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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1929년 7월 12일. 친애하는 동무 정숙에게. 참달한 비고를 알리노라.

  아아, 정숙아. 이것이 꿈이니, 생시니? 땅이 울렁거리고 산산조각 난 하늘이 떨어지는 것이, 눈물은 현해탄을 채우고 한숨은 백록담을 감싸는 것이 정녕 생시의 일이란 말이니? 꿈에서도 겪고 싶지 않은 슬픔이 닥친 것이 정말이란 말이니? 옛말에 오장육부가 녹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내 오늘에서야 알겠구나. 너는 이게 다 무슨 말인가 하겠지. 며칠 째 학당에 나오시지 않는 언니를 뵙겠다며 초행가마 속 새색시 같은 얼굴로 전차에 몸을 싣던 내가 아니니?

  아아, 나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구나. 언니를 뵐 기쁨에 발이 땅에 닫는지도 모르던 나였다. 부군이라는 작자가- 능글맞은 낯짝의 콧수염 말이다! - 나와 학당에 다니는 녀학생이 누추한 여염집까지 무슨 행차냐며 희롱해도 참았다. 언니를 뵐 수 있는 기쁨을 생각하면 요런 고난 따위는 그저 달콤하기만 했구나. 그런데 고 사내가 뭐라고 한 줄 아니? 언니가 소박을 맞으셨다는 구나. 아니, 현숙하기는 신사임당 뺨을 치며 고아하기로는 황후마마보다 더한 언니를 아내로 맞이했으면 주제를 알고 받들어 모셔도 모자랄 판에 누가 누구를 내쳐? 나는 말을 잃고 서 있었다. 사내는 흉측한 미소를 지으며 언니의 친정되시는 댁의 주소를 일러주었다. 다행히 가까운 곳이라 나는 길을 나섰다.

  아니, 정숙아 제일 친한 동무인 네게만 말하자면 사실 나는 기쁨에 넘쳐 뛰어갔었다. 너는 내가 왜 기뻤는지 알 것이다. 언니께서 결혼한 몸이 되신 후 질투심에 떨었던 나를 보았으니 말이다. 언니의 손가락을 핥을 때도 사내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언니의 품에 안기면 고 사내도 품이 따사로운 것을 알겠지 하고 분을 이기지 못하던 내가 아니니? 그런데 언니가 소박을 맞으신 게야. 흉측한 사내의 품에서 벗어나 나만의 언니로 남아계실 테니 내 어찌 아니 기쁘겠어?

  언니의 사택은 ㅇㅇ동에 있더구나. 처마가 부서지고 문짝이 맞지 않는 한옥이었다. 사진에서나 존재하는 줄 알던 폐가에 언니가 계시다니 놀랍더구나. 나는 문을 두드렸다. 나온 것은 입이 뒤틀리고 코가 문드러진 매병환자 꼴의 -외양의 흉측함을 다 묘사할 수 없도다- 사내였다. 행랑아범의 복색을 하고 있던 사내는 내게 말했다. 언니가 나를 뵙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너의 놀라는 모습이 상상되는 구나. 언니와 나의 관계를 잘 아는 너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 그러니 내 마음은 얼마나 황망스러웠겠니. 나는 그럴 리 없다고 매달렸지만 사내는 쾅 하는 문소리와 함께 내 마음을 버리고 들어갔다.
  
  나는 울고 소리치고 문을 두드려댔다. 언니를 향한 절절함에 불타 언니의 이름을, 어떤 곡조보다 아름다운 음률을, 온갖 보배보다 나를 기쁘게 하는 단어를 부르고 또 불렀다. 간장이 녹아 내리는 소리에 마침내 언니께서 나오셨다. 박가분보다 새하얀 얼굴, 깊고 청망한 눈망울, 아찔하게 붉은 입술, 매서운 콧날과 턱 선.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이가 또 있을까? 아아-언니의 곱디 고운 자태는 내 눈물을 멈추고 나를 월궁항아의 정원에서 뛰노는 색동처럼 만드셨다. 내가 언니의 아리따움에 혼을 뺏기고 있을 때 언니께서 말씀하셨다. 오오, 정숙아. 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을지 상상이나 가니?

   "덕분아, 나는 더 이상 네 언니를 하지 않겠다"고 하셨단다.

  아아, 믿어지니 정숙아? 얼마 전 창가실에서 키-쑤를 해주시던 고 입술이었다, 입 안 가득 언니의 체취를 새겨 넣으셨던 혀였다. 천상의 기쁨을 보게 했던 샘물이 어찌 내 마음에 낙인을 찍는 형벌도구가 되었단 말이냐?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나는 무너졌다, 아니 세상이 무너졌어. 오오, 그런데 정숙아 언니께서는 자지러지는 내 모습을 보고도 그저 가만히 계셨다. 평소 같으면 내 진홍빛 뺨을 어루만지시고 품에 안아 달래주셨을 언니였을 터인데 그저 슬픈 표정으로 날 보고 계셨던 거야. 오오, 세상에 정녕 언니의 마음이 떠나간 것이었다. 정숙아, 이를 어찌하면 좋겠니? 진액이 스며든 울음도 언니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했다. 창백한 안색도 언니의 말을 주어 담지 못했어. 잘못이 있으면 차라리 매질을 하시지 버리시지마는 말라는 내 호소도 언니의 결심을 바꾸진 못했어! 언니께서는 그냥, 울부짖는 나를 보시더니 자택으로 돌아가셨다.
  
  아아, 세상에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지른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잘못을 모르겠어, 내가 언니의 아리따움을 혼자 간직하지 못하고 네게 말한 탓일까? 아님 내가 정숙하지 않은 모습으로 언니의 여동생이 된 탓일까? 아니다. 다아 소용없다. 이미 언니의 마음은 나를 떠난 것이다. 아아, 정숙아 나는 언니의 여동생으로 죽을지언정 언니 없는 세상에 살고 싶지 않구나.  언니 없는 내 삶에 의미가 있을 것인가? 없다. 없단 말이다.
기억이 나는구나. 춘사월을 맞아 바람처럼 벚꽃이 날리던 교정을. 각자 자색을 뽐내는 꽃잎이 어우러져 만든 향취와 정경을. 세상 만물이 벚꽃에 묻혀 사라지는 듯 했고 한낱 미두꾼의 서녀인 나도 지워지는 듯 했다. 어지러울 정도로 강렬한 벚꽃 내음새에 공포감마저 느낄 무렵- 나를 구해주신 이가 있었다. 그 이가 눈에 담기는 순간, 벚꽃잎마저 색을 잃고 세상에는 그이만이 존재했었다. 그런 언니다. 나의 세상이고 나의 모든 것인 언니란 말이다.

