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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인형 야상곡

2008.07.26 00:4307.26

littlesasm@naver.com―― chapter #0.  기도[prayer]


오늘 괜히 어둠이 무섭다고 말하면서 네 옷소매를 붙잡고
내가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은
부드럽고 상냥하고 천사 같은
너의 그 역겨운 낙천 따위가 아니라
오직 단 한마디의 욕뿐이었어.
착하고 순결한 그대.
당신이 그 아름다운 이마를 증오로 찌푸리면서
끔찍하고도 잔인한 욕지기를
질펀하게 쏟아주길 바라는 것은
나의 잔혹한 이기심이었을까.
그랬다면 나는 구원받을 수 있었을 텐데

― 아멘.






―― chapter #1. 리베라 메 [Libera Me]




서늘하다.

학교의 음악실은 늘 이렇다. 거의 뚜껑이 닫혀 있다시피 하는 피아노도, 어두운 회녹색 커튼이 묵직하게 걸린 긴 창틀도, 모두 서늘한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다. 가만히 검은 적요 속에 몸을 담가 본다. 먼지 쌓인 그랜드 피아노 위에 뺨을 대자 냉기가 확 끼쳐 올라온다.

눈을 감는다.

들리지 않는 음악 소리.

그 아이의 웃음소리.

차가운 감촉의 뺨.

눈동자.




이미,  

사랑이란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와 버렸다.









그 기억의 각인은 너무도 강렬해서, 나는 이전까지 내가 겪어왔던 모든 일들을 전부 뇌리 속에서 지워버렸다. 덕분에 내가 태어나자마자 처음으로 겪은 일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의 목소리나 요람 위에서 돌아가는 장난감 비행기가 아닌, 감각을 마비시키는 진한 피 냄새였다. 기억한다. 온 몸의 피가 다 빠져버린 듯이 창백한 얼굴로 새빨간 피를 뚝뚝 떨구며 우리 집 마당에 서 있던 다섯 살짜리 사내아이. 그것은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접한 옆집 외동아들의 ‘자살극’이었고, 얼마 안 가 우리는 그것이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며 하물며 처음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가 대기업의 상무인데다 국회위원과 줄이 닿아있는 정계의 거물이며, 아내가 아들을 낳다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현재의 아내와 재혼하여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는 이야기는 이미 동네 어귀에 싸하게 퍼져 있는 소문이었다. 그들의 아들인 서휘는 여러 모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아이였다. 이사 온 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아 무려 두 번이나 ‘자살극’을 벌였다는 그 기괴한 정신병 증세도 그렇지만, 정신병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천사 같은 생김새가 주목의 주요원인이 되었다.

개인 미용사의 손을 거친 곱슬곱슬한 머리스타일과 꼬마신사처럼 보이는 세련된 옷차림, 어린아이답지 않게 묘한 색기를 풍기는 이 소년은 항상 자해를 못하도록 묶어놓은 벙어리장갑과 금속밴드를 차고 다녔다.

깜박일 때마다 커다란 눈 밑에 그림자가 질 만큼의 긴 속눈썹과 쓰다듬고 싶도록 새하얗고 뽀얀 뺨, 갓 피어난 꽃망울처럼 불그스름한 입술. 만약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태어날 때부터 관능의 매혹을 체득하고 있었던 듯한 요염한 어린아이. 나의 부모님도, 이웃어른들도, 우리 집에 찾아왔다가 나와 함께 있는 서휘를 본 손님들도 모두 이토록이나 예쁜 남자애는 처음 보았다며 감탄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 최초의 기억을 물들인 그 새빨간 핏방울은, 그 뒤 거의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세상을 끔찍하도록 채색하게 된다. 그리고 일곱 살의 어느 날, 친척집에서 돌아오던 중 부주의한 트럭에 치이려는 나 대신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서휘는 단 한 번도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짓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가 어째서 자해에 대한 욕망을 억누를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자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그 어린 나이에 벌써 스스로를 상처 입힐 정도로 참혹한 내면의 심연을 가진 어린 소년은 언제부터인가 자기 자신의 손으로 등 뒤에 있는 태엽을 감기 시작했다.

끼익끼이익, 침묵 속에서 고요히 태엽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눈을 뜨고, 달빛 속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인형의 눈을 바라본다. 인형은 푸르게 웃으며 나를 향해 말을 건다. 이미 흘릴 피 따위는 모두 메말라 버렸다는 듯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소를 지으면서.







“――정말 어쩔 수가 없다니까.”

서휘가 이렇게 말하자 새엄마는 아버지 몫의 밥을 퍼다 말고 소리 내어 웃었다.

“진서는 매일 이런다니까. 툭하면 멍하니, 정신은 딴 데 가 있고. 이래갖고 어떻게 학교에 가서 공부나 할까 몰라. 서휘가 잘 챙겨주고 있지?”

“그럼요. 아줌마. 저한테 다 맡겨두세요. 전 진서 오빠나 다름없으니까.”

“오빠 좋아하시네.”

서휘가 능숙한 어조로 대꾸하자 내 입에선 자연스럽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새엄마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크게 웃고, 세현이는 식탁 아래에서 다리를 흔들며 숟가락을 오물거리고 있다.

“중간고사는 언제 보느냐고 물었다. 아침부터 무슨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고 있어?”

아버지가 식탁머리에서 가볍게 타박을 주신다. 나는 대꾸할 말이 부족하여 잠자코 잼을 바른 빵을 입에 물었다. 그 말에 답한 것은 서휘였다.

“조느라 그랬겠죠, 뭐. 어젯밤에도 늦게까지 안 자고 있었던 모양인데.”

“또오? 진서야. 내가 너무 늦게까지 책보고 있지 말라고 했지? 책도 좋지만 건강 생각을 해야지. 그러니까 자꾸 시력도 나빠지고, 몸도 안 좋아지고 그러는 거잖아. 작년에 시험 성적 떨어진 것도 잠이 부족해서 집중력이 떨어진 것 때문 아니야?”

새엄마가 이렇게 거들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셨다.

“내년엔 고3이다. 좀 더 집중해야지.”

“네.”

나는 짧게 대답하곤 우유를 마셨다.

평소와 똑같은, 여느 날의 아침 풍경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서휘는 자기 집보다는 우리 집에 머물고 있을 때가 더 많았고, 사춘기 이전까지는 매일 우리 집, 내 침대 위에서 사이좋은 남매처럼 붙어서 잤다. 열두 살 때 새엄마가 낳은 배다른 남동생 세현이보다 오히려 서휘가 더 피를 나눈 친형제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열여덟 살. 그 나이의 사내아이라면 으레 찾아오는 여드름이나 체형상의 불균형적인 변화, 즉 어릴 때 아무리 귀여웠더라도 그 나이 쯤 되면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징그럽게 변해버리고 마는 보통 아이들 사이에서, 서휘는 놀랍도록 어릴 때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자라났다.

군살 하나 없는 탄력 있는 몸매와 우유처럼 보드라운 살결, 까맣게 반짝이는 눈동자와 미소가 감도는 입술은, 남자든 여자든 연령 구별 상관없이 절로 멍하니 눈길을 멎게 하는 고혹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번화가에 나가면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스카웃 제의를 받았고, 학교 근방뿐만이 아니라 인근 지역구에 걸쳐 서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유명했다.

하지만 이런 녀석이 어째서 그렇게도 인기가 좋은 걸까―――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나뿐일 거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녀석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빵을 깨작거리며 힐끔 눈을 들어 맞은편에 앉은 녀석을 쳐다본다. 서휘는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매력적이고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우리 집의 아침 식탁을 장식하고 있다. 새엄마가 녀석의 눈웃음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깨우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장점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 사이에 섞여들 수 있는가. 그것이 그가 나이를 먹으면서 터득한 여러 가지 비법 중의 하나였다.

“이러다 늦겠다. 이제 얼른 일어나렴. 숙제 같은 건 잘 챙겼지?”

새엄마는 세현이가 턱에 흘린 빵조각들을 떼어 자기 입에 넣으면서 안 해도 될 말을 한다.

“다녀오겠습니다.”

서휘가 나대신 싹싹하게 인사를 한다. 세현이는 티셔츠에 잼 얼룩을 묻힌 채 신발을 신는 내 소매를 잡아당긴다.

“누나, 언제 와? 응? 언제 오꺼야?”

나는 세현이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속삭여준다.

“세현이 점심 다 먹고 저녁 먹기 전에 착하게 말 잘 듣고 있으면 누나 돌아올게. 말썽 피우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

“웅! 누나! 얼릉 와! 아찌? 얼릉!”

“형아도 누나랑 같이 ‘얼릉’ 돌아올게, 세현아. 집 잘 지키고 있어?”

서휘는 남자들만의 인사방법이라고 가르쳐준 주먹 부딪치기를 세현이와 나눈 후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씩 웃는다.

현관 밖으로 나오자 나는 서휘를 쳐다보지 않은 채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에도 집에 안 들어갔지? 내가 새벽까지 책 보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집밖에서 불빛이 보였거든.”

서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잘하는 짓이다. 그렇게 외박을 밥 먹듯 해도, 아저씨가 뭐라 안 하셔? 끼니는 잘 때우고 다니는 거야?”

“그럭저럭. 보통은 여자가 사주거나, 운이 좋으면 직접 요리해주니까.”

서휘가 셔츠 안에, 열두 살 때 잔 여자가 선물한 전갈좌의 목걸이와, 열다섯 살 때 어깨 죽지에 새긴 천사 날개의 문신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 또래 사내애들이 흔히 그러듯, 욕구불만으로 인해 욕정에 가득 찬 얼굴이 아닌, 창녀처럼 색정적이고 음란한 유혹의 언어를 미소 속에 내포하고 있다는 것 또한 나는 알고 있다.

