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추적자

2008.12.08 16:5912.08

“Freeze!”
헬렌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상대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다. 헬렌은 허공에 한 발을 발사했다. 총성이 수풀을 뒤흔들었다. 이번에는 움찔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헬렌쪽으로 돌렸다.
“움직이면 쏘겠어요. 전 경찰입니다.”
헬렌은 상대를 주시했다. 그녀보다 20센티는 크고 몸무게도 40킬로는 더 나갈 것 같다. 완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걸 손에 차세요.”
헬렌은 수갑을 던졌다. 가까이에서 보니 남자는 더 위협적이다. 근육질의 젊은 남자다. 정확한 나이를 알 순 없지만 이십 대로 보인다. 떡 벌어진 어깨하며 완벽한 역삼각형의 체격을 가지고 있다. 엉덩이도 탄탄할 거야. 헬렌은 그의 긴 다리를 보며 생각했다.
“무슨 일이신지? 왜 이러는 거죠?”
남자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희미하지만 남부 액센트가 섞여있었다.
“잔말 말고 수갑부터 차요.”
헬렌은 상대의 가슴을 겨누며 말했다.
남자는 헬렌을 보며 미소 지었다. 호의의 표시일 테지만 헬렌은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경찰이라고 해도 남자들은 여자를 무시한다. 더구나 남부 출신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헬렌은 눈을 부릅뜨며 최대한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그제서야 수갑을 손에 찼다. 헬렌은 남자를 뒤돌아 서게 했다. 역시 탄탄한 엉덩이다. 헬렌은 남자의 엉덩이에 시선을 뺏겼지만 해야 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그녀는 빠르게 남자의 몸을 수색했다. 단단하고 탄력 있는 몸이다. 시큼한 땀냄새가 풍겼지만 싫지는 않았다. 기대와 달리 총이나 나이프는 나오지 않았다.
“뭔가 착각하셨나 본데 전 지나가는 여행객일 뿐입니다.”
남자는 이번에도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자세히 보니 꽤 잘생겼다.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를 손질하면 영화배우를 해도 될 정도다. 하지만 외모에 속으면 안 된다. 테드 번디도 잘 생겼다. 절대 겉모습 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더구나 이 남자는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는 지갑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던 약간의 현금이 가진 전부였다. 심지어 차 열쇠도 없었다. 이런 외진 곳을 차도 없이 왔단 말인가?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시간에?
“이런 곳에 왜 여행을 오셨죠? 그리고 신분증은 없습니까?”
“근처 오두막을 빌렸습니다. 짐은 거기에 다 있습니다.”
당당한 목소리다.
“일단 경찰서로 가시죠.”
“왜 이러는 겁니까?”
짜증을 낸다.
“가면서 알려드리죠.”
한적한 숲을 수상한 남자와 같이 걷는 건 결코 즐겁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가 자신을 헤치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오늘따라 숲은 무척 조용했다. 들짐승도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을씨년스럽게 떠 있었다. 헬렌은 총을 꼭 쥐고 걸었다. 빠른 속도로 걸었지만 차까지 가는데만 이십 분이 걸렸다. 헬렌은 차를 몰며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들이 있던 숲에서 한달 간격으로 시신이 발견됐다. 두 경우 모두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살해당했다. 별개의 사건일 가능성도 있지만 연쇄살인의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잠복하는데 남자가 눈에 띈 것이다.
남자의 이름은 크리스다. 그는 얼마 전 대학을 중퇴하고 그 길로 여행을 떠났다. 마침 대학 때 친구가 이 근처에 오두막을 소유하고 있다. 장기간 사용해도 된다고 해서 좀 전에 이곳에 도착했다. 오두막에 짐을 풀고 근처를 산책 중에 잠복중인 헬렌의 눈에 띄었다. 그의 주장이었다.
“그 살인에 대해서 얘기해봐요. 피살자들은 모두 여잔가요?”
크리스가 질문했다.
“그게… 한 명은 젊은 여자인데 다른 한 명은 10대 소년이었어요.”
“한 명은 여자, 한 명은 남자라… 혹시 강간당한 흔적은 없었나요? 양성애자일수도 있잖아요.”
“둘 다 강간당한 흔적은 없었어요.”
“성적인 목적은 없다… 별개의 사건일 가능성이 높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죠. 하지만 강간범은 성적 욕망을 분출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게 아니에요. 그들은 지배하고, 제어하며, 힘을 행사하는 짜릿함에서 만족을 얻어요.”
헬렌은 거기까지 말하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쓸데 없이 너무 떠들었다. 더 이상 사건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가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범인들은 항상 경찰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경찰이 그들을 얼만큼 쫓아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살해 간격은 얼마였나요? 정확하게 한달 간격인가요?”
헬렌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정보는 지역신문만 검색해도 금방 나온다.
“물론 정확한 건 아니에요. 두 번째의 경우 살해되고 시간이 좀 지나서 발견되는 바람에 정확한 사망시간을 추정하기는 어려웠어요. 하지만 피해자의 실종시간 등을 종합해보면 한 달이 확실해요.”
“마지막 살인이 있은 지 얼마나 흘렀죠?”
“한 달 됐어요.”
헬렌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오늘 잠복했던 것이다. 미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녀의 직감은 오늘 또다시 살인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주위 동료들에게 얘기했더니 하나같이 웃기만 했다. 할 수 없이 혼자 잠복해야 했다.
“살해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해봐요? 그들은 평소 위험에 많이 노출됐었나요? 그러니까 혼자 살거나, 술독에 빠져 살거나, 아니면 약을 하거나, 밤늦은 시간에 방황한다던가?”
헬렌은 다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지역신문에 기사가 다 나간 내용이다.
“남자애는 문제가 좀 있었어요. 약을 한다고 그러더군요. 가출도 몇 번 했고.”
“여자는요?”
“여자는 착실한 편이었어요. 그녀는 학교 선생이었어요. 일년 전에 이곳으로 부임했는데 학생들도 그렇고 학부모와 동료교사들도 다 그녀를 좋아했어요. 사생활도 깨끗한 편이고요.”
“혹시… 이런 질문 해도 될는지 모르겠는데 여자 몸에 어떤 특별한 상처는 없었나요?”
“특별한 상처?”
헬렌은 호기심이 동했다. 지금부터는 신문에 활자화되지 않은 내용이다. 사건해결의 단서가 될 중요한 정보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피살자의 몸에 남아있는 범인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상처자국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정말 잔인한 얘기지만… 혹시 사체를 먹지 않았나요?”
