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성문 너머 코끼리

2010.12.31 23:5512.31

하나.

녀석은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은 어떤가요. 나는 오늘도 하루 종일 풀을 베었어요. 손가락에서 풀 냄새가 나요. 녀석은 내 키보다 더 많은 양의 풀을 먹어치웠어요. 당신이 놔두고 간 저울로 재보니 58kg이나 먹었어요. 그렇게 먹은 주제에도 설탕을 더 이상 주지 않으니 그게 불만스러운가 봐요. 가져다주는 대로 풀도 꾸역꾸역 잘 먹긴 하지만, 풀을 다 먹고 나서도 설탕이 없으면 발을 거세게 굴러요. 긴 코를 치켜들고 부오오우, 파오오우, 큰 소리로 울어대죠. 하지만 난 설탕을 주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당신은 내게 말했었죠. 당신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물을 데리고 왔다고. 솔직히, 난 아름답긴 커녕 무서워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를 못했어요. 하지만 내가 맡은 역할이 이거라, 담당관한테 밉보이기 싫어서 억지로 고개를 들었죠.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에요. 그게, 그렇잖아요. 녀석은 너무 크잖아요? 당신이 처음 왔을 때, 사람들 반응을 생각해봐요. 아무도 당신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잖아요. 저 괴물 때문에 주저앉고 소리 지르느라. 장군님까지도 덜덜 떨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지 않았나요. 카룰 알죠? 내 친구. 그 자식은 근위대씩이나 되어놓고서도 창 떨어뜨리고 바닥에서 벌벌 기고. 내가 그 괴물 앞에서 고개를 든 것만으로도 엄청난 거였다고요. 당신은 그 괴물을 쓰다듬기까지 하면서 괜찮다고 말했지만, 난 전혀 괜찮지 않았어요. 그저 당신이 이상하기만 했죠. 당신은 이 괴물 앞에서 어쩌면 그렇게 멀쩡해 보일까. 난 다리에 힘이 자꾸 풀렸어요. 담당관 앞에서 주저앉을까봐 그게 계속 걱정이었어요.

슬금슬금 고개를 드는데, 이건 다리라기보다는 기둥에 가깝고, 입에는 이빨인지 뿔인지 모를 게 붙어있고, 코랍시고 달려 있는 건 그냥…… 호스였잖아요? 귀는 보자기보다도 크고. 나 정도의 조그만 여자애는 그 코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하늘나라로 가 버릴 거 같았으니. 죽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하늘로 붕 날아갈 거 같았어요.

물론 지금은 그렇게 무섭지 않아요. 당신이 말했듯이, 녀석의 눈을 보면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곤 하죠. 이렇게 커다랗고 힘센 녀석이 어쩌면 이렇게 선한 표정을 하고 있을까. 그게 더 신기해지곤 해요. 당신이 웃을 때면 꼭 이런 기분이 들었는데. 당신은 잘 있을까요. 녀석이 우리나라의 풀도 잘 먹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내가 녀석에게 풀을 먹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신은 뭐라고 할까요. 웃을까요, 화를 낼까요. 기왕이면 웃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당신이 뭐라고 하던 난 설탕을 먹이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당신이 뭐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녀석은 나한테 맡겨둬요.


둘.

당신은 예언자의 존재에 대해서 언제 알았나요? 전부터 얘기해줄까, 계속 고민했었는데. 그래도 결국에는 알게 되었겠죠. 모든 사람들이 당신과 구세주에 대해서 얘길 했으니. 당신이 오기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구세주랍시고 난리를 쳐 댔었죠. 그 중에 어떤 사람은 그런 속임수로 사람들의 돈을 긁어모아서 영주가 되기도 했어요. 대부분은 그냥 미친놈 취급받고 끝났지만요. 하지만 당신은 이 얘기에 대해서 조금도 알지 못했죠. 미안해요. 진작 얘기해 줄 걸 그랬었나 봐요. 얘기해 준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그건 잘 모르겠네요.

녀석은 오늘도 풀을 먹었어요. 꼬박꼬박 50kg에서 60kg 정도는 먹어요. 전보다 좀 건강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자꾸 사람들이 녀석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해서 놀라곤 해요. 난 녀석이 아니면 이제 갈 데도 없어요. 녀석을 살리기 위해서 기껏해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열심히 풀을 베는 거 밖에 없어요. 하지만 나 혼자 하기엔 역시 힘에 부쳐요. 담당관한테 풀을 베어 줄 사람들을 조금 더 구해줄 수 없냐고 물어봤는데, 뭐 하러 그 괴물한테 그렇게까지 힘을 써야 되냐고, 한 마디 던지더니 다시 날 돌아보지도 않더군요. 어쩌겠어요. 힘닿는 데까지 낫질해야지. 근데 이게 쉽지가 않아요.

