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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무기여 잘 있거라

2008.03.28 22:0203.28

   늑대늑대님의 {고양이와 마녀}는 중반 이후까지는 무리없이 읽혔습니다. 그런데 결말에서 맥이 빠졌어요.
   일단 만화가들이 작업하는 모습, 편집부의 모습, 원고가 청탁되고 게재되는 모습 등등이, 살아있지 못해, 막연한 상상으로 만들어낸 듯한 인상을 주어 글이 생생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한 대단한 작가의 말 몇 마디를 듣고 알게 된 방법으로 벽을 뛰어넘는데, 말 몇마디로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한 단계의 벽은 가볍지 않습니다. 실제 겪은 일을 쓴다고 해서, 만들어낸 ‘창작물’에 리얼리즘이 묻어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경험담으로 성공했다는 식의 진행도 안이한 면이 있고요.
   정말로 이 남자의 말 몇 마디로 깨달음을 얻기엔, 캐릭터의 카리스마도 그다지 특이하거나 설득력이 있지 못햇습니다. 스토리로 풀어내야 할 걸 캐릭터에 환원시켰습니다.
   매정하게 여자친구를 배신할 땐 언제고, 마치 결말은 그래도 이래야지, 하는 것처럼 여자친구를 막판에 안쓰러워하는 것도 납득이 안 갑니다.
   성과 폭력의 결부도 진부한 면이 있고요.
   하지만 짧지 않은 분량임에도 큰 무리없이 이야기를 끌고 나갔습니다. 기본 필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건필하세요.

   전경남님의 {대한민국 또는 나이키 운동화를 위하여}는 현실에 비현실을 버무리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런 글은 그 비현실 부분에 상당한 넉살과 재치, 톡톡 튀는 맛 같은 게 필요한 데, 안타깝게도 그 부분이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했습니다. 문제의 시발점인 나이키 운동화도, 그걸 찾는 과정도, 노숙자가 품에 안고 있던 걸 들고 그냥 뛰는 것도,그다지 재미있다고 보기 힘들었고, 인물들도 생동감 있거나 개성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디어 부분을 보강한다면, 재미있는 글을 쓰리라 생각됩니다. 건필하세요. ^^

   유나고양이님의 {단... 단... 너무나도 단 커피...}는 누나에 대한 집착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자체가 진부하고, 누나에게 집착하게 된 동기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고, 그렇게 극단적으로 가는 행동을 하면서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감성이 상실된 20대의 모습을 설득력있게 그려내지도 못했습니다. 문장과 단어 부분도 많은 보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글을 쓴 분의 예민한 감수성이 느껴집니다. 이야기 속에서 그 감수성을 살릴 수 있다면 빛나는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Sky導님의 {발걸음}은 도입부가 너무 흐릿해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려는 이야기의 지점은 좋았습니다. 아쉬운 점은 문장이나 이야기 전개 속에서 확실하고 분명한 힌트를 주지 않더라도, 이야기로서 읽힐 수 있어야 하는데, 너무 많은 것을 감추려고 하다보니 묘사들이 너무 흐릿해 읽는 이가 읽으면서 어느 지점에 와 있는 지, 다른 말로 지금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내포된 의미는 복합적이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더라도, 당장 진행되는 이야기는 독자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방식의 서술은 일종의 기법으로 작가가 의도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지만, 기법으로 사용한 건지, 자신이 없어서 얼버무린 건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아름다웠고, 주제의식이 좋았고, 무엇보다 작가가 어느 시점에서 어디를 바라보고 써야 되는지 앵글을 잘 잡은 글이었습니다. 건필하세요. ^^

   유리나무님의 {번역의 오류}는 신비로운 대상에 대한 갈망을 담은 글이었습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대상, 가질 수 없는 절대적인 어떤 것에 대한 동경과 갈망은 볼 수 있었지만 그것 만으로 이야기가 되지는 않습니다.
   대상은 신비에 싸여 있더라도, 이야기/서술이 신비에 싸여 있으면 안 되는데, 신비하고 잡을 수 없어보이는 것일 수록, 구체적인 형상화를 통해 빛이 납니다. 절대적인 많은 아름다움은 죽음을 부르는데, 이 글에서 그 대상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게, 그럴 수밖에 없어서였는지, 죽이기라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그 대상의 신비를 잡을 수 없었던 건지 숙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독자가 ‘아, 저렇게 아름답고 신비한 존재가 있을 수가’라고 느끼게끔 만들어야 하는데, 서술에서 읽는 이를 앞서갔습니다. 막상 대상 자체에 대한 묘사는 별달리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신비롭다, 고 선언해버리고 시작한 대상에 대해서 진짜 신비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대상/감정에 대한 장황한 묘사없이, 몇 시간 동안 벌어진 작은 사건만을 서술해 그시절/그 순간과 대상과 감정에 대한 신비를 잡아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소나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글과 지향하는 바는 다르지만,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 오히려 대상의 결코 잡을 수 없는 순수를 그린 예로 말씀드립니다.
   표현력이 풍부하신 것 같습니다. 진짜 이야기 속에 그 표현력을 담으신다면 아름다운 글을 쓰시게 될 것 같습니다. 건필하세요.

   anmi-님의 {고양이의 노래}는 발단―――절정으로 끝났습니다. 길고양이에 대한 동정과 사람들의 동물에 대한 무심한 학대행위에 대한 비판의식은 엿보이는데 그게 이야기 속에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고양이 심장을 가져간다는 건지, 고양이 심장을 가져가는 사람들을 비판하더니 그 이야기와 빵집 습격 사건은 어떠 연관이 있는지, 빵집을 습격한 고양이를 공격하는 걸, 고양이 입장에서 그려 매우 잔인해보이지만, 그 사람이 정말로 나쁜 행동을 한 건지 등의 의문이 들었고요. 보통 고양이가 빵집에 오면 소리를 질러 내쫓거나 물건을 던지지 칼로 찌르지는 않습니다. 비극을 그린 게 아니라, 억지로 상황을 비극적으로 몰아갔습니다.
   주제와 이야기가 긴밀해진다면, 좋은 글을 쓰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건필하세요.

   라퓨탄님의 {송쿠그(아침선문답)}은 지금까지 인류가 답을 찾아 온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과 인류가 만들어 온 명언들을 나열함으로써 철학적인 의문/해답을 이야기하고 찾아보려 한 글로 보입니다. 재미있는 시도였습니다.
   다른 글도 더 보고 싶습니다.

   inkholic님의 {무기여 잘 있거라}는 읽으면서 즐거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하나의 벽을 넘으셨습니다. 한 이야기 내에서 소화 가능하며, 살릴 수 있는 소재를 취사선택해 집중하는 법을 알게 되셨습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흔히 많이 읽으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읽어 온 것을 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글에는 inkholic님이 읽어 온 글의 향취가 묻어 있습니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다음 글 기다리겠습니다.
   독자우수단편 우수작에 선정되신 걸 축하드리며 ltpimento @ paran.com 으로 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건필하세요.