헬렌은 급 브레이크를 밟았다. 바로 앞에서 뭔가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누군가 줄을 걸어 잡아 당긴 것처럼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다행히 그것 외에는 충격이 없었다. 그녀를 놀래 킨 건 커다란 숫사슴이었다. 녀석은 유유히 도로를 건넜다.
“여기서 젤 위협적인 건 저놈 같은데요. 제가 아니라 녀석을 잡아가야 할 것 같은데.”
크리스는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잘생긴 남자의 매력적인 웃음이지만 헬렌은 소름이 돋았다. 곁눈질로 수갑을 확인했다. 아무 문제 없다. 그래도 불안했다. 비록 수갑을 차고 있지만 이 정도 덩치라면 여자 한 명 목 졸라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이제 운전에 집중해야겠어요.”
헬렌은 차갑게 쏘아붙이고 이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경찰서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도착하니 밤 10시 반이 막 지나고 있었다. 한 달 간격으로 두 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지만 경찰서는 한산했다. 근 십 년간 살인 사건이 없던 곳인데다 두 사건 모두 우발적인 범행으로 추측됐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서장은 이번 사건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아내의 병간호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당직인 매튜는 역시나 깜빡깜빡 졸고 있었다.
헬렌은 매튜를 깨워 남자의 지문을 채취하게 했다. 남자는 자신이 범죄자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매튜의 단호한 표정을 보더니 마지못해 응했다.
지문채취와 사진촬영을 마치자 남자는 신문을 갖다 달라고 했다. 그 정도는 해줘야 할 것 같았다. 헬렌은 무려 한 달치 신문을 남자에게 건넸다. 그는 묵묵히 신문을 읽었다. 헬렌은 그가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체크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살인사건 기사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잠시 와봐! 결과가 나왔어.”
매튜가 말했다. 그녀는 재빨리 매튜가 있는 방으로 갔다. 문을 닫기 전 크리스를 확인했다. 그는 여전히 신문에 빠져있었다.
“이렇게 빨리? 무슨 범죄야?”
헬렌은 기뻤다. 이런 행운이.
“요즘 장비가 워낙 좋잖아. 그런데 이걸 어쩌지? 아쉽게도 범죄자는 아니야.”
“그럼 뭐야?”
헬렌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 떴다.
“크리스 브라운. 그가 밝힌 본명은 사실이었어. 혹시나 해서 이 이름으로 검색했더니 금방 결과가 나왔어. 나이 28세. 크리스는 군인이었어.”
적어도 이름을 속이지는 않았다. 나이는 생각보다 많다. 20대 초반인 줄 알았는데 28세다. 그녀와 동갑이다. 매튜의 마지막 말이 제일 궁금했다.
“군인?”
“응! 그래서 지문이 남아있었어. 저 남자 일년 전까지 이라크에 있었어. 거기서 부상을 당했어. 훈장도 받았더군.”
“전과는 전혀 없는 거야?”
“복무 기록은 아주 좋아.”
“나한테는 대학을 자퇴했다고 말했는데.”
“전역 후 대학에 갔겠지.”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런데 어떤 부대에 근무했어? 해병대?”
“그게 좀 흥미로운데 말이야... 이 친구 꽤 날렸어.”
“날리다니? 특수부대에 근무했단 말이야?”
“응! 델타 포스 출신이더군.”
“음... 좀 이해가 안 되는데. 거기 출신들 용병으로 가면 돈 많이 받는다며? 그래서 전역하면 다시 이라크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나?”
매튜의 친구 중에 특수 부대 출신이 있다. 그 친구는 전역 후 당연하다는 듯 용병회사에 들어갔고, 엄청난 수당을 받고 있다. 매튜가 술 먹을 때마다 그 친구 얘기를 하도 떠들어대서 헬렌도 그쪽 사정은 훤했다.
“전쟁터가 싫었나 보지. 부상이 꽤 심했던 모양이야.”
“그걸 뭐라고 하더라? 그런 곳에 오래 있으면 머리가 이상해진다고 하잖아?”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그래 그거. 저 사람 혹시 그 병 아니었어?”
“아냐. 정신과 검진을 받았는데 결과는 정상으로 나왔어. 특수부대 출신의 정신병자를 그냥 사회에 풀어놓겠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절대 아니야.”
“장담할 수는 없는 거잖아? 전역 후에 발병했을지도 모르지.”
“넌 저 사람을 의심하는 구나?”
매튜는 호기심이 동한 듯 볼펜을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그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할 땐 볼펜을 물곤 했다.
“너무 수상해. 이런 곳에 혼자서 여행 왔다는 것도 그렇고, 사건에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그렇고... 생각해 봐! 두 희생자 모두 무자비하게 공격 당했어. 처음보다 두 번째 소년의 경우가 훨씬 심했어. 여태까지 내가 본 시체 중 가장 잔인했어. 그 동안 억누르고 있던 환상이 폭발하자 이제 도저히 제어할 수 없게 된 거야.”
“저 남자는 너무 침착한데?”
매튜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크리스는 여전히 신문을 읽고 있었다.
“특수부대 출신이라며? 분명히 감정을 제어하는 훈련을 받았을 거야. 하지만 계속 억누를 수는 없지. 머리가 이상해졌으니까. 그래서 감정이 폭발할 때 무차별적으로 살인하는 건지도 몰라.”
“음… 저 사람이 범인인지 확인해볼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해.”
“어떤?”
“여자 시체 주변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혈액을 구했잖아. 그거하고 저 사람 DNA하고 비교해보면 되지.”
“그러려면 영장이 필요한데.”
“그렇게 복잡하게 할 것 없어. 저 사람에게 커피 한 잔 권해. 그러면 커피 잔에 DNA가 남게 되어있어.”
“DNA를 구하면 그 다음은?”
“너 내 애인이 누군지 벌써 잊었어?”
매튜는 웃으며 말했다. 그의 여자친구는 인근 대학의 생물학과 조교다. 실험장비를 이용하는 건 결코 어렵지 않다.
“저 사람 무작정 붙잡아둘 순 없는데… 검사가 끝나려면 얼마나 걸릴까?”
“낸시한테 최대한 빨리 끝내달라고 부탁할게. 마침 실험실에 있어. 내가 샘플을 가지고 직접 갔다 올게.”
매튜의 눈동자에서 희열이 번뜩였다. 헬렌은 그의 목적을 읽었다. 단순히 샘플만을 가져다 주려는 게 아니다. 그의 욕정도 함께 따라간다.
“알았어.”
