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호모 네티우스

2010.02.27 00:0502.27

딸을 실어올 토론토발 비행기가 도착시간이 거의 가까워졌다. 너무 오랫동안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는지 하체 이곳저곳에서 근육들이 힘겨워했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책을 접어 가방에 넣고 혹 잃어버릴 물건이 없나 주변을 둘러본 뒤 카페 문을 나섰다. 널따란 대합실에는 여행길에 마음 설렌 사람들과 가족이나 지인을 지루하게 기다리는 여러 무리 사람들이 TV에 눈을 고정하고 수다를 떨면서, 사진을 찍거나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나무랐다. 아이들은 달콤하게 떠다니는 구운 과자냄새나 활주로에서 슬슬 기어 다니는 비행기보다 자기들 손에 들린 변신로봇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다. 제법 정교하게 만들어진 변신로봇들은 백인남자가 혼자 앉아서 신문을 펼쳐 읽고 있는 긴 의자를 배경에 놓고 뻣뻣한 양 팔을 올려 레이저빔과 미사일을 쏴댔다. 물론 어른들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뒤편에서 철걱거리는 소리에 무심코 돌아보았다. 공항 경찰대가 무뚝뚝한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멋지게 쓴 베레모가 눈에 들어오자 생활에서 자주 마주하게 되는 습관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난데없이 베레모의 어원이 궁금해진 것이다. 아주 오래전 이원복교수의 만화에서 그 내용을 본 적이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역사학적인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은 내 머리를 원망해야 했다. 현재 상황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두통을 끌어올 필요는 없었다. 딸이 옆에 있었더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답변을 해 주었을 것이다. 내 딸은 정말 아는 것이 많은 아이니까.                                  

  “걱정 많이 했지?”
그런대로 전망이 괜찮은 병원 옥상에서 내려다 본 도시 풍경은 나쁘지 않았다. 신호를 대기 중인 온갖 색깔 차들,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이 안고 있을 저마다의 사연, 세상은 나로 인해 의미 있는 곳이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담은 시각은 그네들이 무척이나 평화롭게 보이도록 했다.
의사친구를 둔 덕분에, 정(情)이 오고가지 않은 교감 없는 의사와 마주앉아, 선뜻 말붙이기 불편한 시간 따위는 적어도 내가 걱정할 바가 아니었다. 친구는 결과에 대해 입을 열기 전에 이미 미세한 표정을 흘렸다. 스스로 모르고 있는 자신의 버릇이겠지만 오랜 친구로서 능히 그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느낌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내 어깨를 툭 치는 믿음직한 친구에게 담배를 꺼내 권했다. 우리는 옥상 난간에 등을 기대고 길게 담배연기를 뿜었다. 맞은편 화분에 박혀있는 활엽수 잎이 도심의 건조한 바람 탓에 일정한 패턴으로 흔들렸다. 친구는 흔들리는 잎에 시선을 고정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친구에서 의사로 변하려는 모양이다.
  “우선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되는데…… 당연히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지은이가 좀 독특한 케이스야.”
그래, 딸이 어느 특정한 방향으로 독특하다는 것에 대해 아빠인 나만큼 더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내가 지난 10년간 지켜 본 딸의 독특함에 대해서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아직 남은 모양이다. 경청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상황을 어디까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혹을…… 예전 기록하고 대조 해봤을 때, 달라진 것은 거의 없어. 굳이 있다면 지은이가 크는 만큼 혹도 같이 거기에 맞춰서 건강하게……그래, 건강하게 같이 자랐는데 문제는 혹 크기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봐. 다만……”
  “너도 알고 있겠지만 뇌는 눈에서 받은 빛에, 이미 과거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스스로 영상을 만들어 내거든. 그래서 그런 기능들이 성숙해있는 어른들이 아이들에 비해 더 뚜렷한 영상을 잘 만들어 내는 거야. 말하자면 입체영상기능이 훨씬 좋아진다는 얘기지.”
  “음……그래서?”
  “뇌에서 시각정보기능만 가지고도 설명을 늘여놓자면 흠……그것만 가지고도 상당히 복잡해져.”
이 유능한 의사친구의 뇌 언어중추 어딘가에서, 설명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 문장들이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설명하자니 조금 전 말했던 ‘독특함’의 요소에 대해 의사가 아닌 사람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가보다. 나는 보기 드문 인정을 겸비한 의사친구에게 충분히 시간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친구는 매우 유능한 편이니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독특함을 지은이에게서 발견했던 때는 아이가 다섯 살 때부터 아니, 엄밀히는 세 살 때부터였다.  