  1


  사실 따지고 보면 첫 경험 때부터야.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나. 눈이 꽤 많이 내린 날이었어. 독서실 책상에 앉아 무기력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고? 그냥 이런저런 생각들. 수능은 일 년 앞으로 다가왔는데 가고 싶은 학과도 안 정했고, 엄마아빠 등쌀에 못 이겨 독서실 등록하긴 했는데 분위기는 또 이리 칙칙해. 공부는 오지게 안 되는데 밖에는 청승맞게도 눈이 수북수북 쌓이고 있는 거야. 그런데 나는 나가서 만날 여자친구도 없고.
  그 때 그 누나가 나한테 왔어. 나보다 두 살 많은, 재수하는 같은 동네 누나였는데 커피 한 잔 주면서 괜히 친한 척을 하더라고. 이름? 안 물어봤어. 뭐, 그 누나도 내 이름 따위 관심 없었을 텐데 뭘. 그나저나 원래 남자 독서실에 여자가 들어오면 안 되는 거거든. 그래서 슬쩍 주위를 둘러봤는데 독서실 안에 우리 밖에 없는 거야. 그때서야 알아차렸지. 누나가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뭔가 끈적하다는 걸.
  유혹당한 거냐고? 글쎄. 누가 먼저 유혹한 걸까. 황 대리는 여자니까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남자들도 은근히 내숭 떨 때가 있어. 순진한 척 하는 거랄까. 그 때의 내가 그랬지. 누나가 뭘 원하는지 다 알면서, 수학 문제를 가르쳐준다는 말을 철썩 같이 믿은 척 하고 누나 자취방에 따라 간 거야. 코사인과 탄젠트의 차이점을 알려준다나? 지금 생각하면 웃겨. 그 누나 나보다 수학 한참 못했거든.
  안 떨렸냐고? 니미, 처음인데 어떻게 안 떨려. 이런 거 네가 처음이야, 하고 말하면서 브래지어 후크 쉽게 푸는 새끼들. 그거 다 구라야. 처음엔 다 어설플 수밖에 없어. 어쨌든 이야기로 돌아와서,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낑낑거리고 있는데 누나가 한숨을 쉬고는 자기가 스스로 브래지어를 푸르더라고. 약간 존심이 상했지만 처음이니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애무를 하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누나한테 별 반응이 없더라. 그냥 내가 열심히 땀 흘리는 모습만 귀여워하더군. 열 받았지. 내 하드디스크의 절반을 차지했던 숱한 야동들도 별 도움은 안 되더라니까. 어떤 야동? 왜 있잖아, 지금은 은퇴한 AV 배우 히토미 칸나. 그렇게 잘 나갈 때 느닷없이 콜렉션을 중단하다니, 에효.
  앗참, 얘기가 샜군. 그런데 누나가 스스로 짚어준 곳들을 공략하니까 조금씩 뜨거워지더라고. 그런데 막 넣으려는 찰나에 갑자기 막아서는 거야. 콘돔 없이는 절대 안 된다고. 그냥 하면 안 돼,하고 졸라봤지만 누나는 단호했어.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콘돔을 꺼내 손수 끼워주더라. 엄청 능숙한 솜씨였어.
  얼굴 빨개졌다? 어이, 황대리. 순진한 척 하지 마. 별로 친하지도 않은 직장 동료를 손쉽게 모텔로 끌어들여놓고 어디서 내숭을. 아침부터 남자랑 이런 얘기하는 건 좀 민망하다고?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근데 나는 아니야.
  이런 얘기하는 거 황 대리가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 나니까.  



  2



  경과보고서 93001.

  도라쉬크 공화국의 위대하고 위대하신 수령님께.
  공화국의 43번 소혹성에서 수령님께서 친히 허가하신 극비리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연구소가 습격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28개의 연구소 중 습격당한 연구소가 추진 중이었던 연구안이 하필 저희 함대의 주력 항속 장치인 범우주중력무시광속추진동력기관 ‘므라크하브담’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닌 걸로 보여집니다.
  시각은 어젯밤 38시 103분으로 추정되며 연구장비 일체가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된 걸로 보입니다. 연구소의 경비를 맡고 있던 네 명의 자랑스런 동지들이 저항을 벌인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생체 신호는 찾을 수 없어 모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습격자들의 정체는 아직 파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나 정황으로 미루어보건대 습격자들의 당초 목적은 ‘파괴’가 아닌 ‘정찰’이었던 걸로 여겨지며 그것이 발각되자 증거 인멸을 위해 공격을 감행한 걸로 보여집니다. 현재 저희 수색대는 43번 소혹성을 향해 신속히 다가서고 있는 중입니다.
  120시간 내에 습격자들의 정확한 의도와 피해범위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앗사라크 쉬아돔 전술보좌관.



  3



  첫 경험을 했다고 해서 갑자기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거나 뿌듯하지는 않았어. 그건 하룻밤의 잠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거든. 물론 할 때는 세포벽을 뚫고 핵이 뛰쳐나오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경험이었지만, 누나의 집을 빠져나왔던 새벽에 나는 아버지에게 둘러댈 변명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새벽하늘 구석에 떠 있는 별이 유난히 커 보이더라. 괜시리 날 쳐다보고 있는 느낌도 들고. 동정을 잃고 남자가 되었지만 그 사실이 나를 둘러싼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냥 그 별과 나만 공유하는 비밀 하나가 생겼을 뿐.
  사실 처음이 어렵지, 뭐든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법인가 봐.
  환상이 현실이 되고, 일탈이 일상의 범위 안에 포함되어버리는 그런 순간이 있잖아. 세상의 음부를 하나 훔쳐 본 대가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느낌.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 한 번 여자와 자본 남자는 더 이상 첫 경험에 대한 환상을 가질 수가 없잖아. 그래서 왠지 난 그 때 자유를 얻었다기보다 잃어버린 것 같아.  
  그 날 이후로 독서실은 한 번도 가지 않았어. 누나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왠지 모를 죄책감도 느껴졌었고, 무엇보다 그 장소 자체가 꺼려지더라고. 그 날 있었던 일에서 아무것도 연관되고 싶지 않았어. 가스 배달을 하던 동네 형이 알려준 사실이지만 그 누나, 생각보다 소문이 안 좋더군. 왜 그런 여자들 있잖아, 동정남들만 골라서 노리는. 여자 몸 건드리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모습에 우월감이나 쾌감을 느끼는 걸지도. 그 얘기를 듣고도 당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어. 나라고 뭐 떳떳한가.
  그런데 두 달쯤 뒤에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는지 누나가 연락을 해왔어. 청천벽력 같은 소릴 들었지. 내 아이를 임신했다는 거야. 나는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안전하게 하지 않았냐고 했지만 누나는 한 마디로 일축했어.
  재수가 좆같이 없으면 이래.
  누나는 수술 요금을 반반씩 내자면서 10만원을 달라고 하더라고. 삼촌이 물려준 기타를 몰래 팔아야했지. 대학에 가면 여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틈틈이 연습도 하고 그랬는데. 우리 집이 특별히 유교적 신봉의 가풍이 있다거나 엄격한 건 아니었어. 하지만 미성년자가 임신을 시켰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 만약 알았다면 아버지의 재떨이가 날 용서치 않았을걸.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누나가 가진 아이가 내 아이라는 보장도 없고, 병원에도 같이 가지 않았으니 어쩌면 난 사기를 당한 건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어리숙해서 덜컥 겁부터 났지. 매일 누군가한테 쫒기는 꿈을 꾸기도 하고 소문이 퍼질까봐 두렵기도 했어. 그리고 그 날 이후 몇 달 동안 신발에 붙은 껌처럼 내 머릿속을 따라 다니는 두 마디가 있었지.
  콘돔 했는데. 진짜 했는데.



