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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나비 아이들

2005.03.25 23:5303.25

“귀향”은 주제와 사건을 읽기 어려웠습니다.

“만약”은 상황이 상당히 진부하고 역시 주제가 모호하고 결말 역시 흐릿했습니다.
같은 기억을 가지고 같은 모습을 가졌더라도 초기화되어서 돌아온 건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와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사랑을 느끼는 이야기인데, 그걸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질 건지, 어떻게 극복할 건지 또는 어떻게 처절하게 실패하고 교훈을 얻는지, 가 이야기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비 선안”은 의도에는 맞은 것 같지만 소설이라고 보긴 힘든 면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주인공의 고통도, 기쁨도 너무 상식적인 수준에서 묘사해 감흥을 받기도 어려웠고 전체적으로 좀 싱거웠습니다.

“술 한 잔 두드리다”는 소재를 소화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재미있었을 수도 있는 소재로 보여 아쉬웠습니다.

“나비 아이들”은 지나치게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해 버린 점이 흠이었습니다.
아이들은 8살이 최고령이라는데 아이들의 대사는 적어도 중고생은 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옷 투정으로 시작하는데 그 것과 본 내용으로 이어지는 고리가 약했습니다.
계속 자신은 예쁘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메인 소재랑은 별 상관이 없어 보였고요.
하지만 메인 주제가 뚜렷했고, 서술이 차분한 점이 돋보였습니다.

우수 단편 선정을 축하드리며 게시판에서 “진아” 혹은 “mirror"을 클릭하신 후 연락 가능한 이메일 주소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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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아이들 ( rubycrow )



나는, 정말이지 예쁜 옷이 갖고 싶었다.

아직 어린 나이, 이제 여섯 살의 나이에 옷을 탐내는 것은 당연한 거라고 보통 주변에서는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생각'해 주지만 그것을 용납해 주지는 않는다. 어머니는 화를 내셨다.

"옷은 충분하잖아. 저 원피스를 입고 가렴."

"하지만 저 옷은, 아침에도 입었는걸...."

"맙소사! 얘, 주영아. 옷은 일주일에 열네 번 갈아입는 게 아냐. 물론 더러워진다면 예외지만 말야. 응, 알았니?"

나는 입을 댓발은 내밀었다. 어머니는 언짢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시다가 한숨을 쉬었다.

"옷장에서 맘에 드는 걸로 골라 입으렴. 그렇지만 내일도 또 그러면 안 되요. 엄마 빨래하기도 힘드니까. 자, 어서 가렴. 놀이방에 늦겠어. 얘, 주영아, 뭘 하는 거니?"

"나, 옷장 안의 옷은 싫은걸. 새 옷을 갖고 싶어."

어머니가 불같이 분노한 것은, 어른들의 경제관념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훌쩍거리며 입고 간 옷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하얀 바탕에 옅은 분홍색 하트가 알록달록한 옷은 내가 갖고 있는 옷 중에서도 예쁜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나는, 더 예쁜 옷이 갖고 싶었다. 더 예쁜 옷. 아주 예쁜 옷이.

"주영이 왔니?"

활짝 웃는 예주 언니를 바라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더욱 간절히 했다. 하얀 치마 위에 분홍 망사 천이 덮인 치마. 하얀 치맛단에는 어김없이 하얀 레이스가 달려 있다. 하얀 블라우스의 소맷단과 목을 두르는 선에도 레이스가 달려 있고 꼼꼼히 잡힌 가슴 부분의 핀턱과 진주 단추. 예주 언니의 희고 가느다란 팔다리와 작은 얼굴에 정말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언니는 정말 예쁘다. 오늘도 언니는 가장 예쁜 나비다.

"얼굴이 왜 울상이니, 우리 주영이. 엄마에게 혼났어?"

"옷, 안 사주는 걸."

끅끅 밀려오는 울음을 나는 억지로 참아냈다. 놀이방 안에는 여자애들뿐만 아니라 남자애들도 있으니까. 여자애들은 옷에 대한 나의 갈망을 잘 이해해 주었지만 남자애들은 그러지 못했다. 놀려댄다거나, 아니면 그나마 입고 있는 옷을 잡아당겨 괴롭힌다거나 둘 중의 하나겠지. 아니나다를까, 남자애 중 하나가 놀려댔다.

"옷 안 사준다고 울었어? 너 바보냐?"

"시끄러!"

나는 어머니에게 화난 것까지 몽땅 쏟아부어, 엄청나게 거센 소리로 말했다. 남자애는 내 기세에 움찔 놀랐다가 놀란 것이 창피했는지 더욱 심하게 이죽거렸다.

"울보, 바보 같으니. 정말 보기 흉해. 못생긴 주제에."

"으앙~!"

나는 기어이 바닥에 퍼질러 앉아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예주 언니는 남자애에게 화를 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모습이 더 보기 흉해. 친구를 울릴 줄밖에 모르다니, 울보보다 더 질이 나빠!"

