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다음 글의 속편입니다: http://mirror.pe.kr/novel6/26507

 노란 고양이가 역으로 가는 길을 묻기에 가르쳐줬더니 당신 정말 고양이가 길을 물었다고 믿고선 진지하게 대답까지 해 준 건가, 과로나 뭐 그런 것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인데 내가 괜찮은 정신과를 아니까 한 번 가 보는 게 어떻겠느냐며 주소를 알려 주고 사라졌다.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라 일러 준 병원으로 찾아가자 의사가 난처한 얼굴로 또 그 녀석 짓인가, 젖먹이 때 어미를 잃은 것을 보살펴 줬더니 은혜를 갚겠다면서 멋대로 호객 행위를 해서 곤란하다, 기왕 이렇게 찾아줬으니 뭔가 상담받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야기 정도는 들어 줄 수 있다, 돈은 받지 않을 테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지 마시고,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차를 한 잔 내 주었다. 목이 말랐기 때문에 차는 마셨지만 딱히 토로하고 싶은 것은 없었기에 그렇습니까, 말이 그럴싸해 깜박 속아 여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영리한 녀석이로군요, 라고 몇 마디 한 다음 그냥 돌아왔다. 

 다음날 같은 모퉁이에서 고양이를 만나 네 탓에 헛걸음을 하였다, 다행히 의사가 정직한 사람이라 그냥 넘어갔다만 자칫했다간 비싼 상담료를 뜯길 뻔했노라 책하였더니 고양이가 태연한 얼굴로 앞밮을 핥으며 대꾸했다. 첫날은 정직한 척하여 일단 신뢰를 얻는 것이 그 녀석의 수법이다. 상담실에 주홍색 향초가 있지 않더냐, 그 안에는 마약 비슷한 성분이 있어 일정 시간 이상 맡았다간 중독되어 버리고 말지. 두 번째는 유료야. 비싸다고. 향초 같은 게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차를 얻어 마신 것은 틀림없는지라 혹시 이상한 걸 먹이거나 하지는 않느냐고 묻자, 길거리에서 노란 고양이와 정신과 의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나 하고 있다니 역시 머리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다. 그것도 저번에는 이쪽에서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한 것 뿐이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자진해서 말을 걸지 않았나. 의사에게 다시 가서 고양이와 대화할 수 있다는 망상이 계속 드는데 어제 댁이 내게 준 차에 뭔가 이상한 것을 넣은 탓이 아닌가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질 않겠나. 그런가. 나는 퇴근하거든 다시 어제의 병원을 찾아가, 혹여 향초 같은 것이 켜져 있으면 나는 그런 인공적인 향기를 맡으면 골치가 아프니 끄고 환기를 해 주십사 청하고, 차를 내주어도 입도 대지 않고, 다만 어제오늘 고양이가 사람 말로 떠드는 듯한 환청을 들어 불안한 것뿐이니 무언가 약을 처방해 주지 않겠느냐고 말해보자 작정하였다.


 "또 오셨군요 선생님. 오늘은 어쩐 일로 내원하셨는지요?"

 "예에. 아무래도 어제 일이 마음에 걸리는지라...."

 "아,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염두에 두실 것 없습니다. 그건 다 그 녀석이 손님을 끈답시고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는 소리니까요."
 
 "그래도 좀 이상하잖습니까. 백주대낮에 낮도깨비도 아니고 고양이가 사람 말을 하는데."
 
 "그렇습니까. 신경쓰지 마시라 말씀을 드렸는데도 이렇게 다시 오실 만큼 집착하는 걸 보아하니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진료실에 들어오니 정말로 무슨 방향제 냄새가 희미하게 나길래 이거 고양이는 둘째치고 일단 창문부터 열어달라고 해야 하나 싶어 어물거리고 있자니까 의사가 저렇게 슬그머니 운을 띄우는 것 아닌가. 고양이에 관해 뭔가 안 좋은 일을 겪은 적이 있다면 한번 이야기해 보란다. 과연, 이런 식으로 상담을 유도해 진료비를 챙기는구나. 빨리 일어나야겠다 싶어 딱히 생각나는 일은 없으니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라 둘러대려던 순간 칙 하고 방향제의 자동분사기가 작동하는 소리가 났다. 청량하게 퍼지는 유자 향을 맡고서 나는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그게, 안 좋은 일이라기보다는 좀 성가신 일이었습니다만."

