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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반(反)빙하 소설

2015.10.01 04:1610.01

 
반(反)빙하 소설
 

 
 
 
  
 
  지금 어물전에서 회쳐지는 물고기들도 가족들이 있겠지. 아내와 자식, 친척들이 있겠지. 행복했겠지. 낚싯대에 물릴 줄은 몰랐겠지. 그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낚싯대 없는 날도 있었겠지. 저 먼 옛날 개들은 자유롭게 들판을 뛰어다녔을 것이고, 총 겨누고 욕 나누는 북한 놈들과도, 정 나누고 지내던 때 있었겠지. 싸우지 않아도 될 때. 행복할 때. 슬픔 없는 때, 그래, 있었겠지, 하지만 빙하는 녹지. 빙하는 녹지. 막으려 해봤자 막을 수 없지. 녹아버리지.

  
  나쁜 놈!
  연은 굳게 다짐했다. 이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저 얄미운 놈의 반질반질한 귀싸대기를 한대 후려치자. 그런 다음 저 놈에게 누나답게 쏘아주는 거야. 나는 08학번이고 넌 09학번이야. 그러니 내가 너보다 한 살이 더 많고, 넌 남자야. 연상의 여자한테 다짜고짜 입 맞추면 되겠니. 안 되겠니. 키스를 하려면 허락받고 해야지! 키스해도 돼요? 싫어. 정말 안돼요? 뭐, 하든지. 아니지, 아니지. 이게 아니다. 여러 말 할 필요 없다. 일단 귀싸대기 두 대를 치고, 세 대를 치고, 다섯 대는 쳐야겠다. 그러고 나서 평소보다 3옥타브 정도 높은 ‘솔’음으로 ‘흥’이라 내뱉고 여기를 나가버리자. 이 입술이 떨어지기만 하면.
  연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눈을 떴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보기 싫어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도 눈감았다. 그날은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고, 연은 손이 너무 시려 남자의 귀싸대기를 못 때렸다. 거리의 연인들은 꼬옥 손을 잡고 다녔고, 그 날까지는 561일 남아있었다.
 
 D - 390
 
  찌이이이익~!
  연의 얇은 티셔츠가 쭈욱 찢어졌다. 찢어진 티셔츠 사이로 드러난 검은 브래지어를 본 남자는 침을 꿀떡 삼키더니, 광기의 야수전사로 변신했다. 그는 이백오십오 미터 상공까지 뛰어올랐다가 공중제비를 세 번 정도 돌고선,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남자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명의 2군 투수가 처음으로 올라선 마운드. 각오를 담아 던지는 공이 가벼울 리 없다. 생각보다도 훨씬 묵직하게 들어오는 공에 엉겁결에 포수가 된 연은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공을 처음 던져본다던 투수는 꽤나 배짱이 넘쳤다. 던지는 족족 정중앙에 직구, 깊숙이. (최고구속 152km/h) 미트에 박히는 공의 소리는 우렁차고 리드미컬했다. 연이어 외쳐지는 심판의 함성.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아~웃!
  연은 그대로 삼진 아웃 돼버렸다. 남자가 뛰어올랐던 이백오십오 미터보다 곱절은 높이 날아오른 그녀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거다. 이 것이었다. 이 男子.  
  이날 경기는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진행되었으며, 선수 부상을 우려해서 3회 만에 끝났다. 비록 무승부였지만 양 팀은 서로 만족했고, 뜨거웠던 경기내용과는 다르게 훈훈했다. 이번 경기에서 처음 등장한 신예투수는 이날 총 200여 개의 공을 던졌으며, 거칠고 야생적인 공으로 짐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늘 수줍었던 남자는 사귄 지 150여일 만에 처음으로 연에게 사랑한다 말했고, 연은 바보가 되어버렸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남자의 이름은 남자가 아니었다. 다만 지금 이 시점의 이름이 그에게 의미 없을 뿐이었다.
 