  아아- 정숙아. 나는 잘못을 알았다. 아리따운 언니를 혼자 차지하려던 욕심이 언니를 잃게 만든 것이야. 행복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 나의 죄인 것이야. 아아, 정숙아 나는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없다. 언니가 나의 세상인데 언니께서 나를 버리셨으니 내가 살아갈 이유가 있단 말인가? 나는 죽을란다. 나는 죽을 것이다. 내가 죽어도 너무 슬퍼 말거라. 언니 없는 세상에 조덕분으로 사는 것보단 구더기 끓는 시체가 되어 언니가 보듬어주시던 볼을 문드러지게 하고 언니를 담았던 눈을 파버리게 하고 언니에게 무서운 말씀을 들었던-아직도 믿어지지 않는구나-귀를 짓무르게 하는 것이 낫겠다.
정숙아. 네가 진정한 동무라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련? 나 죽거든 무덤가에 언니의 사진 하나만 놓아주어라. 황천길의 고됨은 두렵지 않으니 언니를 뵙지 못할 넋이 불쌍하다. 넋이 되어서라도 언니 얼굴을 보고 싶지만 그것도 아니 된다 하실까? 아아, 모르겠다. 언니의 사진이라도 보아야 나는 죽을 수 있을 수가 있다. 아아, 정숙아 진정 언니께서 나를 버린 것이로구나!  




1929년 7월 13일. 친애하는 동무 정숙에게.

  아아, 정숙아 언니께서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었다. 네게 편지를 쓰고 나는 한 장의 종이를 더 집었어. 언니께 못난 녀동생이 되어 언니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에 죽음으로 사죄하겠노라고. 그 날, 처음 자매의 연을 맺던 날 하사하셨던 수건을 보내니 종종 그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시고 입도 맞춰주신다면 넋이 되도 여한이 없겠노라고.  목숨보다 애지중지 하던 수건-언니의 손수 만드신, 언니의 고결한 기품과 자색이 올올마다 배어있는 그 것-을 돌려보냈으니 내 결심이 얼마나 굳은 것이었는지 너는 짐작하리라. 아범을 시켜 편지를 보내고는 나는 길을 나섰다.

  아아- 어제 따라 달빛은 매정하게 탐스럽더냐. 자매의 연을 맺던 날 창가실에 비취던 달빛 같지 않았겠니? 너도 알다시피 학당에 다니던 이치고 언니를 사모하지 않는 이 없었다. 송 반의 화자는 뒷간까지 언니를 쫓아다녔고 매 반의 갓난이는 월사금을 떼다 언니께 양장-청백리 같은 언니는 받지 않으셨지만-을 선물하지 않았니. 심지어 정숙이 너도 편지 꽤나 보냈었지 않니. 허나 언니가 녀동생으로 간택해주시고 볼을 어루만져 주신 것은 오직 나, 조덕분이뿐이었다. 언니께서 "우리 자매의 연을 맺자구나" 하셨을 때 내가 까무러치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롱하고 탐스런 달빛을 보니 그날의 흥분, 언니가 볼을 만져주실 때 짜릿함, 언니의 숨결이 떠오르는 듯 하였다. 허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이었단 말이냐. 굳은 맹약의 언니는 가고 고요한 강의 얼굴만 존재하고 있었다.  

  어스름을 그득 담은 강은 사자(死者)의 낯빛 같았다. 인적은커녕 물결 흐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던 죽음의 강 앞이 무섭기도 했지만 저리 무거운 강이라면 내 슬픔 따위는 금방 묻혀 잊혀지리라 마음먹었다. 다만 마지막까지 걱정스러웠던 것은, 부패한 내 시신의 흉측함이 언니의 청아한 눈망울에 행여 폐나 끼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니께서는 부덕한 나를 찾지도 않으실 거니 - 아, 아, 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인당수 빠지는 심청이마냥 나는 치마를 뒤집어 썼다.
그 때 나를 잡는 이가 있었다. 누구겠니, 정숙아. 나를 뼈가 으스러지도록 안아주시는 이가? 저번 창덕원 온실에 들어갔을 때보다 더한 향취를 내뿜어 나를 아리아리하게 취하게 만드시는 이가, 언니 말고 또 누가 계시겠니? 언니께서는 나를 안아 들고 둑방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리고는 어찌 목숨을 함부로 여기냐며 나를 꾸짖으셨어. 나는 분하고 투정부리고 싶은 마음에 언니의 가슴팍을 살짝 내치고는 말을 뱉고 말았다. 언니 없는 세상에 조덕분으로 살아남느니 언니의 녀동생이 되어 죽겠노라고. 그랬더니 언니가 무얼 하신 줄 짐작이나 하겠니? 언니께서 우셨어! 총검을 휘두르는 순사 앞에서 눈 하나 꿈쩍 안 하는 언니께서 울고 계셨던 거야!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언니께서 좋아하시는 어리광을 피우기로 했어. 언니의 손을 꼬옥 잡고 언니의 가슴에 얼굴을 얹으려는데 어머나 어쩜 그리 언니의 손이 찬 것일까? 내 볼을 어루만지실 때 화로보다도 뜨거운 언니의 손이었는데 어찌 겨울철 강물마냥 변한 것일까? 나는 깜짝 놀라 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어. 언니는 눈물을 그치고 슬픈 얼굴로 나를 가만히 보셨는데 달빛이 감싸는 언니의 얼굴은 옥황상제의 복숭아를 훔쳐 먹고 내려온 월궁항아가 분명했다. 어쩜 그리 살결은 곱고 하야며 눈썹은 짙고 입은 어찌 그리 붉고 코는 오뚝한 것일까. 언니는 한숨을 쉬시더니 내 손을 잡고……세상에 정숙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니? 자신의 가슴에 내 손을 올려놓으셨어! 언니의 그 봉긋한 가슴을 내가 만졌단 말이야! 그런데…… 언니에겐 심 박동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오오 정숙아, 언니는 심장이 뛰지 않았어. 언니께선 정녕 돌아가신 것인가? 언니처럼 아름다우신 분은 이 세상에 살아있을 수가 없는 것인가? 나는 의혹과 슬픔과 애정이 뒤섞인 눈으로 언니를 바라보았다. 언니께서 말씀하셨다.

