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추 먹지도 나의심장은
하 않을거 뛰고있고너
다 면서죽 의심장은꺼
아 이고이 진다사그러
름 유도없 든다생명의
답 이부순 불꽃들이받
다 다붉고 고휘두르고
즐 하얗고 찢고부순다
겁 노랗고 나는즐겁고
다 아프다 너는죽는다

*                *                *                *                *                *                *

“오늘도 늦었구나.”
“어쩌다보니. 다들 밥 먹었어요?”
“벌써 9시니…”
“난 대충 먹었어요. 안 먹어도 되는데.”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의 어머니도 그걸 알았고, 그도 그냥 해본 소리였다. 이미 차려진 밥상을 봤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실 그는 오전 11시쯤 느지막히 먹은 아침겸 점심 외에는 아무것도 입에 대질 못했다.

“그런 소리 말아라. 그래도 밥은 챙겨 먹어야지.”
“나 때문에 괜히 밥상 따로 차리는거 귀찮잖아. 그리고 밤 늦게 먹으면 나 살찌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그는 벌써 수저를 잡고 있었다.

“아버지는?”
“주무신다. 내일 또 새벽같이 일어나셔야 하니까.”
“랑이는?”
“방에서 공부해.”
“제 오빠가 왔는데 나와보지도 않고… 것보다 공부는 무슨 공부. 보나마나 전화질 중일걸.”

  벌건 순두부 찌개에 밥을 석석 비벼 먹었다. 어머니는 옆에서 자리를 지켜 주었다. 일주일에 두 세 번씩 늦어지는 날이면 늘 이렇다. 어머니가 보고 있던 거실의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 고공행진하는 집값은 여전히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정부의 이번 부동산 정책은 미연책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음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부동산 관련 이야기만 나오면 배가 아팠다. 삼년 전에 아버지가 헐값에 처분했던 땅이 지금은 수십배로 뛰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덧붙여서 그가 나이 스물 일곱에 부모님 집에 얹혀 사는 것도 가격이 미친 뭐 널뛰듯 하고 있는 부동산 시장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TV를 끄려 리모콘을 쥐었다.

“다음 뉴스입니다. 6인조 아이돌 그룹 KISSER의 멤버 김 모씨와 이 모씨가 서울 강남의 모 나이트 클럽에서 종업원을 폭행,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기획사인 요요 엔터테인먼트에서는 늑대인간병의 발병이라는 성명을 냈습니다…”
“아, 나 나왔다.”

현장에서 오가는 경찰들, 목격자 인터뷰 등을 하는 화면 한 구석에서 회색 잠바차림의 자신을 발견한 그는 쓰게 웃었다.

“어머, 또 나왔네…”
“어라, 오빠 또 TV에 나왔어?”

계단을 내려오던 동생이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TV를 들여다 본 동생은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또 스쳐지나가는 거네, 뭐. 오빤 인터뷰같은 것도 안해?”
“얘는 무슨 소릴… 저런 흉흉한 사건에 뭐가 좋다고.”

어머니가 손사레를 치며 질겁을 하자 동생은 헤실 웃었다. 그 역시 쓰게 웃었다. 별로 좋은 사건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TV에 나온 건 지난 두 달 간 벌써 네 번째였다. 한번도 화면의 중심에 잡힌 것이 아니었고, 언제나 우연히 카메라 앵글 안에 들어온 행인처럼 보였으므로 그 자신 말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가해 용의자들이 소속된 KISSER는 작년 신인그룹상을 받은 바가 있고 현재 앨범 판매량이 40만장에 근접하는 인기 아이돌 그룹이라 사건의 귀추가 주목됩…”

그는 TV를 껐다. 동생은 태연한 얼굴이었지만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다시 밥상앞에 앉았다.

“키서인지 뭔지 하는 애들, 저번에 불쌍한 사람 돕고 하던 애들 아니니? 그런 애들이 어째…”
“그거야 소속사에서 이미지 만들라고 시킨거겠지, 걔들이 나서서 하는 것도 아닐텐데 뭐.”
“랑이 너 쟤들 좋아하지 않았어?”
“걔들 아니라니까? 내가 좋아하는 애들은 레젠드! 그리고 요새는 활동도 별로 안한단 말야.”

갓 스무살, 이제 좀 어린티를 벗고 대학생티가 나기 시작한 그의 여동생은 물 한잔을 손에 들고 이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아휴, 평랑이 저건 딸년이라고 하나 있는게 엄마한테 그렇게 틱틱거려? 모를 수도 있지…”

여기까지야,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집에서는 조금 달랐다. 아직 더 나올 것들이 있었다. TV소리마저 사라지자 그가 씹는 소리만이 정적 속에 울렸다. 우적 우적, 와그작 와그작, 꿀꺽. 그는 기다렸고, 역시나 어머니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평인아, 너 그 일이 괜찮니?”
“괜찮고 자시고가 어딨어요. 일인데.”
“에휴… 네 아버지가 주식에만 손을 안 대었어도… 네가 이런 일까지는…”
“그거랑은 상관 없어요. 그리고 이 일이 뭐 어때서요?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그는 물을 들이켰다. 방금 먹은 밥이 돌이 된 것 처럼 딱딱하고 뱃속이 거북했다. 물에도 청량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정수기 필터를 교체한게 언제였는지가 마음에 걸렸다.

“얘는… 사람들한테 욕 먹는 일인데…”
“아 욕을 먹기는 왜 먹어요. 감옥에 갈 사람 구해주는데 좋아하면 좋아했지.”
“감옥에 가야 할 사람인데 안 가는 거니까…”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요. 감옥에 보내면 안 되는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면 안되죠. 저 KISSER 사건만 봐도 그래요. 내가 감시카메라 영상을 봤는데, 그건 그야말로 인간이…”

뱃속에 들어간 것들이 요동을 쳤다. 위장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그는 고집스럽게 밥을 씹어삼켰다. 꾸역꾸역 먹다 사레가 들었다. 켁켁. 재빨리 손으로 입을 가리길 다행이었다. 으깨진 순두부 조각과 밥알이 벌건 국물을 타고 흘러내렸다.

“…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쟤들도 수년간 연습생으로 있다가 겨우 좀 스타 반열에 올랐나 싶었는데, 제정신이라면 이런 일을 일으키겠어요? 늑대인간병은 호르몬 문제에요, 호르몬. 우리는 우리 의지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줄 알지만, 호르몬 조절만 잘못되어도 얼마든지 감정이 변하는 거라구요. 암 걸려 죽어가는 사람한테 당신이 암 걸린 건 당신 탓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그야 그렇지만…”
“그래서 원래 법적으로 정신병자가 범죄를 저질러도 법대로 처리하지 않는 거에요. 그렇다고 사회를 멋대로 활보하는 것도 아니고, 격리치료를 받는 거잖아요. 어느 정도 괜찮아 졌다고 판정이 나야지만 사회로 복귀하는 거니 감옥과 다를 바가 뭐겠어요. 사회로부터의 격리와 갱생을 다 하는 거잖아요.”

아이를 못 가져 발을 동동 구르다 서른에서야 겨우 낳은 아이였지만 응석받이로 키우진 않았다. 나쁜 길로 빠지지도 않고, 게으르거나 구제불능의 상태도 아닌 건실한 청년으로 자랐지만, 뭔가 모자랐던 것 만은 틀림없었다. 똑똑했지만 특출나진 않았던 것이 문제였을까. 꿈꾸었던 것들을 이루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맴돌던 그는 어딘가 우울한 그늘을 가진 청년이 되어버렸다.

“모두가 다 그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니잖니. 예를 들어, 네가 피해자 엄마였다고 생각해 봐라. 사로고 죽었더래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누군가 죽였다고 하면… 가슴이 찢어지고… 그러는데 가해자는 감옥도 안가고… 화가 나고 욕도 나오지 않겠니?”
‘그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제에요. 왜 남 잘되는 꼴을 못봐.’

대답하려던 그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피곤했다. 다 먹은 밥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씻을게요, 두세요.”

그래도 어머니에게는 아직껏 착하고 귀엽기만 한 아들이다. 어머니는 얼른 고무장갑을 뺏어 들며 그를 만류했다.

“얘두, 일하고 들어와서 설겆이는 무슨…  방에 올라가서 자거라. 내일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야지.”

*                *                *                *                *

병원 건물 바깥 조차도 건물로부터 반경 100미터 이내는 금연구역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건물 옥상에서 피우는 건 생각치 못했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눈감아 주는지 모르겠지만, 병원 옥상은 금연지옥에서 흡연자들의 낙원 구실을 해 주고 있었다.

석주는 세 대째의 담배를 피워물었다. 오전 내내 병원에 있으면서 담배를 못 피웠고, 아마 점심시간이 끝나면 또 오후 내내 담배를 피우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나마 쌍방간에 일이 익숙해져 절차가 많이 간소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덜커덩 하고 옥상 문이 열리자 석주를 비롯하여 끽연가들의 시선이 모였다. 시선을 받은 사람은 잠깐 멈칫 했지만, 그가 잔소리하러 온 병원 관계자가 아닌 것을 확인하자 제각기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가 버렸다. 석주만이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똥싸는데 뭐 이렇게 오래 걸려?”
  “… 어제밤부터 속이 좀 안 좋아서요.”
  “사먹는 건 몸에 안좋다니까.”
  “아니요, 어머니가 해주신 밥입니다만.”

석주는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평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얼른 반대편으로 물러났다

“너 그거 스트레스성 위궤양 같은거 아냐?”
“단순히 얹힌 겁니다. 쓰리지는 않아요. 별로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었고.”
“그래? 어제 그런 걸 봐서 그런거 아냐?”
“전 비위가 좋은 편입니다.”
“비위랑은 별 상관 없는 문제야. 나도 비위는 괜찮지만, 어제 저녁은 걸렀다. 마누라는 밥 거르면 안된다고 난리 치지만 도대체 속이 거북해서.”

또 한번 깊이 연기를 빨아들인 석주는 다 타버린 담배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발로 비볐다. 평인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위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냐. 이건 양심의 문제라고. 편해지려면 양심을 버리면 돼.”
“양심? 양심은…”
“나 정도 버리는게 딱 적당해. 이제 저녁은 걸러도 다음날 아침부터는 문제 없거든. 너 오늘 아침 점심 다 굶었지?”
“양심과는 상관 없는데요. 그냥 얹힌 것 뿐이에요.”
“글쎄, 왜 얹혔는지를 생각한다면 상관이 있겠지.”

평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석주는 새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켜려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평인을 돌아보았다.

“너도 한대 피울래?”
“아뇨, 전 담배 안 피웁니다.”
“거 참 신기하단 말야. 어째 그 나이가 되도록 담배 한 번 안 피워봤냐.”
“전 피우는 사람들이 더 신기합니다. 뻔히 자기 몸을 망치는 줄 알면서도 피우니까요.”

석주는 말 없이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였다. 평인은 마약을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적어도 마약 주사를 놓는 그 순간 만큼은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담배를 피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 보다는 일상적인 공허함이 묻어나왔다.

“야, 너 의대 나왔다고 했지?”
“예? 뭐… 중도에 포기했지만요. 그리고 그 전에는 법대를 시도했다가 떨어졌고.”
“그러면 담배의 해악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겠지, 그치?”
“그러니까 안 피우는 거죠.”
“그래. 그렇게 생각하시겠지. 그렇지만 말야, 의사들은 십중팔구 엄청난 골초들이란 말야. 울 어머니 편도선암에 걸려서 돌아가셨는데 말야. 그 때 수술해주던 이비인후과 의사가 사람이 참 좋았어. 잘 해줬구. 그래서 그 후로도 가끔 소식 듣고 했는데, 얼마전에 후두암으로 죽었다더라. 담배를 하두 펴 대서. 밤낮으로 후두암 걸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봐 오던 사람도 담배를 못 끊더라구.”
“지극히 비이성적이군요. 인간답지 못해요.”

석주는 웃었다. 웃다가 연기가 어디 잘못 들어갔는지 쿨룩쿨룩 기침까지 해가면서.

“야, 인간이란 비이성적인 동물인거야. 지극히, 그 어느 동물보다 말이지.”

덜커덩. 옥상 문이 또 열렸다. 이번엔 두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들어선 두 사람은 병원 경비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담배를 비벼 끄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나 아직 덜 탄 담배가 아까웠던 석주 같은 사람들은 긴장 한 채 그들을 좀 더 관찰하다가, 그들이 품에서 담배 한 갑씩을 꺼내는 걸 보고는 마음을 놓았다.

“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KISSER인지 나발인지 별 거지같은 것들도 저렇게 좋다고 쫓아다니는 애들이 왜 이렇게 많아?”
“신세대 아이돌 가수인데 뭐, 그 정도 인기는 아무것도 아니지. 재작년에 탤런트 최수혁이 여기 온 거 알지?”
“최수혁이? 최수혁이 정신병 걸린 적이 있어?”
“아니, 최수혁이는 누구 병문안 왔던 모양인더라구. 치매 걸린 할머니라던가. 그때는 진짜 경찰까지 불렀다니까, 팬들이 못해도 1000명은 몰려들었을걸.”
“KISSER는 그게 아니라 환자로 검진받으러 들어온 거잖어? 늑대인간병에, 사람 하나를 완전히 곤죽으로 만들어 버렸다며? 그런 천하의 개 호로자식들을 아직도 좋다고 쫓아다녀?”

신경쓰지 않으려 했는데도 KISSER의 이야기가 나오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가 기울어졌다.

“팬들이 어디 그런거 신경 쓰나? 병이래잖아, 병. 그리고 이번에 잡혀 들어온 두 놈 다 그룹에서도 유난히 잘 나가던 애들이라더군. 에잉, 이 병원도 글러먹었어. 돈도 좋지만 평판도 생각해야지, 아무 놈이나 늑대인간 병이라고 진단서 떼주면 병원의 도덕성이 어떻게 돼?”
“요샌 병원도 비지니스니까. 그러니까 우리 월급도 이렇게 높지.”
“비지니스라고 해도 최소한의 상도덕이라는 게 있잖어.”

석주는 별로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지만, 평인은 다시금 속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화장실에서 고생을 했으니 뱃속에는 아무것도 들은게 없을 텐데도 창자를 찌르는 듯한 아픔이 이따금씩 느껴졌다. 답답했다.

“슬슬 의사들 점심시간도 끝났겠군. 다시 일하러 가자.”

석주와 평인은 옥상에서 내려왔다. 최근 자주 본 얼굴임을 아는 경비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속이 메스꺼워졌다. 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왜 그래, 또 속이 안 좋아?”

