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가면

2005.12.30 23:3912.30

C.T님의 “이상향”은 문장이 비틀려 있어서 읽기 힘들었습니다.
우리 말 공부를 많이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향”은 무언가를 쫓아가는 전형적인 퀘스트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동화등에서 이미 많이 보여진 형식이며, 동화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신하고 명료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는데, 참신한 건 둘째 치고 명료하지도 않았습니다.

azuretears님의 “어느 한 속어의 유래”는 도입부가 조금 산만하긴 했지만 재치있고 재미있었습니다.

황당무계님의 “악어 생포하기”는 가볍고 톡톡 튀고 아이디어도 재미있었습니다.

뭉그리님의 “유리병 속의 정체”는 제목이 비문입니다.
제목은 글의 얼굴입니다. 또한 제목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글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하셔서 제목을 좀 더 신중하게 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더 발랄하고 재미있고 재치 있게 쓸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소재와 반전을 글솜씨가 따라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글의 전반부는 글 뒤에 숨긴 보석까지 읽는 이를 붙잡기 위해서 끊임없이 유혹하고 미스터리를 던져 주어야 하는데, 앞이 굉장히 뻔하고 아무 의미 없을 이야기로 보입니다.
앞에 악마를 잡는 부분과 악마인 걸 알게 되기까지를 좀 타이트하게 끌고 나갔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주인공의 고뇌를 그냥 한 문단 안에 서술해버려서 시시해져버렸습니다.

roland님의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은 일단 제목이 재미없었습니다.
역시 전반부가 문제가 있었는데요.
물에 빠진 여자와 나누는 대화나 상황에 너무 현실성이 없어서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하고 단번에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남자가 왜 고민하는가가 없이 쓸데없이 장면을 낭비했습니다.
반전처럼 좀 있다 보여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너무 늦게 나왔습니다.
장면을 구성할 때  장면에서 성취해야 할 목표를 확실히 정해 놓고, 묘사를 낭비하지 않는 연습을 해보시길 권합니다.
반대로 확실히 힘을 줘야 할 부분을 쉽게 넘어가지 않고 힘을 주는 법도 필요합니다.
중반은 괜찮았는데 앞은 재미없고 뒤는 싱거웠습니다.
읽으면서 여자를 구한 후 세 사람이 어떤 갈등 관계를 형성하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럴 만한 분위기는 형성이 되었었는데, 아무 사건 없이 그냥 넘겨 버렸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성경을 기반으로 한 건데, 선악과나 방주의 역할, 왜 방주가 있었는지 등등 남자가 갈등해야 하는 모든 구체적인 요인을 설명하지 않고, 그저 신 이야기만 길게 해서 재미가 없었습니다.
조금 냉정하게 말씀드리자면 이 이야기는 살이 붙어 있어야 할 곳은 살이 없고 뼈만 있으면 충분할 곳은 비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쁘지 않은 소재에 전개였다고 생각하지만. 모자랐습니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 나타내야 하는 포인트를 나타내고 나머지는 지워야 합니다.
아니면 나머지도 재미있어야 합니다.

soulskate님의 “달걀”은 꽁트로 충분한 걸 단편 길이로 등장인물과 대화를 늘렸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날개님은 “가면”과 “베타테스터” 두 편을 올려주셨습니다.
두 편 다 잘 쓴 글이었으나 테마가 진부했고, 김영하를 떠올리게 되는 면이 걸렸습니다.
베타테스터가 가면보다 더 쉽게 읽혔습니다.
다만 죽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 외에는 주제도 진부하고, 아이디어 하나에 기댄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풀 만큼 잘 풀었고, 깔끔하게 잘 쓴 글입니다.
가면은 그에 비하면 좀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나 감정적인 고조를 충분히 준비했어야 하는 부분이 보입니다.
초반은 좀 산만하고요.
소재에 비해서 문체가 많이 건조하든지, 문체에 비해서 결말이 너무 로맨틱하든지 둘 중 하나로 보입니다. 두 편 중 잠시 고민했습니다만 베타테스터가 더 깔끔하지만 더 진부했기에, “가면”이 제이님의 “로망스”와 함께 공동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뵐 수 있길 바랍니다. :)


제이님은 지금까지 거울에 “검은 것은 아름답다”, “파도”, “로망스” 세 편을 올려주셨습니다.
집착하는 테마라든가 소재가 계속 같고, 패턴이 비슷하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속도 조절도, 인물을 드러내는 방식도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제이님의 글은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는데요.
소재나 인물은 다르지만 계속 모티브는 같다는 느낌이고, 그 모티브는 작가가 굉장히 깊은 곳에서 꺼내는 거고, 깊은 곳에서 꺼낸다고 해서 숨기고 있었던 게 아니라 주제랑 작가가 완전히 밀착해서 그 안에서 숨쉬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흡인력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 흡인력이 중력 우물처럼 느껴집니다.
다만 거울에 글을 올리신 순서대로, 글이 뒤로 갈수록 독자와의 소통에 무심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빨려들 듯이 읽게 되는 것이 또 묘한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제이님의 글을 계속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오래도록 선정작이 없다가 두 편이나 선정작이 나와서 글을 읽으면서 즐거웠습니다.