헬렌은 주방으로 갔다. 종이컵에 커피를 한 잔 타서 남자에게 건넸다. 그는 고맙다며 아주 맛있게 마셨다. 헬렌은 컵을 치우는 척하며 슬쩍 챙겼다. 헬렌이 컵을 건네주자 매튜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경찰서에는 그녀와 남자 둘 뿐이었다. TV를 켤까 하다가 그만 뒀다. 남자가 신문에 워낙 빠져있어서 방해가 될 것 같았다.
내가 왜 저 사람 편의를 봐주지? 헬렌은 화들짝 놀랐다. 비록 평소 그녀가 좋아하는 키 크고 엉덩이가 멋진 남자긴 하지만 그는 잔인한 살인마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가 싫진 않다. 그에게는 이성을 유혹하는 매력이 있다. 가만히 앉아서 신문을 보는데도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왔다.
헬렌은 그의 매력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책상 한편에 있던 사건파일을 펼쳤다. 아무리 봐도 두 사건 간에는 별다른 연관관계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육감은 두 사건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헬렌은 첫 번째 희생자인 캐시의 파일을 찬찬히 읽었다. 캐시는 밤에 산책을 나갔다가 실종됐다. 영어교사인 그녀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그래서 꾸준히 글을 적었는데, 글이 막힐 때면 몇 시간이고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 시체가 발견된 곳과 차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공원이다.
상식적으로 그녀가 그 외진 숲까지 걸어갔을 리는 없다. 걸어서 왕복하려면 여덟 시간이 넘는 거리다. 분명 차로 납치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공원근처에서 수상한 차량을 목격한 사람은 없다. 역시 이곳 주민일까? 물론 평범한 차량을 이용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띄었을 수도 있다.
가장 의문스러운 건 범인의 행동양식이다. 분명 범인은 차로 캐시를 납치했다. 그건 범인이 조직적 범죄자라는 걸 뜻한다. 이에 걸맞게 누구도 캐시를 납치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 수상한 차량을 목격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범인은 범행현장에 자신의 신원을 밝힐 수 있는 유력한 단서인 혈액을 남기는 실수를 범했다. 나뭇가지에 긁혀서 그렇게 된 모양이다. 더구나 사체에 이빨 자국도 남겼다. 조직적인 범죄자라면 그런걸 남겨두지는 않는다.
하지만 살인이 벌어진 장소를 보면 범인이 조직적이라는데 동의하게 된다. 캐시가 살해돼서 유기된 숲은 도로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누군가 갑자기 나타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곳이다. 범인은 이곳 지형을 잘 알고 있고, 철저히 준비한 게 틀림없다. 또한 그가 야외에 익숙하며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범인은 조직적이지만 처음으로 환상을 실현하는 자리라서 실수했을 가능성이 높다.
헬렌은 크리스를 힐끔 쳐다봤다. 둘의 시선이 부딪쳤다. 크리스의 푸른 눈은 차갑지만 아름다웠다. 헬렌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커피 한 잔 더 부탁해도 될까요?”
크리스는 이번에도 미소를 지었다. 헬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 것까지 두 잔을 탔다.
“이 수갑 언제까지 차고 있어야 하는 거죠?”
크리스는 오른손에만 수갑을 차고 있었다. 반대쪽 수갑은 그가 신문을 보고 있는 무거운 철제 책상 다리에 채워져 있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요?”
“아직 견딜만해요. 답답해서 그래요.”
크리스는 경찰서에 들어오자마자 화장실부터 갔다. 헬렌은 크리스의 질문을 무시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제 죄명이 뭐죠? 여기는 밤에 돌아다니면 잡혀가나 보죠?”
크리스가 말했다.
“입 닥치고 조용히 있어요.”
헬렌은 책상을 신경질적으로 내려치며 말했다. 크리스와 단 둘뿐이라는 사실이 너무 불안했다. 자신의 감정을 크리스가 눈치채길 원하지 않았다. 범죄자들은 약자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잔인하다.
“계속 떠들면 어떻게 할 건데?”
분노가 서린 목소리다. 이 남자 특수부대 출신이다. 더구나 이라크에서 근무했다. 그 말은 몇 명인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을 죽여봤다는 걸 뜻한다. 그곳에서 포로를 잔인하게 고문했을지도 모른다. 정부가 승인한 가학 행위는 가학적 변태성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배웠지만 백 퍼센트 장담할 순 없다. 분명한 건 최근 그녀가 만난 용의자 중 크리스만큼 해당사항이 많은 사람은 없었다는 점이다.
“죄명이라도 알려줘. 그리고 몇 시에 나갈 수 있는지도.”
다시 침착한 목소리다. 금방 자신의 감정을 감춘다. 그 점이 더 무섭다.
“내일 아침 서장님이 출근하면 알려드릴게요. 그때까진 절대 나갈 수 없어요.”
“날 잡아온 건 서장이 아니라 아가씨잖아?”
당신이 아니라 아가씨다. 이 남자 날 무시한다. 헬렌은 은근히 부아가 났다. 그녀는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이곳 결정권자는 제가 아니라 서장님이에요.”
“보아하니 오늘 야간근무가 아닌 것 같은데… 집에 기다리는 가족 없어? 부모님이라든가? 애인이라든가?”
사생활에 관심을 가진다. 좋지 않다. 날 다음 번 표적으로 삼으려고? 이럴 땐 침묵이 최고다.
“반지가 없는 걸 보면 결혼은 하지 않았고, 뭐 이혼했을 수도 있지만. 무전 연락 외에 따로 전화하지 않는 걸 보면 근처에 같이 사는 가족은 없는 모양이군.”
크리스가 혼자서 떠든다. 모두 사실이다. 이 남자 꽤 머리가 좋다. 소년을 죽인 범인은 모르겠지만(평소에 위험에 많이 노출된데다가 살해 당시도 약에 취해있었다.) 캐시를 죽인 범인은, 비록 흔적을 남기긴 했지만, 머리가 상당히 좋을 것으로 예측된다.
놀랍게도 캐시는 저항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적극적인 성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녀가 공격자에 맞서 싸웠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또한 그녀는 몸매관리를 위해 태보를 꾸준히 해왔다. 여자지만 기초적인 방어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힘 한번 못써보고 당했다.
독극물이나 약물을 주입한 흔적은 전혀 없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살인범은 그녀를 완전히 방심하게 만들었다. 그건 면식범일 가능성도 내포하지만 기본적으로 살인범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걸 뜻한다. 또한 그녀를 단번에 제압한 걸 보면 상당한 완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크리스는 특수부대 출신이다. 맨손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건 누워서 떡먹기다.
“내가 범인이라면 당신처럼 혼자 사는 매력적인 여자를 가만 놔두진 않을 거야.”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헬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내질렀다.