D – 205
 
연과 남자와 쌈밥집
 
 
이 년 젓가락에는 법도가 없다
 
그 삼겹살은
마지막으로 남은 고놈의 흑돼지 삼겹살은
눈치를 스리슬쩍 보다가, 남 안볼 때 슬쩍짭짭 먹어야 하거늘
영점 팔초 그 잠깐, 망설임도 없이
그 한 점을 집어
상추에 얹더니, 구운 마늘 한 조각에
밥도 있고 버섯도 있고 쌈무도 깔아넣네
아아, 저것은
완전체 쌈?
 
귀찮아서 어지간해선 만들지 않는다는 그 쌈
아~ 소리와 함께 느닷없이 입안에 들어온 그 쌈
연이 입이 아닌 내 입에 들어온 쌈
 
어째선지 좀
싱거웠던 (1)
 

D – 76
 
그녀가
건의했다.
 
우리 애완동물이나 하나 기를까?
연과 남자는 동거 중이었다. 남자는 신문사에서 일했고, 여자는 지방 의류잡지의 모델이었으나, 이 무렵은 집에 있는 때가 훨씬 많았다. 여자의 외로움을 걱정한 남자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기르라고 말했다. 연은 그 말에 삐쳤다. 기르라니, 당연히 같이 기르는 것 아냐? 남자는 그녀의 입을 막았다. 입으로. 연은 남자를 째려보다, 눈을 감았다. 남자와 연은 애완동물 가게에 갔다. 비싼 돈을 내고 산 애완동물은 진돗개였다. 우둔하게 생긴 꼴이 널 닮았다며 연이 웃어댔다. 그 녀석은 수컷이었다. 이름은 고양이라 붙여졌다. 남자의 작품이었다. 장난기가 조금 지나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이 고양이를 꼬옥 껴안을 때부터 남자는 유치한 질투심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연은 웃었다. 남자가 고양이마저 질투하는 게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에도 그날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D - 1
  
  멍멍! 멍멍! 멍멍멍멍멍멍멍!
 
  고양이가 하늘을 보고 미친 듯이 짖어대고 있었다. 그걸 보던 남자는 연에게 무심히 말했다. 저거 봐. 그냥 거세시키자니까.
 