그 예언자 있잖아요. 쿨리크.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나 쿨리크 할머니를 알아요. 그 구세주 예언을 하고 나서 성에서 쫓겨났거든요. 쫓겨나고 나서는 아예 담을 넘어서 우리 마을로 들어왔어요. 그 조금 후에 내가 태어났고요. 유명한 예언자가 있으니까 우리 엄마는 신나서 날 안고 쿨리크 할머니를 찾아갔어요. 보통 사람들은 반역을 예언한 사람이라고 말도 잘 안 걸었는데, 우리 엄마가 성격 희한한 거죠. 근데 이 할머니가 날 보더니

“왕궁 성문을 열 아이로구먼.”

해 버린 거예요. 왕궁 성문을 연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요? 우리 엄마는 때때로 영주의 성문을 여는 소녀들을 본 적이 있대요. 물론 영주의 아들놈들은 늘 그렇듯이 빌어먹을 놈이 많아서, 대부분 논두렁에서 소녀들이 한바탕 엉엉 울고 나면 모든 일이 끝나버리곤 하죠. 하지만 아주 가끔, 몇몇은 영주의 성문을 여는 거예요. 소녀들이 아주 아름답거나, 영주의 아들놈이 꽤 착하거나 한 경우에요. 아니면 서로 많이 좋아하게 된 경우일 수도 있겠죠. 예쁘고 화려하게 땋은 머리를 양쪽으로 얹어 올리고서, 질질 끌리는 빨갛고 긴 치마를 입고, 영주의 성문으로 들어가는 소녀들이 아주 가끔, 있기는 있다는 거예요. 영주의 성문을 열면, 돼지가 새끼를 열 마리 낳으면 아홉 마리는 영주에게 바치는 게 아니라, 그 아홉 마리 새끼돼지를 진상 받는 입장에 서게 되죠. 영주의 성문만 연다고 해도 눈이 돌아갈 판인데, 왕궁 성문이라니. 우리 엄마는 내 머리를 매일 땋아서 얹었어요. 머리 땋아서 얹는 거, 당신도 봐서 알겠지만, 높은 아가씨들이나 하는 거잖아요. 거기다가 쿨리크 할머니한테 보내서 글을 가르치질 않나. 어릴 때는 미레가 소젖 짜는 걸 도와줬다가, 아, 미레 알죠? 카룰이랑 결혼하기로 한 그 여자애요. 아무튼 미레가 소젖 짜는 걸 도와줬다가 엄마한테 뺨도 맞은 적이 있어요. 확 후려치고서는 울면서 그러더라고요.

“넌 왕궁 성문을 열 아이란 말이다!”

소젖도 한 번 제대로 못 짜봤는데, 낫질이야 제대로 하겠어요. 딱 죽을 맛이에요. 그렇다고 녀석을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알아서 잘 하고 있어요. 녀석은 걱정하지 말아요.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녀석을 지킬게요.


셋.

오늘은 유난히 당신 생각이 많이 나네요. 당신을 처음 보았던 순간이 떠올라요. 당신은 전혀 몰랐겠지만, 사람들은 다 놀랐어요. 예언의 내용이랑 똑같았으니까요. 하늘이 열렸고, 동그랗게 빛이 쏟아졌고, 구세주가 하늘을 뒤흔들 듯 커다란 회색 기사와 함께 나타났죠. 기사라기보다는…… 괴물이긴 했지만. 난 그렇게 빨리 왕궁 성문이 열리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왕궁 앞에 있는 북은 아무리 두드려도 왕궁 문을 열지는 못하는데. 당신은 순식간에 왕궁 문을 열어버린 거예요. 그것도 여왕님까지 소환해가면서. 그날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날이었어요. 미레랑 카룰이 약혼하는 날이었고, 왕궁 성문이 열린 날이었고, 여왕의 아들을 만난 날이었고, 녀석도 만난 날이었죠. 솔직히 나, 며칠만 더 있다간 시청에서 잘릴 판이었거든요.

나는 담 너머 출신이라 도무지 그 번쩍거리는 기기들엔 익숙해지지가 않았어요. 지금도 잘 못 다뤄요. 당신은 왕궁에서 살았으니 더 화려한 것들을 많이 보았겠죠. 나는 자료를 찾으려고 기계에 손가락을 연결하기만 해도 온 몸에 소름이 돋아요. 처음 다룰 때는 거부반응까지 일어났어요. 촌스럽죠?

