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스타 글라디에이터

2010.04.30 23:3104.30

스타 글라디에이터 Star Gladiator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와 아버지는 많이 놀라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이미 수년전부터 신장염으로 병원을 오가던 양반이었고, ‘노환으로 별세라는’ 소식이 뒤따라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보통의 아버지들이 자식에게 실망하고,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바라고 강요하다 좌절하는 것과는 달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관계는 역전되어 있는 면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좋게 말하면 개성이 넘치고 활기로 가득한 분이셨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개망나니였다는 소리다.
할아버지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동네의 20대 청년들을 두들겨 패고 다니는 분이었다. 단순히 지하철의 노약자석에 앉은 임산부에게 욕하고 화풀이 하는 나이 헛먹은 노인네의 지랄 수준이 아니었다. 동네 풀빵장사에게까지 자릿세를 털어내는 양아치들의 팔을 뽑아 놓거나 눈에다 오뎅꼬치를 박아 넣는 수준이면, 이건 단지 혈기왕성이 지나친 노인네의 주책으로 넘기기에는 무리가 있는 행동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지는 대검 중수부에서 근무 하는 검사였다. 할아버지가 역 앞 번화가의 나이트클럽 사장을 패면 아버지는 사과나 합의 대신 나이트클럽에 경찰들을 몰고 들어가 마약단속을 벌이는 식으로 일처리를 했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관심과 우려는 언제나 아들인 나보다 당신의 아버지인 할아버지에게 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할아버지 덕분에 내가 집안의 골칫거리 순위에서 늘 1위 자리를 놓치고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검사, 의사이고 그 자식들이 명문대 출신의 잘나가는 증권매니저이거나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하다 온 첼로연주자인 집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느 집안에나 하나쯤은 있는 얼룩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라는 막강한 골칫덩이가 버티다보니 나는 그저 ‘어디 가서 사람이나 죽이고 오지 않으면 다행’인 정도였다. 몰론 내가 평소에 막돼먹은 행동을 하는 부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하라는 모든 것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의 기대를 한 번도 만족시킨 적이 없었다는 점에 있다. 나는 다른 형제나 사촌들보다 가장 빨리 첼로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콩쿠르에 나가 본적이 없었다. 집안에 음악가 한명은 있어야 품격이 산다는 어머니의 바람은 엉뚱하게도 작은아버지의 딸인 재희누나가 이루었다. 내 형제들을 비롯하여 사촌들까지 모두 소위 명문대에 진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도 어딘가의 등록금만 내면 다 받아준다는 대학에 진학 한 것은 나뿐이었다. 이럴 때는 집안에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가 되는 것이 편하다.
하지만 그 바람막이였던 할아버지가 병원에 들어가게 되자 나는 약간의 당혹감을 느꼈다. 할아버지는 신장염과 몇 가지 합병증으로 수년전부터 통원치료 중이었다. 요양병원의 부원장인 작은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자신의 병원으로 할아버지를 옮겼고 할아버지는 혼수상태로 사흘을 보내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일단 큰 고비를 넘긴 것에 한숨 놓았지만 병증으로 보건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작은아버지의 판단에 할아버지를 계속 입원시키기로 하였다. 할아버지는 예상대로 결코 얌전한 환자는 아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부원장인 작은 아버지 때문에 드러내놓고 불평하진 못했지만 따로 고용한 간병인은 일주일 사이에 세 명이 못 견디고 나가떨어질 정도였다. 그 결과 할아버지를 간병하는 일에 낙점된 것은 바로 나였다. 표면적으로는 할아버지가 손자들 중에 유독 나를 귀여워했다는 이유였지만 사실 직장도 없이 밥이나 축내는 손자는 나뿐이었다는 게 가장 적합한 이유일 것이다. 특별히 시간을 정해놓고 병실에 머물러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집안의 공기도 답답하고 딱히 나돌아 다닐 곳도 없던 나에게 할아버지의 병실은 도피처로 안성맞춤이었다. 할아버지의 병실은 이전의 탈주전력 때문에 병원의 맨 위층 구석의 독실로 이동되었다. 부원장인 작은아버지 덕분에 병실에서의 생활은 제법 호화스러웠다. 대형 평면TV까지 갖추고 있는 병실에서 할아버지가 잠들면 헤드폰을 끼고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하거나 잔뜩 쌓아놓은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간병을 위해 왔다 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은 주로 할아버지의 말벗이 되어드리거나 목욕을 도와드리는 일이 전부였다.
어머니가 방문하는 날은 할아버지나 내게도 달가운 날이 아니었다. 그날도 어머니는 검사들의 부인회 모임에 갔다 오는 길에 들렀다며 내 양복과 옷가지들, 반찬거리들을 잔뜩 싸 짊어지고 왔다. 내가 갈아입을 옷들을 벽장에 정리하는 동안 어머니는 반찬통을 모두 열어젖히고 이거는 누가 만들어서 보내주고, 저건 누가 해줬다며 할아버지에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어머니가 직접 만든 아무것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마뜩찮은 눈길로 반찬통을 바라보다가 양복을 옷장에 넣는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양복은 웬 거냐?”
나는 양복옷걸이 안쪽에 같이 걸린 검은색 넥타이가 잘 안보이도록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어머니는 당황을 감출 때 흔히 쓰는 요란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이구, 강 검사랑 같이 일하는 검사님들이 내일 아버님 뵈러 오겠다고 해서요. 지환이 옷이 다 찢어지고 구멍난거 밖에 없어요. 애들 옷 입는 꼬락서니 아시잖아요. 없는 집 자식도 아니면서 어디서 그런 것만 주워대 입는지, 참…….”
어머니는 할아버지나 집밖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지칭할 때 늘 ‘강 검사’라고 불렀다. 아버지를 ‘강 검사’라고 부를 때마다 할아버지가 인상을 찌푸려도 어머니는 그 점만큼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남편인 강영호 보다 대검찰청 중수부 ‘강 검사’의 부인이라는 위치를 더 사랑하셨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반찬통을 어머니 앞으로 밀어내었다. 어머니가 반찬통을 냉장고에 정리 하는 동안 나는 일부러 천천히 옷장을 정리 하였다. 옷장 정리가 끝나면 병실 안에서 아무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병실에 놔두고 밖에 나갔다 오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사이 할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무슨 말싸움이 일어나지 않을까가 더 불안했다. 화살을 맞아도 차라리 내가 맞는 게 낫다.