  4



  경과보고서 93002.

  도라쉬크 공화국의 위대하고 위대하신 수령님께.
  피해 현장은 예상보다 참혹합니다. 방어 시설물의 7할이 녹아내렸고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연구시설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저희 군사전문가의 진술에 따르면 이 정도의 막대한 피해를 낼 수 있는 전투력을 가진 집단은 가우리스탄 제국과 용병집단인 나퀴렉 뿐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단순한 연구소 습격이 아니라 성단전(戰)을 암시하는 신호탄일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현재 저희는 43번 소혹성의 수석연구원 동지인 왈 크아톰이 암호화하여 남긴 기록을 해독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연구소 피습 당시 최후까지 생명을 보존하여 사망 직전 서신을 남겼는데, 수령님께서도 매우 근심하실 것이라 사료되는 므라크하브담에 대한 행방이 기록되어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앗사라크 쉬아돔 전술보좌관.



  5



  두 번째 여자는 기억이 좀 흐릿한데, 이름이 수미였나? 아니, 숙미였던 것 같기도 하고. 하긴, 황 대리 말이 맞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어쨌든, 내가 합격한 대학교는 집에서 두 시간 반 거리였는데 도저히 가방을 메고 왕복할 엄두가 나질 않았어. 그래서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겠다는 약속 하에 아버지가 학교 근처에 방을 하나 잡아주셨지.
  2층짜리 호프집에서 홀서빙을 시작했는데, 생각해보면 거기 사장님이 진짜 악덕이었어. 돈 떼먹는 건 일쑤인데다가, 툭하면 알바생들한테 욕지거리나 하고. 그러니까 어떤 스타일이냐면…… 언젠가 한 번 3000cc통에 맥주를 조금 모자라게 따랐더니 뒤통수를 딱 후려치더라고. 맥주 몇 방울 아끼다가 손님 잃어버릴 거냐면서 말야. 그래서 다음부터는 거품까지 가득가득 따랐지 뭐. 그런데 어느 날 팔뚝에 힘 꽉 주고 맥주통을 나르는데 또 면박을 주는 거야. 맥주통이 좀 비어 있어야지, 미련하게 그걸 가득 따르고 다니냐, 흘린 맥주 네놈 월급에서 깎으면 좋겠냐면서. 그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겠어?
  니미, 대체 어쩌라고.
  대신에 그런 사장 밑에서 일하다보니 알바생들끼리 사이가 굉장히 좋았거든. 그 때 깨달은 건데 사람 사이가 가장 빨리 가까워지는 방법은 목욕탕 가는 것도, 술 한 잔 하는 것도 아니야. 바로 윗대가리 뒷담화지.
  수미는 나보다 일주일 정도 늦게 들어온 동갑내기 여자애였는데, 몸매도 호리호리하고 얼굴도 예쁘장해서 사장이 늘 카운터를 맡기곤 했어. 걔가 다니던 학과가 비서과였던가? 아무튼 그랬을 거야. 그런데 문제는 손님들이 밀어닥치는 주말이 되면 카운터고 홀서빙이고 구분이 없어진다는 데에 있어. 테이블을 마저 치우기도 전에 단체손님들이 꾸역꾸역 밀려 들어와 자리에 앉아대면 너나 할 것 없이 앞치마 휘날리며 뛰어다녀야 하는 거지. 그런데 수미는 카운터에서 손님들 카드 긁어주고 생글생글 웃어주는 건 잘 했지만 서빙은 영 꽝이었거든. 그래서 사건이 터졌지.
  2번 테이블 안주로 나온 오꼬노미야끼를 수미가 12번 테이블에 가져다 줘 버린 거야. 원래대로라면 손님들이 ‘안 시켰는데요’하고 돌려줬을 텐데 12번 테이블은 단체석이거든. 스무 명이 넘는데 지들도 뭘 시켰는지 알 턱이 없으니 그냥 주는 대로 넙죽 받아먹은 거야. 그럼 2번 테이블 애들은 어떻게 됐겠어? 한 시간 동안 나초만 씹고 있다가 열불이 나서 항의를 한 거야. 그렇다고 한 시간 전에 먹은 안주를 12번 테이블 애들한테 토해내라고 할 수 도 없는 노릇 아니겠어. 재빨리 사장이 다시 만들겠다고, 서비스로 황도도 드리겠다고 가까스로 달래놨는데……. 아 글쎄, 마침 오꼬노미야끼 반죽이 다 떨어진 거야. 손님들은 열 받아서 다신 안 온다며 나가버렸고.
  결국 사장이 폭발했지. 2번 테이블 주문 받은 게 어떤 새끼냐고 주방까지 달려와서 씩씩거리는데, 주방 이모들부터 알바생, 얼음물 따르고 있던 손님까지 바싹 굳어버렸어. 그런데 그 때 냉장고 옆에서 하얗게 질려있는 수미를 본 거야. 바들바들 떨고 있더라고. 그도 그럴게 사장 손 옆에 하필 부르스타가 놓여 있었거든.
  내가 손 들었어. 모르고 2번 테이블 안주를 잘못 적었다고. 글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고향에서 일하고 있을 누나 얼굴이 그 애 얼굴이랑 겹쳐보였던 건지, 아니면 그냥 쿨해 보이려고 그랬는지. 둘 다 아니면 그냥 잠깐 겁대가리를 아이스박스에 깜빡 흘려버린 건지도. 다행히 주방 이모들이 말려서 정수리에 부르스타가 박히는 일은 면했어. 대신 그 날부터 수미와 급격히 친해질 수 있었지. 근무가 같이 끝나는 날이면 집까지 데려다주기도 했고.
  수미한텐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반년이 지나고 나서 남자 쪽이 조금 시들해졌는지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더라. 원래 공대생들이 좀 그래. 늘 지껄이는 얘기는 늘 자동차나 토익 점수, 격투기나 레이싱 걸 뿐이지. 근데 수미 남자친구는 그 중에서도 최악이었어. 아 글쎄. 온라인 게임에 미쳐있었다지. 내가 아까 얘기했던가? 뒷담화만큼 사람 사이를 친밀하게 만들어주는 건 없다고. 수미가 남자친구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투덜대는 걸 나는 그 애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묵묵히 들어줬어. 가끔 ‘저런, 쯧쯧, 아이고’ 등등의 추임새만 넣어주면 되는 일이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수미가 남자친구랑 크게 한 바탕 했는지 일하는 내내 하루 종일 씩씩대더라고. 카운터 기대서선 잘 웃지도 않고.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남자친구가 기념일을 잊어먹은 모양이야. 그 남자친구, 수미가  PC방으로 찾아가 씩씩거리며 컴퓨터 전원을 꺼 버렸을 때도 그 날 획득한 아이템에 대해 미치도록 아까워했다는군.
  그 날, 수미는 치킨이 먹고 싶다고 했어. 집에 가는 길에 느닷없이 말야.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난 당황했지. 물론 여자들이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걔 저녁 아홉시 이후론 감자튀김 한 조각도 입에 안대는 아이였으니까. 결국 어영부영 내 자취방에 수미가 오게 된 거야. 응? 치킨? 물론 안 남기고 다 먹었지. 꾸역꾸역. 태연한 척 수미 입가에 붙은 양념을 놀려대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몹시 복잡했어. 방 한 켠에 묵묵히 자리 잡은 침대가 자꾸 눈에 어른거리고.
  그래서, 덮쳤냐고? 으이구, 이 여자야. 남자들을 다 짐승들로 보는 거야? 뭐, 다 늑대들이긴 하지. 그런데 알아두는 게 좋아. 늑대들은 사냥감의 약점이 보이기 전까진 절대 이빨을 드러내지 않거든. 치킨을 다 먹고 함께 티비를 봤어. 연예인들이 나와서 첫 키스 장소에 대해 시시콜콜 떠들어대는 프로였던 것 같아. 수미가 졸립다며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눕더라. 그런데 프로가 다 끝났어. 살짝 내려다봤더니 어느새 수미가 날 올려다보고 있었어. 하필이면 방금 티비에서 ‘키스’란 말이 수십 번은 흘러나왔고 말야. 물론 입 맞추고 싶었지. 그런데 자세가 영 아니었어. 수미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대려면 목이 부러질 판국이었거든. 그런데 그 때, 수미가 내 목에 손을 둘렀지. 수미 입술에서 치킨 먹을 때 함께 주는 무 냄새가 났지만, 좋았어.
  왜 갑자기 웃냐고? 아니, 분명 뜨거운 밤으로 기억되긴 하는데. 웃지 않을 수 없었거든. 너 그거 하다가 피식 해 본 적 있어? 난 있어. 한창 그걸 하다가 수미가 내 위로 올라타서 허리를 돌려대는데…… 무지하게 뻣뻣한 거야. 이건 무슨 고장난 방적기도 아니고. 그러니까 리듬감이 전혀 없더라구. 웃음 참느라 혼났지. 콘돔은 했냐고? 아니, 분명히 기억했는데 안 했어. 내가 그럼 안에다 해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수미는 이렇게 대답했지.    
  걱정 마. 오늘 안전한 날이거든.