그는 세포 하나하나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유전자로 만들어진 인간처럼 보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성인 여자와 섹스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향수 냄새를 풍기며 내 침대로 숨어 들어왔고, 마치 조난의 바다에 던져진 구명보트나 되는 듯이 나를 꽉 끌어안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소름 끼칠 만큼 똑똑한 아이였기에 조금이라도 낌새가 들킬라치면 깨끗하게 일을 처리하고 티 없이 순진무구한 아이가 되어 부모님 앞에서 웃었다.

나는 내가, 서휘에게 있어서 성별의 구별 없이 순수한, 형제도 아니고 타인도 아닌 중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성인 여자와 밀도 깊은 연애를 나누는 그가 나처럼 성적 매력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여자아이에게 욕망을 느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춘기 때에도, 그 이후에도 그는 같은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단 한 번도 내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가장 다행스럽고도 행복한 결과가 되었다. 만약 서휘와 내가 서로를 안게 되었더라면, ‘피를 나누지 않은 쌍둥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미묘하고도 독특한 관계는 유리처럼 산산이 파열되어 버렸을 터이다.  

나는 그를 이해했고, 그는 나를 이해했다.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 표정 없이, 핏방울을 떨어뜨리며 마당 위에 서 있던 그 소년은, 나의 최초의 기억을 잠식하였듯이 이후의 나의 삶을 지배해나가기 시작하였다.









학교는 감옥과 마찬가지이고, 권력은 그 뿌리에서부터 아이들을 지배해나가게 된다. 동성애자였던 푸코가 자신의 불안정한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 구축한 이론이 아니더라도, 분침과 시침에 맞추어 획일적으로 흘러가는 학교는 이미 내게 감방이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미션스쿨인지라 일주일에 한 번씩 강당에 가서 십자가 아래 기도를 강요받아야 하는 것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고, 기독교 수업 시간 때 억지로 읽어야 하는 성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형식의 전도가 나 같은 아이를 더욱 무신론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는 것을, 학교의 권력자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숨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한 강당 위에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라든가, 맑은 합창 소리 같은 건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것 중의 하나였다. 또 기도를 마친 후 몰래 빠져나와 강당 건물의 뒷산에서 피우는 담배 한 대도 꽤 괜찮았다.

지배받고 싶지 않다면 권력이 주는 모든 이득을 거절하고, 타락해 버리면 되는 것인가? 그러나 그런 거창한 이상주의자 또한 아니었던 탓에 나는 어중간하게 열등생과 우등생 사이를 넘나드는 평범한 방식을 선택했다. 어쨌거나 선생들은 성적만 잘 나온다면 불필요한 터치는 하지 않으니까. 몸이 약하다는 것을 핑계로 수업 시간에 양호실에 가서 누워 있거나 수시로 땡땡이를 쳐도 의심 받지 않으니 편리하다. 이런 나에 비해 서휘는 단 한 치의 오점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로서 진정한 팔방미인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학생이었다. 내가 성적은 좋지만 약간은 허술하고 불안해 보이는 학생이었다면, 서휘는 어느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완벽한 모범생의 전형이었다. 이러니 선생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얘기다. 고양이처럼 날렵하고 악마처럼 교묘한 그만의 눈속임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었다.

때문에 순진한 여학생들은 얘기만으로도 벌써 얼굴이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모르며 나를 향해 이런 말들을 주워섬기게 되는 것이다.

“저기, 진서야……서휘가 재벌 여자랑 사귄다는 게 정말이니? 지난번에 학교 근처에서 번쩍번쩍한 자가용을 타고 여자랑 가는 걸 누가 봤다는데.”

“아니, 대학생이랑 사귄다는 거 아니었어? 모델 같은 여자였다는데. 남자애들 말로는, 웬만한 탤런트들 저리가라였대.”

나는 호기심과 질투심에 사로잡힌 여자애들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툭 한 마디 내뱉어준다.

“둘 다 맞아. 하지만 지금은 다른 여자랑 사귀는 것 같던데.”

“어머나, 역시!”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여자아이들은 신음 섞인 비명을 내지르며 깔깔 웃어댄다. 그들에게 있어 서휘는 또래의 멋진 동급생이라기보다는, 뭔가 한 차원 높은 다른 세계의 남자아이로 비춰지는 모양이다. 그의 아버지에 관한 소문 또한 그것을 한층 가미시키는데 적절한 양념이 되어준다.

여자아이들은 그런 면에 있어서 매우 예민한 촉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소꿉친구라는 이유로 다른 반인데도 불구하고 그와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하는 나를 향해 질투심을 내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 흔한 린치를 당한 적도 없고, 이렇다 할 따돌림을 당해본 적도 없다. 서휘와 함께 자라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은 “어쩜, 너희들은 그렇게 똑같니”라는 감탄사였다.

우리는 닮았다, 어찌 보면 좀 지나칠 만큼.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 실제 이란성 쌍둥이조차도 우리만큼 서로를 닮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렸을 때는 그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자라면서, 누가 그것을 먼저 원했는지는 모르나,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부부처럼 서로의 모습을 거울의 상처럼 간직하게 되었다.

피른 나눈 혈연관계처럼 보이는 우리를 보고,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소꿉친구 사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그와 나 사이에는 내 부모님이, 서휘가 내 방에 아무리 들락날락거려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 그런 무기질적인 공기가 감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정말이야? 지금은 어떤 여잔데?”

2학년에 들어와 제법 나와 친해진 ‘이화연’이 내 귓가에 조심스럽게 속삭여온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탈색한 머리에 수시로 얇은 화장을 즐겨하는 화연은 제법 예쁘장한 여자애들이 많기로 유명한 우리 학교에서도 단연 수준급의 미모를 자랑하는 아이였다. 중학생 때부터 모델 학원에서 수업을 받으면서 재즈댄스를 배우는 그녀는 주변의 다른 여학생들과 다르게, ‘현실적으로’ 서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화연은 자신의 수준이 서휘와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접어서 표시해 두었던 책갈피를 펼치면서 심드렁하게 대꾸해준다.

“몰라. 어젯밤에도 외박하고 들어왔으니까. 새로운 여자인 것 같은데 얼굴은 보지 못했어.”

“서휘 외박 자주 하니? 너희 집에도 자주 오지? 진서야, 나 오늘 너희 집에 놀러 가면 안 돼? 귀찮게 안 할게. 응? 안 될까?”

“글쎄”

나는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시선을 내린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는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마음대로 해.”

“좋아라!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게, 진서야!”

화연은 뛸 듯이 기뻐하며 내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향수 냄새가 은근하게 풍겨 나온다. 비오는 밤이면 서휘가 온 몸에 둘둘 휘감은 채 침대 속으로 파고들던 그 독한 향기. 아릿하고 숨이 막힐 듯 지독한 여자의 체취가 곁에 앉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것 같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를 조금 밀어낸다.

“민망하게 왜 이래. 나중에 한 턱 쏘기나 해.”

내가 얼굴에 드러나려는 어색함을 감추며 이렇게 말하자 화연은 기쁜 듯이 활짝 웃었다. 놀기 좋아하고 남자에게 관심 많은 타입 치고는 솔직하고 성정이 밝은 아이다. 다른 사람과 그리 마음을 잘 터놓지 못하는 나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만한 사람을 냄새로 골라낸다. 대부분은 발견해내지 못했고, 일단 발견했다 하면 절대 손에서 놓치지 않는다. 만약 화연이 서휘랑 사귀게 된다면 그가 지금처럼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보내는 것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될 지도 모르지. 평범한 고등학생 커플처럼 사귀게 될 것이다. 가끔씩 반지 선물이라면서 자랑스럽게 손가락에 낀 예쁜 보석을 보여주고, 팔짱을 끼고 등하교를 함께 하고, 평범하게 데이트하면서 서로를 걱정해줄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지금의 서휘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이다. 나는 결코 그렇게 해줄 수 없어.

점심을 먹자마자 나는 화연과 옥상에 올라가서 바람 부는 방향에 따라 담배 연기를 날려 보냈다. 4월이라 교정 아래에는 노랗게 핀 개나리가 한 움큼씩 얹혀 있었다. 봄은 싫다. 어릴 때부터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었던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안경을 위로 올린다. 안경으로나마 좀 막아보려는 것이다. 그래봤자 걸려야 될 때면 꼭 걸리고야 말지만. 달콤한 꽃잎과 부드러운 바람. 화연은 내 곁에 서서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진서 넌 참 특이해. 넌 속세에 욕망이라곤 없니? 비구니가 될 거야?”

나는 픽 웃고 만다. 옥상의 철망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가슴이 뻐근해진다. 욕망이 없느냐고? 절실하게 뭔가를 원하는 것을 욕망이라고 이름 짓는다면, 그래, 없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어 있었고, 지금도 눈이 멀어 있다. 그 커다랗고 새카만 눈동자에 비치던 내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온 세상이 백색이 되는 것을 느꼈고, 그 뒤 다른 색깔은 내게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다.

“좀 꾸미고 살아, 이것아. 아무리 그래도 머리가 이게 뭐니. 아무렇게나 끈으로 동여매면 그만이야? 너 미용실도 한 번 가본 적 없지? 집에 옷은 있어?”

멋쟁이인 화연이 내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혀를 쯧쯧 찬다. 나는 담배꽁초를 발밑에 버리곤 발로 비벼서 끈다. 끼익, 하고 문 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옥상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서고 있다. 괜히 겁을 먹은 화연이 얼른 피우고 있던 담배를 등 뒤에 숨긴다. 나는 그림자만 봐도 알아차릴 수 있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역시 여기 있었네.”

서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옆에 서 있던 화연의 얼굴이 금세 상기된다. 나는 별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점심은 먹었어?”

“어.”

“서휘는? 설마 오늘도 밥 안 싸온 건 아니지?”

화연이 묻는다.

“안 싸오긴 했는데, 애들 거 다 나눠 먹어서 배가 빵빵해. 쉬는 시간에 선생님들 간식까지 빼앗아 먹었는데, 뭘.”

그가 웃으며 대꾸하자 화연은 고작 그런 대화에 가슴이 충만해진 듯 몹시 즐거운 얼굴이 된다.