 

 3년 전에 나는 전시회에 갔다가 먹으로 그린 고양이 그림을 하나 사 왔다. 이튿날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온 집안에 검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나는 방 한가운데 나 있던 제일 까맣고 또렷한 발자국을 시작으로 고양이의 발자취를 되짚어보았다. 종횡으로 방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서서히 옅어지던 발자국은 그림이 걸려 있는 벽 바로 앞에서 흐릿하게 끊겼다. 도약을 준비한 듯 꾹 눌려 뭉개진 흔적이 보였다. 그림에는 화가의 낙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나는 방 안에 풍기는 희미한 먹 냄새를 맡으며 고양이가 있었던 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고양이의 실루엣을 따라 물이 스몄다가 마른 것 같은, 살짝 울고 빳빳해진 한지의 감촉이 느껴졌다.
 
 박박 문질러 닦아 봤지만 발자국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이걸 어느 세월에 다 치운단 말인가? 나는 물티슈를 집어던지고 벌렁 드러누웠다. 핸드폰을 켜 검색창에 먹물 지우는 법을 쓰려다가 지우고 대신 화가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고양이가 사라졌다며 항의하는 글이 한가득 나왔다. 화가도 처음 몇 번은 어떻게 대충 무마해볼 생각이었는지 세상에 영원불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미술품의 아름다움 역시 매한가지로 그림이 백지가 된 것은 다 의도된 현상이고 여기에는 심오한 예술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거니와 구입해주신 여러분께서 보여주신 이 모든 반응 또한 작품의 일부인 바 운운하는 해명을 댓글로 달았으나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라, 그럼 전시회를 할 때 곧 사라질 그림이라고 미리 설명을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둥, 일언반구도 없이 그림을 팔아놓고 이제와서 발뺌이라니 이건 사기라는 둥, 그딴 알아먹지도 못할 설명은 이름만 대면 누구든 알 법한 유명 작가가 수십억짜리 현대미술 작품 팔 때나 붙이는 거지 당신처럼 어중간한 위인이 쓸 패가 아니라는 둥, 난 예술입네 뭐네 그런 건 모르고 고양이가 귀여워서 댁의 그림을 산 것 뿐이니까 이럴 거면 당장 환불해달라는 둥 원성만 빗발치니 이내 꼬리를 내리고 실토하기를 번지는 모양새며 향이 하도 좋기에 골동품상에서 수상한 먹을 사다 썼는데 하필 그게 청나라 관리들이 문서위조할 때 쓰던 물건이라 햇빛을 쪼였더니 수주 내로 색이 사라지더라나. 당장 먹 사느라 진 빚도 갚고 여기저기 돈 쓸 일이 급급하여 숨겼다가 결국 이 사단이 나고 말았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고 다만 엎드려 사죄드릴 뿐이란다.
 
 이번 일로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는 아래 연락처로 문의해주시면 성심껏 보상해드리겠다고 적혀 있기에 나는 문자와 엉망이 된 방 사진을 보냈다. 제 고양이가 달아났습니다. 환불해드릴까요 그림을 다시 그려 드릴까요. 새 고양이를 원합니다만 또 빠져나와 방을 더럽히면 곤란하니 어떻게 잘 좀 해 주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화방에서 산 공장제 먹으로 그릴 거니까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면 이번에는 하얀 고양이를 그려 드릴까요? 아니오. 그래도 검은 고양이가 더 좋으니 검은 고양이를 그려 주시지요. 알겠습니다. 제 화실 주소입니다. 여기로 백지가 된 그림을 보내 주시면 제 낙관을 확인하고 바로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럼 언제쯤 완성되는지요? 다음 주 내로 시작하면 3월 중순쯤에는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겁니다. 말일날 볼일이 있어서 근처에 들를 일이 있는데 직접 가서 그림을 받아가도 될까요? 예, 오시기 전에 미리 연락 주세요.
 


 3월 말이 되어 나는 그림을 찾으러 갔다. 화가가 툇마루에 식빵처럼 옹송그리고 앉은 고양이 그림을 보여 주었다. 
 
 "눈동자를 안 그렸으니까 빠져나올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화제를 영면이라고 할까요?"
 