반일반이 끝나는 시간에서 불과 10여분 후면 노란 봉고차는 학교 언덕을 힘겹게 올라오고, 곧 작은 손으로 선생님의 손을 야무지게 붙든 채 내리는 지은이를 볼 수 있었다. 밖을 내다보면 덜덜거리는 봉고차에서 내리자마자 교실 창문을 향해 손을 흔드는 작은 인형 때문에 웃음 많은 여학생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어댄다. 덕분에 내가 어느 반에서 수업중이더라도 지은이가 도착했음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지은이는 어떻게 알았는지 교실문을 힘겹게 열고 들어와, 학생들을 소란스럽게 만들곤 했다. 학생들은 지은이를 빙 둘러싸고 핸드폰으로 같이 사진을 찍거나 사탕을 쥐어주는 등 요란을 떨었다. 지은이는 전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없었다. 자신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음을 즐기는 듯 했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지은이를 데리고 매점엘 가거나, 며칠 뒤에 골든벨 녹화가 예정되어 있는 강당을 보여주었다. 학생들은 10분밖에 안 되는 시간에, 놀라운 배분능력을 발휘하며 지은이를 즐겁게 했다. 수업종이 울리면 학생들은 부리나케 교실로 돌아가고 지은이는 교무실로 밀어 넣어졌다. 그러면 지은이는 어항 속 금붕어들과 대화하면서 밥을 주고  싫증이 나면 수업이 없는 음악실의 피아노에 앉아있거나 도서실, 미술실 등 미지의 영역을 넓혔다. 학교에서 생활하는 전체 교사와 학생들에게는 지은이의 안전에 대한 무언의 감시연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학교건물 내에서 지은이가 안전사고에 노출될 가능성은 실제로 굉장히 낮은 편이었다. 수업이 비는 교사들은 홀로 교무실을 빠져나가는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의 뒤를 밟으며 야구선수처럼 서로 수신호를 쓰며 웃기도 했다.                    

반복되던 일상의 어느 날, 학생들이 내는 재잘대는 소음을 깨고 핸드폰이 울었다. 점심식사 후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스탠드에서 동료 교사들과 커피를 들고 담소를 나누다가 전화를 받았다. 이웃 아주머니였다.
  “서……선생님! 지은이가 지금……”
병원에 도착했을 때 지은이는 검사 중이었다. 간호사는 큰 사고가 아니니 안심하셔도 되고 검사 끝나면 곧바로 아이를 만나볼 수 있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아주머니의 딸 늦둥이와 지은이를 데리고 장을 보러 나갔다가 후진하는 납품트럭에 지은이가 치었다고 말했다. 머리를 상당히 기른 젊은 트럭기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뒷주머니에 목장갑을 쑤셔 넣은 채로 다급하게 달려온 모양이다. 언제나 친딸처럼 지은이를 아껴주시는 아주머니의 놀란 가슴을, 아빠인 내가 달래드려야 했다. 아이는 괜찮을 것이다. 조금만 진정하고 상황을 바로 보면 크게 흥분하지 않아도 됨으로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다수 아빠들은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어디선가 머리를 들고 찾아오는 냉철함에 스스로도 놀라게 된다.
그 날은 지은이가 감기기운이 있어서 유치원을 빠져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늦둥이도 엄마를 졸라 둘은 합동결석에 성공했다. 아주머니는 열한시쯤 아이들에게 점심을 미리 먹이고 지은이에게 시럽제 감기약을 떠먹인 다음 집을 나섰다. 사고가 나기 전, 두 아이는 까르륵대며 멋대로 뛰어다니다가 어느 순간 아주머니와 멀어졌고 뒤로 물건을 내리려던 트럭 뒤편으로 지은이가 달려든 것이다. 트럭에 후방 감지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고 기사는 말했지만 있다한들 험하게 운전할 관상을 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가진 편견이긴 하지만, 저런 얼굴에 운전을 곱게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은이는 눈썹 위까지 조이며 지나가는 붕대가 답답한지 손으로 올리려 했고 간호사는 아이를 말리며 주의를 주었다. 탑차 모서리에 치인 어린아이 치고는 너무나 무사한 모습이었다. 의사는 아이가 충격 좀 받았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다친 곳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의사는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가 내 팔을 슬쩍 잡아끌었다.
  “좀 미심쩍은 것이……나왔습니다. 지은이 머릿속에서 혹이…… 작은 것이 하나 발견 되었는데요 크기는 10mm가 채 되지 않고요. 이번 사고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아, 지은이가 우선은 사고에 대한 안정을 찾아야 하고 또…… 뇌라고 하는 것이 복잡한 신경망에 둘러싸여있어서 쉽사리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현재로서는 크기가 자라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고요. 대부분의 뇌종양 환자들은 뇌하수체 선종인 경우가 많아요. 그것은 코에서 가깝고……물론 코를 통해서 수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환자들은 당연히 호르몬계통에 이상이 생기게 마련이죠. 헌데……지은이는 그 위치가 약간 달라요. 아직은 그게 무어라고 단정을 못 내리겠습니다. 그래도 응급상황은 아니라 지켜볼 시간은 충분히 있습니다.”