제이님과 날개님 독자우수단편 선정을 축하드리며 진아나 mirror을 클릭하셔서 주소와 우편물을 받으실 분 성함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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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여자는 눈을 떴다. 차가운 전동차 안이었다. 눈앞에는 낯선 사람들이 보였다. 이어폰을 낀 청년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것이 대학생으로 보였다. 그 옆에 양복을 입은 남자는 외근을 나가는 직장인 같았다. 그 옆에는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교복 입은 소녀가 핸드폰으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 옆에는 빨간 초미니를 입은 여자와 캐주얼한 옷차림을 입은 남자가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들은 고작 몇 걸음 떨어져 있는 셈이었지만, 소음 때문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들을 수 없었다.
  다들 뭘 하는 사람들인 걸까. 문득 여자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러나 옷차림이나 행동만으로 알아낼 수는 없었다. 여자는 생각을 포기한 채 눈을 감았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요새 들어 횟수가 빈번해진 두통이 찾아온 것이다. 통증이 점차 심해졌다. 손으로 머리를 꾹꾹 눌러대도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염려스러웠다. 어떻게 비칠까.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혼자만 있고 싶어. 여자는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에 혼자만 있다면 골치 아픈 일은 반으로 줄어들 테니. 아니, 없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늘 버겁다.
  …….
  얼마나 눈을 감고 있던 것일까. 여자는 깜빡 잠이 들었다고 생각하며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무슨 역이지? 무심코 반대편을 본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람들이 전부 얼굴에 흰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여우가면이었다. 인간으로 변한 여우들이 다소곳이 앉아 자신만 노려보는 것 같았다.
  여자는 숨이 턱 막혔다. 왜 날 바라보지? 비명을 내지르려 했다. 그러나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 나도 가면을 쓰고 있을까? 여자는 반대편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꺄아아악! 눈도, 코도, 입도 없는 살덩어리 얼굴이 검은 유리창에 비쳤다. 여자는 눈을 감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뇌리에서는 방금 전 광경이 잔상으로 남아버렸다. 게다가 암흑 속에서 머리카락만 붙은 살덩어리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싫어! 여자는 끝내 비명을 터트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모두 한결같이 의아한 표정으로 여자를 주목했다. 어느 샌가 가면은 사라지고 없었다. 모든 게 정상이었다.
  여자는 다시 반대편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구분되었다. 여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여자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거북스런 시선이 온 몸에 꽂혔다. 여자는 곤혹스러워서 다시 앉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전동차가 정차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가 넓으니 내리실 때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여자는 문 쪽으로 다가가면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이제 아무도 여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뭐지? 여자는 여우가면을 떠올렸다. 가면들이 둥실둥실 떠서 자신을 뒤쫓을 것 같았다. 내리실 때 가면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여자는 서둘러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여자가 간 곳은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페였다. 카페에는 들릴 듯 말 듯한 음악이 깔려 있었고 사람들은 이야기에 빠져있었다. 연갈색으로 치장된 탓인지 따뜻한 느낌이 드는 인테리어였다. 시각이 마침 점심시간이라 테이블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자는 자신과 약속한 사람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생각보다 금세 찾을 수가 있었다. 혼자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는 딱 한 명이었다. 그 남자는 혼자 창밖으로 보는 게 묘하게 잘 어울려 보였다. 여자는 곧장 남자 맞은편에 앉았다. 김형진 씨죠? 창밖을 보던 남자가 돌연 시선을 돌렸다.
