찰이다. 지금 즉시 이륙장으로 돌아가라."

  이사도라 가넷처럼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기랄, 샘 다라본트! 빌딩에 부딪치면 너도 죽는단 말이야!"

  아무리 윽박지르고 타일러도 샘 다라본트는 묵묵부답이었다. 데커드
는 마이크를 툭 내려놓고는 라울을 쳐다보았다. 라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격추시키죠. 라울의 눈빛에 데커드도 눈빛으로 되받아쳤다.
하지만 그럼 그는 죽어. 라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빌딩에 부딪치게
되면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됩니다. 데커드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
을 깨달았다.

  그는 힘없이 파일럿을 향해 말했다.

  "로켓 런처 어딨나?"

  

  모노플레인의 폭발음은 아마 멘토스 타운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데커드의 예상대로 탑승자였던 샘 다라본트는 모노플
레인과 함께 공중분해 되었다. 세 명 중 유일하게 숨이 붙어 있는 이사
도라 가넷마저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뉴욕경찰청으로 돌아온 데커드와 라울의 어깨는 축 쳐져 있었다. 사
건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고 있는데 피해자이자 가장 유력한 증언자 중
두 명이 죽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세 명의 결정적인 공통점은 아직도
찾아지지 않고 있었다. 의문사 전담반이 생긴 이래 가장 큰 곤혹이었
다.

  "데이터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요, 반장님."

  라울이 반장실로 가져온 디스켓에선 두 개의 영상이 홀로그램으로 떠
올랐다. 하나는 웅장한 홀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이 벌어지는 공연실황
이었고, 하나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여행을 떠나는 멜로 영화였다.
세 피해자가 사망당시 보고 있던 13번과 14번 채널의 프로그램들이었
다.

  "이걸 보면서 뇌사에 빠졌다니 믿을 수 있겠나, 라울?"

  "솔직히 두 손 들고 싶습니다. 도저히 모르겠어요."

  라울은 그렇게 말하면서 실제로 두 손을 치켜드는 시늉을 해보였다.
데커드는 피식 웃고는 등을 의자에 깊게 파묻었다. 그러다가 뭔가 결심
한 듯 리스트폰에 대고 "에이프릴."하고 말했다. 라울의 눈썹이 치켜 올
라갔다. "반장님, 설마……?"

  데커드의 리스트폰 위로 앳된 소녀의 홀로그램이 튀어나왔기 때문에
라울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빠, 안녕. ……어라, 왜 이렇게 표정이 어두워? 핏치 아저씨도 울
상이네요. 무슨 일 있는 거에요?"

  환한 표정으로 등장했던 에이프릴의 얼굴은 곧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
었다. 데커드는 에이프릴에겐 보이지 않는 각도로 라울에게 손짓을 보
냈다. 웃어라. 라울과 데커드의 입꼬리는 순식간에 올라가는 놀라운 변
화를 보여주었다.  

  "아니야, 에이프릴. 아빠가 또 경찰청 컴퓨터를 부숴먹었지 뭐냐. 아
무래도 이거 다 고치고 집에 가야겠는걸?"

  "또? 내가 아빠 성질 좀 죽이랬잖아. 왜 컴퓨터는 때리고 난리야."

  "하하, 그러게 말이다."

  "……그럼 오늘 못 들어오겠네?"

  데커드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무안한 듯 웃었다.

  "미안하구나, 에이프릴. 아빠가 대신 내일 맛있는 거 사가지고 들어갈
께."

  "치. 알았어요. 아이스크림 캔디 사와야 돼?"

  "약속하마. 그럼 잘 자거라, 에이프릴."

  "아빠도 잘 자. 핏치 아저씨도 바이바이."

  라울은 여전히 치켜 올라간 입꼬리를 유지한 채 에이프릴의 홀로그램
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에이프릴의 모습이 사라지자 라울은 곧바
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미스테리예요. 어떻게 반장님의 유전자에서 에이프릴 같이 귀
여운 애가 나올 수 있는 거죠?"

  "죽은 지 엄마를 닮아서 그래. 라울, 누누히 말하지만 눈독 들이면 박
살내버린다."

  라울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면서 생각했다. 애초에 그럴 의도는 전혀
없지만, 반장님이라면 진짜로 날 죽일지도 몰라. 어느새 라울의 표정
은 다시 딱딱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반장님. 그럼 오늘 ‘그거’ 하는 겁니까?"

  데커드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울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 그거 아직 찬성 못 하겠습니다. 도저히 적응도 안 되고. 아무래도
꺼림칙하다니까요."

  "입 다물고 따라오기나 해."

  



  6.





  두 형사는 샘 다라본트의 아파트에 와 있었다. 사건이 잘 풀리지 않
을 때마다 데커드가 고집을 부리는 수사방법이 바로 이것인데, 사건 현
장에서 하룻밤을 지새는 것이다. 물론 라울은 형사로서 데커드를 존경
해 마지않았지만 이 수사 방법에 만큼은 존경심을 표하기가 매우 힘들
었다. 의문사가 일어났던 현장에서 잠을 자다니, 뭔지 모르게 오싹하
기 때문이다.