평인은 거짓말에 익숙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                *                *                *                *

병원 측도, 그리고 평인과 석주 측도 모두 이번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환자 둘을 동시에 다루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어차피 서류작업은 거기서 거기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의 서류를 작성하며 평인은 대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친구의 과제를 베끼며 적당히 표현 방법만 바꾸는 일을 평인만큼 잘 하는 사람은 없었다. 교양과목 교수로는 지나치게 깐깐하다 싶었던 서양철학 교수도 평인만은 잡아내지 못했다. 병원이야 너무 까다롭게 굴 이유가 없었다. 병원이야 어디까지나 돈을 받는 측이니까.

언제나 귀찮게 구는 쪽은 의뢰인 측이다. 의뢰인을 다루는 것은 석주의 몫이다. 이미 몇 차례의 시도 끝에 평인의 성격이나 화술이 도저히 의뢰인을 다루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아뇨, 절대 그런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그 뭐냐, 형식적인 절차인거죠. 예?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건 법이에요. 아닙니다. 아니, 진정하시고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절대 공개 되는 것도 아니고요. 절차상 필요한 거라서요.”

아니, 평인이 이 일에 적합하지 않다기 보다는, 석주가 이 방면의 스페셜리스트라고 부르는 쪽이 옳았다. 아마 그가 전에 일했던 회사에서도 비슷한 일을 했으리라 짐작되었다.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해야 하는 전화 통화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예. 그렇죠. 아뇨, 그건 아니고요. 사장님요? 사장님이랑 얘기하셔봐야 소용 없습니다. 이 건은 제가 책임자라서. 아 이것 참, 고실장님 왜 이러세요. 저희가 일을 확실히 처리해 드린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라니까요. 에드와 알은 확실히… 예. 예. 그럼요. 걱정마세요. 예. 예, 예. 경과보고 드리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에이 개씨팔놈.”

통화 종료음이 나는 즉시 석주의 입에서 걸쭉한 욕이 터져나왔다. 그 방면에서도 그는 프로다. 그런 욕이 터져나올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르는 데도 통화중에는 결코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는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내지만 다시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주머니 안에 넣어버렸다.

“난리피워요?”
“아 그 개 썅노무새키, 아가리를 확 찢어버릴 수도 없고… 지는 전화로 지랄만 하면 되지만 고생하는 건 나라구. 그리고 이새낀 브로커가 무슨 불법 사기단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야? 걔들 전과기록 좀 보내달라니까, 얼마를 더 달라는거냐고? 병신새끼, 브로커리지도 다 법대로 하는 건데, 무슨 비리 공무원 돈 찔러주듯이 돈만 좀 더 내면 서류고 뭐고 다 제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야 뭐야?”
“글쎄요. 사전적 의미로 브로커에는 사기꾼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데요.”

석주의 째려보는 눈에 평인은 조용히 눈을 깔았다. 달래는데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글러먹은게 이새끼들은 절차와 법규를 홍어좆으로 보고 있어. 이러니 재계보다 연예계가 더 정치판이랑 관계가 깊다는거 아냐. 어우 좆같은 세상. 그리고 전과기록은 왜 못 보내주겠다고 지랄이야? 어차피 미성년자니까 뭐 별것도 없을 거 아냐.”
“그 에드란 녀석은 15살에 살인미수 한건 했다는 소문이던데요. 찌라시 기사라 믿기는 좀 그렇지만.”

멈칫했던 석주는 머리를 긁었다. 기도 안 차다는 표정이었다.

“이거 환장하겠군. 진짜야?”
“찌라시 기사라니까요. 소속사 측에서 서류 보내주면 확인해보죠. 그런데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왜, 네 감이 그렇게 말하디?”
“아뇨, 이 혈액검사 결과를 보세요. 거기, 33페이지요.”

병원측에서 받아온 자료를 넘겨주자 석주는 그것을 뒤적였다. 견해는 없고 숫자만 나열된, 지극히 객관적인 자료다. 그것을 바탕으로 의사가 어떤 견해를 가지는가는 물론 석주와 평인 같은 브로커들에게 달려 있다. 혹은, 브로커가 제시하는 돈의 액수에 관련이 있던가.

“뭐 특이한 거라도 있냐?”
“알의 경우는 호르몬 과잉분비가 분명하죠. 보다시피 지금 얼굴에 털도 무성하게 나 있고. 즉 체포당시 호르몬 과잉분비로 엄청난 흥분 상태였던게 분명해요. 근데 에드 녀석은…”

평인의 손가락이 짚은 숫자에 시선이 닿은 석주의 인상이 크게 일그러졌다. 알의 숫자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이다.

“그건 정상치에요. 즉 체포당시 흥분이 가라앉은 평정상태였단 말이죠.”
“이 녀석은 늑대인간 병 환자가 아니라는 거네?”
“… 꼭 그렇지만은 않지만.”
“씨벌, 그럼 어차피 정신병자는 마찬가지 아냐. 완전히 사이코, 돌아도 단단히 돌은 거지. 정신 말짱한 상태에서 그런 짓을 했으면 늑대인간병이 아니라 악마병이야 악마병. 별 개 씨발 좆같은…”

그 이후로도 한참 욕설을 주워섬기는 석주의 입에 담배라도 한대 물려줘 버리고 싶었다. 일단 담배를 물고 있는 순간에는 조용하니까. 그러나 병원 안이라 어쩔 수 없었던 평인은 꼼짝없이 그의 다채로운 욕설을 감상해야 했다.

“에이씨, 나도 원래 다니던 회사에서는 브로커들한테 별 개 지랄 다 떨었거든. 하는 일 없이 서류나 슥슥 쓰고 돈은 억수로 쳐받아먹는 놈들같아서. 근데 내가 해보니 이거 정말 사랑으로 보살펴줘야 할 직종이네.”

투덜거리면 한참 복도를 서성거리던 석주는 결국 큰 결심을 했다는듯이 돌아섰다.

“야, 병원장 좀 만나자고 해봐.”
“예?”
“알 하나만 늑대인간 병으로 처리할 순 없잖아. 에드 그 새끼만 따로 정신병이나 사이코나 뭐 그런 걸로 처리되거나 어디 일간지에 기사라도 나가 봐. 요요 엔터테인먼트의 실장인가 하는 새끼가 우리한테 돈을 주려고 하겠어?”
“그치만 이 수치로는 늑대인간병이라 우기기가 좀 그런데요.”
“그러니까 수치를 고쳐야 할 거 아냐!”

빽 소리를 지른 석주는 다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오천만원짜리야. 회사가 반 먹고 네가 오백만원 먹는다고 쳐. 병원장한테 사바사바하는데 천만원쯤 떼어줘도 난 대충 천만원 남는단 말야. 근데 이걸 놓칠 수가 있겠냐? 지금 내가 이걸 눈 뻔히 뜨고 놓치란 말야? 또 회사에서는 엄청 갈굴 거 아냐, 큰거 놓쳤다고.”

조금 전까지 불법적인 일과는 전연 관계가 없는 사람인양 방방 뛰던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평인은 그것을 입밖에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얼굴 표정에서까지 그걸 지우지는 못했다. 석주도 그걸 깨달았는지 갑자기 그를 돌아보았다.

“야.”
“예.”
“일 끝나면 한잔 살게. 시간 좀 비워라.”

*                *                *                *                *                *

일을 끝내는데는 나흘이나 걸렸다. 서류를 완성하고, 필요한 부분을 조작하는데 이틀이 걸렸고, 병원장의 보고서를 다듬고 입을 맞추는데 하루, 대금지불과 자료 전달에 하루가 걸렸다. 힘든 일이었지만 손에 쥐게 된 돈을 생각하면 짭짤한 한 건이었다. 덕분에 석주는 꽤나 거나하게 술판을 벌였고, 평인은 새벽 세시가 가까운 이 시간에 비틀거리며 초인종을 누르는 신세가 되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문에 머리를 기대고 기다렸다. 과연, 두 번째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문이 열렸다. 그는 고꾸라질 듯 앞으로 기울며 덥썩 끌어안았다.

“윽, 술냄새! 오빠 술먹었어?”
“아이구, 우리 평랑이, 귀여운 내 동생… 이 오라버니를 기다렸구나?”
“저리가! 징그럽게.”

정강이를 걷어차였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아픔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죽는다고 아픈 시늉을 했다.

“아이구- 이젠 남자친구 생겼다고 오라비를 마구 학대해도 되는거냐, 가족은 천륜인 법인데 폭력을 구사하고…”
“시끄러워, 엄마아빠 깨겠다. 빨리 들어가서 엎어져 자. 나 공부하는 중이었단 말야.”

현관에서 잘 안벗겨지는 신발을 벗으려 낑낑대던 그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다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쪽 발만 신발을 신은 채였다.

“아차차, 가방, 가방.”

엉금엉금 기다기시피 들어오는 그를 보며 평랑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아주 어렸던 시절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과 너무 비슷해 보였다.

“무슨 가방인데 그렇게 꼭 끌어안고 있어?”

평인은 소파에 벌러덩 누워있으면서도 품에 가방을 꼭 안고 있었다. 딱딱하고 큼직한 서류가방인데 꼭 큰 곰인형이라도 껴안은 듯 하다.

“이거? 중요한 서류가방이지.”

그는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평랑은 괜시리 기분이 나빠졌다. 그녀의 오빠는 그렇게 실없이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취해서 주정부리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왜 그렇게 웃어? 변태아저씨 같아.”
“변태 아저씨? 이거 내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겠네. 아 기분이 좋아서 웃는건데 그것도 못하냐?”
“기분이 왜 좋아?”

평인은 또다시 흐흐흐 웃었다. 웃음이 입가에서 흘러내렸다.

“술을 마셨으니까 기분이 좋지.”
“기분이 안 좋으니까 마신 거 아냐?”
“아냐!”

평인이 벌떡 일어나다 가방 모서리에 가슴을 찍고는 괴로워했다.

“오빠 좀 바보같은데.”
“크흠! 자, 이걸 봐라. 오빠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를 보여주지.”

평인이 자물쇠를 열지 못하고 몇 번이나 끙끙거리며 숫자조합을 맞추는 동안 평랑은 인내심있게 기다렸다. 별로 신경쓰지 않는 척 하면서도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마침내 그가 서류가방을 열어내었다. 오빠의 반응에서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던- 그래도 설마 하던 -  그것들이 우수수 방바닥으로 쏟아졌다.

“자, 봐라! 오빠가 기분이 안 좋을수가 있겠냐, 응? 기분이다, 기분. 평랑이 요즘 남자친구도 사귀는데 옷도 예쁜 것도 좀 사 입고 그래야지. 선머슴처럼 하고 다녀서야 되겠어?”

턱 하고 손에 쥐어주는 만원권 뭉치. 짐작은 했으나 막상 실물을 보니 충격이었다. 장사를 해본 적도 없고 은행에서 일해본 적도 없는, 평범한 월급장이의 딸로 이십여년을 살아온 그녀에게 현금 뭉치라는 것이 어떤 기분으로 다가왔을지, 평인은 쉽게 알 수 없었다.

“오, 오빠. 이거 얼마야?”
“응? 한 묶음에 50장. 아, 기분이다. 오빠를 위해 밤 늦게까지 안 자고 있던 동생에게는 백만원쯤 줘야…”
“그게 아니고! 이게 전부 얼마냐고!”
“한 700만원? 잘했다고 보너스도 좀 받았거든. 근데 그건 왜?”

평랑은 벌레라도 만진 듯 손을 떨쳐내었다. 만원권 뭉치가 바닥을 굴렀다.

“이상하잖아, 이런거? 그 회사 좀 이상해 오빠. 월급을 이렇게 현금으로 주는 회사가 어딨어? 이거 불법 아냐?”
“무슨 소리야? 당연히 합법이지.”
“이렇게 큰 돈을 가방에 담아서 주는 게 어떻게 합법이야?”
“비정규직이라서 그런거야, 비정규직. 계약직이라고도 하지. 이게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냐면 말야, 일종의 프리랜서거든. 석주 선배라고 지난번에 봤지? 그 사람이 날 고용하고 있고, 그 사람은 정규사원으로 회사에 고용된 거야. 그리고 회사에서는 정규 사원에게 조력하고 있는 나에게 배당금을 따로 주는 거야. 근데 절차상으로 일단 돈은 전부 선배가 받고, 나한테 그걸 나눠주는 형식이거든. 그래서 그런 거지 불법이라던가 그런 건 전혀 아니니까 안심하고 받어.”

그러나 평랑의 얼굴에서 불신의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평인은 갑자기 술이 깨는 것을 느꼈다. 잠시나마 좋았던 기분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그와 동시에 속이 치받아 올랐다. 삽시간에 안색이 변한 평인은 입을 움켜쥐고 화장실로 뛰쳐들어갔다.

“오빠, 괜찮아?”

우우웨에엑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형형색색의 토사물들이 쏟아져나왔다. 위액과 술과 침에 뒤섞인 음식물들은 반쯤만 삭아, 여전히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우웨에엑. 조금 전 석주와 함께 갔던 고급 룸살롱의 과일안주. 흐물흐물한 복숭아 조각이 말했다. “마셔, 마셔! 야, 일일이 신경쓰면서 이짓을 어떻게 하냐? 쫙 마시고, 내일부터 새 기분으로 출발하자고.”

위액이 훑은 입과 혀와 목구멍이 타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속은 여전히 치받았다. 우웨에엑. 낮에 요요 엔터테인먼트의 고실장과 만난 자리에서 먹은 칼국수. 끊어진 국수가락이 말했다. “어쨌든 일을 잘 처리해줘서 고맙네. 특히 에드의 일은… 보너스도 좀 넣었네.”

헛구역질 두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 있는 것들까지 일제히 일어났다. 가슴이 답답하고 명치가 짓눌려왔다. 우웨에엑. 추가 자료를 재판정에 급히 갖다 주느라 씹지도 않고 삼켰던 길거리 야채호빵. “너희는 뭐야! 뭐하는 새끼들이야! 뭘 갖고왔길래 저새끼들이 무죄고 환자야, 이 개새끼들아!”
덜 삭은 호빵 조각과 함께 토해낸 막곱창. 재판이 끝나고 허기진 배를 메웠던 그것. “원고측에 얼굴이 알려졌으니 원… 사장이 또 지랄 한바탕 하겠군. 어? 야, 걱정마 걱정마. 지난번에도 한번 그랬는데 별일 없었어. 일단 먹어.”

우욱, 우욱.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는데도 그는 계속해서 헛구역질 했다. 등을 두드려주는 손길에 돌아보니 평랑이가 아직 서 있었다. 그는 입가로 흘러내린 위액과 비틀린 웃음을 소매로 훔쳤다.

“됐어, 넌 들어가.”
“오빠, 이젠 좀 괜찮아?”
“괜찮으니까 들어가!”

마지막에 언성이 좀 높아졌던 모양이다. 동생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쿵쿵쿵 화난 걸음 거리로 올라가 버렸다. ‘왜 소리는 지르고 야단이야!’ 듣지 않아도 그녀가 중얼거렸을 말은 뻔했다.