  왠지 낯익은 인상이었다. 어디서 한 번은 본 것 같았다. 어쩌면 초등학교나 중학교 동창은 아니었을까. 짧은 머리카락에 검은 정장차림 때문인지 남자에겐 다른 사람과 구분할 특징이 없었다. 우연히 어디서 마주쳐도 이 남자인지, 아니면 비슷한 사람인지 모를 것 같았다. 네, 맞습니다. 서희영 씨인가요. 반갑습니다. 여자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대꾸했다. 제 애인이시죠.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자로 사귄지는 두 달째. 남자는 말없이 입가에 웃음을 띠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즉시 본론을 꺼냈다. 오늘 하루 제 애인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남자는 침착한 태도로 대답했다. 저 역시 잘 부탁드립니다. 남자의 태도는 긴장은커녕 여유롭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자는 긴장이 역력했다. 여자는 이제껏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는 것이다. 여자가 엄마를 속여본 적은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그것도 속인 게 아니라 엄마가 속아준 것이 맞을 것이다. 귀신을 속여도 엄마는 못 속여. 네 살 어린 여동생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여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난 속일 거야. 속이고 말겠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곳에 가겠어.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자가 고개를 숙이며 혼잣말을 하는 게 아닌가. 이상한 광경이었다. 아니, 타인은 모두 이상한 법이다. 남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일을 오래 하니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 않는다. 역할 대행업체에서 남자는 애인 도우미로만 활동한 것이 아니었다. 때론 나이 많은 사람의 자녀 역을 맡기도 했고, 하객이나 조문객도 맡았다. 한번은 어떤 사람의 오빠 역을 맡았는데, 스토커를 쫓아내려다 두들겨 맞아 전치 6주가 나온 적도 있었다. 그 뒤로는 사정을 신중하게 알아보고 일을 맡았다.
  이 여자의 경우는 하루 연인이 되어 엄마를 상대해 달라는 것이었다. 가격은 삼십 만원이었고, 실제 자신에게 오는 건 그 반인 십오 만원이었다.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사연이라 남자는 마음에 들었다. 물론 백 명의 사진 속에서 자신이 선택 된 것이고, 몇 주 만에 찾아온 일이라는 것 또한 중요했다. 요즘은 이런 업체가 늘어나는 추세라 일이 줄어든 편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자는 경력이 붙어서 도우미 레벨이 높아 일을 많이 맡았다. 그렇다고 결코 일이 많아서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는 어떤 여자들 사이에서 두 번 이상 남자친구 역을 맡다가 들통이 난적도 있었다. 그 후로 그 여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들 진실해졌거나 아니면 서로 만나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는 가면서 이야기 하고 우선 자리를 옮기죠. 여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남자도 따라 나섰다. 둘은 카페를 나와 나란히 거리를 걸었다. 지하 주차장이 꽤 멀리에 있어서 오래 걸어야 했다.
  거리엔 사람들로 붐볐다. 다들 어디로 그렇게 바쁘게 가고 있는 것인지. 여자는 이번에도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역시 알 방법은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길을 걸을 뿐이었다.
  눈물 나. 여자는 눈이 따끔따끔한 것을 느꼈다. 먼지라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여자는 몇 번 눈을 깜빡여서 눈을 적셨다. 겨우 눈의 통증이 진정이 된 순간, 여자는 머리의 통증을 느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여우가면이 씌여져 있었다. 가면을 쓴 사람들이 한결같이 여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건물 속 사람들, 광고 안에 사람들까지 가면을 쓴 세상이었다. 여자는 두렵고, 머리가 아팠고, 혼란스러웠다. 여자는 같이 걷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 역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한 가지 가면이 아니라 수 천 개의 가면이었다. 얼굴에 쓰고 있는 가면들이 빠른 속도로 계속 바뀌고 있었다. 여자는 현기증을 느꼈다. 다리에 힘마저 풀리면서 거리 한 복판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짚으면서 괜찮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낮은 자세에서 올려다 본 세상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사람들은 피곤에 찌든 얼굴로 돌아다녔다. 여자는 가면을 쓰는 게 더 나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가 여자를 부축해서 일으켰고 여자는 머리에 손을 짚으면서 대답했다. 제가 빈혈이 있어서 그래요. 이제 괜찮아요……. 남자는 여자를 부축한 채 주차장까지 이끌었다. 남자의 차에 타는 순간, 여자는 눈을 감았다.