지은이가 사고에 대한 후유증 따위를 모조리 털어내면 다시금 정밀검진을 받기로 했다.
의사는 뭐든 먹여도 좋다고 했다. 병원을 나서기 전에 지은이에게 몸을 굽혀 눈을 맞추고 뭐 먹고 싶으니? 하고 묻자, 아이는 한참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베스핀라민스32 후레쉬 키위 요거트”
  “뭐……?”
  “아이스크림, 아빠! 그거 색깔 디~게 예뻐.”

예정대로 얼마 후 정밀진단을 하게 되었다. 지은이는 컨디션이 매우 좋아 보였고 나는 아이 앞에서 일부러 밝은 척을 했다. 아내를 보내던 그 날의 기억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아내에게 시간이 불과 몇 분정도밖에 남지 않음을 직감했을 때 나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은 무엇인지 떨리는 고민을 했다. 아내를 도울 수 없는 많은 쓸모없는 손들을, 쓸모없는 공기 속을, 외면하는 신의 얼굴을 저주하며 난생 처음 울음 끝에 웃음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은이가 검사를 받는 동안 딸과 함께 지내왔던 지난날의 많은 기억들이, 그 중에서도 아빠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렇다. 의사처럼 뚜렷한 병명이나 처방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던 지은이의 독특했던 모습들 몇 가지를 함께 지내오면서 간간이 발견했었던 것이다. 단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으며, 지금 검사 중인 혹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었다.
아이가 세살 때였을 것이다. 나는 평소에 일거리를 집으로 가져오는 편이 아니었다. 집안일을 은근히 벅차하는 것이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일 것이다. 아내를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지 벌써 2년이 흐르던 시절, 지은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전부터 맘씨 좋은 이웃 아주머니의 보살핌이 컸다. 아주머니에겐 지은이보다 한 살 많은 늦둥이 딸아이가 있었고 둘은 친자매처럼 한나절 소꿉놀이를 하다가 거실이나 소파에서 널브러진 채 잠이 들곤 했었다. 퇴근시간이면 잠든 지은이를 등에 업고 돌아오는 것이 한 때 반복되던 일상이었다. 언젠가 너무나 화창했던 토요일, 일찍 퇴근해서 돌아왔을 때 아주머니의 집 마당에서 나를 보고 웃으며 달려오던 지은이를 안아 올리던 그 순간은 내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되었다. 어렵게 건네 드리는 봉투에 손사래를 치며 아주머니는 지은이가 아주 똑똑해서 이담에 공부도 썩 잘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지은이의 총명함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칭찬을 하곤 했다.
내가 세탁기를 돌리고, 저녁밥을 짓다가 열린 문으로 살펴보면 어느 틈에 깨어난 지은이는 아주머니가 땋아놓은 양 갈래 머리에 매달린 방울을 흔들며 그림그리기에 열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엄마를 찾으며 대책 없이 울어대거나 한 적이 거의 없어서 때로는 당황스러운 적도 있었지만 덕분에 초보아빠의 육아치고는 수월한 편이어서 다행이었다.
지은이는 아무데서나 그림을 그리다 그대로 곯아떨어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언젠가 잠에 취한 지은이를 안아 침대에 누이고 어질러진 색연필과 그림공책을 정리하던 중 잠시 내 눈은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공책 안엔 그림이라고 할 수도 없는 괴상한 소용돌이나 네모와 동그라미, 그밖에 대체 뭘 그린건지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 페이지마다 그려져 있었는데 그중 희한한 것 하나가 내 눈길을 잡은 것이다. 회색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해서 꼭꼭 눌러 지저분하게 덧칠해진 그것은 A-10기였다. 정면으로 그려진 그것은 A-10기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는 터보팬 두 개까지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내 상식에 의하면 세 살짜리가 그리는 비행기는 절대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아마도 옆집 늦둥이는 오빠들에게 장난감을 다양하게 물려받았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시간에 무감각해질 즈음, 검진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예상했었던 대로 문제의 혹이 더 자랐는지, 그것의 정체와 위험성 등을 검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용히 알록달록한 눈과 뇌 모형을 꺼내 놓았다.