  "네가 무슨 유령신봉자냐? 오싹하긴 뭐가 오싹해. 저번 독가스 사건
때도 이것 때문에 해결했잖냐."

  데커드는 지난 사건을 끄집어냈다. 한 남자가 의문사를 일으켰는데,
알고 보니 일정한 시각이 되면 지면에서 독가스가 올라오는 지층 위에
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데커드의 수사 방법이 개가를 올린 순간이었
다. 라울은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은 포
기할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반장님이 질식하실 뻔한 건 기억 못 하시나요? 에이프
릴이 천애고아가 될 뻔한 순간이었다고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실마리가 풀렸지. 이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거
야."

  소파에 등을 기대며 데커드는 리모콘을 집어 들었다. 다이얼로 채널
을 돌리자 하이비전에서는 사망 시각에 방영된 프로그램들이 쭈욱 펼
쳐지기 시작했다. 데커드가 본청에 요청해 그 시간대에 방송된 모든 하
이비전의 전파를 통채로 복사해온 것이다.

  "그리고 밤새도록 돌려 본다는 얘기죠? 오케스트라와 멜로 영화라.
어디 안자고 버틸 수 있을려나 모르겠군요."

  라울이 투덜거리자 데커드가 라울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커피를 안 사왔군. 라울?"

  "옛썰. 대령하겠습니다."

  라울이 자리를 뜨자 데커드는 곧장 하이비전의 화면에 몰입하기 시작
했다. 하지만 아무리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본다 해도 화면에선 별 특
별한 징후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현란한 손놀
림과 멜로 영화에 나오는 연인들의 키스신만이 반복되어 나올 뿐이었
다.

  '13번과 14번이라. 차라리 한 채널이면 좋았을 것을, 왜 두 개로 나눠
진 건지. 그것도 붙어 있는 채널을…… 잠깐, 붙어 있는 채널?'

  순간 어떤 섬광이 데커드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붙어 있는 채널과…… 다이얼이라."

  데커드는 다이얼을 붙잡고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13번에서 14번으
로, 14번에서 13번으로. 화면에서는 콘트라 베이스의 연주자 얼굴과 멜
로 영화의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의 얼굴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그러
다가 어느 순간 데커드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챌 수 있었다.

  분명히, 13번 채널에서 14번으로 넘어가는 순간 두 채널 중 어느 쪽에
도 속하지 않는 무언가가 데커드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리모콘을 쥔
데커드의 손에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데커드
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이얼을 움직였다. 13번도, 14번도 아닌 그
두 채널의 정가운데에 다이얼을 고정시킨 것이다.

  '이것이군!'

  분명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야 정상인데, 놀랍게도 화면에서는 현란
한 무늬의 영상이 데커드의 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온갖 원색적인
도형들과 이미지들이 번개처럼 지나가며 데커드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데커드는 정신을 잃었다.





  "반장님! 반장님! 정신 차리세요!"

  볼에 무언가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자신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데커드는 그 괘씸한 녀석의 팔목을 부러뜨릴 요량으로 손을 휘
둘렀다. 하지만 라울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스로 붙잡히
지 않을 수 있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반장님?"

  데커드의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라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뭘 하고 있었지?"

  "지난번 독가스 사건 때보다 더 놀랬습니다, 반장님. 뭘 하고 있었다
니요, 백치처럼 멍한 표정으로 하이비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계셨단
말입니다."

  그때서야 바늘처럼 왼쪽 뒤통수를 찔러오는 두통이 느껴졌다.

  "내가? 하이비전을 보고 있었다고…… 채널…… 그래, 채널 13과 14
의 중간을 봤지. 분명 뭔가 있었어. 그런데……."

  라울이 데커드의 말을 끊었다.

  "네, 뭔가 있었어요. 무슨 마법 같았죠. 아무리 큰 목소리로 부르고 흔
들어도 반장님은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단 말입니다. 제가 전원을 끄
고, 뺨을 거칠게 때린 뒤에야 일어나신 겁니다. 대체 뭘 보신 거예요?"

  데커드는 자신이 무엇을 봤나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생각나는 것
은 여러 가지 색깔들만이 희미하게 떠오를 뿐, 어느 것도 구체적으로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모르겠군. 기억이 안 나."

  라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했습니다, 반장님. 만약 반장님이 그 영상을 계속 보고 계셨더라
면……."

  "알아. 나 역시 뇌사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라울의 표정이 더욱 무거워졌다. 하마터면 존경하는 선배이자 파트너
를 잃을 뻔 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데커드의 표정은 살아나기 시작했다.

  "좋아. 드디어 실마리가 잡혔군. 이제 내가 본 영상을 연방수사국에
의뢰하면……."

  "지금은 안 됩니다, 반장님. 쉬셔야 해요."

  "난 멀쩡하네, 라울."