  남자는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자는 눈을 뜰 기색이 없었다.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살아있는 게 맞는 걸까. 남자는 여자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았다. 기척이 없었다. 남자는 여자가 마치 시체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는 차에 시동을 켜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어디선가 사고가 났는지 도로는 차들로 가득 메워진 상태였다. 남자는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옆에 여자가 자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필 수 없었다. 남자는 하릴없이 기지개를 켠 뒤 다시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자는 정말 금세 잠이 든 것일까. 어쩌면 여자는 지금 꿈까지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여자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 조심했다.

  여자는 눈을 떴다. 몸에 힘이 없었다.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차의 내부가 먼저 보였다. 그리고 유리창 밖으로는 온통 푸른 물만 보였다. 차는 바다 한 가운데 고요히 떠 있었다. 물결치는 푸른 물결 위로 조각배처럼 떠 있는 차 한 대. 여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앞 뒤, 좌우로 사방을 살폈지만 바다 밖에 보이지 않았다. 푸른빛에 질식해 버릴 지경이었다. 주위에는 섬도, 새도, 구름도 보이지 않았다. 여긴 어디야. 난 어디에,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왜, 어째서! 무서워.
  여자는 토하고 싶었다. 멀미가 났다. 바다에 있어서인지, 차를 타서인지, 둘 다인 건지. 벗어나고 싶은데, 탈출하고 싶은데. 여긴 어디야. 몸에 힘이 차츰 빠져나간다. 숨쉬기조차 버겁다. 차가 유유히 물속에 잠겨든다. 창밖으로 물 속 풍경이 보인다. 해파리가 떠돌고 가오리가 헤엄친다. 울긋불긋한 열대어가 떼를 지은 채로 돌아다닌다. 산호초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는듯한 물고기들도 보인다. 검고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차창에 머리를 부딪친다. 사방이 적막하다. 사람이 없는 곳이라, 그래.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운전석을 바라보았지만, 남자는 없다. 넌 어디에. 여자가 손을 뻗은 순간, 차가 흔들린다. 여자는 차창 밖을 본다. 물고기들이 차 뒤로 쏜살같이 사라져간다. 쫓기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정면을 주시한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범고래다. 세상 전체를 집어 삼키려는 듯한 압도적인 광경이다. 여자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다. 차까지 통째로 암흑이 뒤덮인다. 여자는 눈을 감아버린다. 눈을 뜰 수가 없다. 여긴 어디야. 시야는 어둠뿐이다. 다른 감각은 일체 차단된다.
  …….
  여자는 눈을 떴다. 시야에는 차창 너머로 도로를 채운 차들이 보였다. 창 너머로 각종 도시의 소음들이 들려왔다. 퀘퀘한 냄새가 맡아졌다. 입안에선 쓴맛이 났다. 여자는 딱딱한 버튼을 눌러 차창을 내리고 바깥 공기를 마셨다. 시끄럽고 지겨운 도로가 새삼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왜 이리도 가득 찬 것일까. 여자는 운전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인가요? 남자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일어나셨군요. 차가 막혀서 그렇습니다. 원인은 모르겠습니다. 여자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조금 늦을 것 같아. 차가 막혀서. 응, 형진 씨 차 타고 가는 중이야.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줘……. 여자는 통화를 끝내자마자 다시 남자를 향해 물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남자는 바로 대답했다. 한 삼십 분 정도면 정체 구간을 빠져나갈 것 같습니다.
  여자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밖은 전혀 변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일을 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었나요? 남자는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들겨댔다. 글쎄요, 재미있는 일인지는 모르겠군요. 한번은 결혼식에서 신랑 하객을 선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진짜 중학교 동창이었습니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제가 진짜 하객인지, 아니면 가짜 하객인지 헷갈리더군요.
  여자는 조그맣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랬겠네요. 음…… 그럼 애인 도우미 하시면서 헷갈리신 경우는 없으시고요? 남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아니라 상대방이 그런 적은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여성분이 무심코한 거짓말을 수습하고자 애인 도우미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 일은 잘 해결되었는데, 그 이후로도 연락을 끊지 않으시더군요. 제가 연락을 받지 않자, 급기야 회사로 돈을 내면서까지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사람처럼 이 일 자체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었습니다만, 다행히 만나서 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여자는 이야기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다 물었다. 어떻게 이야기 하셨는데요? 정체가 슬슬 풀리고 있었다. 남자는 차를 앞으로 몰면서 대답했다. 착각은 자유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는 법이라고요.