“우리한테 오지. 우리 밥 많이 남았었는데.”

“여자들 반까지 어떻게 가냐. 그냥 교실에서 대충 해결하고 말지. 담배 남은 거 있어?”

“응! 여기! 나한테 있어.”

화연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새하얀 담배 한 개비를 골라 그에게 건네준다. 서휘는 익숙하게 그것을 입술에 물고 나를 쳐다보았다.

“불 좀 줘.”

여기 있어! 라고 말하려던 화연은 눈치 빠른 아이답게 입을 꾹 다물었다. 서휘는 화연에게 불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요구한 것이다. 자식, 눈치 없기는. 나는 그를 눈으로 흘겨보고 나서 라이터를 그의 입술 위에 대주었다. 찰칵, 불이 켜지고 담배 끝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서휘는 아무 말 없이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이고는 입으로 후, 뱉어낸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내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구름 낀 정오의 하늘 밑에서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린다. 나는 무관심한 눈으로, 셔츠 안으로 드러난 그의 목덜미 쪽을 바라본다. 아침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붉은 기운이 남아 있다. 갑자기 화연이 철망에서 떨어져 나온다.

“참 나 다음 시간 책 빌려야 돼. 수학이지? 갔다 올게. 조금 있다가 보자!”

“응.”

나 대신 서휘가 눈으로 웃으며 그렇게 대답해준다. 화연은 얼굴을 잠시 붉혔다가 타닥 경쾌하게 뛰어나갔다. 옥상문이 닫히자 정적이 찾아들었다. 나는 얼굴을 조금 찌푸리며 그의 셔츠 깃을 가리켰다.

“가려. 다 드러나잖아.”

서휘는 꼼짝도 안 하고 서서 담배만 피운다.

“그런 생활 이제 그만 해. 몸만 축나.”

나는 마지못해 그의 셔츠 깃을 위로 잡아 올려준다. 그가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낯선 샴푸냄새. 근래 들어 그의 샴푸냄새는 항상 바뀌었다.

“좋은 냄새가 나.”

그가 조용히 중얼거리면서 내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목덜미와 뺨, 귓가에 입술을 대고 가만히 숨을 들이마신다.

“오늘 집에 화연이 놀러오기로 했어. 저녁 먹으러 올 거지?”

내가 말한다. 서휘는 얼굴을 들어 올리더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메뉴가 뭔데?”

“엄마가 오삼불고기 해주신댔어. 그거 좋아하지?”

“응.”

그는 어린아이처럼 방긋 웃었다.

“앞으로 그럴 거면 그냥 우리 집에서 자.”

“질투하는 거야?”

“그래, 엄청나게. 세현이 방 있으니까 거기서 자면 될 거야. 우리 집에 네 이불도 따로 있잖아. 괜히 딴 데 새지 말고. 알았어?”

“응.”

그가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아이 대하듯 어른다.

“좋아. 말 잘 듣네. 그럼 이따가 보자. 곧장 집으로 와.”

예비종이 울리는 소리에 맞춰 나는 옥상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휘는 따라오지 않는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탁, 문을 소리 나게 닫는다.

봄인데도 왠지 서늘하다. 샴푸냄새가 아직도 얼굴 옆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서휘가 집에 온 것은, 화연과 영어 숙제를 끝내고 저녁까지 먹은 후 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놀고 있을 때였다. 어린 서휘와 내가 찍힌 사진을 보고 탄성을 지르거나, 침대에 누워 높다랗게 쌓여 있는 소설책 중 셜록홈즈 단편선을 꺼내 읽다가, 결국엔 내 머리를 가지고 땋거나 풀면서 장난을 치고, 끝내는 내 얼굴에 화연이 화장을 하기 시작했을 즈음에야, 그는 제 방 드나들 듯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뭐해?”

올이 굵은 회색 니트에 청바지를 걸친 그가 불쑥 들어서자 화연은 립스틱을 손에 든 채 오뚝 굳었다.

“지, 진서한테 화장 좀 시켜주려고. 안녕, 서휘야?”

얼굴이 발개진 그녀가 이렇게 인사하자 서휘는 싱긋 웃으며 침대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재미있겠는데. 이 녀석은 한 번도 그런 거 해본 적이 없으니까. 아마 안 어울릴걸. 어린애가 엄마 루즈 훔쳐 바른 것 같은 느낌일 거야.”

“괜한 관심 끄시지. 저녁 먹으러 오랬더니 어디서 뭐한 거야? 엄마보고 다시 차려달라고 하기도 뭐하잖아.”

“먹고 왔어.”

화연에게 옴쭉달싹못하게 붙잡히는 바람에 약간 심통이 난 내가 뚱하니 내뱉자 서휘는 우리 쪽으로 몸을 바싹 기울이며 화연을 보았다.

“이거 내가 한 번 발라 봐도 돼?”

“뭐?”

화연이 당황하여 서휘를 쳐다보았다. 서휘는 씨익 웃고는 그녀의 손에서 립스틱을 받아 내 입술에 들이댔다.

“야,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하긴. 낙서지. 좀 가만히 있어봐.”

“너, 야, 잠깐! 지금 어디다 칠하려는 거야! 똑바로 못해?”

서휘는 내 뒤통수를 바싹 잡아 누르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흠, 이런 거 많이 먹으면 몸에는 안 좋을 거야. 그렇지?”

그 말에 화연은 불이 붙은 것처럼 얼굴을 확 붉히고 말았다.

“뭐, 뭐?!”

“어어?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야? 여자들 말야, 여자들. 맨날 이런 거 입에 바르고 뭐 먹을 때 다 빨아 삼키잖아. 안 그래?”

“아, 아니. 그렇지……하하, 난 또……”

“응? 너 지금 무슨 생각 했어? 무슨 엉큼한 생각을 한 거야?”

서휘가 킥킥거리며 짓궂은 얼굴로 화연을 놀리자 그녀는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맸다.

“모, 몰라. 서휘야…놀리지 마.”

“이거 다 네 거야? 나 좀 봐도 돼? 색색깔로 조그만 게 예쁘네.”

서휘는 화연의 화장품들을 살펴보면서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화연은 정신없이 허둥거렸다. 그런 화연은 귀여웠고, 서휘도 그녀에게 관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듯싶었다. 나는 만족했다. 여러 모로 보나 두 사람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자, 그렇다면 이쯤에서 자리를 비켜줘야겠지?

“차 줄까? 뭐 마실래?”

“난 홍차.”

“아, 그냥 커피 줘. 진서야. 땡큐.”

나는 방문을 닫아주고 아래층 부엌으로 가서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새엄마가 나를 힐긋 보더니 계단 위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진서 네 친구니? 혹시 서휘랑 사귀는 아이야?”

눈치도 빠르셔라. 나는 정수기 물을 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사귀는 사이가 될 거예요.”

“헤에, 세상에. 요즘 애들은 참 빠르다니까. 근데 진서 넌 남자친구 같은 거 없어?”

“그런 거 안 키워요.”

“하긴, 넌 맨날 서휘만 보고 자라서 웬만한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게다.”

나는 새엄마가 접시 위에 담아준 쿠키와 차를 들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중간쯤에 잠시, 이거 문을 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일부러 크게 인기척도 냈다.

서휘는 분명히 내가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손에 접시를 든 채 내가 문을 열었을 때 마주친 것은 침대 위에 앉아 화연의 얼굴을 감싸고 입을 맞추고 있는 서휘의 모습이었다. 여자가 꼼짝도 할 수 없게끔 팔 안에 단단히 가두고 키스를 하는 그의 태도는 노련하고 능숙하게 느껴졌다. 힐끗, 그의 눈이 한순간 열린 방문 틈으로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그것은 한 번도 제대로 웃는 법이 없었던 인형이 잔혹한 살기를 드러내며 태엽을 감는 듯한 광경이었다.

“나, 나 갈게. 내일 보자. 진서야!”

화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 가방을 챙겨 방밖으로 뛰쳐나갔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 서둘러 인사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웅을 하러 나갈 틈도 없었다. 뭔가, 이건 아니었다. 이런 식의 광경을 상상해 본 적은 없다. 나는 화가 났다.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밖에 만들지 못하는 서휘에 대해 분노가 치민다. 그는 내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입술에 희미한 조소를 걸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양 팔을 기지개 펴듯 들어 올리며 한 손으로 이마 위에 흩어진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더니, 입술을 핥는다.

“왜 그래?”

노려보는 나의 시선을 마주 응시하며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가까이에 있는 탁자 위에 차와 쿠키가 담긴 접시를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니? 친구 가버렸다, 진서야. 걱정스러운 듯 위층을 향해 소리치는 새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염려 마세요. 나는 소리쳐 대답하고는 방문을 닫았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내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하고 냉혹해져 있었다.

“누가 내 친구를 너랑 자는 여자 다루듯이 하랬어? 화연이는 내 친구야. 그렇게 함부로 다룰 만한 애가 아니라고.”

“쟤도 좋아하던데?”

서휘가 키득거리며 몸을 굴리더니 내 베개 위에 얼굴을 묻었다.

“원하니까 해준 것뿐이야. 원하지 않는 이상은 절대 해주지 않아. 그리고 저 애도 꽤 노는 것 같던데 뭘. 적어도 내가 첫 키스 상대자는 아닐 거 아니야?”

나는 경멸이 담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삐딱하게 나오는 그의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화를 낼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오늘 재워줘.”

그가 내 쪽으로 얼굴을 기울이며 고혹적인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여기서. 네 옆에서 잘래. 나 요즘 며칠 간 한 숨도 제대로 못 잤어. 이젠 한계야.”

그가 스륵 몸을 일으키며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내 팔을 끌어당기더니 침대 옆으로 오게 하여 허리를 끌어안았다. 엄마에게 매달리는 아이처럼. 성모의 발치에 무릎 꿇는 독신자처럼.