“조용히 해.”
“너무 흥분하지마. 예쁜 얼굴에 주름 생기잖아.”
점점 능글맞아진다. 헬렌은 다시 고함을 내지르려다 뭔가를 깨달았다. 어쩌면 이자의 본성을 엿볼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 살인은 모르겠지만 캐시의 살인과는 연관이 있어 보인다. 헬렌은 캐시와 두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다 체격도 비슷하다. 머리 색깔도 옅은 갈색으로 같다. 초록색 눈동자도 캐시와 동일하다.
성폭력범이 환상을 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범죄자가 원하는 특징은 더욱 구체화된다. 예를 들어 나이는 18세에서 22세. 날씬하고 예쁘며 머리는 금발 등등.
“제가 예쁜가요?”
헬렌은 크리스와 눈을 마주치며 질문했다. 사실 예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조슈아와 헤어진 후 외모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데도 접근하는 남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 못생겼다고 생각해? 혹시 성전환 수술 했어? 내가 아는 여자들 중에 자신이 못생겼다고 말하는 여자는 없었는데.”
또 살살 약을 올린다. 헬렌은 못 들은 척 욕을 삼켰다.
“제 어디가 마음에 들죠?”
“난 아가씨가 마음에 든다고 말한 적 없어. 난 아가씨처럼 마른 여자보다는 풍성한 글래머 스타일을 좋아해.”
“그런가요?”
잘못 짚었나?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추측이 틀려서라기 보다는 여자로서 매력이 없다는 말에 기분이 상했다. 조슈아와 헤어지고 나서 5킬로나 빠졌다.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더 빠진 것 같다.
이런 촌 동네로 온건 더 이상 끔찍한 시체를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성범죄전담반에서 근무했다. 각오하고 간 곳이지만 그녀의 예상보다 몇 배는 더 끔찍했다. 그곳에서 조슈아를 만났다. 그는 그곳에서 가장 촉망 받는 직원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와 헤어지자 그 끔찍한 곳에 붙어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캐시의 사건으로 돌아갔다. 최근 몇 달간 여성의 속옷을 훔쳐가는 변태가 없었는지 조사했다. 단순히 속옷을 훔쳐가는 경우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심각한 경우 이성의 신체 일부를 절취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신고된 건 단 한 건도 없었다. 역시 외부인의 소행이 틀림없다.
“재미없는 파일은 그만 보고, 소년에 대해서 얘기해줘.”
크리스가 말했다. 너무 당당하다. 자신이 서장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헬렌은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이 남자도 흔한 마초중의 한 명일 뿐이다. 조슈아가 그랬던 것처럼.
“신문에 다 나와있잖아요?”
헬렌은 차갑게 쏘아줬다.
“소년의 사체는 먹히지 않았지? 그렇지?”
역시 의심스럽다. 그러고 보니 차에서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어떻게 이 남자는 캐시의 사체에 카니발리즘의 흔적이 있는 걸 알았을까? 경찰은 물론 어떤 언론도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캐시의 몸에 있던 이빨자국과 이 남자의 이빨을 비교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DNA 조사까지 할 필요 없이 이빨자국만 검사해도 알 수 있는데.
어차피 DNA 결과가 나오면 모든 게 밝혀지겠지. 그녀는 이빨자국을 검사하려던 생각을 거두었다.
“신문에는 뭐라고 나왔던가요?”
“두 경우 모두 사체가 먹혔다는 내용은 없어.”
“그런데 어째서 사체가 먹혔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 놈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야.”
“그 놈? 누굴 말하는 거예요? 당신 뭔가 알고 있죠?”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알지 못해.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지.”
크리스는 빙긋이 웃었다.
비웃는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이 남자 뭘 알고 있는 게 분명해. 헬렌은 수사관으로서의 호기심이 동했다.
“그는 누구죠?”
“혹시 빙의라고 들어봤나?”
“빙의? 귀신들리는 거 말하는 거예요?”
“응. 이 사건의 범인은 분명 일반적인 능력의 소유자는 아니야. 그는 자신을 신이나 어떤 초월적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너무 비과학적 아닌가요? 예언자들이 받은 신의 계시도 과학적으로 따져 보면 간질발작 후에 환각을 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하지만 동양의 무당 같은 경우는 시퍼런 칼날 위를 걷기도 해.”
“특별한 정신 질환의 경우 일반인의 수십 배에 달하는 지능을 가지기도 하고 평상시 근력의 몇 배에 달하는 힘을 순간적으로 발산하기도 해요. 제 생각에 빙의는 뇌의 착각이에요. 인간의 뇌에 간직된 특별한 잠재력이 발산되는 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뿐이에요.”
“정말 그럴까?”
“기사에 나온 대로 소년은 양쪽 팔이 떨어져 나갔어요. 도구를 사용한 건 아니에요. 놀랍게도 완력만으로 팔을 뜯어냈어요. 그래서 빙의된 정신병자라고 생각하시나 본데… 사실 그럴지도 몰라요. 그런 괴력은 정상적으로 설명하기 힘드니까요.”
혹시 곰이 습격한 건 아닐까 하는 주장도 있었지만 사체 근처에는 발자국은 고사하고 털 조각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도 정신병자를 보지 못했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이상하지 않아? 오히려 이런 시골이 낯선 사람은 더 눈에 잘 띌 텐데. 더구나 정신질환자가 있으면 어떻게든 눈치챘을 텐데 말이야.”
헬렌은 크리스의 몸을 흘끔 쳐다봤다. 그의 팔은 길고 굵었다. 저런 근육의 소유자라면 소년의 팔을 맨손으로 뜯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정신질환까지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헬렌과 눈이 마주치자 크리스는 살짝 윙크를 던졌다. 끔찍했다. 이자는 나를 가지고 놀고 있어. 헬렌은 목이 탔다. 그의 완력이라면 철제 책상에 묶인 수갑쯤은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태연한 건 언제든 헬렌을 죽일 자신이 있어서이다. 헬렌은 책상 위에 던져둔 자신의 글록 17을 내려다봤다. 가능한 한 총과 떨어져 있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경찰서 대표전화다. 그녀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매튜였다. 그는 검사 결과가 오늘 오후에는 나올 수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12시가 지났다. 매튜에게 빨리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는 애인을 도와줄게 있어서 두시나 되야 도착할 것 같다고 말했다. 크리스의 눈치가 보여서 끝내 빨리 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크리스에게는 두 시간의 여유시간이 주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한층 느긋한 표정이었다. 그는 왼손으로 책상을 툭툭 쳤다. 조용해서 그런지 그 소리가 무척 신경을 거슬렀다. 그는 혼자서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지만 군가가 아닐까 싶었다.