어머니가 냉장고 문을 닫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나는 옷장 문을 닫았다. 어머니는 잠시 병실 안을 둘러보다가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옷장 속으로 들어가 숨고 싶었다.
“성환이는 이번에 해외지점장으로 발령 났다더라. 최연소래. 식구들 전부 다음 달에 뉴욕으로 간 덴다.”
작은 아버지의 아들 소식을 왜 어머니의 입을 통해서 먼저 들어야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 한쪽의 소파에 몸을 묻었다. 책들을 뒤적이고 있는 내 옆에 어머니가 앉았다.
“ 그래서 성환이한테 가기 전에 네 자리 하나 봐달라고 부탁 해놨어. 성환이 명함 갖고 있는 것 있지? 이메일로 이력서 보내 달라더라, 졸업증명서랑 성적 증명서는 나중에 보내래. 명함 갖고 있어?”
“있을 거야. 찾아보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해!”
어머니는 가방을 열어 사촌 형의 명함을 내게 건네주었다. 어머니가 목소리를 높이는 때는 많지 않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서인 경우가 많다. 나는 명함을 읽고 있던 책에 책갈피 삼아 끼워 놓았다.
“내일 아버지랑 검사님들 오시면 저 양복으로 갈아입어. 아예 아침에 일어나 미리 입어두고 있던가.”
“하루 종일 병실에서 양복 입고 있으란 말이야? 어차피 퇴근 하시고 오실 거 아냐?”
“그럼 다섯 시쯤에 갈아입던가. 검사님들 오시면 인사 잘 드려. 재희도 귀국했다니까 조만간 들를 거야. 머리도 좀 자르고! 손님들 오시면 책은 한쪽에 치워놔. 여긴 신문도 없니? 학교 같지도 않은 학교 다니면서 4년 내내 책만 보더니 아직도 읽을게 남아있어? 할아버지 병실이 네 방인 줄 알아?”
“아, 애 좀 그만 잡아라!”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할아버지가 고함을 질렀다. 어머니는 입을 다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사내자식 기를 그렇게 죽여 놔서 어따 쓰겠냐?”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 올리고 눈을 감았다. 잠을 잘 테니 그만 시끄럽게 하라는 신호였다. 어머니는 늘 그랬듯이 작은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몇 마디 변명을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지갑을 꺼내어 신용카드 한 장을 내게 건네어 주었다.
“이걸로 밥 사먹고 이발해. 재희 내일모레 온댔어.”
어머니는 병실 문을 나서면서도 입모양만으로 ‘이발 꼭 해.’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병실 안은 적막으로 채워졌다. 적막을 먼저 깬 것은 할아버지였다.
“재희가 내일모레 온다고?”
“네, 연주회 때문에 귀국 했나봐요.”
“또, 깽깽이 소리 시끄럽겠구먼.”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아 뉘었다.

해가 기울고 병실 안이 어둠과 적막으로 뒤섞이는 동안에도 나는 불을 켜지 않았다. 잠이든 할아버지의 불규칙한 호흡소리만이 어둠과 적막이 혼합된 수면 위를 떠다녔다. 나는 휴대용 독서등의 작은 불빛에만 의지해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크왓크 타무르…….”
할아버지의 잠꼬대에 나는 병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시간전과 달라진 것 없이 할아버지는 편안한 자세로 잠을 자고 있을 따름이었다.
다시 고개를 책으로 돌리려 할 때 할아버지는 기묘한 발음의 문장을 내뱉었다.
“운다 헤이얏타 그룬-지-하룬.”
글로 표기 하자면 위와 같이 쓸 수 있지만 실제의 발음은 더 기묘한데가 있었다.
외국어 같기도 하지만 무척이나 낯선 느낌의 그 문장은 할아버지의 입에서 계속 되풀이 되고 있었다.
몇 분뒤 할아버지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잠에서 깨었다. 나는 수건으로 할아버지의 등을 적신 땀을 닦았다. 할아버지의 몸은 주름만큼이나 흉터가 많다. 흉터들은 대부분 할아버지가 젊었을 적에 났던 것이라 세월의 흐름에 따라 침식하듯 흔적들만 남아 있지만 어떤 것들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처럼 보였다.
할아버지는 종종 말없이 사라졌다가 며칠 뒤 집에 불쑥 나타나거나 하는 기벽이 있었다. 때로 말없이 돌아온 할아버지는 어딘가 부러져 있거나 얼굴에 상처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술과 담배는 입에도 안대는 분이었기에 알콜성 치매를 의심할 수도 없었다. 할머니는 살아계실 적에 할아버지가 두집살림을 한다고 여기셨는지 흥신소 직원을 붙여 할아버지를 따라다니게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별 소용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하루 이틀 또는 한 달 뒤에야 집에 돌아오는 할아버지는 그간 어디에 갔었는지, 어쩌다 다쳤는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단지 돌아올 때마다 몸에 늘어나는 상처 때문에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든 걱정거리와 한숨을 유산으로 물려받아야 했다.
겨드랑이의 땀을 닦아 내기 위해 할아버지의 팔을 들어 올리려 하자 할아버지는 손을 저으며 내가 들고 있던 수건을 빼앗았다. 칠순을 넘긴 노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할아버지는 온몸이 근육으로 뭉쳐있었다. 그것은 프로테인과 헬스클럽에서 만들어낸 근육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의 노동과 햇빛 속에서 갈아내고 깎아내고 제련되어 나온 근육이었다.
몇 년 전부터의 병치레로 인해 할아버지는 야위어 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작아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병이 앗아간 살들과 혈색 좋은 피부의 밑에 감춰져있던 단단하고 예리한 칼날 같은 원래 몸이 더 드러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에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늘 커져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늘 단단한 바위 같다. 세월이 그것에 상처를 주고 침식한다 하여도 바위는 바위다.