  언니의 조부께서는 신미년에 아미리가 亞米利加) 사람들이 이양선을 앞세워 평양을 침략했을 때, 앞장서서 싸운 사내대장부셨다. 김에리사 선생님께 말씀해주시던, 어떤 화포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던 이양선을 일반 민노들이 물리쳤던 승리를 너도 알겠지? 흉포한 총탄에 백성들의 피가 대동강을 붉게 물들일 무렵, 이양선은 거대한 불길로 바뀌었고 언니의 조부께서는 타오르는 열기에 사로잡혀 대창을 꼬나 쥐고 이양선으로 뛰어 들어가셨다는 구나. 술 취한 코쟁이의 눈을 꿰고, 어린 코쟁이의 이빨을 부서뜨리고, 늙은 코쟁이의 뱃가죽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그 때 조부의 모습은 장안교의 조자룡이 아닌 흡사 망나니 같았다고 하셨어. 조부 스스로도 나중에 언니께 다섯 길 넘게 솟은 화마와 코쟁이들의 색다른 피 냄새가, 피 맛이 자신을 미치게 만들었다고 말씀 하셨다는 구나. 조부께서 정신을 차렸을 때 조부는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이양선 지하에서 헤매고 계셨대. 대창은 몇 놈의 창자를 꿰었는지 다 문드러져 있고, 옷은 피범벅이 되어 움직일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에 몸서리가 쳐지셨다는 구나. 조부가 밖으로 나가시려고 할 때 어둠 속에 희미하지만 뭔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셨대. 아무리 간이 큰 조부라도 등골이 제법 서려오는데, 무언가가 조부님을 덮치더니 목덜미를 깨물었대. 너는 상상도 못하겠지? 나도 그랬단다. 목덜미를 깨물리시다니? 근데 고 피가 빨리는 기분이 양귀비 연기를 마시는 것과 같았다는 구나. 온 몸의 근육이 경직되었다가 풀리고 정신이 저 멀리 떠나갈 것 같은 무렵에 무언가가 말을 했다고 하셨다.

   " 그토록 피를 탐하니 실컷 즐기고 살거라."

  그리고 조부께서는 정신을 잃으셨단다. 조부께서 피를 탐하는 서양귀에 쓰이신 것이다.  피를 탐하는 귀신이라니 도대체 뭐 하는 요물인지 상상도 가지 않지? 나도 실은 언니의 말씀이 잘 이해되진 않았지만 -언니는 원체 어려운 말을 잘 하시는 분이니까 - 대충 말해보자면 이렇단다. 그 귀신은 지독한 놈이라 어떤 굿을 하고 치성을 드려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구나. 네가 저번에 용하다구 했던 북한산 밑 박수무당 있지? 조부께서도 진즉 그 박수에게 가보셨는데 어찌나 독한 요물인지 고 박수가 오히려 눈꺼풀을 뒤집고 거품을 물었다는 구나. 근데 유일하게 서양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건 자식을 낳는 거란다. 자식을 낳으면 서양귀가 자식에게 쓰인 댄다. 그래서 언니의 조부께서는 언니의 아버님을 낳으셨고, 아버님은 언니를 낳으셔서 흡혈귀란 놈에게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셨다. 아아, 정숙아. 언니께서 그윽한 눈으로 나를 보시며 언니가 고 난쟁이 똥자루와 결혼한 것은 서양귀를 떼어버리기 위함이었지 결코 내가 싫어서는 아니라고 하셨단다. 아이-천벌 받을 생각이겠지만 이 와중에도 언니께서 억지로 결혼하셨다는 게, 내가 아닌 딴 남자에게 마음을 주시지 않으셨다는 게 어찌나 다행인지? 게다가 결국 지금 언니의 품을 차지한 것은 난쟁이 똥자루가 아니라 바로 나, 조덕분이란 말이다.
  
  허나 고 난쟁이 똥자루 콧수염은 고자인지 매일 밤 괴로운 순간이 지나갔지만-나는 잇몸을 깨물어야 했고 잇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를 보고 언니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셨다- 얘는 생기지 않았다. 결국 언니께서는 처녀의 피를 계속 드셔야 했다. 어째서 처녀의 피냐고? 서양귀란 놈이 요상도 한 것이, 남정네에게 붙은 귀신은 남정네의 피만 탐하게 되고 여인네에게 붙은 귀신은 여인네의 피만 탐한다는 구나. 그래서 언니도 처녀의 피를, 그것도 아리따운 처녀의 피를 탐하시는데 어디 요즘같이 문명화된 세상에 피를 구할 수 있니?  언니는 학당에 다니시면서 귀여운 녀동생을 사귀고 그들의 피를 드셨대. 그런데 나만은, 언니가 진정 아끼시는 녀동생인 나의 피는 드실 수가 없으셔서 배고픔을 참고 나를 살리기 위해 버리셨다는 거야. 그 말을 하시던 언니의 눈에는 갈망이 가득했다.
  
  나를 갈망하시는 언니의 눈동자 앞에서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니. 언니께서 나를 버리신 게 아니시라는데, 그 수많은 녀동생 들 중에 나를 정녕 귀애하셨다는데 내가 뭘 어찌할 수 있겠니! 나는 내 저고리 고름을 풀었어. 저고리가 사르륵 떨어져 내리고 내 목덜미가 들어났다. 언니의 호흡소리가 거칠어졌어. 언니꼐서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만 나는 언니를 끌어안았다. 언니 숨결, 달콤한 따사로움이 목덜미에 짙게 배어들었다. 아아, 그리고- 그리고- 언니가 내 목을 무셨을 때 그 짜릿한 느낌이란! 남녀의 운우지정이 이보다 더 조은 것일까? 아아 정숙아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하것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거야. 달빛과 피와 언니의 하얀 옥수가 섞인 고 짜릿함에 나는 고만 혼절하고 말았어.

