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카나리아

2006.04.28 21:5904.28

이 달에는 독자우수단편을 선정하기 시작한 이래 최초로 우수 단편이 세 편이나 선정되었습니다. 좋은 글들이 많아 읽으면서 즐거웠습니다.


나길글길님의 "안개 저편의 이상향“은 1인칭으로 소소한 이야기를 써내려간다고 해도 소설다울 수 있는데 소설이라기보다는 여행기처럼 보였습니다. 이상향을 찾아 떠나는 것이 현실적인 고뇌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책 몇 권 읽고 충동적이고 즉흥적으로 떠난 점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출발은 미미했더라도 여행지에서 현실적으로 만날 수 있는 무언가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면 감동을 줬을 텐데, 구루를 만나서 너무 쉽게 끝맺은 감이 있어서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은님의 "소네트"는 이야기에서 진짜 중점적으로 보여야 할 부분보다 쓸데없는 디테일, 예를 들어 카트리나 주교의 능력이라든가, 어린 여백작에게 너무 시선을 줘서 중심 사건이 뭉개졌습니다. 디테일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끌고 나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될 수도 있는데 소네트의 경우 시종일관 주변만 보여주다가 끝나 재미가 없었습니다.  

리안님의 "눈"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에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일단 한 사람만 등장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이야기의 소재와 초점이 모두 맞춰져 있다는 뜻인데, 독자가 감정 이입을 하거나 캐릭터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눈보라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 그리고 걸어가는 한 사람을 가지고 해야 했어야 할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아 제일 마지막 문장인 “그래서 그는 웃을 수 있었다.”에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김동석님의 “밤의 택시 드라이버”는 심심했습니다. 손님의 행동이 너무 갑작스러웠는데, 거기서 이야기를 좀 더 팠더라면 더 재밌지 않았을까 합니다.

salamanders님의 "화이트 실루엣"은 주제는 괜찮았지만 대사로 풀어버린 것이 흠이었습니다.

異衆燐님의 “침입”은 러브크래프트의 팬픽션으로 읽혔습니다. 문장을 비슷하게 쓰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만,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번역투였고, 팬픽션 이상으로 읽을 만한 요소가 없었던 점이 아쉬웠습니다.

미소짓는독사님의 “작은 문학도의 이야기 - 악어”는 인시아나, 엘렌 등 디테일들이 여전히 주렁주렁한 느낌이 없진 않았습니다만, 디테일을 다루는 솜씨가 좋아졌습니다.
전반적으로 약간 산만하고 주제도 좀 약하고, 마지막에 종족간의 전령이 되자고 서술해버린 게 아쉬웠습니다만, 캐릭터리티를 살려서 재미있게 쓰는 데에는 성공한 글이었습니다. 페츄코스가 사실 여자였다거나, 페츄코스가 자기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이 엘렌이 등장한 뒤에야 보여지는 것 등등 소소한 장면들이 재미있었습니다.

제로테제 님의 "소녀는 악마였습니다.“는 사건을 보여주지 않고 말로 해버려 별로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미루님의 "유리성의 아이"는 이미지만 있을 뿐 한 편의 완성된 소설로 보기엔 미흡했습니다.

dndi님의 “사랑의 기원”은 산만했습니다. 배경을 소설 속에서 이야기로 재미있게 풀어가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뭉그리님의 "그리움이 향하는 곳에..."는 엘리미, 닉 초포, 인간 과학자 식으로 시점이 바뀌는데 굉장히 산만했습니다. 세 개의 레이어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모든 이야기들이 재미있어야 했는데 별로 재미가 없어서 군더더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장황했던 엘리미 부족에 대한 이야기 뒤에 결말은 말 몇 마디로 휘리릭 설명하고 넘어갔습니다. 중심점을 확실하게 잡고 가지를 더 쳤어야 합니다.

박성우님의 “Becoming”은 처음 읽었을 때는 명사로 끝을 맺는 서술이 시놉시스나 영화 시나리오 같아서 읽기 불편한 면이 있었습니다.
실제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면 당시를 더 정밀하게 조사했어야 합니다. 1980년대에는 환경운동이 없었습니다. 달동네에 사는 가난한 남자가 정신과에 상담치료를 받으러 가는 것도 당시 시대와 맞지 않습니다. 당시는 이런 식의 상담치료가 보편적이지 않았고, 정신병원에 간다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던 때입니다. 병원비를 어떻게 감당했는지도 의문이고요.
하지만 군더더기가 없고, 현실과 환상을 연결하는 글솜씨, 실험적인 서술, 주제를 담고 있는 비유의 적절함과 주제의 무게감 등이 좋은 글이었습니다.
우수단편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김지원님의 "카나리아"는 인물들의 혼잣말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점이 산만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문장도 안정되었고, 어둡고 폐쇄적인 분위기도 좋았으며, 묘사도 실감났습니다. 우수 단편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roland님의 “언제나 함께이기를”은 누나에게 집착하게 되는 동기를 그다지 보여주지 않았고, 누나의 중요성에 비해 누나의 캐릭터리티가 너무 나중에 나왔습니다. 누나라는 캐릭터 자체가 전체적으로 희미했습니다. 문장도 군더더기가 많은 편이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시작과 끝, 미스터리와 반전이 적절히 다 있는 글이었습니다. 우수 단편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독자우수 단편에 선정되신 세 분께 축하 말씀드리며 메일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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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 ( s a n d m e e r @ h o t m a i l . c o m )



1. 재영

노래를 잊은 카나리아는 보름달 밤에 은으로 된 배에 띄워 보내면 잊어버린 노래를 기억해낸다.
농담이시겠지. 노래를 잊은 카나리아가 노래를 기억해낼 리 없다. 이미 언제부터인가 잘못되어 버린 게 분명하다.
그리고 나도 그렇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어딘가가 잘못되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처음부터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던 건 아니다. 나는 그냥 평범한 아이였다. 가족 역시 평범했다. 그저 어디에나 있는 중산층. 나는 학교에 다녔고, 동생도 있었다. 이웃집 아이들과 몰려다니며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하고 놀았고, 학교에서는 착실하게 공부도 하고 장난치다가 혼이 나기도 했다.
지극히 평범했다.
열 살이 조금 넘어서던가, 점점 내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은 것은 아니다. '시나브로'라는 말이 딱 맞을 것이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나에게는 뭔가가 빠져 있다. 그런데 그게 뭘까?
마치 노래를 잊은 카나리아처럼, 나에게 중요한 뭔가가 빠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뭔지 모르는 채로 하루하루 살았다. 심각하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저 잠이 오지 않는 밤에 혼자 앉아서 뭐가 문제인 걸까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폭발해 버렸다.
말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참을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거였다. 부모님이 동생에게 뭔가를 사 주셨던가? 대단한 건 아니었다. 우리 집 경제사정은 평범해서 사정이 좋으면 옷도 몇 벌씩 샀고 사정이 나쁠 때에는 다 함께 긴축재정에 들어갔다.
그 때는 형편이 괜찮을 때였나 보다. 동생이 뭔가 선물을 받았는데, 그 순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잡히는 물건을 죄다 집어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 바닥에 뒹굴고 머리를 쥐어뜯고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그저 참을 수가 없었다. 목이 쉴 때까지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고 화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동생도 부모님도 그저 경악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나도 대충 알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마치 자제력이라는 부분으로 통하는 필라멘트가 툭 끊어져버린 것처럼 나는 그야말로 '발광'했다.
요즘 같은 시절이라면 부모님은 나를 정신과에 데려갔으리라. 하지만 그때는 요즘 같은 시절이 아니었다. 정신과 같은 건 정말로 '미친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던 때였고, 그런 데라도 한 번 갔다오면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나는 줄 알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그저 조용히 동생에게 사 주었던 것과 똑같은 것을 나에게 사 주셨다. 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 책상 서랍 한구석에 넣어놓고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면 사람은 두려워지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억누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의식적으로 억누르지 않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의식적으로 억눌렀다. 부모님은 걱정스럽게 나를 쳐다보며 내가 원한다 싶은 것은 그저 무조건 사다 주기 시작하셨다. 동생 역시 내 눈치를 보며 내 앞에서는 새 물건을 자랑하지 않았다.
문제는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 같다. 나 자신조차도 몰랐다. 방 한구석에 앉아서 허공을 쳐다보며 하염없이 중얼거리곤 했었다. 잊어버려, 잊어버려, 잊어버려. 뭔지는 모르지만, 잊어버려야 했다. 나에게 뭔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잊어야 했다.
불행히도 그것은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독립을 했다. 부모님은 아마도 무사히 나를 내보낼 수 있어서 기쁘셨을 것이다. 서울로 올라와서 작은 회사에 들어갔고, 조그마한 전셋집을 얻었다. 그때는 시절이 좋던 때라서 집값이 비싸지 않았다. 물가도 지금처럼 비싸지 않았고. 뭐 월급은 적었지만.
나의 상태는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뭐랄까,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다. 내가 살살 누르면 튀어 오르려는 압력 역시 작지만, 내가 힘을 주어 꽉 누르면 튀어 오르려는 압력 역시 배로 높아지는 것이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탄산음료처럼 나는 그렇게 꽉 찬 상태였다. 참을 수가 없을 때에는 방에 앉아서 벽에 머리를 박으며 울었다. 자학이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웠다.
회사 생활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최하급 여직원이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고 해 봐야 커피 심부름이며 복사, 잔심부름 따위다. 그나마도 직원들이 기분 나쁠 때면 샌드백 대용품까지 되어 주어야 했다. 한 번 그렇게 주먹 대신 말로 난타를 당하고 나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지독하게 멀었다. 머릿속은 지끈거리고, 구역질이 나고 뭔가 부수고 망가뜨리고 싶은 충동이 목까지 치밀어 올라서 집에 돌아오면 그때부터 그 충동을 억누를 방법을 찾아야 했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해 본 적도 있다. 숨이 막혀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물 속에 잠겨 있다가 나오면 잠시 기분이 멍하고 괜찮아졌다. 목욕의 좋은 점은 눈물을 아무리 흘려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애용했지만, 수도세가 너무 많이 나오는 관계로 그만뒀다.
그 다음으로는 쓸모 없는 이불이나 옷 같은 것을 갈가리 찢어보았다. 가위를 들고 조각조각 자르거나, 얇은 천은 그냥 손으로 죽죽 찢었다. 천이 찢어지는 소리나 느낌은 때로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별로 오래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찢어버릴 옷이나 이불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것은 아주 가느다란 선으로 구분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Thin redline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었다. 생사를 가르는 가는 붉은 선이라는 의미라는데, 나는 그 제목을 떠올릴 때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떠올리게 된다. 선을 넘어가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넘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선을 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이런저런 방법 없이 가슴 속에 탄산가스 같은 것이 계속해서 쌓이다가, 어느 날 회사에서 폭발해 버렸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갖고 과장이 나에게 잔소리를 퍼부었을 때였다. 뒤에서는 다른 직원들이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나는 '확 돌아버렸다'. 과장의 얼굴에 서류철을 집어던지고 구둣발로 책상을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과장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는 명패를 창문으로 던지자 시원하게 유리가 박살났다. 직원들이 비명을 질렀고, 남자들이 나를 붙들었다. 나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구두굽이 부러졌고, 누군가의 옷자락이 찢어졌고, 구겨지고 찢어진 서류가 공중에 날렸다.
그렇게 나는 회사를 그만 두었다.