  맥없이 대화가 끝나자 남자는 묵묵히 운전에 집중했다. 여자는 정체구간을 빠져나가는 순간, 사고 현장을 발견하고는 침묵을 깨트렸다. 사고가 났었네요. 남자도 여자가 말한 곳을 바라보았다. 핏자국이 나 있었고, 우는 사람이 보였고, 울부짖고, 욕하는 사내가 보였다.
  남자는 시선을 돌렸다. 인간은 누구나 우는 법이다. 사람은 눈물을 감추지만, 때론 터져 나올 때가 있다. 사고로 인해 축구선수를 꿈꾸던 자신의 꿈이 무너졌을 때처럼.
  여자는 말없는 남자를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왜 이런 일을 하세요? 좀더 번듯한 일도 있잖아요. 남자는 잠시 여자의 얼굴을 살펴본다. 얼굴엔 어떠한 표정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좀처럼 이 여자의 다른 표정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 표정을 잃은 것일까.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던 것일까. 이 여자는 표정없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아. 남자의 표정은 어두웠다. 글쎄요, 전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번듯한 일도 했죠. 막 노동판에서도 일해 봤고, 회사 생활도 해봤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것도 저를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은 편합니다. 가끔 다른 누군가가 되는 거죠. 싫증 날 일도 없습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때론 재미있거든요.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희영 씨는 무슨 일을 하시죠?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요. 집에만 있어요. 전 무엇 하나 해본 적이 없어요. 아르바이트도 말이죠. 그래서 시도조차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아요.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어요. 여자는 과거를 떠올린다. 언제나 혼자 밥을 먹고, 숙제를 하고, 등하교를 했다.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다. 대학교 다닐 때는 어떤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학원마냥 공부만 하다 졸업해버렸다. 여자에겐 사람이 낯설었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아르헨티나에 가고 싶은 거죠? 왜 이렇게 부모를 속이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하는 것입니까? 여자는 중얼거렸다. 돈 크라이 포 미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여, 울지 말아요. 여긴, 지나치게 빠르고 삭막해요. 난 이곳이 낯설어요. 느긋한 여유가 있고, 전통적인 탱고음악이 거리 곳곳마다 흘러나오고 있을 것 같은, 그곳. 거기에 발을 딛는 순간, 전 지워지고 말 거예요. 그러고 싶어요. 그래야 해요. 남자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막연한 동경이군요. 그곳은 이제 폐허가 되어버린 희망이 땅이죠. 제가 아는 건, 축구를 사랑하는 나라라는 것뿐이지만. 여자는 남자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제가 절실히 무엇을 행하고 싶다는 의지죠.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요……. 의지. 남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자신에겐 그런 의지가 있었던가. 자문을 해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어디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항상 많은 일을 해왔지만, 어떠한 일도 스스로 원한 게 아니었다. 일 속에 파묻혀 살고 있었을 뿐이다. 이미 사라진 꿈에 아직 매어 있었다. 착각이 족쇄처럼 자신의 발목을 죄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발을 내딛을 수가 없어.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면, 길이 보일 것 같은데. 언제나 제자리야. 사고 현장을 벗어나자 도로가 시원하게 뚫렸다.
  여자가 말했다. 아르헨티나에는 세계 최대의 도로 폭을 가진 도로가 있대요. 한때 웅장했던 아르헨티나의 경제력을 말해주는 거죠. 과연 얼마나 넓을까요? 남자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봤자, 도로는 도로일 뿐이죠. 차가 달리는 길이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여자는 남자의 대답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곳은 여유가 몸에 배어있다는 말에, 전 제 고향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여유일 뿐이라는 것을 여기선 누구도 이해해주지 못하니까요. 차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남자가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장소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한식점이었다. 간판은 오래된 듯 촌스러웠지만 막상 내부는 의외로 깔끔하고 세련되었다. 방안으로 들어가자 한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짧게 컷한 머리카락과 자줏빛 정장 차림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다소곳한 태도로 앉아 있다가 방석을 꺼내며 자리를 권했다.
  남자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자기소개를 했다. 내심 불안했던 여자는 남자의 당당한 모습에 안도했다. 지금 남자의 연기는 누가 봐도 여자의 남자친구로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훌륭했다. 여자의 엄마가 식사가 끝날 즈음에 남자를 향해 물었다. 우리 애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나요? 남자는 갑작스런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아직 젊기에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지금 이 순간 저는 그렇습니다. 질문은 연이어 계속되었다. 그곳은 치안이 나쁘다고 들었어요. 딸애를 지켜줄 자신이 있나요? 남자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이곳의 밤거리나 그곳이나 위험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이 특별히 치안이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사실 세계 어디나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걱정 붙들어 매시어도 괜찮습니다. 세계 어디라도 제가 있는 한, 따님은 안전할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의 어깨까지 감싸 잡으면서 미소 지었다.
  여자는 당황하면서도 그런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다행히 여자의 엄마는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이번에는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엄마, 저 형진 씨랑 잘 다녀올게요. 걱정 붙들어 매시고 이제 허락해 주세요. 여자의 엄마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종업원이 식사를 치운 뒤, 차를 내왔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여자의 엄마는 애매한 대답을 했다. 내가 허락할 문제는 아니잖니. 다만 어미로서 네 신변을 문제 삼을 권리를 행사하는 것뿐이란다.