  “흠……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선 아이 건강에 대해선 지난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크게 걱정하실 단계는 아닙니다. 아이의 머리에 있을 것으로 의심되던 그 혹은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의사는 자신의 고급 볼펜 끝으로 모형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모든 일엔 순서가 있게 마련이지요? 빛이 사람 눈에 들어오게 되면……아, 길게 설명드 려도 괜찮으신지요? 네…… 각막, 수정체, 망막 등을 지나온 빛은 바로 이곳 후두엽에서 머물러있던 예전 기억 등을 끄집어내서 그 방금 본 빛에 대한 파악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이 부분……을 중뇌라고 하는데요. 중뇌는 이 홍채를 조절하거나 안구운동 그리고 동공반사 등의 기능하고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불과 몇 초가 간신히 흘렀겠지만 느낌상으론 우리 두 사람 사이를 떠다니던 시간이 순간 멈춰버렸거나 오래들은 카세트테이프처럼 늘어져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졌다. 나는 상대가 기분상하지 않을 만큼 떨떠름한 얼굴의 감정 수위를 조절하면서 이야기를 마저 풀어 주기를 기다렸다. 내 시선이 오묘하고 알 수 없는 곳을 향해있기는 하지만 의사는 내가 자신의 설명을 죄다 이해하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듯 했다.
  “여기서부터 이곳까지를 후두엽이라고도 하고 뒤통수엽이라고도 하는데요. 지은이에게 일정수준으로 단어시험, 색맹, 동작식별등 테스트를 했는데 모두 정상으로 나왔습니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말이지요. 여기를 ‘새발톱고랑’이라고 합니다. 이 표면들에서 대부분 시각정보를 인식하게 되지요…… 지은이의 뇌 바로 이 부분에 그것이 붙어있는 것이지요. 오늘 나온 결과에 의하면 이것은 그저 단순한 혹과 같은 것이 아니고…… 자성(磁性)을 띤 금속성물질이라는 것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지은이의 두피엔 이런 이물질이 들어갈 만한 외상이 전혀 없는데도 말입니다.”

답이 없는 궁금증을 안고 지낸 지 며칠이 흘렀다. 나는 학생들의 고민에 부채질을 해댈 시험문제를 추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일로 컴퓨터 앞에 장시간 앉아있었던 탓인지 몸이 굳어졌다.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리고 끓기 전에 아이의 방을 살폈다. 지은이는 작은 플라스틱책상에 모든 색연필을 펼치고 앉아서 그림그리기에 몰두해 있었다. 슬며시 뒤에 다가가도 모른 채 콧노래로 아기염소를 반복적으로 흥얼거렸다.
뜨거운 물에 커피가루만 두 스푼 넣어 물을 많이 붓고 쪼개지 않은 나무젓가락으로 저었다. 그 소리를 지은이가 듣고는 저도 달라고 했다. 아내와 같이 마시던 똑같은 커플 머그컵에 우유를 반 정도 따르고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플라스틱책상에 우유가 담긴 따뜻한 컵을 조심스럽게 내리고 아이 옆에 앉았다. 지은이는 자기 컵을 들어 올려 건배하자는 시늉을 했다. 똑같은 머그컵 두 개가 기분 좋게 울렸다.
  “우리 딸내미 뭐 그려?”
엉망진창 그림이지만 부끄러운 기색이 전혀 없는 아이는 그림을 자랑스럽게 펼쳐서 아빠에게 보였다. 딸의 그림을 자주 봐와서 알 수 있었다. 지은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뚜렷하게 천재적인 재능이 보이거나 혹은 잘 그리는 편이 아닌 상당히 못 그리는 편이었다. 굳이 잘 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평범한 소녀로,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처럼 잘 웃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한다. 부모로서의 과욕으로 딸을 괴롭힐 마음은 내게 조금도 없었다.
이미 여러 페이지 전부터 수도 없이 그려놓은, 꼬리가 유난히 크고 온통 노랗게 칠해진 네발짐승은 피카추일 것이다. 한편엔 속눈썹이 유난히 길게 그려진 공주가 역삼각형으로 된 입으로 미소 짓고 있었고, 동그란 안경 쓴 새는 뽀로로를 그린 모양이다. 그리고 동그랗고 납작한 검정색 덩어리는 대체 뭔지 모르겠다. 내가 골똘히 그것에 눈이 머물자 지은이가 말했다.  
  “아빠, 번개탄이 뭐야?”
  “응? 번개탄? 불 땔 때 쓰는 거야. 활활 더 잘 타라고. 그런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봤어.”
  “봤어? 어디서?”
  “아빠, 그럼……자살이 뭐야?”
나는 딸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고 자살에 대해 가르칠 수 없었다. 주제를 돌려 얼른 공주그림을 칭찬했다. 하지만 머릿속엔 자살이란 두 글자가 헤엄을 치고 있었고 눈은 지은이의 얼굴과 번개탄 그림을 번갈아 보았다. 얘가 어디에서 이걸 주워들었는지……  

다음날 출근했을 때 교무실에서 교사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빈 책상 위에는 언제나처럼 오늘자 조간신문들이 포개져 있었다. 그중에서 인기가수K의 자살소식이 대서특필로 다뤄지고 있는, 다른 신문들에 비해 유난히 지쳐 보이는 스포츠신문은 이미 여러 손길들이 다녀간 흔적으로 끝부분이 돌돌 말려가는 중이었다. 내가 잠깐 제목을 훑고 지나려하자 곳곳에서 동료교사들이 먼저 본 내용을 한마디씩 덧붙여주었다.