놀이방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예주 언니, 가장 예쁜 예주 언니의 말이었다. 남자애는 움츠러들었고 풀이 죽어 버렸다. 예주 언니는 늘 가지고 다니는 하얀 레이스 달린 손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 주며 위로하였다.

"신경 쓰지 마. 주영인 아주 예뻐. 예쁘고말고, 주영인 이 놀이방에서 가장 예쁜 아이 중 하나인걸. 주영인 정말 예쁜 나비야."

거짓말, 거짓말이야. 가장 예쁜 나비는 예주 언니야. 난 예주 언니처럼 예쁜 나비는 절대 되지 못할 거야. 난 키도 작고, 통통하니 살이 쪘고 머리숱도 예주 언니처럼 풍성하고 검지도 않은걸. 거기에다 옷도 초라하니까....난 절대 예쁜 나비가 될 수 없어. 난 아주 못생긴 나비야. 엉엉,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너무나도 서러웠다.




언제나 그렇듯, 놀이방의 선생님들은 꽤나 무심한 편이었다.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졸고, 혹은 딴짓을 하는 동안 서서히 놀이방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부은 얼굴을 들고 예주 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희고 보드랗고 가냘픈 손. 정말이지 예쁜 예주 언니. 가장 예쁜 나비.

"그 놀이터야, 알지?"

보통 이 무리의 선봉으로 나서는 준규가 입을 열었다. 큰 키에 잘생긴 이목구비를 가진 준규는 성격도 침착하고 어른스러워서, 사내들 무리 사이에서는 그가 언제나 대장이었다.달리기든 뭐든 준규는 뭐든 잘했고 누구에게나 귀여움받았지만 잘난 체하는 면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사내아이들은 그를 질투하면서도 존경했고 여자애들은 그를 은근히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선뜻 좋아지질 않았다. 그의 행동에는 왠지 '아이같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는, 나비에 적당한 아이는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물론 이런 말을 했다가는 애들에게 공격받을지도 모른다. 등 뒤에서 비아냥거려지거나....같은 여자애들에게 공격당하기에도 충분할지도. 하지만 준규는 예주 언니와 비슷하면서도 예주 언니와 달랐다. 어른스러우면서도 꽃 한 송이에 나와 같이 뛰고 좋아하는 예주 언니와, 언제나 침착한 준규가 같을 수는 없었다.

"얘, 주영아."

잠시 딴 생각을 하자 예주 언니가 손을 꼭 쥐어 잡아당기면서 슬며시 웃었다. 나는 아, 하고 멋적어했다.

"그 놀이터야, 알지?"

준규가 다시 물어왔다.

"응, 나는 하얀 나비를 보러 갈 거야."

"나는 분홍 나비를."

나와 예주 언니가 대답하자 준규는 고개를 끄덕이고 걸어갔다. 예주 언니가 피식 웃으며 내 등을 찔렀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혹시 준규?"

"뭐, 뭐야!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예주 언니가 생각하는 것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는 건 분명했지만, 준규를 생각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예주 언니는 흐흥, 하고 웃었고 나는 얼굴이 벌개지는 것을 느끼며 예주 언니를 세차게 잡아당겼다.

"어서 놀이터로 가자!"





놀이터에는 조금씩 모여 온다는 것이 규칙이었다. 눈에 뜨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놀이방의 모든 아이들이 와서도 안 되었다. 어느 한쪽이 자주 오지 않게 비율을 잡는 것은 준규였고 그런 준규의 결정에 누구 하나 토를 단 적이 없다. 실제로 준규는 공정했다.

두명, 세 명 무리지어 놀이터에 아이들이 모였다. 준규는 가만히 수를 세었다. 입을 천천히 놀리며 준규가 겨우 입을 열었다.

"....열둘. 정확해."

"오늘은 왜 열둘이야? 더 많이 와도 되었을 텐데."

서슴없이 물은 남자애는 '준규가 알아서 할 텐데 뭘 나서'라는 뜻의 눈빛을 여자애들에게 받아야 했다. 그러나 준규는 심상하게 답했다.

"나비가 셋이 죽었거든."

순간 조용해졌다.





"자, 시작하자."

준규가 아이들을 재촉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어서."

나는, 조금은 긴장하고 있었다. 예주 언니가 활짝 웃었다.

"자, 이리 와. 주영아, 같이 날자."

순간 마음 한 구석이 환하게 밝아졌다. 께름칙한 것이 모두 날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예쁘지 않다. 나는 잘 날지도 못한다. 하지만 예쁜 예주 언니 옆에서 날 수 있는 나비는 나일 테니까. 예주 언니는 날 단 하나의 친구로 인정해 주었으니까.

"차례대로 줄을 서고."

준규가 담담히 말한다. 나는 예주 언니의 손을 꼭 잡았다. 날 때 걸리적거리겠지만, 그래도 무서우니까.