  6



  경과보고서 93003.
  
  도라쉬크 공화국의 위대하고 위대하신 수령님께.
  다행히도 므라크하브담은 무사하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간 얼마나 염려가 많으셨습니까? 가우리스탄 제국에 대한 숫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궁극의 무기는 아직 우리 손에 있습니다. 왈 크아톰은 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그 순간, 완공되고 있던 므라크하브담을 스스로 폭파시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설계도를 암호화시켜 놓았고, 그 설계도는 지금 저희 수중에 들어와 있습니다. 저희 모성(母星)에는 이 설계도를 복원하여 므라크하브담의 공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인재들이 충분할 겁니다.
  이곳에서의 잔여작업이 끝마치는 대로 공화국으로 복귀하겠습니다.

                                                       앗사라크 쉬아돔 전술보좌관.



  7



  뭐야, 뻥 친 거야?
  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 분명 안전하다고 해 놓고선 이제 와서 임신이라니. 그런데 수미가 거의 울먹이면서 말하더라. 자기가 계산을 잘못했을 수도 있고, 여자들 주기는 원래 불안정할 때도 있다고. 그러면서 좀 있으면 배가 불러올 텐데, 남자친구가 알면 가만 안 둘 거라고. 갑자기 울음을 왈칵 쏟아내는 것도 짜증났지만 별 볼일 없는 남자친구한테 매여 있는 그 애 처지에도 화가 나더군.
  그거 알아? 연인들이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단 두 가지래. 첫 번째는 상대방과 자보지 못해서이고 두 번째는 상대방과 자봐서래. 그런데 수미는 전자였나봐. 내가 보기엔 그 남자, 아직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인데 수미는 그런 모습을 다르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
  제길, 그 애 수술비로 또 한 달치 월급이 날아갔어. 그 때부터 내가 뭘 했는지 알아? 난생 처음으로 자발적인 공부를 하기 시작했지. 완벽한 피임법에 대해서 말이야. 뭘 알아야 실수를 안 할 거 아냐.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벽한 피임법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더라고. 콘돔 불량품에는 미세한 구멍이 있을 수도 있고, 완벽히 착용을 했다 하더라도 확률은 95퍼센트란 거 알아? 그래서 충분한 인내력으로 밖에다 싸면 되지 않을까 해서 알아봤는데. 어이쿠, 그거야말로 위험천만한 피임법이더라고. 살짝 삐져나온 쿠퍼액으로도 임신이 될 수 있다는 거야. 저주스러운 정자의 생명력 같으니.
  결국 인터넷에서 누군가 알려준 방법이 그나마 가장 안전해 보였어. 일을 다 치른 다음에 화장실로 가서 방금 쓴 콘돔에 물을 한가득 집어넣어 보라는 거야. 그러면 아주 작은 구멍도 잡아낼 수 있다는 거지. 세 번째 여자애한텐 그 방법을 써 봤어. 클럽에서 만난 애였는데 도대체 내가 뭘 하는지 궁금하다며 화장실까지 따라오더니 그 광경을 본 거야. 그리곤 한 마디 하더군.
  어머, 너 존나 깬다.
  아 그 순간의 쪽팔림이라니. 하지만 그 이상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어. 산부인과 문 두드리는 짓 좀 그만 하고 싶었단 말이야. 어떻게 된 줄 알아? 세 번째 여자애한텐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어. 운이 없었다는 표정으로 담담히 돈을 요구하지도, 엉엉 울며 매달리지도 않았지.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이 우리 사이는 그냥 그렇게 끝났어. 드디어 벗어났구나, 싶었지.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 1년 정도 뒤에 우연히 그 여자애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거든? 그런데 대문에 그 여자애가 왠 갓난아이를 떡하니 안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사진 아래엔 이렇게 쓰여 있었어.
  아자아자, 당당한 싱글맘.

  

  8



  경과보고서 93004.
  
  도라쉬크 공화국의 위대하고 위대하신 수령님께.
  옥체를 보존하셨다는 전보를 듣고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릅니다. 저희 수색대 역시 포격에 말려들어 약간의 부상을 입었지만 사망자는 없습니다. 물론 므라크하브담의 설계도 역시 무사합니다. 하지만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군요.
  가우리스탄 제국과 나퀴렉이 합동전선을 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신병기 므라크하브담에 대해 예상보다 더 큰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훌륭한 삶의 터전이었던 모성이 대규모 함대의 갑작스런 포격에 완전궤멸 되었다는 사실도 비통하지만, 유일한 반격의 불씨가 위태롭다는 사실이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공화국의 86개 소혹성으로 유능한 동무들이 뿔뿔이 흩어진 지금, 므라크하브담을 복원시킬 수 있는 인재를 수소문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입니다. 만약 저희의 수색대가 발각되는 날에는 가우리스탄 제국에 므라크하브담을 빼앗기게 되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수령님, 무운을 빌어주십시오.