  “여러 사업하다가 빚 독촉에 시달렸대요.”
  “요즘 것들은 삶이 너무 쉬워요 문제야 문제.”
  “죽기 전에 너무 힘들지 않을까? 왜 하필 번개탄이야.”
번개탄? 엊저녁 지은이의 질문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로서 지켜봐온 지은이는 어린이용 방송편성 외에는 TV에 거의 관심이 없는 편이다. 물론 지은이는 성장하면서 TV를 통해서만이 아닌 다른 매체에서 이미 잡스런 지식들을 보고 들었을 테지만, 유해정보에 대한 학부모를 포함한 보편적인 교육사회 그물망은 적어도 아동기 까지는 어느 정도 실효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은이로부터 어제처럼 요상한 질문을 받는 것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긴 하지만…… 지은이의 자살이나 번개탄에 대한 그 질문은 분명 혹하고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TV가 아니라면 라디오뉴스나 인터넷? 궁금증은 짧은 시간 동안 미약한 두통을 일으켜, 마치 머릿속에 나사 몇 개가 풀린 듯 덜걱거렸다. 이웃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여쭤볼까? 아니야……괜스레 불쾌하실 거야.
교재묶음과 지시봉을 정리해서 안아든 채 수업을 들어가려던 노총각선생이 파티션 너머로 표정도 없이 눈만 간신히 내놓고 나를 주시했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놓여있던 장식품 같았다. 장난기 많은 두 눈은 깜빡임도 없이 말했다.
  “무슨 생각해요? 우린 아직 살아서 할 일이 많아요.”
수업이 비는 시간에 메일을 열어보았다. 항상 두서너 건씩 교묘하게 들어오는 대출관련이나 성인사이트광고를 그대로 휴지통에 버리고나서 무심결에 검색창에 ‘번개탄’을 쳐봤다. 석탄이나 캠핑 관련용품 등 업체광고가 상위에 뜨고, 그 아래 한 줄뿐인 국어사전엔 ‘착화탄’을 속되게 이른다는 친절한 문구가 보였다. 그리고 연관 검색어 란엔 ‘번개탄자살’, ‘가수K 번개탄’이 순서대로 보였다. 번개탄자살을 클릭하자 가수K가 자살할 때의 현장사진이 큼직하게 펼쳐졌다. 차량 번호판이 모자이크 처리된 승합차와, 노란 띠 주변을 조사하는 경찰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화면을 내릴 때마다 기사 우측 상단부터 성가시게 따라다니는 스크롤 광고에 TV출연이 잦은 생태학박사의 사진이 보였다. 희한한 재주를 가진 동물이나 방황하는 유기견을 구출하는 TV프로그램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얼굴이다. 수작이 뻔한 광고로 여기고, 밑동에 깨알처럼 붙어있는 close를 클릭해 없애려 하다가 화면을 열게 되었다. 본문보다 두세 배 큰 ‘진화와 현대인’이라는 제목아래 진화론에 입각한 박사의 주장이 실린 글이었다. 박사는 길지 않은 글에서 허리와 안면 등의 경사각, 두뇌의 크기 등 여러 발달사항을 살필 때 현대인은 지금도 여전히 진화중이라고 주장했다. 화면 하단에는 FDA에서 승인된, 수험생의 학습능력을 향상시켜준다는 뇌자극기기의 광고가 실렸고 그 아래엔 진화론과 창조론을 도마에 놓고 치열하게 다투는 댓글이 끝없이 이어졌다. 박사의 글을 끄자, 뒷면에 숨어있던 가수K관련의 기사가 다시 드러났다. 기사 상단엔 어제날짜 20:38이 찍혀 있었다.
지은이를 실은 봉고차가 보인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언덕을 오르는 봉고차는 힘들어 보인다. 오늘이 17일이므로 7번,17번,27번 학생이 칠판 앞에서 문제를 푼다. 승부욕이 있는 학생 둘은 문제 앞에서 무서운 집념을 보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에 비친 분필가루가 허옇게 흩날리고 학생 둘은 따박따박 소리가 나도록 칠판의 문제와 한바탕 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학교생활을 하며 매번 느끼는 바이지만, 학생들 중에는 선생을 무안하게 만들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학생들이 적지 않다. 나머지 7번 학생은 문제에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창밖의 봉고차에서 내리는 지은이에게 살며시 손을 흔들어주고 있을 때, 학생은 내가 못 볼 줄 알고 가장 앞자리에 앉은 학생들에게 지원요청을 하며 완벽한 식과 답을 적었다. 적응 못할 새로운 환경이나 위기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은 사람들의 얼굴이 다른 것만큼 다양한 것인가?