  차를 마시고 난 다음에 여자와 약속된 대로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회사에 다시 들어가 봐야 해서요.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여자의 엄마는 얼굴에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다음에 보도록 해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며 살짝 웃은 다음에 밖으로 나갔다. 신발을 신고 가게 문을 나서면서 남자는 걱정이 들었다. 여자의 표정은 언제나 딱딱했고, 여자의 엄마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자기도 내내 여자를 따라서 딱딱한 표정을 지어야 했던 것일까. 남자는 이미 지나간 일이니 더 생각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는 몇 시간 후에 저녁 약속이 있으므로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매번 일이 끝난 후, 남자는 김형진이 아닌 김진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랜만에 진짜 자신의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여자는 차를 다 마실 때까지 엄마가 말이 없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엄마의 표정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저 여유로운 미소의 의미는 무엇일까.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듯한 아이 같은 표정. 마침내 차를 다 마시고 엄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여자는 엄마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오랜만에 화장을 해서 무척이나 화사해 보였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더구나. 진짜로 사귀는 건 어떻겠니? 고대하던 엄마의 입이 열리자 여자는 머리에 손을 짚었다.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엄마는 바로 간파한 것이다. 동생의 말이 맞았다. 엄마를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자신도 처음부터 이런 식은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여자는 이런 짓까지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일지도.
  여자는 또박또박 말했다. 전 반드시 혼자서 갈 거니까, 제발 말리지 말아요. 엄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세상에 어떤 엄마가 딸애를 혼자 그런 곳에 보내겠니. 그럴 순 없다. 여자는 소리를 높였다. 엄마! 진짜―!
  엄마는 여자의 말을 끊었다. 그만하자. 더 얘기할 게 뭐가 있니. 네가 포기해라. 내가 어떻게 널 혼자 보낼 수가 있겠니. 미치지 않고서야.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서면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전장이었다. 여자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가요, 간다고요! 그러나 엄마는 단호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미쳤니. 그만해라, 애야. 이미 한 번 오장육부가 타들어가는 고통을 겪었어. 다신 안 된다. 다시는! 여자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가야만 한다고요. 가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어요! 미치겠어요! 제발 저를 이해해주세요!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돼!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였다. 종업원이 한 걸음에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여자는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남자는 술이 술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쓴맛이라기보다는 맹맹한 물맛 같았다. 머릿속엔 자꾸 낮에 만난 여자의 무표정이 떠올랐다. 어떤 표정도 담아보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뭘 그렇게 혼자 죽상이야. 자, 신나게 마시자. 이렇게 다 모인 것도 정말 오랜만인데. 고등학교 친구들이 계속 술을 권했다. 고등학교 때와는 몰라보게 달라진 친구들도 있었고, 그대로인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똑같다 하더라도 많은 게 달라진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편했지만 한 편으로는 지나간 세월이 그대로 느껴지는 순간인지라 섬뜩하기도 했다. 다른 술자리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또 계속 다르게 살아가겠구나. 다신 그때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 남자는 술잔을 들이켰다. 그러자 또다시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리 무표정한 그 여자라도 술에 취한다면 미소를 짓지 않을까?
  남자는 확인하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문자를 보내봐야겠어. 남자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거기엔 이미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남자는 또 친구가 따라준 술을 한번에 들이켰다. 이 여자 실패했구나. 내 탓도 있겠지. 남자는 지체없이 답문을 보냈다. 아닙니다. 그런데 내일 시간 되세요? 짧은 답문이 곧바로 도착했다. 네. 괜찮아요.