“미안, 미안해. 진서야……나……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지금 당장이라도 미쳐 버릴 것 같아. 아니……이미 미쳐 있는 것 같아……진서, 진서야……”

나는 자신의 팔을 면도칼로 난도질한 채 피투성이가 되어 서 있던 어린 소년을 떠올렸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 봉인된 마물은 아직 죽지 않은 채 잠들어 있다. 언제 다시 봉인이 풀려 가슴 속의 마물이 깨어나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면 서휘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고도 잔혹하게.

나는 조용히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고, 그러자 그는 깊은 물속에 떨어진 듯 그 즉시 끝이 보이지 않는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달빛은 음란하고도 나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 chapter #2. 악마의 트릴로 [The Devil's Trillo]




달빛조차 없는 밤이다.

벽시계가 똑딱똑딱 쉬지 않고 소리를 낸다. 창문 틈새가 조금 열렸는지 엊그제 활짝 핀 정원의 목련 향기가 상쾌한 공기를 타고 방안으로 스며들어온다. 나는 숨을 들이마신다. 꼼짝할 수가 없다. 저녁에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 한 잔을 꺼내 마신 것이 탈이었다. 오늘도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셨고, 파출부가 가버린 후 넓디넓은 집에는 그 여자와 나 혼자뿐이다.

나는 몸을 뒤틀려 애를 쓴다. 뜨거운 숨소리가 저절로 입 밖으로 새어나오면서 팔다리가 묵직해진다. 나는 저 밑바닥에서부터 꿈틀꿈틀 기어 올라오기 시작하는 악마의 혓바닥을 본다. 어릴 때부터 그랬듯이 침대 밑에 숨어 있던 악마는 천천히 위로 올라와 나의 몸을 녹아내릴 만큼 내리 누르고 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조심스럽지만, 그만큼 경박한 소리. 구름에 가려진 달이 반쯤 얼굴을 내밀면서, 몸매가 드러날 만큼 얇은 슬리브리스 원피스를 걸친 여자를 비춘다. 그녀는 긴 파마머리를 목 뒤로 넘기면서 나를 향해 미소 짓는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고 애쓴다. 똑딱똑딱, 끊이지 않는 시계 소리.

“소용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달짝지근하고 뜨겁다. 정원의 목련향기와 닮은 목소리다. 삐걱. 그녀가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위로 올라온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달콤한 향락과 욕망으로 빛나고 있다. 그녀가 이불을 치우고 내 허리 위에 올라탄다. 매니큐어를 칠한 고운 손가락이 내 머리칼을 쓸었다가 뺨을 통해 입술에까지 내려온다. 나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중얼거린다.

“그만둬.”

훗, 그녀의 입술이 붉게 웃는다. 그녀는 아름답다. 적어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공품 같은 미인들보다는 훨씬 더 생생하게 피어 있다. 아버지는 여자의 미모를 마음에 들어 했고 다른 것들은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잠옷 단추를 즐기듯 천천히 푼다. 드러난 쇄골에 입술을 대고, 두 손으로 나의 가슴을 능숙하게 더듬어 내려간다. 나는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육체를 느낀다. 고통스럽고도 치밀하게. 나는 결국 신음을 토해낸다.

“제발……그만둬……!”

“우리 예쁜 서휘, 난 네 엄마잖니? 요즘엔 자주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못됐어. 어디서 그렇게 질척질척하게 뒹굴다 오는 거야? 엄마가 슬프잖아. 엄마는 더 잘해줄 수 있는데. 안 그래? 네 입에서 첫 신음소리가 나게 한 건 바로 나잖아. 너에게 쾌락을 가르쳐 준 건 바로 나였어.”

그녀의 손이 바지 속을 더듬어 내려가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페니스를 움켜잡는다. 나는 허리를 들어올린다. 어릴 때부터 줄기차게 섭취해 온 최음제가 머리를 마구 뒤집어 놓아 몸을 광란상태로 인도하고 있다.

그녀가 스륵 미끄러져 내려가 나의 바지와 속옷을 벗기려 하는 순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녀를 걷어찼다. 콰당탕, 몸집이 작은 여자가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벗겨진 옷을 더듬더듬 고쳐 입는다. 떨어진 악마가 나를 향해 슬픈 눈으로 웃는다.

“왜 그러니……? 나는 단지 너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죽어버려.”

비틀거리며 옷걸이에서 재킷 하나만을 걸쳐 입고 쾅쾅거리며 집을 빠져나온다. 현관문을 세게 닫고 정원으로 뛰쳐나온다. 짙은 향기와 차가운 밤바람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흔든다. 나는 잠시 그대로 서서 발밑을 내려다보며 숨을 들이쉰다. 온몸이 지독한 열병에라도 걸린 듯 덜덜 떨려온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나는 걷다 말고 곁에 있는 나무 기둥을 움켜잡는다.

앞으로 걸어간다. 간신히 구겨 신고 나온 운동화가 처량 맞아 나는 피식 웃고 만다. 대문 밖을 벗어나자 조각난 달은 다시 구름 속으로 들어가 숨는다.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옆집을 돌아본다. 2층의 진서 방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다. 밖으로 나왔을 때, 시간은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진서의 집 담장에 기대어 멍하니 그녀의 방 창문을 올려다본다. 춥다. 가슴이 얼어붙을 것만 같다. 봄인데도 나의 손발은 동장군처럼 얼어있다. 코트 주머니에는 다행스럽게도 배터리가 닳지 않은 휴대폰이 들어 있었다. 나는 단축 번호 중 하나를 누르고, 진서의 방을 올려다보며 전화를 건다.

“안녕, 나야.”

전화기 속에서 잠에 취한 목소리가 말을 받는다.

“응. 나 좀 재워줘. 정류장 쪽으로 나갈게. 데리러 와. 응. 그럼 조금 있다 봐.”

나는 휴대폰을 닫고 그것을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는다. 진서를 상상한다. 그녀의 얼굴과, 옷 속에 숨겨진 부드러운 몸과, 온기를 상상한다. 온몸이 미친 듯이 떨려온다.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죄인처럼 천천히 골목길을 벗어난다.

간간히 자동차가 지나가는 조용한 정류장 앞으로 고급세단 하나가 미끄러지듯 멈춰 선다. 차창이 열리며 긴 머리에 구찌 엔비 미를 즐겨 쓰는 여자가 머리를 내민다.

“타, 서휘야.”

그녀의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막 윗도리를 벗으려는 여자를 끌어안았다.

“고양이 같네.”

낮게 웃으며 여자는 순순히 거칠게 덤벼드는 나를 받아준다. 옷을 벗기고 침대에 여자를 눕힌다. 여자는 ‘그녀’가 벗기지 못한 옷을 내게서 남김없이 걷어 내면서 웃음소리를 낸다.

“기분 좋네. 서휘가 나한테 제일 먼저 전화를 해주다니. 역사에 남을 영광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가슴에 입술을 갖다 댄다.

“아……흣”

짧은 애무 이후 곧바로 그녀 속으로 들어가자 이미 충분히 젖어 있던 여자는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는다. 나는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폭발하는 것을 느낀다. 최음제의 효과로, 온 몸이 바싹바싹 달아오른다.

“아……핫, 하앗……아, 앗……”

나는 미친 짐승처럼 여자를 깔아뭉개며 울부짖는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쾌락으로 흐르는 눈물인지, 고통으로 흐르는 눈물인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그게 그거라는 사실을,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깨우치고 있었다.









다섯 살 때 새집으로 이사를 온 후 나는 옆집 마당에서 꽃과 함께 놀고 있던 여자아이를 처음 보았다. 혼혈처럼, 유난히 색소가 엷은 새하얀 피부의 소녀.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햇빛에 반사되어 금발처럼 빛났고, 눈동자는 속이 들여다보일 듯 투명한 갈색이었다. 그녀를 보자 나는 나의 까만 머리와 눈이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려야 할 세상의 죄악인 것처럼 느껴졌다. 저런 애한테 나 같은 애가 다가가도 괜찮은 걸까? 금방 나처럼 까맣게 물들어 버리면 어떻게 하지? 나는 멈칫거리며 담장 뒤에 숨어서 그 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고개를 들고 내 쪽을 보았다. 그 애는 맑은 눈으로 나를 빤히 응시하더니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쭈뼛거리며 소녀의 집 마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너 누구야?”

“서, 서휘……민서휘…저기로 이사 왔어.”

“서히?”

“아니, 서휘. 서휘야.”

흐음, 소녀는 또랑하게 눈을 굴리고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 버렸다.

“저기, 뭐……해?”

“꽃을 묻어주고 있어.”

“꽃?”

“아무렇게나 땅에 떨어지면 불쌍하잖아. 무덤 만들어주려고.”

“무덤?”

나는 그 아이가 조그만 손으로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 흙의 둔덕을 보았다. 돌로 구덩이를 파서 떨어진 꽃잎을 정성스럽게 넣어 그 위에 고운 흙을 뿌린다. 나는 그 애 옆에 쪼그리고 앉아 무덤 만드는 것을 도왔다.

“넌……이름이 뭐야?”

“류진서.”

소녀가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진서……?”

“여기 살아. 심심하면 놀러와.”

그 말에, 나는 엄청난 기쁨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러오라고, 이곳으로 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한 그 말이 나에게는 얼마나 큰 구원이 되었는지 그 애는 알고 있을까?

나를 낳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아버지와 재혼한 여자는 아기였을 때부터 나를 성적으로 학대했다. 집에 잘 들어오지 않고 수시로 바람을 피우는 아버지도 문제였지만, 그지없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 여자의 내면 또한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닳고 허물어져 있었다. 그다지 관심도 없는 얘기지만, 그 여자는 어렸을 때 몇 번이고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고급 매춘부 비슷한 일을 하며 마약처럼 세상의 음지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러던 여자가 결혼한 후 남편의 아들을 자신의 노리개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히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성적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엉망으로 희롱당하고 밤마다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던 나는,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진서의 집 마당 위에 섰을 때, 나를 바라보던 그 아이의 눈을 기억한다.