"자, 됐어."

순간, 머릿속에 전류가 인다. 온몸을 감싸는 찌르르한 느낌. 등에서 솟아나는 간지러운 기분. 팔다리가 졸아드는 느낌. 천천히 화한 기분이 퍼져나간다. 피부에 혀가 돋아나 박하사탕을 맛보는 느낌처럼, 달콤하고 시원하며 기분좋다.

그리고 나는, 하늘을 난다.

아, 나는, 하늘을 날고 있다. 이 바람, 이 상쾌함, 이 햇빛. 나는,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다. 예주 언니가 내 주위를 빙글 돌며 난다. 예주 언니는 준규에게 말했던 것처럼 분홍 나비가 되어 있었다. 날개의 끝으로 갈수록 점점이 진하게 붉어지는 붉은빛, 날개의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이 희어지는 분홍빛. 가느다란 선을 그리는 날개맥마저 아름다운 예주 언니의 날개. 마치 꽃잎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예주 언니. 언니는, 가장, 아름다운 나비.

"주영이, 예쁜 흰나비구나."

거짓말, 나는 예쁘지 않아. 빙글 돌면서 내 몸을 확인해 보지 않아도 나는 예주 언니의 날개처럼 점점이 짙어지는 아름다운 빛 대신 얼룩덜룩하게 검정이나 노랑이 섞인 흰나비겠지. 나는 입을 비죽이 내밀었지만 예주 언니에겐 내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날아오른다!"

남자애들이 소리친다. 남자애들은 기실 옷에 신경쓰지 않는다.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데 옷이 얼마간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고 여자애들은 조바심내지만, 남자애들은 아름다운 나비엔 관심이 없다.

남자애들은 강한 나비, 커다란 나비가 되고 싶어한다. 그것이 진짜 나비와 나비 아이들의 다른 점이다-라고 말한 것은 준규였다. 그러나 기실 그렇게 말하는 준규는 어떤 남자아이 나비보다 강하고 큰 날개를 가졌지만, 아이들과 시합하지 않았다. 아니 가끔씩은 했다. 그러나 더 높이 날 수 없다고 풀죽어하는 남자아이들을 북돋우고 자극하기 위한 시합 외엔 참가하려 하지 않았다.

"난, 더 높이 날고 싶어."

.....그리고 준규 말고 또 하나 예외가 있다. 준규가 아이답지 않은 것처럼, 아이답지 않은 예주 언니. 예주 언니는 우리 놀이방의 여자아이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개를 가졌음에도 좀더 높이 날고 싶어하고 좀더 강한 날개를 원한다. 남자아이들은 그런 점에서 예주 언니를 꽤나 좋아하고 있었다. 뭐, 자신들을 이해해 주는 여자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날아오른다!"

남자애들이 다시 소리친다. 예주 언니는 그 점점이 빛나는 분홍빛 날개로 세차게 바람을 가른다. 나도 뒤를 따른다. 예주 언니, 예주 언니. 정말이지 예쁜 나비. 나는, 예쁘지 않고 수줍어서 여자아이들 사이에 잘 끼지 않는다. 그런 나를 여자아이들 사이에 끼게 해 준 예주 언니는, 정말이지 상냥한 예주 언니는 마치 공주님 같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마에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둥글게 서서 나를 걱정스러운 듯 내려보고 있었다. 내가 깨어나자 환호성을 질렀지만 준규의 질타에 얌전히들 입을 다물었다.

"날다가 정신을 잃었어."

준규가 말해 주었다.

"약한 날개엔 너무 높이, 거세게 날았어. 그래서 바람에 휩쓸린 거야."

"준규가 멋지게 자기 날개로 받아서 착륙했어. 진짜 멋졌어!"

여자애들이 꺄아- 하고 본인이 있는 것도 무시하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준규의 얼굴엔 부끄러움도 그렇다고 잘난 체도 없이 덤덤했지만.

"그나저나 다음부터는 조심해."

"응, 잘못했어."

"예주 누나도 마찬가지야."

응? 나는 당황했다. 예주 언니 잘못은 없어. 내 잘못인데. 내 잘못인데....

"같이 조를 짰으면 같이 행동하던가 아니면 날아오르기 직전에 다시 조를 짰어야지. 나비가 되면 아이일 때보다 더 위험하니까 조별로 행동하자고 한 거 잊었어? 주영이가 날개가 약하니 예주 누나가 맞춰줘야 할 거 아냐. 단독행동 하는 거, 좋지 않다는 거 알고 있잖아?"

"응, 정말 주영이에게도 너에게도 미안해."

"예주 언니는 잘못한 거 없어!"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말했다.

"내가 바보라서 그런거야. 내 날개가 둔해서 그래. 내가...."

서러웠다. 예주 언니처럼 예쁜 날개가 아닌 것도, 강한 날개가 아닌 것도....준규는 혀를 찼다.