  라울은 단호한 동작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을 뇌사에까지 이르게 만드는 지독한 영상입니다. 잠깐이었지
만 반장님의 뇌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몰라요. 오늘은 쉬고, 내일 아
침에 가보도록 해요. 오늘도 피곤한 하루였잖습니까."

  데커드는 라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선, 자신의 판단보다 라울의 판단을 믿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이었
다.

  "그래. 자네 말대로 하도록 하지."

  데커드는 곧 소파 위에서 잠에 빠져 들었다. 하지만 라울은 쉽게 눈
을 붙일 수가 없었다. 머리 속에 맴도는 생각에 잠이 오질 않았던 것이
다. 식칼을 들고 남편에게 덤볐던 이사도라 가넷과 모노플레인을 몰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향해 돌진했던 샘 다라본트의 모습이 눈에
서 떠나질 않았다.

  '만약에 반장님이 그들처럼 된다면…….'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쳤지만 가능성을 전혀 배재할 순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반장님을 막아야 하는 건가.'

  라울에겐 굉장히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7.





  다음날 아침 일찍 데커드가 경찰청으로 불러온 건 최면 전문가 소르
마크 박사였다. 사건의 경위를 전해들은 소르마크 박사는 덥수룩한 턱
수염을 어루만지며 생각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이비전과 다중채널의 스피커
가 표현할 수 있는 영상물은 강력한 최면 수단이 될 수 있겠죠. 물론 굉
장히 위험한 방법인데다가 단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어서 확신은 못
하겠지만 말입니다."

  데커드와 라울에게는 그 대답만으로 충분했다. 라울이 데커드 대신
입을 열었다.

  "이제 확신하셔도 될 겁니다. 그렇다면 또 한 가지, 최면 상태에 깊게
빠져들면 뇌사에 다다를 수도 있나요?"

  "뇌사? 글쎄요……. 아무리 강한 최면요법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
할텐데요."

  그 때 데커드가 나섰다.

  "정확히는 뇌사가 아닙니다, 박사님. 뇌사와 똑같은 증상을 보였지만
뇌파는 살아 있었죠. 그리고 3일 후 깨어났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소르마크 박사는 다시 턱수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데
커드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 날 때쯤 소르마크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건 뇌사가 아닙니다. 잠에 빠졌던 거죠. 아마 비렘수면
(N-REM) 단계보다 더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 것일 겁니다."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이론적으론 가능합니다, 파르손 반장. 하지만 그럴 경우엔……."

  "그럴 경우엔?"

  소르마크 박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람은 비렘수면 단계에서 꾸었던 꿈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너무
나 깊숙한 무의식을 건드리는 부분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보다 더 깊
은 수면에 빠졌다가 다시 깨어난 경우라면, 얼마나 근원적인 무의식을
건드렸을지 짐작하기조차 힘들군요. 어떤 특이한 행위를 보여도 이상
할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 같은. 순간 데커드와 라울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
다. 그리고 그것을 입 밖에 낸 것은 라울이었다.

  "그렇다면 박사님. 누군가 의도적으로 사람을 세뇌시켜 지배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이 방법을 쓸 수도 있나요?"

  "의도적인 세뇌 말입니까? 그러나 그건 윤리적으로……."

  쾅! 결국 데커드가 책상을 부술 듯이 내리쳤다.

  "박사님. 그놈의 ‘윤리’는 잠깐 쓰레기통에 던져두고 생각해 봅시다.
그게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만 말씀 해 주십시오."

  데커드의 박력에 잠시 놀랐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지독한 악의가 느껴지지만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데커드의 눈빛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13번 채널과 14번 채널 사이에서 흘러나왔던, 문제의 그 영상을 본 방
송국 관계자는 무언가를 떨쳐 내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영상
은 굉장히 작은 화면에, 게다가 소리 역시 제거한 상태라 최면 효과가
나타나진 않았지만 방송국 관계자에게는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온 듯
했다.

  "이런 해괴망측한 영상이 심의를 통과할 수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절
대로 채널을 부여받을 수가 없다고요. 이런 건 본 적도 없는데다
가……,  어쨌든 이런 방송을 허락할 정신 나간 방송사가 있을 리 없습
니다."          

  라울이 입을 열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정식 채널에서 나온 영상이
아닙니다."

  "아니라면요?"

  "채널과 채널 사이에서 흘러나온거죠. 다이얼 방식의 리모콘으로만
잡아낼 수 있었던 매우 특이한 케이스란 말입니다."

  '채널과 채널 사이'란 말에 방송국 관계자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그건 방송 업계 전체의 윤리를 무시하
는……."

  데커드의 표정이 급격히 변하는 것을 본 라울이 황급히 그의 말을 가
로막았다.

  "윤리란 말은 가급적 쓰지 마십시오. 우리에겐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런 방법이 가능하긴 한 겁니까?"