기계에 손가락을 대자마자 갑자기 시야가 바뀌더라고요. 커다란 금빛 시스템이 열리면서, 주변도 싹 바뀌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두려웠던 건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들이 끊임없이 내 뇌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것들을 복사하기 시작했죠. 신경 하나하나가 곤두섰어요. 머릿속을 지네가 휘젓고 있는 것만 같았죠.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어요. 내 비명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달려왔어요. 난 입에 거품까지 물고 쓰러져 있었다더군요. 단순히 쓰러져 있던 게 문제가 아니었어요. 내 공포가 시스템에 너무 강력하게 작용해서 데이터베이스의 1000분의 1가량이 날아갔어요. 시스템이 빨리 날 끊어내서 다행이었죠. 그 때문에 난 죽을 뻔 했지만. 아무튼 다른 사람들은 금방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 자료를 입력해서 돌아오는데. 난 겁먹어서 자료를 지우기나 하고 있으니. 최근 자료라 머릿속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빨리 재입력을 하긴 했지만, 그 다음부터 기계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무서워서…….

그러다보니까 어떻게 취직은 했는데…… 취직을 한 게 용한 거죠. 그나마 담당관이 날 불쌍하게 여기고, 불쌍하게 여기다보니까 겨우겨우 몇 달은 갔어요. 그렇지만 한계가 있죠.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직접 연결해서 입력하고 있는 걸 자판이나 두들기고 앉았으니. 월급이 아깝죠.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그 날 나를 딱 그 자리에서 계속 일하게 해 줄 구세주를 만난 거예요. 당신 말고, 여왕의 아들이요. 이상하지 않았어요? 왕궁은 그렇게 넓고, 당신은 왕궁에서 묵는데. 왜 녀석은 시청에 있는지. 그게 다 나 때문이었다고요. 여왕의 아들이 한다는 소리가, 오래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대요. 예뻐서 보고 있었대요. 난 그 날 그 사람을 처음 만났는데. 그 사람은 자료 입력하는 기계 앞에서 잭에 손가락을 댔다가 뗐다가 겁먹고 있는 날 진작 보고 있었던 거예요.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역시 왕궁 예언자의 예언이 틀릴 리가 없었다면서 신나서 동네에 떡이라도 돌렸을 거예요.

나도 그 생각했죠. 예언이 맞는구나. 미레랑 카룰의 약혼식은 못 가지만. 그 사람이 내 시꺼먼 공무원 유니폼을 벗기고 가슴팍에 손을 집어넣을 때도 그 생각을 계속 했어요. 예언이 맞는구나. 미레와 카룰을 생각하니 마음이 갑갑하네요. 카룰, 잘 되어야 할 텐데. 미레는 여전히 집에서 잘 나오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밤만 되면 모두들 미레의 집으로 찾아가고 있어요. 당신이 지금 옆에 있었다면 뭐라고 말해주었을까요.

아, 녀석이 오늘 베어온 풀을 다 먹었나 봐요. 당신이 녀석을 데려오면서 건네 준 종이를 아직 가지고 있어요. 철자법이 엉망인 건 알고 있나요? 우리말을 배웠다더니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ㅿ이나 ㆁ같은 글자는 아주 옛날 말인데. 이 기계를 가지고 당신에게 글자를 알려줬던 그 사람은, 또 아주 옛날에서 글자들을 보낸 걸까요. 그래도 당신이 초원에서 이 녀석이 얼마나 먹는지 써 줘서 다행이에요. 그 정도는 챙겨서 먹이고 있어요. 쉽지는 않지만요. 녀석은 내가 손을 내밀면 코를 내 손에 조용히 가져다 대요. 녀석이 뿜는 콧김은 강하지만 따뜻해요. 절대로 설탕은 먹이지 않을게요.


넷.

당신이 떠나기 직전에 봤던 녀석을 기억해요? 지금 당신은 녀석을 알아보지도 못할 거예요. 말하고 보니 알아보긴 할지도 모르겠네요. 이렇게 커다란 녀석이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당신이 왔던 그 땅에는 녀석처럼 커다란 괴물도 여러 마리 있다면서요. 그런 녀석들이랑 섞어 놓으면 당신은 아마 이 녀석을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녀석은 아주 씩씩해요. 쓰러질 것처럼 힘없이 울지 않아요.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처럼 우렁차게 울죠. 그럴 때면 시청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려요. 당신이 말했던 그 곳으로 지금이라도 달려갈 것만 같아요. 대초원이요.