"나비가 되는 걸,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냐? 뭐 날개 힘이 좀 약하다고 해서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우리들에겐 중요해."

나를 달래던 예주 언니가 정색을 했다.

"어떻게 중요하지 않을 수가 있지? 우리는 아이들이야. 아이들에게 나비가 된다는 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야?"

"우리는 아이들이야-라니 인상적인 말이네, 예주 누나. 아이들은 보통 자신이 아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데 말이야. '어린애' 소릴 들으면 빽하니 울어버리는 게 애들인데."

예주 언니는 조금 창백해졌다. 준규는 한숨을 쉬었다.

"딱히 뭐라고 하자는 게 아니잖아. 나는 그저, 이런 사소한 일로 상처받는 게 싫을 뿐이야. 강한 날개나 예쁜 날개가 아니라고 해도 무슨 상관인지. 어차피 어른이 되면 나비가 되었던 기억 같은 건 잊게 되잖아."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그래, 어른이 되면 모두 잊는다. 나의 어머니도 나의 아버지도 어렸을 적에는 나비였을 텐데, 한번쯤 나비가 되어 창공을 휘저었을 텐데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본능처럼, 아이들은 나비가 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어른이 되고, 그들은 나비가 되는 법도 나비가 되었을 때의 기억도 잊고 만다.

나비가 되는 법을 잊는다. 나비가 되었을 때의 기억도 잊는다. 그래, 그것이 바로 '나비의 죽음'이다.

"그런 말 하지 마!"

새파랗게 질려 여자아이 하나가 항의했다. 그런 거 생각하고 싶지 않아. 조금만 더 이 시간을 즐기고 싶어. 아이들은 다들 그렇게 바랄 것이다. 어느 순간 나비가 되는 법을 잊어버리고 '그 놀이터야. 알지?'라는 신호에 어리둥절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아이들은 엄습하는 공포감에 두려워한다. 언젠가는 자신들도 잊을지 모른다. 창공을 뛰노는 이 즐거움을, 이 바람을, 그리고 이 햇살을. 얼굴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에 녹아들 듯하던 이 마음도.

몇몇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준규는 작게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잘못 말했다."

그래도 아이들을 가라앉히지는 못한 모양인지 아이들은 흑흑거리며 작은 울음을 쏟아냈다. 예주 언니가 조금 나무라듯 말했다.

"그런 말 하지마. 나비가 죽을 때를 자꾸 생각하게 되어 괴로워질 테니까."

"예주 누나, 예전에 들은 말이 있는데 말야."

준규는 골똘히 생각하다 말했다.

"사람들에게는, 뭐랄까 방어 본능이 있다나 봐. 이를테면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 죽게 되지. 이것은 자연의 섭리야. 어떻게 해서든간에, 늙어 죽건 굶어 죽건 사고로 죽건간에 죽게 되어버려. 그리고 어떻게 죽건간에-뭐 클레오파트라 같은 방법을 쓴다면 예외일까- 단말마의 고통을 겪어. 그런데, 그런 필멸자인 우리들은 말이야, 일상 생활에서 죽음의 공포를 대부분 느끼지 않고 살아. 급박한 위기상황 같은 건 예외로 치고,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느끼지 않는 거야. 그것을 신의 자비로 설명해야 될까 아니면 뭐라고 해야 될까. 임종이 가까워 오는 사람들이야 예외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언젠가 자신은 죽는데도 불구하고- 느끼지 않는다는 거야."

나는 들어본 적이 있는 클레오파트라, 뭐더라 하는 단어에 정신이 쏠려 있었다. 그러나 예주 언니의 얼굴은 정말 하얗게 질려 있어서, 나는 두려워졌다. 나는 예주 언니의 손을 더듬어 붙들었다. 예주 언니는 정말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 이후에는, 별로 변함없는 나날이었다. 아니, 예주 언니는 조금 달라졌다. 예주 언니는 더 높이 날아오르려 들었다. 더 높이, 아주 높이. 광적으로 미친 듯이 하늘을 내달리는 예주 언니의 모습은 왠지 섬뜩하도록 아름다웠다. 몇 번씩이고, 몇 번씩이고....왜 그러는지는 다들 몰랐다. 준규만은 어렴풋이 눈치챈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물어도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준규는 내가 싫다고 고집부리는데도 조를 바꾸라고 지시해서, 나는 준규와 조를 짜게 되었다. 여자아이들은 부러워했지만 나는 관심조차 없었다. 나는 가끔씩 표면에 가까운 곳을 날아다니는 것 외엔 더 높이 날지 않았다. 나도 준규도 예주 언니를 보고 있었다. 준규 외에 가장 잘 나는 남자애와 조를 짜게 된 예주 언니는, 상공 높이 날아서 그대로 돌멩이처럼 툭 떨어져내리다 표면 가까운 곳에서 날아오르는 무서운 곡예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말 상공에서 돌멩이처럼 툭 떨어져 내려, 준규가 아슬아슬하게 구한 것도 여러번이었다. 나는 예주 언니의 그런 모습에 몇 번을 울었지만 예주 언니는 마치 뭣에 홀린 듯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어느 날이었다. 그런 나날로부터 오래지 않은 날이었다. 나는 그 날을 잊지 못할 것이다. 절대로.