  D - Day
  
  “저 아기 좀 봐. 너무 귀엽다.”
  아기는 귀여웠다. 둥그런 얼굴에 보들보들한 피부. 하지만 남자는 어느 새 저만치 달려가 아기의 머리를 만지는 연이 훨씬 더 귀엽다고 생각했다. 때는 점심시간. 날은 화창했다. 공원으로 나오기로 한 선택은 꽤 좋았다. 연은 유모차를 끌고 있던 아기 엄마에게 물어봤다.
  “이 아기 몇 개월이나 됐어요? 어떡해, 너무 귀엽다."
  “지난주에 막 돌잔치 했어요. 이제 슬슬 걸어야 될 텐데. 설 생각도 안 해서 걱정이에요.”
 아기 엄마는 나이가 꽤 들어보였다. 40대 초 중반?
  ‘늦둥이구나. 진짜 사랑 많이 받았겠다.’
  남자는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기에 즐겁게 이야기 나누는 연과 아줌마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혼자 주변 산책을 했다. 공원은 넓고 쾌적했다. 낚시꾼들은 호수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뛰놀고 있었다. 발바닥 지압코스를 포함한 산책코스를 한 바퀴 반 정도 돌던 남자는 무심코 하늘을 바라봤다. 푸르고 맑은 하늘이었다. 정말 맑고 투명한 하늘이었다. 그리고 눈에 띄게 커다란 그 것도 역시 맑고 투명했다. 어어? 자기야. 자기야!
  “이 아기 좀 안아 봐도 되나요?”
  “그럼요. 조심해서 안아주세요.”
  연이 아기를 안고 살살 흔드는데 멀리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건 목소리라기 보단 고함소리였고, 고함소리라기 보단 울부짖음이었다.
  “자기야! 뛰어!”
  “뭐?”
  “미친년아! 뛰라고!”
  남자는 뭐라 설명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남자가 가리킨 곳, 하늘을 바라본 연은 굳어버렸다. 올려다본 그 곳엔.
  손이 있었다. 사람 네다섯 명쯤은 한 번에 잡을 수 있을 만큼 큰 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은 진짜로 사람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연은 있는 힘껏 뛰었다. 하이힐이었다. 넘어졌다. 품안의 아기는 힘껏 울었다. 손은 연과 아기를 동시에 잡았다. 그리고 들어올렸다.
  “내려놔! 이 미친 새끼야! 시발.”
  저 멀리서부터 달려온 남자가 그 손에 매달렸다. 연을 끌어내리려고 그 손을 때리고 차고 깨물었다. 하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하늘로 하늘 위로 쭈욱 쭉 올라갔다. 이미 먼 곳이 되어버린 지상에서 아기 엄마가 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아아아. 우리 아이 돌려줘요.
  그 투명하고 푸른 손의 주인은 앙팡 행성인(2)이었다. 앙팡 행성은 지구에서 아주 먼 행성으로 요즘 지구인 낚시가 유행하고 있었다. 낚시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지구와 공간이 연결되어있는 워프 낚시터에서 투명스프레이를 뿌린 손을 넣기만 하면 됐다. 앙팡인인 다영과 창수는 최근 한 벤처 사업가가 개발한 이 낚시에 푹 빠져있었다. 창수는 막 수확물들을 망에 넣으려는 다영이에게 말했다.
  “야, 다영아.”
  “왜?”
  “애기는 불쌍하다. 놔주자.”
  “쯧, 그렇긴 하다.”
  앙팡인들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 다영이는 지구를 보고선 대충 손가락으로 어림을 잡았다.
  “저쯤에서 잡았었지?”
  “어, 저기 반원 모양 비슷한 땅 있는 곳. 어, 거기. 맞아”
  “많이 먹고 무럭무럭 자라서 또 잡혀야 한다.”
  덕담을 한 다영이는 아기를 내려놔줬다. 아기는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자, 울음을 그쳤다. 여긴 어디지. 아기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바라봤다. 그 곳에 엄마는 없었다. 그 대신 도로에 팔열종대로 늘어선 사람들이 똑같은 자세로 걷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빨간 별을 단 깃발과 황토색 옷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커다란 탱크가 줄을 맞춰 행진하고 있었다. 아기는 그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따라 해보고 싶었다. 아기는 무릎에 힘을 줬다. 아둥바둥대다가 겨우 일어섰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넘어질 것 같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마침내 내딛은 오른발. 한 걸음? 두 걸음! 까·꿍.

 
  