토요일 퇴근 후 집에 도착하니 택배기사가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동네 막 들어설 때 전화를 주시더군요.”
누이가 집안을 정리하면서 오랫동안 자리만 차지하고 쓰레기로 변해가는 온갖 물품들을 정리했다고 한다. 라면상자에 박스테이프가 탄탄하게 붙여져 제법 묵직했다. 거실바닥에 박스를 놓고 배를 갈랐다.
  “지은아, 고모가 너 보라고 책 보내 주셨네?”
박스에서 어린이용 위인전집, 동화책, 테마별로 제작된 과학전집을 꺼내어 나열해보니 순식간에 거실 바닥에 타일을 까는 모양이 되어버렸다. 박스 바닥에 사인펜으로 휘갈겨 쓴 메모가 나왔다. ‘잘 꽂아서 보관해. 지은이가 크면 알아서 꺼내 읽어.’
지은이는 거북선이 그려진 이순신전기를 집어 들어 책장을 버겁게 넘겼다. 그리고 대강 훑어보더니 책을 놓고 말했다.
  “아빠 딴 거 없어?”
  “왜? 재미없을 것 같아?”
  “아니…… 그냥……”
  “자봐, 지은아 아빠가 문제 내볼게 지은이가 맞춰봐!”
나는 세종대왕 전기를 몇 페이지쯤 넘긴 다음 문제를 냈다.
  “옛날에 우리나라 왕 이었던 세종대왕은 한글하고 물시계를 만드셨는데 또 다른 시계도 만드셨거든? 해, 하늘에 떠있는 해 때문에 볼 수 있는 이 시계는 뭘까요?”
  “음…… 앙부일구, 세종16……년에 백성들의 편의……목적으로 장영실이 제작했으며……  보물 845호.”
  “지은아…… 어…… 어떻게 알았니?”
  “음? 그냥……”
  “아니, 그냥 이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냥……그냥……보이는데, 왜 그래 아빠……”
내가 흥분해서 목소리를 좀 크게 냈나보다. 눈에 눈물이 가득 찬 지은이가 끝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를 안고 등을 토닥이자 아이는 큰 설움이라도 있는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그렇게 얼마간 울었다. 바닥에는 세종대왕의 얼굴이 영문도 모른 채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깨끗하게 아이의 얼굴을 씻기고 얼마 되지 않아, 침대에서 쌔근쌔근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유치원에 전화했다. 아직 퇴근을 하지 않은 원장과 통화하게 되었다. 지은이에 대해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원장은 잠시 망설이듯 말을 멈추더니, 지은이에 대해 나름의 의문점이 있어서 안 그래도 엄마를 만나보고자 했다고 한다.
  “원생 수가 많지 않고 지은이는 행동에 특별한 데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눈여겨봤어요.  평소엔 여느 아이들하고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런데 간혹 아이답지 않은 말을 해서 우리를 놀라게 할 때가 있어요. 지은이 아버님께서도 바로 그 문제로 전화를 주셨다고 보입니다. 언젠가 지은이가 미국 역대 대통령을 줄줄이 외운 적이 있어요. 노래하듯이 가락을 붙이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또……아이들이 인형놀이 하는 것을 무심코 본적이 있었습니다. 지은이가 인형들을 바닥에 늘어놓으면서 장난감 다이아반지를 가장 끝에 놓기에 왜 반지를 끝에 놓는지 물어보니까 글쎄, 다이아몬드가 모스경도계에서 제일 단단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전에는……”
  “잠깐만요 원장님!”
내 말소리에 지은이가 잠에서 깼는지 잠시 돌아본 후 말했다.
  “원장님께선 지은이가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다고 보시지요?”
  “글쎄요,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마치 백과사전을 그대로 읽는 것 같다는 느낌 외엔 딱히……”
그날 저녁에, 언제나처럼 플라스틱 책상에서 그림을 그리는 지은이에게 따뜻한 우유를 건네고 가볍게 건배를 했다. 지은이는 공룡을 그리고 있었다. 고모로부터 받은 책 중에도 공룡을 다루는 것이 있었겠지만 지은이는 그 책이 사실상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딸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양 갈래로 달랑이는 방울을 아이가 아파하는지 눈치를 보며 풀어주었다. 이웃아주머니는 방울을 야무지게도 묶어두셨다.
  “오늘은 우리 딸내미 뭐 그려요?”
나는 평상시처럼 물으며 거실에 있는 PC 화면을 봤다. 모니터는 화면보호기가 작동되어, 지난여름 놀이공원에 갔을 때 내가 지은이를 안고 찍은 사진 여러 장이 반복적으로 화면전환이 되었다.