겨드랑이의 땀을 다 닦은 할아버지에게서 젖은 수건을 넘겨받아 욕실에서 더운물로 빨았다. 그것을 들고 병상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할아버지는 말없이 병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서서 말없이 그 노인을 바라보았다. 달빛과 창밖의 네온사인 불빛이 서로 다투며 할아버지의 몸에 내려앉고 있었다. 빛들이 노인에게 달려들 때마다 노인은 점점 어둠속으로 몸을 숨기는 듯했다.
“그런데, ‘운다 헤이얏타 그룬-지-하룬’이 무슨 말이에요?”
나는 할아버지가 잠꼬대로 계속 되뇌었던 말을 최대한 비슷한 발음으로 물어보려했다. 단지 적막함이 싫어 그냥 물어본 질문이었지만 어둠속에서도 나는 할아버지의 몸이 굳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아까 주무시면서 계속 말씀하시던데요. 발음이 되게 특이 하던데.”
침묵하던 할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자유인으로 죽는다.”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어느 나라 말이에요?”
나는 수건으로 할아버지의 목 뒤를 닦았다.
“나라가 아니다. 제3은하연방의 표준어지.”
“네?”
나는 되물었지만 그것은 할아버지의 대답을 제대로 못 들어서 되물은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간직했던 불안감이 비로소 현실로 드러나자 반사적으로 나온 되물음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할아버지가 말했다.
“제3은하연방의 4표준어다. 3기 문명에 속하는 지성체들 중 음성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이들을 위한 은하어語야.”
나는 할아버지에게 치매 증상이 보인다는 소식을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둘 중 누구에게 먼저 말해야 하나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처음 납치 된 것은 낙동강 방어전이 한창이던 열네 살 때였다. 어봉리 일대를 둘러싼 국방군과의 고지 쟁탈전은 불과 피로 얼룩진 핑퐁게임을 반복하고 있었다. 미군 폭격기는 능선을 불바다로 만들며 인민군의 진지를 제거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뚫고 내려오는 쪽이나 막아내려는 쪽 모두에게 다급한 싸움이었다. 미군의 폭격에 시달리던 인민군 중에는 하나둘 전선을 이탈하는 숫자가 생겨났다. 할아버지는 그날 밤 중대원들 전원의 발목에 쇠사슬로 연결된 족쇄가 채워지는 것을 보며 길지 않았던 당신의 삶이 끝났다 여겼다. 동이 트면 다시 미군의 폭격이 시작 될 것이었고 족쇄로 발목이 묶인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부산으로의 진격을 재촉하는 북한군 사령부의 머릿속에는 낙동강전선이 최전선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할아버지는 발목을 끊고 도망가면 한발로 어디까지 갈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산속의 진지에서 잠이 들었다. 꿈에서 할아버지는 서울에 남아 있을 당신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만났고, 전쟁이 끝나 다시 학교에 가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할아버지의 발목에는 족쇄가 사라지고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잠든 사이에 국방군의 공격을 받아 죽은 것으로 여겼다. 그곳에는 교회목사님이 이야기 하던 ‘나발을 든 천사들’도 없었고 아브라함과 모세도, 예수님도 없었다. 단지 자신의 몸을 묶고 귀에 이상한 벌레를 집어넣으려 하는 ‘온몸이 빛나는 사람들’만 있을 따름이었다.
어차피 죽은 몸이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죽은 것 보다 더 나쁘겠는가 하는 마음에 별다른 반항 없이 누워 있던 할아버지는 귓속으로 기어들어온 벌레가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고통을 느끼며 나름대로 유추 가능 한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빨갱이 군대에 들어가 싸웠다고 지옥에 왔구나.’
할아버지는 원해서 인민군에 들어온 것이 아니며 집에 있다 끌려나왔을 뿐이라고 하소연 하고 싶었지만 그의 말을 들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귓속에 들어간 벌레는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할아버지는 그 순간부터 ‘온몸이 빛나는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아니 들었다기보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가 맞다. 그들이 할아버지의 머릿속에 심어 놓은 것은 할레이름이라 부르는 광범위한 은하계 언어의 통역기였다. 두통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겨우 주변을 둘러볼 정신을 차리게 된 할아버지는 자신 말고도 열 두어 명의 인민군이 함께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레이름을 통해 전달받은 사항은 간단명료했지만 그 명료한 내용 뒤에는 할아버지의 인식으로는 상상 할 수 없었던 광대한 세계가 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끌려온 이들은 앞으로 ‘이칸투스’로서 싸워야 했다. 이칸투스가 무엇이냐고 묻는 내 질문에 할아버지는 잠시 망설였다.
“약간 애매한 단어더라. 한국말로 비슷한 말을 찾을 수는 있는데 굳이 가까운 표현을 고르자면 영어로 하는 게 비슷하다만.”
다음 말을 기다리는 내 눈을 보며 할아버지는 말했다.
“스타 글라디에이터 Star Gladiator."
새롭게 끌려온 이칸투스들은 몇 명씩 나뉘어 신체검사를 받았다. 또래 보다는 체구가 컸던 할아버지는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어디론가 끌려갔다. 함께 끌려온 인민군들도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개중에는 불필요한 만용을 부리는 이들도 있어 ‘온몸이 빛나는 사람들’에게 저항 해 보았지만 참담한 대접만 받을 뿐이었다. 할아버지가 이른바 ‘흥행사’라 불리는 흘란도르를 처음만난 것도 그때였다.
“이건 못 쓰는 거야! 지구인들은 머리가 잘려나가면 못써!”
흘란도르가 ‘온몸이 빛나는 사람들’에게 화내는 소리를 할아버지는 이해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음성으로는 전혀 다른 소리였지만 할아버지의 머릿속에는 모국어 만큼이나 빠르고 친근하게 이해되었다. 흘란도르는 머리가 반쯤 잘린 인민군의 시체를 내집어 던진 다음 할아버지 앞에 섰다. 흘란도르가 아휠라엔 성인들의 표준체구에 비해 작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된 사실이었기에 할아버지는 눈앞에 서있는 3미터에 달하는 외계생명체에 압도당하지 않을수 없었다. 흘란도르의 눈은 빛나는 촉수와 같았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눈앞까지 다가와 할아버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동안 당신은 오줌을 지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있었다. 흘란도르의 만족에 가까운 감정을 할레이름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이크란이 있어. 좋아, 당분간 지구인들은 필요 없겠어. 삭텔라움에 필요한 머릿수는 다 채웠다.”