그의 노래를 듣느니 TV를 보는 게 훨씬 나았다. 헬렌은 TV를 틀었다. 날씨예보가 나오고 있었다. 구름이 몰려드는 것 같더니 새벽부터 비가 온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창문이 덜컹거린다. 분위기가 한층 음울해졌다.
매튜는 덤벙대는 성격이다. 혹시 열어놓은 창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문단속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총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창문과 정문을 제외한 모든 문을 닫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크리스는 물끄러미 TV를 보고 있었다. 뉴스채널이라 새로운 뉴스가 계속 쏟아졌다.
“여기서 웨스트 밸리까지 얼마나 걸리지?”
크리스가 질문했다.
“웨스트 밸리? 거긴 왜요?”
“소년이 실종됐대. 웨스트 밸리에서 사촌들을 만나 같이 캠핑을 하기로 했는데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대. 핸드폰도 받지 않고.”
“정말이에요? 교통사고가 난 건 아니래요?”
“소년의 집에서 웨스트 밸리까지 교통사고가 신고된 건 전혀 없대. 그나저나 여기서 얼마나 멀어?”
“지금 시간이라면 차로 한 시간도 안 걸려요.”
“거기 안 가볼래?”
“가서 뭐 하려고요?”
“여기 이렇게 죽치고 있는 것 보다 거기 가서 소년이라도 찾는 게 좋지 않을까?”
“거긴 우리 관할이 아니에요.”
“그럼 아까 그 숲은 당신 관할인가?”
“네.”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말이다. 캐시의 시체가 발견된 곳은 이쪽 관할이지만 소년의 시체가 발견된 곳은 이쪽 관할이 아니다. 그런 문제들 때문에 수사에 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매튜가 일찍 돌아온다는 전화인가? 혹시 자고 온다는 전화는 아니겠지? 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매튜가 아니었다. 마을 외곽에 혼자 사는 카일리 할머니였다. 그녀는 남편을 먼저 여의고 고양이들과 같이 살고 있었다. 외아들은 런던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집 뒤에 수상한 사람이 서성인다며 와줄 것을 요구했다. 카일리 할머니의 집은 웨스트 밸리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래서 더 의심이 간다.
헬렌은 전화를 끊고 서장 방에 들어갔다. 이곳이라면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다. 지역방송사에 전화를 걸어 크리스가 말한 뉴스를 확인했다. 이번에도 크리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떻게 한다? 경찰서를 비우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간 큰 도둑이라도 경찰서를 털 일은 없다. 전화는 내 핸드폰으로 연결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크리스다. 그를 이대로 놔두고 가려니 영 불안했다.
이런 망할 매튜. 헬렌은 잔뜩 화가 났다. 아무리 뒤져도 유치장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매튜가 가져간 게 분명하다. 그녀는 매튜에게 전화를 걸었다. 헐떡이며 받는다. 역시 매튜가 가져갔다. 그녀는 빨리 돌아오라고 쏘아붙인 후 전화를 끊었다.
“내가 그렇게 무섭나?”
크리스는 차갑게 말했다. 헬렌은 크리스에게 여분의 수갑을 채운 후 오른손에만 채워져 있던 수갑을 풀었다. 행여 그가 공격할까 싶어 취한 조치였다. 헬렌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경찰차로 드라이브 하는 것도 운치 있지.”
크리스는 히죽 웃었다. 너무 여유가 있다. 그래서 화가 난다. 크리스를 뒷좌석에 태울 수도 있지만 조수석에 타도록 했다. 괜한 오기였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무시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좀 전에 말했던 거 있잖아요?”
헬렌이 말했다.
“어떤 거?”
“범인에 대해 추측할 수 있다면서요? 범인은 어떤 부류예요?”
“한마디로 미친 놈이지.”
크리스는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시원하게 웃는 남자가 좋다. 이런 부류는 속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자세하게 말해줘요.”
“좋아. 내가 알고 있는 걸 말해주지. 범인은 백인남자가 분명해. 이 동네에는 흑인이나 히스패닉이 거의 없어. 다시 말해서 유색인종이 나타나면 금방 눈에 띈다는 말이지. 그런데 아무도 수상한 자를 목격하지 못했어. 따라서 범인은 백인이 분명해. 그리고 희생자를 능숙하게 제압한 걸 보면 아무래도 여자보다는 남자일 확률이 높지. 그것도 젊고 건장한 남자. 군대나 경찰 같은 데서 근무했을 가능성이 높아. 아니면 무술을 수련했던지. 그런 곳에서 효과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을 배웠겠지. 단지 기술만 좋은 게 아니라 완력도 엄청나지. 꽤 덩치가 좋을 거야. 하지만… 꼭 그렇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어. 자신이 빙의됐다고 생각하는 정신병자라면 자그마한 체구라도 엄청난 괴력을 발휘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헬렌은 크리스의 말을 듣기만 했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제삼자의 입장에서 추측하는 경우는 분명 드물긴 하지만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추측하는 이유는 관심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척 하면서 범죄를 다시 경험할 수도 있다. 더구나 어떤 것도 자백하지 않으면서 범죄와 관련된 사실들을 알려줌으로써 수사관을 놀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크리스의 얘기가 조금 빗나가는 것 같다. 그녀는 맞장구를 쳐줄 겸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범인이라고 알아볼 수 있죠? 눈에 띄는 어떤 특징이 있나요?”
“눈에 잘 안 띄긴 하지만 특징이 있어. 무표정해져.”
“무표정해진다고요?”
“그래. 내 생각에 그건 진화 때문인 것 같아.”
“무표정한 게 진화 때문이라고요?”
“응. 무표정한 얼굴은 진화적으로 안정되어 있어. 상대와 다툼이 있다고 생각해봐. 무표정한 상대가 가장 까다로운 법이야.”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되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마침 전화가 왔다. 매튜였다. 이제 출발한단다. 망할 자식.
헬렌은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계기판의 눈금이 백마일을 넘었다. 크리스가 휘바람을 불었다. 긴장한 그녀를 놀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밟았다.
“차 세워!”
크리스가 고함을 내질렀다. 헬렌은 화들짝 놀라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고무 타는 역겨운 냄새가 코를 어지럽혔다.
“왜 그래요?”
헬렌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도로에는 그녀의 차뿐이었다.
“후진해.”
크리스는 명령조로 말했다. 헬렌은 후진기어를 넣고 천천히 차를 후진했다. 그녀도 곧 그것을 발견했다. 검은색 포드 픽업 트럭이 숲 가장자리에 아무렇게나 주차돼있었다. 운전석 문도 열려있었다.