*                *                *                *                *                *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 속에서 일어난 그는 곧 시간이 많이 늦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후 1시. 창문을 가린 블라인드를 살짝 들추자 찌르는 듯한 햇살이 가득했다. 간신히 샤워를 끝마치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집은 적막했다.

아버지는 직장이실테고, 동생은 학교. 어머니는 어디 장이라도 보러 나가셨겠을 것이다. 평인은 적막한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간대의 거리는 한산했다. 학교가 되었던 회사가 되었던, 누구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일하고 있을 터였다.

여름이면 휴가를 얻고, 공휴일에는 쉬고, 평일에는 열심히 할 일을 하는 것. 한때는 그도 그런 생활이 목표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생각하는 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저것 따질 형편이 못 되어 지금의 일을 하고 있지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조금도 보람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뭔가 기피되고, 안 좋은 어감으로 다가오는 일을 한다는 데서 오는 열등감.

남들 다 일할 때 노는 것 조차도 여유롭다기 보다는 외롭고 적막한 기분이 드는 것도 아마 그래서일까.

하릴없이, 이제 어떻게 시간을 죽일까 생각하던 그에게 그 한 통의 전화는 몹시 반가웠다. 정민우. 고교 동창의 이름. 평소라면 ‘언제 한번 시간나면 만나자, 내가 밥한번 살께’ 하고 이미 여러번 남발한 부도수표나 한번 발행하고 끝날 상대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리고 민우도 오늘은 좀 더 적극적이었다.

  “그래? 알았어. 5시에 보자. 엉. 알았어. 꼭 나갈게. 너나 꼭 나와.”

휴일 내내 문자 그대로 무위도식 하는데 실패한 그는 즐거운 기분으로 거울 앞에 섰다.  그가 옷을 차려입고 나가려던 참에 동생이 집으로 돌아왔다.

“오빠 어디 나가?”
“어. 오랫만에 민우랑 만나기로 했다.”
“민우오빠?”
“기억나냐? 걔랑은 고3때 잠깐 친했었을 뿐인데.”
“당연히 기억나지. 오빠 친구들 중에 유일한 유명인인데다가, 나 그 오빠 좀 좋아했었거든.”

잠시 인상을 찌푸렸던 그는 곧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 나이 때의 민우는 정말 잘나갔다. 연예인 지망생답게 샤프한 외모와 선생들의 불만을 사기 쉬운 패션으로 뭇 여자아이들의 시선을 한몸에 끌었다. 가끔 평인의 집에 놀러왔던 그가, 당시 중3이던 여동생의 눈에 얼마나 멋지게 보였을 지는 짐작할 만 했다.

“지금도 좋아하는 건 아니지?”
“그때야 어렸잖아. 가만, 그러고보니 그 오빠 그룹 요새 잘 안나오던데. 새 앨범 소식도 없고.”
“가서 물어봐줄께.”

고교시절 만나기로 약속하면 민우는 제 시간에 오는 법이 별로 없었다. 항상 연예기획사 같은 곳을 기웃거리느라 바빴던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민우와 어울리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민우는 인기인이었고, 항상 뭔가 다른 약속이 있었다. 그가 십여분씩 늦는 것은 예사였다.

“여어.”

어른이 되어서일까. 그는 오히려 약속시간보다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비록 친한 친구들을 가장 친한 순서대로 늘어놓자면 저 뒷줄에 가 있어야 할 민우였지만, 또 이럴 때 만나니 왠지 반갑고 친한 사이처럼 느껴졌다.

‘이게 어른의 인간관계라는 거지.’

심심할 때 밥 한끼 같이 먹는 정도로는 나쁘지 않았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가벼운 농담을 하고, 근황을 묻는 말에는 적당히 얼버무린다. 서로가 지금 상황이 그리 창창하지만은 않음을 알고 있으니까, 현재나 미래 보다는 과거 이야기가 속 편했다. 잘 나갔던 시절들, 꿈과 희망이 생동하던 시절.

민우는 소위 잘 나가는 애였다. 그냥 잘 놀기만 했을 뿐만 아니라 끈질긴 노력끝에 연예기획사의 매니저와 연을 만들어 앞날도 어느정도 보장받고 있었다. 평인은 모범생이었다. 성적은 상위권이었고 별로 모나지 않은 생활을 했다. 서울 유명대학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상위권 대학의 법대를 노려볼 만 했다.

그 시절의 이야기들은 즐거웠다. 전날 술을 많이 마셔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도 평인은 맥주를 잔뜩 마시고 또다시 기분좋게 취해버렸다.

“야, 평인아.”

한참을 즐겁게 이야기하던 민우가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갑자기 진지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세수라도 한 듯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너 요즘 일은 좀 어때?”
“… 어, 뭐. 그럭저럭이지. 그건 왜?”

민우는 갑자기 평인의 손을 붙들었다. 그는 당황했고, 이어지는 말에는 더욱 당황했다.

“진짜 이번 딱 한번만 부탁한다. 평인아, 내가 평소에 아쉬운 소리 안했잖아. 한번만, 딱 한번만 도와줘라.”
“무슨 소리야? 차근차근 얘기해 봐.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알다시피 데뷔 이후로 이렇다할 히트곡이 없다.우리 밴드, 솔직히 말해 실력도 외모도 그리 딸리지 않는다고 봐. 근데 곡이 안 좋아. 홍보도 안 되고. 기획사도 솔직히 작고 별 힘이 없어서, 쇼 프로 같은 거에 참가할 기회도 없어.”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평인의 주변에서야 민우는 거의 유일한 연예인이었고 유명인이었지만, 사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수많은 가수들 사이에 묻혀 대중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인기몰이를 하기에는 여러가지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노래도 어중간했고, 일반인 중에서는 잘 생겼으나 연예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평범한 축에 든다. 딱히 연주실력이 좋거나 인기몰이를 할 만한 건수도 없었다.

“이번 3집은 진짜 죽을 힘을 다해 준비했어. 비싼 작곡가들도 썼고, 기획사도 여러가지로 방송출연 기회를 알아봐 주고 있단 말야. 이번엔 진짜 자신있어. 이번에야말로 히트칠 수 있다고.”

그런데 자신한테 무엇을 도와달라는 것인가? 평인은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평인이 하는 일이 가끔 연예게와 연루되곤 했다. 이번 KISSER사건도 그랬고. 그렇다고 해서 평인이 연예계에 눈곱만큼의 영향력이 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올시다 였다. 그렇다면 돈인가? 하지만 이미 곡도 방송출연도 다 준비되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영장이 나왔단 말야. 내 나이에 더 이상 미룰수도 없어.”
“그래…서?”
“이번 한번만이다! 진짜 이번 한번만이야. 네 힘으로 날 좀 빼줘.”

군의관도 아닌 평인이 어떻게 그에게 군 면제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그는 금방 알아채지 못했다. 자신에겐 그럴 방법이 있었음을.

“재판까지 가든 어쨌든 좋아. 난 아무나, 정말 가볍게 때릴게. 기획사랑 얘기도 다 됐어.”

벌떡 일어서는 순간 세상이 빙글 돌았다. 손을 붙드는 민우의 힘에 이끌려 그는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안돼. 그건… 불가능해. 늑대인간병에 걸린 걸 증명하려면 적어도 몸에 털이 나야 하고…”
“그런 건 네가 꾸며줄 수 있잖아. 친구 좋다는게 뭐냐. 한번만 부탁하자.”
“안될수도 있어. 아니, 안될거야 아마. 증거 불충분에…”
“상관없어! 일단 어떻게든 군대만 안가면 되는거야.”

확실히 그렇다. 흡혈귀병과 늑대인간병에 관련된 병력이 있거나, 혹은 의심만 간다 하더라도 군대는 면제된다. 언제라도 살인자로 돌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에게 무기를 쥐어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시도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늑대인간병이 의심되는 사람이 사회에서 취직을 할 수 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예인이라면?

“별로 추천하는 방법이 아닌데.”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냐. 나도 진짜 마지막이야. 부탁좀 할께.”

정신이 혼몽했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그깟 맥주 몇 잔이 세상을 이렇게 어지럽게 만들었을까.

“일단 생각은 해 볼게.”

분명 술기운 때문이었다.


*                *                *                *                *                *

뉴스도 신문도 보지 않았다. 연일 KISSER의 에드와 알이 늑대인간 병으로 병동에 수용되었다는 기사만 잔뜩이었다. 사건의 추이도, 사건에 대한 논란도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그는 그토록 빈둥대면서도 의도적으로 대중매체에 접촉하지 않았다.

몇번이고 석주에게 연락해보려 했지만 결국 전화를 걸지 못했다. 물어보나 마나 석주는 불같이 화를 내며 평인을 – 그리고 민우를 – 씹어삼키려 들 터였다. 민우에게도 전화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를 몰랐다.

만사가 귀찮아진 그는 사흘간 일체의 교류를 끊었다. 핸드폰도 꺼버렸다. 인터넷도 접속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흘 만에 출근하는 그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삼진 브로커리지라는, 이미지를 명확히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분히 수상쩍은 이름을 가진 이 회사는 그래뵈어도 빌딩 한 층을 통째로 빌리는 큰 회사이다.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회사였지만, 상근하는 사무원만 서른 명 가까이 되고 평사원이 또 서른 명 가량에 평인과 같은 계약직들이 다시 그 정도 된다. 임원이며 비서며, 이것저것 합하면 백명 가까이 되는 큰 회사였다.

석주와 평인이야 큰것 한건 해결하고 사흘간 휴가를 받았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일하는 중이어야 할 텐데, 사무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술렁이고 있었고 다른 이들도 한구석에 모여 있었다. 무엇보다 신경쓰이는 것은, 평인이 사무실에 들어서는 즉시 술렁임이 딱 멎었다는 것이다.

그는 불편함을 느끼며 문간에 기대어 섰다. 어차피 정식으로 이 회사의 사원인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석주의 조수에 불과한 그였으므로 사무실에 그의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석주의 것으로 되어 있는 자리가 있었지만 석주는 아직 출근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왠지 어색함을 느낀 그는 그냥 자판기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뽑아 마셨다.

굳이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적당히 홀짝이며 종이컵으로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가리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오자, 평인에게 쏠리던 사람들의 시선은 순식간에 거둬졌다. 사장이었다.

이쪽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합법적인 브로커리지를 하는 것은 물론 불법적인 브로커리지도 합법으로 가장해 서슴없이 사업을 확장해 지금의 위치에 오른 사람. 사원 수 백명 안팎의 중소기업 정도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돈을 굴리며, 정재계 인사들을 쥐락펴락 하는 사람. 사원들이 그를 어려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흔히 그만한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 말을 꺼내기 전에 ‘에-’ 한다던가, ‘흠’하고 헛기침을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문을 여는 법도 없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사무적인 말투야말로 사장이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고였습니다. 잠깐의 실수가 부른 사고이지요. 사원 여러분은 동요하지 마시고 예전처럼 업무를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은 사원대표로 다섯 명 정도가 상가를 방문하도록 하지요. 물류 1팀 전팀장, 물류 3팀 김팀장, 총무과 김과장하고, 의료1팀 강팀장, 법무팀 최팀장. 오늘 스케쥴에 특별한 것 없을테니 갔다 오시고, 혹 뭔가 일이 생기면 총무과에서 일정 미뤄주거나 다른 팀에서 지원합니다. 이상입니다. 그럼.”

무슨 일인 것일까? 사장이 비서와 함께 나가자 사내가 다시 웅성거렸다. 평인은 궁금했으나 계약직인 관계로 다른 사원들과 별달리 안면이 없어서 그냥 어색하게 서 있었다. 석주가 왜 이리 늦나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그때 의료 1팀의 강팀장이 다가왔다.

“저기… 자네는 안갈건가?”

석주와 평인의 의료 4팀은 늑대인간 병에 관련된 일을 전문으로 맡아왔기 때문에 주로 의료 보험 문제 쪽을 다루는 의료 1팀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늑대인간병에 걸렸거나 그로 인해 피해를 당한 경우 아직 보험처리를 해주는 보험회사가 없었기 때문에, 1팀과 4팀의 업무가 서로 부딪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강팀장과 석주 사이의 문제였고, 석주의 조수인 평인은 아예 그 사이에 끼어들 일도 없었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좀 떨떠름하긴 해도, 궁금하던 차에 잘되었다는 심정이었다.

“저…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요. 휴가가 오늘 끝났거든요. 석주 선배도 아직 안왔고…”

강팀장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그의 두툼한 손이 평인의 어깨에 얹혀졌다.

“아직 몰랐나 보군. 석주는 습격받아 혼수상태야.”

평인은 강팀장의 말을 이해했다. 정말, 뭐라고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                *                *                *                *                *                *

일단 위중한 상태는 넘겼다지만 석주는 아직껏 깨어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목을 너무 오래 졸려 산소 공급이 안되 뇌손상이 심하다는 전언이었다. 깨어나더라도 어딘가 잘못되었을 확률이 십중팔구.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기에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고도 아니고 습격이었다는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살인사건을 다뤄 온 주제에…’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제 삼자의 입장에서였다. 자신이 직접 다루면서도 보고서와 기록테이프의 벽을 한 꺼풀 벗겨야 하는 남의 이야기. 자신의 지인이 그런 일을 당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산소마스크를 끼고 누운 석주와, 오열하는 부인과, 방문 곁에 서 있는 정복 차림의 경찰은 모두 바로 자기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조사하지 않으려나?’

경찰을 보며 생각하던 그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간사한 게 사람이라더니…’

감정이 북받쳐 통곡하던 부인이 다시 진정하고 띄엄띄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충동적인 폭행이었단다. 기분이 좋아서 술을 먹고 택시를 탔는데 하필 그 운전사가 KISSER의 에드와 알에게 당한 피해자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석주가 술 때문에 거의 인사불성인 상태에서 운전사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석주를 데려가 폭행했고, 거의 저항하지 못하고 죽을 뻔한 것을 지나가던 행인 덕분에 간신히 목숨만 건질 수 있었단다.

조사받지 않은 이유도 대충 이해되었다. 공식적인 회사 기록에는 평인의 존재는 없었으므로 경찰의 조사를 받는 것은 피했다… 라는 것이 공식적인 이유겠고, 기실 회사에서 일이 일파만파로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썼다는 게 현실적인 이유일 터. 이런 일이 세간에 알려져봐야 삼진 브로커리지로써는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르게 말해, 경찰 조사를 안 받았다는 것은 회사도 이걸로 끝이라는 의미였다. 평인은 회사의 사원이 아니었다. 그저 석주에 의해 고용된 석주의 조수. 언제든지 끊어 버릴 수 있는 도마뱀 꼬리. 그 뿐이었다. 그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병원내에서 핸드폰은 금지다. 하물며 각종 전자기기에 의해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환자 앞에서야.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그는 얼른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발신자의 이름은 민우였다. 평인은 받지 않았다. 잠잠해졌던 전화는 다시 울렸다. 그는 받지 않았다. 전화는 다시 울렸다.