준규는 늘 그렇듯 다가와 물었다.

"그 놀이터야. 알지?"

"응, 나는 노란 나비를 보러 갈래."

그렇게 대답하면 나는 예주 언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 하얗고 아름다운 이목구비에 떠오른 표정은 불가사의했고 난해했다. 어리둥절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예주 언니는 천천히 물었다.

"놀이터에 나비가 있어? 어떤 나비?"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가서 준규에게 끌려왔다. 예주 언니는 따라오려고 했지만 준규가 아이들을 시켜 선생님이 예주 언니를 찾도록 만든 모양이었다. 나는 억지로라도 예주 언니를 따라오게 하려고 고집부리다가 준규의 무서운 부라림을 받았다.

놀이터에 도착해서 나는 울었다. 하늘을 날 생각 따윈 절대 나지 않았다. 나비가 되기도 싫었다. 이럴 리가 없어. 예주 언니의 나비가 죽다니. 예주 언니는 정말 예쁜 나비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어떻게, 어떻게. 대체 어떻게.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야? 아이들을 예주 누나에게 들키게 할 셈이었어?"

"보면...떠오를지도 모르잖아! 놀이터를 보면...떠오를지도 모른다고!"

"바랄 걸 바래. 그럴 수 있었다면 어른들도 나비가 될 수 있을걸."

"너무해. 예주 언니가....얼마나 나비가 되는 걸 좋아했는데! 정말 좋아했다고! 미친 듯이 상공을 날아올랐는데...너도 알잖아!"

"마지막 발악이었을 뿐이야. 보통 사람들은 죽음을 체감하지 못하지. 누구나 죽는데도 불구하고, 평온하게 죽음의 공포 같은 건 느끼지 못하고 일상을 살아가....그건 축복이지. 그러나 임종시의 사람은 달라. 생생하게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예주 누나는 누나의 나비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예주 누나는 나비의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필사적이었던 거야."

"거짓말이야!"

"내가 '나비의 죽음'에 대해 말했을 때, 나를 나무라던 예주 누나의 말이 생각나? 나는 내가 한 말로 아이들이 운 것에 대해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아이들은 곧 내가 말한 '나비의 죽음'에 대해 잊을 테니까. 아이들의 나비는 수명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평온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중학생,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 혹은 회사원처럼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못해. 느끼더라도 곧 까먹지. '나비가 죽을 때를 자꾸 생각하게 되어 괴로워질' 일은 없단 말이야. 하지만 예주 누나의 나비는 임종이 가까웠기 때문에 예주 누나는 죽음의 공포를 생생하게 느낀 거지. 비록 울지는 않았더라도 , 내 말에 운 아이들보다 예주 누나는 더 심한 충격을 받았던 거야."

"어째서, 어째서 너 따위가!"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일어서서 악을 썼다. 아이들 몇이 당황해서 나비에서 아이들로 되돌아왔다. 나는 화가 났다. 도저히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나비의 죽음은 나이에 상관없잖아. 왜 예주 언니의 나비가 죽어야 하지? 네가 더 '어른'같아. 어렵게 말하고 냉정하고, 모든 걸 냉정하게 따져. 넌 어린애 같지 않아. 그런데 왜 네 나비는 죽지 않았지? 왜 예주 언니의 나비가 죽어야 해?"

"말이 심하잖아, 주영아!"

주변 아이들이 나무라건 뭐라고 하건 나는 굽힐 생각이 없었다.

"어른이 되면 나비는 죽는 거라잖아. 예주 언니는 어른이 되지 않았어. 하는 말 하는 행동도 어제나 그제나 조금도 다르지 않아. 도리어, 네가 어른이잖아. 왜 네 나비는 멀쩡해? 왜 예주 언니의 나비는 죽어야 하지?"

"야, 김주영!"

"너 그 말 사과 못해?"

"다들 조용히 해!"

시끄럽던 놀이터는 준규가 고함지름으로써 조용해졌다. 준규는 조금의 노기도 조급함도 실리지 않은- 정말이지 어른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말이지, 어른이 되기 때문에 나비가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아.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말야. 나비의 죽음은 네 말대로 나이에 전혀 상관없어. 여섯 살 된 아이의 나비가 죽기도 하고....예주 누나의 나비는 여덟 살까지 살아 있었지. 애들아, 대체 어린애답다는 게 뭐라고 생각해?"

다들 말이 없었다. 우리들은 아이들이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을, 우리들이 판결내릴 수 있겠는가?