이렇게 빨리 달렸는데 어떻게 이걸 놓치지 않았을까? 의문을 가질 틈이 없었다. 크리스는 헬렌이 제지할 틈도 없이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헬렌은 문을 열려다 차량번호부터 조회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상향등을 켜고 차를 돌려 헤드라이트가 트럭을 비추게 했다. 그러자 번호판이 보였다. 결과는 바로 나왔다. 실종된 소년이 몰고 갔던 트럭이었다.
헬렌은 트럭으로 달려갔다. 트럭은 멀쩡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크리스는 트럭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소년은 어디로 간 거죠?”
“자기 발로 걸어간 것 같아. 누군가와 다툰 흔적도 강제로 끌려간 흔적도 없어.”
크리스는 숲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늘은 흐렸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헬렌은 차로 돌아가서 지원을 요청했다. 경찰들은 웨스트 밸리 전체에 퍼져 있어서 이곳까지 오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한다.
“수갑을 풀어줘. 그리고 손전등이랑 비옷 좀 줘.”
크리스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헬렌은 망설였다. 크리스를 백 퍼센트 신뢰할 수 없었다. 물론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소년의 실종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어제 저녁부터 그와 계속 같이 붙어있던 그녀가 증인이다. 하지만 분명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그를 믿어도 될까?
“이봐! 시간이 없어. 앞선 두 사람이 어떻게 당했는지 잊었어? 그들은 아주 잔혹하게 살해당했어. 심지어 시신을 먹어 치우기까지 했어. 그런 녀석이 소년을 살려둘 것 같아?”
“조금 있으면 다른 경찰들이 도착해요. 당신의 도움은 필요 없어요.”
“그들이 와서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곧 비가 쏟아져 내릴 거야. 그나마 남아 있는 흔적도 비에 다 쓸려가 버릴 거라고. 이봐. 우린 지금 일분 일초가 급하단 말이야. 그리고 잘난 척 하는 말로 들리겠지만 난 너희 경찰보다 몇 배나 뛰어난 추적자야. 난 이런 상황에서 적을 추적하는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은 사람이란 말이야.”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 우선 시간이 없다. 소년의 목숨을 위해서도 그렇고 흔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다. 또한 특수훈련을 받은 그보다 추적에 능숙한 경찰은 반경 수백 킬로 이내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좋아요. 하지만 당신에게 무기를 줄 순 없어요.”
“어차피 그것에게 무기는 안 통해.”
헬렌은 수갑을 풀었다. 크리스는 양 손목을 부지런히 마사지했다. 너무 빡빡하게 채워둔 모양이다. 그는 헬렌이 건네준 비옷을 입고 손전등을 챙겼다. 트렁크를 뒤지더니 비닐과 밧줄을 챙겼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숲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흔적을 찾은 거예요?”
“잔말 말고 빨리 따라와. 무전기는 챙겼지? 덤벙거리다 날 놓치면 안돼.”
너무 잘난 척 하는데. 헬렌은 쏘아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곧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크리스는 자신이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걸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는 부러진 나뭇가지 따위들을 기가 막히게 찾았으며 어두운 숲 길을 엄청난 속도로 헤쳐나갔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번개도 하늘을 가르며 사방에서 내리쳤다. 섬찟했다. 이곳은 피뢰침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앞에서 걷고 있는 크리스의 넓은 어깨를 보고 있으면 공포가 사라졌다. 든든한 남자다. 범인이라고 생각한 건 역시 오해다. 그녀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리스는 한층 속도를 높인다.
“뭘 발견했나요?”
헬렌은 헐떡이며 질문했다.
“놈이 좋아할 만한 곳이야. 녀석은 분명 이 근처에 있어.”
크리스의 호흡은 일정했다. 특수부대 출신답게 굉장한 체력의 소유자다. 헬렌은 이를 악물었다. 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순간 크리스가 멈춰 섰다. 헬렌은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의 옆에 섰다.
그건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기묘한 광경이었다. 벌거벗은 소년이 바닥에 누워있었고, 크리스보다 체격이 조금 작긴 하지만 역시 건장한 남자가 소년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따로 조명이 설치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곳만 밝은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무섭다기 보다는 성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엄숙한 종교행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남자가 범인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는 가면을 쓴 것처럼 철저히 무표정했다.
“Freeze!”
헬렌은 권총을 꺼내며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남자는 헬렌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헬렌은 크리스를 흘끔 쳐다봤다. 그는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상대가 비무장이지만 만만치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 남자 잘난 척은 혼자 다하더니. 결심했다. 헬렌은 방아쇠를 당겼다. 다리에 쐈다.
이럴 수가. 분명 명중했는데 잠시 움찔할 뿐 끄떡도 하지 않았다. 반대편 다리에 쐈다. 이번에도 잠시 움찔할 뿐이었다. 그녀는 복부를 쐈다.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상대의 머리를 노렸다.
“눈을 보면 안돼!”
크리스가 경고했다. 하지만 헬렌은 이미 그것에게 빠져있는 상태였다. 그것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현기증을 느꼈다. 속도 거북했다. 뱃속이 울렁거려서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었다. 의식이 흐릿해지면서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마치 물에 떠 있는 것처럼 편안했다.
희미한 시야라도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그것을 주시했다. 갑자기 하얀 섬광이 번쩍였고 고압선에 감전된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경찰차 안이었다. 크리스가 운전하고 있었다.
“이제 정신이 들어?”
헬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직 완전히 정신이 돌아온 건 아니다. 여전히 어지럽고 속이 거북했다. 넘어지면서 다쳤는지 등과 팔이 따끔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뼈가 부러진 건 아니다. 찰과상일 뿐이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그건 어떻게 됐나요?”
그녀는 그 남자가 아니라 그것이라고 말했다. 그건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존재에게 남자라는 인간의 성을 붙이는 건 실례라고 느껴졌다.
“지금 그걸 처치하러 가는 길이야. 좀 전에 봐서 알겠지만 그건 총이나 칼 따위로 처치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건 한때 악마라고 불리던 거라고.”
“악마?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라크에서 근무할 때 녀석과 처음 조우했지. 우리는 테러범을 추적 중이었는데 한 동굴에 테러범이 은신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어. 그래서 그곳으로 들이닥쳤지. 자연적인 동굴이었는데 무척 컸어. 동굴 끝부분에서 인공적인 흔적을 발견했어. 거기에 그것이 있었지. 두꺼운 돌문이 가로막고 있었는데 우린 폭탄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안으로 들어갔어. 나중에 알고 보니 4천년 전에 만들어진 돌문이었어. 아무튼 우린 그곳에서 아주 화려한 항아리를 발견했지. 그건 아주 단단히 봉해져 있었어. 꽤 비싸 보였지. 모두가 관심을 가졌어.