삭텔라움은 이종異種의 생명체 셋이 한 조를 이루어 도전자가 되고 한명의 챔피언과 겨루는 방식의 경기였다. 한 조를 이루는 생명체는 각기 다른 은하계에서 온 이들로 구성해야 한다는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낮과 밤을 구분 할 수 없는 곳에서 시간의 흐름도 가늠하지 못하는 상태로 오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한순간일지도, 영원에 가까운 시간일지도 몰랐다. 할레이름이 있었지만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외계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누구고 여기가 어디인지, 왜 할아버지가 이곳에 와야 했는지 질문할 이들도, 답할 이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첫 번째 삭텔라움을 치를 때 까지도 자신이 무슨 목적으로 이들에게 끌려왔는지 이유를 정확히 몰랐다고 했다.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 탁자위에 놓은 무기들 중 하나를 고르도록 명령 받았을 때도 다음에 펼쳐질 일들에 대해서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무기들은 지구인을 위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지구인들이 쓰던 물건을 닥치는 대로 쓸어와 늘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삭텔라움의 전통에 따라 세 명의 도전자들은 한 개의 공격 무기와 방어 무기를 고를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프라이팬과 쓰레기통 뚜껑을 선택했다. 그나마 그것이 누군가를 때려눕히는데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었다.(물건들 중에는 뜨게실 뭉치와 줄자도 있었다.) 무기를 고른 다음 흘란도르는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훌륭한 이칸투스는 나갔다 살아 돌아오는 이칸투스다.”
하지만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할아버지는 훌륭한 이칸투스가 되기는 진작 글렀다고 절망했다. 우선 도전자인 할아버지의 조에서 가장 체구가 큰 이칸투스가 할아버지였다. 나머지 둘은 봉제 곰 인형처럼 생긴 줄루워크인과 다섯 살 여자아이만한 테라이안이었다. 프라이팬보다 그나마 나아보이는 무기는 봉제 곰 인형이 들고 있는 포크 비슷한 물건 밖에 없었다.
잠시 후 경기장에 ‘챔피언’이 들어서자 객석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할아버지의 귀에 들리는 소리보다는 할레이름을 통해 전달되는 관중이 내뿜는 정신적인 흥분이 더 강렬하고 혼란스러웠다. ‘챔피언’은 아무리 봐도 영덕대게를 크게 부풀려 놓은 모양이었다. 잠시 그 크기에 압도당한 할아버지는 그대로 멍하니 경기장 한가운데 서있었다. ‘챔피언’의 앞발이 머리에 꽂히기 전까지 그대로 서있었던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몸을 날려 쓰러뜨린 테라이안 덕분에  첫 출전에서 바로 사망하는 변은 당하지 않았다. ‘챔피언’의 앞발이 바닥에 꽂히면서 피어오른 흙먼지 때문에 콜록거리며 테라이안이 외쳤다.
“멍청아! 살고 싶으면 계속 움직여!”
할아버지의 몸을 깔아 누른 테라이안은 그를 다시 일으킨 다음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챔피언’의 주변을 돌며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프라이팬과 양철 쓰레기통 뚜껑만을 들고 있던 할아버지는 ‘챔피언’의 단단한 껍질과 거대한 앞발을 보며 들고 있는 것보다 좀 더 큰 프라이팬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루한 탐색전의 결과 할아버지는 ‘챔피언’에게 한 가지 약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챔피언’이 할아버지의 프라이팬과 쓰레기통 뚜껑이 맞부딪히는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이었다. 할아버지는 양철 쓰레기통 뚜껑을 계속 프라이팬으로 두들기며 ‘챔피언을 경기장 구석으로 몰아갔고 그사이 봉제 곰 인형은 ’챔피언의 몸 밑으로 굴러 들어가 들고 있던 포크로 배껍질의 약한 부분을 찾아내어 그곳을 찌르는데 성공했다.
첫 번째 삭텔라움에서 살아 돌아온 지구인은 오직 할아버지뿐이었다. 이야기를 잠시 끊은 할아버지는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어른들에게 할아버지가 치매 증상이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는 당분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실여부를 떠나 할아버지의 모험담은 재미있었다. 굳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다. 자정이 넘자 야간 근무를 서는 간호사가 병실을 둘러보고 갔다. 할아버지는 좀처럼 이야기를 길게 하는 분이 아니셨기에 수 시간 동안 이야기를 풀어 놓은 것이 몸에 부담되었는지 자리에 누웠다.
“그 삭텔……라움 이란 건 계속 무한하게 반복되는 건가요?”
“아니지, 그랬다면 내가 여기 누워 있을 리 있나. 처음부터 세 번째 경기까지를 삭텔라움이라 부르고 네 번째부터 6번째 경기를 인텔라움이라고 부르지. 그렇게 세경기마다 묶어서 각기 부르는 명칭이 따로 있어. 규칙도 조금씩 달라지고 이칸투스가 받는 대우도 달라지는 거야. 이칸투스는 총12회의 일라움(각 세경기마다 묶는 단위)을 뛰어야해. 그러면 마지막에 ‘그룬지라움’ 한경기를 남겨 놓게 되지.”
나는 의자를 당겨 병상 쪽에 갖다 대었다.
“그럼 할아버지도 ‘그룬지라움’에서 싸우셨어요?”
할아버지는 창가쪽으로 몸을 돌아 뉘이며 대답했다.
“아니, 이제 ‘그룬지라움’만 남겨 놓고 있다.”
“그룬지라움에서 이기면요?”
내 질문에 할아버지는 잠시 아득하게 먼 곳을 바라보는 얼굴이 되었다.
“자유를 되찾게 되지. 더 이상 이칸투스로 살지 않아도 되는. 하지만 그런 이칸투스는 은하계역사상 아무도 없었어.”

다음날 저녁에 병실은 장례식장을 방불케 했다.
넥타이 색깔만 다르다 뿐이지 온통 검은 양복만 입은 남자들로 가득찬 병실은 할아버지의 심기를 적잖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양복으로 갈아입지도, 이발을 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불만에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보는 아버지의 시선을 피해 나는 일부러 찻잔을 닦는다는 핑계로 탕비대가 있는 곳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의례적인 문병과 안부인사가 한참을 오고 간 다음에야 손님들은 모두 병실을 빠져나갔다. 작은 아버지를 만나고 가겠다며 뒤에 남은 아버지는 나를 복도로 불러내었다.