  데커드가 뿜어내는 콧김은 방송국 관계자의 머리카락을 날려버릴 듯
했다. 결국 방송국 관계자도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때서야 데커드
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떤 괘씸한 녀석이 채널과 채널 사이에 몰래 전파를 끼워
넣었다는 거군. 맞소?"

  "거의 확실합니다. 프링글스 타운이라는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 것으
로 보아 뉴욕 어딘가에 발신지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죠."

  라울이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본인은 느끼
지 못했지만 질문을 던지는 라울의 목소리는 매우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전파를 역추적 할 수도 있겠군요?"

  



  8.





  "저거, 아무리 봐도 발신탑이군."

  "네. 숨겨놓지도 않았으니, 이거 원. 대범하다고 해야 하나?"

  두 시간에 걸려 전파 추적에 성공한 뒤 데커드와 라울은 기동 타격대
와 함께 발신탑으로 보이는 작은 전파탑을 포위하고 있었다. 전파탑 아
래에는 회색 건물 한 채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반장님. 만약 저 안에 범인이 있으면 이거 너무 싱거운 거 아닙니
까?"

  데커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하지 마. 붙잡은 그 순간부터 싱거운 상황은 없을 테니까."

  데커드는 시간 낭비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곧바로 타격대에
게 명령을 내렸고 이윽고 타격대가 건물 안으로 침투했다. 라울의 예상
이 적중했다. 싱겁게도, 범인은 별다른 저항 없이 타격대에 체포되었
다.

  자신을 로퍼슨이라 밝힌 범인은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중년 남자였
다. "네 놈이 그거 만들었냐?" 하는 데커드의 질문에 남자는 소리 없이
웃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거'라고 하니 불쾌하군요. '작품'이라고 불러주시지요."

  중간에 타격대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로퍼슨은 몇 달 뒤에나 법정 증
언이 가능했을 것이다. 데커드의 주먹에 치아가 모조리 뽑혀나갔을지
도 몰랐기 때문이다.





  "희한한데요. 발뺌을 하지 않는군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범인 로퍼슨의 모습을 보며 라울이 말했다. 데
커드는 거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꼼짝할 수 없는 증거가 있잖아."

  "하지만 저래서야…… 제 발로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잖습니까."

  데커드는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턱만 움직여 로퍼슨을 가리켰다.

  "어쨌든 네가 얘기해봐라. 난 저 녀석 안 때릴 자신 없다."

  솔직한 데커드의 말에 라울은 피식 웃고는 취조실 안으로 들어섰다.
로퍼슨은 슬쩍 고개를 들어 라울의 얼굴을 쳐다볼 뿐 별다른 표정의 변
화를 드러내지 않았다.

  라울은 단도직입적으로 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지, 로퍼슨?"

  로퍼슨은 라울의 노려보는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대답했다.

  "예술은 본능입니다, 형사님. 거기에 이유가 필요합니까?"

  "죄 없는 사람 두 명이 죽었어. 그래도 예술이라 말할 수 있나?"

  "그들의 죽음이 제 작품의 클라이막스였죠. 그들이 잠을 깨고 움직였
을 때는 제가 마치 조물주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둔탁한 충격음이 유리 너머로 들려왔다. 라울은 보지 않고서도 데커
드가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래 끌면 안 되겠군.

  "그럼 범행 사실을 시인하는 건가?"

  "당신들이 절 어떻게 다루던 상관없습니다. 난 소원을 이뤘으니까요.
미련은 없습니다, 형사님."

  "좋아. 그럼 한 가지 묻지. 도대체 어떤 최면을 건 거지?"

  라울의 질문에 로퍼슨은 느닷없이 천장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라울
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기 시작할 때쯤 로퍼슨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형사님. 릴케 좋아하십니까?"

  "릴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로퍼슨이 고개를 내려 라울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위대한 시인이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생각해 보십시오. 형사님. 시인이 시를 쓰고 나서, 그 내용을 독자들
에게 일일이 설명해 주는 것을 보셨습니까?"

  "얘기해 줄 수 없단 얘기군."

  로퍼슨은 다시금 예의 그 웃음을 머금기 시작했다. 라울은 잠시 생각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로퍼슨. 자백을 받았으니 더 이상 취조할 것은 없군. 하지만 이
제부터…… 내 개인적인 질문을 시작할 거야."

  로퍼슨의 눈에 호기심의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것은 데커드에게
도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 개인적인 질문이라니?"

  이윽고 라울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데커드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라울이 입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
었다. 데커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스피커를 꺼 놨어?"

  데커드가 들을 수 없는 유리 너머 취조실에서는 라울이 로퍼슨을 추
궁하고 있었다. 조금 전과는 확실히 다른 박력을 내뿜는 라울이었다.

  "어서 말해라. 최면을 푸는 방법이 뭐지?"

  로퍼슨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희한하군요, 형사님. 그걸 묻는 이유가 뭐죠?"

  "닥치고 대답하기나 해! 어떻게 하면 최면을 풀 수 있지?"

  라울은 위협적으로 로퍼슨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하지만 로퍼슨은 전
혀 물러섬 없이 맞받아쳤다.