그런데 단지 돈 때문에 관심을 가진 게 아니야. 그 항아리는 쉬지 않고 속삭였어. 날 내보내 달라고. 날 어서 내보내달라고. 그러더니 조금 있으니 날 먹어달라고 유혹했어. 모두가 굉장한 허기를 느꼈어. 대장이던 찰스가 항아리를 개봉했어. 어찌나 단단히 봉해져 있었던지 곰도 때려잡는다는 찰스도 겨우 열었어. 거기 그게 있었어.”
“정확하게 어떤 거였죠?”
“놀랍게도 어린애 손바닥 크기 정도 되는 살덩이였어. 우린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그게 사람의 살이라는 걸 알았어. 놀랍게도 전혀 부패하지 않은 채 보존되어 있었어. 찰스는 그걸 보자마자 즉시 입으로 가져갔어. 곧바로 싸움이 벌어졌어. 다들 그걸 자신이 먹고 싶어했어. 설명할 순 없지만 우리 머릿속에는 오직 그걸 먹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 몇 명이 찰스의 사지를 결박한 다음 억지로 토하게 만들려고 했어. 그때 찰스가 폭발했어. 그는 사지를 결박했던 동료들을 모두 찢어 죽였어. 그리고 걸신들린 듯 시체를 뜯어먹었어. 공포가 몰려왔어. 놀란 동료들이 그에게 총을 쐈지. 하지만 좀 전에 봐서 알겠지만 총은 소용이 없었어. 누군가가 수류탄을 던졌고 난 그때 정신을 잃었어. 깨어나보니 병원이더군. 동료들 대부분이 죽었어.”
“찰스는요?”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어. 난 그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어. 마침 전역할 기회가 주어졌기에 전역하고 대학에 들어갔지. 어릴 때부터 난 의사가 되고 싶었어. 참! 내 주특기는 의무병이야. 간단한 야전수술 정도는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췄지. 하지만 그것이 날 가만 놔두지 않더군.”
“어떻게요?”
“찰스를 제외하고 나까지 모두 세 명이 살아남았어. 한 학기를 마쳤을 때 살아남은 동료 중 하나가 날 찾아왔어. 그는 신문을 가지고 왔는데 역시 살아남은 동료였던 로빈이 살해됐다는 기사가 실려있더군. 살해수법이 꽤 엽기적이었어.”
“카니발리즘?”
“그래. 찰스가 로빈을 뜯어먹은 거야. 동료, 참 그의 이름은 해리야. 해리가 그러더군. 녀석은 사람의 인육을 먹음으로써 또는 먹힘으로써 생존하는 게 분명하다고 말이야. 해리는 전역 후 사건 현장으로 돌아가서 많은 걸 조사했어. 그 동굴에 관한 전설도 그가 알아낸 거야. 수천 년 전 사람을 잡아먹는 악마를 한 영웅이 겨우 잡아서 그곳에다 봉인해놓았다는 거야. 우린 어렵지 않게 그 악마가 그것이라는 걸 깨달았지.”
“도대체 그게 뭐죠?”
헬렌은 뒷좌석을 흘끔 돌아보며 말했다. 뒷좌석에는 검은 비닐로 몇 겹이나 감싸고 그 위에 밧줄을 꽁꽁 감은 물체가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나도 정확하게 그게 뭔지 몰라. 하지만 진화의 어떤 고리에서 튀어나온 돌연변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 녀석은 어마어마하게 오래된 존재일 거야.”
“그런데 왜 여태 발견되지 않은 거죠?”
“녀석은 생식능력이 없는 게 분명해. 녀석은 먹힘으로써 한 개체에서 다른 개체로 전이될 뿐 생식은 하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눈에 띄지 않는 거야. 개체수가 안정적인데다가 겉으로 봐서는 전혀 구분할 수 없으니까.”
“왜 그렇게 진화했을 까요?”
“녀석은 최상위 포식자야. 공룡시대에 녀석은 가장 강한 육식공룡의 몸에 전이돼서 다른 공룡을 잡아 먹었을 거야. 같은 종을 먹는 습성은 그때 생겼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포식자의 개체수가 늘면 자연히 경쟁도 늘게 돼. 이론적으로 저들은 무한히 지속되는 존재야. 저들에게 생식능력이 있다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전멸하고 저들로만 지구가 꽉 차게 돼. 그럼 저들끼리 싸우게 되고 결국 전멸할 수 밖에 없지.”
“일리 있는 추측이긴 하군요. 그런데 저걸 어떻게 잡은 거죠? 그리고 소년은 어떻게 됐어요?”
“소년은 무사해. 걱정 마. 저것들은 시간이 있으면 아주 천천히 식사해. 먹잇감을 기절시키고 근육이 늘어질 때까지 기다려. 그래야 더 맛있는 모양이야.”
“지금 어디 있어요? 왜 차에 태우지 않은 거죠?”
“혹시라도 전이될까 봐 태우지 않은 거야. 아까 우리가 간 곳 어딘지 기억나?”
“대강은요.”
“현장에 두고 왔어. 아! 그 상태대로 두고 온 건 아냐. 비를 피할 만한 곳에 눕혀놨어. 나중에 찾으면 돼.”
“다행이군요. 참! 캐시를 죽인 건 그것이 확실한 것 같은데… 소년을 죽인 건 도대체 누구죠? 소년의 시체는 먹히지 않았잖아요?”
“소년을 먹으려다가 약물중독인 걸 알게 된 거지. 피 냄새 따위로 말이야. 녀석은 좋은 고기만 먹어. 암이나 질병, 약물에 중독된 사람은 먹지 않아. 10대 소년이라 무척 싱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약물에 중독된 걸 알고 화가 나서 산채로 찢어 죽인 거야.”
“그렇군요.”
헬렌은 이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걸 어떻게 죽이려고요?”
“과거에는 용암에 빠트려 죽였다고 하더군. 물론 해리의 말이야.”
“해리는 어떻게 됐어요?”
“나를 찾아온 그날 이후 연락이 끊겼어.”
“사망기사는 없었나요?”
“그래. 녀석은 해리를 완벽하게 처치했어.”
“어떻게?”
“지금 뒷좌석에 있는 게 해리거든.”
“그럼 벌써 전이했단 말이에요?”
“찰스보다는 해리가 더 평범해 보여. 다시 말해 생존할 확률이 높다는 말이지.”