“여보세요.”
“평인이냐? 나야, 민우. 왜 이렇게 전화를 안받냐?”
“미안, 지금 병원이라서.”
“아, 일하는 중이었어?”
“아니.”

잠시간의 침묵. 물론 급한 쪽은 민우였다.

“저기, 평인아.”
“응?”
“그때 내가 말한거, 알아 봤어?”

평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평인아. 아직인거냐?”

뭐라고 해야 하나.  

“… 그게, 아무래도 안 될것 같다.”

다시 침묵. 민우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그의 얼굴이 지금 어떤 모양일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뭔소리냐 그거?”
“안 되겠다고. 포기해라.”
“그게 뭔 소리냐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상황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꾀 부리지 말라고. 법대로, 정정당당하게 군대 가란 말야!”
“뭐? 야, 너 어디야?”
“네 멋대로 세상 살지 말라는거야. 그렇게 네 하고싶은데로, 네 생각하는데로 세상 일이 풀리질 않아. 그걸 알아야지!”

별 기능 없는 싸구려 핸드폰일수록 튼튼했다.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도 핸드폰은 기능에 충실하게 상대방의 말소리를 전달했다. 야, 이 개새끼야, 너 시발 지금 죽고싶냐… 평인은 그 핸드폰을 붙잡고 벽에 찍어대었다.

“자네 왜 그러나! 정신 차려!”

평인은 사람들의 부축을 뿌리치고 혼자 일어났다. 웅성거리며 둘러선 사람들을 향해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은 흉측한 일그러짐만을 만들어 내었고, 그는 일그러진 얼굴 그대로 밖으로 내달았다.

*                *                *                *                *                *

“여.”
“합석해도 좋다고 한 적 없습니다.”
“거 젊은 놈이 야박하게 굴지 말라고. 내가 한잔 따라줄까?”

대답도 하기 전에 이미 술병부터 빼앗아갔다. 거부할 틈도 주지 않는다. 평인은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상대방을 올려다보았다. 목소리만으로 이미 알아차렸지만, 저 지긋지긋한 박기자가 눈앞에 앉아 있었다.

우리일보 연예면의 박기자는 돼지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기자였다. 그것은 몹시 뚱뚱한 그의 외모 탓도 있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사건의 냄새를 잘 맡기 때문이기도 했다. 놓치기 쉬운 작은 것에서도 큰 사건의 냄새를 잘 맡아내는 그의 능력은 송이버섯을 찾아내는 돼지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젊었을 적에는 정치면의 잘나가는 기자였지만 건드려서는 안되는 인물을 건드리고 그만 연예면으로 좌천되었다.

석주와 평인에게서 뭔가 이상한 냄새를 맡은 그는 정녕 돼지처럼 집요하게 쫓아왔다.

“자, 한잔 쭈욱 비워버려, 쭈욱.”

누가 따라주든 술은 술이다. 평인은 잠시 망설이다 술잔을 들어올렸다. 분명 차가운 술인데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즉시 불길같은 뜨거움이 일어났다. 첫 잔이라면 모를까, 이미 상당히 취해 있던 그에게는 강렬한 충격이었다. 박기자는 스스로 한 잔을 따라 단숨에 비웠다.

“야. 너랑 나랑 알게 된지가 벌써 얼마나 오래 된거냐.”
“한 다섯달 된 거 같군요.”
“그래, 국회의원 김국구 아들 김연태 사건. 광화문 사거리에서 접촉사고가 나자, 상대방 운전자를 끌어내어 광화문 한복판에서 구타끝에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 폭행치사로 구속되었어야 할 사건이었지. 난 솔직히 그런 새끼들이 처벌 안 받는 거, 기자생활 삼십년에 정말 셀 수도 없이 많이 봐왔거든. 근데 이건 좀 특이하게 빠져나가는 거야. 뭐 늑대인간 병이라나? 난 이 괴질과 김연태의 무죄와 김국구의 검은 돈가방의 연관성을 찾으려 했어. 그러다 걸린게 너희야.”

평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그와 석주가 맡았던 사건 중 가장 저렴한 가격에 처리된 사건이었다.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언론과 야당의 집중포화를 맞던 김국구와 김연태의 사건은 삼진 브로커리지로써는 일대 모험에 가까운 리스크를 갖고 있는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사건을 맡아 처리한 것은 여당 총재인 김국구의 정치적 그늘이 가져다주는 막대한 이익을 위해서였다. 당장의 현금보다도 유용하게 쓰일 이익들.

“그리고 그때부터 난 너흴 정말 지겹게 쫓아다녔다. 쫓아다니는 내가 다 지칠 지경이었으니 너흰 오죽이나 지겨웠겠냐. 박종철 사건, 권지성 사건, 마기욱 사건, 알버트 김 사건, 이정우 사건. 그리고 이번엔 KISSER 사건.너넬 직접 쫓아 다닌 것만도 이정도다. 근데 너흰 진짜 암말도 안하더라.”
“말하는 즉시 기사화되서 나갈 텐데 어떻게 말합니까.”
“그래! 뭐 그런 것도 있지. 직업병이거든. 하지만 오늘은 그런건 다 잊어! 다 잊어버리고 털어 놔라. 무슨 한이 그렇게 맺혀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지, 시원하게 다 털어버려!”

연령도, 성격도, 그리고 말투까지 박 기자와 석주는 여러모로 닮아 있었다. 닮았기 때문에 석주는 그토록 박 기자를 싫어했을 것이다. 평인은 술 한병과 잔 두 개를  사이에 두고 박 기자와 마주보았다.

“석주 선배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인간이야말로 가장 비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응?”
“그게 무슨 뜻일까요?”

질문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지 박 기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그치가 어떤 뜻에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야. 이런 거 아냐? 사람이 아닌 다른 생물들은 자연법칙에 충실하잖아. 영역을 침입하면 나가 싸우고. 먹기 위해 죽이고. 발정나면 짝짓고. 내 먹이를 건드려도 싸우고. 나보다 강한 놈이 나타나면 도망가고. 생존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선택. 어 이거 오늘 문장 좀 되는데.”
“그렇군요. 그럼 인간은…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군요.”
“그래. 인간은 감정이 있거든. 아, 동물이 감정이 없다는 건 아냐. 그러나 인간은 감정에 휘둘려 합리적인 사고를 못 할 때가 있지.”

박기자는 잠시 평인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예를 들면… 원한 때문에 누군가를 죽이려한다던가.”
“석주 선배에 관한 이야기는 안할 겁니다. 쓸데없이 녹음기 용량 낭비하지 마시죠.”

박 기자의 얼굴이 약간 찌푸려졌지만 곧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래, 좋다 좋아. 기자가 아니라 한 명의 인생 선배로써 대해주마. 허심탄회하게 말야.”

그는 품에서 녹음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전원도 껐다. 어차피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녹음기가 없어도, 술을 몇 잔 했어도 박 기자의 기억력은 멀쩡할 것이다. 그 과장된 제스쳐가 오히려 달갑잖다.

“만약 사람이 이유 없이 흉폭해진다면 그건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
“2011년, 처음 흡혈귀병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중구난방으로 떠들었죠. 먼 옛날 드라큘라의 혈통이 유전되었다는 식의 유전설, 단순한 정신이상 증세, 혹은 진짜 흡혈귀가 아직껏 살아남아 사람들을 물고 있다는 식으로.”
“그래. 2014년에 크리스토퍼 요한슨 박사가 흡혈귀병의 원인을 규명해내지 못했다면, 사람들은 아직껏 흡혈귀의 공포에 떨고 있었겠지.”
“기생충이었습니다. 머리에 가벼운 전기충격요법을 쓰면 죽어버리는 기생충이요. 그러나 그러한 간단한 것을 알지 못해 죽어나간 사람이 도대체 몇이었습니까? 발작 도중 사살당한 환자들. 흡혈귀병 환자에게 죽은 사람들. 흡혈귀로 의심받아 자살한 사람들. 혹은 흡혈귀로 의심받아 사살당한 사람들.”

악몽의 3년이었다. 박 기자도 그 시절엔 정말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며 흡혈귀 사건들을 취재했다. 폭력성이 증가하고, 상대를 물어뜯어 혈액을 탐하는 기이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박 기자도 지하철에서 하마터면 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흡혈귀병을 일으키는 기생충의 치료방법과 예방약이 나오지 않았다면 인간 사회 자체가 붕괴했을 뻔한 인류의 대위기였다.

“그래서- 늑대인간병도 기생충의 영향이라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아직 정확히 증명되지 않았지만 호르몬 과잉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실제로 늑대인간병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의 혈액을 검사하면 극도로 과다한 호르몬이 검출되고요. 그 한 부작용으로 온몸에 털이 급격히 자라는 증상도 보이지요. 그 호르몬 과잉분비가 왜 일어나는지를 알아내는 게 문제이지만… 지속적인 혈액검사와 호르몬제 처방이면 충분히 정상 생활을 할 수 있는 환자들입니다.”
“실제로 마기욱이 그렇지. 1년 정도 치료한답시고 잠적했다가 최근에는 토크쇼도 나오고 오락프로도 나오고, 아주 잘 활동하더구만.”
“그래요. 그런 마기욱을 감방에 쳐넣는다고 뭐가 좋아 집니까? 그가 다시는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면 죽은 사람이 살아 온답니까? 아니면 범죄가 줄어든답니까? 범죄자는 격리, 갱생키기고 환자는 치료하는 게 정의 아닙니까?”

박기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잖아도 뚱뚱해 거의 보이지도 않는 눈이 완전히 실 같이 변했다.

“법대로 하자면야 그게 옳지. 법대로 하자면.”
“그럼 법대로 하지 않고, 왜?!”
“법이란게 만인을 위한 게 아니니까 그렇지.”

잔을 쥐고 있는 손이 떨렸다. 석주는 박기자의 얼굴만 보면 만원권 두어장 콧구멍에 꽂아 젯상에 얹어버리고 싶다고 했다. 평인은 거기 동감했다.

“그렇지 않나, 응?”
“제기랄! 브로커리지는 불법이 아니에요!”
“그야 그게 일이니까 그렇지. 불법도 불법이 아닌 걸로 만들고, 불법이 아닌 것은 불법으로 만들고. 정의의 천칭에 손을 대어, 눈먼 여신을 속이는 짓. 그러니 원한을 샀어도 할 말이 없지.”
“자세히 알 지도 못하면서…!”
“알지 못하니까 자네에게 물으러 온거야. 기자란 그렇거든.”

던질까? 던질까? 그대로 손안에서 부숴지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꽉 쥔 잔을 들어올렸다. 이죽대는, 말 잘하는 면상. 거기에 잔을 던져 맞춰버리고, 그 이죽거리는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다.  휘릭 – 챙그랑. 술잔은 바닥에서 산산히 부서졌다.

“왜 애꿎은 술잔에 화풀이하나?”
“당신 얼굴에 던질 수는 없으니까.”

한순간의 숨막힐 듯한 정적도 사라지고, 다시금 술집 특유의 소란스러움이 돌아왔다. 그러나 시선은 남았다. 힐끔힐끔, 웅성웅성, 그를 쳐다보며 지껄이는 사람들. 먹은 것도 없고, 빈속에 술만 들이부었는데 뱃속의 창자가 모조리 꼬여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스스로가 이성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이 정도로 끝나는거야.”

박기자는 피식 웃었다. 겨우 기자 따위가, 객관으로 포장한 주관으로 진실을 호도하는 기자 따위가 그를 비웃었다 – 평인의 머리속을 갖가지 상상이 스쳐지나갔다. 주둥이가 좁고 목이 긴 술병은 쥐고 휘두르기에 딱 알맞아 보였다. 의자 다리, 양철 쟁반, 어느 것 하나 저 면상을 뭉개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 중에 술병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퍽 하고 술병이 박살난다. 삐딱하게 앉아있던 놈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만 옆으로 우당탕 넘어진다. 깨져버린 술병은 내버리고 놈의 위에 올라탄다. 쏟아진 술과 유리조각과 피가 엉켜 내려오는 놈의 더러운 얼굴 위로 주먹이 작렬한다. 금시 놈의 입과 코에서도 피가 흐른다. 충격이 컸는지 놈은 말도 제대로 못한다. 별로 치지도 않았는데 거의 실성한 것 같다. 일어나서 이번엔 놈에게 발길질을 가한다. 한번, 두번, 세번. 발길질이 시원시원하지 못하다. 더 시원하게, 더 폭발적으로 놈을 날려버리고 싶다. 입가로 욕설이 비어져 나온다. 에이 병신새끼가, 에이 좆도 아닌 새끼가.

술기운이 가져오는 몽롱한 환몽 속에 있던 그는 다시금 현실로 돌아왔다. 박기자는 여전히 예의 그 자세였다. 조롱하는 듯 신경에 거슬리는 묘한 미소도 그대로였다. 손이 꿈틀거렸다.

‘입만 열면,’

평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한 마디만 더 모욕적인 소리를 지껄인다면. 한 번만 더 석주 선배의 뒤를 캐려고 든다면. 한 번만 더 빈정댄다면.’

그러면 상상한 그대로 해줄 것이다. 손이 꿈틀거리며 술병 근처로 갔다. 한마디만 해라. 한 마디만 해라. 아주 죽여주마.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 기자는 그 자세 그대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을 열지 않아도 그 시선에는 충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애송이가…’ 박 기자는 서른도 안 된 놈이 벌써 현실의 쓴맛을 다 본 척 하는 것이 상당히 우습다고 생각했다. 평인은 천천히 돌아서더니 아쉬운 듯, 질렸다는 듯, 막막하다는 듯, 한심하다는 듯, 안도한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박 기자도 따라 일어섰다.

“야!”

맹렬하게 뒤돌아보는 평인에게 그는 명함을 한 장 건내었다.

“할 말이 있으면 전화해. 만나주지.”

그리고 박 기자는 평인의 몫까지 술값을 계산하고는 가버렸다.

*                *                *                *                *                *

“무슨 술을 또 마셨니?”
“응? 아아. 뭐. 좀 마실 일이 있어서요.”
“요새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아니니? 어제도 마시고 들어오고…”
“그렇게 됐어요.”