 "아니오 아니오. 죽은 고양이 그림 같은 걸 방에 걸어두기는 꺼림칙하니 그냥 자는 고양이 정도로 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화제는 춘면불각효로 짓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방울하고 유자를 그려 두었으니까요. 고양이라는 족속은 가장자리에 놓인 물건을 보면 떨어뜨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법이니 잠을 깨더라도 반드시 여기부터 앞발을 댈 것입니다. 방울소리가 들리거든 얼른 이 유자를 까도록 하십시오. 고양이는 감귤류 과일의 향을 싫어하니까 냄새를 맡으면 그림에서 나오지 않을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낙관이 마를 동안 화실을 구경하며 화가와 그림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왔다.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의사가 물었다.
 
 "그래서, 그 고양이가 또 방을 시커멓게 만들어 버리던가요."
 
 "아니오. 새 고양이는 얌전합니다만, 가져온 날 이상한 꿈을 꾸는 바람에."
 
 

 화가는 걱정할 것 없다고 했지만 역시 신경이 쓰이지 않겠나. 이부자리에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중간중간 벽에 걸린 그림을 힐끔거리다 선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딸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비몽사몽한 눈으로 방바닥을 구르는 방울을 보고 있자니까 뒤이어 유자 한 알이 벽에서 툭 떨어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 후닥닥 일어났다. 고양이가 그림 밖으로 고개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냉큼 유자를 주워 까려고 했는데 어랍쇼, 만져보니 이거 유자가 아니라 유자 모양 향초다. 나는 급한 대로 일단 그림 앞에 초를 들이밀었다. 호기심에 주둥이를 갖다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본 고양이가 깜짝 놀라 코를 쑥 뺐다. 살짝 부풀어오른 꼬리가 불만스럽게 툇마루를 툭툭 두드렸다. 고양이가 앞발을 핥으며 황망해진 마음을 달래는 동안 나는 허둥지둥 라이터를 찾아 초에 불을 붙였다. 합성향료답지 않게 청량한 유자 향이 방 안에 퍼지자 3차원의 세계로 나오기를 포기한 고양이가 이번에는 종이 가장자리를 곁눈질하지 않겠느냐. 안 돼. 장판에 찍힌 발자국은 겨우 지웠지만 벽지에 먹이 배면 끝장이다. 나는 어떻게든 고양이의 관심을 끌어 보려고 형광등을 껐다. 촛불 앞에 손을 갖다대고 그림자 새를 만들어 요란스레 퍼덕이자 두 눈이 휘둥그래진 고양이가 펄쩍 뛰어올라 앞발을 휘둘렀다. 처음 몇 번은 잘 피했지만 얼마 못 가 오른쪽 잠옷 소매가 발톱에 걸리는 바람에 붙잡히고 말았다. 고양이가 손을 깨물거리면서 뒷발질을 하는 동안 나는 왼손 그림자를 움직여 조심스럽게 그림 속의 고양이를 쓰다듬어 보았다. 비단처럼 매끄러운 털과 잘 늘어나는 털가죽 밑의 부드럽고 유연한 살의 감촉, 그리고 촛불의 열기와는 확연히 다른 따끈따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이것 참 주물딱거리는 맛이 있구나. 먹물만 안 흘리면 꺼내놓고 만지련만. 소매에 걸린 발톱을 빼 주려고 앞발을 잡았다가 말랑거리는 육구를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실실 웃고 있는데 하필 그때 배달 오토바이가 집 앞을 지나갈 게 뭐냐.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란 고양이는 발톱에 내 그림자를 매단 채 그만 멀리 그림 속으로 부리나케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제 고양이가 또 사라졌는데요."
 
 "그것 참 이상하군요. 말씀드렸다시피 이번에는 아무 문구점에서나 살 수 있는 공장제 먹으로 그렸거니와 그전에 쓴 먹도 햇빛을 쬐면 지워질 뿐이지 그린 그림이 실제가 되어 튀어나오는 마술 연필 같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방바닥에 고양이 발자국이 찍혔다고 주장한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림 속의 고양이가 그림자를 끌고 도망치다니, 말이 안 돼요. 과로나 뭐 그런 것 때문에 신경쇠약이 온 것 같은데 제가 괜찮은 정신과를 아니까 한 번 가 보시는 편이 어떨까요."
 