  정신을 차려보니 난 언니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어. 언니께서는 내 얼굴을 어루만지시면서 슬픈 표정을 지으셨지. 정숙아, 너에게만 말하지만 그 때 난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 했다.  언니께서는 내게 미안하다고 하셨어. 다시 이런 일 없을 거라고, 그만 떠나시겠다고 했어. 나는, 나는… 내가 뭘 할 수 있겠니. 나는 얼굴을 고대로 들어서 언니께 키-쑤를 했단다.  그리고 평생 언니 곁에서 있을 거라고 했다. 아아, 정숙아 이것이 꿈이니 생시니? 이제 정말로 언니가 나만의 것이 되었어! 경성에서 제일 가는 미모와 인품과 자색과 지성을 겸비한 미인, 책만 파던 너조차도 사모하던 여인이 나만의 김경옥이 된 거야!
  
  동무야 이 것이 내가 집을 나온 까닭이다. 어머니가 나를 걱정하시는 마음 다 잘 안다. 하지만 네가 그랬잖니 인생은 한 번뿐이라고. 지금은 내 열 녀섯 생애 중 다시 없을 기쁜 날들이다.  날 철없다 여기지 말고 네가 대신 어머니 위로 좀 해드리렴. 우리 집 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리를 입에 달던 네가 아니니. 빛도 안 드는 교회 쪽방보다는 양옥집이 낫지 않겠니? 어머니를 부탁한다.
나는 언니 댁에 들어와 있다. 조부님, 아버님은 날 반가워해주시고 언니는 날 사랑해주신다. 요상한 서양귀 때문에 언니는 낮에 주무시고 해가 떨어질 무렵 일과를 시작하신다. 나는 오전엔 언니께 드릴 피를 구하러 매독 사내랑 돌아다니고 밤에는 언니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지낸다. 이러다 보니 3-4시간 밖에는 못 자지만 행복감에 취해 피곤한 것도 모른다. 후후- 언니 옷자락이라도 잡아봤으면 좋겠다던 너 였잖니? 낮에 언니가 주무실 때 나는 가만 가만 언니를 만져보곤 한단다. 요 미역 같은 머리카락이, 탄탄한 허벅지가, 조고맣게 패인 배꼽이, 목덜미에 난 솜털이 정녕 내 것인가, 나의 언닌가 해서 몇 번이고 간질어 보고 깨물어 본단다. 언니의 몸엔 한기 가득하고 심장은 느리게 뛰지만 사과 같은 가슴 사이에 귀를 대고 언니의 심장소리를 듣는 날들--- 아, 동무야 행복하고 행복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노라!




1929년 9월 1일. 친애하는 동무 정숙에게.

  오랜만의 연통이다. 그 동안 사는 게 바빠 기별을 못했다마는 언니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으며 잘 지내고 있다. 아- 그러고 보니 9월이구나. 본관으로 가는 길은 은행 냄새와 단풍 물로 범벅이 되고 못난이 소사는 길을 청소하면서 투덜거리겠지. 곰보빵 같은 치가 신세한탄을 하며 바닥을 청소하는 게 증말 곰보 같아서 너랑 나는 제법 킬킬거렸던 일이 생각나노라. 그러고 보니 애란이는 시집을 갔다며? "나는 남자고 뭐고 다 필요 없어요. 언니가 유일한 낭군이여요" 매일 같이 외치고 다니던 얘가 학당에서 제일 먼저 시집을 가다니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다. 하여간 내 사랑하는 학당 동무 정숙아, 그리고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동고동락하던 자매 같은 이들아. 너희는 졸업반이구나. 누구는 결혼을 할 테고 누구는 일본 유학을 갈 것이고 누구는 조선의 무지한 녀성을 개화시키는 일에 몸을 바치겠지. 에리사 선생님께서 하시던 말이 생각난다. 여러분은 한 명의 개인이 아니라 조선 녀성의 횃불이요 , 희망이라. 주먹을 쥐시며 부르짖으시는 말씀에 나도 신녀성이 되어 넓은 세계를 바라볼거라 약조했었다..... 아니다, 나는 평생의 정인인 언니랑 같이 있다. 나는 행복하다, 그렇구 말구.  

  동무야. 실은 문제가 있었다. 처음에 언니 삼시 세끼를 챙겨드리는 일은 쉬웠구나. 집을 나오면서 아버지 장롱을 뒤져 돈 뭉텅이를 가져갔었다. 그 돈으로 우리 아버지, 오빠들이 하는 것처럼 모던 걸을 사서 언니께 드렸었다. 모던 걸이야 양장을 곱게 차려 입고 돈 몇 푼에 자기 손목을, 사내들에게 연애의 기쁨을 잠시나마 주는 이인데 피라고 못 팔게 무어란 말이니. 언니도 행복해 하셨다. 가끔은 진고개 모던 걸의 피가 맛있었다며 다시 한 번 데려오라 청하시고 청량리 모던 걸은 운동을 안 해 맛이 떨어지니 데려오기 전에 꼭 야채반찬을 많이 먹이라고 말씀하시며 나의 공로를 치하하셨다.

  모던 걸이 문턱을 들락날락 거리는 횟수만큼 돈 주머니는 가벼워졌다. 보름 전 2원 4푼어치의 피가 언니의 위장에 마지막으로 들어간 식사였다. 언니는 타다 남은 잉겅불마냥 말라가셨고 나의 마음도 타 들어갔다. 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언니 댁에는 돈이 없었다. 아니, 내가 가져온 돈의 반은 언니 조부님과 아버님의 생계 유지비로 들어갔다. 그 분들은 자식을 낳기 전 근 20년을 귀신에 쓰인 생활을 하다 보니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나 예쁜 청년들을 찾아 환락가를 돌아다니는 생활을 하시다 보니 돈을 버는 법이나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계셨다. 아이, 내가 어른들 욕을 하는 걸 알면 효성스러운 언니께서 필경 싫어하시리라. 하여튼 언니께서는 말라가셨다. 허기가 너무 심하면 나를 내던지고 아픈 말로 상처를 주신 일도 잦았다.

  아니다. 이것은 모두 나의 잘못이다. 언니를 배고프게 한 나의 잘못이다. 언니는 원체 자상한 분이시다. 언니께서 배가 부르시면 나를 품에 안고 자신이 만든 상처 하나 하나에 키-쑤를 해주셨다. 그렇다, 언니의 성정이 사나운 것은 모두 나의 부덕함이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누가 열 녀섯짜리 처녀, 학당도 졸업 못한 계집애에게 일을 주고 돈을 주겠니? 더욱이 어머니께서 나를 귀하게 키우신 고로 나는 설거지나 바느질 하는 법도 모르는데 무슨 일을 하겠니? 길은 보이지 않았고 무능력한 나를 꾸짖는 어른들과 언니의 화내심은 날로 강도를 더했다.