그는 외투를 벗어 던지고는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TV에서는 토크쇼 프로그램인 듯 연예인들이 나와 웃고 떠들고 있었다. 마기욱의 모습이 보였다. 늑대인간 병이 발병한 첫 번째 연예인. 마기욱의 사건 때는 삼진 브로커리지도 늑대인간 병에 전혀 관여하고 있지 않았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늑대인간 병이었고, 석주나 평인은 그의 케이스를 참고삼기 위해 매우 면밀히 연구한 바가 있었다. 그가 비록 지속적인 약물치료에 의존하고 있지만, 거의 정상적인 연예계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은 늑대인간병 환자들에게 매우 고무적인 사례였다.

“밥은 먹었니?”
“예… 아니요.”
“그래? 지금 얼른 차려줄게.”
“아, 괜찮아요. 먹고싶지 않아요. 속이 많이 안좋아서…”

그는 눈을 감고 자려고 시도했다. 몸은 축축 늘어졌고 머릿속은 뒤죽박죽 헝클어져 있었다. 그러나 잠은 찾아오지 않았다. 난잡하게 어지러진 머릿속을 비집고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보려 애썼다. 잠은 누울 공간이 협소해 마땅찮다는 듯 끝내 그에게 안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빠, 전화.”

그리고 마침내는 핸드폰마저 그에게 일어날 것을 강요했다. 그는 핸드폰을 들어올렸지만 깨진 액정에는 발신자 번호가 표시되지 않았다. 그는 받지 않았다. 다시 벨이 울렸다. 받지 않았다. 세 번째 벨이 울렸을 때 그는 핸드폰의 전원을 끌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끌까. 받을까. 끌까. 받을까. 네 번째 전화벨이 울렸을 때, 그는 결단을 내렸다.

“여보세요.”
“평인이냐?”
“…민우?”

뜻밖의 전화였다. 전화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평인은 몹시 놀랐다. 그리고 민우의 용건에는 더욱 놀랐다.

“저… 아까는 진짜 미안했다. 그때는 정신이 없었어.”

사과의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 자존심 강한 민우한테서. 그것도 울먹이는 목소리라니. 민우는 남 앞에서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곧 죽어도 자존심만은 세우는 그런 인물이었다. 평인은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이건 무슨 뜻이지?

“좀… 도와줘라. 너밖에 없어. 좀… 나와줘.”
“무슨 소리야? 어디로 나와?”
“지금 너희집 근처야. 어… 그 왜 무슨 슈퍼 옆에. 길 건너에 포장마차 하나 있고.”
“야, 지금이 몇신데…”
“부탁한다. 제발 좀… 나와줘.”

평인은 던져두었던 옷을 대충 걸쳐 입고는 일어섰다. 눈이 동그래진 어머니와 동생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디가니? 이 시간에.”
“아니… 잠깐 나가봐야 될 거 같아.”
“무슨일이야?”
“별 거 아냐. 오래 걸리진 않을거야… 아마도.”

그는 운동화를 구겨 신고 거리로 나섰다. 밤이건만 서울의 밤은 완전한 어둠을 허용하지 않는다. 잠 못드는 사람들의 푸르스름한 스크린 불빛, 환한 형광등 불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나오고, 주택가 골목을 벗어나면 잠을 모르는 눈부신 간판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려 아우성친다.

그래서 거리는 결코 조용해질 수 없었다.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 취객과 함께 비틀거리는 그의 노래.  포장마차에서 터져나오는 공허한 웃음소리. 그런 시간에도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도시의 풍경속에서 민우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전화 통화에서 민우가 말했던 집앞 슈퍼마켓이나 근처의 포장마차 안에도 들어가 보았지만 역시 민우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뭐야… 불러놓고 어딜 간거야?”
“여… 여기야.”

뒤에서 어깨를 잡는 손길에 평인은 움찔 하고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민우는 온통 시커먼 옷에 모자를 눌러쓰고,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연예인이라지만 심하다 싶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선글라스 틈으로 잠깐 보인 눈매가 아니었으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어?”
“이쪽으로…”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민우는 한쪽 골목길로 들어갔다. 말이 좋아 골목길이지, 무계획적으로 쌓아 올린 건물과 건물의 비좁은 틈새에 불과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들어가는게 문제가 아니라, 덩치가 조금만 커도 들어가기 어려워 보였다. 잔뜩 무언가를 걸쳐 입어 몸놀림이 둔해진 민우에게는 더더욱 답답할 텐데도, 그는 기어코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밤에 눈이 적응되었다 싶었는데도 너무 어두워 발 밑을 확인하지 못했다. 무언가 시커먼 것을 잘못 걷어찬 느낌이 나더니 곧 썩은내가 풍겨올랐다.

“크… 왜 이런 대로 오자는 거야?”

한 쪽 건물이 구조적으로 약간 들어간 부분에 와서야 겨우 얼굴을 마주볼 만한 공간이 형성되었다. 결코 누가 볼 일이 없을 텐데도 민우는 골목길의 양쪽 끝, 심지어는 하늘 위쪽까지 둘러보고서야 겨우 마스크를 벗었다. 골목 틈새로 스며드는 미약한 빛에 드러난 민우의 얼굴은 무서우리만치 창백했다.

“평인아. 그래도… 그래도 너 밖에 없다. 그래도 친구라고는 너 밖에…”
“… 야, 뭐… 이러지 말고, 포장마차라도 가서 한잔 하면서 이야기하자. 이건 좀…”
“안돼!”

민우의 붙드는 힘이 너무 강해 그는 놀랐다. 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손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알았어… 놔줘.”
“미, 미안… 하지만, 정말 난 큰일났단말야.”

그리고는 민우는 울음을 터트렸다. 숨죽이며 인적 드문 곳으로 숨어든 자 답지 않게 울음 소리는 너무나도 컸다. 그 어린아이 같은 반응에 평인은 아연해졌다. 그가 알던 자신 만만한 민우는 어디에도 없었다.

“야, 야…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거야? 일단 진정해. 진정하고…”
“진정할 수가 없게 되었잖아!”

그는 머리를 부여쥐고 앞으로 쓰러졌다. 욱, 욱, 윽. 몇 번이나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억누르며 그는 숨막히는 소리를 내었다.

“진석이도…. 동호도… 믿었는데…”

진석이? 동호? 진석이라는 이름은 좀 낯설었지만 동호라는 이름은 확실히 기억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민우랑 친했던 녀석이었다. 소위 말하는 좀 노는 스타일이라, 모범생이었던 평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민우와 매우 친했기에 몇번 같이 만나 놀았던 적은 있었다.

“괜찮아.”

평인은 생각했다. 언젠가 책에서 본 기억이 났다.

‘민우는 지금 반쯤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셈이야. 감정이 격해지고, 매우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로부터의 도피를 위해 순간적으로 타인에게 심하게 의지하는 상태. 그것이 극단적인 상태까지 가거나 지속적으로 나타난다면 정신질환으로 여기고 치료에 들어가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기도하다.특히 떼쓰는 어린아이들과 같지. 교육을 위해 어린아이들의 어리광은 때때로 엄격하게 대할 필요가 있지만, 민우와 같은 경우는 오히려 받아주어야 한다. 뭐였더라. 그래, 반복적인 말을 통해 안심시키는 것.’

“괜찮아. 내가 옆에 있잖아.”
“괜찮아, 내가 옆에 있잖아.”
“괜찮아! 내가 옆에 있잖아!”
“괜찮아?”
“여, 역시 너 밖에 없다. 너 밖에…”

으흐흐흑. 달리 멋있는 말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민우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울음이 가라앉은 것 같자 평인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내게 털어놔 봐. 도와줄게.”

민우는 스스로 자신의 각 팔을 움켜잡았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던 평인은 민우가 떨고 있음을 느꼈다. 민우는 곧 폭발하려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사람이 죽었어.”

민우의 떨림이 더 심해졌다.

‘아냐.’

평인은 이를 악물었다. 민우의 떨림이 심해진 게 아니라, 그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평인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게 아냐. 정신차려야 해. 이성을 잃으면 안돼… 사실을 직시해야 해.’

그는 천천히 민우의 말을 재구성했다.

‘주어 - 민우가.’
‘목적어 – 사람을.’
‘동사 – 죽였다.’

“사람을 죽였어.”

한 순간이나마 민우의 말을 좋은 쪽으로 들으려 했으나 그는 곧 이성을 되찾았다. 매우 심하게 흔들리는, 냉정하지 못한 이성을.

“어쩔 수 없었어! 제기랄, 나도 여러가지로 노력했다고! 그런데, 그런데…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참을 수가 없었어. 빌어먹을. 죽일 생각은 없었어. 그냥 한대 먹일 생각이었다고, 진짜 그뿐이었어. 그런데… 그런데 넘어지면서, 제기랄, 그 책상은 왜 거기 있었던 거야? 알겠어? 무슨 상황인지? 그 병신이, 그거 한대 맞았다고 넘어진거야. 그래서… 그래서… 내가, 죽인게, 아닌데!”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민우의 말을 들으며, 평인의 머리속은 분주해졌다.

“그래서…”

민우가 그를 올려다 보았다. ‘나보고 어쩌라고?’ 하는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올 뻔 한 것을 간신히 삼켰다.

“앞으로 어떻게 할거야?”
“네가 도와줘야 해. 이대로… 이대로 감옥에 끌려갈 순 없어. 군대에 갖다오는 문제가 아냐. 이대로라면, 난… 난 살인자야. 감옥에서 청춘을 다 썩히고, 그리고 나오면 뭐지? 아무것도 아냐. 가수도, 연예인도… 난 공부를 못했어. 너도 알잖아. 그래서, 그래서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겠다… 하고 싶다, 하는 쪽으로만 열심이었지.”
“그래. 이해해. 하지만, 내가 어떻게…”
“넌 도와줄 수 있어. 아니, 너밖에 없어. 제발, 평인아… 우린, 우린 친구잖아.”

평인은 갑자기 잔인해 지는 자신을 상상했다. ‘웃기지마, 살인자.’ 주먹으로 민우의 얼굴에 한방 시원하게 먹여준다. 그리고는 멋진 대사를 읊는다.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치뤄야지. 말했지, 편법 쓰지 말라고. 정정당당하게 사회를 살란 말이야.’ 그러나, 평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 거기 다니지 않아. 회사에서 잘린셈이야.”
“뭐?”

민우의 얼굴이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평인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게, 낮에 너한테 전화받았을 때… 날 고용하고 있는 선배의 병실이었어. 난 조수였고… 그 선배가 의식불명상태야. 자연히 난 회사랑 더 이상 연결고리가 없어진 셈이라고. 그러니 별 도움이…”
“안된…다고? 너도… 안된다고?”

민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스스로의 손을 먹어치우기라도 할 듯 입 안에 쑤셔넣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되뇌였다.

“아…애…다오? 응? 아… 아애?”

평인은 그 핏발선 눈동자, 절망과 공포와 세상에 대한 분노가 고인 눈동자를 보며 흠칫 물러섰다.

“아냐, 기다려. 그래도… 그래도 거기에 아는 팀장님이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했거든. 거기에 부탁해 볼게. 기다려봐, 어라…”

어둡고, 아무런 인적이 없는 골목에서,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크고 힘은 두 배 쯤 셀, 그리고 반쯤 제정신이 아닌 민우를 앞에 둔 그는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울리지 않기많은 기도했다.

“핸드폰이 어디갔지? 아, 젠장. 집에 두고 왔나 보다.”
“이, 이걸 써.”
“번호를 기억해야 그걸 쓰지. 얼른 집에 가서 전화해볼게.”
“그, 그래도…”
“민우야!”

평인은 다시 한번 민우의 어깨를 잡았다.

“우린 친구지?”
“으… 응.’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민우를 두고, 평인은 재빨리 그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막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흘깃 돌아보니, 민우는 따라나오질 못했는지 어두운 골목만이 거기 있었다. 그는 재빨리 주변을 체크했다. 한동슈퍼 옆, 전봇대와 상가 건물들 사이의 골목길.

숨이 차도록 달려 집까지 뛰어온 그는 어디 갔다왔냐며 묻는 어머니와 여동생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궜다. 두근두근 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핸드폰을 열었다. 번호를 보아하니 광고전화인 모양이었다. 속으로 욕설을 한번 뇌까린 그는 천천히 전화번호를 눌렀다.

1, 1, 2.

‘진정한 친구란, 죄를 덮어주는 게 아니라… 친구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친구야.’

그는 발신 버튼을 눌렀다.

추 먹지도 나의심장은
하 않을거 뛰고있고너
다 면서죽 의심장은꺼
아 이고이 진다사그러
름 유도없 든다생명의
답 이부순 불꽃들이받
다 다붉고 고휘두르고
즐 하얗고 찢고부순다
겁 노랗고 나는즐겁고
다 아프다 너는죽는다


*                *                *                *                *                *                *

“자네가 날 먼저 부를 줄은 생각도 못했어.”

평인도 그건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러나,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명함을 발견했을 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걸었다. 박기자는 나는 듯이 달려와 주었다.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참 안된일이었네… 조의를 표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평인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박기자는 그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오늘이야말로 그걸 알아낼 기회였다. 장례식장에서는 그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지금에야말로 가능할 것 같았다. 평인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가 원하던 것을 들을 기회.

“일단 한 잔 받지.”
“아니요.”

평인은 술잔을 거절했다. 박기자는 허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정신을 흐트리고 싶지 않습니다.”
“술은 사람을 취하게도 하지만… 때론 흐린 정신을 달래기도 하지.”
“그래도 싫습니다.”

박기자는 말없이 자신의 잔만 채웠다. 불판 위에 곱창이 올려졌다. 연홍색 빛깔에 흐물거리는 고깃덩어리가 불판 위에 올려지는 즉시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고 묽은 곱을 토했다. 그러나 그건 분명히 죽어있는 내장조각일 뿐이다.

“좋아. 한잔 사려고 했더니만. 그래, 같이 술 한잔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뭔가? 한 사람의 인생 선배로써가 아니라 기자로써 나를 대하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말해두겠는데, 기자로써의 나는 집요해.”
“제가 특별히 박 기자님이 좋아져서 여기 나온 건 아닙니다. 전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에서, 이용할 수 있는 기자가 필요했으며, 안면이 있는게 당신이었을 뿐입니다. 일 한다고 생각하세요. 저도 그쪽이 편합니다.”

박 기자는 주머니에서 수첩과 연필을 꺼냈다. 녹음기는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좋아. 시작하게.”
“예? 음…”

평인은 한참 입을 다물고 신음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군요. 궁금한 걸 물어오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아. 뭐. 그래. 나는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준비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먼저 전화를 걸었고, 또 날 이용할 생각이었으니 말야.”

그는 곱창이 타기 전에 서둘러 젓가락을 가져갔다. 고소한 냄새는 식욕을 자극했다.

“뭐, 천천히 먹으면서 하지. 어디부터 할까. 그래, 현 심경은 어떤가?”
“심경이요?”