  연과 남자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주변에서 이상한 악취가 나고 있었다. 구정물과 휘발유가 섞인 것 같은 냄새였다. 냄새 때문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남자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상황을 인지하고선 차렸던 정신을 다시 놓치려했다. 그걸 본 연이 귀싸대기를 있는 힘껏 때렸다. 다섯 대 정도.
  "정신 차려! 자기야."
  "어, 응."
  거대한 망 안에는 세계 각국에서 잡혀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망 바깥으로는 자신들의 집에 있는 것보다 다섯 배는 큰 가구들이 눈에 띄었다. 다섯 배 큰 의자. 다섯 배 큰 책상, 다섯 배 큰 콘돔. 아.
  혼돈과 아비규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인 남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남자의 토익 LC 점수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따라서 단순한 영어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납치되었어. 우린 힘을 합쳐야 돼! 칼이나 라이터를 꺼내. 우린 할 수 있어."
  흡연자들은 의기양양하게 라이터를 꺼냈다. 이 날이 올 줄 알고, 담배를 안 끊었지. 마약상이나 갱은 단검을 꺼냈고, 동네 아줌마는 과도를, 닌자는 수리검을 꺼냈다.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하나였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 된 기쁨, 다 누리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방문을 열고, 앙팡인인 다영과 그녀의 딸 다은이가 온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대로 멈췄다. 일곱 살짜리 다은이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지구 생물을 바라보다 말했다.
  "엄마. 이거, 다 먹을 거야?"
  "응, 왜?"
  "나 하나만 기르면 안 돼?"
  다영은 잠깐 고민했다. 음, 애완동물을 기르게 하면, 애가 온순해지고 책임감을 갖게 되겠지? 계산을 마친 다영은 다은이를 엄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은이 네가 밥 꼬박꼬박 주기로 약속하면."
  "응, 약속."
  "그럼, 골라봐."
  망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상황인지 감이 안와, 서로를 마주보았다. 눈치 빠른 몇몇 마약상은  자신을 골라달라는 듯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보던 다은이는 오랫동안 고민했다. 딱 하나만 고르기로 했지만, 그건 뭔가 아쉬웠다, 얘를 고르자니 얘가 더 좋을 것 같고, 걔보단 얘가 더 예쁜 것 같았다. 이 세상 어린 애는 다 똑같다. 많은 것 중 딱 하나만 고르라고 시키는 일은 어느 아이에게나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였다. 다은이의 눈에 연과 남자가 들어왔다. 다은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 둘은 손을 꼬옥 잡고 있었고, 잘 하면 하나라 우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은은 연과 남자를 망에서 꺼내면서 말했다.
  "이렇게 하나 할래."
  "안 돼. 그게 하나니? 처음 약속대로 해."
  "잘 봐. 얘네 둘 붙어 있잖아. 엄마, 제발."
  하지만 다영은 얄짤없었다. 그대로 손가락으로 연과 남자의 맞잡은 손을 갈라놓았다. 어린 때부터 고집을 받아주면 버릇만 나빠지는 법이니, 이건 불쌍해도 어쩔 수가 없다.
  "이젠 둘이지? 하나만 골라."
  다영은 엄한 표정으로 다은을 바라봤고, 연은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눈치 챘다. 이 세상 엄마는 다 똑같다. 사랑하니까 다 해주고 싶지만, 정말 사랑하니까 절대 허락 못 한다. 연은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결국 하나만 남게 될 거야.'
  연은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가 천장을 올려봤다. 마음의 다짐을 마친 연은 남자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입을 맞췄다.
  이런 상황에 도대체 무슨 짓이야. 이 여자는. 당황한 남자는 다짐했다. 이 입술이 떨어지기만 하면, 이 여자에게 바보 같은 이 여자에게. 연 이 년을.
  입맞춤은 너무 짧았다. 너무 짧은 순간이라, 남자는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해야 할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연은 달렸다. 이백오십오 미터정도는 뛰어오를 기세로 도약했다. 다은이의 머리. 넓디넓은 그곳은 이미 대 운동회. 줄다리기 선수가 된 연은 줄을 꼬옥 잡았다. 줄다리기를 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1. 줄을 양손으로 꽉 감아쥔다. 한쪽 겨드랑이에 줄을 바짝 끼운다.
  2.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자마자, 고개를 바짝 들어 뒤쪽 하늘을 본다. 그와 동시에 허리를 세우고 엉덩이를 번쩍 치켜든다.
  3. 죽을 각오로 잡아당긴다.
  이런 비법을 전혀 몰랐던 상대 선수, 머리카락들은 휘슬이 울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비명을 질러대며 뿌리 뽑혔다. 그 반동에 연은 넘어지고, 앙팡인 꼬마는 울었다. 연도 울었다. 깜짝 놀란 꼬마의 엄마는 연을 떼어내서 방바닥에 던졌다. 어질러질 바닥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달려간 다영은 다은이의 머리를 껴안았다가, 입김을 후후 불었다가, 손으로 쓰다듬었다가, 안절부절 못했다.
  "우리 아가 어떡해. 울지 마. 아가야. 우리 아가. 울지 마."
  "엄마, 흐아아앙. 엄마아. 엄마."
  다은이는 울면서 손으로 남자와 다른 한 금발의 백인여자를 가리켰다. 다은이의 머리에 약을 발라준 다영은 둘만 따로 뺐다. 그리고 망을 냄비에다 통째로 부었다. 아까 바닥에 던졌던 재료도 잘 씻어 넣었다. 물을 붓고 채소를 숭숭 썰어 넣고 불을 올렸다. 오늘의 요리는 웰빙 매운탕. 다영이의 콧노래와 함께, 냄비 안에서 커다랗고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수가 마루에서 신문을 읽다 소리를 듣고 중얼거렸다. 그것 참 싱싱하군.
  주변이 잠잠해질 때쯤에서야 남자는 제정신을 차렸다. 그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뭔가를 했어야만 했다. 뭔지 몰라도 뭐든 했어야 했다. 하지만 남자는 하지 못했고, 다은이는 해냈다. 이건 당연한 얘기겠지만, 남자의 이름은 남자가 아니었다. 쟤 이름 뭐로 지을 거냐고 엄마가 묻자, 다은이는 망설임도 없이 뽀삐라고 답했고, 그의 이름은 뽀삐다.
 