  나는 참다 못해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께서는 안 계셨고 안질에 눈이 다 짓물러 앞이 안 보이는 어머니께서만 덩그러니 계셨다. 날 부여잡고 " 이 몹쓸 것아, 너 어디 갔었니? 너 보고 사는 이 에미는 죽으라고?" 하며 통곡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마음이 조금 흔들렸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결혼 가라고 하셨을 때, 그것도 은행가의 두 번째 소실자리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어머니께 말씀 드렸다.

   " 어머니, 나 연애하우."

연애라는 말이 어머니께는 어찌나 놀라운 것이었든지 안질로 짓물러진 눈이 번쩍 뜨였을 정도였다.


   " 네.. 네가 연애를 한단 말인가? 그 사내애랑 같이 있었던 거가? 어떤 사내애가? 너 혹시
     사내에게 손목을 잡히거나 입술을 내어주지 않았겠지?

   " …… 입술은 주었수."

   " …… 세상에 이런 망조가 있나! 딱 하나 있는 딸년 시집 잘 가라고 그 비싼 학교를 보냈더니
    몹쓸 연애라는 것만 배워왔단 말인가? 학교 보냈다가 여자 신세 망친다는 소릴 내 구구절절
    들어왔건만 내 진정 이리 될 줄은……"

  아이, 나는 차마 할 말이 없었다. "계집애는 밥 반공기만 맥이면 알아서 크지." 라든 구두쇠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가 어떤 핍박을 받으면서 나를 학교에 보냈는데 어머니 가슴을 이리 아프게 한단 말인가?

    " 어떤 사내가? 집안은 좋나? 그 쪽 어른을 내 당장 뵈어야겠다."

    " 사내가 아니라 학당 선배라우. 경성에서 제일가는 지성에 미모를 갖추었다오."

    " 여자란 말인가?"

    " 언니 참말로 좋은 사람이오. 지금 병약하여 어머니께 보여드리진 못하지만……'

    " 아아- 칠성님, 천신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딸이 여자를 좋아한답니다. 야야, 나는
      정말로 네가 연애라는 몹쓸 짓을 하는 줄만 알았는데 난 또 뭐라고. 자, 그럼 두말없이 결혼
      하는 거다? 내 오늘 중으로 매파를 넣을 터니……."

    " 어머니!"

    " 어디 여자가 소리를? 어미 앞에선 괜찮지만 너 시댁에서 그러면 어미 욕 먹인다."

    " 나는 언니가 좋다니까. 결혼하기 싫다니까?"

    " 누가 언니 좋아하지 말랬니. 결혼하기 전에 실컷 언니 좋아해라. 그토록 언니를 좋아한다니
      실컷 언니랑 손도 잡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러다가 결혼하면 되지 않니?"

    " 어머니!"

    " 아이 네가 좋아한 게 여자라서 참말 다행이다. 참말 다행이야……"

  아- 구세대 분이라지만 어찌 내 맘을 이해 못해 주시는가? 어머니도 언니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한낱 치기로 본단 말인가?  세간에서는 애란이 같은 얘들을 보고 한 때 지나가는 풍조, 어린 날의 치기처럼 여기지마는 언니의 대한 나의 감정은 불멸한 것이야! 우리가 자매 결연할 때의 그 신성함을 어느 결혼식에 비할 수 있으며 서로를 아끼는 마음은 백년해로하는 부부와 같지 않니? 이 도령과 성 춘향보다 더 절절하고 로미오와 줄-렛보다 진한 이 세상 어느 남녀 사이의 정분과도 비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언니께서도 그렇고 말고. 어머니 앞에 나는 비참할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께서 하도 시집가라 성화시기에 돈 달란 말씀도 못 드리고 그냥 뛰쳐나왔구나. 내가 나갈 때 아니 된다며 무너지시는 어머니의 모습! 그 모습을 보는 나의 심경은 어떠했겠누. 허나 내게는 언니가 계신다.

  한 가지 위안인 것은 네가 어머니께 말 상대가 되어드린다는 사실이다. 알 길 없는 나의 행방 때문에 혼절하실 때 마다 네가 옆에 있었다며? 동무야, 참말로 고맙다. 내 불효를 네가 갚고 있고나. 이 은혜 어찌 갚아야 할지. 불쌍한 어머니도 나 같은 천정부지 딸보다는 너 같은 부모는 알길 없지만 선교사 밑에서 곱게 큰 아이를 수양딸로 맞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정숙아. 네가 나의 진정한 동무라면, 우리 어머니께서 너를 얼마나 귀애하시는지 안다면 부탁 하나만 더 들어다오. 부디 언니께 네 목을 내어드릴 수 있겠니? 어려운 부탁인 건 안다 정숙아. 하지만 네가 내 목숨 살리고 싶다면 내 부탁 한 번만 들어다고. 우리가 어떤 사이니 동무가 아니라 자매 같은 사이잖니? 어리석은 동생 살리는 셈 치고 도와다구. 편지 받걸랑 내가 앙꼬빵을 잘 사주던 삼립당 뒷골목으로 오너라.



1929년 11월 15일 은혜가 백골난망
  
  기쁘고 기쁘다. 개화된 지식인으로 신령이니 미신이니 하는 것을 믿지 않으나 전생에 무슨 덕업을 쌓아 현세에 이런 복을 누리는 거니. 첫째는 물론 언니를 뵙고 사랑 받으며 사는 복이요, 둘째는 정숙같이 나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도와주는 붕우를 만난 것이다. 조상들이 모름지기 인간의 법도로 삼강오륜이라 하셨는데 임금이자, 부모이자, 부군-언니를 부군이라고 칭해도 될까? 볼이 뜨거워 어쩔 줄을 모르는 나다-이신 언니를 섬기는 도를 알며, 너의 우정을 받고 있는 나니 어찌 공자께서 보시기에 삼강오륜의 덕을 잘 지키기 않는다고 하실 수 있겠어? 신체발부수지부모라는 말이 문명화된 세상에 더 이상 통용되는 것은 아니나 피를 나눠준 너의 은혜로움에 백 번 감사하노라.
  