잘못된 게 뭘까? 모르겠다. 억누르고 참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다. 하지만 참을 수가 없는 날이 있다. 나름대로 정해놓은 좋고 나쁨의 경계를 그저 훌쩍 넘어버리고 싶은 날이 있다.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다가, 결국은 실패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면 왜 좀 더 쉽게 그것을 선택하지 못하는 걸까? 왜 그러고 나서 이렇게 후회하는 걸까? 모르겠다. 정말로 전혀 모르겠다.
집으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집에 가 봐야 부모님은 그저 걱정만 하실 것이다. 다른 회사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으리라. 전에 다니던 직장에 연락하는 순간 나는 정신병자,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있을 테니까.
나는 정신병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 부적응자도 아니라고 생각해. 고등학교까지 무사히 졸업했다는 건 분명히 괜찮다는 거잖아. 그저 가끔, 아주 가끔 선을 넘어버리는 것뿐이다. 좀 더 열심히 억누르면, 좀 더 훈련을 하면 나아질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살 수 없으면? 아무 데로도 갈 수 없겠지.

먹고살기는 해야겠기에 나는 우연히 지나가다가 발견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어떤 면에서 회사 생활보다도 더 지독하다. 텃세를 부리는 엉뚱한 어린애들, 아르바이트생을 예비 도둑 취급하는 주인, 수작을 걸려는 남자 손님들. 그래도 편한 게 있다면 대체로 혼자 일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모든 사람들과 무조건 어울려야 하는 회사보다 편하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89년의 토요일이었다. 날씨는 쌀쌀했다. 내 기분은 그냥 보통 때와 다름없었다. 어딘가 잘못되어 있었다고 해도 최소한 나는 느끼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는 보통의 하루였다. 그렇게 보통의 하루가 될 수도 있었다.
그 여자가 들어올 때까지는.
날씬한 몸매에 맵시 있게 미니스커트를 입은 그 여자는 곧장 음료수 냉장고로 가더니 죽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과자 코너를 지나치며 다시 한 번 죽 훑어보고, 마지막으로 잡지 가판대를 한 번 쳐다본 다음 나를 보았다. 그리고 새빨간 입술로 생긋 웃었다. 그 다음 가게를 나갔다.
왜였을까? 그 미소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하지만 나는 가게를 비워놓고 그 여자를 따라나갔다.
"이봐요!"
여자는 귀찮다는 듯 뒤돌아보았다. 방금 전의 미소는 사라지고, 그저 짜증이 어린 눈길뿐이다.
"뭐예요? 바빠요."
"아니, 잠깐만요."
잠깐만. 그래서 어쩌자고? 나는 내가 왜 그 여자를 붙잡는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웃음의 의미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왜 웃은 거지? 거기 서 있는 내가 뭔가 이상했던 건가? 아니면 그저 나와 자신의 처지가 너무 달라서? 그것도 아니면...... 머리 속은 이미 뒤죽박죽이었다. 제대로 된 생각이라는 게 없었던 것 같다.
"왜요? 나 아무 것도 안 샀어요."
"아는데, 그게 아니라......"
"그럼 뭐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여자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하얀 얼굴, 섬세하게 아이라인을 그린 새카만 눈, 아까 나의 머리 속을 텅 비게 만들었던 빨간 입술.
나는 어쩌면 매혹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 여자에게. 하지만 그걸 알아낼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여자는 마치 내가 귀찮고 지저분한 벌레라도 되는 양 팔을 홱 내저으며 돌아섰다.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두 번?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의 잘 다듬어진 머리채를 휘어잡고서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나는 그저 뼈와 뼈가 부딪히는 감각만을 느꼈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마치 나처럼. 예전의 나처럼. 손톱으로 나를 할퀴었고, 소리 높여 도와 달라고 외쳤고, 하이힐로 나를 걷어찼다. 나는 아픈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그녀를 때렸다. 여자의 코에서 피가 흘렀고, 입술이 찢어졌다.
"왜 이러는 거야, 나한테!"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다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내 손에는 여자의 머리카락 몇 가닥만이 남았다. 잠시 그것을 내려다 본 다음 나는 여자를 쫓아갔다. 그러다가 바닥에 있는 어린애 머리만한 돌을 보았다. 여자는 뛰어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여자의 고함소리에 사람들이 올 것이다. 나는 돌을 주워 여자를 향해 던졌다.
흡사 요즘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돌은 여자의 머리에 정확하게 맞았다. 여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게 보였으나 다시 일어나지는 않는다. 나는 비척비척 그 쪽으로 걸어가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흐트러진 옷, 헝클어진 머리, 피. 옷에는 무늬처럼 점점이 피가 얼룩져 있다. 검붉은 얼룩이 묻은 돌은 옆에 떨어져 있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돌을 다시 집어들었다. 옆으로 돌아간 여자의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입에서도 피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돌을 들어 여자의 머리를 다시 한 번 내리쳤다. 비명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저 뼈와 돌이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입에서 좀 더 많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돌을 내려놓고 나는 손톱으로 여자의 피투성이 뺨을 긁어보았다. 살점이 손톱 밑에 박혀 긁혀 나오도록. 부드러운 피부에 마치 그림처럼 손톱 자국이 생긴다. 허옇게 뒤집힌 눈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흡사 눈물처럼.
나는 계속해서 여자의 얼굴을 할퀴었다. 손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 여자는 더 이상 꿈틀거리지 않았다. 뺨에 제대로 된 피부가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나는 손톱으로 피부를 쥐어뜯었고, 그 다음에는 머리카락을 잡아 뽑기 시작했다. 하나씩, 둘씩, 한꺼번에 잡아당기자 여자의 머리가 번쩍 들려 올라온다. 보도블록에 부딪혀 검게 물든 뺨과 피부를 뜯어놓아 피투성이가 된 뺨. 마치 반으로 나눠 각기 다른 색을 칠해놓은 가면처럼 보인다.
여자의 머리카락을 놓고 나는 내 손을 보았다. 양손 전부 손톱 밑에까지 피와 살점이 더덕더덕 붙어 있다. 여자의 긴 머리카락은 피에 젖어 뱀처럼 팔에 감겨들었다. 갑자기 소름이 끼쳐서 나는 그것을 털어 내고 벌떡 일어나서 온몸을 털어 내기 시작했다. 피투성이 손으로 뭐가 털릴 리 만무하다. 편의점 제복이 피로 얼룩지고, 이미 말라붙은 손은 닦이지 않는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여자를 보았다. 시체. 돌에 맞아 깨진 머리, 가죽조차 남지 않은 뺨.
구역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담벼락에 기대 먹은 것을 죄다 토했다.
나는 미쳤다. 미치지 않았다고, 이상한 게 아니라고 수많은 나날을 되뇌었건만 소용없었다. 나는 미친 거다. 한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을 죽인다면 그건 미친 거다. 죽이는 걸로도 모자라 그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고 살가죽을 찢는다면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거다.
어떻게 된 걸까?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잘못되어야 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말했듯이 나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자란 평범한 사람이었다. 원래 정신병자라는 건 뭔가 가족에게 문제가 있거나 그도 아니라면 성장배경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왜 이렇게 된 거지? 누가 제발 가르쳐 줘!