                                                       앗사라크 쉬아돔 전술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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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내가 카사노바 체질이라는 건 아니야. 사실 작업 건 여자한테 퇴짜 맞은 적도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네가 짐작하는 것처럼 밤 기술이 현란하지도 않고. 물건이 큰 편도 아니야. 못 봐서 그런데 사실 조그만 흉터도 있어. 엄마가 그러는데 아주 어렸을 적에 자전거에 치였대나. 사실 이 모텔까지 날 끌어들인 황 대리가 그 방면에선 훨씬 탁월한 셈이야. 그러니까 이것만은 알아줘. 내가 어젯밤 황 대리를 거절한 건 성적 매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네가 싫어서도 아니야.
  물론 네가 악에 받쳐 소리친 것처럼 내가 ‘고자’라는 소리는 더더욱 아니지.
  어쨌든 얘기로 돌아와서,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어.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한 여자들은 몽땅 임신을 해버리니 말이야. 연속적으로 그런 일이 있고 나니까 여자가 무서워지더라. 하룻밤 즐긴다는 생각도 불가능해지고. 물론 방황의 세월도 그리 길진 않았어.
  나라가 날 부르더라고.
  그런데 군대에 가니까 문제가 더 심각한 거야. 넌 잘 모르겠지만 군대란 곳이 좀 이상하거든. 정상적인 남자의 성 의식을 격렬하게 변화시킬 정도로 뒤틀린 공간이니까. 군대에선 왜 그리 현란무쌍한 무용담들이 그렇게 많은지. 선임들이나 동기들한테서 여자들을 단순한 정액받이 취급하는 이야기들을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어.
  그리고 난생 처음 노란 집에 가게 된 거야. 노란 집이 뭐냐고? 아, 우리 부대 앞 사창가들이 다 노란 간판을 달고 있었거든. 군인들이 외박 나가면 달리 할 일이 뭐 있겠어. 기분은 어땠느냐고? 그냥 찝찝했어. 그 여자들 단순히 욕망해소를 위해 봉사하고 돈 받는 불쌍한 애들이야. 거기서 땀 흘리며 허리를 흔들었던 내 처지도 참 그렇더라고. 물론 그런데서 일하는 여자애들 피임 하난 잘 하지. 주기적으로 무슨 약 같은 것도 먹는다던데. 헌데 다음 외박 때 내가 갔던 노란 집은 여자애가 바뀌어 있었어. 뭐, 무슨 사정이 생겨 일을 그만 뒀었겠지.
  근데 왠지 난 그 ‘사정’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제대를 하고 나서 더 이상 여자를 침대에 끌어들이는 일에 흥미가 생기질 않았어. 아니, 그보다는 이제 나 자신에 대해 무서워지기까지 하더라고. 일단 복학을 해야 하니까 등록금을 버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했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쌓이는 날엔…… 그냥 혼자 해결했고. 친구들이 소개시켜주는 여자들도 다 거절했어. 그랬더니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는 거야. 게이로 오인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지. 그런데 말야. 그건 억울하더라고. 그래서 어느날 만취한 채 친구들한테 털어논 적이 있었어. 괴이하게도 난 만나는 여자마다 임신을 시킨다, 그 어떤 피임법도 통하지 않는다하고 말이야.
  그리고 얼마 뒤에 한 아줌마가 날 찾아왔어. 아니, 처음에는 그냥 처녀인 줄 알았지. 보자마자 압도되더군. 극소수지만 그런 여자들이 있다니깐. 남자를 한 입에 꿀꺽 삼키게 생긴 얼굴. 색기(色氣)라고도 하지? 내 얘길 듣고 수소문을 했대. 정말로 그 어떤 피임법도 통하지 않냐고 말이야. 그래서 내가 그렇다고 했지. 왜요, 기인열전에라도 나가 보란 말이에요? 하고 비아냥거렸어. 그런데 그 아줌마, 눈 하나 깜짝 않고 굉장히 끈적한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했어.
  너, 불임인 여자랑도 해 봤니?  


  10



  경과보고서 93005.

  도라쉬크 공화국의 위대하고 위대하신 수령님께.
  그런 연유로 저희는 이 은하계를 떠나려 합니다. 이미 가우리스탄 제국의 함대가 감지할 수 없는 곳으로 좌표를 지정해 놓았습니다. 물론 이것이 수령님께서 매우 꺼려하시는 ‘도박’의 일종이란 걸 압니다. 그렇지만 우리 공화국은 지금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므라크하브담이 아직 우리의 손에 있는 지금, 이것만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켜내야 합니다. 바로 저희 수색대만이 공화국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인 것입니다.
  해낼 것입니다. 저희는.

                                                       앗사라크 쉬아돔 전술보좌관.



  11



  그러니까,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아줌마는 정말로 대단했어. 물론 군살 한 군데 없는 몸매도 굉장했지만, 흔히들 명기(名器)라는 말들을 많이 하잖아? 정말로 그래. 그 아줌마의 거기 말이야. 잡아당기듯이 내 물건을 확 끌어당기는데 정신 안 차리면 먹혀버리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더군. 왜 붕어가 물을 빨아들일 때 있잖아? 입 뻐금거리는 거. 그렇게 조였다가 풀어줬다가 하는데 너무 좋아서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었어. 덕분에 오래 버티지도 못하고 넉다운 됐지.
  그런데 그 아줌마의 진가는 그 때부터 발휘됐어. 원래 남자는 한 번 일을 치르면 수그러들게 마련이잖아. 갑자기 의욕이 떨어지고 탈력감이 든단 말이야. 그런데 그 아줌마가 다시 날 깨우기 시작하는 거야. 사정한 지 얼마나 됐다고.
  난 말야 그 때까지만 해도 남자의 성감대는 한 곳인 줄만 알았어. 그렇잖아. 평생 개발시키는 곳도 한 곳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아니더라. 그 아줌마는 손가락, 혀, 그리고 온몸을 동원해 내 숨어 있던 성감대를 끄집어내줬어. 너 남자의 최고 성감대가 어디인 줄 알아? 귓볼? 젖꼭지? 아니야.
  바로 항문이지.
  평생 나는 나 자신이 산의 꼭대기까지 올라봤다고 생각해왔었어. 정상의 신선한 공기를 맛 보았다고 말야. 그런데 알고 봤더니 내가 땅을 파고 있던 곳은 겨우 중턱 부근이더라고. 그 아줌마, 그렇게 끝내주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선천적으로 불임이래. 언제나 자궁 밖에 임신이 된다는 거야. 남편도 아냐고 했더니 모른대. 문제는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니까 남편이 슬슬 아이를 만들자고 한 거야. 사실대로 털어놨다간 소박맞을 상황이고. 그래서 내가 필요했다는 얘기였지.
  한 달 뒤에 내 통장으로 돈이 입금됐어.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었다니까. 그 뒤로 복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등록금 걱정을 해 본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말야 그다지 엄청나게 기쁘진 않았어. 현금인출기에 표시되는 숫자는 어마어마했지만 그만큼 끈끈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발목 언저리에 동여매어진 듯한 기분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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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보고서 93006.