 아무리 기다려도 고양이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화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항의했더니 이거 적반하장으로 내 정신상태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냐. 하지만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라 나는 화가가 일러 준 병원으로 찾아가 호소하였다. 
 
 "요즈음 그림 속의 고양이가 움직이는 듯한 헛것이 보이더니, 급기야 그 고양이가 제 그림자를 채가는 바람에 그림자가 사라진 것 같다는 망상이 들어 괴롭습니다."
  
 의사는 서랍에서 동공반사를 검사할 때 쓰는 작은 손전등을 꺼내 내 손을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생님. 선생님은 망상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그림자는 정말로 사라졌으니까요."
 
 "아니, 그림자가 없어졌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요즘 세상에 그림자 하나쯤 없는 것이 뭐 그리 큰 흠이겠습니까. 악마와 거래를 했다면서 이단심문관이 잡아가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상견례 자리 같은 데 나갔다가 들켜 버리면 아무래도 모양새가 영 안 좋을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까. 선생님께서 정 불안하시다면야 약을 처방해 드리지요. 이걸 드시면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의사는 대수롭잖다는 투로 처방전을 한 장 써 주었다. 달필인지 졸필인지 모를 초서체로 마구 갈겨쓴 한자라 뭐라고 쓴 건지 당최 알아볼 수가 없었다. 
 
 "대체 이것이 무슨 약입니까?"
 
 "이것은 은형법에 쓰는 약으로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유서깊은 처방이니 마음놓고 드셔도 좋습니다."
 
 "은형법이오?"
 
 "쉽게 말하자면 투명인간이 되는 약이지요. 투명인간이 되면 그림자가 없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과연. 괜찮은 정신과라더니 참 용한 의사로구나. 나는 안심하여 처방전을 들고 근처 한약방을 찾아갔다. 눈매가 여우 같은 약방 주인이 환약과 함께 감초 차 한 잔을 내 주며 청하기를, 약이 제대로 듣는지 확인해 보고 싶으니 약기운이 돌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주지 않겠느냔다. 자기가 십수 년이 넘게 여기서 일했지만 이런 약은 오늘 처음 만들어 본다나. 나는 승낙하고 약방 한쪽에 앉아 약을 삼켰다. 감초 차를 후후 불며 홀짝이고 있자니까 주인이 도깨비감투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쓰면 투명인간이 된다는 감투 말씀이신가요."
 
 "그렇소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도깨비감투를 얻어 도둑질하는 데 써먹었는데 담뱃불이 튀는 바람에 그만 감투에 구멍이 나고 말았다더구려. 아무개의 아내는 빨간 헝겊으로 감투를 기워 주었고 그 다음부터 아무개가 감투를 쓰면 빨간 헝겊조각이 보이게 되었지요. 아무개는 그러고도 도둑질을 계속했으므로 곧 빨간 천쪼가리가 아른거린 다음에는 꼭 물건이 없어지더라는 소문이 돌았소. 해서 피해를 입은 시장 상인들이 다같이 빨간 헝겊조각을 덮치니 감투가 벗겨져 아무개는 몰매를 맞았다는 이야기라오."
 
 "예. 어렸을 때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읽은 버전에서는 구멍으로 이마가 들여다보이는 바람에 빨간 헝겊이 아니라 살색 점이 보였다고 했지만요. 아, 이거 슬슬 약기운이 올라오는 모양인데요."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한 손끝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깜짝 놀란 내가 눈이 안 보인다고 소리를 지르자 약방 주인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본래 사람을 완전한 투명인간으로 만들면 자연히 청맹과니가 되는 법이외다. 투명해진 각막은 제구실을 못 하니까 말이오. 해서 도깨비감투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지. 이것도 일종의 무형 오파츠가 아닐까 하고. 예를 들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이야기나 우라시마 타로 전설은 쌍둥이 이론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잖소? 아주 오래 전에 우주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한 초 고대문명이 존재했다. 그 문명은 흔적도 없이 멸망해 버렸고 불가사의한 이유로 인해 관련 기록은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의 발달한 과학 기술을 암시하는 듯한 내용이 일부 옛날 이야기에 담겨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거요. 광속 우주여행이 가능한 만큼 사람을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것쯤은 간단했을 테지. 하지만 그 대단한 과학 기술로도 망막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지 못해 끝내 불투명한 상태로 남겨 둘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싶소. 도깨비감투에 뚫린 구멍과 빨간 헝겊이란 다름아닌 그 불투명한 각막에 대한 은유가 아니겠소?"