“성환이 만나보러 간다며?”
“아뇨, 아직 정해진 건 없는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복도에는 저녁식사를 담은 카트가 바퀴를 삐거덕거리는 소리만 흘렀다.
“미국에 학교 알아봐줄까? 성환이도 그쪽으로 가니까.”
“아뇨,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아버지는 목소리가 병실 안으로 들릴까 걱정스러운 듯  조심스레 낮췄다.
“일이년 정도 있을 곳으로 알아봐 줄 테니 그렇게 해. 성환이가 알아봐주는 자리가 잘 안되면.”
내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아버지는 부원장실에 들르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다시 병실에 들어갔을 때 할아버지는 내가 병실 한 편에 치워 놓은 책들을 들춰보고 있었다.
“뭔 놈에 빨갱이 책들이 이렇게 많나?”
내가 킥킥거리며 웃자 할아버지도 빙긋이 웃었다. 할아버지는 책들 중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꺼내어 들었다. 병상에 몸을 반쯤 누운 채로 책장을 들추던 할아버지가 혼잣말을 했다.
“거들먹거리는 꼬락서니들 하고는…….”
손님들이 가져온 과일의 포장지를 벗겨 냉장고에 정리하던 나는 잠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책장은 넘기고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있는 듯 했다.
“네 애비는 그렇게 거들먹거리기 좋아 하는 놈들과 같이 다니면 안 돼. 그런 놈이 아니야. 내 새끼를 내가 못 알아 볼까봐?”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지만 나는 별달리 질문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족이란 것의 비밀 앞에서 적절한 질문은 없다. 적절한 질문이 없으니 마찬가지로 적절한 대답도 없다.
책장을 넘기던 할아버지는 이내 책을 병상 옆의 테이블에 다시 올려두며 중얼거렸다.
“로스케들은 잘 처먹기라도 했지…….”
저녁식사가 끝난 뒤 소파에 누워 할아버지가 꺼내 놓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텔레비전으로 여섯시 내 고향을 보며 말없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나는 내심 할아버지가 어제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서 해주길 바랐지만 말을 꺼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정색을 하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야기는 멍게비빔밥으로 시작되었다. 텔레비전속의 리포터가 호들갑스러운 감탄사를 내뱉으며 떠먹는 멍게 비빔밥을 본 할아버지는 혀를 차며 말했다.
“뭐 저리 지랄을 하며 처먹어. 사내새끼가…….”
“방송이잖아요. 맛있게 먹는 척을 해야죠. 드셔보신 적 있으세요? 멍게 비빔밥.”
나는 책장을 덮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물끄러미 텔레비전의 화면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때는 다리가 없어서 거제도에서 나가려면 가조선착장으로 가야했는데......석방된 포로들을 수송할 배가 늦게 와서 하룻밤 선착장 주변에서 노숙했지. 차라리 수용소로 다시 들어가고 싶더만. 적어도 지붕은 있었으니. 부산까지만 가면 서울 가는 기차를 탈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만 급했지. 어디 이슬 피할 곳이라도 찾으려고 돌아다니는데 선착장 주변에 술집이 하나 있었어. 막 문 닫으려고 하는 데 주인을 붙잡고 사정했지. 창고든 어디든 재워주기만 하면 다음날 설거지든 뭐든 해서라도 보답하겠다고. 그러니까 주인이 들어와 자고 가라더군. 창고 옆에 작은 방이 있었는데 이불까지 내어 주는 거야. 그러더니 밥은 먹었냐고 묻더라고. 잠자리까지 내어주는데 밥 얻어먹을 염치는 없어서 먹었다고 했더니 주인이 좀 있다가 함지박에 밥을 주더라고. 고추장도 없고 하니까 나물이랑 멍게젓갈을 얹어서 보리밥에 그냥 비벼 먹었지.”

삭텔라움에서 살아남은 할아버지는 인텔라움이 시작될 때 까지 차크라움을 받았다. 그것은 각 일라움 사이에 주어지는 휴가와 같은 것이었다. 한 번의 일라움, 즉 세 경기를 마칠 때마다 이칸투스들은 차크라움을 통해 고향에 돌아갈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말그대로 휴가일뿐 다음번 일라움이 시작될 때면 어김없이 다시 ‘온몸이 빛나는 자들’에 의해 납치되어 경기장으로 되돌려지는 것이다. 어차피 노예로 잡아간 거라면 왜 굳이 차크라움같은 휴가 기간이 필요한가 하는 나의 질문에 할아버지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차크라움 중에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어. 그놈들은 어디든 따라와서 다시 데려갔으니까. 물론 차크라움 기간 중에 죽는 경우도 있었지. 나는 차라리 그러길 바란 적도 있었다.”
첫 번째 차크라움을 받으며 할아버지는 그들의 섬세한 배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 배려에 분통을 터트렸다. 그들은 할아버지를 납치당하던 당시의 복장으로 다시 갈아 입혔는데 그것은 할아버지가 입고 있던 인민군 복장이었다.
“그 육시랄 놈들이 깨끗하게 세탁까지 해놨더라고.”