  니에- 그런데 너는 무얼 먹고 그리 맛난 피를 가졌누? 언니께서 네 피의 향취와 진미가 특별하다 몇 번이고 칭찬하셨다. 나도 너처럼 맛있는 피를 가졌으면, 그래서 언니가 나를 한 번 더 취하셔 단단한 송곳니가 살갗을 뚫고, 심장이 수축되고 풀릴 때마다 흥분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짧고 거친......아아, 차마 부끄러워 여기서 다 형언치 못하겠도다. 언니께서 나를 귀애하시는 맘이 식었다던가 그런 오해 마라! 세 번 피를 빨리는 이에게도 흡혈귀가 옮는다 구나. 언니께서는 저주를 물려주고 싶지 않으시다면서 굶주림 속에서도 내 피를 거부하셨으니 어찌 자애하시는 마음이 얕다고 하겠누.  허나 나의 좁은 마음은 섭섭한 생각이 든다. 에잇- 언니의 자애로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나는 정녕 못난 녀동생이로다.

  어제의 일이다. 네 피를 잡수시고 언니가 네 피가 얼마나 좋은지, 어떻게 맛있고 어떤 냄새가 나며 질감과 혀 돌기에 감도는 맛이 어찌나 조흔지 말씀하셨다. 허나- 나에겐 그냥 피일 뿐이었다. 핥아보고 물에 타먹어 보고 색도 보았지만 그저-짭짤하고 구역질 나는 피였다. 언니는 기분이 좋아지셔 3척이나 되는 나무 위를 뛰어올라가 달빛의 색깔이 몇 가지인지, 옆 동네 고양이가 쥐 사냥을 하고 있다든지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있던 것은 없었다. 허나 언니와 같은 존재가 된다면 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튼- 언니를 통해 너와 나는 친구보다 깊은 연을 맺게 되었다.  어찌 보면 본부인과 하룻밤 여인 같은 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언니같이 곱고 우아하고 명민하며 현숙하신-언니의 미덕을 찬미할 말을 어찌 한낱 종이에 다 나열하겠느냐. 이만 줄인다. - 분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은총을 입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도 언니께서 편안하게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홀수 날 마다 학당 동무들에게 빵을 사준다고 하여 삼립당 뒷골목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어떻겠누? 수양딸이 되었으니 용돈도 넉넉할 게 아니냐. 네가 동무를 데려오고 생활비조로 돈도 가져온다면 이 은혜 잊지 않으마. 언니께서도 정숙이 네게 감사하고 계신다. 정숙아. 부디 나를 봐서라도 아님 언니를 뵐 일을 생각하며 맡은 소임을 다하길 바란다.
  



1930년 4월 09일

  집에만 있어 그런가, 학당 다니던 시절이 자주 떠오르는구나. 부장인 언니께서 도서실을 정리하시느라 매일 남아계셨고 나는 언니를 기다리며 책을 읽었지. 주로 연애소설이었다. 첫 눈에 인연을 알아보고 죽음이 갈라놓아도 저승에서라도 만나는 사람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떨림이 언니를 뵐 때 나 같았고 고난이 언니를 짝사랑할 때의 나 같았기에 나는 책 속에 빠져들곤 했다.  나는 이 책 속에서 나는 무도회장의 쭐-렛이었다. 창가 아래를 지나가는 서문경의 풍채에 반한 반금련이었고, 장병천을 위해 단지를 하던 강병화였다. 줄-렛이 독약을 마시고 반금련이 참살 당하는 지경에 이르면 나도 언니를 잃는 것이 아닐까 하여 홀짝거렸다. 그러다 보면 귓가를 스치는 향취와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가 계셨다.

   "오늘은 어떤 문구가 너의 감회를 자극했느냐?"

  언니가 나를 버리실 것만 같아, 언니와 내가 헤어질 것 같아 울었노라 말씀 드리면 언니는 나를 품에 넣고 남대문이 전소되면 모를까 그런 일은 없을 거라 토닥여주셨다. 그래도 나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언니 손을 꼬옥 쥐고는 길을 나섰다. 낮에만 해도 웃고 떠드는 동무들 소리와 꾸중하시는 선생님의 발걸음소리로 쉴 자리 하나 없이 법썩한 길인데 밤의 정경은 어쩜 그리 달랐더냐? 심해처럼 쥐 죽은 밤에 대리석 빛이 한 줄기 있었다.

  고운 소금처럼 뿌려진 달빛 아래 걸음을 옮길 때마다 벚꽃 향내와 색이 온 몸에 물드는 그 길에는 언니와 나만 있을 뿐이었다. 빛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면 어둠 속의 웅얼거림이 나를 집어삼킬 것 같기에 나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언니께 졸랐다. 총독부의 최근 강령에 대한 비판부터 수업 내용, 친구들 사이의 이야기, 장안의 화제, 읽은 책 내용, 배운 창가 한 소절까지...... 언니의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언니 또한 나에 대해 다 아셨다. 길도 끝물에 이르고 밤의 자색이 강렬해질 무렵에는 아침에 콩자반을 먹기 실어 뱉은 것이 나인지 동아 일보에서 나혜석 선생님의 글을 읽고 조선 녀성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울분과 선각자로서 맹약을 한 것이 언니인지 모르는 판이었다. 아아- 네게 말을 하니 그 길이 눈 앞에 펼쳐지는구나. 그 길, 언니와 내가 단둘이 걸었던 길. 서로가 느끼는 촉감, 공기의 맛, 살갗의 냄새, 달빛의 색깔을 말하지 않아도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알았던 길- 길 끝에 커다란 오동나무에 이르면 언니와 나 혹은 언니 혹은 나는 이 것이 행복이라고 느꼈었지. 그 길을 다시 한 번 언니와 걸어보고 싶구나.

  하지만 언니는 필경 피곤한 기색으로 들어와 내게 별 말씀도 안 하시고 주무실 테지. 오늘도 언니는 나를 집에 두고 출타 하셨단다. 괜찮을 것이다. 언니는 장정 서넛도 해치울 만한 괴력이 있으시고 밤이야말로 언니의 시간 아니니. 아마 지금쯤- 달빛이 안개처럼 깔린 경성시내를 날아다니고 계실 테지. 사람 구경을 좋아하시는 분이니까 총독부 옥상에서 땐스-걸들의 몸 놀림을 보고 계실지도 모른다.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니까 남산 도서관에 들어가 맑스인가 뭔가 하는 냥반의 저서를 읽으실지도 모르고 아님 예쁜 처녀의 목덜미에....... 아, 아, 정숙아 어찌하면 조으니? 언니께서 무얼 하고 계실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정숙아 부탁이다. 삼립당으로 얘들을 데리고 올 때 부디- 나보다 예쁜 얘들은 데리고 오지 말거라.