평인은 머리를 숙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

박 기자는 종이에 다음과 같이 적어넣었다. ‘몹시 혼란스러움. 복잡한 감정.’ 그는 특별히 일에 책임감을 느끼거나 하는 성실한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상대를 보지도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만큼 성급하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 깨끗하게 글을 썼고, 온점을 찍고 나서야 다시 평인을 쳐다보았다.

“이를테면, 슬픔이라는 감정이 있겠지?”
“… 예.”
“슬프다. 또 이런 건 어떤가. 공허함, 상실감 같은 건?”

평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아무런 소리 없는 신음.

“특별히 가까운 남매 사이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이차도 있으니 심하게 싸울 일도, 그렇다고 같이 어울릴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랑이는 별로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어요. 평범하게 학교 생활을 했고, 가끔 친구들이랑 늦게 들어오기도 했고, 그러면 부모님게 혼나고, 저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고. 러브레터를 지운다는게 제 하드를 날려먹는 일도 있었고, 저는 화를 냈고 녀석도 화를 냈고… 용돈을 주면 좋아했지만 그리 자주 주지는 않았습니다. 남자친구가 생겼다면서 부모님 몰래 저에게만 알려주기도 했고… 저도 거기에 참견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의 여동생이었습니다. 특별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평범한 여동생.”

박기자는 그 이야기를 간단히 간추렸다. ‘사이좋은 오누이.’

“전 일을 나갔고, 랑이는 학교에 가거나 놀러 나가곤 해서 하루에 얼굴을 보는 시간은 아침에 잠깐, 저녁에 잠깐 정도였습니다. 그 아이가 없다고 해서 특별히 상실감을 느끼거나 할 건… 없습니다. 다만… 다만… 랑이를 생각할 때마다, 그 애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면서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뭔가?”
“분노.”

박 기자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려 애썼지만 고개를 숙인 평인은 좀처럼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분노. 분노라면 대상이 있겠지?”

깍지낀 평인의 손이 빨갛게, 다시 하얗게 물들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았다. ‘나의 분노는 무엇을 향해 치솟는가?’

*                *                *                *                *                *                *

“오빠, 오빠, 이것 좀 봐.”
“뭔데 그래.”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꿈자리가 뒹숭숭 했기 때문에 침대에 누워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때문에 간만에 일찍 일어난 참인데, 동생 평랑이가 호들갑을 떨며 그를 불렀다.

“아침부터 컴퓨터질이냐.”
“이것 좀 보라니까.”

콘택트 렌즈를 착용하지 않았지만 큼직하고 선정적인 빨간 색으로 씌어진 헤드라인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가수 정민우, 소속사 사장 살해’ ‘이미 자백… 충동범죄였다’ ‘본인은 늑대인간병이라 주장’. 기사 전문은 읽기 어려웠지만 내용은 불 보듯 뻔했다. 무엇보다 민우를 잡도록 결정적인 신고를 한 사람은 자신이었으니까.

“안 놀라?”
“응? 아… 이미 어젯밤에 들었어.”
“뭐야 오빠. 왜 이렇게 시큰둥해? 오빠 친구잖아.”

그는 대꾸 없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엄마, 엄마! 이것 좀 봐. 알지? 민우 오빠, 옛날에 오빠 친구였던 사람. 진짜 안됐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소리가 그 모든 소리들을 삼켜버렸다. 차가운 물이 두리뭉실했던 머릿속의 형상을 선명하게 일깨웠다.

민우의 눈. 절망감과 배신감이 교차하는 그의 눈은, 골목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평인의 눈과 정확하게 마주쳤다. 그 먼 거리에서, 그 짙은 어둠 속에서, 민우는 경찰들에게 끌려 가면서도 평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빠 오늘 어디 갈꺼야?”
“응? 왜?”
“아니, 옷을 차려 입으니까.”
“이게 아주 오빠를 날백수로 보고 있어. 나도 바쁘단 말야.”

사실 이른 아침부터 옷을 차려입는 것은 근래 평인의 생활상에 비추어 볼때 드문 일이었다. 일을 갈때도 동생이 촌스러운 쥐색이라고 혹평한 회색 잠바를 대충 걸쳐입고 나가던 처지였으니까. 하도 안 입어 버릇하던 정장을 입자니 목이며 어깨가 답답했다. 그러나 동생에게 한 말 대로, 날백수를 면하려면 옷을 잘 차려 입어야 한다.

“혹 여자라도?”
“그렇다고 해둘까.”
“오, 진짜? 진짜야? 장난 아니고?”

넥타이까지는 너무 오버하는 느낌도 있었지만 어정쩡하게 캐쥬얼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보다 나을 듯도 싶었다.

“여자라기 보다는 꼭 어디 면접보러 가는 것 같은데.”

동생은 쓸데없는 데서 예리했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방글거리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거울에 비쳐보였다. 그는 넥타이의 매듭을 고치며 물었다.

“요샌 그 남자친구랑 데이트 안해?”
“안 그래도 오늘 만나기로 한 걸. 영화 보러 가자던데.”
“그래?”

그는 지갑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 보았다. 한숨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꾹 참으며 그는 만원권 열장을 꺼냈다. 지갑에서 손쉽게 10만원을 꺼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통장이 아닌 현금으로 보수를 받던 그에게는 지갑이 곧 전재산이었다. 그리고 그건 초라할 정도로 얄팍해졌다.

“랑아.”
“응?”
“이거 오늘 놀러가서 써라.”
“나도 돈 있어.”
“가끔 오빠가 용돈도 줘야지. 아니면 예쁜 옷이라도 사 입든가. 선머슴처럼 하고 다니면 남자친구 떨어져나간다.”
“체, 나 정도 외모면 뭘 입어도 괜찮지만…”
“그러면서 돈은 왜 받아가? 도로 줘 그럼.”
“아 남자가 째째하게. 고마워, 잘 쓸게.”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직업 소개소도 들려보고, 평소 잘 안 보던 무가지들도 둘러 보고, 직업을 찾으려면 해 볼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마음이 심란해 며칠 쉬었으면 생각하다가도, 쉬고 있으면 더 심란해 질 것 같아 억지로 집을 나선 길이었다.

‘좋아, 심기일전 하는 거야.’

어차피 해고당한 셈이기도 했지만 삼진 브로커리지 같은 골치 아픈 일은 이제 질색이었다. 그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 일은 어차피 끝난 일이다. 앞으로는 돈은 좀 덜 벌어도 평범하고 경력에 들어갈 만한 일을 하고 싶었다.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녔다. 아침엔 주로 직업소개소를 돌아다녔고 오후엔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 시켜놓고 신문들을 뒤졌다. 조금 눈치가 보이면 피씨방으로 자리를 옮겨 인터넷을 뒤져보기도 했다.

팩스와 이메일로 이력서를 보내고 몇번 전화통화도 했다. 첫술에 배부르겠느냐만은 면접 보러 오라는 실낱같은 희망의 동아줄도 내려오지 않은, 지치는 하루였다. 저녁 일곱시경에 그는 터덜 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서 이메일을 체크해 보면 혹 좋은 소식이 있을지, 한 일주일 정도 찾아보고 별반 그럴듯 한게 없으면 직업소개소에서 소개해준 아르바이트라도 다녀 볼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낯익은 골목길에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뉘엿 뉘엿 져가는 석양이 회색 담벼락을 주홍빛으로 물들인 위에, 경찰차의 빨갛고 파란 경광등 불빛이 섬뜩하게 스친다. 계속, 주기적으로, 반복적으로, 끝없이. 여간해서는 볼 일이 없는 많은 수의 경찰차들, 정복을 입고 분주히 오가는 경찰들. 그 사이로 선명하게 들어오는 노란색 출입금지 폴리스라인.

너무나도 낯선 풍경이었다. 그가 사는 평범하고 조그만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집과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자각하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 경찰이 그를 제지하고 있었고 그는 폴리스 라인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나 이집 살아요!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이봐요!”

그 순간의 기억들은 명료하지 못했다. 마치 잔뜩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기듯, 언뜻언뜻 강렬한 흑색 모노톤의 장면들만이 머리속에 남아 있었다. 호송용의 커다란 경찰 승합차의 문이 열리고, 구속당한 누군가가 집으로부터 끌려나왔다. 경찰이 세 명이나 달라붙어 있고 얼굴과 옷이 온통 피범벅이 된 사내였다.

사내는 평인에게 덤벼들었다. 한 마리 야수처럼 격렬하게 덮쳐왔다. 평인은 넘어졌다. 옆 머리에 충격을 받고 시야가 흔들렸다. 평인의 목을 조여오는 놈의 손은 피에 젖어 미끈미끈했다. 사내의 머리에 흥건한 피가 평인의 몸을 적셨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다시 다음 순간 평인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경찰들은 사내를 억눌렀다. 사나운 짐승을 대하듯이 마비총을 쐈다. 흡혈귀병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쓰는 전기충격요법을 응용하여 만들어진 마비총은 대상의 신경계를 잠시동안 마비시킨다. 사내는 팔다리를 개구리처럼 쭉 뻗고 경련했다. 그의 얼굴 근육들도 멋대로 움직였다. 평인은 사내의 얼굴에서 일그러진 웃음을 발견했다. 흰 이빨을 드러내고, 입가엔 거품을 줄줄 흘리면서. 마비총 때문에 지은 표정이 아니라, 마비총에 얼굴이 뒤틀리면서도 지어낸 웃음이었다.

사내에게 수갑이 채워지고, 호송차량의 구속 벨트가 조여지고 그 문이 닫히고 나서야 평인은 사내가 누군지를 알아차렸다. 민우였다.

머리가 상황을 정리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평인은 경찰의 제지를 무시하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 조각이 밟혔다. 어머니가 아끼던 유리로 된 커피테이블은 산산히 조각나 바닥에 널려있었다.

거실의 소파는 제자리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고 TV는 테이블에서 떨어졌으나 전원 콘센트와 커피테이블의 철제 다리의 덕분에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창문의 커튼이 반쯤 뜯어졌고 식탁 의자들이 굴러다녔다. 경찰들이 집안까지 신고 들어온 발자국들이 방마다 가득했다.

동생은, 랑이는 어디 있는가 하고 그의 눈이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아직 들어왔을 리가 없다. 남자친구랑 놀다 온다고 했으니, 분명 늦을 것이 분명했다. 랑이는 아직 들어오지 않은 것이었다… 그의 이성이 속삭였다. 진실을 외면하지 말라고.

그의 대뇌는 천천히 눈앞의 현상을 받아들였다. 물씬 풍기는 피내음. 바쁘게 오가는 경찰들. 피바다가 된 거실 한바닥에 조용히 드러누워 있는 한 사람. 머리가 길고, 체구가 작고, 노란색 가디건을 걸치고 피바다 속에 잠겨 있었다. 그는 계속 부정했지만 그의 이성적인 사고는 이미 대답을 정해놓고 있었다.

랑이는 죽어 있었다.

*                *                *                *                *                *

“누구를 미워해야 할까요.”

침묵. 웃고 떠들고 술잔을 부딪치고 불판에 고기 익는 소리가 가득한 속에서의 외로운 침묵.

“왜 사람들은 그렇게 이성적이지 못한 것일까요? 랑이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민우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그애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살인을 한 본인을 숨겨 오래도록 죄책감과 경찰의 추적에 떨며 살 바에는, 어차피 잡힐 바였다면 즉시 잡히는 편이 나았을 텐데. 설사 나에 대한 증오가 있더라도, 그 대상을 나로 한정해야 했을 텐데. 왜 그랬을까요?”

평인은 말을 계속했다.

“민우를 놓친 경찰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면서 왜 그렇게 허술했을가요? 살인범을 놓쳤으면, 가장 먼저 저의 신변과 저희 가족의 신변보호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닐까요?  이웃들은 왜 그랬을까요?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는데도 왜 이웃들은 들어가 보지 않았을까요? 하다못해 경찰이라도 빨리 불렀으면 괜찮았을 텐데. 우리집에서 가정폭력이나 부부싸움이 있어왔던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렇게 비명과 소란에 무관심 할 수 있었을까요?”

박 기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탓이다. 평인은 씁쓸하게 내뱉었다.

“아니면 탈주한 살인범에게 문을 열어준 바보같은 랑이를 탓해야 할까요?”

평인은 숨을 골랐다. 깍지를 낀 손에서 힘을 빼자 천천히 혈색이 돌아왔다. 손등에 난 손톱 자국서 피가 배어나왔다. 박 기자는 손수건을 건네었지만 평인은 그것을 받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느릿느릿, 평온한 어조였다.

“저는 그들 중 누구 하나만을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박기자는 쓰던 것을 멈추었다.

“감탄할 따름이네. 이 상황에서도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 하니 말이야.”

평인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성적이지 못한 인간을 싫어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 와서도 이성이 저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지요.”

박 기자의 펜이 멈췄다. 그는 자신이 뭐라고 써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냉철한 척 하는 애송이는, 동생이 무참히 살해당한 이 순간까지도 객관성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렇게 쓰려 하는데, 그의 펜은 그렇게 쓰기를 거부했다. 뭔가가 달랐다.

“그 이성적인 결론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예. 그 어느 누구 하나만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이 세상을 미워하기로 했습니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른 펜은 종이 위에 파란 잉크 점을 남겼다. 잉크에 젖은 종이는 날카로운 펜촉에 쉽사리 찢기운다. 그는 그 페이지를 찢어내어 버리고 새 페이지로 넘어갔다.

“장례식장에서 내가 물은 적이 있지? 뭐 이제와 새삼스레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조문보다도 자네에게서 이슈가 될 만한 것을 좀 더 캐내려고 하는 속마음이 있었거든.”

평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고, 불쾌하다거나 유쾌하다거나 하는 감정의 표시도 아니었다. 박 기자는 마음을 정했다.

“그때 자네는 입을 열지 않았어. 왜지? 그때와 지금 무엇이 달라졌단 말이지?”
“그때는 경황이 없기도 했지만,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석주 선배를 생각해서라도, 박 기자님에게는 얘기할 수 없었지요.”
“석주를 생각해서라.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사흘 전에 삼진 브로커리지에 갔었습니다.”

*                *                *                *                *                *                *

하늘은 화창하고 푸르러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평인은 비가 오면 좀 덜 우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하철 안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그 생각 뿐이었던 그는 마침내 삼진 브로커리지의 빌딩 앞에 도착해서야 날씨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의 직장이었던 빌딩은 전면부가 유리로 뒤덮인, 현대적이고 세련된 형태의 건물이었다. 그는 더욱 우울한 기분을 느꼈다.

그에게 기다리라고 한 사장의 비서가 아름다운 아가씨였고 친절하게 대해주었기에 그는 더더욱 우울해졌다. 그녀가 그를 사십오분쯤 기다리게 한 다음 – 그 사이 평인은 커피를 다섯 잔 비웠고 화장실을 두 번 갔다왔다 – 예쁘게 웃으며 사장님이 바쁘시니 내일 이나 모레쯤 다시 연락해 주겠다고 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우울해질 건덕지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화를 냈다.