나는 그저 슬펐을 뿐이다. 미치도록 괴로웠을 뿐이다. 누군가 나를 이 지옥에서 끄집어내어 구해 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리고 진서는, 그러한 나의 유일무이한 구원자였다.









“기다렸어?”

늘씬한 몸매에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가진 여자애가 내 팔을 붙잡는다. 몸에 딱 달라붙는 교복이 그 애에게는 마치 독특한 사복처럼 느껴진다. 이화연. 모델지망생이자, 진서의 친구.

나는 그녀가 팔짱을 끼도록 내버려두며 대꾸했다.

“별로.”

“어, 화난 목소린데? 아니야?”

“진서는?”

“음악실에 갔어. 우리 먼저 가라는데? 음악선생 보고 가려는 건가봐.”

“…….”

나는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긴다. 화연은 옆에서 내 얼굴을 힐끔힐끔 올려다보며 눈치를 보고 있다. 예쁘장하고 똑똑한 여자애다. 데리고 다니기 나쁘지 않고, 그다지 귀찮게도 하지 않는.

키스 사건 이후 나는 화연과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학교 여자애와 사귄 적이 없는 나인지라 소문은 눈덩이처럼 금세 불어났다. 선생들까지 나와 화연의 관계를 시시콜콜히 꿰어듣고 수업 시간에 끈적끈적한 농담을 던질 지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학교에서 여전히 진서와 함께 다녔다. 화연까지 합해 셋이 같이 복도를 걸어가고 있으면 어디선가 짓궂은 목소리가 튀어나오곤 했다.

“여~민서휘, 팔자 좋구나. 양쪽에 여자 하나씩 끼고 다니고. 그 중 하나만 나한테 넘겨라?”

나는 픽 웃으며 꼭 같은 농담으로 맞받아치고는 했다. 어릴 때 그 여자가 손을 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심산으로, 태권도든 검도든 배울 수 있는 건 모조리 배워둔지라 학교에서 우습게 보일 만큼 약점 잡힐 일은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음악선생. 30대 초반의 독신주의자. 올이 풀린 헐거운 셔츠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하얀 뿔테 안경을 쓴, 성격은 괴짜인 주제에 세련되게 생긴 얼굴로 인해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점하고 있는 남자.

진서는 그 음악선생과 유달리 친했다. 딱히 볼일도 없으면서 방과 후나 쉬는 시간이면 음악실로 가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선생과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진서에게 담배를 가르쳐 준 것은 다름 아닌 그 음악선생이었다. 라흐마니노프를 굉장히 잘 쳐. 그녀는 즐거운 얼굴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쇼팽도. 서휘 너 어렸을 때 녹턴 자주 연주했었잖아? 선생님도 그걸 잘 해.

나는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도무지 멈출 수가 없다. 한 번 폭발하기 시작한 괴물의 발광은 혼자 힘으로는 절대 가라앉지 않는다.

“이거 맛있다. 먹어봐, 서휘야.”

화연이 숟가락에 아이스크림을 떠서 나에게 내민다. 나는 잠자코 그것을 받아먹는다. 화연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다.

“마, 맛있어?”

나는 대답 없이 손을 뻗는다.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녀의 입술은 차갑고 달콤하다.

“서휘야……”

상기된 얼굴의 화연이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웃어 버린다. 나란 녀석은 어떻게 해도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구나. 구원될 수 없어. 이미 죄를 셈하는 데 모든 값을 다 쳐버려서, 천국행 티켓을 살 돈은 남아 있지도 않다.

“서휘 너 피아노를 잘 친다며?”

화연이 묻는다.

“예전에 콩쿨에 나가서 상도 타오고 했다면서, 지금은 왜 안 해?”

“집에 있던 피아노가 망가졌거든.”

“어머, 어쩌다가? 비싼 걸 텐데.”

“내가 망치로 내리쳤어.”

“뭐어?”

“사실은 엉덩이로 깔고 앉았더니 건반이 내려앉았어.”

“하핫! 서휘도 참”

화연은 보기 좋은 입술을 치켜 올리며 매력적으로 웃는다. 여자. 꽃향기가 나는 부드럽고 뜨거운 여자다. 나와 잤던 여자들과, ‘그 여자’를 쏙 빼닮은. 이 아이도 옷을 벗기면 똑같은 신음소리를 내겠지. 똑같이 내 목을 끌어안으며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외치겠지.

나는 눈앞에 떠오른 음란한 상상을 곧 지워버린다. 진서의 친구다. ‘함부로 대할 만한 아이가 아니라’고 진서가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그런 거다. 멋대로 농락할 수는 없지.

“서휘야”

화연은 나를 자기 혼자 산다는 자취집으로 데리고 갔다. 여자 혼자 사는 집답지 않게 살풍경하고 차가운 방이었다. 그녀가 먼저 나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아아, 그래. 나는 첫 키스 상대가 아니었다니까.

“오늘은 갈게.”

나는 벗어두었던 교복 셔츠를 집어 들며 말했다.

“뭐? 왜?”

“그냥. 그럴 기분이 아니야.”

나는 화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는 저벅저벅 그녀의 집을 빠져나왔다.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자 있어야 할 물건이 잡히지 않는다. 덜컹. 문이 열리고, 화연이 손에 금색의 조각달 펜던트를 든 채 나를 본다.

“이거 떨어뜨렸어.”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마주본다. 싸구려에 낡아빠진 어린애들 목걸이다. 어릴 때 놀이동산에서, 진서와 나는 헤어지게 되면 이걸로 맞춰보자고 둘이 하나인 달 모양의 목걸이를 샀다. 내가 아직도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서는 모른다. 그녀의 조각달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진작에 쓰레기통에 버려졌을지도 모르는데.

“고마워.”

나는 화연에게서 그 목걸이를 받아든다. 그녀의 눈이 떨어질 줄 모르고 나를 끈질기게 쳐다본다.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강하게 키스를 퍼붓는다. 주륵, 그녀가 미끄러진다. 나는 부드럽게 그녀를 감싸 안고 집안에 내려놓는다.

“잘 자.”

콰앙. 문을 닫고 나서 나는 씩 웃었다.

자, 이제.

지옥에 떨어질 시간?









문을 열자, 진서는 책상에 앉아 두꺼운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발걸음 소리를 내며 다가가도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침대에 털썩 앉아 어깨 너머로 그녀의 옆얼굴을 쳐다본다.

“뭐 읽어?”

“도스토옙 아저씨.”

“도스토예프스키?”

“응.”

“재미있어?”

“그럭저럭.”

“음악선생하고 뭐했어?”

“피아노 들었어.”

“뭘 쳤는데?”

“쇼팽, 녹턴 2번.”

“웃기시는군. 여자 꼬시려고 별 짓을 다하네. 그 지겹도록 대중적인 음악을.”

“너나 그렇지.”

그녀는 더 이상 말없이 책의 페이지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머리카락 몇 올이 새하얀 목덜미 위에 내려와 있다. 집에서 입는 스웨터에 헐렁한 체크무늬 면치마. 코끝에 내려쓴 안경은 가느다란 은색으로 반짝인다. 나는 침대에 누워 뒹굴며 그녀를 바라본다.

살짝 치켜 올라간 기다란 눈매에 색소가 옅은 갈색 눈동자. 언제나 아무렇게나 묶은 채 느슨하게 내버려두는 갈색 머리카락.

한창 멋 부릴 나이인 여고생 치고는, 심각하다 할 정도로 외모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집에서는 둘째 치고 어디 시내로 외출을 나가야 할 때조차 아무거나 집에 있는 것을 꺼내 입으면 그만이다. 예쁘게 보이려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거나 입술을 추켜올려 웃는 법도 없다. 늘 나른하게 풀어진 채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차갑고 냉소적인 인상으로 비춰진다.

문득 가슴 속에서 불쾌한 파동이 치솟아 오른다.

그 음악선생――이제야 알겠다. 그 사람은 진서와 세계의 경계가 일치한다. 아무리 나이 차이가 많이 나도, 사회적 지위가 달라도, 묘하게 끌리는 상대가 있다.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게 되고 그만큼 이해하게 되는 상대가 있다. 당연하다, 세계가 맞닿아 있으니까.

나는 꿈틀 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참는다. 진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무서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안 돼, 나는 삼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억눌러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제 내 밑에는 나락만이 남게 돼……

“그래도 네가 치는 게 더 낫더라.”

갑자기 진서가 입을 열었다.

“뭐?”

나는 숨소리를 내지 않게 위해 주먹을 하얗게 부르쥐며 평범한 어조로 물었다.

“쇼팽 녹턴. 네가 더 낫다고. 그러고 보니 갑자기 듣고 싶어졌어.”

그녀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나는 멈칫 굳어 버린다. 그녀는 내 쪽은 쳐다보지 않고 걸어가 CD를 넣는다. 잠시 후 나지막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녀는 책을 손에 든 채 타박타박 걸어와 침대 옆자리에 앉는다. 벽 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숙인 채 책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한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그녀는 나의 발작을 진정시켜준다.

피아노를 치지 않은 건 꽤 오래 전부터였다. 중학교 졸업식 날, 나는 손에 잡히는 것을 모두 피아노를 향해 집어 던지고, 건반을 부수고, 쓰러 넘어뜨렸다. 엄청난 소리가 났다. 굉장히 멋진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폭발하는 소리, 광란의 비명, 이보다 더 멋진 걸 생각해낸 작곡가는 아무도 없겠지.

그 여자는 내 등 뒤에 멍하니 서 있었다.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의 입술을 깨물었고, 칼날을 그 여자의 목에 박는 대신, 피아노의 하얀 건반 위에 박아 넣었다. 온 집안에 터질 듯한 살기가 팽배했다. 그 후 나는 두 번 다시 피아노를 쳐 본 적이 없다. 음악실에 있는 피아노도 마찬가지이다.

화연에게 처음으로 키스를 한 날, 나는 진서의 방에서 미친 듯한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녘에 깨어보니 진서의 침대 아래에서 이불을 깔고 누워 있기에, 부스스 일어나서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진서는 인형 감싸듯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한 치도 떨어지는 곳 없이 한 몸처럼 붙어서, 잤다.