  도라쉬크 공화국의 위대하고 위대하신 수령님께.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먼 거리를 날아와 간신히 서식할 수 있을 만한 환경을 가진 행성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우리의 모성만큼 안락한 곳은 아닌지라, 수색대원 동지들은 척박함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헌데 며칠 전 저희 수색대원 동지 중 한 명이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곳의 ‘대기환경’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인 ‘므라크하브담’의 설계도를 점층적으로 부식(腐蝕)시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연료는 거의 바닥난 상태라 다른 행성을 찾아본다는 것은 자칫 자살행위로 이어질 수 있고, 저희 수색대가 가진 장비로 설계도를 완전보호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과감한 결단과 선택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렇지만 과연 저희에게 주어진 경우의 수가 몇이나 될지가 걱정입니다.  

                                                       앗사라크 쉬아돔 전술보좌관.



  13



  하지만 그애는 달랐어. 그러니까 지금까지 만나왔던 그 어떤 여자랑도 비슷하지 않았지.
  처음 그 앨 만난 곳은 도서관이었어. 졸업할 때까지 공부만 할 생각이었거든. 물론 학업에 대한 열의가 마구 불타오르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군대를 다녀오니까 낭떠러지 끝에 선 기분이더라고. 조금만 발을 구르지 않으면 추락할 것 같아서 발버둥 쳐야 할 것만 같은.
  그런데 어느 날인가 도서관에 인간들이 미어터지는 날이었어. 시험기간이어서 자리가 없더라고, 글쎄. 그래서 어딘가 구석자리에 책만 펴 논 곳을 찾아 슬쩍 옆자리로 치워두고 공부를 했지. 왜 그런 애들 있잖아. 도서관에 책만 펴 놓고 어디론가 실종되는 아이들. 그런 자리는 스리슬쩍 대신 써도 되는 거거든.
  그런데 한참 책 속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거야. 누군가가 양 손바닥으로 갑자기 내 눈을 틀어막은 거였어.      
  누구게?
  그리고 들려오는 속삭임. 저음인데다 차분한 목소리였어. 나는 쥐고 있던 볼펜을 놓칠 만큼 당황해서 ‘양희’, ‘현주’ 등 내가 알고 있는 여자들 명단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지. 그런데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눈을 막고 있던 손이 치워졌어. 그리고 귓가에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속삭임이 들려오더군.
  여기 자리주인이지롱.
  어처구니가 없어 등을 돌려보니 난생 처음 보는 여자가 뚱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어. 장난기 있는 표정도, 날 나무라는 표정도 아니었지.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마주봤어. 마치 눈싸움을 하듯이 빤히. 작달만한 키에 한쪽으로 질끈 묶은 머리. 그리고 헐렁해 보이는 가디건을 입은 여자애였어. 순간 웃음이 나왔지. 그랬더니 그 애는 자길 무시하는 줄 알았는지 갑자기 인상을 쓰는 거야. 실은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사과가 아니었지.
  그런데 몇 살이세요?
  거참. 알고 보니 고작 스무 살이었어. 당시의 나와는 무려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났었지. 그 후 몇 번 도서관에서 마주치다가 친해지게 됐어. 양쪽 다 밥 먹을 친구가 없는 처지더라고. 언제 좋아졌냐고? 글쎄. 잘 모르겠네. 밥 먹다가 친해졌으니 밥정이라고 해야 하나. 아, 맞다. 그 일이 있었구나. 하루는 새벽에 혼자 가기 무섭다고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더라고. 코웃음을 쳤지. 어마어마한 호신용 얼굴을 달고 다니면서 무슨, 하고. 거절했냐고? 아니. 데려다 줬지. 사실 자세히 보면 은근히 정감 가는 얼굴이기도 했고.
  초가을이라 날씨가 굉장히 쌀쌀했어. 한참 걷고 있는데 춥대. 대뜸 재킷을 좀 벗어 달래. 나 원 참.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 무대포인지. 응? 맞아. 벗어줬지. 그럼 어떻게 하냐. 그냥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걸었어. 길이 좁아서 어깨를 맞대고 있었는데, 허참. 어깨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체온이 나쁘지 않더라고.
  잘 가. 오빠.
  그런데 그 애, 정말 휑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어. 에게, 좀 싱겁다 싶었지. 내 손에는 그 애가 벗어놓고 간 재킷만 무겁게 들려 있었어. 찬바람에 놀라 황급히 재킷을 껴입었는데…… 주머니 속에 찔러 넣은 손으로 뭔가가 잡히는 거야. 작은 쪽지였어.
  매일 데려다 줬으면 좋겠어, 오빠가.
  어이어이, 너무 그렇게 웃으면 내가 무안하잖아. 걔 스무살이었다니까. 어렸고. 하지만 귀엽지 않아? 그런 고백. 그 날부터 진지하게 만나게 된 거야. 뭐, 애써 달콤한 기억으로 포장하고 싶지는 않아. 청춘 시트콤처럼 아름다운 일들만 있었던 건 아니거든. 둘 다 고집이 세 자주 다투기도 했고.
  하지만 처음이었어, 그런 거.
  아침에 눈을 떠 그 애 문자를 확인하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고, 밤에는 침대에 누워 그 애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거야. 강의실에 앉아 졸다 깨어났을 때나 버스에서 하염없이 창  밖을 바라볼 때,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우유병의 뚜껑을 열 때 그 애 생각이 나는 거. 가슴 한 구석에 사물함이 있다면 무언가 꽉 들어찬 것처럼 든든한 거.        
  에효, 넌 이런 얘기 하고 있는데 무슨 질문이 그러냐? 어디 까지 갔냐니. 하긴. 지금까지 내가 읊어댄 여자들 이야기로는 그런 물음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구나. 그런데 듣고 실망하지는 마.
  우리 뽀뽀만 했어. 키스도 아니고, 그냥 뽀뽀. 이마에 쪽, 해주는 거. 그냥 비오는 날. 우산 같이 썼을 때 내가 기습적으로 한 거야. 성적 매력이 없었냐고? 그건 잘 모르겠어. 어쩌면 말야, 일부러 그 쪽으로는 생각 안 한 건지도 몰라. 그 아줌마와의 잠자리 이후 왠지 내 남자로서의 욕망이 너무 기계적으로 느껴졌거든. 아까 말한 군대 남자들의 허풍 속 여자들, 내가 그랬던가? 정액받이라고. 그럼 그때까지의 난 그냥 단순한 정액뿌리개였어.
  그리고 그 애한테만큼은 상처주고 싶지 않았어. 알잖아? 그때까지 나와 관계했던 여자들은 대부분 힘들어했어. 하룻밤 쾌락의 대가로.
  물론 쉽지 않았지. 한창 혈기왕성할 때잖아. 팔짱 낄 때 가슴만 닿아도 그게 서곤 했는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참기 힘들었어. 물론 혼자 해결하면 되는 문제였겠지. 그런데 그 애와 만나면서 내 컴퓨터에 있던 야동들도 몽땅 지웠거든. 다른 여자 알몸 보고 흥분하는 것에도 죄책감이 느껴졌었으니까.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는 줄 알아?
  몽정을 하더라고.
  꿈에서 저질러 버린 거야, 그 애랑. 중학교 1학년 때 이후 첫 몽정이었어. 너무 오래 참으면 알아서 배출이 된다네? 내 느낌엔 ‘나 아직 살아있소’하고 시위해대는 것 같아 보였어. 팬티 빨면서 나 자신에게, 또 그 애에게 얼마나 쪽팔리던지. 이튿날 데이트하면서도 오죽하면 걔가 그랬을까.
  오빠, 왜 땅만 쳐다봐?
  그런데 왜 헤어졌냐고? 헤어졌다고 말해야 할까. 그런 걸. 놀이공원을 가기로 약속했던 날이었어. 그 날 입으려고 반쪽 날개가 그려진 커플티도 인터넷으로 주문을 해뒀었지. 왜 그런 거 있거든. 두 명이 꼭 붙어 있으면 날개 한 쌍이 만들어지는 거. 물론 그 애가 쇼핑몰에서 보여준 그 순간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유치했지. 그런데 그런 식으로 유치한 것도 생각처럼 나쁜 기분은 아니었거든.
  그 날, 약속장소에서 여섯 시간을 기다렸어. 놀이공원을 맘껏 즐기려면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그 전날 유독 빨리 잠들었던 애였어. 늦잠을 잘 리가 없었지. 아니, 항상 약속에 늦었던 건 오히려 내 쪽이었으니까. 전화기도 꺼져 있었어. 처음엔 화가 나다가, 다음엔 어이가 없다가…… 나중엔 미치도록 걱정이 됐어. 진짜로 무슨 일이 생겼나 해서. 다음 날부터 학교도 나오지 않았지.
  그 애 집으로 찾아갔어. 혹시 날 피하는 건지, 아니면 어디가 아픈 건지. 너무나 알고 싶었거든. 걔 언니가 나오더라. 떠났다는 거야. 그리고 날 다신 안 만나겠다고 했대. 내가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떠났다면 어디로 간 건지만 알려달라고. 그런데 그 애 언니는 막무가내였어. 제발 만나게 해달라고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요지부동이었지. 만약 내가 나라를 팔아먹은 사기꾼이었더라도 그렇게 냉정하게 대하진 않았을 거야.  
  한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거, 정말 미치는 일이야. 그것도 왜 내 곁을 떠났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없는 경우엔 더더욱. 나 말야, 죽으려고 했었어. 소주를 몇 병이나 들이붓고 학교 건물 옥상에 올라갔거든. 자그만치 20층짜리 빌딩이었어. 난간에 올라서니까, 와 아찔한 거야. 덜컥 겁도 나면서 술이 확 깨더군. 그런데 진짜로 술이 깬 건 그 다음 순간이었어.    
  등 뒤에서 ‘그’ 목소리가 들려왔거든.