담벼락에 기대앉아 나는 그저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더 이상 토할 것도 없는데 구역질은 계속해서 올라왔다. 피는 사방에 묻어 있었다. 손, 옷, 얼굴, 머리까지.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다. 시체는 그 자리에 엎드려 하얗게 뒤집힌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갈 곳이 없다.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경찰이 오면 이대로 끌려가겠지. 나는 왜 이렇게 된 걸까? 뭐가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문제가 있었던 걸까?
"어디서 피냄새가 난다 했어."
나는 시선을 돌렸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을까? 왜 경찰은 오지 않는 걸까? 사람들은 다 어느 길을 지나가고 있는 걸까? 여기엔 왜 아무도 오지 않지? 경찰은 내가 미쳤다고 말할까? 나는 진짜 미친 걸까?
선을 넘는다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다. 돌아갈 수가 없다.
"왜 그러고 앉아 있지?"
남자는 내 앞으로 다가와서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나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왜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지 않는 걸까?
"네가 그런 거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경찰인지도 모른다. 이런 장면을 너무 많이 봐서 면역이 된 건지도 몰라.
"이제 난 어떻게 돼요?"
나는 느릿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너무나 깨끗하고 명료하게 나와서 놀라울 정도였다.
"글쎄. 어떻게 되고 싶지?"
"미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눈을 감았다. 미치고 싶지 않아.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살고 싶어. 이렇게 끝나고 싶지는 않아. 정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뭔가 문제인지 알고 싶어. 미지근한 눈물이 뺨을 적셨다.
"미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미 미쳤는지도 몰라.
"네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거야?"
차가운 손가락이 뺨에 닿았다. 나는 눈을 떴다. 남자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네가 미쳤다고 생각하니?"
"난 사람을 죽였어요."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미쳤다는 증거는 아니야."
"죽이고 나서 시체를 할퀴고 살점을 뜯어냈다구요."
나는 양손을 내밀었다. 내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평온했다. 남자는 피가 말라붙은 내 손을 잠깐 본 다음 입술 끄트머리를 비틀었다. 그것은 마치 미소처럼 보였다.
"그렇게 하면 미친 거야?"
"모르겠어요."
모르겠어. 나는 미친 걸까? 이 남자는 왜 묻는 걸까? 가늘고 붉은 선. 넘어가기는 쉽지만, 돌아오기는 쉽지 않다.
"살고 싶어."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채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내리듯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어."
어디로? 모르겠다. 나는 처음부터 내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인간으로서 넌 모든 걸 잃어버렸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나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얼마나 쉽게 죽는 동물인지 보았고, 직접 겪었다. 나는 이미 선을 넘은 곳에 서 있다. 돌은 사방에 널려있고, 사람들도 사방에 널려있다. 손톱도 건재하다.
돌아갈 수 없어.
"하지만 다시 시작할 수는 있지."
남자의 묘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차가운 입술이 뺨에 닿았다. 그리고 목에 닿았다. 따끔한 침처럼 뭔가가 살갗을 찌른다.

노래를 잊은 카나리아는 영영 기억해내지 못한다. 애당초 어딘가가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2. 동규

노래를 잊은 카나리아는 회초리로 때려야 할까?
때린다고 해서 기억해낼 것 같으면 애당초 잊어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잘못된 것은 그 자체로 즐기는 편이 더 좋다.
그래, 나는 비뚤어졌다.

지난 150년은 격동기였다. 나는 문호를 열지 않으려던 조선이 정복당하는 것을 보았고, 필사적으로 왕정을 지키려던 대한제국이 처절하게 몰락하는 것을 보았으며, 6·25 전쟁에 참전했다. 세상은 눈 깜박할 사이에 변한다. 이제는 과거의 모습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내가 뛰어 놀았던 땅은 아스팔트로 뒤덮이고 고층 빌딩이 올라갔다. 전쟁으로 황폐해졌던 도시에는 매연을 뿜어내는 자동차들이 지나간다. 밤의 도시에는 추락한 별처럼 불빛이 깜박인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볼 것이다.
나는 뱀파이어다.

처음부터 뱀파이어였을 리는 없다. 당연하다. 그렇게 태어나는 존재 따위는 없다. 나는 그저 평범한 아이였다. 댕기를 땋고서 아이들과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고, 밭에서 과일을 훔치다가 들켜서 혼이 난 적도 있다. 그렇게 살았다. 뱀파이어 따위는 들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었다.
기억하는 한, 조선은 언제나 전쟁 중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평범하게 살던 우리 가족에게 뭔가 피해가 왔던 것은 아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항구에는 외국배들이 들어왔다가 나갔고, 지금은 서울이라고 부르는 이 땅에서도 심심찮게 봉기며 싸움이 일어났다.
그런 와중에 나는 평범하게 혼인을 했다. 집사람은 아이를 낳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병원에라도 가서 검사를 해보겠지만, 당시에는 그저 여자의 잘못으로 넘길 뿐이었다. 그녀는 울었고, 나는 술을 마셨다. 꽤 많이 마셨다. 농사지어 곡식이 나면 돈 있고 힘 있는 작자들이 거둬갔고, 나는 나머지를 갖다 팔고서 나오는 돈으로 술을 샀다. 집사람은 5년 만에 도망쳤다.
지금 이렇게 말하면 우습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요즘 TV에 나오는 사극처럼 허여멀건 옷을 입고 허리가 휠 때까지 농사일을 하는 그런 때였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때를 떠올린다. 지독한 햇살. 뱀파이어가 되어서 가장 기쁜 것 중 하나는 그 빌어먹을 햇살을 다시는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어느 날이었던가,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을 만났다.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란 작자들이었다. 서울 시내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녔다. 사람이 매달려 있는 손바닥만한 나무 막대기를 내놓고는 신이니 믿으라고 하는 놈들. 도대체 그런 나무 막대기에 매달린 작자를 믿어서 뭐가 나오느냔 말이다. 도망친 집사람은 그런 것들을 믿었다. 그 괴상한 막대기를 옷장 한구석에 고이고이 모셔놓고는 내가 안 본다 싶을 때면 꺼내놓고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지금도 나는 교회 꼭대기에 매달린 벌건 네온사인 십자가를 보면 코웃음만 나온다. 죽은 신 따위는 믿어봤자 아무 소용없다. 차라리 살아있는 나 자신을 믿어라. 그 편이 낫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게 바로 진리다.
취해서 그 파란 눈의 외국인들을 보고 뭐라고 욕을 했던 것 같다. 그들이 내 말의 절반이나 알아들었을 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까만 색에 목에는 하얀 테두리가 있는 옷을 입고 있던 그들은 나를 붙잡고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이미 한 대 맞았을 때부터 나는 정신이라고는 없었다. 아니면 너무 취해 있던 탓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 중 하나가 바닥에서 뒹구는 나를 잡아 일으킨 다음 빤히 보았다. 그리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그때는 알아듣지 못했고,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목을 꿰뚫던 날카로운 이, 빙글빙글 도는 세상, 새하얀 보름달, 입에 닿던 짜고 씁쓸한 액체.
그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여자와의 잠자리보다도 진하고 뜨거운 쾌감. 지금도 피를 빨 때면 온몸이 저리는 감각을 맛본다. 100년이 넘게 지나도 그것만은 똑같다.

나를 뱀파이어로 만들었던 것은 초기에 선교사인 척 이 곳에 들어온 선구자들이었다. 미지의 땅을 탐험하고 싶어했던 개척자라고 부르도록 하자. 어쨌든 신부의 옷을 껴입고는 뻔뻔하게도 피를 빨았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나무 막대기에 매달린 신이 천벌을 내릴 만도 하지 않은가? 그래봤자 죽어야 천벌도 내릴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그들의 일원이 되었다. 어차피 나는 처음부터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삶을 산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산다는 게 무엇일까? 하루하루 땅을 갈고, 농사일이 끝나면 죽도록 힘들었던 것을 잊기 위해 술을 퍼마시는 그런 것도 사는 것에 속하나?
여전히 인간들은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산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그것이 삶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설령 태양을 볼 수 없고 음식 대신 피를 빨아야 하는 뱀파이어라고 해도, 최소한 그때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다.
뱀파이어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그 프랑스인 선교사들과 함께 이 나라를 떠나 유럽을 돌아다녔다. 유럽! 그 당시에 유럽을 다녀왔던 한국인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나는 그 중 하나였다, 역사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넓은 세상을 보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었다. 그때의 흥분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흥분했었다는 사실만은 뚜렷하게 생각난다. 그 이래로 그것만큼 흥분했던 일은 내 피로 뱀파이어를 만든 일, 그거 하나뿐이다.
나는 세계대전을 구경했다. 그리고 이곳으로 돌아와 6·25에 참전했다. 왜 참전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몇 명 되지 않는 한국인 뱀파이어로서 나름대로 사명을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때는 나도 아직 젊었으니까. 동료들은 제각기 갈라져 마음 내키는 편을 들었다. 물론 우리끼리는 싸우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것이 숭고한 사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피에 취한 광기였을 뿐이다. 시체가 널리고 피가 사방에서 튀었으니 제정신으로 있는 뱀파이어가 더 이상한 거겠지. 피의 향연, 그게 우리가 했던 일이다.
그때의 전우들은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전쟁은 인간에게든 뱀파이어에게든 영향을 미친다.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고, 삶이 바뀐다. 몇몇은 전쟁이 끝난 후 자살했다. 몇몇은 이 나라를 떠났다. 그리고 또 다른 몇몇은 나처럼 여기 남아서 계속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바뀌었다. 나도 계속해서 변한다. 처음에는 그저 많은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 기뻐서 끝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다 지치자 동료가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동반자, 함께 즐길 사람. 도망쳐 버린 마누라와는 다른, 좀 더 나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그렇게 고른 것이 J였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나와는 달리 교육받은 지적인 사람이었다. 엘리트, 특권층. 지금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나는 세심하게 J를 골랐고, 공을 들여 유혹했으며 결국 나의 곁으로 끌어들였다.