  D +1
  
  다은이는 평소보다 30분은 일찍 일어났다. 뽀삐와 해피의 먹이를 챙겨주기 위해서였다. 먹이는 어제 먹다 남은 음식들을 대충 섞은 죽이었다. 어차피 뭐 먹는 걸 좋아하는지는 몰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파란색 플라스틱 그릇에 음식을 가득 담은 다은이는 해피와 뽀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뽀삐는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싫어했다. 머리를 쓰다듬으려하자, 재빨리 뛰어서 소파 구석으로 숨어버렸다.
  아무래도 적응을 못하는 쪽에 더 신경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분고분히 밥을 먹는 해피를 보던 다은이는 소파 밑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에는 겁에 질린 뽀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외롭고 불쌍해보여서 발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질질 끌려오는 뽀삐. 다은이는 해피가 먹고 있던 밥그릇을 뽀삐 앞으로 가져다줬다.
  "뽀삐야. 밥 먹어야지. 응? 이거 맛있어. 먹어봐? 응?"
  뽀삐는 고개를 흔들며 밥을 먹지 않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해피가 다가왔다. 그녀가 뽀삐의 귀에 대고 뭐라 말하자, 뽀삐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의 말이 옳다. 먼저 죽은 그녀를 위해서라도, 자신에겐 이미 죽을 권리가 없었다. 살아야 한다. 그 생각에 뽀삐는 고개를 숙여 죽을 먹었다.
  밤이 되자마자 뽀삐는 몰래 주변을 살폈다. 도망갈 만한 통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앙팡인의 집은 지구인의 집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이 다섯 배 정도 컸다. 다섯 배 정도 높은 현관문 손잡이에 좌절한 뽀삐는 창문 밖을 내다봤다. 그가 지금 있는 곳은 고작 아파트의 2층이었지만, 높이는 십 미터가 넘었다. 나갈 방법은 전혀 없었다.     
 
  D +15
 
  미국에서 왔다는 금발여자, 해피는 말했다. 생각해봐. 그녀가 당신이 그저 살아있기만을 바랬겠어? 삶의 필수요건은 밥보다도 행복이야. 배고파서 자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다만 자신의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자각할 때, 사람은 자살해. 물론 넌 자살을 할 사람은 아냐. 이미 죽어버린 그녀 때문에 넌 죽어도 죽을 수 없어. 하지만 네가 하고 있는 건 살아도 사는 게 아냐. 죽은 그녀도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랄 거야. 그렇게 희생을 했는데 당신이 불행하면 저승에서도 억울해 미칠 거라고.  
  "다녀왔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다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다은이는 1시가 되면 집에 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해피는 일어나 달려갔다. 다은이의 굵은 다리에 매달렸다. 그러면 다은이는 웃으며 해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뽀삐는 그런 해피를 경멸했다. 어떻게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말을 들을까. 재롱을 피울까. 웃을 수 있을까.  
  "뽀삐도 잘 있었어?"
  뽀삐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는 다은이의 손을 뿌리치고 소파 밑으로 들어갔다. 다은이는 약간 상심한 표정이 되었지만, 예전처럼 억지로 빼내려고 하진 않았다. 해피와 다은이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뽀삐는 눈을 감았다.
 