“그걸 어떻게 완벽하게 죽일 수 있죠?”
“근처에 제철공장이 있더군. 그곳에 내가 원하던 그것이 있어.”
“용광로.”
“역시 똑똑한 여자군. 용광로에 던져 넣을 거야.”
“그런데 날 처음 봤을 때 내가 그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누구에게나 전이될 수 있다면서요?”
“왜 안 했겠어?”
“어떻게 내가 그것이 아니라고 확신했죠?”
“넌 무표정하지 않았거든. 감정이 얼굴로 바로 드러났어.”
크리스는 픽 웃으며 말했다.
“아!”
헬렌은 이제야 그의 행동을 이해했다. 멈칫거리던 그가 헬렌이 인상을 긁자 순순히 수갑을 찼다.
크리스의 힘은 엄청났다. 검은 비닐에 싸인 그것은 엄청나게 무거워 보였는데 크리스는 힘들이지 않고 들었다. 공장은 자동화 되어 있어서 직원이 거의 없었다. 크리스는 특수부대원답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용광로까지 접근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용광로에 던져 넣었다. 그의 얼굴에 희열이 번졌다.
크리스는 “두 번 다시 볼일은 없을 거야. 안녕!” 이 말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헬렌은 아쉽지만 그를 잡지 않기로 했다. 그는 여전히 매력적이었지만 좀 전처럼 확 당기는 느낌은 없었다.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가? 아니면 내 처지 때문에 그런가?
곧 크리스에 대한 생각은 지워졌다. 다만 이 사건을 어떻게 끝맺음 지어야 할지 머리가 아플 뿐이었다.

실종된 소년은 무사히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다. 소년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몽유병의 일종일지 몰라서 일단 병원치료를 받기로 했다. 헬렌은 소년을 발견한 공로로 표창까지 받았다.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던 크리스도 간단하게 해결됐다. 그는 소년의 수색을 도와주다 길이 엇갈려 사라진 걸로 처리됐다. 당연한 얘기지만 크리스의 DNA는 캐시를 죽인 범인의 것과 확연히 달랐다. 그래서 모두의 관심 뒤편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 있었다.
“헬렌! 잠시만 나 좀 봐.”
매튜가 손짓했다. 헬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매튜에게로 걸어갔다.
“왜? 무슨 일인데? 근무 바꿔달라는 소리면 나 그냥 간다.”
“나가서 커피나 한 잔 마시자. 커피는 내가 탈게. 먼저 나가 있어.”
매튜의 표정은 심각했다. 얼굴도 창백했다.
무슨 일일까? 여자친구와 헤어졌나? 그래서 나한테 상담을 요청하는 건가? 헬렌은 파란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공기가 너무 깨끗했다. 그래서 이곳을 택한 것이지만.
“자! 여기 있어.”
매튜가 커피를 건넸다. 이제 혈색이 좀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헬렌! 얼마 전에 네가 잡아왔던 남자 있지? 크리스라고 하던 남자.”
“그 사람은 왜?”
“혹시나 싶어서 그 사람의 지문을 검색해봤거든.”
“그때 검색해보지 않았나?”
“그때는 크리스 브라운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해서 지문을 대조해봤을 뿐이야.”
“그런데 왜?”
“놀라지 마?”
매튜는 말을 끝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뭔데 그래?”
“그는 크리스 브라운 이었지만 동시에 살아있었다면 올해 70살이 되는 로버트 오닐이기도 했어.”
“뭐라고? 무슨 소리야? 알아 듣게 설명해봐?”
“그와 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이 또 있다는 거야.”
“그게 가능한 거야?”
“아니. 그는 크리스 브라운이자 로버트 오닐이야.”
“그는 이제 28살이야. 어떻게 70살이 될 수 있어?”
“그래서 로버트 오닐의 사진을 구했는데… 그는 분명 크리스 브라운이었어.”
“뭐?”
“여기 사진하고 자료. 참고로 로버트 오닐은 20년 전에 사망한 걸로 되어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망자의 지문을 검색하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갈 뻔 했어.”
매튜는 서류를 건넸다. 헬렌은 재빨리 서류를 검토했다. 매튜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크리스는 전혀 늙지 않았다. 40년 전 사진 속의 로버트는 그녀가 며칠 전 본 크리스와 헤어스타일만 다를 뿐 모든 것이 똑 같았다.
“매튜. 나 말고 또 누가 알고 있어?”
“낸시. 사실 크리스를 자세하게 조사해 달라고 한 건 낸시였어.”
“낸시가 왜?”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 약속 지킬 거지.”
매튜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래. 약속해.”
“사실… 그때 가져갔던 샘플로 DNA 검사를 하지 못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낸시하고 장난치다가 그만… 소년도 찾았다고 하고 범인은 도망갔다 길래 당연히 크리스가 아닌 줄 알았어. 그래서 검사를 해보지도 않고 DNA 지문이 동일하지 않다고 말했던 거야.”
“그런데? 다시 조사해보니 크리스가 범인이었어?”
“아니. 크리스가 범인은 아니야. 그건 분명해. 낸시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아있던 샘플로 다시 조사해봤어. 그런데 놀라지마.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얘기니까.”
“지금 네가 하는 말보다 더 한심한 건 없어.”
“크리스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는 XY, 여자는 XX인데 크리스는 성염색체가 아예 없었어. 처음에는 샘플이 심각하게 훼손된 줄 알았지만 그건 아니었어. 크리스에게 문제가 있었던 거야.”
“뭔가 잘못된 거 아냐? 샘플 어디 있어? 다른데 의뢰해봐야겠어.”
“그게… 며칠 전 낸시의 실험실에 도둑이 들었어. 다행히 장비를 훔쳐가진 못했는데 실험하던 샘플들이 대부분 망가졌어. 크리스의 샘플도 그때 전부 다 망가졌어. 정말 이상한 일이야. 경보장치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는데. 아무튼 난 낸시를 믿어. 그녀는 나한테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이걸 봐. 크리스는 분명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잖아?”
하늘이 노랬다. 샘플을 건드린 건 크리스가 틀림없다. 도대체 그는 누구지? 그리고 그가 말한 것 중에 뭐가 진실이지? 그가 말한 모든 것들, 심지어 그녀의 눈으로 직접 본 그것도 이젠 믿을 수 없었다.
어쩌면 크리스도 그것의 하나일지 모른다. 좀더 진화한 그가 자신보다 열등한 동족들을 죽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살기 위해 사람을 먹어가면서...
그녀는 AIDS에 걸린 걸 처음으로 감사했다. 조슈아가 그녀의 삶에 남긴 낙인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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