한 가지 물건에 싫증이 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설령 처음에는 나에게 딱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라도, 결국은 좀 더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나의 눈에도 처음에는 J만 보였지만, 나날이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
싫증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한 번 싫은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 진행은 더더욱 빨라진다. 처음에는 그렇게 예쁘고 마음에 들던 그녀가 어째서 싫어지게 된 건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이유라는 게 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여튼 처음에는 못 보면 죽을 것처럼 붙어 다니다가, 언젠가부터 그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J는 처음에는 화를 냈고, 그 다음에는 태연한 듯 외면하다가 마지막에는 울면서 매달렸다. 울면서 매달리면 싫증은 짜증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나의 손버릇은 인간일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구태여 함께 즐길 사람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즐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즐겁게 해 줄 사람이다. 그저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은 이제 피곤하다. 옆에 두고 언제나 즐겁게 구경할 장난감이 필요하다.
물론 J를 죽이는 것은 즐거웠다. 솔직히 뱀파이어는 인간보다 맷집이 좋고, 그래서 때리는 것이 훨씬 즐겁다. 단단한 살, 뼈가 우그러지는 느낌, 축축하게 흐르는 피의 검붉은 색깔과 향기. 거기다가 인간보다 훨씬 오래 반항한다. 피부를 할퀴는 날카로운 손톱, 살점이 뜯겨나가는 그 감각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느낌이다. 아픔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살아있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지? 취할 듯한 피의 향기, 달콤한 맛,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내 손안에서 죽어 가는 새 한 마리.
그녀의 죽음은 간단하게 처리되었다. 유신 시절에는 뱀파이어들도 서로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자기 사느라 바쁜 법이다. 지금이라고 해서 별로 다를 것도 없지. 그녀는 죽었고 그걸로 끝이다. 내가 죽어도 그걸로 끝이겠지. 그런 거다.
그렇게 다시 십여 년을 보내다가, 그녀를 발견했다.

피냄새에 끌려서 가다 보니 그녀가 있었다. 손에, 얼굴에, 온몸에 피를 묻히고서 시체의 앞에 앉아 있었다. 시체는 오랜만에 보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피가 묻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몽롱했다. 얼굴에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이 어려있다.
"지워지지 않아."
"이미 말랐으니까."
피는 금방 굳는다. 문질러도 문질러도 그 흔적은 마치 피부에 스며든 것처럼 오래도록 남는다. 나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네가 그런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웃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멍한 웃음이다.
"내가 그랬어."
"왜?"
"몰라. 미쳤나 봐."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 어떻게 돼?"
"글쎄."
인간의 법이 어떤 형량을 내릴지는 뻔한 일이다. 시체의 모양새를 보건대 쉽게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정신병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녀는 나의 마음을 끌었다. 자그마한 얼굴은 평범했지만 그 기묘한 표정 때문에 마치 아기천사처럼 보였다. 더러운 것이라고는 모르는 천사. 나무 막대기에 매달린 신을 찬양하는 어린 영혼.
"미치고 싶지 않아."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고 싶어."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성과 광기, 현실과 꿈의 경계 사이에서 그녀는 휘청거리고 있다. 나는 그 느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결국 어떻게 되는지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을 수없이 많이 보았다.
하지만 바로 내 옆에 두고 본 적은 없다. 이것은 새로운 기회였다. 나에게는 새로운 장난감이 필요하고, 그녀는 내 눈앞에 떨어진 선물이었다.
"돌아가고 싶어."
"넌 더 이상 인간으로는 살 수 없어. 그런 짓을 하는 건 이미 인간이 아니야."
물론 인간도 그런 짓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다독여주는 건 재미가 없지 않은가. 나는 별로 착한 사람이 아니다.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나의 말은 그녀의 귓가에서 맴돌다가 그냥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하지만 다시 시작할 수는 있지."
나는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말라붙은 피가 혀에서 달콤하게 녹아든다. 천천히 입술을 내려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불행히도 세상일은 내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그녀는 상당히 가능성 있는 장난감이었지만, 쉽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게는 기묘하게 스스로를 얽매고 있는 이성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성이라기보다는 그런 가면을 뒤집어쓴 강박관념에 가까웠다.
"재영아."
하루종일 그녀는 집안 한구석에 틀어박혀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소일한다. 작고 마른 몸은 나날이 더욱 작아지는 것 같고, 얼굴은 햇빛을 보지 못해서인지 석고상처럼 하얗다. 마치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피를 먹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 번씩 '돌아버리면' 그녀는 누구보다도 잔혹한 뱀파이어가 된다.
먹기 위해 사냥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재미로 사냥을 하는 것은 잔인하다. 대체로 그렇게들 말한다. 그렇다면 가능한 한 오래 재미를 즐기다가 마침내 먹어치우는 것은 잔인한 걸까 아닐까? 고의는 아니다. 그저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그녀였다.
"네."
구석에 앉아서 나에게는 별로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 책을 읽고 있던 그녀가 일어났다.
"나가자."
"어디요?"
"글쎄다. 어디로 갈까?"
그녀는 머뭇거렸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서 말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것은 지난 십 년 간 매일같이 그녀가 해 온 일이다. 글쎄다, 아직은 짜증이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게 뭔지 알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선을 넘지 않고서 피를 빨 수 있는 곳.
세상에 그런 곳 따위는 없다. 문제는 피를 빠는 것에 있지, 장소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 말을 왜 해 주겠는가? 아니, 해 준다고 해도 그녀는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물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푸라기를 꽉 잡으면 살 거라고 믿고 있다. 그게 재미있는 것이다.
"그냥 아무데나요."
저것도 십 년 간 똑같은 대답이다. 왜 아직까지 재미있는 걸까 생각해 봤는데, 그것은 아마 내가 좀 둔한 편이라서 그런 것 같다.
팔을 내밀자 그녀는 얌전히 팔짱을 끼고 따라나왔다. 밤하늘은 새카맣고, 별이 몇 개 반짝인다. 겨울 하늘에는 별이 많다. 바람은 차갑게 피부를 스친다. 그녀는 옆에서 말없이 걸었다.
"뭐 읽고 있었어?"
"1973년의 핀볼이요."
"1973년이라. 별로 기억나는 게 없는 해로군."
"살아온 모든 해를 기억해요?"
"한 가지의 특정적인 일 정도는 기억하지.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해도 있어. 아무 일 없이 지나가면."
마치 평범한 사람들처럼 우리들은 이야기를 나눈다. 1973년, 솔직히 기억나는 게 없지는 않다. 그 해는 내가 J와 지독하게 싸웠던 해였다.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녀를 죽였다.
기억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1966년은 6·25 전우였던 P가 미국으로 떠난 해다. 1983년은 광주 출신의 H가 몸에 석유를 뿌리고 성냥을 그었던 해다. 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랬다는 사실만 기억난다. 비명을 지르던 그의 목소리도 기억나고.
죽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불에 타 죽는 것만큼 나쁜 방법도 없다.
"난 기억나는 해가 별로 없어요."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일정 이상으로 높아지는 때는 이성을 잃었을 때뿐이다.
"기억하려고 하면 그냥 흐릿하기만 해. 생각나는 일들도 언제 일어난 건지는 기억 안 나요."
"구태여 기억할 필요 없어."
"지나간 세월이 그저 안개 속에 싸인 것처럼 몽롱하기만 하면 얼마나 비참한지 알아요? 하는 일 없이 시간을 흘려 보내는 기분이야."
그녀는 앞만 쳐다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사실로 그녀는 하는 일이 없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게 그녀의 바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조용하고 무사태평한 삶.
"그게 싫어?"
그녀의 눈이 슬쩍 나를 향했다가 다시 앞을 향했다.
"모르겠어요."
그녀의 손가락이 나의 코트자락을 살짝 쥐었다가 다시 놓았다. 마치 무언가가 하고 싶은 것처럼 그녀는 안달하고 있다. 쫓기는 것처럼 목덜미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럴 때는 무어라도 해야 한다. 그게 아무리 쓸데없는 일일지라도 해야만 한다. 한밤에 가면을 쓰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어린아이들에게 겁을 주는 일까지도 나는 해 본 적이 있다. 쓸모는 없지만, 재미는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다그치면 일을 망칠 뿐이다. 나는 그저 그녀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 주었다. 하고 싶다면 뭐든지 해 봐. 나는 한 걸음 뒤에 서서 구경해 줄 테니까.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겨울 바람을 맞으며 사람들은 깔깔댄다. 길거리의 가게들은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저기 써 있는 글자들을 보니 아마도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모양이다. 아니, 내일이었나? 나의 시간 감각도 별로 좋은 편은 못 되는 모양이다.
"선물 사 줄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길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사냥감을 찾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주위에 있는 돌들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이다. 관심도 없고 흥미도 없다. 그저 지나가는 이방인들일 뿐.
지나가던 여자가 날카롭게 웃었다. 안 그래도 가볍게 튀어 오르고 있던 공기들이 주위에서 방울처럼 흔들린다. 흠칫 하며 그녀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눈가에 살짝 주름이 잡힌다.
"어우, 야! 왜 그래?"
여자는 옆에서 낄낄대고 있는 남자를 주먹으로 때렸다. 남자가 몇 걸음 뛰어 도망치고, 여자는 웃으며 그 뒤를 따라가다가 우리를 지나 사람들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끝. 하지만 내 팔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는 힘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뭔가가 그녀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다.
마치 예민한 스위치가 달린 전구처럼 그녀는 무언가에 반응한다.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위치가 켜지면 그때부터 그녀는 안달하기 시작했다. 나의 팔을 잡고 있는 손가락은 연신 펴졌다 오므라지며 계속해서 옷자락을 구겨놓았다. 비싼 트렌치 코트가 구겨지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가 무언가 일을 벌이기 직전이라는 생각에 나는 간신히 참았다.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진다. 주위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가 시끄러운 것처럼 그녀는 머리를 가끔 흔들었다. 팔을 움켜쥔 손가락이 옷을 사이에 두고 팔뚝으로 파고든다. 날카로운 손톱이 살갗을 찔렀다. 오, 이런. 이 아가씨는 점점 더 달아오르고 있다.
갑자기 그녀가 멈춰 섰다. 나는 하마터면 그녀의 등에 부딪힐 뻔했다. 그녀는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물 사 줘요."
"뭐가 좋아?"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은 한 남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우아하게 빗어 넘긴 보수적인 머리모양에 회색 양복을 입고 갈색의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주위에는 한 잔 걸친 듯 다른 남자들이 서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외모 때문인지도 모른다. 매끈하게 잘 생긴 얼굴.
"정말로 저걸 갖고 싶어?"
그녀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기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로?"
"정말이라니까!"
그녀가 마침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천이 찢어지는 듯한 그 새된 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 몇 명이 인상을 찌푸리고 돌아보았다. 나는 웃었다.
"네가 갖고 싶다면 줘야지."
나는 그녀의 손을 치운 다음 남자에게로 곧장 걸어갔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나는 남자의 배를 가볍게 쳤다. 남자는 억 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앞으로 몸을 구부렸다. 주위의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순간 나는 그를 어깨에 걸머지고 쏜살같이 움직였다. 뒤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공기를 흔든다.