진서는 가위에 눌리고 있었다. 괴롭게 얼굴을 찌푸리며 엄마, 엄마 하고 불렀다. 피투성이, 붉은 피가 점점이 그녀의 얼굴로 떨어져 내렸다. 사고가 났을 때 진서의 어머니는 그녀를 끌어안고 숨을 거두었다. 진서는 상처 하나 없이 피투성이가 된 채 넋을 잃었다. 그때부터 나는 자해를 그만두었다. 진서가 더 이상의 피를 보는 것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고, 이마와 뺨,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 여기에 있어. 진서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핥고 깊이 끌어안았다.

만약 네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나는 너의 상처마저 기쁘다. 네가 나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미치도록 즐거워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결코 너를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아…….









“좀 더 쳐봐.”

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느새, 텅 비어 있던 음악실에 누군가가 침범해 들어와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에 하얀 뿔테 안경을 쓴 학교의 음악 선생. 낡은 양복을 걸치고 빗질도 안 한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있다. 그는 나른한 얼굴로 피아노 뒤쪽에서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좀 더 쳐보라니까? 왜 연주를 하다말고 우뚝 멈춰서 있어? 그것도 거의 10분 동안이나. 기다리기 지겨워서 돌아가시겠다. 더 안 칠 거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음악 선생은 흠, 고개를 갸웃하더니 담배를 입술에 문 채 피아노 앞으로 걸어왔다.

“너 민서휘지?”

그는 안경을 쓰고서도 눈을 찌푸린 채 나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맞구먼. 여자애들이 그렇게 꺅꺅거리길래 어떤 녀석인가 했더니. 멀리서 보기에는 빼빼 말라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았는데 가만 보니 보기보단 쓸 만한데?”

음악 선생은 내 손에 눈길을 주며 그렇게 말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어어, 아니. 나갈 필요 없다. 어차피 수업도 다 끝났는데. 좀 더 쳐보지 그래? 나 듣고 싶은데, 너의 그 질척질척한 라흐마니노프.”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음악선생은 태연한 얼굴로 굵은 안경 속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다. 담배 연기가 코를 찌른다. 나는 얼굴을 돌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연기 싫어합니다. 꺼주십시오.”

“어, 아 그래. 미안하게 됐다. 내가 그만……”

음악 선생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뒤쪽에 있던 칠판지우개에 대고 담배를 비벼 껐다.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음악 수업은 지우개 따위 필요 없으니까. 자, 이제 됐지? 까다로운 학생. 이제 나머지 연주를 계속해주겠어?”

나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딱딱하고 고지식한 미션스쿨에서 그나마 머리가 깨어 있는 유일한 선생이다. 수업다운 수업은 안 하고 놀고먹기로 유명한, 오죽하면 별명마저 ‘초날라리’일까. 수업 시간엔 늘 시답잖은 얘기만 지껄이다가 뜬금없이 애꿎은 학생에게 뽕짝을 부르라고 시키는가 하면, 갑자기 날씨가 좋다면서 오늘은 밖에 나가 바람이나 쐬자고 하거나, 시험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높거나 낮은 음을 부르면 그걸로 평가하겠다는 둥 하는 소리를 지껄이는, 학교에서 가장 해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괴짜 선생이다.

라흐마니노프를 굉장히 잘 쳐. 멍하니, 그 선생님의 손을 보고 있으면 즐거워져.

“……질척질척하다고요?”

내가 입을 열었다.

“응?”

음악 선생이 뜬금없는 얘기를 한다는 표정으로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대로 서서 음악 선생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아아, 아까 내가 한 말? 흐흐, 이해해라. 내가 좀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편이어서. 미안하다, 기분이 상했다면 용서해라.”

놀라울 만큼 깔끔하게 사과한다. 나는 약간 당황한다. 보통 선생들이란 아무리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쉽게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발뺌하기 마련인데. 이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과하고는 사심 없는 깨끗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뭔가가 흘러넘치는 듯한 느낌을 표현한 말이었어. 홍수처럼. 이러면 이해하려나?”

그가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뒤돌아서서, 다시 의자에 앉는다. 음악 선생은 칠판에 기대어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등을 바라보고 있다.

건반에 손을 올린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면서, 손등에 핏줄이 불거진다.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마물이 밖으로 뛰쳐나오며 함성을 내지른다. 피투성이의 얼굴로 미소 짓는 악마. 찢어발기고 산산이 흩뿌리며 발광하는.

검은 머리카락과 새하얀 육체. 그것을 마음껏 농락한다. 찍어 누른다. 화려하고, 잔인하게 짓밟으며 춤춘다. 영혼을 빼앗는 악마처럼, 어느 순간 달콤하게 미소 지으며 상대의 공포를 달래다가, 졸음이 올 것만 같은 고요한 음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다.

그러다가 다시금, 무서운 광기를 폭발시킨다.

피아노 소리가 멈췄을 때 음악실 전체에는 기묘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음악 선생은 입을 조금 벌리고 넋이 빠진 멍청한 얼굴을 하고 서 있다. 나는 웃는다. 늘 내 얼굴을 한 꺼풀 덮고 있던 새하얀 가면을 벗고, 핏빛의 끔찍한 미소를 짓는다.

“……진서가 선생님을 유난히 따르는 것 같더군요.”

내가 말했다. 음악선생이 움찔 눈을 깜박였다. 나는 한 발작 앞으로 걸어간다.

“담배도 선생님한테서 배운 건가요?”

“아”

그는 안경을 벗는다. 나는 한 발작 더 앞으로 나아간다.

“진서에게 그런 걸 가르쳐주지 마십시오. 선생님이지 않습니까? 쓸데없는 말씀도 하지 마시고요. 전 제 친구가 선생님과 단 둘이 음악실에 머무는 일로 인해 쓸데없는 소문을 만드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잠깐, 민서휘……”

“전 분명 ‘경고’드렸습니다. 선생님.”

일정한 거리 안에 멈춰 서서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탁-!

그가 미처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음악실 문을 닫아버렸다. 어찌할 수 없는 살기. 세계가 붉은 광기로 가득 차오른다.







―― chapter #3. 데모니셰 [demonische]




“저 왔어요.”

차분하게 내리깔리는 음성. 이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 황량한 음악실은 금세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다른 세상으로 바뀐다. 눈을 들어 올리면 그곳에는 가녀린 팔다리에 투명한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서 있다. 이신엽은 안경을 추슬러 올리며 히죽 웃는다.

“어라, 언제 왔냐?”

“좀 전에요. 주무시고 계셨어요?”

남자는 자국이 죽죽 난 얼굴로 팔을 쭉 뻗으며 크게 하품을 했다. 하마처럼 요란한 소리도 내가면서. 소녀는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그의 코끝에 간신히 걸쳐진 하얀 뿔테 안경을 가져간다.

“별로 차이도 없네요.”

하며 소녀는 안경을 자기 코 위에 걸쳐본다. 살풍경한 음악실 내부를 비추던 안경이 자신의 얼굴에 와서 멎자, 이신엽은 손을 뻗어 그녀에게서 안경을 돌려받았다.

“도수 없는 거야. 보안경이지. 설맹(雪盲)이 될까봐 무서워서.”

“왜 설맹이 돼요? 겨울도 아닌데.”

“여기 바로 눈앞에 있잖아.”

이신엽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소녀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한다. 눈부신 태양이 내리쬐는 희디흰 설원. 그는 소녀를 보고 있으면 어느덧 자신의 눈이 멀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고작 열여덟 정도밖에 안 된 계집애를 못 당해내 눈이 부셔하다니, 나도 참 주책이지.

“<눈먼 자들의 도시>같군.”

“사라마구요?”

그의 혼잣말을 금세 따라잡는다. 이신엽은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면서 소녀를 돌아보았다.

“날 보지 마. 눈이 멀어버릴 거야.”

“그것도 좋겠네요. 세상이 온통 백색의 빛이 된다면.”

그녀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의자 위에 앉는다. 가만히 건반을 내려다보더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오늘은 안 쳐요?”

“신물 났다.”

“왜요?”

“되게 당했거든.”

이신엽은 소녀에게 담배 하나를 건네주었다. 소녀는 앉은 채로 병아리처럼 그것을 입술로 받는다. 남자는 얼굴을 내밀어 자신의 담배를 소녀의 담배 끝에 갖다 댄다.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눈동자는 파삭 하고 얼음이 부서져 내릴 듯이, 차갑다.

“누구한테요?”

이신엽은 머리를 더욱 헝클어뜨리며 내뱉었다.

“민서휘.”

멈칫, 소녀가 굳었다. 안 그래도 흰 뺨에서 더욱 핏기가 사라진다. 그녀는, 이신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되물었다.

“서휘가 피아노를 쳤나요?”

“잘도 아는군.”

“뭘……쳤어요?”

“리스트, 죽음의 무도(Totentanz).”

“…….”

“세상이 부서져나가는 줄 알았다. 피아노를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쳐대는 놈은 또 처음 봤어. 마치 악마의 힘줄로 만든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내가 그 전에 놈을 좀 열 받게 만들긴 했지. 뭐……질척질척한 라흐마니노프라고 했었거든.”

소녀는 아무 말이 없다. 담뱃재가 떨어져 나가는 줄도 모르고 조각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 이신엽은 재떨이를 피아노 건반 위에 내려놓는다.

“얌마, 진서야. 정신 차려. 피아노 망가뜨릴 셈이야?”

“……어렸을 때, 치던 곡이예요.”

진서가 말했다. 그녀는 나머지 말은 다 뱉지 못했다. 자해를 할 때마다 미친 듯 연주하던 곡이예요, 라고.

“어렸을 때? 어렸을 때 그걸 쳤단 말이야? 나 참, 정말 무시무시한 꼬맹이로군.”

이신엽은 기막힌 얼굴로 웃어버린다. 그 날 그가 본 것은 피아노 앞에 앉은 한 마리 악마였다. 그곳에는 살아있는 인간이 없었다. 악마가 죽음을 노래하고, 공포를 찬양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쳐 몸을 부르르 떤다.