"어떤 어른들은 아이들이 영악하다고 말하지. 어떤 어른들은 아이들이 순수하다고 말해. 그러나 나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해. 아이들의 세계 속에서 영악한 아이들과 순수한 아이들은 존재하잖아. 우리는 우리들의 세계 속에서 어떤 아이들을 나쁘다고, 어떤 아이들을 착하다고 말하지. 표현 방법은 틀리지만, 아이들의 세계나 어른들의 세계나 다를 것이 없어."

"다르잖아. 아이와 어른들은...."

"다른 건 하나뿐이야. '지식의 정도'야. 무지하냐 무지하지 않느냐, 그것뿐이야."

준규의 말은 단정적이었다.

"때때로 착한 아이가 나쁘게 행동할 수 있어. 잉꼬에게 닭뼈를 주어 죽인다던지. 그것은 아이가 몰랐기 때문이야, 무지의 결과지. 알았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나쁜 아이가 착하게 행동하는 것도, 어느정도 무지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아? 나쁜 아이가 심술이 나서 식물을 괴롭힌다고, 물을 잔뜩 부어 줄 수도 있지. 때론 중립적인 아이들이 나쁘게 혹은 착하게 행동할 수 있어. 무지 때문에 말이야. 길가다 어린애가 적선하는 아이에게 돈을 주면 착한 아이라고들 하지. 그러나 그 어린애가 돈의 뼈아픔을 알게 된다면, 돈 한푼이 부족해 굶어죽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직 아이들이어서, 돈의 뼈아픔을 겪어 보지 못한 우리들에게 준규의 질문은 많이 무리한 데가 있었다. 한 아이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럼 준규야, 너도 알아? 그...'돈의 뼈아픔'이란 걸."

"나도 몰라. 나도 애잖아."

순간, 분위기가 풀려 모두 킥킥 웃어댔다. 한참 웃고, 조금은 밝아진 분위기에서 내가 물었다.

"그렇다면, 왜 나비는 죽는 걸까. 어른이 되는 것과 나비는 관계없다는 건데 말이야."

"실제적인 나이와는 일단 관계없어."

"그리고 키가 컸다거나 살이 쪘다거나 하는 것도. 머리가 좋다거나 어른스러운 것과도 관계 없지."

"전자를 신체적, 후자를 정신적이라 하지."

준규가 말하자 아이들은 준규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예주 누나는 이런 어려운 말 하지 않았어. 그 정신적....아무튼 그것이 높은 애들의 나비가 일찍 죽는다면, 준규의 나비는 이미 죽었을 텐데."

"그럼 나비는 왜 죽는 거지?"

"그 어떤 것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건지도 몰라. 그냥 나비는 제멋대로 나타나서 제멋대로 죽는 건지도."

"하지만 아무리 오래 살았던 나비라도 결국 초등학교에 입학할 정도만 되면 죽는다고 하던걸."

아이들은 모두 준규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준규는 우두머리였고, 아이들 중 가장 머리가 좋았다. 준규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우리들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들은 나비가 된다고."

"우리들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아까 말했잖아. 나는, 우리들이 어른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단순히 아이는, 어른을 축소시키고 무지를 덧붙여 놓은 존재일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들에게도 우리들의 세계가 있어. 때로는 폭력이 있고 드물지만 죽음이 있고, 그리고 아픔이 있는 세계가. 어른들의 세계엔 지식이 있고 우리들의 세계엔 나비가 있는 거야. 어른들은 지식으로 그들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우리들은 나비가 되어 우리들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거야."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준규의 말은 언제나 어려웠지만 지금은 한층 더 어려웠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른들은 지식으로 살아가고 우리들은 나비로 살아간다?"

"만일 어른들이 서로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 봐.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친구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지식을 사용하는 거야. 그들은 정중히 인사하고, 조금씩 말을 나누고, 조금씩 서로 같이 밥을 먹고....그게 어른들의 방법이지. 우리들은 어땠지?"

"서로 싸워."

남자아이들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여자아이들은 입을 비쭉 내밀었다.

"숨바꼭질, 술래잡기, 그리고...."

다들 입을 다물었다. 내가 대신 대답했다.

"남자아이들은 높이 날아오르기 경쟁을 하고, 여자아이들은 서로 날개를 보여 주며 무리를 이뤄서 표면을 뱅글뱅글 돌아다니고, 춤을 추지."

"그러니까, 특권인 거야."

준규는 시원스럽게 말했다.

"우리는 어른들을 축소한 것에 무지를 덧붙여 놓은 존재야. 어른들의 세계에 있는 폭력과 죽음과 절망이, 우리들의 세계에도 있는 거야. 하지만 우리들은, 나비가 될 수 있어. 나비가 되어 어울릴 수 있지. 그렇기에 우리들은 어른들보다는 폭력과 죽음과 절망에서 자유롭지. 그것이 아이들의 특권이야. 나비가 될 수 있는 특권은, 그런 거야."

"그렇다면 나비의 죽음은......어른들의 세계로 접어들면 나비는 죽는구나."