  

  14



  경과보고서 93007.

  도라쉬크 공화국의 위대하고 위대하신 수령님께.
  결국 저희 수색대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손실되어가고 있는 설계도를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그리하여 미약한 기술적 지식으로나마 므라크하브담의 축소물을 건축하기로 했습니다. 설계도가 사라지더라도 범우주중력무시광속추진동력기관의 ‘실제모형’이 있다면 희망의 불씨는 사라지는 것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무척이나 위험할 것입니다. 므라크하브담의 동력기관이 처음 작동되는 순간 머나먼 우주 저편에서 가우리스탄 제국이 저희의 신호를 포착할 테니까요. 그러나 우리를 먼저 발견하는 것이 사악한 제국이 아니라, 위대하신 수령님이 이끄시는 도라쉬크 공화국의 동지들일 수도 있습니다. 확률은 반반입니다. 제가 지난 보고서에 작성했듯이 말 그대로 ‘도박’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겐 축소모형이나마 므라크하브담의 복잡한 작용원리를 건축한다는 것은 턱없이 벅찬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 행성에 서식하고 있는 한 생명체의 일부분에 므라크하브담을 ‘이식’할 것입니다. 므라크하브담과 매우 흡사한 원리를 지닌 유기체에 우리의 희망을 숨겨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지킬 것입니다.
  그 생명체의 목숨을.

                                                       앗사라크 쉬아돔 전술보좌관.



  15



  처음에는 공중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했어. 굉장히 어눌한 한국어였어. 마치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외국 유학생이 어설프게 배운 말을 구사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 목소리는 얼핏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
  앞을 자세히 보라.
  그래서 자세히 봤어. 뭐가 있었게? 외계인이었어. 골프공만한 털뭉치 여섯 개가 허공에 떠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 전에 네가 그랬잖아. 내 차 백미러에 달려 있는 액세서리가 탐난다고. 핸드폰 고리 해도 이쁘겠다고. 그거 사실은 외계 생물체야. 그것도 지구에서 엄청나게 먼 곳인 도라쉬크 공화국의 일급 수색대래.
  어쨌든 그 때 나는 너무 놀래서 진짜로 죽을 뻔 했어. 빌딩 아래로 떨어질 뻔 했다니까. 그런데 나보다 그들이 더 놀래더라고. 털뭉치들이 막 말을 쏟아내는 거야. 목숨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그대는 우리 공화국의 투쟁에 없어서는 안 될 마지막 용사라고. 사방팔방에서 또렷하지도 않은 말들이 들려오니 정말 정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더라. 그 때 노란 털뭉치가 앞으로 나섰어. 순식간에 말들이 잠잠해지더군. 그는 자신을 ‘앗사라크 쉬아돔’이라고 소개했지. 응, 맞아. 네가 가장 탐스러워보인다고 했던 그 액세서리 말야.
  그가 해준 말이 바로 내 술을 깨도록 만든 거야. 아니, 정확히는 내 인생을 깨도록 만들었다고 해야 하나. 앗사라크 쉬아돔은 처음엔 사과를 했어. 우리의 언어를 완벽히 번역한 다음에 등장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불시에 나타나서 미안하다고. 내가 스스로 생명반응을 소멸시키려 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날 지켜봐왔다고 말이야.
  그들의 말에 따르면 범우주중력어쩌구하는 기관, 즉 그들 최강의 무기가 내 몸에 심어져 있대. 그것도 내 가장 은밀한 부위에 말이야. 자전거 사고로 위장해 이식에 성공했다는군. 그리고 그 무기가 처음 작동했을 때 머나먼 우주에서 그 신호를 포착했대. 아까 얘기한 거 기억나? 내 동정을 빼앗은 그 누나의 집에서 나온 새벽, 하늘에 떠 있던 별 말이야. 그런데 문제는 그 신호를 포착한 것이 그 외계인들 편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알 방법이 없다는 거야. 운명에 맡기고 주기적으로 신호를 방출하는 수밖에.
  간신히 정신을 조금 차린 내가 망설이며 물어봤지. 대체 내 거기 속에 있는 무기의 정체가 뭐냐고. 어떤 기능을 하는 거냐고. 굉장히 어려운 말을 써서 처음에는 잘 못 알아들었지만 대충 이런 거였어. 공간과 시간, 그리고 중력과 차원마저 무시하는 엄청난 가동엔진이라고. 정해진 목적지로 가는 길에 그 어떤 장애물을 만든다하더라도 순식간에 그 좌표를 지정해 돌파할 수 있는 추진력을 지녔다고.
  쉽게 말해 내 정자가 순간이동을 한다는 거야.
  그때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됐어. 왜 나와 잔 여자들은 모조리 임신을 했었는지. 콘돔에는 전혀 구멍이 없었는데 어째서 실패했는지. 생리주기가 안전한 여자도, 불임인 여자도 내 정자의 ‘목적지를 향한 순간이동’을 피할 순 없었던 거야. 내가 그토록 안타까워했던 AV 배우 히토미 칸나의 은퇴 이유는 사실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어. 모든 게 내 탓이었지.
  그 애가 내 눈앞에서 사라진 이유마저도.
  너무 놀랬을 거야. 처녀가 임신을 했으니까. 그 애 언니 말대로 절대로 날 보고 싶지 않았겠지. 자신이 잠을 자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 범인이 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부모님에게 심한 욕을 들었을지도 몰라. 웃기지? 그 애는 아무 죄가 없는데. 나란 놈을 만났다는 것 말고는.  