  D +41
 
  섹스를 하고 난 밤. 그녀는 침대 위에 앉아서 그를 빤히 바라보곤 했다. 피자 위에 뿌리는 파마산 치즈가루처럼 꼼꼼히, 그리고 부드럽게 그를 바라봤다. 연애경험이 별로 없었던 그는 그녀의 시선을 잘 마주보지 못했다.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서툰 농담을 건네면 그녀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그의 등을 잡고 품에 안아버렸다. 기억이란 고시텔이랑도 같은 것이라, 소중한 걸 담아두는 것조차도 힘들 정도로 좁았다. 담아두는 것에만 집중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걸 몰랐다.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뽀삐는 소파 밑에서 그들을 바라봤다. 해피가 다은이의 발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뽀삐는 그 때 그녀의 얼굴을 잘 담아두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를 버티게 해주던 연은 마음속에서도 지워져가고, 다은이도 이젠 뽀삐를 신경 쓰지 않았다. 가슴 속에 연기가 낀 것 같았다. 신경써주는 이가 없다고 생각하자, 그 전까진 전혀 몰랐던 거대한 외로움이 몰려왔다. 그는 소파 밑에서 뛰쳐나갔다.
  "어, 뽀삐야?"
  뽀삐는 어느새 다은이의 다리를 껴안고 있었다. 다은이보다도 뽀삐 자신이 더 놀랐다. 그리고 스스로를 경멸했다. 외로웠다. 연이 잊혀져갔기 때문일까. 다은이의 무관심 때문일까. 그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은이는 행복해했다. 다행이다. 드디어 뽀삐도 우리 집에 적응하기 시작했구나.
    
  D +90
  
  모처럼 찾아온 주말, 창수는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광고가 시작되자, 심심해진 창수는 외쳤다. 뽀삐, 해피 이리와. 뽀삐는 소파 밑에서 나왔고 해피는 다은이의 방에서 나왔다. 창수는 뽀삐와 해피가 말을 잘 알아듣고 찾아오자 기뻤다. 조금 놀아줘볼까? 그는 뽀삐의 양 겨드랑이에 엄지와 검지를 끼워, 들어올렸다. 위 아래로 잠깐 흔들어주다, 품에 안아줬다. 광고가 끝나고 TV에선 동물에 관한 퀴즈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창수는 문득 뽀삐와 해피가 두 발로 걷는 게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해피의 어깨를 왼손으로 꾹 눌러봤다. 잠깐 저항하던 해피는 아악~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잠시 기다리자 다시 일어섰다. 꾹 눌렀다. 일어섰다. 꾹 눌렀다. 그러다 문득 해피의 얼굴을 보니 눈에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그걸 본 창수는 머쓱해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해피야 미안해.
 
   D +117
  
  해피가 없었다면, 연은 안 죽어도 됐을지 몰라. 뽀삐는 도무지 해피에게 정이 들지 않았다. 해피를 볼 때마다, 의심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연이 만약 가만히 있었다면 그녀도 살아남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그녀가 헛된 희생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버리고 나면 뽀삐는 해피를 결코 좋아할 수 없게 돼버리는 것이다. 그랬기에 뽀삐는 그녀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주기적으로 섹스를 했다. 섹스를 하는 동안 죽고 싶다는 생각이나, 자신이 애완동물에 불과하단 사실은 떠오르지 않았다. 원하면 언제든지 했고, 그 것은 그들이 애완동물 생활을 견디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  
  말도 안 돼. 정말이야? 친구의 말을 들은 다은이는 놀랐다. 애완동물성형수술이라니, 이제야 알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꼬리달린 뽀삐나, 날개 달린 해피를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떨렸다. 수술 중 부작용과 고통이 있을 수 있다지만, 애들도 예뻐지는 일이니, 좋아하겠지?
     . 
 