"그래, 정확히 말하면.....'어른들과 같이 행동할 때, 어른들과 같이 행동해야 될 때' 나비는 죽는 거야. 우리들이 첫만남에서 서로 엉키어 놀지 않고 격식을 갖추어 인사를 시작할 때 나비는 죽는 거야. 격식과 의례와 인삿말이, 겉마음과 속마음이 필요해질 때 우리들의 나비는 죽고 마는 거야."

눈물이 나왔다. 다시, 눈물이 흘렀다. 가슴이 아파. 가슴이 아파서 참을 수 없어. 예주 언니를 격식과 의례와 인삿말로, 겉마음과 속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나를 생각해 보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 예주 언니가 나를 격식과 의례와 인삿말로 대한다는 것도 가슴이 아팠다. 너무 아파, 너무나도.

준규는 가만히 손수건을 건네는 것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준규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예주 누나는 곧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했어. 예주 누나는 여덟 살이야. 되려 늦은 편이지. 예주 누나의 나비는 오래 산 편이었으니까....기운 내. 나비는 언젠가 죽어. 우리들의 특권을 언제까지나 양 손 가득 쥘 수는 없어. 어린이는 언젠간 어른이 될 테니까."

"하지만 너무 괴롭잖아, 너무 아프단 말이야! 인사, 하고 뭐 그런 것, 마음을 숨긴다거나, 뭐 그런 건....."

내 눈물에 다른 여자아이들도 울었다. 그 때 한 남자아이가 조심조심 말했다.

"난, 그렇게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게 안 슬프다구?"

나를 따라 다른 여자애들도 도끼눈을 떴다. 그러나 남자애는 수줍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 엄만 때때로 거짓말을 하곤 해. 이를테면 아빠가 '오늘 힘들었지' 라고 물으면 '아녜요 괜찮아요'라고 한다던지....아빠가 좋아하는 영화를 싫어하면서도 재미있다고 말하며 본다던지....아빠도 엄마에게 거짓말을 해. 회사일 힘드셨으면서도 안 힘들었다고 거짓말하기도 하고...."

"이른바 하얀 거짓말이라는 거지."

"그리고, 때때로 인사나 격식이라는 것도.....아빠는 엄마를 '여보, 당신' 하고 부르지만, 가끔은 소연 씨,라고 엄마를 정중하게 부르면서 존댓말하기도 해. 엄마는 그럼 아주 기뻐하고....나는 격식도, 인사도, 존댓말도, 그래 격의있는 그런 것들도 겉마음과 속마음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점점 알 수 없게 되버렸다. 아이들도 묘한 표정이 되어 갔다. 그래, 우리들 모두 그런 걸 한두 번씩은 보았을 것이다. 달리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확실히 그런 건, 나쁘지 않았고........다른 여자아이가 입을 열었다.

"저기 말이지, 아빠가 예전에 그런 말을 했어. '이승 거지가 저승 염라대왕보다 좋다'고. 엄마는 '거지'란 말은 좋지 않다고 했지만.....저기 어쨌든 말이지, 살아 있으니까 좋은 거라고 아빠는 웃으며 그랬어. 살아가는 건 좋은 거라고 말야. 우리가 어른으로 커 가는 것도 살아가는 과정이잖아? 어른이 되는 것도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을 것 같아."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듯한 말이지만 내 머리로는 그것을 콕 찝어낼 수 없었다. 남자애들이 다시 물었다.

"준규야, 어떻게 생각해?"

"몰라. 하지만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 우리는 나비를 잃는 대신 지식을 얻고, 그리고 어른이 되어 어른의 세상에서 살겠지. 그런데, 아까도 말했잖아? 난 어른과 우리들이 별로 다른 것 같지 않은걸."

준규의 말에 모두들 흡족해했다. 준규는 우리들 중 가장 존경받을 만한 우두머리였고 준규의 말은 다 옳게 들렸기 때문이다. 다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놀기 위해 다시 나비로 변해 흩어졌다. 나와 준규는 나비로 변하지 않았다. 나는 준규를 보았다. 준규는 키가 크고 잘생긴 얼굴이었고, 의젓하고 아는 게 많았다. 그런 그의 나비는 아직 죽지 않았다. 아직 준규는 의례와 인사와 겉마음과 속마음이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준규를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준규는 웃었다. 그리고 심장에 손을 댔다.

"무서워."

준규는 그렇게 말하고 괴로운 얼굴을 했다. 나는 소름이 돋았다. 나 역시 무서웠다. 임종 직전의 환자 옆의 간호원처럼, 나는 무서웠다. 알고 있었다. 준규의 '공포'가 무엇인지.

"어른이 되어도 괜찮겠지?"

나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몇 번을 우는 건지. 나는 울면서 다시 물었다.

"너는 뭐든 잘 알고 있잖아. 너는 그러니까 정답을 말할 수 있을 거야. 우리, 어른이 되어도 괜찮은 거겠지?"