  “응, 공룡.”
  “무슨 공룡인데?”
  “응……스테고……”
아이는 다정하게 웃는 내 얼굴에 잠시 머뭇하더니, 살짝 웃으면서 그림 속 공룡을 초록색색연필로 힘주어 칠하며 말을 이었다.
  “스테고사우루스……일억……오천……만 년 전 주라기…… 성장 후 대략 육……에서 구 미터이고 초식공룡이고 등에 골판이 있으며……”
나는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재빨리 일어나, 거실로 가서 PC의 전원을 뽑아버렸다. PC는 한 순간에 기능을 멈추었다. 화면보호기는 커다란 회색 망치풍선을 들고 있던 지은이의 순서에서 그대로 꺼졌다. 고개를 돌려 지은이를 살폈다. 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들렸다. 지은이는 내가 뭘 하건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여겨졌다. 그리던 공룡에 정신이 팔린 채 왼팔로 턱을 괴고 색연필로 한가롭게 색칠했다. 바로 옆에 살며시 다가가도 지은이는 전혀 돌아볼 기색이 없었다.
  “저기……지은아?”
  “응?”
  “스테고사우루스는 몸무게가 얼마나 나갈까?”
  “음……몸무……어……잘 몰라.”
  “그럼……주라기에 살았던 공룡들은 또 뭐가 있는지 알아?”
  “아니……잘 몰라”
나는 아이가 당황하지 않도록 애써 웃으면서 거실에 있는 PC에 전원을 꼽았다. 여전히 지은이의 행동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없었다. 잠시 그렇게 5분정도 시간을 유지하고 다시 지은이 옆에 다가 앉았다.
  “아빤 지은이가 공룡얘기 해줬으면 좋겠는데……주라기 공룡……티라노사우루스……”
  “응? 아빠, 티라노사우루스는 백악기고 주라기는……브라키오사우루스가 있었는데 음……몸무게가 최고로 많이 나간대. 그리고 디플로도쿠스는……공룡 중에 꼬리가 제일 길어.”
그 뒤로 PC를 또 꺼보고 같은 실험을 반복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이로써 분명해진 것이다. 지은이는 인터넷을 검색해서 읽어내는 것이었다. 지은이의 머릿속에 있다는 그 혹, 그것과 이 일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 혹이 무선공유기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은이가 잠잘 때 체온이나 맥박을 체크해도 모든 수치가 정상적이었고, 뚜렷하게 걱정되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지은이는 스스로를 괴물로 여기지도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천부적 재주를 떠벌리지도 않았다. 지은이에게 그 혹은 눈이 안보일 때 안경 쓰는 경우하고 다를 것이 없었다.

차창 밖 높은 하늘엔 많은 구름이 비벼지듯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로 깨끗하고 인심 좋게 쏟아지는 태양광이 좋았다. 덕분에 앞차가 멋대로 차선을 넘나들어도 웃어줄 수 있었다. 지은이는 조수석에서 양 검지를 까닥이며 뽀로로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다가 교차로가 나오기 300M전부터 방향을 알려준다. 오늘 예정된 골든벨 녹화 때문에 지은이는 견학차 유치원을 하루 빠지게 했다.
  “골든벨 해야 되는데, 구름이 많네.”
  “아빠, 서울 경기지역은 아침에 구름만 조금 끼고  낯 최저 11, 최고 23도래.”
  “그래……고맙구나.”      
학생들은 예상문제집을 훑어보기나 했는지, 불과 24번도 못가서 대부분 떨어졌다. 패자부활전과 찬스 등 방송에 적절한 상황이 만들어질 때까지 녹화는 끝을 모르고 진행 되었다.  내가 삐에로 가발을 쓰고 학생들 앞에서 춤추는 선생님 무리 중 어디쯤에 있는지, 객석에 앉혀둔 지은이는 자라처럼 목을 빼고 아빠를 찾았다.
쇼를 끝내고 객석에 돌아와 앉자, 옆자리에 노총각선생은 지금까지 출제된 문제를 지은이가 다 맞혔다면서 눈은 똥그랗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래살고 볼 일이지?”  
홀로 살아남은 학생이 49번 문제를 놓고 생각이 나지 않는지 무척이나 괴로워하고 있었다. 찬스도 쓰고 없다. 여기서 끝나려나 보다. 그 학생을 내려다보고 지은이는 조용히 말했다.
  “의식의 흐름”
결국 학생은 ‘얘들아 미안해’만 적어서 자신 없게 화이트보드를 들어올렸다.