종종 꿈을 꿔요. 꿈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항상 배경은 그 대초원이에요. 새파랗고 눈부신 풀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요. 그리고 녀석이 그곳 어딘가에 서 있죠. 나는 설탕을 들고 애타게 녀석을 불러 봐요. 하지만 녀석은 결코 나를 돌아보지 않죠. 때때로 나는 녀석과 함께 그 대초원을 달리고 있기도 해요. 아무리 달려도 초원은 끝이 나질 않아요. 이상한 일이에요. 난 단 한 번도 당신이 말한 것 같은 거대한 초원을 본 적이 없는데. 내가 본 파란 풀들이래야 보리밭이 전부인데. 이상하게도 그 대초원의 풀냄새가 꿈을 깨고 나서도 오랫동안 코끝을 간질여요.

내가 왜 풀을 먹이기 시작했는지, 묻고 싶겠죠. 당신이라면 벌써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카룰 때문에 울던 걸 기억하죠? 당신한테는 아주 단순하게 말했었죠. 굉장히 단순한 일이었지만, 단순하지 않기도 했었어요. 여왕의 아들은 난감해 하더군요. 날 정식으로 후궁으로 맞고 싶었대요. 반란을 일으킨 도당이랑 소꿉친구여서 좀 곤란해졌다는 거예요.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놓고는 내가 실망할까봐 걱정했지만, 나는 실망이 아니라 슬펐어요. 카룰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 게 절대로 아니었어요. 카룰이 얼마나 얌전한 아인데요. 처음 그 녀석이 창을 배운다고 했을 때, 어처구니가 없어서 미레랑 한참을 비웃었어요. 강에서 붕어를 잡아도 미레가 잡지, 카룰은 못했거든요. 나요? 나는 뭐…… 엄마한테 맞기 싫으면 셋이서 소풍갈 때 케이크나 만들어 가는 정도였죠.

그 날, 소문이 사실이 된 날, 미레 아버지가 밭을 빼앗긴 날에요. 카룰이 그 밭을 지키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거든요. 미레 아버지가 난리가 났어요. 미레 아버지는 처음 그 소문이 들렸을 때부터 말도 못했어요. 미레 어머니가 조금 기다려보자고 하는데도 쟁기를 집어들면서 영주님이랑 담판을 짓고 오겠다고 소리 지르고. 원체 성격이 그런 분이시기도 하고요. 그런데 자기 아들같은 카룰이, 미레랑 약혼까지 한 카룰이, 미레 아버지 땅이 이제 영주님 땅이라고 거기 버젓이 창 들고 서 있?니 얼마나 복장이 터졌겠어요. 너 이 새끼 죽여 버리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날뛰시는데, 카룰은 얼굴도 들질 못하더라고요.

요즘 담 안쪽에서는 별의별 얘기가 다 들려요. 카룰이 미리 반란자들과 모의했다가 반란자들이 쳐들어 온 순간에 왕궁을 습격하자고 외쳤다느니, 영주가 다니는 비밀 통로를 몰래 알아뒀다가 반란자들에게 알려줬다느니, 사실 그때 카룰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로 한 근위대들이 카룰을 배신해서 반란이 진압된 거라느니, 엄청나게 똑똑해서 옛날부터 거짓말을 하면 모두가 다 속았다느니, 성내의 모든 기계들을 다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느니, 사실 시청 안의 자료들도 밖에서 모두 카룰에게 해킹당하고 있다느니.

그 멍청한 카룰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미레 아버지가 사람들을 모아서 쟁기나 낫 같은 거나 들고 성으로 몰려갔을 때, 카룰한테 불검이 주어졌대요. 불검, 본 적 있어요? 나도 시청 안에 있는 거 한 번밖에 못 봤는데. 몇 걸음 멀리서도 그 사람의 얼굴을 인지하기만 하면 자동으로 검이 그 사람의 뇌를 끝장내버린다고 하잖아요. 카룰 뿐만 아니라 근위대 모두에게 그 불검이 주어진 거예요. 미레 아버지가 오고 있는데, 카룰이 불검을 들고 있었다고요. 카룰한테 그게 어떤 의미겠어요. 카룰이 근위대가 된 건 다 미레 때문이었는데. 미레는 약해빠졌다고 늘 카룰을 놀려댔거든요. 물론 근위대는 월급도 안정적으로 받고, 나름대로 담 안으로 들어갈 기회도 많긴 하죠. 아마 왕궁 근위대까지 승진하는 걸 꿈꿨을 거예요. 그 이상은 꿈꿀 애도 아니고. 카룰은 미레한테 어깨 펴고 살아보겠다고 근위대에 들어갔어요. 미레는 카룰의 구혼을 받아줬고요. 그런데 불검을 들고 미레 아버지를 노려보게 되다니.