 뭐야? 사람을 눈뜬장님으로 만들어 놓고는 한가하게 도깨비감투 이야기나 하고 있다니! 화가 치밀어 주인의 멱살이라도 잡을 요량으로 벌떡 일어났는데 그만 균형을 잃고 말았다. 허우적거리다 눈을 떠 보니 이불 위였다. 눈은 멀쩡히 잘 보였거니와 그림자도 제대로 붙어 있었다.

 
 "새 고양이도 제자리에서 얌전히 자고 있었고요. 그 뒤로도 움직이거나 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찝찝해서 그림은 밀봉해 두었습니다."
 
 "아니, 그림자가 없는 건 안 괜찮고 투명인간이 되는 건 괜찮단 말씀이십니까?"
 
 "뭐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걸 먹으면 문제없어질 거라고 호언장담하는 말을 들으니 그때는 혹해서 그만."
 
 "선생님의 문제는 바로 그겁니다. 고양이 말만 듣고 여기까지 온 것도 그렇고, 요컨대 귀가 너무 얇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팔랑귀를 고칠 수 있는지 물으려 했는데 슬슬 예약 환자가 올 시간이니 죄송하지만 다음에 다시 와 달란다. 별수없이 상담료를 지불하고 나가자니까 누군가 회색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들어와 접수처 직원에게 건네주는 것 아닌가. 이 녀석이 또 길에서 엄한 사람을 현혹하고 있기에 잡아 왔단다. 나는 허둥지둥 진료실로 돌아가 의사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보살펴줬다는 그 고양이가 요만한 회색 페르시아 고양이입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혹 다른 고양이는 안 기르시는지요? 이를테면 노란 녀석이라든가."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며칠 뒤 나는 노란 고양이를 만났던 모퉁이에서 회색 페르시아 고양이를 발견했다. 목걸이에 병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다시 비싼 상담료를 뜯길까 두려워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요놈이 신발코에 뺨을 부비며 가르랑거리다 숫제 발라당 드러누워 애교를 부리는데 이건 어쩔 도리가 없다. 별수없이 안아들고 병원을 찾아가니 직원도 의사도 없고 진료실 안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강도라도 들었나. 내가 어리둥절하여 우두커니 서 있자니까 형사 두 사람이 들어와 경찰수첩을 내밀었다. 이 병원 의사가 다섯 명의 환자한테 마그네슘이라고 속이고 LSD를 처방해 주는 바람에 하나는 약을 더 얻으려고 하루에 열 번씩 병원을 들락거리다 끝내 의사를 식칼로 위협해 약을 몽땅 털어갔고 둘은 행방불명됐고 나머지 하나는 약에 취해 트럭을 몰고 경찰서로 돌진했단다. 

 "선생님께서도 무언가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셨는지요?"

 "아니오. 상담은 한 번 받았지만 약은...아, 방향제 냄새를 맡은 적은 있습니다."

 "방향제요?"


 "예에. 이 녀석이 길에서 사람을 유인해 데려오거든요. 제가 본 건 이 고양이가 아니라 노란 고양이고 의사 말로는 자기는 노란 고양이 같은 건 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만, 환자한테 LSD같은 걸 주는 의사 말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여하튼 그 고양이가 지나가는 사람한테 말을 걸거든요. 엄한 사람을 정신이상자로 몰면서 이 병원에 가보라고 하는데 이게 말솜씨가 교묘해서 깜박 넘어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와가지고 진료실에 들어가면 의사가 차를 한 잔 주는데 거기도 이상한 게 들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고, 또 진료실 안에 방향제를 뿌려 놓는데 거기 마약 성분이 있어서 일정 시간 이상 냄새를 맡았다간 중독된다고 하더군요. 중독된 환자가 다시 병원에 찾아오면 그때부터 비싼 상담료를 뜯는다고요."

 "...그러니까, 고양이가 말을 한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니까요. 이 회색고양이를 취조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속히 연행해 가시지요."

 형사들은 나를 미친 사람 보듯이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래도 일단 검사는 해 보겠다면서 내 머리카락을 두어 가닥 채취해 갔다. 진료실을 뒤져 방향제와 자동분사기도 가져갔다. 하지만 고양이는 데려가지 않았다.