할아버지는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들이 할아버지를 되돌려 놓고 간곳은 어봉리에 있던 미해병 1사단의 진지 한복판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북한군과 마주하고 있는 미해병대의 진지 한복판에 홀연히 나타난 인민군의 소년병사는 손질 발짓을 해가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할아버지의 머릿속에 심어진 할레이름은 미군들의 영어를 통역해 할아버지에게 전달해 줄 수 있었지만 할레이름이 없는 미군병사들은 할아버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결국 통역이 가능한 국방군의 장교가 미 해병대쪽으로 파견되어 왔고, 다행이 할아버지는 자신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검투사 경기를 하다가 휴가를 받아 이곳에 왔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통역장교와의 대화 끝에 할아버지는 자신이 있는 현재가 납치된 날로부터 불과 하루밖에 안 지났다는 사실에 경악했지만 말이다. 그들이 할아버지를 돌려보낼 때 ‘약간의 시간적, 공간적 오차가 있을 것이라 설명했을 때 당신은 내심 전쟁이 끝난 다음의 서울로 보내주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할아버지는 미 해병대에게 인민군의 진지 위치와, 그들이 노획한 미군의 무전기로 미군의 이동계획을 감청하고 있음을 알렸다. 덕분에 미군은 폭격 지점을 수정할 수 있었고, 미 해병대는 다음날 117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미 해병대는 할아버지의 군복 등짝에 흰색 페인트로 'POW'라고만 써놓았을 뿐 할아버지를 다른 포로들과 함께 두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어봉리 능선의 점령 이후로도 미 해병대와 함께 9월의 인민군 대공세 때 까지 싸웠다. 할아버지는 휴가 중에도 목숨을 건 전투를 치러야했다. 10월 이후 낙동강 전선이 방어전에서 잔존 인민군의 소탕작전으로 전환되자 할아버지는 미 해병대와 함께 서울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이미 맥아더가 이끄는 7사단과 해병들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 수복에 성공하였다는 소식은 그 희망을 더 키워주었다. 그러나 미 해병대는 북진 행로에 할아버지를 끼워주지 않았다. 엄연히 인민군 출신의 ‘POW’ 꼬리가 붙어있던 할아버지는 그해 11월에 새로 개설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첫 입주자로 초청받게 되었다.
수용소 생활의 초기는 삭텔라움을 치르던 때보다는 못했지만 나름 평안한 시절이었다. 할아버지를 납치한 이들은 적어도 경기가 없는 기간에는 편안한 휴식과 음식을 제공해주었다. 수용소의 잠자리와 음식은 그보다 훨씬 못했지만 적어도 이칸투스로서 살아갈 필요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할레이름의 도움을 받아 틈틈이 영어를 익히며 미군과 포로들 사이의 정보 제공자 역할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단순히 포로들의 동향을 미군에게 전달하고 미군으로 부터는 전선의 동향을 수집하여 포로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할아버지의 위치는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해를 넘기자 수용소는 점점 거대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참전 이후 중공군 포로를 위한 구역이 신설되었고 수용소는 어느새 소도시를 이루었다. 가장 골치 아픈 것은 포로들이 반공 포로와 공산포로 양진영으로 갈라지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다음부터였다. 징집병 출신인 할아버지로서는 반공포로의 진영에 속해야 했지만 할아버지는 수용소가 삭텔라움보다 더 복잡하고 잔인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결투장임을 깨닫고 섣불리 어느 한편에 서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미군과 중공군포로, 인민군 포로들 사이를 오가면서 정보와 물자의 흐름을 이어주었다. 심지어는 여자 포로수용소까지 발을 뻗쳐 ‘1:1 데이트 사업’을 벌이는 모험도 서슴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행동원칙은 간결했다.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수용소 내 독점 사업도 얼마 후에 위기를 맞게 되었다. 수용소장인 도드 장군을 납치한 공산포로 진영의 농성이 격화되자 할아버지는 공산포로들의 수용소동에 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갇혀버리게 되었다. 반공포로들과 미군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할아버지는 발빠르게 미군과의 연락책을 찾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미군의 강제진압이 시작되자 할아버지는 그들이 자신을 다시 데려가주길 애타게 기도했다. 세 명의 동료들과 함께 한명의 적과 싸우는 경기장이 그곳보다는 더 나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은하계 검투사리그의 신인 유망주가 휴가지에서 어떤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폭동이 진압되고 남은 것은 수십 구의 시체들과 공산포로가 격리된 포로수용소뿐이었다. 수십 구의 시체 중에는 할아버지의 ‘데이트 사업’에서 가장 인기가 좋던 ‘직원’도 한 명 있었다. 할아버지는 개성 출신의 열일곱 살 소녀에게 둘 중 하나만 살아서 수용소를 나가게 된다면 서로의 가족에게 소식을 전해 주기로 약속 했었다. 살아남은 것은 할아버지였지만 그는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폭동이 끝나고 난 이후로 할아버지는 수용소내의 ‘사업’들을 모두 정리 하였다. 갖고 있던 물품들은 모두 신참들에게 나눠주거나 팔아버렸고 미군과의 연락도 끊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집은 더욱더 멀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한여름이 되자 중립국의 감독 하에 포로들의 송환 심사가 시작되었다. 여름에 시작된 전쟁은 그렇게 여름에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심사를 위해 감독관 앞에 섰다. 감독관인 미군장교의 질문은 할아버지의 예상과 달랐고 질문의 내용조차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당신은 공산주의자인가, 민주주의자인가?”
할아버지는 통역을 맡은 국군장교가 잘못 통역한 것이 아닌가 잠깐 의심했지만 할레이름을 통해 들은 감독관의 말도 같은 내용이었다. 할아버지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한국말로 대답했다.
“뭐가 되어야 합니까? 집으로 돌아가려면. 어머니가 보고 싶습니다.”

한 달이 걸려 도착한 서울에서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불에 타 사라진 집과 아들이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반공청년단에 의해 살해당한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소식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인 반공청년단의 사무실을 찾아가 복수하기로 마음을 먹고 사제폭탄과 대검을 구해놓았다. 할아버지의 인텔라움이 시작 된 것은 복수의 결행 예정일 전날 밤이었다.
“인텔라움에서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생긴 셈이지.”
할아버지는 내가 건넨 물 잔을 받아 들고는 한참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는 약을 먹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자 나는 병실의 불을 끄고 보조침대에 누웠다. 묻고 싶은 것, 궁금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질문은 아껴두기로 했다. 지금은 종종 그때 질문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다음날 낮에 나는 성환이형에게 메일을 보내고 몇 가지 잡다한 일거리들을 찾아 병실 안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케이블 채널의 영화를 보거나 야구경기의 녹화방송을 보고 계셨다. 재희누나가 온 것은 내가 목욕을 마치고 나온 다음 할아버지에게 면도를 해드리겠다고 하자 귀찮다고 거절하는 할아버지와 실랑이를 벌이던 참이었다. 해가 지고 난 다음 병실 안으로 들어온 재희누나에게서는 여름의 향기가 났다. 지난번에 봤을 때 보다 머리를 더 기른 그녀는 늘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아마티 첼로와 함께 나타났다 버드나무 가지처럼 길고 부드러운 몸은 무거운 첼로케이스가 마치 솜사탕이라도 되는 것 마냥 들고 가벼운 걸음으로 병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첼로를 한쪽 벽에 조심스럽게 세운 뒤 병상으로 다가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 재희 왔어요.”