  “네에~ 정답은 의식의 흐름이지요”
안타까워하는 학생 주변에 탈락했던 다른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 중에 몇 명이 지은이에게 달려오더니 겨드랑이에 손을 껴 번쩍 안아들고는 무대로 달려갔다. 그리곤 어느새 MC의 팔에 지은이가 안겨져 있었다. MC는 지은이를 카메라 앞에 보이며 말했다.
  “자, 우리 어린이 이름 뭐예요?, 지은이예요? 우리 지은이 어린이도 이담에 공부 열심히 하면 여기 언니처럼 훌륭하게 클 수 있어요 알았지요?”      


  “말하자면 그래…… 아빠인 너로서 쉽진 않겠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 지은이는 현 인류 진화단계의 한 시점에 놓여있다고 봐. 현 상황을 용불용설에 맞춰보면 잘못된 건 없어. 지극히 정상적인 흐름일 수 있지. 모든 자연을 담은 이 우주는 아직 그 끝을 모르긴 하지만 그 뭔지 모를 완성을 향해 지금도 달리고 있잖아. 거기엔 온갖 에너지적 혼돈이 불가피해지게 돼. 즉,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는 거지. 기존 지식에 의하면 진화의 단계는 천문학적인 시간을 들여 이루어 진 결과물이잖아. 하지만 거기에도 어느 날 변화가 찾아온다면? 계절이 바뀌듯이 말이야. 우리가 인지하는 시간적 범위 밖에, 또 다른 형태의 것이 난데없이 다가와서 우리를 잠시 가지고 놀다가 사라지는 경우가 아닌가 생각하게 돼. 아니면 두 가지 이상의 시간적 테두리가 겹치는 단계였거나……다만 왜 하필 다른 누구도 아닌 지은이어야 했을까, 하는 감당키 어려운 마음도 있겠지…… 현재 과학기술문명은 지나치도록 빠르게 발전하고 있잖아. 지구촌 어디에선가는 이미 자기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마우스기능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휘발유를 커피에 섞어 마셔야 힘이 나는 사람도 있을지 몰라. 소나기가 내리기 전에 한 두 방울이 미리 떨어지는 것처럼 지은이는 그저 첫 타자일 뿐이라고 생각해. 물론 아닐 수도 있고……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야.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뚜렷한 치료법이나 필요성을 가지지 못했잖아? 다행히도 지은이가 이 일로 고통 따위를 받는 것도 아니고…… 정 걱정된다면 지은이에게 입막음을 제안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미니홈피 업로드 하는 속도도 남들처럼 맞추고 말이지. 공연히 사회적 주목을 받아서 성가셔 하는 것보다 한결 생활이 수월할 것 같은데……?”
친구는 할 얘기를 다 했는지 난간에 버려진 종이컵에 담뱃불을 껐다. 수년간 지은이의 혹을 지켜봐온 의사친구로부터 듣게 되는 설명은 여전히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은이가 열 살이 되었을 때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여전한 일상은 내 머리를 편안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지은이가 시험을 볼 때마다 몇 개씩 밀려 쓰라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조금 전 도착한 비행기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백인남자가 흠칫 손목시계를 살피더니 읽던 신문을 자리에 두고 사람들을 향해 두리번거리며 걸어갔다. 아이들을 부르는 엄마 목소리가 들리자 변신로봇들은 싸움을 멈추고 아이들 손에 들린 채 작은 발걸음들에 실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지은이가 저만치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바지주머니에 꽂혀있던 내 오른손을 빼 올려 같이 흔들어 주었다. 지은이의 옷차림과 걸음걸이, 그리고 양손바닥을 보이는 과장된 몸동작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이제는 영락없이 외국인 같았다.
의대 진학 후 지은이는 인터넷으로 만나던 외국인 친구들의 초청으로 자주 해외를 드나들었다. 졸업하고 얼마 뒤엔 자라면서 그간 검진을 받아오던 병원에서 잠시 머물다가 어느 날 이민을 결정했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온 탓인지 지은이는 자신의 능력을 좀체 밖으로 드러내지 않음에 익숙해져 있었다.
지은이가 철부지처럼 달려와 내게 포옹을 했다. 그리고 두어 발짝 뒤에서 여행용 가방을 끌며 하얀 이를 드러낸 젊은 흑인 남자가 다가와 모자를 벗고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안녕아빠? 잘 지내셨어요? 더 마르셨네? 기다리시느라 힘들었지요?”
  “음……그래 이젠 좀 어른스러워 져야지. 헌데 같이 온 이 친구는?”
  “응, 아빠. 아빠……사위 될 사람. 쉘튼! 인사드려 마이 대디.”
쉘튼은 고개를 숙여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운동선수인지 짧게 깎은 머리로 두피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고개를 들어 다시금 이를 드러내고 웃는 쉘튼의 왼쪽 귀밑엔 귀걸이가……귀걸이가……아니고 십자가형USB가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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