"나도 모든 걸 잘 아는 건 아냐. 내 '지식'이 어른들의 세계에 쓸모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 나도 아이인걸. 내 나비는 아직은 죽지 않았어. 하지만, 말했잖아. 아이들은, 우리들은 어른과 다르지 않다고. 분명 괜찮을 거야. 나는 믿고 있어."

"너무....싫어....난 그래도 싫어. 난 어른 같은 건...."

"주영아. 피터팬을 보았지?"

나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책임한 놀이방은, 아이들과 놀아주기 귀찮으면 비디오를 틀어주곤 했다.

"피터팬은 결국 네버랜드에 혼자 남아. 다른 아이들은 모두 현실에 와서 어른이 되어 버리지. 웬디가, 웬디의 딸이, 그 딸의 딸이 계속 끊임없이 찾아가 준다지만 결국 피터팬 주위엔 아무도 없어. 모두들 죽어 버리는데 피터팬 혼자 살아 있는 거야.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나비의 죽음을 거부한다면, 그래서 끝까지 아이들과만 어울린다면 우리는 피터팬이 되고 말아. 가련하게 고독에 떨게 되고 말아. 너도, 그렇게 되기 싫겠지?"

"모두 자라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모두 자라지 않으면, 모두 변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게 아니잖아.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죽는 수밖에 없어. 죽거나, 애시당초 생명이 없는 무생물이 되거나."

준규의 말은 엄격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애써 닦아냈다. 준규는 시계를 보았다.

"곧 돌아갈 시간이구나."

"......다시는 놀이터에 오지 않을 거야?"

"모르겠어. 나의 나비가 얼마나 살 수 있을지는 나도 몰라. 천천히, 질기게 숨을 이어 가다가 갑자기 툭 끊어져 버리겠지. 그리고 어둠이 찾아오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게 되겠지.....사람의 죽음과 나비의 죽음은 비슷하지 않을까. 기실, 사람은 두 번의 죽음을 겪는 건지도 몰라."

준규는 웃었다. 잘생긴 얼굴로, 환히 웃어 보였다.

"어른의 세계도 나쁘진 않아. 예주 누나와 난, 거기서 너를 기다릴 거야."





두 번째였던가, 세 번째였던가. 준규는 어느 날부터 '그 놀이터야, 알지?'라고 묻지 않았다. 아이들 몇은 펑펑 울었지만 곧 새로운 우두머리를 찾게 되었다. 그래, 오래지 않아서. 아이들에게 주어진 특권은 나비뿐만이 아니라 망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도 믿는다. 나쁘진 않을 거야. '어른의 세계'도. 우리의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까.

심장이 아파 왔다. 무서웠다. 그래도 나는, 조용히 웃었다. 나의 나비야. 너는 죽을 거야. 하지만 말야, 준규가 그러더라. 너는, 불사조야. 너는 죽어서 지식으로 태어나는 거야.





내가 어린이의 허물을 벗고 어른이 되는 그 날, 너는 나비에서 지식으로 태어나는 거야.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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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ubycrow 05.03.26 13:25 댓글 수정 삭제
    덧. 아이들이 중고생처럼 말하는 것은 엄청난 에러 맞습니다(.....) 다만 나비로 변할 줄 아는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좀더 다르게 묘사하고 싶었어요; 주인공의 '아름다운 옷, 얼굴'에 대한 집착은 '아름다운 나비'가 되고 싶어하는, 즉 나비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고요; 글솜씨가 부족해서 설명이 제대로 안 된 부분도 많고 설득력도 부족한 데다가, 여기저기 빼먹고 지나쳐서 내용이 연결이 안 된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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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rror 05.03.31 13:58 댓글 수정 삭제
    rubycrow님께는 아옌데의 야수의 도시 보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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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딥씨 05.04.12 02:26 댓글 수정 삭제
    '귀향'의 소설 평이 맘에 안 드는군요. 주제와 사건을 읽기 어려웠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쉬운 내용이고 주제도 다 드러나 있는데 (게다가 작가가 마지막에 코멘트까지 달아 놓았고...) 너무 무성의하게 평을 하신 게 아닌가 싶네요. 작품의 어떤 점들이 어떻다는 평이 아니라 그냥 읽기 어려웠다는 말뿐이라니 좀 심하네요. 제가 보기엔 그 중 괜찮은 작품 같았는데...아쉽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취향과 맞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애써 글을 쓰신 작가를 생각해서 신중한 평을 부탁드립니다. ㅎㅎㅎ 사이트 운영하시느라 고생하시는 운영자님께 이런 투정 비슷한 말씀 드리게 되어서 죄송스럽네요. 사이트의 발전을 위하여~! 한 마디 적어 봤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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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rror 05.05.06 13:32 댓글 수정 삭제
    답글을 늦게 확인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
    좀 더 신중한 평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지켜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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