“내가 벌써 노망이라도 난줄 아냐? 손녀얼굴도 못 알아볼까 봐?”
할아버지는 짐짓 역정 내는 목소리였지만 재희누나가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계집애 손에 왠 굳은살이야? 너 이래서 시집이나 가겠냐?”
재희누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병실 안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향기가 퍼지고 웃을 때 마다 더 밝아지는 기분이다. 재희누나는 잠시 나와 몇 마디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뒤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벽에 세워놓았던 첼로 케이스를 끌고 와 그것을 끌어안은 채로 병상위의 할아버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할아버지, 제가 연주 해드릴까요? 들려드리고 싶어서 악기도 가져왔는데.”
할아버지는 대답 없이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대답 없으시면 하라는 걸로 알게요.”
재희누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병실 한가운데에 의자를 끌어나 놓고는 첼로를 끌어안고 앉았다. 첼로의 목에 얼굴을 갖다 댄 그녀는 잠시 현을 쓸어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라고 중얼거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래된 그녀의 버릇이었다. 가늘고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조율을 마친 다음 그녀는 연주를 시작했다. 첫음절이 지나고 난 다음 나는 몸을 소파에 깊숙이 파묻었다. 포레의 엘레지Elegie (c minor Op. 24)였다.
재희누나에게서는 항상 여름의 향기가 난다. 언제나 곁에 있는 것만으로 죄책감을 갖게 만드는 그녀는 늘 밝은 빛을 뿌리고 다니지만 나는 늘 그녀의 그늘만을 찾아다녔다. 아찔한 햇볕과 향기에 취했던 여름을 떠올리며 누나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내 손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손끝에는 그때의 향기가 맴도는 것 같다. 연주는 그때의 여름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끝났다. 보잉을 멈춘 그녀는 첼로의 목을 쓰다듬으며 다시 입모양만으로 중얼거린다. 질주를 끝낸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달래는 모양과 같다. 누나는 곁눈질로 나를 보더니 소리내지 않고 입모양만으로 말한다.
‘잠드셨나봐.’
소리내지 않고 터트린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한가득 번진다. 재희누나는 조심스레 첼로를 케이스에 다시 집어넣고 내 옆에 앉았다. 그녀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요즘에는 연주 안 해?”
“안한지 몇 년 돼서 이제는 활도 못 잡을걸.”
그녀는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어깨를 드러낸 원피스의 치맛자락 주름을 매만지던 그녀는 몸을 뒤로 기대었다. 드러난 어깨위로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렸다.
“연주회 때 올 거지? 회사에 얘기해서 창구에 표 맡겨 놓을게.”
“여기 있어야 돼.”
“넌 여기 있어도 여기 없잖아.”
나는 잠시 그 말을 이해 할 수 없어서 말없이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재희누나의 얼굴은 묘하게 비대칭이었다. 그중에서도 입은 살짝 삐뚤어진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인지 그녀는 늘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지만 잘 모르는 이들은 그녀의 표정에서 냉소를 읽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나와 재희누나 둘 뿐이었지만, 그 때문인지 안에 있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그녀와 나는 멍하니 하나씩 줄어드는 층수 표시 숫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5층을 내려가는데 5년은 걸린 기분이다. 주차장에서 차에 첼로를 싣는 것을 도와주고 난 다음 돌아서려는데 그녀가 말했다.
“커피 한잔 하고 올라가.”
“할아버지 깨실 지도 몰라. 잠을 얕게 주무셔.”
재희누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대로 차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갈게.’라고 중얼거린 다음 돌아섰다. 무언가가 뒤통수를 때리고 바닥에 떨어졌다. 뒤돌아보니 재희누나의 차 열쇠였다. 나는 허리를 숙여 열쇠를 집어 들려 했지만 어느새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가 열쇠를 낚아채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며 차로 걸어갔다.

병실로 돌아가 읽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을 때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때, 피아노를 그만두겠다며 재희는 삼일 밤낮을 울며 떼썼다.”
나는 할아버지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네가 그 깽깽이를 연주 하는 걸 보고 난 다음에 말이야.”
나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재희누나가 연주하는 거 보고 그만뒀어요.”
내가 어려서부터 가장 두려워하던 일은 부모님께 혼나거나 사촌들에게 놀림거리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재희누나와 부딪히는 일이 가장 무서웠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갖길 원했다. 물건이든, 재능이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늘 두려웠다.
“알레이칸 사람 중에 느웨브라는 놈이 있었지. 그놈이 항상 경기 전에 외치던 말이 ‘운다 헤이얏타 그룬-지 하룬’이었다.”
나는 책장을 덮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읽기 힘들지 모른다.
느웨브는 인텔라움의 두 번째 경기부터 할아버지의 동료가 되었다. 인텔라움의 첫 경기에서 죽은 줄루워크인 대신 들어 온 것이다. 인텔라움 부터 할아버지는 새로운 무기를 받고 몸에 맞는 갑옷도 받게 되었다. 흥행사인 흘란도르는 할아버지의 경기 스타일을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지리한 탐색전으로 경기 시간을 끌지도 않았고 초반 공격에 적을 해치워 관객들의 김을 빼놓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는 관중을 흥분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상대 앞에서 만용을 부리다 위기를 자초 하지도 않았고, 화려한 기술로 상대를 압도하는 힘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살아남았다. 그는 언제나 다음번 차크라움을 위해 모든 경기에 임했다. 경기가 더해질수록 상대하는 적들은 더 낯설고 강력해졌다. 수십만 광년을 오가는 세계에서 온 수많은 ‘챔피언’들에게 할아버지는 언제나 강력한 도전자였다. 승리가 더해질 때 마다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가까워졌지만 돌아갈 때마다 고향은 언제나 낯설었다. 지구에서의 인생은 그에게 시골집에서 보내는 짧은 여름방학이 되어가고 있었다. 비록 시공간의 터널을 지나 며칠 차이로 되돌아왔어도 그는 늘 지구에서 이방인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도 자신이 일라움에서 겪었던 경이로운 모험과 비극을 말할 수 없었다. 지구에서의 삶은 점점 의미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경기장에서는 무패의 도전자였지만 집에 돌아와 있을 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그것이 진짜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그는 경기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할아버지가 그룬지라움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자유를 되찾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버지가 태어나고 난 다음이었다.