  휘슬 소리가 울리면서 축구 경기가 시작되었다. 양 팀은 오랜 라이벌이라 응원 열기가 뜨거웠다. 휴지 폭탄이 경기장을 채우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사람들의 응원 소리에 귀청이 멎을 지경이었다. 연이어 파도타기 응원이 물결쳤다. 남자는 두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 거기야! 그곳으로 빠져! 패스하라고, 패스! 슛!
  여자는 무심한 눈초리로 양팔을 낀 채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여자는 경기가 흥미가 없는 듯했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딴 짓을 하진 않았다. 곧 치열한 공방 끝에 하프 타임이 되었다. 스코어는 일대일이었다. 양 팀의 전력은 비슷했고, 경기는 팽팽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한 쪽은 공격이 강하고 한 쪽은 수비가 견고한대도 두 팀은 같은 스타일의 팀 같았다. 라이벌전이라는 의식으로 인해 선수들이 치열해진 까닭일 것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따뜻한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미안해요. 재미없지요?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런 곳은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한걸요. 남자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왜 그렇게 표정이 없어요? 여자는 잘 알아듣지 못 했다. 네? 남자는 곧장 다시 물었다. 왜 항상 땅을 보며 걷나요? 왜 항상 사람 눈을 마주치지 못 합니까? 왜 매사에 표정이 없는 거죠?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선을 남자에게 돌려서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에는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보였다. 순간, 여자는 호흡을 멈췄다. 경기장을 메운 몇 만 명의 사람들이 전부 가면을 쓰고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축구를 하고 있는 선수들도 전부 멈춰서 가면을 쓴 채 여자를 노려보았다.
  여자는 뒷걸음질 치려 했다. 남자가 어깨를 붙잡았다. 남자는 이번에도 계속 변하는 수십 가지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여자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여자가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친 순간이었다. 으아아앙! 남자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여자는 흐느끼며 말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요, 친구 집에 놀러갔던 적이 있었어요. 정신없이 놀고 있었어요. 가면을 쓴 사람들이 들어온 줄도 모른 채. 그리고 기억이 없어요. 같이 춤을 추고 놀았는지, 우리도 가면을 썼는지, 밖으로 나왔는지, 지하로 숨었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냥 가면만이, 선명한 가면만이 기억나는 거예요. 어느 날, 전 제 집에 그냥 누워 있어요. 가면을 쓴 사람들은 없었어요. 친구도 다시는 볼 수 없어요. 나중에야 알았죠. 제 친구와 제가 그 날 납치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 저만 살아 돌아왔다는 걸 말이에요. 그간의 기억을 전 차마 불러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후부터 사람들 얼굴이 하나같이 가면으로 보이는 환각을 겪곤 해요. 무서웠어요. 전 사람들이 버거워요. 저도 버거워요. 여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남자는 손으로 여자의 눈물을 훔쳤다. 남자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여자는 그 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마주 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람으로 뒤덮인 도로에서 사람을 피해 홀로 운전을 해온 것이다.
  남자는 여자와 눈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저는 말이죠, 어렸을 때부터 축구 선수가 꿈이었습니다. 전 제가 반드시 축구 선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만 도로를 건너다가 오토바이에 치이고 말았죠. 한 순간이었습니다. 너무나 빨랐고, 갑작스럽기 때문에 믿기지 않았죠.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는데, 다시는 축구를 할 수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세상엔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것을 그때 배웠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미련 때문인지, 축구를 보러 다닐 뿐이죠. 전 많은 일을 해왔어요. 대학교 때도 많은 역할을 맡았지만 어느 하나 의지가 결여되어 있었죠. 제 의지로 행하는 건 축구 경기장을 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어요. 노래가사처럼 우린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다는 거 말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누구나 있어요.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저 맡게 된 게 아니라, 그저 하게 된 게 아니라, 해야만 하는 것이고, 하면 잘 해낼 수 있다는 겁니다. 남자의 가면이 바뀌는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여자는 다시금 눈물을 흘렸다. 어제 창에 비친 제 얼굴을 찾았어요. 끔찍한 모습이었어요. 거기엔 눈도, 코도, 입도 없는 귀신같은 얼굴이 비치고 있었어요. 그게…… 저였어요. 잊을 수가 없어요. 어제도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엄마가 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보다, 그게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게 더 괴로운 거예요. 미칠 것만 같아요, 아니 이미 미친 걸까요? 뭘 어떻게 하라는 걸까요? 살수가 없어요. 누가 어떻게 살라고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해야만 하는 게 뭔데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걸요! 어떻게, 어떻게……. 여자는 쉴새없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가면이 금이 갔다. 부서져 내린다. 여자는 놀란 눈초리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무엇도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저 안쓰러운 얼굴로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눈물을 훔치다가 두 손으로 여자의 얼굴을 매만졌다. 괜찮습니다. 다 괜찮아요. 여기에 눈이 있잖아요. 이렇게 오똑한 코가 있고, 예쁜 입술이 있는데, 이렇게 느껴지는데, 괜찮아요. 돈 크라이 포 미 아르헨티나……. 울지 말아요.