“중요한 비즈니스 관련이라고 얘기했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중요성을 모르는 건 아니나 사장님은 다른 일로…”

평인은 흘긋 사장실 쪽을 쳐다보았다. 당연하지만, 이 쪽 업계에서 일을 하는 사장은 스스로의 신변 보호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무술의 고단자인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체구와 외모만으로도 일반인을 압도하는 두 명의 경호인을 평인이 뚫을 수 있는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한번 더 사장님께 전해주시죠. 이건 몹시 중요한 일이라고. 만약 사장님께서 만나주시지 않는다면 의료 4팀이라는 이름이 신문에 오르내릴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평소같았다면, 비서는 계속 웃는 낯으로 거절했을 것이다. 그녀가 월급을 받는 이유의 반 정도는 거기에 있으니까. 삼진 브로커리지의 경리사원에서 사장의 눈에 띄어 비서의 자리에까지 오른 3년 간, 그녀는 별에 별 꼴을 다 보아왔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도 상대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평인은 – 평인의 눈 속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사장실로 들어갔고, 잠시 뒤 다시 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사장은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비서가 자리를 권했지만 평인은 앉지 않았다. 그는 사장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섰다. 사장은 평인과 이야기하기 위해 고개를 드는 대신 등받이를 낮추고는 눕듯이 편한 자세로 바꿨다.

“김평인 씨. 내게 비지니스가 있다고 했는데?”
“그렇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뭔지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동생 분의 일은 몹시유감입니다.”

사장이 그러기를 기대했다고 생각했기에, 평인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서로간에 잘 아는 일이니 서론은 생략하겠습니다. 삼진 브로커리지에 의뢰를 하겠습니다.”
“의뢰라면 저쪽으로 가서 접수를 하십시요. 사장 면담은 그럴 때 쓰는 게 아닐텐데요.”
“그럴 수 없는 사안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 제가 비록 계약직이었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의료 4팀이 맡는 건수는 전부 사장님으로부터 직접 내려온다는 것을요.”
“잘 알고 있군요. 그래서 그 관련 건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관리하고, 문제가 생겨도 내 개인적으로 해결한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그걸 잘 알고 있는데 그 따위로 처신을 해?”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무서운 사람이 있었다. 사장이 그런 사람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데도 상대방을 움츠려들게 하는 사람. 어느새 존대말이 사라졌지만 평인은 애써 침착해졌다. 존대말을 썼다 하더라도 그의 태도에는 어차피 평인에 대해 일말의 존중도 없었다. 평인은 사무적인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우리 회사에서는, 그래, 자네들 같이 공개할 수 없는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이 꽤 있어. 그리고 회사는 그들이 일한 대가로 그런 분야에서 그들을 보호하도록 노력하지. 예를 들면 식물인간이 된 자네 팀장의 뒤를 봐준다던가 하는 경우 말이야. 그리고 사원들에게도 회사를 보호하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지. 그런데 자네는 어땠지? 정민우가 자네를 찾아왔을 때, 경찰에 밀고를 하면서 뭐라고 했나? 삼진 브로커리지에서 일한 전력 때문에 정민우가 찾아와? 그리고 자네 동생 사건에도, 다시 같은 얘기를 해? 경찰에서 당연히 이쪽을 조사했지. 안 그래도 그네들은 정민우를 한번 탈주시킨 사건으로 욕을 한 바가지 뒤집어 쓴 터라, 희생양이 필요했지. 그걸 내 선에서 무마시켜야 했어.”

사장은 으르렁대었다. 그의 인맥이라면 그걸 무마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화를 내는 것이 대화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 쯤은 평인도 알 수 있었다. 사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손해가 있을 거라 판단했다면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퇴직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되었네. 그리고 이제와서 도와달라는 건가?”
“일은 제가 다 하겠습니다. 돈도 드리겠습니다. 3억까지 드릴 수 있습니다.”

3억이라는 숫자는 이전까지의 수고료들을 종합해 고려한 결과 도출할 수 있었던 평인의 최선이었다.

“어떻게?”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 입니다.”

사장은 웃었다. 냉혈한의 웃음이었다.

“신체 건강한 젊은이니 못할 것도 없겠지. 그러나 안돼. 자네가 회사에 입힌 피해 때문이 아니더라도, 경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민우가 늑대인간병에 걸렸었다고 우겨야 해. 그렇지도 않은데 정민우가 탈주에 성공했다고 하는 건 경찰의 수치가 되니까. 적어도 늑대인간의 괴력은 되어야지 탈주할 수 있었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는거야.”
“정민우의 체포 당시 혈액검사 자료, 모발이 급성장하지 않은 점, 그리고 무엇보다 미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저에게 보복을 했다는 것 만으로도 녀석이 늑대인간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늑대인간병에 걸렸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사장은 또다시 웃었다.

“바로 그렇다네. 그리고 자네와 자네 팀장은 바로 그런 증거들을 뒤집으며 지금까지 일을 성공시켜왔지. 그런데 이제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 회사는 지금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셈이 되는데?”
“회사에는 피해가 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자네에게 인생의 교훈을 주지. 거짓말을 하기는 쉽네. 그러나 거짓말을 계속 거짓말로 숨기는 것은 어렵지. 하지만 제일 어려운 것은, 거짓말을 하고 난 뒤 진실을 고백하는 것이야.”
“하지만…!”
“이야기는 끝일세. 미안하군. 약속이 있어서.”

경호원 두 명이 다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 중 한 명이 매우 정중하게 평인을 모셨다. 그리고 평인을 내쫓는 데에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평인이 할 수 있던 유일한 저항은, 사장실의 문을 자신의 손으로 – 쾅 소리가 나게 – 닫는 정도였다.

*                *                *                *                *                *

“증거가 있는가? 삼진 브로커리지가 실질적으로 늑대인간 병 환자가 아닌 사람들을 늑대인간 병 환자라고 주장했다는 그 증거가.”
“자료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법원에 그 자료가 존재하고, 그걸 보는 즉시 어디를 고쳤는지, 어디가 억지인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사실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피해자들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늑대인간병이라는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 이들에 대한 불만은 이미 하늘을 찌를 듯했다. 사회적 논란으로만 끌고 가더라도 충분했다. 특히, 박 기자의 경우는 더더욱 그랬다.

“예를 들어서?”
“자세한 사항은 전부 여기 있습니다. 제가 호르몬 수치를 조작한 내용도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빠져나갈 수 없겠죠. 제가 장본인이니.”
“그러면 처벌을 피할 수 없을 텐데? 물론 자백하는 것이니 정상 참작은 되겠지만…”
“그 정도는 상관 없습니다.”

평인은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박 기자에게 봉투를 건네었다. 못해도 A4용지 백장은 되어 보이는 보고서였다.

“제 기억에 의존한 거라서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겠지만, 법정자료와 대조해보시면 됩니다. 큰 그림은 다 맞으니까요.”

박 기자는 첫 페이지를 넘겼다. 긴 리스트의 목차가 눈에 띈다. 1장. 삼진 브로커리지의 시스템. 2장. 검은 커넥션. 3장. 사건 목록. 그리고 3장 아래에는 낯익은 사람의 이름들이 보인다. 다시 다음 장으로 넘기니, 시작부터 빽빽한 글자들이 그를 반겼다. 포인트 10, 아니 어쩌면 9 정도로 보이는 작은 글씨들은 포장마차의 전구알 아래에서 읽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눈에 가혹했다. 쓸데없이 성실하긴, 하고 중얼거리며 박 기자는 그것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나는 한 사람의 기자로써, 이런 식으로 주어지는 자료는 좋아하지 않아. 내가 질문하고, 대답을 듣고, 혹은 대답을 회피하는 자세라던가 말하는 태도 등에서도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건 정보의 진실성이라던가 유효성을 가늠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글쎄요. 이 일에 대해 자세히 모르시니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전부 적었습니다.”
“참고 자료로 삼겠네. 그러나 몇가지 질문이…”

평인은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박 기자는 말을 멈추고 얼굴을 찌푸렸다. 직접적이지는 않으나 그 노골적인 태도에서 충분히 무례함을 느낄 수 있는 행위였다.

“시간이 늦어서요. 이만 가봐야 될 것 같습니다만.”
“이제 7신데?”
“벌써 7시입니다. 병원에 가 봐야 되서요.”
“병원은 무슨 병원인가?”
“어머니가 입원하셔서.”

박 기자는 그를 잡지 않았다. 잡았다 하더라도 평인은 떨쳐냈을 것이다. 평인은 젓가락에 손도 대지 않았다. 곱창 2인분은 그대로 박 기자의 몫으로 남았다. 평인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더 이상 고기에 손을 대지 못했다. 고기를 먹으려 하면 금새 속이 뒤집히고 구토를 했으니, 곱창이 지글거리며 구워지는 앞에서 그리 오래 있었던 것도 사실 대단한 일이었다.

석양이 내리는 저녁 거리를 걸어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은 크고 세련된 건물이었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연한 녹색이 주를 이루는 인테리어는 흡사 고급 호텔이라도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물론 그런 착각에 빠지는 일은 없다. 인테리어와는 별개로, 하얀 환자복을 입은 이들이 어딜 가든 눈에 띄었으니 말이다.

실성한 사람, 미친 사람, 난폭한 사람, 우스운 사람, 조용한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병원 밖의 사람들로부터 환자라는 진단을 받고 들어온 사람들이다. 평인의 어머니도 그 중 304호실이라는 작은 병실에서 다른 세 사람과 함께 누워 있었다. 병실의 제일 끝 창가에 앉은 사람은 오래된 라디오를 켜 놓고 있었다. 천국으로의 계단을 노래하는 슬픈 목소리가 전자기타와 드럼의 신경 거슬리는 화음에 감겨든다. 다가가보니 라디오의 주인인 환자는 잠들어 있었다. 평인은 라디오의 전원을 내렸다.

“어머니, 저 왔어요.”

평인의 어머니는 눈을 뜨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밥은 잘 드셨어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여섯시간에 한 번씩 발작을 일으켰다. 발작을 잠재우기 위해 신경안정제를 투여하면 그녀는 조용해졌다. 지금 처럼,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평인은 퇴원하고 어디 시골에 내려가는게 어떨까 하고 물어봤다. 의사는 약물투여량을 줄여가며 경과를 지켜보자고 말했다. 평인은 그러라고 했다.

“많이 먹지 않으면 기운이 나질 않아요.”

그는 어머니의 손을 쥐었다. 어머니는 그의 손을 잡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다. 평인에게는 고통스런 시간이다. 어머니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플 정도로 손을 조여온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어머니가 잠들 때 까지 인내했다.

신경안정제의 덕분인지, 어머니는 한번 잠들면 오래오래 잤다. 평인은 어머니가 잠들고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리다 일어났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마지막으로 버스를 타고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평인이 병원에서 돌아올 때 쯤이면 집은 어둡다.  유리가 깨져 있고 가구가 흐트러지고 신발 자국이 어지러운 그대로다. 그는 신발도 벗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 기사들을 읽다보면 시간은 금방 갔다. 취침은 새벽 두 시쯤에 했다. 어머니가 깨기 전에 병워에 가 있으려 하더라도 아침 여덟 시 쯤 일어나면 넉넉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며칠 되었다. 전화 했더니 집에 들어올 엄두가 나지 않아 모텔을 전전한다고 하였다. 평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봐도 밥을 차려먹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은 컵라면, 밤참은 냉동만두로 적당히 때우는 것이 편했다. 아무도 평인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 다시 병원을 나가고, 어머니의 곁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점심 쯤 나와 간단히 요기를 하고, 근처의 피씨방에서 시간을 때우다 저녁에 들어갔다. 그리고 집에 가는, 그런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는 하루에 인터넷 뉴스를 체크하는데 여덟 시간씩 할애했다. 여섯 시간 정도를 취침하는데 쓰고, 그 외 밥 먹는 등의 잡다한 일에 두시간 정도를 소모한다고 볼때 그의 하루 중 나머지 여덟 시간은 다시 신문과 뉴스에 집중되어 있었다.

박기자를 만나고 일주일 쯤 되었을 때 그는 하나의 뉴스를 접하였다. 더 이상 1면에 나오지도 않고 헤드라인도 조그마한 기사였다. ‘정민우, 집행유예… 병원에서 보호감찰 하기로.’ 평인은 그날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그는 밤을 새어가며 집을 청소했다. 깨진 유리를 쓸어 담고 가구들을 제 자리로 옮겼다. 경찰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도, 핏자국도 모두 지웠다. 평소 신경도 쓰지 않던 TV위의 먼지도 닦아내었고 구석 구석을 쓸고 닦았다.

그는 평랑이의 방도 정리했다. 옷가지들은 모두 개어 옷장에 넣었고 침대도 정리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공부했던 책들은 차곡차곡 책장에 넣었고 색연필과 볼펜은 연필꽂이에 넣었다. 핸드백들은 옷장 오른쪽 구석에, 책가방은 책상 네 번째 서랍에 넣었고 커다란 곰인형은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안방과 부엌을 마저 치운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그 자신의 방에는 별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책상 맨 윗 서랍에서 갈색 봉투를 꺼내 품에 넣은 그는 이 집으로 이사올 때 쓰던 박스를 가져와 책상 위의 모든 것을 그 안에 쓸어 담았다. 박스를 테이프로 봉해 책상 밑에 넣고 방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옷가지들을 뭉쳐 침대 밑에 쑤셔박았다.

그는 현관의 신발들을 가지런하게 놓아 마무리를 짓고는 밖으로 나섰다. 병원은 문을 열었지만 그렇게 이른 새벽에는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병실 밖에 앉아 기다렸다. 아홉시가 되어서야 면회가 허락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그는 다시 어머니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잘 잤어요?”

어머니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입을 열었다.

“넌 잘 못잔 모양이구나. 피곤해 보이는데…”

평인은 잠시 말을 잊었다. 사건이 발생하고 근 2주만에 처음이었다. 어머니가 정상적인 언어를 구사한 것은.

“얼굴도 야위었고… 밥은 잘 먹는 거니?’
“네.”
“그래… 내가 빨리 일어나야지.”
“그러려면 밥을 잘 드셔야죠. 어제처럼 조금씩만 잡수시면 안되요.”
“그래… 어머, 인아. 우니?”

그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랑이는 이제 없다. 부모님에게 남은 자식은 평인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없어질 경우를 생각했다. 자신이 일상에서 벗어났을 때를 생각했다.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그 길을 가면서, 어머니는 어떤 심정이 될까. 혹 다시 충격을 받아 쓰러지시진 않을까. 정상적으로 살아나가실 수 있을까.

“아하하. 좀 이상한데.”