“너와 그놈은 대체 어떤 관계냐?”

창백해진 얼굴로 얼어붙어 있는 진서를 향해 그는 불쾌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이신엽은 이마를 찌푸리며 담배를 빤다. 소녀는 금방이라도 피아노 앞을 떠나가 버릴 것 같다. 눈이 녹아 사라지듯, 흔적도 없이 그렇게.

그는 소녀의 어깨를 짚으며 피아노 의자 옆에 앉는다.

“나의 헨리에테 부인에게 바치지. 슈만이다.”

담배를 재떨이 위에 버리고 그것을 뚜껑 위에 올려놓았다. 자못 심상하게, 건반을 누른다. 슈만 피아노 소나타 2번 2악장. 천천히, 모든 얼음을 녹여내는 감미롭고 낭만적인 음악이 공간 전체에 퍼져나간다. 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 피아노 음악을 들으며 망가진 인형처럼 멈춰 있다. 피아노가 노래할 때만큼은, 소녀는 그의 것이다.

얼음이 녹아내린다. 설원의 소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다.

“선생님, 바보 같은 얘기 하나 들려드릴까요?”

“해봐.”

“제가 일곱 살 때……교통사고로 어머니가 저 대신 돌아가셨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

“그때 저는 서휘랑 같이 산 달 모양 펜던트를 목에 걸고 있었는데……그러니까 둘이 반으로 나뉘어져서 맞추면 보름달이 되는 목걸이요……그걸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사고 때 저 역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어요. 아픈 곳은 하나도 없었지만……나중에 보니 그 목걸이의 달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는 거예요. 아무리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 피로……불그스름하게 변색이 되어서……저는 도저히 그걸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버릴 수도 없었어요. 제 마음 이해하시겠어요?”

“음.”

“그래서……저는 그 목걸이를 제가 어렸을 때 만들어두었던 ‘꽃무덤’ 속에 묻었어요. 언제라도 다시 찾을 수 있도록……저에게 그건……엄마와……서휘였어요.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을 꽃과 함께 묻었어요. 저는 그 무덤 속에 언젠가 제가 들어가게 될 거라고 상상해요.”

“……”

“……”

남자의 안경이 벗겨진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그 안경을 피아노 건반 위에 올려둔다. 아무런 보호막이 없는 남자의 눈에 소녀의 얼굴이 비춰진다. 남자는 그만 눈이 멀어버린다.

그는 피아노를 치듯 소녀의 등 뒤에 팔을 감는다. 소녀 또한 남자의 목에 팔을 감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찾아 깊고도 오랜 시간을 방황한다.

침묵

그때, 어디선가 작고 투명한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서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음악실 문 앞에 화연이 서 있었다. 발밑에는 막 씻은 실험용 비커가 조각조각 나뒹굴고 있었다. 선생님 심부름으로 과학실에 비품을 놓아두려다가, 음악실을 지나가게 된 그녀가 창문으로 그 장면을 본 것이다. 진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어떤 표정도 지어낼 수가 없었다.

“아……”

뭐라고 말을 뱉으려던 화연이 멈칫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깨진 유리조각을 내버려둔 채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달아나 버렸다.









아버지가 돌아왔다. 여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맵시 있는 자태로 그를 맞이했다. 아버지는 별 감흥 없이 여자를 흘긋 보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서휘는 고개를 꾸벅하며 말없이 인사했다.

“……별 일 없었느냐.”

“예.”

“학교는.”

“잘 다니고 있습니다.”

“……열심히 해라.”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술집의 기생처럼 치맛자락을 팔락이며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나눌 대화는 이것뿐이다. 더 이상의 할 말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아버지는 단지 아들이 ‘별 일 없이’ 자신의 일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기억나지 않는 아주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관심 이상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한 번 따뜻하게 끌어안아준 적도 없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적도 없다. 여자는 아기를 돌보는 데 필요한 여러 뒤치다꺼리를 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키우는 데에는 베이비시터가 고용되었다. 여자는 오로지 그를 학대하는 데에만, 장난치고 희롱하는 데에만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사용했을 뿐이다.

서휘는 자기 자신을 차갑게 비웃었다. 이럴 줄 누가 몰랐는가.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보니 문자 하나가 들어와 있다.

[휘야♡ 나야. 학교 쉬지? 오늘 만나자]

문자 아래 적힌 이름을 보며 가만히 기억을 떠올린다. 누구더라? 아, 그래. 짧은 파마머리에 유난히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내뱉는 여자였지. 안나 수이를 쓰는 여자였다. 그는 향기별로 여자들의 목록을 구분한다. 어떨 때는 여자의 이름보다는 향수 이름이 먼저 떠오른다. 섹스를 하다보면 향수 냄새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뇌리에 꽂히기 때문이다.

그때 거의 동시에 다른 문자 하나가 더 들어온다.

[오늘 잠깐 볼 수 있어?]

화연이다. 그는 잠시 생각해본다. 안나 수이와 꽃(花). 둘 중 무엇의 향기가 더 달콤할까? 고민할 만한 문제도 아니다. 그는 꽃에게 사과의 언어를 날려 보낸다.

[미안. 오늘 약속 있어]







“하아……사랑해, 서휘야……”

안나 수이가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만나본 모든 남자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아이 위에 올라타 있는 중이다. 허리 밑에서 소년은 고개를 조금 옆으로 기울인 채 눈을 내리깔고 있다. 그리스 조각상처럼 유연하고 매끄러운 상체 위에 이슬 같은 땀방울이 맺혀 있다. 안나 수이는 소년의 까만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긴다. 사슴 같은 목덜미, 긴 속눈썹과 촉촉한 눈동자, 그리고 색정적인 붉은 입술. 안나 수이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잊고, 소년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얼굴을 붉힌다.

“너 지금 꼭 남창 같은 거 알아?”

키득키득 웃으며 그녀가 이렇게 속삭인다. 허리를 뒤틀자 소년이 깊은 숨을 토해낸다. 여자는 소년의 가슴과 허리를 손으로 애무하며 몸을 앞뒤로 움직인다.

“섹시해……그냥 보고만 있어도 가 버릴 것 같아. 넌 나한테 팔려온 거야. 알겠지? 그냥 가만히 있어. 시키는 대로 해. 그래……아아, 사랑해, 서휘야……!”







안나 수이와 작별한 후, 서휘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부재 전화와 문자가 열 통 가까이 쌓여 있었다. [서휘야 잠깐이라도 좋으니까][5분만이라도 좋아][지금 어디 있는 거니?][제발 서휘야][서휘야 나] 그는 고운 눈썹을 조금 일그러뜨린다. 이런 애였던가? 귀찮게는 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후 부재전화 메시지에 통화 버튼을 누르자, 화연의 핸드폰이 연결된다.

“나야.”

“서휘야!”

“무슨 일이야?”

그의 목소리는 안나 수이와의 계속된 섹스로 인해 조금 낮게 가라앉아 있다. 어찌 보면 다소 차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화연은 전화기 저편에서 말을 잊어버린다.

“저, 그러니까……”

“할 말 없으면 끊는다. 나 바빠.”

“아, 아니야! 잠깐만……잠깐이면 돼. 지금 좀 만날 수 있을까?”

서휘는 약속장소인 화연의 집 근처 공원으로 나갔다. 화연은 얇은 원피스 하나만을 걸친 채 멍하니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다가가자 화연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그를 쳐다본다.

“진서가 너무 걱정돼!”

“……뭐?”

서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무슨 소리야?”

“진서가……진서가 음악선생과 만나고 있는 것 같아. 그냥 사제관계가 아니라,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더라고. 저번에 음악실 안에서 두 사람이……키스하는 광경을 봤어. 나는 너무 놀라서……”

“-!”

서휘의 얼굴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화연은 울먹거리며 뭐라고 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파멸한다. 세월을 거름 삼아 하나하나 쌓아올린 레고조각이 피에로의 광소 속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제 너는 멸망해 버릴 거다. 붉고 파란 피에로가 기다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까르르 웃어젖힌다. 서휘는 더 이상의 말을 듣지 않고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아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 심장만이 미친 듯이 뛴다. 죽음죽음죽음, 무희는 자신의 마지막 춤을 추고 있었다.









진서는 방안에 있었다. 조용히, 의자 위에 앉아 창문 밖을 쳐다보며 녹차를 마시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사랑스러운 꽃의 빛깔이 배어나온다. 늘 아무렇게나 묶고 다니던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 늘어뜨려져 있다.

서휘는 그녀에게 다가간다.

“나랑 얘기 좀 해.”

“해.”

“……너,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무슨 할 말?”

“……음악선생하고 무슨 관계야?”

쿡, 그녀가 웃었다. 서휘는 멍청해져 버린다. 진서는 녹차를 내려놓고 허리를 굽히며 큭큭 웃음을 터뜨린다.

“남자들은 다 똑같네.”

그녀가 이렇게 말하곤 눈물을 닦는다. 얼음이 깨져 녹아내린 듯한 눈물이다.

“슈베르트 들을래? 죽음과 소녀 어때?”

서휘는 그녀가 CD를 집어넣는 것을 내버려둔다. 곧이어 음악이 흘러나온다. 죽음이 소녀를 삼키려 한다. 소녀는 저항한다. 그러나 죽음은 소녀의 가녀린 목덜미를 잡아 그 피를 남김없이 핥아낸다.

서휘는 그녀의 목을 잡아챘다. 무슨 생각인지, 자기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키스했다. 그 어떤 여자에게도 해본 적이 없었던, 불꽃같은, 상대의 영혼을 빨아들일 듯한 키스를 했다. 미친 질주 속에서 그는 뼈가 얼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주 키스를 해오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그녀는 결코 그에게 닿아오려 하지 않는다.

“……”

서휘는 차가운 칼날에 찔린 얼굴로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녀의 하얀 목에는 손자국이 나 있었다. 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갈색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비춰진다. 그 속에서, 그는 깊은 상처를 입은 짐승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다.