  "알 것 같군요. 하긴, 누군가 나를 붙잡는다면 또 한 명의 시청자가 생
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요. 아마 당신일 수도 있고……."

  말끝을 흐리며 로퍼슨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가리켰다.

  "저 험악한 인상의 남자일 수도 있겠군요. 뭐, 어느 쪽이든 나야……."

  로퍼슨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순식간에 멱살을 잡힌 채 들어 올려졌
기 때문이다. 라울은 잡아먹을 듯이 로퍼슨의 얼굴을 쏘아 보며 말했
다.

  "너와 장난할 기분 아니다, 로퍼슨. 우리는 네 놈이 갖고 노는 장난감
이 절대 아니야. 지금 당장 말하지 않으면……."

  "죽여요."

  라울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죽이란 말입니다, 형사님. 사실 모든 예술에도 끝은 있게 마련이죠.
형사님이 제 예술의 끝을 내 주시면 나야 영광이겠군요."

  "이 자식, 정말 미쳤군."

  로퍼슨은 전혀 소리 내지 않고 입모양만으로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은
라울에게 소름끼칠 정도로 섬뜩하게 다가왔다.

  "미쳤다는 말은 그럴 때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죠. 천재의 혼을 이
해하지 못했을 때."

  라울은 서서히 멱살 잡은 손을 풀어 주었다. 그가 보기에 로퍼슨의 정
신 상태는 이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뒤틀려 있었다. 흥분을 겨우
가라앉힌 라울이 취조실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등 뒤에서 로퍼슨의 목
소리가 들려 왔다.

  "재밌군요, 형사님.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하나가 남아 있다니. 만들
어낸 저조차도 나머지 하나의 작품은 어떻게 끝날지를 모르겠군요. 이
거 색다른 흥분을 가져다주는데요? 클라이막스를 기대할 겁니다, 기쁜
마음으로."

  라울은 취조실의 문을 부숴버릴 듯이 닫아버렸다.





  9.





  "대체 무슨 얘길 한 거야?"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데커드의 질문에 라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
다. 몇 번을 시도해 봐도 라울이 입을 열지 않자 데커드는 결국 포기하
기에 이르렀다. 이 녀석 알고 보니 악어고집이었군.

  "좋아. 범인도 잡혔고, 증거도 있으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영
상의 내용물도 연방수사국에 의뢰해 놓았으니, 곧 결과가 나올 거야.
그럼 우린 보고서만 작성하면 땡이라고."

  라울은 희미하게 웃음을 보이기 시작했다. 데커드는 더욱 신이 나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좋아. 오늘은 우리 집에서 한 잔 어떤가, 라울? 에이프릴한테 추파
만 던지지 않기로 약속하면 내가 한 턱 내겠네."

  '추파'란 대목에서 라울은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라울
과 에이프릴의 나이차는 자그만치 열 살이 넘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초대해 주시면 감사히 가야죠."



  

  "자네 말야, 너무 에이프릴한테 실실거리지 말라고. 그 녀석 남자라
곤 아빠 밖에 몰라서 자네 같은 무뚝뚝한 녀석한테도 이상한 생각을 품
을지도 모른단 말야."

  "반장님. 에이프릴도 남자친구 만들 나이가 되었다는 걸 잊지 마세
요. 아니면 혹시 반장님이 에이프릴의 남자친구들마다 따라다니며 협
박한 거 아닙니까? 내 딸 건드리면 박살내버리겠다,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뭐, 우리 에이프릴 좋다고 따라 다닌 놈은 많았지
만 그 때마다 나는……."

  데커드의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라울은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딴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최면에 걸린 채 무시무시하게 돌변했던 희생
자들의 얼굴과 로퍼슨의 얼굴이 번갈아가며 떠올랐다. 그리고 로퍼슨
이 남긴 말도 묵직하게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뭐, 별 일 없겠지.'

  라울은 일단 머릿속을 비우기로 마음먹었다.

  "그 녀석 말이야. 어렸을 때부터 종종 나한테 물어봤다고. '아빠, 아빠
는 나를 위해 죽을 수 있어?' 그렇게 물어오는 녀석은 어찌나 귀엽고 당
돌한지. 요새도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는 그런 대사가 종종 나오는
모양이야. 나는 그 때마다 죽을 수 있다고 대답하지. 에이프릴의 목숨
은 내 목숨보다 소중하거든. 뭐, 너무 닭살 돋는다는 표정 하지 말라
고. 나도 솔직한 심정에선 그런 일이 생기기야 하겠느냐, 생각하고 있
으니 말야."

  데커드가 웃으며 혼자 떠드는 사이 둘은 어느새 데커드의 집 앞에 당
도해 있었다. 데커드는 환한 얼굴로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문 앞에
에이프릴의 영상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어? 아빠다! 핏치 아저씨도 왔네요?"