1927년 7월 1일. 언니를 처음 뵌 날

  생각해보니 오늘은 30년 5월 23일이더구나. 머리가 아파서 날짜도 잘 모르는 모양이다. 머리가 아프다. 방이 왜 이리 춥니. 어머니께서는 어디 계셔. 아니, 나는 언니 댁에 있다. 매병쟁이는 불을 안 떼고 뭘 한담. 아버님, 할아버님은 또 출타하셨나? 정숙아, 너 그거 아니-? 매병쟁이 말이다. 코는 흔적만 남아있고 꾀죄죄한 사내. 언니 댁의 행랑아범. 고 사내가 과거엔 미남이었다는 구나 글쎄? 지난 번 아버님이 웬 이쁘장한 청년을 안고 들어오시는 길이었어. 아버님께 인사 드리고는 나는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근데 누가 벽을 긁적대지 않더냐? 사내였다. 사내가 아버님 방에서 나는 소리에 맞춰서 손톱으로 가슴 대신 벽지를 찢어발기고 있었어. 매번 벌어지는 일이지만 유독 시끄럽게 굴기에 "네 까짓 게 질투할 건덕지냐 되냐? 너는 저 청년보다 늙고 썩은 얼굴이잖냐."했더니만 눈을 번덕이며 자기도 장안에서 유명한 미 청년이었다고 하더구나. 나는 우스워서 배를 잡고 바닥을 굴렀지. 우습잖니? 네가 남은 천쪼가리를 모아 싸구려 손수건을 만들어 언니께 바친 것을 보고 웃던 것보다 더 웃었단다.
  그랬더니 사내가 거품을 물면서 ‘그러지 마라, 내가 얼마나 미남이었는데. ’ ‘아버님을 모시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이제 추해서 나를 찾지도 않으신다’라고 하더구나. 문드러지다가 반만 남은 사내가 아버님을 사모한다고 고백하는 꼴이 얼마나 웃기던지.  
내가 웃음을 그치지 않자 사내는 입술 –반 남아있는 것도 입술로 친다면 말이다-을 깨물면서 나도 자신처럼 추해질 거라고 하더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누구냐, 조덕분이 아니냐. 이런 말은 그렇지만 내 통통한 진홍빛 뺨은 남학생의 연정에 불을 질렀고 펜레터 깨나 받았던 내가 아니냐! 언니께서도 특히 발그스레한 뺨이 사랑스럽다며 종종 깨물어주셨다. 나는 사내에게 소리를 치면서 가재를 내던졌다. 사내는 히죽거리더니 거울이나 보라며 방을 나섰다. 나는 욕을 한 바가지 부어주고는 오래간만에 거울을 봤는데—정숙아, 그것은 누구였니? 진흙빛 얼굴에 생기 잃은 볼, 퉁퉁 부은 눈, 더벅머리의 늙은 여자가 누구였단 말이야? 나-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 같던 조덕분이는 어디로 가고 저 거울 안의 추레한 여자가 누구란 말이니? 나는 거울을 내던졌다. 오, 저 것은 내가 아니다. 언니의 청아한 눈동자 안에 내가 있을 것이다. 웃고 사랑스런 눈길로 언니를 바라보는 조덕분이가 있을 거다!  
  나는 언니를 부르려고 했지만….. 언니를 못 뵌 지 이레였다. 그렇다, 생각해보니 이레였다. 언니는 출타가 잦아지시면서 집에 들어오시지 않는 일도 생겼다. 하지만…. 이레 동안 언니는 무얼하고 계셨으며 나는 무얼 한 건지 기억이 나질 않는 구나. 하여간 나는 언니가 필요했다, 나를 다정하게 불러주시고 진한 키-쑤로 내게 생기를 불어 넣어주실 이가! 나는 나설 채비를 하는데 어쩜 옷이며 신발이 다 성한 게 없니. 닳은 고무신과 바랜 교복으로나마 치장을 하고 문을 나서려는데 사내가 웅얼거리더구나.

   “제길…. 아가씨는 양장 처녀에게 빠진 지 오래인데 무슨 소용이람? ”

  아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다. 머리가 아파서 사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아니 집에 있긴 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길을 나섰다. 내가 나섰을 때는 밤이었던가 낮 이었던가. 이게 다 뭐가 중요하겠니. 언니를 찾아 간만에 삼립당에도 가보고 진고개, 청량리 등 다 돌아보았지만 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리는 아파오고 며칠 째 먹지 못한 속은 그제야 아우성이라 나는 친정에 가보기로 했다.

  너도 잘 알다시피 우리 집은 남촌 양옥집이잖니. 일본인이 되어야 돈도 잘 번다는 아버지 덕분에 이사온 곳이긴 하지만 나는 이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친일파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너의 영향일지도 모르지. 사랑하는 동무야, 책만 읽고 내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도 한 두 마디 충고를 던져주던 너 아니니? 그러고 보니 너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했지만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것은 책을 좋아한다는 것, 청계천 쓰레기 속에 살던 것을 선교사님이 키우고 있었다는 것밖에 모르는 구나. 그러고도 우정이 돈독하게 유지 되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하여튼 초라한 차림새의 내가 남촌에 돌아다니는 것을 알면 경부라도 나올까봐 나는 빙빙 둘러 우리 집을 향해 갔었구나.
  
  오른쪽으로 돌고 왼쪽으로 꺾었을 때- 나는 담벼락에 붙어있는 양산을 보았다. 짙은 감색의 조끼의 팔이 레이스 달린 드레스의 등허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양산이 조금씩 움찔거리더니 떨어져버렸다. 허리를 살짝 꺾은 드레스의 목덜미를 사내- 아니 남장차림의 언니가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한 장면, 한 장면 마다 언니는 목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 조금씩 돌고 있었다. 양장처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볼에는 홍조가 돌았고 입술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깨물고 있었으며 눈은 나를 보면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것은—너였다.