  D +121
 
  뽀삐의 엉덩이 위로 꼬리가 대롱거렸다. 꼬리가 대롱거릴 때마다, 해피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롱, 대롱, 대롱, 해피. 해피. Happy. 앙팡인의 기술력은 대단했다. 생전 처음 달아본 꼬리임에도 감각이 예민했다. 털도 나지 않은 갈색의 꼬리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잘도 흔들렸다.   
  "뽀삐, 뭐하는 거야. 빨리 가자."
  꼬리를 흔들거리던 뽀삐를 보던 다은이는 목줄을 휘익 끌어당겼다. 한적한 공원, 따사로운 햇볕 아래로 크고 매끄러운 곡선이 하나 그려졌다.
  
  D + 207
 
  언제나와 같은 하루가 지나고 뽀삐는 온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깼다. 왠지 모르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마룻바닥을 걸었다. 엉덩이 뒤에 달린 꼬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입안이 영 텁텁했다. 바짝 마른 입안에서 구레한 입 냄새가 났다. 하지만 이젠 제법 익숙해져서, 양치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도, 안 할지도 모른다. 다영이와 창수는 자고 있었다. 다은이는 최근 남자친구가 생긴 후 집에 늦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이 곳 저 곳을 다니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바람이 목 뒤로부터 등으로 발끝으로 쓸어내리는 듯 싸늘한 느낌. 온통 차가워졌다가, 화악 뜨거워지는 느낌. 뽀삐는 재빨리 뒤돌아봤다. 그 곳엔 연이 있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살짝 웃더니 등을 돌려 그에게서 멀어졌다. 깜짝 놀란 뽀삐는 그녀를 쫒았다.
  연이 발을 디디는 곳마다,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새빨갛고 뜨거운 그것들은 연을 쫒아가는 뽀삐를 감싸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연을 놓칠까봐, 뽀삐는 달렸다. 두 손을 흔들어 꽃들을 걷어냈다. 손으로 꽃들을 걷어낼 수록, 연의 모습은 또렷하게 보였다. 더 빨리, 더 힘껏, 뽀삐는 꽃을 걷어냈다. 양 팔을 흔들며 허우적대던 그는 마침내 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껴안았다. 그 순간 그를 감싸고 있던 꽃들이 새하얗게 터져나갔다.
  터져버린 그 것이 느낌표의 궤적을 그리던 그 때에야 그는 스스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별일 아니었다. 별일은 아니었다. 그는 성기를 잡고 있던 손을 폈다. 멍해진 그의 심장에선 꽃이 지고 있었다. 허무했다. 마치 척추 뼈가 뽑혀져 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주저앉아 천장을 바라봤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조금씩 연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침대에 가만히 앉아서 그를 바라봤다.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뽀삐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게 되는 것이다. 그녀를 위해 살게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똑똑한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입 맞출 때 이미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뭐가 더 나을지.
  어느새 상상 속의 그녀는 그를 비웃고 있었다. 나쁜 년……. 개년. 그 순간 뽀삐는 참지 못하고 바닥을 내리찍었다. 쿵. 쿵. 쿵.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깬 창수와 다영이는 마루로 나왔다. 소파 밑에서 난 소리였다. 바닥을 두드리는 뽀삐의 발밑엔 희멀건 분비물이 있었다. 뽀삐의 커져버려 빨갛게 타는 것 같은 모양의 성기를 본 다영이는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쟤 그냥 거세시키자.
  
  D + 3570
  
  뽀삐는 다은이의 무릎 위에 배를 위로 한 채 누워있었다. 뽀삐가 눈을 감자, 다은이는 뽀삐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잠들어가는 뽀삐의 귀로 다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뽀삐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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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쌈장이 없었다. 
 (2)앙팡행성인: 외계행성 앙팡에 거주하는 외계인으로 파란색 피부를 가졌고 겨드랑이 털이 없다는 것. 전체적으로 얼굴이 불독을 닮았다는 것. 덩치가 사람의 다섯 배 정도라는 것, 손은 열배 정도 크다는 것. 남성의 생식기가 엉덩이 쪽에 달려있다는 것을 빼면 인간과 똑같이 생겼다. 많이 다르게 생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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