  여자는 눈을 떴다. 공항은 북적거리는 사람들로 인해 시끄러웠다. 창밖으로 거대한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탈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거대한 쇠 덩어리가 하늘로 천천히 떠오른다. 실제가 아닌 것 같다. 도대체 현실 속엔 왜 믿기지 않는 일들이 많은 것일까. 엄마가 갑자기 그곳에 가라고 한 것은 강하게 반대한 지 며칠이 지난 후였다. 여자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엄마가 갑자기 아르헨티나 행을 허락한 이유를. 그 날 식당에서 난리를 친 것 가지고 엄마가 변심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호되게 혼이 나고, 절대로 보낼 수 없다는 입장만 다시 확인했을 뿐이니까. 그런데 지금 자신은 공항에 서 있다. 이게 현실일까. 비행기를 타면 갑자기 폭발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모든 게 사라지는 게 아닐까.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여자는 눈을 비볐다. 심한 피로가 느껴졌다. 이미 오랜 여행을 하고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난 이미 갔다가 돌아오는 길인지도 몰라. 그런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여자는 두려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비행기에 탑승하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그건 마치, 처음 걷기를 시작하는 아이와 닮았다. 여자는 벽을 짚으면서 가까스로 버티고 섰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제복을 입은 스튜어디스가 여자의 팔을 잡아주며 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팔을 뿌리쳤다. 괜찮아요. 여자는 스튜어디스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놀라서 또 균형을 잃을 뻔했다. 스튜어디스는 흰 여우가면을 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또 가면을 쓰고 있었다. 머리가 또 지끈지끈 아팠다.
  스튜어디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여자를 부축했다. 여자는 또 스튜어디스를 밀치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스튜어디스는 얼마 더 서성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혼자 남은 여자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여자는 눈을 깜빡여 보았다. 변한 건 없었다.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여자는 두려운 나머지 차마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까. 어디로 가야 벗어날 수 있을까, 가면들에게. 아니, 벗어나는 게 다가 아니다. 그건 해결이 아니니까. 여자는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한 걸음씩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눈도, 코도, 입도 느껴졌다. 그래, 여기에 난 지금 이대로 있어. 여자는 겨우 몇 발짝 걷는대도 심하게 땀을 흘려댔다. 눈가엔 또다시 눈물이 맺혔다. 왜 이렇게 걷는 게 힘이 든 건지, 새로운 곳에 내리는 것도 마찬가지인 건지.
  등산을 한 것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여자는 마침내 자신의 좌석 앞에 당도했다. 해야만 하는 것이고, 하면 결국 잘해낼 수 있다는 겁니다. 여자는 먼저 어깨에 멘 가방을 풀었다. 드디어 그곳으로 출발인 거야. 그러고 보니 그 형진이라는 남자에게 고맙다는 말도 못 했네. 떠나는 마당에 생각나다니. 여자는 아쉬움을 느끼며 자리에 앉다가 옆에 앉은 남자의 얼굴을 덮고 있던 신문을 떨어트렸다. 여자는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에는 가면 같은 게 없었다. 그리고 또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너무나 평범해 보여서 기억에 남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렇지만 다른 비슷한 인상의 사람을 착각한 것이 아닌 분명 그 남자다. 여자는 당황한 나머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 형진 씨?
  남자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오, 김진형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렇게 옆자리 앉은 것도 인연인데, 이야기라도 나누면서 가죠. 혹시 압니까? 제가 희영 씨의 진짜 남자친구라도 될지 말입니다. 여자는 그제야 엄마가 갑자기 여행을 허락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비행기가 서서히 활주로를 주행하기 시작했다. 승객 여러분은 안전벨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여자는 왠지 이제는 가면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승객 여러분은 가면을 벗어주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비행기가 창공을 향해 이륙했다. 남자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전 아르헨티나에 가면 우선 축구 경기장에 가볼 겁니다. 한국에 아르헨티나 리그 소식을 전하고 싶어요. 여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말을 들었다. 희영 씨는 뭐하실 거예요? 여자는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그곳에서 탱고를 배울 거예요. 함께 추시지 않겠어요? 여자는 얼마만인지 모를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댓글 3
  • No Profile
    진아 06.01.03 16:45 댓글 수정 삭제
    날개님 게시판에서 진아나 mirror 클릭하셔서 주소와 우편물 받을 주소 남겨주세요. 자유 게시판에 비밀글로 남기셔도 좋습니다. ^^
  • No Profile
    mirror 06.01.05 20:05 댓글 수정 삭제
    희진님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 보내드렸습니다.
    건필하세요. ^^
  • No Profile
    mirror 06.04.24 03:02 댓글 수정 삭제
    날개님에게는 "딜비쉬" 보내드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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