  이제 알겠어? 내가 어째서 황 대리와의 잠자리를 거부했는지. 그건 내가 고자여서도, 게이여서도 아니야. 실제로 그런 소문이 돈 적도 있었지만 나는 그 때마다 해명해야 했어. 이토록이나 긴 이야기를 매번 여자에게 들려줘야 했지. 물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어. 차라리 쿨하게 거절하란 말을 들은 적도 있었지.
  앗사라크 쉬아돔은 내게 말했어. ‘그들’이 찾아오는 때는 5383일 뒤, 그러니까 서기 2018년이라고. 맞아. 앞으로 9년이나 남았지. ‘그들’이 도라쉬크 공화국의 생존자라면 그들 모성의 뛰어난 기술로 내 거기에서 문제의 무기만 깨끗하게 빼낼 수 있겠지만 만약 가우리스탄 제국의 병사들이라면 내 목숨은 없는 거라고. 2017년 3월 22일에 나와 도라쉬크 공화국 수색대의 운명이 결정될 거라고.
  그 때까지 난 여자와 잠자리를 할 수 없어. 성적인 유혹조차 받아선 안 돼. 내 꿈자리에 나올 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사실 지금까지 몇 명 피해를 입었을지도 몰라. 그 어떤 질긴 콘돔도, 독한 피임약도, 불임병도 소용없어. 내 ‘무기’는 모든 인과(因果)를 무시하고 그 목적을 달성해 버리니까. 그래 맞아. 마흔 셋이 될 때까지 난 홀애비로 살아야 하는 거야. 명쾌하지?
  그 생각을 왜 안 해 봤겠어. 결혼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되는 거지. 착하고 마음씨 예쁜 여자 만나서 알콩달콩. 그 경우엔 내 능력이 원치 않는 실수가 아니라 축복을 낳을 테니까. 그런데 그게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여기 보여? 왼쪽 가슴 언저리. 어젯밤 황 대리가 더듬으려고 달려들었던 곳.
  여기 이 사물함에, 아직 그 애가 있거든.
  2015년이면 그 애도 서른 아홉이야. 많이 힘들었겠지. 아니면 내가 준 상처를 이기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엉뚱하고 씩씩하게 살아왔을 수도. 그 때라면 이미 결혼을 했을지도 몰라. 고집도 부리지 않는 성실한 남자를 만나 그 남잘 닮은 아들을 낳고, 어쩌면 그 녀석이 오줌을 싼 팬티를 빨고 있을지도 몰라. 많이 늙었겠지? 작고 따뜻했던 그 어깨가 디룩디룩 살이 쪄서 아줌마가 되어 있을 거야. 지금 찾아가면 안 되냐고? 그럴 수야 없지. 그 애한테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 무기가 아직 내 몸에서 숨 쉬고 있는 걸. 이 흉물스런 것과 작별을 고한 뒤에야 가능한 일이야.
  그래서 나는 간절히 바래. 날 찾아올 외계인들이 가우리스탄 제국이 아니라 도라쉬크 공화국 소속이기를. 내 목숨이 아까워서도 아니고, 이전처럼 여자와 뜨거운 밤을 보내고 싶어서도 아니야. 다시 한 번, 그 애를 만나고 싶어. 내게 지워진 이 굴레를 모두 훌훌 털어내고 떳떳한 한 명의 남자로 그 등 뒤에 서고 싶어. 그리고 쭈글쭈글 해졌을 내 손바닥으로 그 애의 눈을 가릴 거야. 그 애가 깜짝 놀라 누구냐고 물어오면 이렇게 말할 테지.  
  자리 주인이야. 내 자리, 찾으러 왔어.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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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a 08.03.28 22:37 댓글 수정 삭제
    멋져요,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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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kholic 08.03.29 17:57 댓글 수정 삭제
    ida/ 아이고, 감사합니다. 짧지만 작가에게 큰 격려가 되는군요.

    선정단께서 골라 주신 것 역시 감사드립니다.
    역시 예리하신 것이 이 글에 아직 온전히 '제 것'이라 할 수 없는 요소도 있는 것 같아요. 다음 글이 언제나 이전 글보다 좋으란 법은 없지만 열심히, 건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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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티 08.04.03 10:37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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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반향 08.04.03 13:13 댓글 수정 삭제
    와......... 정말...

    저 마지막에 눈물 찔끔했어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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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kholic 08.04.03 13:51 댓글 수정 삭제
    볼티/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존재반향/ 전 존재반향님의 리플에 눈물이 찔끔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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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rror 08.04.04 22:48 댓글 수정 삭제
    inkholic님께는 <더블 캐스트> (1, 2 완) 보내드렸습니다.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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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새 08.04.07 15:39 댓글 수정 삭제
    정말 잘 읽었습니다. 독자단편에서 이 정도 충격을 받는 건 정말 오랫만인 것 같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기다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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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8.04.08 21:24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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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kholic 08.04.09 00:57 댓글 수정 삭제
    mirrior/ 희한하게 책 안 읽던 저희 작은 형이 재밌다고 킬킬 거리며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보새/ 기다림이 녹슬지 않게 건필하겠습니다.

    날개/ 오랜만이에요! 아직 졸업은 안 하신 건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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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사자 08.04.12 19:24 댓글 수정 삭제
    재밌어요. 복선도 깔려있고,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야기와 저 4차원너머 이야기가 합쳐진게 정말 크게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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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kholic 08.04.12 23:14 댓글 수정 삭제
    소금사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이 실은 4차원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서 숨쉬고 있을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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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04.23 01:34 댓글 수정 삭제
    와아~ 정말 집중하셨어요.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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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림 08.04.23 21:57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냠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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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연히 이 사이트 알게되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는데요..
    정말 뜻 밖의 수확이네요.. 이런 작품이 숨겨져있을 줄이야..
    앞으로도 멋진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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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kholic 08.05.14 22:06 댓글 수정 삭제
    부족한 글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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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rdofyk 08.08.29 03:07 댓글 수정 삭제
    멋지네요. 재밌게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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