카룰은 그냥, 불검을 떨어뜨리고 도망갔어요. 그거 말고 카룰이 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미레의 아버지 얘기를 듣고는 당신도 울었지요. 미레는 그 사건 이후로 집 밖으로 나오질 않았어요. 당연하죠. 마을 입구에 뇌가 깨끗이 지워진 채 매달려서 굶어 죽어가는 아버지를 누가 멀쩡한 정신으로 볼 수 있겠어요. 뇌가 지워져도 신경은 살아있는지, 미레 아버지는 때때로 경련을 일으켰어요. 다들 자기 집안에서만 숨죽여서 울었죠. 더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 줄게요. 어쨌든 내가 녀석에게 풀을 먹이기 시작한 건, 다 이거 때문이에요.

아, 당신 말이 맞았어요. 영주는 거기다가 냄새가 지독한 꽃들을 키우기 시작했어요. 기계랑 더 쉽게 뇌를 연결할 수 있게 해 주는 꽃이라는데, 잘못 쓰면 뇌가 잠식당할 수도 있어서 위험하대요. 그런데 그 꽃물을 마시고 머리에 직접 커서를 연결하면 세상이 어둑한 꽃밭처럼 보이기도 하고, 생선 내장 속처럼 보이기도 한다더라고요. 그 밭에서 영주한테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점점 흐려진 눈으로 돌아와요. 하루 종일 그 밭에 서 있다 보면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는 기분이 든대요. 누군가는 집에 오자마자 세 시간 동안 토악질만 하더니 숨을 거두기도 했대요.

녀석이 먹을 풀을 구하려면 어차피 담을 넘을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풀을 벨 때 더욱 조심스러워요. 녀석한테 자칫 그런 걸 먹일까봐 무섭기도 하고요. 다행히 담과 담이 연결되는 산등성이에는 길고 큰 풀들이 많아요. 한참 동안 녀석이 먹을 풀을 베다 보면, 여기 꽤 소질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해요. 대체 우리 엄마는 뭣 하러 나한테 글을 가르친 걸까요. 그냥 풀이나 베고 살 걸. 아직 녀석에게 위험한 걸 먹이진 않은 거 같아요. 녀석은 점점 건강해지고 있거든요. 당신도 점점 건강해지고 있나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다섯.

하루가 다르게 대장간이 시끄러워요. 이젠 더 찍어낼 농기구도 없는데, 내내 쇠 두드리는 소리, 쇠 식는 소리가 끊이지를 않아요. 대장장이들 말고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일거리가 없는 거 같지만요. 몇몇 사람들은 산을 넘어서 옆 마을로 갔다고 하는데, 그 마을이라고 어디 농사지을 데가 있을까요. 우리 마을 뿐만이 아니에요. 영주들이 하나 둘씩 땅을 빼앗고 있대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은 살아간다고 하잖아요. 그거 거짓말이에요. 너무 오랫동안 살기가 힘들면, 사람들이 죽어요. 우리가 살기 힘들어진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어요. 금화에 구리가 섞여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가끔 물건 팔러 들르는 행상인 아저씨 말고는 아무도 그 말에 신경쓰지 않았죠. 누가 금화를 만져보기나 하겠어요. 평생 우리랑 상관이 없는 얘기인 줄로만 알았죠. 그런데 그 얘기가 돌고 나니까, 영주들이 달라고 하는 돈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영주들이 돈을 많이 달라고 하니까, 달걀 값이 비싸지기 시작했어요. 소젖 값이 비싸지기 시작했고, 그러면 영주들은 더 돈을 많이 달라고 했어요. 달걀도 소젖도 밀도, 아무 것도 우린 살 수가 없었어요. 엄마 젖을 못 빨아서 굶어죽는 아기들이 한 마을에 꼭 두세 명 씩은 생겼어요. 먹고 살려면 어떻게든 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들 얘기했죠. 카룰은 창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언젠가부터 계속 아프던 우리 엄마는 점점 약해져서 끝내 돌아가셨어요.

시청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숨이 막히더군요.