 "이봐, 네 주인이 마약사범 노릇을 하다 경찰을 피해 도망갔다는데 이제부터 어쩔 셈이야? 누구 맡아 줄 만한 사람은 모르고?"

 고양이는 나를 쳐다보더니 귀염성있는 소리로 야옹 하고 울었다. 당장 갈 데가 없거든 자수하는 게 어떠냐, 경찰은 아마 동물보호법을 준수할 테니 취조를 받는다고 해도 네가 협조적으로 나간다면 험한 일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 안락사당할지 모르는 보호소보단 교도소가 낫지 않겠느냐, 형기를 마치면 경찰 중에 마음씨 좋은 사람이 길러주겠다고 할지도 모르잖느냐. 뭐라고 말 좀 해 보라고 얼렀지만 고양이는 그저 가르랑거릴 따름이다. 잘 생각해 보라 당부하고 병원을 나왔는데 글쎄 이 녀석이 나를 졸졸 따라오는 것 아닌가. 난처한 행색으로 종종걸음을 치는데 저만치서 노란 고양이가 길을 막고 앉은 것이 보였다. 나는 노란 고양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 너도 의사의 고양이냐?" 

 고양이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은 길거리에서 노란 고양이와 이야기하는 미치광이고 나는 당신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데 내가 의사의 고양이건 아니건 그런 게 무에 그리 중요하겠느냔다. 나는 양손으로 고양이의 볼살을 주욱 잡아당겼다. 말랑말랑한 볼살은 당기는 대로 잘 늘어났다. 정신에 이상이 생기면 처음에는 환청을 듣고 그 다음에는 환각을 본다고 들었다. 광증이 깊어지면 더 나아가 환촉까지 느끼게 되는 걸까?

 "네 말대로 나는 고양이와 이야기하는 미치광이일지 모르지만 너만 입다물면 증거는 없어진다. 의사는 도망갔고 형사들도 내가 너한테 말을 거는 걸 직접 본 건 아니니까 잡아떼면 그만이야."

 허튼소리를 못 하게 할 요량으로 볼을 잡아늘렸건만 고양이는 환각답게 잘만 나불거렸다. 그렇다면 거래를 하지 않겠느냔다. 저 회색고양이는 젖먹이 때 사람 손을 타는 바람에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이제와서 거리에 나앉는다면 죽을 게 뻔하니 당신이 거두어줄 수는 없겠는가, 그렇게만 해 준다면 두 번 다시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 

 "공짜로는 안 돼. 우리 집에 살려면 밥값을 해 줘야겠다."

 내가 시키면 유자라도 깨물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묻자 회색고양이가 귀염성있는 소리로 야옹 하고 울었다. 자기는 의사의 진료실에서 분유를 얻어먹으며 컸으니 유자 향에는 익숙하다는데. 좋아. 데려가지. 노란 고양이의 통역을 듣고 나는 회색고양이를 안아들었다. 
 

 "여기 있는 시커먼 녀석이 눈을 뜨거든 바로 나한테 알려라. 내가 없으면 이 유자를 콱 깨물어서 못 나오게 막고." 

 방에 도로 검은 고양이 그림을 걸어 두면서 당부하자 회색고양이는 별 이상한 걸 다 걱정한다는 듯 태평한 소리로 야옹 하고 울었다. 하지만 퇴근해 현관을 열어 보면 열에 아홉은 검은 놈이고 회색이고 똑같은 모양새로 동그랗게 옹송그린 채 누가 왔는지도 모르고 쿨쿨 자느라 바쁜 것이다. 나는 단념하고 화장실 냄새도 줄일 겸 유자 향 방향제를 샀다. 오래 피워 두면 벽지에도 향이 밸 테니 3차원으로든 2차원으로든 나올 엄두를 못 내리라. 나는 회색고양이에게 중성화수술을 시켜줘도 될지 물어보고 싶어서 이따금 모퉁이를 서성거렸지만 노란 고양이는 약속대로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히 회색고양이는 발정이 와도 요란하게 울거나 하지 않았고 방향제 탓인지 동네 수코양이들이 몰려와 오줌을 뿌리는 일도 없었으므로 특별히 건강에 이상이 없는 한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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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월 16.08.01 02:10 댓글

    환상같은, 환상적인 이야기였어요.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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