노래를 잊은 카나리아는 고치면 제대로 작동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망가진 채로가 좋다.
그래, 나는 비뚤어졌다.

3. 수민

노래를 잊은 카나리아는 은으로 된 배를 타고 영영 떠나가 버렸다.
떠난 것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잃은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만큼 나는 나이가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눈물이 나오지 않을 만큼 나이가 들지 않았다는 게 불행이라면 불행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특별한 건 아무 것도 없다. 평범한 집안에서 평범하게 자랐고, 평범한 성적으로 적당한 대학에 들어갔으며, 졸업한 다음에는 평범한 회사에 들어갔다. 두어 번 회사를 옮긴 다음 30대 초반에 꽤 큰 컨설팅 회사에 들어가서 적당히 잘 나가는 중이었다.
나의 38년 인생이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된다는 것은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범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길게 말하자면 한없이 길게 말할 수 있지만 줄이고 나면 할 말이 없다. 요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그게 요점이다.
엄청나게 착하게 살았던 것은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 그렇게 남에게 해를 입히고 살았던 것도 아니다. 나를 죽이고 싶어할 만큼 원한을 가진 사람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 관계는 좀 나빴다.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상호 동의 하에 이루어진 일이지, 나 혼자 내 멋대로 한 건 아니다. 대학 시절부터 수많은 여자들을 만났고, 대부분은 좋게 헤어졌다. 여자들이란 처음에는 얼굴을 보고 접근하지만 나중에는 자신과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고 칼같이 잘라낸다. 무서운 존재이다. 어쨌든 나에게 매달렸던 여자는 아무도 없었고 나 역시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좋아한 여자는 없다. 그래서 이 나이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평범하고 싶었다면 최소한 3년 전에는 결혼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은 충분히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셨고, 누나도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조카도 둘이나 있어서 설날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때에는 이 녀석들의 선물을 챙겨주라는 협박 아닌 협박이 담긴 전화도 꼬박꼬박 받는다. 어디를 보나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이다.
그런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혼이라는 게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좋은 여자를 만나면 결혼해야지 하고 생각은 했지만, 그럴 만큼 좋은 여자를 못 만났던 건지 아니면 사실은 별로 생각이 없었던 건지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어차피 상관도 없게 되었다. 더 이상 나는 결혼할 수 있는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회식 자리였다. 회사에서 주최한 연말 파티라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참석했고 가족들도 다 데려왔다. 혼자 온 건 나뿐이었다. 나이가 서른 다섯을 넘어가면 똑같이 독신인 친구를 만나기가 상당히 힘들다. 좋든 싫든 나는 이미 그들의 세상에서 유리되어 있었다.
어쨌든 회식은 유쾌했다. 나는 언제나 분위기 메이커였고, 그 날 역시 그랬다. 연말 보너스도 상당하게 나와서 사람들은 전부 즐거워했고, 온 세상이 다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자정쯤 회식 자리를 파하고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달아오른 얼굴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다.
가족을 동반한 사람들을 위해서 택시를 잡아주고 있을 때, 그 일이 일어났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지금도 그저 추측만 할 따름이다.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다음 순간 나는 숨도 쉴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몸을 구부렸다. 눈앞이 하얗게 보였다. 나이 마흔도 되지 않았는데 심장마비를 일으킨 걸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까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어두컴컴한 골목 구석에서 남자는 나를 마치 짐짝처럼 바닥에 내동댕이친 다음 내려다보았다. 노란 가로등 불빛이 머리 위에서 내리비쳐 남자의 얼굴은 검은 그림자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려고 비틀대다가 결국은 앉은자리에서 방금 전까지 먹고 마셨던 술과 음식들을 전부 토해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방금 전까지는 분명히 흥겹고 즐거운 분위기에 있었는데. 마치 누군가가 눈앞에 드리워져 있던 커튼을 홱 걷어버린 느낌이었다. 커튼 위에 그려져 있던 만화동산과는 달리, 커튼을 걷어버린 자리에는 차갑고 삭막한 회색 벽만이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커튼 위의 조잡한 그림에 열광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인생 자체가 때로 그렇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쉴 틈 없이 달려왔는데 어느 순간 멈춰서 돌아보면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좇고 있던 목표는 그저 어여쁜 허상이었을 뿐이고, 나는 사막 위를 끝없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종종 그런 꿈을 꾸다가 한밤중에 깨곤 했다.
왜일까? 나는 지금까지 딱히 실패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런 것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밑바닥으로 떨어지면 어디까지 떨어지는지 그런 건 모른다. 경제적으로 눈물겹게 어려웠던 적도 없었고, 사는 게 죽도록 힘들었던 적도 없었다. 나는 언제나 즐겁게 살아왔다. 그런데 마치 피 속에 흐르고 있는 기억처럼 나의 꿈속에는 반복해서 사막의 신기루 같은 인생이 떠다녔다.
그리고 그 신기루는 사실로 판명되었다. 그 꿈들은 전부 예지몽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그 날 밤 신기루처럼 산산조각 났다.
"이거 맞지?"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들고 남자를 보았다. 남자의 뒤로 여자가 한 명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 역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최소한 보이긴 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제더라, 대학을 졸업한 다음 이 회사 저 회사를 다니던 무렵에 그녀를 본 적이 있다.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긴 했지만 이야기도 거의 해 본 적 없는 사이였다. 나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신입이었고,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래로 거기서 일을 했으니 나보다 한참 고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녀의 업무는 잡다한 것들이었다. 커피 심부름, 서류 복사, 그 외 이것저것.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능력이 부족하면 발로 뛰어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사무실에서 비명을 지르며 화를 냈다. 화를 냈다기보다는 히스테리를 부렸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온갖 집기들을 사방에 내던지고,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을 때렸다. 사무실의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고, 과장은 경비원을 불러서 그녀를 끌어냈다. 병원에 갔다고 들은 것 같다. 어쨌든 그 이래로 그녀는 다시는 회사로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2년 간 그 곳에서 근무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녀를 잊어버렸다.
바로 그녀가 거기 서 있었다. 그 무렵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세월이 그녀에게는 관대했던 걸까, 아니면 내 눈에 문제가 있는 걸까? 어쩌면 가로등이 너무 어두워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라면 그냥 닮은 사람인지도 모르지.
"갖게 해 줘요."
"물론 그렇게 해 줄게."
무엇을? 나? 왜?
"이리 와 봐."
남자가 손짓을 하자 그녀가 다가왔다.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머리부터 비추기 시작해서 마침내 발끝까지 닿았다. 환한 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분명히 내가 기억하는 바로 그 얼굴이었다.
꿈이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나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손끝이 나의 뺨을 스쳤다.
"살려 줘."
그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이름을 말하면 어쩌면 내 말을 들어줄지 모른다. 그 생각에 나는 미친 듯이 머리 속을 뒤졌지만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전혀. 자음 하나도.
"당신을 알아."
그녀의 손톱이 뺨을 살짝 긁었다. 피부가 얼얼한 느낌이 들고, 그녀가 손끝을 입으로 가져가 빨았다. 뺨이 간질간질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 부분을 닦았다. 끈적거리는 것은 피였다.
"그 녀석 알아?"
서 있던 남자가 팔짱을 꼈다. 그림자 속에서도 그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는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왠지 모르지만 남자는 그 사실이 대단히 불쾌한 것 같았다.
"네."
"어떻게?"
"옛날에 언젠가. 언젠가."
그녀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몸을 떨었다. 그 미소는 아무 생각도 없는 백치 같아 보였다. 그녀는 양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는 약간 기울였다. 가로등 불빛 때문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린다.
"한 번도 웃지 않았어."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손이 아프게 턱을 죈다. 부서질 것처럼 아파서 나는 비명을 질렀다. 뒤에서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미지근한 혀가 뺨을 핥는다. 천천히 내려온 손 하나가 목을 잡았다. 세게. 숨을 쉴 수가 없고 금세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죽음은 너무나 가까이 있다. 너무나.
"웃지 않았어."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밤의 세계는 낯설고 지나치게 고요했다. 한적한 밤거리를 걷는 것은 나의 새로운 취미가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나에게 이상한 일을 하지 않았다. 백치 같은 미소도 짓지 않았다. 오로지 그것은 그 날 밤뿐이었다. 동규는 그녀에게 실망한 듯 가끔 짜증을 냈다.
"뭐가 문제야? 지푸라기를 잡고 있으면 뭔가 달라질 것 같아? 차라리 놓아버리는 편이 훨씬 좋다고!"
"당신은 몰라요."
"내가 너보다 훨씬 오래 살았어!"
말다툼 끝에 이어지는 것은 폭력이었다. 영화, TV 드라마 같은 것에서 나는 충분히 폭력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직접 당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그녀를 때리지 않았다. 대신 나를 때렸다.
나이 서른 여덟에 누군가에게 이렇게 심하게 맞는다는 것은 상당히 괴로웠다. 그가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는 것은 중요치 않다. 뱀파이어가 된 이래로 내가 몇 년인가 더 나이를 먹었다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몸이 변하지 않으면 정신도 변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서른 여덟 먹은 중년에 가까운 남자였을 뿐이고 그는 나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젊은 청년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지독하게 아팠다. 두어 번 맞고 나면 뇌가 두개골 속에서 제멋대로 흔들리는 느낌이라 차라리 빨리 맞고 감각이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재영은 가끔은 비명을 질렀고, 가끔은 외면해버렸다. 피투성이가 되고 나면 그녀는 나의 상처를 깨끗하게 핥아주었다. 상처는 금방 낫지만 정신은 그렇게 빨리 낫지 않는다. 나날이 나는 이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가 우리가 사는 집에 들르는 주기는 점점 더 길어졌다. 처음 내가 왔을 때는 거의 이 집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점점 하루, 이틀, 일주일, 두어 달씩 길어졌다. 그녀는 우울한 표정을 하고 창문만 바라보았다.
"왜 그 사람을 기다려? 사랑해?"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 그녀는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사랑이 뭔데?"
"글쎄, 그냥 뭐, 그런 게 아닌가 해서."
"나한테...... 잘해줬으니까."
"잘해주는 정도로 만족해? 그는...... 이상해."
"나는? 난 이상해 보이지 않아?"
그녀는 나를 쳐다보고 웃었다. 웃지 않으면 울 것 같아서 웃는 그런 웃음은 여자만이 지을 수 있다. 나는 그 웃음이 언제나 대단히 신기했다.
"아니, 뭐."