여기선 그 누구도 굶어죽지 않을 것 같았어요. 밀도 없고 농가도 없어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철골들이 햇빛을 받고, 반사하고, 또 받고, 반사하고. 수많은 햇빛들을 계속 복사해서 다시 만들어내고 있었어요. 복사된 햇빛을 받은 사람들의 얼굴은 화사했고, 공중에는 정신없이 홀로그램들이 떠다녔죠. 나는 어지러워서 시청까지 걸어가는데 통상의 네 배나 되는 시간이 걸렸어요. 홀로그램이 박힌 비단으로 된 강보에 싸인 아기가 날 보고는 꺄르륵 웃었어요. 아기가 꺄르륵 웃자, 아이를 안고 있던 엄마가 잔잔하게 미소지었죠. 담 안은 눈이 부셨고 숨이 막히도록 고요했어요. 겉으로는 시끄럽게 보였지만, 그건 고요였어요. 지금도 이 담 안은 참 고요하죠. 담 밖에서는 대장간이 바빠져도, 담 안에는 숨이 막히는 정적만 있어요.

녀석도 고요하게 풀을 씹고 있어요. 하루 종일 녀석과 나, 단둘이서만 이 지하실에 가만히 있어요. 지하실에 들리는 소리는 풀 씹는 소리뿐이죠. 요즘 들어서 알게 된 건, 녀석이 풀을 많이 먹을수록 똥 냄새가 지독해진다는 거예요. 전에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 냄새도 안 났는데. 이게 당신이 말한 바로 그 대초원의 냄새겠죠. 녀석은 크기가 큰 만큼 똥도 한 무더기를 쏟아놓는데, 요즘에는 똥을 치우면서 가끔 헛구역질도 했어요. 시청 직원들이 나한테서 똥 냄새가 난다고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어요. 연결을 못 하니까 똥이나 치우는 거라는 말이 그 똥 냄새 안에 들어 있는 걸 나도 알아요.

처음 녀석을 데려왔을 때, 당신은 설탕을 먹이라고 말했죠. 설탕을 먹이면 말도 더 잘 듣고, 힘도 더 약해질 거라고. 설탕은 달지만 몸에 영양소가 되지 않으니까, 주면 잘 먹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녀석은 점점 힘이 약해질 거라고 했었죠. 건초는 나흘에 한 번씩만. 절대로 싱싱한 풀을 주면 안 되고, 건초만. 처음엔 울음소리부터 우렁찼던 녀석은, 점점 잠이 많아졌죠.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서 때때로 건초를 씹고, 냄새가 나지 않는 똥을 누고. 나는 당신이 시킨 대로 설탕을 주면서 안심했어요. 녀석은 너무 크잖아요. 예언에 나오는 하늘을 뒤흔들 회색 기사라는 표현이랑 딱 맞아떨어지잖아요. 처음 녀석이 왔을 때, 녀석이 코 한 번만 흔들어도 나는 지하실 구석에서 떨면서 울기만 했던 걸요. 때때로 당신이 찾아와서 녀석의 콧잔등을 쓰다듬어주지 않았다면, 진작 심장마비로 죽었을지도 몰라요. 설탕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런데 이상하죠. 이제는 더 이상 설탕을 주지 않는데도, 녀석은 거칠지 않아요. 물론 우렁찬 울음소리도 되찾았고, 지독한 똥 냄새도 되찾았지만, 거칠지 않아요.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꼭 어딘가 아주 먼 곳을 꿈꾸는 것만 같아요. 이 유리벽 밖의 세상 어딘가를. 물론 녀석은 아주 크니까, 힘도 아주 세겠죠. 하지만 녀석의 눈을 보면,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미레 아버지는 어릴 때 종종 우리 셋을 동시에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곤 했어요. 공중으로 나는 것만 같았지만, 우리는 무섭지 않았어요. 창 연습을 하던 카룰의 벌어진 어깨도 무섭지 않았어요. 당신은 미레 아버지보다도 더 컸지만, 당신의 그 커다란 손바닥도 무섭지 않았어요. 녀석의 눈을 보면 그런 것들이 떠올라요.

녀석을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여섯.

미레의 아버지가 땅을 빼앗겼을 때, 당신은 놀라워했죠. 땅이 빼앗길 수 있는 거냐고 나한테 되물었었죠. 하지만 난 당신의 이야기들이 더 놀라웠어요. 당신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 했어요. 도저히 그녀를 잊을 수가 없어서, 당신은 먼 여행길에 올랐다고, 당신은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어요. 그녀와 헤어져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갔지만 삶 전체가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고. 난 당신의 슬픈 사랑이야기보다 그 말이 훨씬 더 충격이었어요.