  그래, 그것은 너였다. 너와 언니였다. 박정숙과 김경옥이 있었다. 아니다, 언니는 그럴 리 없다. 그 것은 언니가 아니었다. 너의 미소는 잊혀지지 않는다. 꿀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넘어가던 너의 피, 목덜미에서 떼지 못하던 언니의 머리, 나를 보고 언니의 양복 자락을 바싹 조여 쥐던 너의 손, 아버님의 장롱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언니와 너의 양장 차림, 너의 비웃음, 너의 목소리, 꿀꺽 넘어가는 소리, 모든 것!
    
  박정숙,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 오장육부를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것아, 이 편지를 읽고 있느냐? 네 년이 어떻게 나한테? 망할 것들, 망할 것들! 언니는, 아니 김경옥은 무어란 말이냐? 박정숙 네 년이 내 재산을 가져가고 김경옥은 도대체 무어란, 그 맹세는 무엇이었으며 도대체 무어란, 무어란! 오호라, 이제 알겠노라. 다 거짓말이었구나, 다 거짓말이었어! 네 년들이, 나를 농락하려고 다 짜고 나를 가지고 논 것이야. 썩어 문드러질 것들, 천하에 둘도 없을 악한 것들. 네 년들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온갖 욕과 천한 말을 가져다 대어도 너희들의 악덕함에 어울리는 말은 없을 것이다. 망할 것들, 천벌 받을 것들! 썩을 것들! 네 년들이 어떻게? 아프다, 아파. 머리가 아니라 온 몸이 아프다. 공기가 왜 이리 갑갑하냐, 세상은 왜 돌고, 앞이 흐리게 보이는 것이냐? 나는 죽는 것이냐? 아니 내가 왜 죽어, 네 년들 좋은 일만 하게 하고는 내가 왜 죽어. 살아야 한다, 살아서 네 년들의 췌장을 생으로 갈아 씹어 먹어주마.




1930년 7월 12일

  이 편지를 친정에 보내지만 네가 받을지는 모르겠다. 새로 들인 행랑아범이 이걸 찢지 말아야 할 텐데. 새삼 너의 교묘함에 혀를 내두른다. 수양딸이 되어 어머님을 요양 차 지방으로 모시고 나를 알아볼 유모며 하인을 다 내보내다니. 학당에서 쌓아온 우리의 우정 속에 너의 이런 계산이 쌓여 있었던 게냐? 나는 책 읽는 네 년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던 내 입술을 찢어발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구나. 너를 찾아 다닌 지 오래- 내 것이었던 담벼락 안에는 네가 있겠지. 내가 무얼 그리 잘못한 게야, 너에 대한 나의 우정이 잘못되었단 말이냐?

  다 필요 없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 네 숨통이 끊어지는 시각이 내 귀에 들렸으면 좋겠어. 잘 드는 칼로 살을 저미는 고통과 뼈 마디 쑤시는 고통이 몰려와 차라리 자진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어. 죽어라, 죽어. 회한 속에 홀로 죽기를 진심으로 바라노라.
  
  네 옆에 있을 김경옥도 마찬가지다. 부디 죽어—아, 아 언니 제가 언니께 이런 무서운 언사를 하다니 부디 용서해주셔요. 일전에 보낸 편지에서 언니께 부었던 저주의 언사를 용서해주시어요. 종이를 찢고 용서를 비는 말을 쓰고 싶으나 현재의 제겐 종이 살 돈도 없어요. 아, 아 언니는 진정 나를 버리신 게 아니겠지요? 정숙이에게 홀려 잠시 나를 버리신 거겠지요? 아- 언니 언니는 차가운 빈 방에 저를 버려두고 어딜 가셨단 말입니까. 조부님과 아버님 그리고 그 사내도 함께. 설마 언니가 저를 버리셨다는 사내의 말이 맞는 것은 아니겠지요? 오오오 언니 부디 아니라고 말씀해주시어요. 언니를 그리워하며 매일 우는 밤, 언니는 도대체 어디에 계시어요. 아 언니 저의 부덕함을 언니께 욕을 하고 언니를 더욱 사무하지 못했던 부덕함을 용서해주시어요. 아 언니, 아 언니!      




1930년 8월 1일

  너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 어떤 달빛 아래, 어느 창가에서 목덜미에 닿는 언니의 속눈썹을, 폐 안으로 흘러 드는 언니의 숨결을, 눈물을 닦아주는 언니의 혀를 느끼고 있는 것이냐. 보이는 구나, '사랑의 찬미'가 울려 퍼지는 창가실 안에 마주보고 서 있는 여인들이, 관 속에서 자는 여인과 그 여인의 살갗 위를 가만 가만 만져보는 여인의 모습이 보이는 구나. 저 여인은 박정숙이 아니다. 조덕분도 아니다. 심지어 김경옥도 아니다. 저들은 이화학당에 다니며 서로를 아끼던 조덕분과 김경옥이다. 그들의 감정은 뜨거웠고 영원한 것이다. 언니와 나의 마음은 식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당시의 조덕분이 아니오 당시의 김경옥이 아닐 뿐이다. 내가 사랑하던 언니의 모습은 없다. 언니가 사랑하던 조덕분의 모습도 없다. 그러니 어찌 사랑이 존재할 수 있으리오. 나는 네게 화를 내지 않는다.

  아직도 그 날의 창가, 강둑의 달빛, 아래에서 올려다봤던 언니의 얼굴을 생각하노라면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온다- 허나 내가 누구를 잡을 수 있으리오. 언니는 가셨구다, 아니 가지 않았다. 내가 사랑했던 것은 "자매의 연을 맺자 구나"라고 말해주던, 웃는 모습이 나와 닮았다던 언니다. 언니는 내 심장에 머무르고 계신다. 네 곁에 머무르고 있을 김경옥은 다른 사람이다. 나는 네 옆에 있는 사람을 원망하지도 쫓지도 않을 것이다. 언니는 내 곁에 계신다.

  하지만 사람이 이리 쉽게 변하는 거라면, 변하는 모습 때문에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겪는다면 변하기 전에 멈추면 되는 것이다. 나는 언니를 품은 채로 더 이상 추해지기 전에, 그 날의 일을 기억할 수도 없는 조덕분이 되기 전에, 언니가 계신 심장이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는 나날이 찾아오기 전에 멈추려고 한다. 지금 내게 유일한 위안이란 네가 사랑하는 김경옥이 사라졌을 때 네 마음이 지옥의 고통을-부디 나보다 더 아픈 고통을 느꼈을 때!- 그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줄 유일한 친구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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