“……생각하지 마.”

서휘는 흠칫했다. 진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말을 잇는다.

“나는 너에게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어. 피투성이인 손으로 피투성이인 네 얼굴을 닦아줘 봤자, 깨끗해지지 못할 거야.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런 희망도 안 돼.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살아. 지금까지처럼, 그냥 이렇게. 이렇게……”

소녀가 죽어간다. 음색은 두 사람 사이에 머무는 빈 공간을 남김없이 빨아들인다. 침묵이 상쇄를 일으킨다. 세계는 멸망한다.









모든 일은 파란에 직면하면 갑자기 그 속도를 높인다. 파괴되는 것이 느린 속도로 달려가는 일은 없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력으로 몰락을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달은 보랏빛 구름에 감싸여 그 레이스를 구경하듯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서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자신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발밑이 땅 밑으로 쑥 꺼진 듯 무거웠다. 잠을 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을 뜬 후, 그는 자신이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어서서 진서의 집으로 갔다. 계단 위로 올라가 방문을 두드려도 그녀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서휘는 또 눈을 떴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창문 틈으로 귀신 울음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누군가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그것은 발정 난 고양이의 울부짖음이었다. 눈을 떴다. 이제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언제까지라도 꿈을 꾸고, 꿈을 꾸고, 또 꿈을 꾸게 될 것 같았다. 이것 또한 꿈인가?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천천히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있던, 단도를 꺼냈다. 어렸을 때 더 이상 자해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상징적으로 봉인한 물건이었다. 이것으로 팔을 그으면, 그래서 아픔을 느끼면, 이것이 꿈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그는 칼로 팔을 살짝 그어보았다. 빨간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다음 순간, 그는 눈을 떴다.

“허억……”

어둠 속. 누군가가 자신의 위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아, 꿈인가? 안나 수이를 다시 꿈속으로 불러낸 것인가? 아랫도리가 묵직해져온다. 땀이 차면서 숨이 격해진다. 이상하다. 이 느낌은 필요 이상으로 생생하다.

“헉, 헉……”

그를 깔아뭉갠 그림자가 짐승처럼 거칠게 신음을 내뱉는다. 서휘는 눈을 제대로 뜨려고 애쓴다. 뭐지? 뭐지, 이건? 꿈? 현실? 악몽? 아니면, 드디어 지옥?

“아……앗…!”

그것은 익숙한 소리였다. 절정에 다다를 때면 그 여자가 늘 내지르는 비명이다. 덜컹! 서휘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여자의 비명에 익숙한 한 남자가 아들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서휘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눈과, 그의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여자는 여전히 쾌락에 찬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미친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오래 전에 모두가 미쳐 있었다.

서휘는 꼼짝할 수도 없었다. 팔과 다리가 쇠사슬에 묶인 것만 같았다. 아버지,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전 갇혔어요. 손가락 하나도 꼼짝 못하겠어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

아버지의 눈이 빛났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고 여전히 서휘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여자를 잡아 아들과 떼어냈다. 그리고 반나체 상태로 멍하니 누워 있는 아들을, 파랗게 빛나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나가라.”

짧은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휘는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후들후들 경련을 일으킨다. 침대에서 일어서서, 거의 잡아 뜯겨진 옷을 다시 입었다. 아버지는 그를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 여자는 숨을 몰아쉬면서 아버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서휘는 비틀거리며 방을 빠져나갔다. 집안 전체가 기우뚱 기우뚱 흔들린다. 누군가가 폭소를 터뜨리고 있다.

나는, 기도한다.

당신이 지옥에 떨어지기를.

그 눈꽃 같은 순결과, 투명한 눈동자와, 빛나는 이마가 괴로움과 죄책감으로 인해 조각나기를. 당신이 더럽혀지기를.

아아――

당신이 저 달처럼 조각나기를.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그도 몰랐다. 아마도 집안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흉기로 몸을 찔렀겠지. 부엌칼로? 유리 파편으로? 뭐든 좋다. 너덜너덜한 쓰레기가 되어, 나를 짓밟아다오.

하하하!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중학교 때 그가 망가뜨린 후 아버지의 명령으로 새 것으로 사들인 피아노였다. 한 번도 쳐본 적이 없었던 피아노는 때 묻지 않은 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피아노를 쳤다.

시뻘건 피를 뚝뚝 흘리며, 핏방울은 하얀 건반 위에도 내려앉았다. 웃음을 터뜨린다. 와르르, 와르르.

지금까지처럼, 그냥 이렇게, 이렇게…….

――― 이렇게?









진서는 눈을 떴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니, 베개를 끌어안은 세현이가 그녀의 방 안에 들어와 훌쩍이고 있었다.

“왜 그래, 세현아. 무슨 일이야?”

진서는 세현이를 가까이 오게 했다.

“오줌 쌌어? 어디 아파?”

“흑……누, 누나……무서워……”

“무서워?”

진서는 세현이를 침대 위로 안아 올려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속삭였다.

“악몽을 꿨나 보구나. 이젠 괜찮아. 누나가 있잖아. 누나 옆에서 자. 옆에 있어줄게.”

“소리……저 소리가 무서워……”

“뭐?”

그녀는 퍼뜩 잠이 깨는 것을 느끼며 세현이를 바라보았다. 세현이는 진서의 품에 바싹 웅크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것은 머릿속을 향해 울려 퍼지는 메아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세현이는 진서의 손을 잡아 자기 방 쪽으로 끌어당겼다. 세현이의 방은 옆집 서휘의 집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그녀는 희미한 바람소리를 들었다. 달빛에 어린, 구슬픈 울음소리. 끊길 듯, 끊기지 않는,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음색.

그녀는 숨이 멎는 것을 느낀다. 몸서리쳐지는 엄청난 공포가 뇌리를 뒤흔든다. 그녀는 세현이의 손을 놓고 방밖을 뛰쳐나간다. 미친 듯이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연다.

맨발로 마당을 밟고 진서는 서휘를 향해 달려갔다. 밤하늘 가운데에 창백한 빛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달이 운다.

문을 열었을 때, 진서는 거실 한 구석에 놓인 피아노를 보았다. 강도가 들어온 것처럼 온 집안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깨어진 꽃병과, 바닥에 나뒹구는 의자, 찢어진 커튼 사이로, 시린 달빛이 새어 들어온다. 서휘는 새카만 피아노 앞 의자 위에 홀로 앉아 있다. 어디선가 여자 울음소리가 새어나온다. 그러나 곧 진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된다.

야상곡.

서휘는 피투성이가 된 채, 조용히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묵직하고, 고요하게. 모든 것을 희석시켜 버릴 듯, 청아한 음률로.

노래한다. 피아노가 허밍한다. 붉은 피가 떨어진다. 소년은 깊고 검은 눈으로 무아를 바라보며 건반을 누른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스스로 살아있는 듯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인형은 웃고 있었다. 제 마지막 수명을 다한 태엽이 천천히 끝을 향해 달려간다.

피투성이의 녹턴.

진서는 새하얀 눈물이 자신의 눈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은 바닥에 무늬를 이루며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간다. 피아노 너머로 서휘의 모습이 비친다. 마지막 건반을 누르는 순간, 그녀는 옆으로 기울어지는 서휘를 자신의 팔로 받쳐주었다. 눈물이 떨어진다. 마침내 모두 녹아 사라져 버릴 때까지.

붉게 조각난 달은 하나로 맞춰졌다.

“바보야……”

“……”

“생각하지 말랬잖아……인형처럼……애초에 아무 것도 없는 인형처럼 견디랬잖아……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거잖아……”

“진……서……”

“어째서……어째서 모두들 이렇게 붉어지는 거야. 왜 내 앞에서 이렇게 붉게 물들어 버리는 거야……차라리 죽어 버려……제발……죽어 버려, 서휘야……”

“……”

“넌 미쳤어. 더 이상 널 견딜 수가 없어. 왜 내게 이러는 거니……? 너 혼자만으론 부족한 거야? 나를……너처럼 붉게 만들고 싶어? 나를 죽이고 싶어……?”

서휘는 웃었다. 그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 진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드디어……내 소원이 이루어졌네.”

“……”

“그래. 난 널 더럽히고 싶었어. 나와 똑같이 만들어주고 싶었어. 네가 괴로워하며 울부짖기를……바랐어. 같이 불살라지기를, 이렇게……”

“……”

“날……사랑해?”

“……아니.”

“나도……그래. 나는 널 사랑하지 않아……진서야.”

“응……”

“사랑하지 않아……널 사랑하지 않아……”

악마가 웃는다. 지옥에서 기어 나온 그는 새하얀 소녀의 날개를 잡아 뜯으며, 잔인하게 웃어 버린다.

“언제까지라도, 영원히……”

킥킥킥, 나지막한 웃음소리는 어두운 실내를 적시면서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진서는 어깨 위에 놓인 그의 온기가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뺨을 어루만지던 손은 꽃잎이 떨어지듯 조용히 그녀의 무릎 위에 놓였다.

피아노만이 시퍼렇게 빛을 뿜고 있다. 세상이 닫혀간다. 천천히, 소리조차 내지 않고―――





아아,  

서늘하다.
댓글 2
  • No Profile
    lordofyk 08.08.25 06:08 댓글 수정 삭제
    와우 한번에 몰입해서 쭈욱 읽었어요. 전 이런거 너무 좋아요 정신없이 글속에 빠져드는 거요. 남녀간의 이야기는 지지리 궁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좋네요 ^^
    마지막 앤딩도 비극적으로 끝나서 너무 좋았어요. 저는 비극이 좋거든요. 아 말이 횡설수설하네. 그만큼 정신없이 보았다는 거죠 히히 그럼 유리나무님 저에게 피를, 아니 아니그게 아니라 글을 주세요 플리즈~~
  • No Profile
    흐어 09.09.05 04:47 댓글 수정 삭제
    좋다가 마지막에 중2병 폭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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