당신의 세계에서 이사는 행상인들만 다니는 게 아니었어요. 당신은 행상인도 아니었고요. 깨어진 사랑 때문에 이사를 갈 수 있다니. 이사를 갈 때 얼마나 돈을 지불했냐고 내가 묻자, 당신은 눈살을 조금 찌푸렸지요. 그랬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요. 우리들이 사는 이 행성은 그렇다고 들었다면서. 원래 당신의 세계도 그랬었다면서. 하지만 집과 땅은 팔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당신이 말했어요.

왕궁을 빠져나와 시청까지 오는 길에, 당신은 낡은 옷을 입고 꽃을 파는 여자애를 만났다고 했죠. 나는 왕궁에 당신이 그걸 이를까봐 겁을 먹었는데, 그 꽃이 실은 신경에 이상 작용을 일으켜서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하는 꽃이거든요. 말하자면 최음제죠. 불법이에요. 과용하면 고혈압으로 죽을 수도 있고. 하지만 당신은 불법인 꽃을 파는 데엔 별로 관심도 없어보였어요. 그 여자애의 낡은 옷에 대해서만 계속 이야길 했죠. 그날은 녀석에게 내가 토끼고기를 먹인다고 해도 신경도 안 쓸 거 같았어요. 어째서 그렇게 낡은 옷을 입고 있는 거냐며, 그렇게 낡은 옷을 입고 있는데 왜 아무도 그 여자애에게 옷을 주지 않는 거냐며, 당황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내게 따져 물었어요. 아마 당신은 그날 왕궁에 들어가서도 그걸 따져 물었겠죠. 여왕님도 여왕의 아들도 당혹스러워 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잘 모를 거예요. 담만 넘어가면 낡은 옷은커녕 한 번도 제대로 된 옷을 입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나한테 예쁜 옷을 입히기 위해서, 우리 엄마는 평생 찢어진 옷만 입고 살았어요. 옷이 찢어져도 새 옷을 달라고 말할 곳이 아무 데에도 없었죠. 당신이 말해준 세계는 이상했지만, 꿈처럼 아름다웠어요. 집이 없으면 집을 달라고 할 수 있고, 배가 고프면 밥을 달라고 할 수 있고, 옷이 없으면 옷을 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세계. 당신이 지금 가 있는 세계는 또 어떤 세계인가요. 여기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 살아가나요, 여기만큼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나요, 여기보다 더 끔찍한 세계에서 살아가나요. 당신에겐 이 세계가 끔찍했을까요. 내 머리카락도 그랬을까요.

항상 땋아 올린 내 머리를 보면서, 당신은 왜 머리가 이렇냐고 물었죠. 당신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수록, 난 당신에게 점점 더 내 얘기를 할 수 없어졌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낡은 옷만 보고도 충격을 받는 사람한테 엄마가 날 출세시키려고 머리를 땋았다고 어떻게 말해요. 난 우물쭈물하다가,

“예쁘잖아요.”

라고 대답했지요. 당신은 고개를 갸웃했어요.

“다 너무 똑같아서 당혹스러워요.”

아, 그랬어요. 하루 종일 왕궁에 있는 당신은 이 머리모양을 한 여자밖에 만나질 못했겠지요. 그제야 얼굴이 붉어졌어요. 왕궁에 있는 것도 아닌 주제에 얼마나 주제넘어 보였을까.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여왕의 아들은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여왕의 아들을 그 다음에 만날 때도 머리를 풀지는 못했어요. 당신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아침에 그냥 집에서 나오려고 몇 번씩 시도해봤지만, 어색해서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 대신, 당신을 데리고 담을 넘어 나오고 싶었어요. 대충 묶은 미레의 머리카락, 탐스럽게 길러서 나부끼는 대장간 집 딸아이의 머리카락, 행주수건으로 올려 버린 산지기 아이의 머리카락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끝도 없이 말이 길어지네요. 요즘에는 이거 말곤 딱히 낙도 없어요. 당신이 이걸 놔두고 가서 정말 다행이다 싶어요. 자꾸 외로워지거든요. 시청에서도 마을에서도 아무도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아요. 당신과 같은 세계에서 온 이 녀석도, 이곳이 끔찍할까요. 유리벽 안으로 나 혼자 옮겨오는 풀냄새는 찬란한 풀밭과는 비교도 안 되겠죠. 그저 미안할 따름이에요. 그게, 녀석도 나처럼 외로워 보이더라고요.