대놓고 이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에게는 38년 간 쌓인 사회적 예의범절이라는 것이 아직도 존재했다. 이 두 사람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상한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고쳐지지 않아. 이상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지."
그녀는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사실은 그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그저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평생을 인간은 그렇게 산다.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약속 장소에서, 집에서, 인생에서. 나는 기다리다가 결국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혹은 만났는데도 모른 채 지나쳐 버렸는지도 모른다.
"당신을 기억해."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 날, 왜 하필 나였어?"
왜 하필 나였을까. 그것은 오랫동안 고민한 문제였다. 운명의 장난, 아니면 계획된 일? 나 혼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한참동안 나를 쳐다보다가 구부린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간신히 들렸다.
"당신을 알고 있었어."
"나도 알아. 같은 회사에 있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야. 당신을 알았어."
"하지만...... 회사 말고?"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뱀파이어가 된 이후로 내내 혹시 그녀에게 뭔가 잘못했던 게 아닐까, 뭔가 실수했던 게 아닐까 고민해 보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의 뇌세포 속에 살아온 모든 기억이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생각나지 않는 일은 영영 생각나지 않는다. 설령 뇌세포 속에 기억이 있다고 해도 인간의 노력으로 떠올릴 수 없는 기억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 거지?
"추워."
"춥다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뱀파이어는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아니, 추위와 더위 같은 것을 약간은 인지하지만, 거기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한겨울에 벌거벗고 거리를 뛰어다녀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래서 밖에 나갈 때에는 남들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녀는 온몸을 웅크린 채 여전히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나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녀는 얌전히 나에게 기댔다. 실수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리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새 그녀에게 익숙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우리는 침대로 갔고, 언제부터인가 매일 똑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다. 잠드는 건지 죽는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랬다.
그녀를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어딘가가 잘못된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은 나에게 기묘하게도 우월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고민했고, 괴로워했고, 제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제대로 된 정신이야."
그녀는 가끔씩 말했다.
"난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아."
그녀가 미쳤다는 증거는 여기저기에서 드러났다. 그녀는 피를 빨 때 단 한 번도 인간을 살려둔 적이 없었다. 먹잇감을 쫓아서 구석으로 몰아넣은 다음,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까지 폭행한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등골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처음에는 손바닥으로, 그 다음에는 주먹으로 때리고, 할퀴고 물어뜯는다. 피가 사방에 흩뿌려지는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피냄새에 내 몸까지 동하기 시작하면 사태는 악화되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광기에 동참하고 있었던 것 같다. 광기란 전염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동규가 있으면 사태는 최악이 되었다. 그는 그녀의 광기를 부추겼다. 뜯겨나가는 살점을 보며 웃었고, 가끔은 그 살점을 먹었다. 나는 처음에는 마치 살아있는 인간처럼 구석에서 토했다. 토한다기보다는 구역질을 했다. 굳어버린 위가 아플 정도로 구역질을 해도 나오는 것은 없었다. 피 한 방울 토해낼 수가 없다. 먹은 피는 다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겠다.
셋이서 피를 깨끗하게 핥고 나면 인간의 시체만이 남았다. 고깃덩어리라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얼룩지고 뭉개진 가죽과 뼈. 그녀는 머리카락을 뽑아 사방에 흩어놓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씩 들개나 들고양이가 다가와서 그 살가죽을 킁킁대다가 뜯어먹고는 했다. 그는 그것을 끝까지 지켜본 다음에 해가 뜨기 직전에 어디론가 가져갔다.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나면 우리가 식사한 자리에는 머리카락만이 남았다.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보던 어느 날, 나는 그것을 몇 가닥 주워와서 앨범을 하나 사서 끼워 넣었다. 하나, 둘, 셋, 날이 갈수록 앨범 안에는 영양공급원을 잃은 단백질 덩어리가 쌓여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오로지 우리가 배가 고프다는 이유만으로 죽어가는데 어째서 세상은 조용한 걸까?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곳이라지만 이렇게 이유 없이 죽는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결국 가장 먼저 떠난 것은 동규였다. 재영을 부추기고 달래고 꼬드기던 그가 가장 먼저 발을 뺐다.
"망할 자식."
우리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아니, 내가. 나는 그녀의 위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딱히 쾌감을 느끼는 것도 아닌데 섹스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고 있으면 도로 인간이 된 느낌이었다.
"뭐 하는 짓들이야!"
갑자기 나타난 그가 고함을 치며 나를 잡고 침대 밑으로 내던졌다. 그녀는 이불을 움켜쥔 채 일어났다.
"이 따위 짓을 해서 남는 게 뭐가 있어?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안 돼요?"
그녀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했다. 그가 험악하게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이런 걸 하면 인간이 된 것 같아? 그런 모양이지?"
가슴이 뜨끔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나를 반대편으로 걷어차 버린 다음 침대에 무릎을 갖다대고 그녀를 보았다.
"몇 번을 말했어? 그 멍청한 지푸라기 따위는 놔 버려. 그러면 네 인생이 훨씬 편해진다고 했잖아!"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 어떻게 편해지라는 거야! 미치고 싶지 않아. 당신이 다시 시작하게 해 준다고 했었잖아! 그 약속은 어떻게 된 거야? 미치지 않게 해 준다고 했잖아!"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 역시 커다랗게 소리쳤다.
"내가 언제 그랬어? 새로 시작하면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머저리 같이 머리 굴려가며 살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살 거라고 생각했었다고.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 넌 뭐가 문제인지 말해 줄까? 네가 돌았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게 문제야!"
"난 미치지 않았어! 미치지 않을 거야!"
"이미 미쳤어! 세상에 정상인 사람 따위가 있는 줄 알아? 죄다 미쳤는데 네가 그걸 못 알아보는 것 뿐이야!"
"아니야! 세상 사람들이 다 미쳤을 리 없어. 뭔가 잘못됐어."
그녀는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소리쳤다. 그가 웃었다.
"잘못된 건 너의 그 머리야. 설명 가능한 방법을 찾아대고 있으니 잘못된 거야."
"미치지 않았어! 그럼 그 사람 역시 미쳤다는 거야? 아니야, 그렇지 않잖아!"
그의 시선이 나에게로 홱 돌아왔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서더니 내 옆구리를 걷어찼다. 나는 신음하며 몸을 구부렸다.
"이 자식은 뭐가 돌았는지 가르쳐 줘? 잘난 척 우아한 척 인간으로 살고 있었지만, 자기 인생이 사상누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을 가리고 아닌 척 하고 있었지. 자기 인생이 완벽하다고 스스로를 세뇌하고 있었다 이거야. 지금 이 삶을 너무나 좋아하면서, 아닌 척 연극하고 그걸 즐기고 있지. 그게 정상이야? 네가 말하는 정상이 그런 거야?"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럼 넌 왜 저 놈을 골랐지? 왜 미워하지? 왜 이 놈은 네가 자기를 그렇게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하지? 이 자식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하고 있어. 그걸 즐기고 있다고!"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녀가 고함을 질렀다. 나 역시 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식으로 지껄이는 거야! 도대체 뭘 아는데?"
"내가 내 피를 먹여 널 만들었어,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난 네 머리 속에 있는 게 환히 보여. 더 말해 줘?"
그가 몸을 굽히고 나의 바로 눈앞으로 얼굴을 갖다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새까만 눈, 눈동자에 비친 얼어붙은 내 모습뿐이었다.
"그녀를 돌봐주는 척, 감싸주는 척 하는 게 즐거워? 너 역시 그녀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면서도 옆에 있는 건 좋아하지. 그녀가 누군가를 피투성이로 만드는 것을 보며 구역질을 하는 주제에, 거기 동참하고 있어. 뭔가 잘못된 것 같지 않아? 네 머리야, 바로. 어느 날 갑자기 네가 그녀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른다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거야. 아니, 그 소식만 기다리고 있겠어."
"난 그런 짓 하지 않아!"
그의 주먹이 내 머리를 세차게 후려쳤다. 나는 도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 사람 때리지 마! 당신이 뭔데 그 사람을 때려? 하지 마!"
"네가 때려죽인 그 수많은 인간들에게 그런 소릴 해 봐."
"먹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
"그럼 네가 죽인 첫 인간에게 말해 봐."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는 코웃음을 치고는 방을 나갔다. 나는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붙잡고 간신히 일어섰다.
"죽인 첫 인간?"
나는 그녀를 보았다. 죽인 첫 인간? 죽인 첫 인간?
"언제?"
그녀는 이불을 쥐어뜯었다. 천은 새된 소리를 내며 찢겨나간다. 안쪽의 솜이 갈가리 뜯겨 바닥에 흩어졌다.
"옛날에."
"옛날...... 인간이었을 때? 살아 있을 때? 그때 죽인 거야?"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난 미쳤어."
"나도 알아! 젠장."
나는 지금까지 살인범과 자고 있었다. 나는 최소한 그런 종류는 아니야! 나는, 나는 그래도 살아 있을 때에는 정상이었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누가 봐도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고!
"화내지 마, 나한테.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난 뭔가 잘못됐어. 그러니까 내 잘못이 아니야."
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찢어진 이불이 그녀의 무릎 위로 늘어져 있었다. 창밖에서는 불빛이 깜박인다. 나는 일어나서 방안을 서성거렸다.
"당신은 미쳤어. 사람을 죽였고, 지금도 죽이고 있어."
갑자기 그녀의 훌쩍임이 멎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붉은 눈물이 흘러내린 얼굴에 백치 같은 미소가 번졌다.
"응."
"사람을 죽이는 게 좋아?"
"응."
"하지만......"
심장이, 멎어버린 심장이 쿵쿵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무섭게 보였다.
"당신도 했잖아. 같이 했잖아. 그런데 왜 물어봐? 당신은 좋지 않았어?"
"나는 하지 않았어!"
"했잖아. 저번 주에도, 한 달 전에도, 그 전에도. 계속 계속 같이 했잖아."
"아니야! 그건 내가 인간이 아니라 당신 때문에 뭔가 이상한 게 되어서 그런 거야!"
"인간은 화풀이 대상이 아니야. 당신은 날 미워해. 그 사람 말이 맞았어. 날 미워해. 그래서 어쩌지를 못하는 거지."
그녀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선물을 받고 즐거워하는 어린아이 같은 웃음이었다. 조카들이 갑자기 떠오른 것은 너무나 천진한 웃음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카들, 누나, 부모님, 나의 인생 전체가 눈앞에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내 아래 있었다. 동규의 예언대로 나는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카나리아는 잊어버린 것들을 슬퍼하며 바다 속으로 침잠한다.
잊어버린 것도, 잃어버린 것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숭배했고 마음 한 구석에 전부 쌓아놓았다. 하지만 돌아오지는 않는다. 되돌릴 수 없다.
눈물을 흘리지도 못하며 나는 발목에 납덩이를 매단 채 바다 속에 가라앉는다.