평인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저 잠깐 나갔다 올께요. 창피하게 이게 뭐람…”

평인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의 그의 모습은 우스웠다. 씻지 않아 부스스한 머리에 깎지 않은 수염이 시커멓다. 초췌한 얼굴에 눈이 벌개져 우는 모습이 정말 못견딜 정도로 우스웠다. 그는 물을 틀고 세수했다.

‘감정을 씻어내자.’

한번 찬 물을 끼얹을 때마다 머리속이 차가워진다.

‘약한 마음을 버리자. 그래, 지금 당장 어머니에게 큰 충격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평생 가슴속에 앙금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럴 순 없다. 이 사회에게 틀리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도록.”

마지막에 와서는 입밖에 내어 말했다. 소변기 앞에서 일을 보던 중년 남자가 흘끗 그를 돌아봤다. 그는 매고온 작은 가방에서 몇가지 물건을 꺼냈다. 휴대용 면도기와 정장이었다. 십여분 뒤 평인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복도로 돌아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어머니의 병실 앞을 그냥 스쳐지나갔다.

‘지금 들어가면 다시 마음이 약해질 테니까. 깨끗이 끝내자.’

평인은 특수 병동으로 향했다. 특수 병동 앞을 지키는 경비원들은 평인을 보고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평인은 지금 말끔해진 모습으로 정장을 입고 옆구리엔 서류봉투를 끼고 있었다. 그는 특수 병동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이동해, 드디어 209호실에 다가섰다. 평인은 204호실 앞에서 멈춰섰다. 209호실의 문 앞에는 의자가 놓여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재판부의 판결이 끝난 즉시 민우는 늑대인간 병 환자로 분류되어 병원에서 치료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수의 신분은 아니지만, 사법 경찰 한 명이 그를 감시하게 되어 있었다. 치료가 완료되기 전에 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지만, 사실 원한을 갖고 찾아오는 자들을 막기 위해서가 진짜 이유였다.

허나 평인은 사복 경찰들도 점심을 먹으러 갈 때나 화장실을 갈 때 자리를 비운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209호실 앞으로 다가갔다. 막 문 손잡이에 손을 대었을 때, 복도 저쪽의 간호사가 소리쳤다.

“뭐하세요?”

평인은 잠시 굳었지만, 곧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그는 문 가까이서 목소리를 내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는 간호사에게 걸어가, 조용조용히 말했다. 경찰로부터 절대 민우가 어디 나가지 못하게 하고, 누가 들어가는 것도 막으라는 부탁을 받았던 간호사였지만, 낯익은 민우가 들어가는 것은 막지 않았다. 들여보내도 괜찮냐는 신참 간호사의 질문에 그녀는 뻐기듯이 말했다.

“여기서 일하다 보면 저런 사람 많이 보거든. 특히 저 사람은 자주 오는 사람이야.”
“네?”
“으이그. 소위 말하는 브로커라고 브로커.”

이제는 더 이상 그 직함으로 불리지 않았지만, 평인은 만족했다. 그는 병실에 들어가는 즉시 문을 잠갔다.

“엉? 누구요?”

침대 커튼 너머에서 민우가 말했다. 평인은 대답하기 전에 먼저 방 안을 훑어봤다. 병실에 흔히 보이는 링겔병 같은 것은 없었다.  꽃병이 하나, 그 밖에 꽃다발 서너 개와 탁상시계가 올려진 작은 테이블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미니 냉장고가 있었다. 침대 커튼 자락 밑으로 슬리퍼 한 짝이 빠져나와 있었다.

그는 서류 봉투 안의 내용물을 꺼내 손에 쥐었다. 이제 봉투는 필요 없었다.

“너…”
“움직이지마.”

평인의 얼굴을 본 민우는 신음을 흘렸다. 어쩌면 그의 손에 들린 것 때문일 수도 있었다. 흡혈귀 병 때문에 사회에 공포가 만연하던 당시, 호신무기 업체는 큰 호황을 맞았다. 굳에 몸에 대지 않아도, 약간 떨어져서 전기충격을 가할 수 있는 새로운 전기총은 그 당시 나온 히트상품이었다.

“그런 걸 갖고…”

간호사 호출 버튼으로 민우의 손이 움직였다. 평인은 다시 한번 말했다.

“움직이지 마. 이거 쏘면 너 죽어. 알고 있지? 옛 용산 뒷골목에 가면 이런거 불법개조 해 준 다는 거.”

사실이었다. 평인은 용산에 가서 전기총을 개조해왔다. 단순히 마비가 될 정도로의 충격을 주던 전기총은, 만원짜리 열 장의 힘 아래에 척추신경계에 막대한 손상을 입히고 심장마비를 불러일으키는 무시무시한 물건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 번에 전류를 모두 방전시키는 것으로, 한번 쏘면 더 이상 못쓰게 되지만 말이다. 그리고 민우도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용산의 불법 개조 골목을 민우가 소개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평인은 총을 겨눈 채로 대답했다.

“무슨 일일 것 같아?”

민우는 볼을 씰룩거렸다.

“복수냐?”
“복수? 그런 짓은 하지 않아. 이건 죄에 당연히 따라야 하는 심판이야.”
“지랄하지마. 넌 단지 복수심에 미친 거야. 평소 잘난 듯 나불거리던 네 수준도 겨우 그 정도지.”

평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대답해. 왜 랑이였지?”
“뭐?”
“왜 랑이었냐고 묻잖아!”

평인은 거칠게 다가섰다. 총구가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민우는 천천히 양 손을들어올렸다.

“그건 내가 아니었어. 알잖아. 늑대인간 병.”
“아냐! 늑대인간 병이었다고? 넌 정확히 우리 집을 찾아왔어. 늑대인간 병이라면 그럴 수 없어. 이지를 상실하고 주변을 공격해야 해. 네가 탈출한 지점에서 우리집 까지, 너는 대중교통까지 이용해가며 왔어. 그게 말이 돼?”
“글쎄. 그 때는 늑대인간병이 가라앉았던 모양이야.”
“웃기지마! 늑대인간병이 스스로 가라앉는 건 몸 안의 혈당치가 떨어지거나 만족할만큼 다 때려부수고 난 뒤야. 넌 그 중 어느쪽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이성을 가졌다는 거냐?”
“나야 전문가가 아니니까 모르겠지만, 경찰과 법원과 병원은 그럴 수 있다는 모양이야.”

쏴버릴까? 쏴버릴까? 간단한 동작으로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평인이 살짝 손가락을 당기면 끝이었다.

“말해!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어. 너는 분명 정상이었어. 단지 늑대인간병 처럼 보이려고 행동했을 뿐이야. 단지 그걸 위해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랑이를 죽였던 거야. 그렇지? 여기서 자백하면 목숨은 살려주겠어. 그렇지 않으면 넌 죽어.”
“멍청아. 협박 받을 때의 진술은 아무런 효력이 없어. 나도 그 정도는 알거든?”
“닥쳐!”
“닥치면 말을 못하는데?”

평인은 거의 쏠 뻔했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결련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인내했다.

“더 이상 허튼소리는 용납하지 않아. 말해.”
“이런 건 어떨까. 믿고 있던 친구의 배신에 너무나도 큰 상처를 받은 나는, 늑대인간이 된 와중에도 그 집을 떠올리며 찾아갔다고 하는 것은? 그런데 운 나쁜 그녀가 네 대신 당했다는 쪽은?”
“허튼 소리 작작 하랬잖아!”
“글쎄. 난 늑대인간 병에 걸려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기억을 못하니, 객관적으로 상황을 재구성 해 보는 거야. 보라구. 내가 아무리 널 증오했어도, 제 정신이었으면 평랑이를 죽였을 리 없잖아? 나중에 제 정신이 돌와와서, 난 크게 후회했다고. 너무나도 슬프고 절망스럽고, 나 자신이 죽일만큼 미워서, 울면서 통곡했지. 연기였을 리가 없겠지? 난 시트콤에서도 연기 더럽게 못한다고 혹평을 받았으니 말야.”

철컥, 철컥철컥. 문 손잡이가 요란하게 흔들리더니, 곧 쿵쿵대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누구야! 문 열어!”
“빨리 말해! 넌 제정신이었다고, 늑대인간 병이 아니었다고! 죗값을 치루겠다고 말야! 시간이 없어. 열 세겠어. 하나, 둘…”
“살인자가 되고 싶어? 병신아, 넌 못 쏴. 너 같이 말 많고 생각 많은 새끼는 절대 못해.”
“셋, 넷, 다섯, 여섯…”
“내가 겁 먹을 줄 알아? 씨발 겁 먹을 것 같았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이 개새끼야. 쏴봐, 쏴보라고! 겁쟁이 새끼!”
“일곱, 여덟…”

철커덕. 간호사가 열쇠를 갖고 뛰어온 모양인지 잠금장치가 풀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평인은 이를 악물었다. 민우는 범죄자다. 살인자, 그것도 두 명을 죽인 살인자다. 첫 번째 범인은 우발적이었지만, 두 번째는 의도적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늑대인간병이라 주장하기 위해 잔인하고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죽어도 싸다. 죽어도 싸다. 죽어도 싸다. 사형제가 있었으면 사형, 없었어도 무기징역.

“아홉 열!”

경찰이 문을 열어젖히고, 민우가 몸을 옆으로 굴리고, 평인이 방아쇠를 당기는 그 모든 일이 동시에 벌어졌다. 민우의 몸부림은 필사적이었지만 총구를 떠난 발사체는 가느다란 전선을 매달고 민우의 목덜미에 꽂혔다. 그리고, 밀리초보다도 작은 단위의 순간에 강력한 전류가 민우의 심장을 멈춰세워야 했다.

다행, 혹은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용산의 불법개조자는 그 책임을 성실히 다하지 않았다. 다섯 개에 한 개 정도 나오는 재수없는 불량품이 안타깝게도 평인의 손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꼼짝마!”

경찰의 몸은 육중했고 평인은 그 밑에 깔려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사색이 되어 숨을 멈췄던 민우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움직여 목 피부에 꽂힌 발사체를 떼어냈다. 멍한 눈으로 그 발사체를 바라보던 민우의 입가가 씰룩였다.

“하, 아하하, 하하…”

평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웃지마 웃지마 웃지마 웃지마 웃지마 웃지마 웃지마 웃지마.

“웃지마아앍 개씹쌔끼야!”

죽여버리고 싶었다. 저 개새끼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는 그 순간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오로지 단 하나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스스로의 맥박 소리가 너무 커 그의 귀는 다른 소리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들이받았다. 경찰을. 쥐었다. 의자를. 휘둘렀다. 의자를.

의자는 철제의 접이식으로 들고 휘두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첫 번째는 헛스윙이었지만 두 번째는 정확했다. 민우가 나동그라지고 경찰이 나동그라졌다. 유리창이 부서져 조각이 비산했다. 민우의 머리카락을 쥐고 그 머리를 끌어올려 걷어찼다. 그 목을 짓밟고 몇번이고 얼굴을 후려갈겼다. 손을 세워 그 눈을 후볐다. 비명과 함께 나뒹구는 서슬에 밀려났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가공할 폭력 앞에 세계는 침묵했다. 날카로운 파열음도, 둔탁한 파육음도, 째지는 비명도 모두 평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소리, 너는 어디에 있느냐. 빛, 너는 어디에 있느냐. 그는 장님이었고 귀머거리였다. 터무니없는 폭풍에 휘말린 외로운 낙엽이었다. 그는 팔을 휘둘렀고 다리를 휘둘렀지만 온전한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 것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는 유리병을 휘둘렀다. 꽃이 허공을 날았다. 유리 조각과 핏방울이 어여쁘게 빛났다. 그는 그 어둠 속의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빛은 날카로웠다. 빛은 그에게도 피를 요구했다. 평인은 그 고통을 울며 그러쥐었다.

왜 웃어 이 개새끼야. 왜 웃냐고 이 개새끼야!

배를 가르고 내장을 헤집어도 민우의 시체는 대답하지 않았다. 독한 놈, 지독한 놈이었다. 평인은 그 심장을 터트려도 놈이 입을 열지 않을까 궁금했지만 좀처럼 가슴을 들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입 안에 유리 조각을 한계까지 쑤셔 넣었다. 놀랍게도, 박살난 유리병의 거의 모든 조각들이 그 입 안에 들어갔다. 그래도, 민우의 시체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쓰러진 경찰도, 실성하여 비명을 지르는 간호사도, 질린 표정으로 총을 겨누는 경찰들도 – 그들은 입을 벙긋거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평인은 답답했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도무지 이성이란게 없는 존재들이었다.

대화가 없는 고독한 세계에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아우우우우우우우우 –
아우 아우 –
아우우우우우우 –





*                *                *                *                *                *

박 기자는 기사 초안을 송고했다. 에드와 알이 빠진 KISSER는 KISS라는 새 이름으로 앨범을 냈다. 메인 보컬과 랩퍼가 없어도 아이돌 그룹은 어쨌든 연명했다. 그는 KISS가 다음 앨범이 나오기 전에 새 멤버를 영입할 것이라는 추측성 기사를 썼다.

삼진 브로커리지에서 거액을 받는 대가로 평인의 보고서를 넘긴 우리일보는 평인이 병원에서 난동을 부린 사건이 일어나자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대로 보고서를 기사화했다면 대박 특종을 냈을 것인데,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다는 게 사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그 특종을 물어왔던 박 기자는 이후 우리일보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게 되어 편집장도 그의 무리한 기사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들은 박 기자의 눈치를 보았다. 전전날 술자리에서 고까운 소리를 하는 후배 기자를 머리로 받아버린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박 기자는 계속해서 자신이 원본을 갖고 있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것 만으로도 그는 무적이었다.

파일 전송이 진행되는 도중 지루해진 박 기자는 TV를 틀었다. 어디의 시사 프로건 늑대인간 병을 다루느라 여념이 없었다. 재밌는 오락 프로들도 늑대인간 병 특별 방송을 하느라 바쁘다.

“저는 늑대인간 병이 전염성이 있다고 추측합니다. 예를 들면 얼마전의 사건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그러나 늑대인간 병이 반드시 바이러스성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정신병 환자들의 주변 인물들 역시 비슷한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병신같은 것들, 똥을 싸라 똥을 싸.”

박 기자는 신경질적으로 리모컨을 내던졌다. TV 스탠드에 부딪친 리모컨이 부서지며 건전지가 튀어나왔다. 베란다로 나가자 차가운 밤 공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그는 란닝구와 팬티 차림으로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질색하던 마누라는 딸내미를 데리고 친정에 가버렸다. 평인의 보고서를 삼진 브로커리지에 뺏긴 그날 박 기자는 술을 퍼마시고 들어왔고 그날은 아내의 생일이었다.

그는 왠지 힘껏 소리지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를 제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자신을 멈출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만월의 달이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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