  "그래, 에이프릴. 아저씨 문 좀 열어주겠니?"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에이프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은 다시 딱딱한 세라믹으로 돌아왔
다. 에이프릴의 천진한 얼굴을 보자 라울은 그동안의 걱정과 근심이 모
두 날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 괜한 기우일지도 몰라.

  "아무래도 천만 다행인 겁니다. 에이프릴이 사모님의 유전자만 골라
서 받은 것처럼 사모님만 똑 닮은 것 말이에요. 안 그래요, 반장님?
……반장님?"

  평소대로라면 농담이나 주먹이 날아왔어야 할 텐데, 바로 옆에 서 있
던 데커드는 마치 목석처럼 굳어 있었다. 라울의 등 뒤로 싸늘한 기운
이 스쳐지나갔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쳐다 본 데커드의 얼굴은 일그
러질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것은 라울이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던 데커드의 얼굴이었다.

  "아빠, 아이스크림 캔디 사 왔어?"

  문 너머 에이프릴의 목소리를 듣자 데커드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
다. 라울은 천천히 데커드에게서 물러나며 소리쳤다.

  "안 돼, 에이프릴! 문 열지 마! 나오면 안 돼!"

  그러면서 동시에 라울은 핸드건을 꺼내어 데커드를 향해 겨누었다.

  "물러나십시오, 반장님. 안 그러면……."

  라울은 차마 그 뒤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때 라울의 머릿속에
서 그려졌던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데커드가 라울을
쳐다보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 손이 향하는 곳은 볼 것도 없이 데
커드의 핸드건이었다.

  "뽑지 마십시오. 정말 할 겁니다. 쏴 버릴 거라고요!"

  바깥의 소란을 들은 에이프릴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핏치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대답해 봐, 아빠!"

  데커드에겐 이미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몸에
배인 동작 그대로, 오래 전부터 훈련 받았던 순서대로 총을 꺼내 들고
있었다.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데커드와 의문사 전담반을 맡으며 얻게
된 수많은 추억들이 라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빌어먹을. 라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새하얀 복도를 가로지르며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10.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그리고 나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을 때, 붕대가 칭칭 감아져 있는 복부와 링겔 바늘이 꽂혀진 오른
팔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무서운 두통이 엄습해왔다. 뭐야, 대체 무
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일어나셨습니까, 반장님?"

  걱정스런 표정으로 데커드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은 검시관 핀셀이었
다. 데커드는 멍한 표정으로 핀셀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퍼뜩
데커드의 정신을 차리게 만든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에이프릴! 에이프릴은 어딨나!"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반장님. 총을 두 발이나 맞았다고요!"

  데커드는 에이프릴의 안위가 확인되기 전에는 절대 누울 수 없다는
듯이 물어왔다. 핀셀은 간호사 세 명의 도움을 받아 그를 겨우 진정 시
키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지금 안전한 곳에 요원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제서야 데커드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런가, 다행이군. ……그런데 라울은 어디 있나? 이 녀석, 선배가
총을 맞았는데 어디 쳐 박혀 있는 거야?"

  그 말을 들은 핀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데커드가 그 표정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뭐야……, 그 녀석도 다친 건가?"

  여전히 긍정의 대답은 없었다. 핀셀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것을
보았을 때 데커드는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라울이 어디에 있는
지를.

  "노, 농담하지 말게. 핀셀. 그 녀석 어디 숨어 있는 거지? 나를 놀래
켜 주려고 그러는 거지?"

  두터운 붕대가 불그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데커드가 흥분하자 총
상에서 다시 피가 배어나오는 것이다. 데커드는 소리치고 싶었다. 침대
를 들어올려 부숴버리고 싶었다. 윽박지르고 싶었다. 오열하고 싶었
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총상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어째서 라울
이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핀셀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열어 말했다.

  "총격전이었습니다. 반장님은 복부에 두 발을 맞으셨지만……, 라울
핏치 형사는 머리에 한 발을 맞고 말았어요.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
니다."

  데커드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내가.

  이 손으로.

  라울을 죽였다고?





  "반장님, 여긴 출입 금지입니다! 비켜 주십……."

  경비원은 자신이 해야 할 말도 맺지 못한 채 물러서야 했다. 악마 같
은 얼굴을 한 데커드가 핸드건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있나?"

  경비원은 그가 진심으로 총을 쏠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
문에 목숨을 거는 기분으로 질문해야 했다.

  "네?"

  다행히도 데커드는 경비원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는 대신에 다시
한 번 말해주었다.

  "로퍼슨 어디 있나?"

  임무가 목숨보다 중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데커드는 같은 식으로 몇
명의 경비원을 거친 다음 결국 로퍼슨이 있는 방에 도달할 수 있었다.
로퍼슨은 차분한 모습으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계
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데커드는 그의 멱살을 부여잡거나 방구석에 처박지는 않았다. 다만
조용히 총을 들어 그의 미간을 겨누었을 뿐이다. 차가운 총구가 이마
에 와 닿는데도 로퍼슨은 표정의 변화 없이 데커드를 올려다보고 있었
다.