4. 재영

카나리아는 날아올랐다.

그가 떠나버렸다. 내 손을 잡고 가늘고 붉은 선을 넘어오게 만들었던 그가, 이제는 나를 그곳에 버려 두고 혼자 떠나 버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럴 수는 없어. 말도 안 돼.
하지만 그는 그랬다. 나를 버렸다. 나는 단둘이 남았고, 남아 있는 그는 미쳐가고 있다. 물론 나 역시 미쳐가고 있다. 안다. 하지만 아는 것과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인정하고 나면 더 이상 물러설 수 있는 곳이 없다. 숨을 곳도 없다. 그가 떠나버리고, 남아 있는 그도 미쳐 가는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방법이라고는 없다. 오로지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이성의 끈을 미친 듯이 잡고 있을 수밖에.
우리는 단둘이 남았다. 그는 나의 목을 졸랐고, 나는 그의 팔을 부러뜨렸다. 부러진 팔을 잡고 그는 흐느껴 울었다. 피눈물이 그의 뺨에 가늘고 붉은 선을 그렸다. 나는 그것을 닦아주었고, 그는 몸을 떨었다.
그 이래로 그는 나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바깥을 쳐다볼 뿐이다. 내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그가 그렇게 앉아 있다. 새카만 하늘을 바라보며, 마치 하늘에서 무언가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쳐다보고 있다.

버림받았다는 것은 빠르게 퍼진다.
뱀파이어로서 나의 삶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물론 인간일 때도 성공적이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뱀파이어라는 것은 인간과는 다르다. 뱀파이어는 죄책감 없이 짐승이 될 수 있다. 나는 뱀파이어가 되고 나서 죽인 인간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떻게 죽였는지, 그들이 어떻게 울부짖었는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인간일 때 죽였던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은 아직도 기억한다. 그 새빨간 입술, 목소리까지도 기억한다. 손가락에 감기는 머리카락의 느낌도.
나는 어쩌면 지금도 그 느낌을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닐지도 모르고. 누가 알겠는가? 내 머리 속은 나도 모르는데.
힘있는 뱀파이어에게 버림받은 어린 뱀파이어들은 다른 뱀파이어들의 사냥감이 된다. 뱀파이어는 마치 굶주린 육식동물들처럼 서로를 잡아먹는다. 인간보다 같은 혈족을 먹는 것에 더 끌린다는 것은 뱀파이어가 인간보다 더 진화한 종이라는 것을 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와 그를 노리는 다른 뱀파이어들이 무수히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뱀파이어를 죽이는 것에는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고, 멍하니 있는 그가 죽는다. 그래서 나는 싸우기 시작했다. 뱀파이어의 몸은 인간의 몸과 다르다. 때리고 뼈를 부러뜨려도 인간과는 느낌이 다르고 상대방의 반응도 다르다. 떠나버린 그는 뱀파이어를 때리는 것을 좋아했고, 그래서 나의 그는 참 많이도 맞았다. 이제는 나도 그 느낌을 알 것 같다. 훨씬 단단한 뼈, 차가운 고무 같은 피부,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피. 뱀파이어의 피는 시금털털하고 역하지만 인간의 피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 마약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나는 그들을 때리고, 그 피를 맛본다. 그들이 완전히 껍데기만 남을 때까지 피를 빨아먹는다. 그리고 시체는 길거리 한가운데 버린다. 몇몇은 동료들에게 구출되고, 몇몇은 해가 뜰 때까지 꼼짝도 못하고 있다가 타죽는다. 타죽어 버리라지. 내 알 바 아니다.
우리는 아파트를 버렸다. 그가 남겨 준 아파트는 구더기가 꼬여드는 시체처럼 뱀파이어들을 불러들였다. 나의 그는 내가 어디로 데려가든 말없이 뒤를 따랐다. 가끔씩 그는 우리에게 덤비는 뱀파이어들에게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싸웠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맞는 편이었다. 그는 아직 너무 어렸다. 그리고 맞는 것을 싫어했다. 싫어한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것은 약점이 된다. 그래서 그는 맞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끔은 맞고, 가끔은 때린다. 가끔은 피를 빼앗길 때도 있었다. 살이 뜯겨나가고 핏줄이 찢긴 부분에서는 진한 유동체 같은 피가 흘러내렸다. 덤벼드는 뱀파이어도, 나도, 나의 그도 정신이 나간 것처럼 싸웠다. 피냄새가 모두를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미치는 것이 당연했다.