지구의 시간으로 보내는 차크라움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일정치 않았다. 어떤 때는 단 3일 만에 다시 경기장으로 복귀하기도 했고, 가장 긴 때는 10여년이 지나고 난 다음일 때도 있었다. 지구에서의 삶은 매일이 약속되지 못한 내일이었다. 수십만 광년짜리 여행의 티켓에는 정해진 출발일자도,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여행의 종착역을 이칸투스라는 노예의 낙인을 벗어내기 위한 그룬지라움 경기로 결정했다. 지구에서 보내는 차크라움 기간 동안 그는 늘 자살을 꿈꿔왔지만 그룬지라움에서 승리하여 자유를 되찾는 최초의 이칸투스가 되는 꿈으로 그것을 대신하며 버텨내었다.
그렇게 열두 번의 일라움, 총 36회의 격투에서 승리 하면서 그룬지라움을 앞두게 된 것은 5년 전이었다. 할아버지에게는 지금이 마지막 휴가였다.
자유를 위한 마지막 싸움을 앞둔 최후의 휴가.

다음날 낮에 나는 성환이형에게 전화를 받았고 저녁식사약속을 잡았다. 나는 반드시 이발을 하고 나가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끊은 다음 옷장에서 양복을 꺼내어 입었다. 넥타이 매듭을 다듬는 동안 할아버지는 병상에서 몸을 일으키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병상 쪽으로 다가가 할아버지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려 하자 할아버지는 내손을 잡았다.
“이크란은 은하계의 모든 지성체들이 가질 수 있는 거지만, 모두가 갖지는 못하는 거다. 할아버지는 주먹을 쥐어 내 가슴을 가볍게 두들겼다.
“넌 이크란이 있어. 암, 내 손자인데 못 알아 볼 리가 없지.”
난 웃으며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이크란이 무엇인지는 그때 물어봤어야 했다. 다른 수많은 질문들도. 내가 병실을 떠나기 직전 할아버지는 말했다.
“남자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다. 너 자신 말고는 누구도 너를 죽일 수 없다. 기억해.”

나는 병실을 나섰다. 할아버지는 그날 저녁 실종되었고, 3일 뒤 병원 근처의 공원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병실을 빠져나온 할아버지가 공원근처를 배회하다가 불량배들에게 구타당해 숨진 것으로 추정하였다. 아버지의 지시로 경찰은 인근 공원을 배회 하는 침 좀 뱉는 다는 놈들은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중 운 없는 고등학생 두 명은 아버지에게 끌려가  물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부검 결과 할아버지의 직접 사인은 외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의 몸은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장례기간 내내 나는 누구에게도 할아버지와 했던 이야기들을 말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죽음이 단순히 동네 불량배들에 의한 폭행치사 정도로 마무리 되는 것은 엄청난 모욕이었지만 말이다. 할아버지는 누구에게도 죽임을 당한 게 아니었다. 단지 그에게 주어진 싸움을 그는 모두 치러낸 것이다.
그는 은하계의 온갖 격투사들과 서른일곱 번을 싸워 모두 승리하고 마침내 자유를 되찾은 최초의 이칸투스였다.

장례식장은 할아버지가 살아서 보았다면 역정을 내며 판을 뒤집어엎을 만큼 호화롭고 엄숙했다. 발인 전날 밤 나는 빈소의 영정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다른 식구들은 모두 장례식장 옆에 마련된 별실에서 자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은 몇 년 전에 만든 것이었다. 아마도 그룬지라움의 바로 앞 일라움이었던 엘칸라움 때문에 할아버지가 실종 되었을 때 만든 것일 것이다. 영정속의 할아버지는 번뜩이는 눈매로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염을 한 뒤 입관식을 할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할아버지의 미소도 그랬다.
“살아계실 때도 너 혼자 지키더니 돌아가셔도 너 혼자 있구나.”
재희누나가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와 나는 말없이 영정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어느샌가 그녀의 손이 내 손 위에 포개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내일 연주회인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장지 까지 갔다 와도 안 늦어.”
누나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들 사이로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찔할 정도로 따뜻하고 부드럽다. 잠시 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여름방학의 향기는 언제나 짧고 강렬하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은 늘 그런 향기를 내뿜는다. 그해 여름방학에, 세상 어느 곳이든 단 둘뿐인 곳으로 같이 도망가자던 그녀의 말을 잠시 떠올렸다. 세상에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 실망하는 삶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그녀가 안겨주는 감옥은 거부하기 힘들도록 따뜻하고 아름답지만 이제 감옥밖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짧은 여름방학은 오래전에 끝난 것이다.

나는 웃으며 중얼거렸다.

“운다 헤이얏타 그룬-지-하룬.”

<끝>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우수작 최고의 밤(내용 삭제) 2011.05.28
우수작 늙은 소녀 2011.05.02
우수작 종의 기원 2011.02.26
우수작 성문 너머 코끼리4 2010.12.31
우수작 마지막 겨울 下 2010.11.26
우수작 마지막 겨울 上 2010.11.26
우수작 스타 글라디에이터 2010.04.30
우수작 장군은 울지 않는다. [본문삭제]8 2010.03.27
우수작 호모 네티우스 2010.02.27
우수작 김연실변신전1 2010.01.29
우수작 승진과학 혁명3 2009.11.28
우수작 하얀 물고기2 2009.09.26
우수작 이런 변이 있나! 2009.08.29
우수작 토크쇼 2009.08.29
우수작 마지막 선물1 2009.07.01
우수작 유령들4 2009.04.24
우수작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009.02.04
우수작 사소한 것이 부재할 때 우리가 겪는 문제들4 2008.12.08
우수작 추적자1 2008.12.08
우수작 신본격 추리 역사물 : 토끼 간 실종사건1 2008.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