  데커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로퍼슨이 대답했다.

  "당신이 내 마지막 작품이었군요. 사실 확률은 반반이라고 생각했는
데 말이죠. 난 그 형사 쪽에 걸었었거든요. 뭐, 어쨌든……."

  타앙!

  순식간에 로퍼슨의 왼쪽 손목이 날아갔다.

  "끄어어헉……."

  잔뜩 짓눌린 듯한 비명이 로퍼슨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데커드가 다
시 입을 열었다.

  "말을 해야 하니 입은 가장 마지막이다. 다시 묻겠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로퍼슨의 모습은 기괴망측했다.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입은 웃고 있
었지만 혀끝에서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듯 들렸다.

  "깨, 깨운 겁니다……. 당신…… 당신의 보, 본능을……."

  "본능?"

  로퍼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더러 그말을 믿으란 믿으라고?"

  로퍼슨은 계속 말했다.

  "죽이십……시오. 원하는 건 그, 그거…… 아닙니까? 당신의 본능을
그대로…… 따르란 말입니다."

  데커드는 다시 총구를 로퍼슨의 머리에 갖다 대며 말했다.

  "그게 너의 유언이냐?"

  로퍼슨의 어깨가 갑자기 들썩이기 시작했다. 웃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도 똑같군. 당신도…… 결국, 인정을 하지 않아."

  "인정? 뭘 인정하란 말이지?"

  로퍼슨이 고개를 들어 데커드를 쳐다보았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로퍼슨의 얼굴을 보다 데커드는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기고 싶었
지만, 참기로 했다.

  로퍼슨은 어느새 더듬지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당신도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지. 드러나는 채널만…… 보고 싶
어 하는 거야. 채널과 채널 속에 숨겨진 진짜 본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
는 거야."

  "알아듣지 못할 소리만 하는군."

  "당신이 한 거야!"

  느닷없이 로퍼슨이 소리를 질러댔다. 오히려 머리로 총구를 밀어내
는 몸짓이었다. 데커드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시
켜야만 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퍼슨은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든지 간에, 그건 당신 마음이 시킨 거야! ……내
가 저지른 게 아니란 말이야. 킥."

  그 말을 끝으로 로퍼슨은 더 크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데커드의 일그
러진 앞에서. 그가 겨눈 총구 앞에서. 로퍼슨이 허리를 꺾고 웃기 시작
할 때 쯤, 데커드는 주저 없이 그를 쏴 버렸다.

  



  11.





  "에이프릴이 여기로 오고 있습니다, 반장님."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는 데커드에게 핀셀이 다가와 물었다.

  "나는…… 구속되는 건가?"

  "재판을 받지 않은 범인을 살해하셨으니, 일단은 그렇습니다. 에이프
릴과 만나신 후 조치가 취해질 겁니다."

  "에이프릴에게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고맙네."

  데커드는 여전히 고개를 들고 있지 않았다. 핀셀은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데커드가 "뭔가?"하고 묻자 결국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영상 말입니다. 분석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로퍼슨이 죽은 지
금은 의미가 없겠지만, 반장님께서 관심이 있으실 것 같아서요."

  잠시의 침묵이 있고난 뒤, 데커드가 말했다.

  "보여주게."

  핀셀은 말없이 가져온 홀로그램 플레이어를 작동시켰다. 홀로그램이
만들어낸 소르마크 박사가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영상물입니다. 대상의 특성상 깊이 파고드는 조
사가 불가능했지만 몇 가지 알아낸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것은
피해자의 무의식 중 깊숙한 곳에 있는 파괴 본능을 일깨웁니다. 말 그
대로 무언가를 '파괴'하는 거죠. 그리고 피해자들이 3일 동안 뇌사 상태
에 빠져 있었던 것은 그들이 너무 오랜 시간동안 이 영상물을 시청했
기 때문에 지나치게 깊은 무의식에 빠지느라 뇌가 멈춰버린 것처럼 보
인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이 영상물의 흡입력은 엄청난 것으로 보입니
다."

  데커드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 동안 라울과 함께 수사했던 몇 일
간의 모습들이 생생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알려드릴 것은 이 영상물이 거는 지독한 최면과 암시의
가장 무서운 점입니다. 이 영상물은 쉽게 말해 '무언가를 파괴하라'고
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면의 수준을 봤을 때 그 파괴에 성공하거
나 대상이 소멸된 것을 자각했을 때에야 풀리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미루어 추측해 보건데…… 그것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인 것
같습니다."

  뭐라고? 데커드의 두 눈이 부릅 뜨여졌다. 하지만 그것에 상관없이 소
르마크 박사의 홀로그램은 계속 말했다.