떠돌다 보면 살아가는 방법이 생기게 마련이다. 지하철 역, 서울역 근처, 공원,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우리는 노숙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날이 밝으면 지하철이 지나가는 지하 통로에 숨었다. 가끔은 구더기가 꼬이는 시체 같은 아파트로 돌아갈 때도 있었다. 아파트는 가끔 들르는 다른 뱀파이어들에 의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는 작은 소리에도 흠칫 흠칫 놀랐고, 나의 그는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내가 부르면 돌아보기는 했다.
"나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 거야?"
그는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저분한 피부는 영안실의 시체 같은 푸른색을 띠고 있다.
"내가 널 버리고 가면 어떻게 할 거야?"
이번에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죽을까? 죽을 것이다. 하지만 싸우겠지. 싸우다가 아무 의미도 없이 죽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식량이 되어.
나는 왜 그를 끌어들였을까? 모르겠다. 단지 그를 보는 순간, 너무나 오랜만에 만나는 그를 보는 순간 무언가가 들끓었다. 어떤 감정이. 나는 그를 갖고 싶었고, 그래서 가졌다. 그때는 가지면 책임을 져야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책임감뿐이다. 떠나버린 그는 나에게 지푸라기 따위는 놓아버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푸라기조차 놓으면 남은 것은 숨도 쉴 수 없는 물 속으로 가라앉는 일뿐이다. 뱀파이어는 물론 숨을 쉬지 않는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물 속으로 가라앉고 싶지는 않아. 나에게는 이 지푸라기만이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텅 빈 아파트에서 우리는 다시 몇 달을 보냈다. 떠도는 동안 우리가 아파트를 떠났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더 이상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처에 나가서 사람이든 동물이든 닥치는 대로 붙잡아 피를 빨았고, 가끔은 피투성이가 된 채 아파트로 돌아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미친 듯이 웃어댔던 적도 있다. 나와 함께 피를 빨고, 나와 함께 피투성이가 되었어도 그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아니, 그는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다. 그가 웃는 걸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인간이던 그가 택시를 잡으며 친구들과 이야기하던 그때였다.
그의 이마에는 주름살이 있다. 눈가에도 부채살 모양으로 주름살이 있다. 나는 가끔씩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늙는다는 것, 이제는 더 이상 나와 관련이 없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때, 떠나간 그가 나를 처음 발견했던 그때 그의 손을 잡지 않고 거기 남았더라면, 감옥에 가든 정신병원에 가든 그냥 남아있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조금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까? 최소한 지금보다 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정신도 달라졌을까? 지금보다 온전한 정신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영화 속에 나오는 정신병자들처럼 약물로 멍한 모습을 한 채 병원 한구석에 앉아 지금 나의 그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멍하니 바깥을 쳐다보고 있을까?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우리를 떠난 후로 그의 소식은 들은 적이 없다. 그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자 없는 번호라는 안내가 나왔다. 가끔씩 만나는, 싸움을 걸지 않는 뱀파이어들에게 물어보아도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근처의 바에 가서 몇몇 뱀파이어들과 만나 그에 관해 묻는 습관이 생겼다. 그 동안 아파트에는 나의 그가 혼자 남아 있었다. 나는 그를 걱정하지 않았다. 바에 있는 동안만은 내 시간이었다. 그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내 시간. 나는 내가 없는 사이에 그가 누군가에게 공격받고 죽어버리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한 번 누군가가 내가 없는 사이에 아파트에 들어가 그를 공격했다. 그는 그 뱀파이어를 붙잡았다. 피투성이가 되어 그를 붙잡은 다음, 껍데기만 남을 때까지 그의 피를 남김없이 빨았다. 그리고 나서 칼로 난자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군데도 남김없이 칼로 상처를 냈다.
굽기 직전의 생선에 칼집을 넣은 모양을 하고 뱀파이어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바깥에서 만난 다른 뱀파이어와 집으로 들어왔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 나의 그는 바닥의 뱀파이어를 보다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 거의 일 년만에 말했다.
"미치는 건 너무나 쉬워."
쉬운가? 아니. 완전히 미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어렵다. 떠나버린 그가 말한 것처럼 지푸라기를 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물 속으로 가라앉을 용기가 없어서 아직도 지푸라기를 움켜쥐고 수많은 생각을 곰씹고 있는 것이다. 반면 나의 그는 지푸라기를 놓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그 날부터 그는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말을 하고, 웃었다. 대신 나의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치 언어가 한정되어 있는 것처럼, 그가 말하면 내가 말하지 않고, 내가 말하면 그가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을 뿐이다. 우리는 어떤 면에선가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 지푸라기를 쥔 사람과 놓은 사람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그 개자식을 찾아서 죽여버릴 거야. 당신은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알아서 할게."
무엇을, 어떻게? 그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
6개월 정도 더 아파트에 머물렀다. 몇 번인가 다른 뱀파이어들이 찾아왔다. 친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얼굴이 익은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떠나버린 그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여행을 하고 있다던가 그랬다. 그의 옆에 다른 어린 아이가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또 다른 동반자, 아니면 장난감. 애당초 그가 나와 나의 그를 이 세계로 끌어들였던 이유는 심심해서였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제 싫증이 난 장난감은 내버리고 새로운 장난감을 마련한 거겠지.
어쩐지 분했다. 화가 났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고서 자신은 홱 도망을 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최소한의 책임 정도는 져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그래도 책임지고 살려고 노력했어.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분하다. 하지만 그 분노가 오랫동안 지속될 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이 슬펐다.

떠나는 데에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짐을 꾸리고, 그가 잠들어 있는 새벽에 길을 나섰다. 얼마 못 가서 작은 여관에 들어가 방을 빌린 다음 침대 아래쪽으로 기어 들어가 자야했지만, 그럴 가치는 있었다.
지푸라기를 놓아버린 건가? 그건 아니다. 다만 책임지는 것에 질려버렸을 뿐이다. 도대체 왜 내가 책임을 져야 하지? 그래, 내가 골랐다. '나의 그'라고 불렀던 것도 나다. 그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를 데려와서 나에게 주었던 것은 떠나버린 그다. 그의 책임이다. 만든 자가 책임지지 않고 떠나버렸는데 왜 내가 남아서 계속 돌봐야 하는 거지? 그럴 이유는 전혀 없다고. 게다가 그는 더 이상 혼자 둔다고 해서 죽을 것 같지도 않으니까.
이제 어떻게 살든 전부 각자의 문제이다. 하나는 떠났고, 하나는 남았고, 나는 도망친다. 그래, 도망친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겠는가? 어쩔 거야, 붙잡아서 제자리로 되돌려 놓을 거야? 돌아갈 수 있는 제자리 따위는 없다는 걸 내가 더 잘 아는데.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라고. 갈 곳이라고는 아무 데도 없으니까.
어쨌든 그는 쫓아오지 않았다. 아니면 쫓아왔는데 길이 어긋났든지. 쫓아오기를 바란 건 아니다. 나는 이제 그에게 질려 버렸다. 정신을 차린 이래로 그는 제멋대로 모든 것을 해석하며 나를 갖고 싶어했다. 나를 갖는 것이 마치 당연한 자신의 권리인 것처럼 주장했다. 처음에는 받아 주었지만, 이제는 싫어. 지겨워. 나에게는......
나에게는 그가 필요해. 떠나버린 그가. 내가 선을 넘어오게 만든 그가. 그를 찾아내고 싶었다. 처음처럼 돌아가고 싶었다. 그가 나를 부추기고, 나는 부추김에 넘어가 지푸라기를 잠시 던져버리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던 그 시절로. 이제는 내가 지푸라기를 잡고 있는 게 아니라 마치 지푸라기가 나를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놓을 수가 없다. 너무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서 그대로 굳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최소한 그를 버렸어. 그러니까 그도 나를 받아줄지 모른다.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 자리에서 미치는 게 뭔지 보여주면 되겠지. 어차피 나는 미쳤으니까. 그가 바라던 게 그런 거 아니었나? 미치는 거.

시간이 흘러가고, 해가 바뀐다. 나는 떠돌고, 피를 빨고, 사람을 죽이고, 다시 떠돈다. 내가 걷고 있는 뒤로 시체가 하나하나 쌓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기를 먹었는지 쌓아보면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명체란 다른 생명체에게 해를 입히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결국 삶이다.
배를 타고 한국에서 떠난 적도 있다. 생전 처음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정작 외국에 가서 느낀 것은 하나뿐이었다. 인간은 모두 같다. 피부색이 같든 다르든, 사용하는 언어가 같든 다르든, 전부 다 동일하다. 피 맛은 피부색과는 별로 관계가 없더라.
지구 반대편까지 돌아갔을 때,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깔깔대며 웃는 어린 남자아이를 데리고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손버릇이 나쁘고, 줄담배를 피우는 남자아이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그 남자아이를 잡아다 눈을 뽑고 목을 비틀고 혀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그의 옆에 당연한 듯 붙어서 같이 다닌다는 이야기에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한때 내 자리였다. 달갑게 받아들인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것이었다.
혼자 지내던 어느 순간부터, 내가 잡고 있던 가느다란 거미줄 같은 이성의 끈은 솜사탕처럼 녹아버리고 있었다.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금발 머리카락을 뽑고 있다가 그것을 깨달았다. 시체는 마치 내가 제일 처음 죽였던 그 여자와 똑같은 모양새였다. 돌에 찍혀 머리가 깨지고, 뺨의 피부가 벗겨지고, 머리카락이 절반쯤 뽑혀나간 백인 여자. 피만 남아 있었으면 딱이었겠지만 피는 이미 내가 먹어버려서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 골목에 앉아 한참동안 생각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면 나는 왜 지금까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왜 나는 이렇게 되지 않겠다고 미친 듯이 반항했던 걸까?
그래서 나는 도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형 화물선의 화물창고에서, 병원에서 훔쳐온 혈액 샘플을 빨아먹으며 손목시계만 쳐다보았다.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시체에서 빼낸 손목시계는 초침까지 있는 것이었다. 자그마한 숫자판을 계속해서 빙글빙글 도는 초침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굉장히 작게 느껴진다.
항구에서 내렸을 때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이 부슬부슬 내려 바닥에 닿았다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다. 바닥은 축축하게 젖어있고, 새카만 바다는 음울한 회색빛을 띤 하늘과 맞닿아 있다.
택시를 타고 서울까지 온 다음 택시 기사를 길바닥에 버렸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덩치 작은 중년 남자는 눈을 하얗게 뒤집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그만 나비처럼 팔락거리는 눈이 시체 위로 내려앉는다.
택시를 몰고서 아파트로 갔다. 아파트는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몇 년이나 떠나 있었어도 길 하나 바뀌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이라는 것이 마치 흘러가는 구름처럼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문 앞에 서서 벨을 눌러보았다.
잠시 공백이 있은 다음, 문이 열렸다. 오래 전 내가 놔두고 떠나버렸던 그가 변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거기 서 있다.
"돌아온 거야?"
"응."
"완전히?"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파트 밖으로 눈은 조금씩 더 많이 내리고 있다. 바깥에 대놓은 택시에도 눈이 쌓이고 있으리라. 내가 중간쯤 버리고 온 택시 기사의 시체에도 눈이 쌓이고 있겠지.
"응."
그가 팔을 벌렸다. 나는 얌전히 그에게 안겼다.
"기다리고 있었어."
세상은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치 시계의 초침처럼, 나는 세상을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다시는 떠나버린 그를 만나지 못했다. '다시는'이라고 확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언젠가 다시 만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더 이상 그에게 화를 낼 생각은 없다. 아니, 그를 잊어가고 있다.
나에게는 처음부터 뭔가가 잘못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는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카나리아는 노래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노래를 알지 못했다. 은으로 된 배를 타고 바다를 떠돌며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노래를 기억해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마침내 노래를 모른다는 것을 인정했다.
새는 날아오른다. 나는 여기에 있다. 미친다는 것은 생각만큼 나쁘지 않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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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고3이라는 신분이 허락하는 한에서OTL)
  • No Profile
    mirror 06.05.01 01:10 댓글 수정 삭제
    김지원님께는 맥베스, 박성우 님께는 데미안, roland님께는 셜록 홈즈 전집 6권 보내드렸습니다.
    건필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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