  "첫 번째 희생자였던 이사도라 가넷은 자신이 끔찍이 사랑했던 전 남
편을 죽이기 위해, 즉 파괴하기 위해 그를 찾아간 것입니다. 두 번째 지
미 앤더슨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서 자살을 택한 거죠. 마지막 세 번째 희생자인 샘 다라본트의 경우가
가장 비극적인데……. 그가 가장 사랑한 것은 자기 소유의 모노플레인
이었나 봅니다. 다라본트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폭파시키기 위
해 비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최면 상태라고 좀비가 되는 것은 아닙니
다. 지능과 지식은 그대로지요. 그는 아마 뉴욕 최고의 빌딩을 향해 돌
진하면 자연히 격추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 이후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데커드의 뇌리 속에는 오로지 하나
의 문장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핀셀."

  "예, 반장님."

  "잠시 나 혼자 있게 해 주겠나?"

  핀셀은 별다른 말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혼자 남겨진 데커드의 표정
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내 파괴대상은 라울이 아니었군. 그것은…….


  그 파괴에 성공하거나 대상이 소멸된 것을 자각했을 때에야 풀리는
듯합니다.


  에이프릴이 여기로 오고 있습니다.


  아빠, 아빠는 날 위해 죽을 수 있어?


  데커드는 조용히 핸드건을 꺼내들었다. 아직 총알은 남아 있었다. 장
전된 핸드건을 머리에 겨눈 채 방아쇠를 당기려던 데커드의 눈에서 눈
물이 주루륵 흘러내렸다. 아무 죄 없는 에이프릴. 혼자 남을 에이프릴.
자신의 아버지가 왜 죽어야 하는지 알지 못할 에이프릴.

  결국 데커드는 리스트폰을 작동시켰다.

  "영상기록."

  데커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에이프릴의 밝은 목소리가 리스트폰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영상기록이야, 아빠. 화면빨 잘 받게 얘기해야 돼?"







  epilogue.





  이만 얘기를 끝내야겠구나, 딸아. 이제 내가 왜 이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지 너도 알게 되었을 거다. 이렇게 아빠는 너에게 모든 걸 얘기하
지만 너는 내게 아무말 못하고 우린 헤어지는구나. 에이프릴. 네 허락
없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아빠를 용서해다오. 그리고 부디 건강하게 자
라다오.

  안녕. 에이프릴.

  말 못할만큼 사랑한다, 내 딸아. 내 목숨보다 더 너를 사랑한단다.




댓글 5
  • No Profile
    야아, 이거 좋아요+_+ 단편 란에 있던 건 못 읽어보고 지나쳤었는데.

    두 잡문의 평에 대해서는... 마아, 이 정도면 그럭저럭 만족입니다요. 후후, 얼른 속편인 지하도시 이야기를 써야겠군요. 다양한 원천에서 끌어온 소재들이 글 내부에서 적절히 어우러져 있는 지에 대해서도 평을 듣고 싶었는데 좀 아쉽네요;;

    크로노스의 미로에 관해서는... 이렇다할 교훈을 주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흠흠. 아무튼 보다 더 공부한 뒤에 손대 봐야 할 거 같아요. 언제나 좋은 평 감사드립니다.

  • No Profile
    화룡 06.12.31 04:05 댓글 수정 삭제
    한마디 단단히 들을 각오로 올린 글들인데 우수단편에 선정되어 약간 어리둥절합니다. 우선 호평에 대한 감사 말씀을 드리고, 문제점으로 지적하신 부분들에 대해서도 역시 감사합니다. '선택'은 저 자신은 좋아하는 글인데 매번 비슷한 평을 듣는군요. 혼자 머릿속에서 생각만 하고 좋아해서일까요. 한 가지 의문점에 대한 답변이라면, 도망친 데인이 돈을 받는 장면에서, 그 상황은 데인은 전장에서 도망쳤으나 그가 탈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시신도 확인할수가 없었으므로 일종의 행정오류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뭐... 글 안에서 납득시키지 못한 것을 지금에 와서 떠들어봐야 하등 소용이 없는 얘기겠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이야기 진행이 느리고 맥이 풀린다는 것도 몇번 지적받은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상황을 독자에게 전달시킬 것인가, 하는 게 너무 어렵네요. 앞으로도 정진하겠습니다. 그럼 한해를 마무리하고 즐거운 새 해 맞으시길.
  • No Profile
    mirror 06.12.31 06:59 댓글 수정 삭제
    화룡/ 연락 가능한 이메일 주소 쪽지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No Profile
    mirror 07.01.10 02:03 댓글 수정 삭제
    화룡/ 혹시 쪽지 보내셨었나요? 쪽지가 왔다는 메시지는 뜨는데 내용 확인이 안되네요. mirror 클릭하셔서 뜨는 메일 주소로 우편물 수령하실 주소, 받는 분 성함, 연락 가능한 전화번호(택배 발송시 필수입니다.)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No Profile
    화룡 07.01.10 03:20 댓글 수정 삭제
    mirror 클릭해도 쪽지 보내기, 회원정보 보기, 이름으로 검색 세 가지 메뉴밖에 안뜨네요. 뭐 대단할 것도 없는 이메일 주소니 그냥 여기에 공개하겠습니다.
    cksdlf0202@hotmail.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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