일곱.

단순한 노동은 쓸데없이 생각을 많이 하게 해요. 풀을 베고, 풀을 먹이고. 시간은 오래도록 지나가지 않고, 나는 자꾸 당신에게 할 말들을 떠올리죠. 당신이 화형당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었나요? 사실 난 모든 걸 알고 있었어요. 내가 접할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지만, 여왕의 아들은 그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려주곤 했지요. 미안해요, 얘기해주지 않아서.

당신을 두고 아주 많은 싸움이 있었어요. 옆 나라에서 온 사신은, 수백의 근위대가 줄지어 서 있는 여왕님의 홀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고 하더군요. 쿨리크 할머니는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고, 당신은 틀림없이 이 세계를 뒤엎을 위험한 사람이라고. 계속 처리를 못 할 거라면 옆 나라로 넘기라고 호통을 쳤다고 하더군요. 당신은 아마 그걸 못 들었겠죠. 여왕님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맞서서 호통을 쳤대요.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겐 구세주가 있다, 함부로 하지 말라고. 옆 나라 사신은 움츠리고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나라뿐만이 아니었어요.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이 여왕님을 찾아왔죠. 당신이 내려왔을 때, 사람들이 웅성대던 걸 기억하나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그랬었다는 거예요. 구세주가 나타났다고. 어떤 나라에선 일주일 만에 예순다섯 마을에서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켰대요. 그 중에는 영주를 살해해 버린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군요. 다른 나라들이 모두 무역을 끊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여왕님은 급하게 당신이 반역죄라고 외쳤어요. 여왕님은 당신이 외교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우리나라 빼고 다른 나라가 다 연합해버릴 거라곤 생각도 못한 거죠.

여왕의 아들은 당신을 걱정했어요. 그래서 난 여왕의 아들이, 조금이라도 당신을 도울 줄만 알았죠. 진작 당신한테 얘기를 해 줬어야 하는 건데.

당신이 끌려가던 순간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이 나요. 당신은 그때 나와 함께 녀석을 보고 있었죠. 힘이 없어진 녀석을 보면서, 당신은 안쓰러워했어요. 파란 하늘과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풀밭을 당신이 말하고 있을 때, 그들이 달려왔어요. 당신은 반역죄라는 단어를 알아들었죠. 당신은 황급히 이 기기를 켰어요. 가끔 당신이 뭐라 알 수 없는 말로 떠들어대곤 했던 기기였죠. 뭐냐고 묻자, 당신은 알 수 없는 발음을 했었죠. 이 기기의 이름은 지금도 따라할 수가 없어요. 언젠가의 과거에서 당신이 이 행성으로 뛰어온 만큼, 언젠가의 미래로 송신하고 있다고 했죠. 딱 수천 년을 건너뛰어서 말을 걸고 있다고. 당신이 온 그 별이,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와서 지금 이 곳에서 하늘을 보면 빛나고 있을 거라고. 당신이 무어라 말을 하면, 그 상대방은 내가 알 수 없는 언어로 당신에게 대답해주었어요. 당신이 송신기에다 대고 급하게 말을 했고, 문이 벌컥 열렸어요. 당신은 그들보다 훨씬 컸지만, 그들은 우악스럽게 당신의 팔다리를 쥐었죠. 구세주는 불검 따위로 쉽게 죽어선 안 되었어요. 당신은 그들에게 끌려가면서도 상대방의 대답이 흘러나오고 있는 수신기를 놓지 않았죠.

송신기는 내 발치에서 구르고 있었지만요. 난 얼른 송신기를 집어서 치맛자락에 숨겼어요.

당신이 화형대에 매달렸을 때, 사람들은 당신이 하늘을 열고 내려왔을 때처럼 구름같이 몰려들었어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발치에 불이 붙었죠. 커다란 화염이 당신을 집어삼킬 바로 그때, 다시 하늘이 열렸어요. 화염은 더욱 커다랗게 불타올라서, 당신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도 않았죠. 하얗고 동그란 빛은 화염과 합세한 듯이 번쩍였어요. 아, 그래요. 당신은 녀석을 데려가지 못했어요. 녀석은 바로 그 지하실에서 건초를 우물거리면서 천천히 숨을 쉬고 있었죠. 난 아주 먼발치에서 그 빛을 바라보았어요.

불이 모두 꺼졌을 때, 당신의 시체는 그 자리에 없었어요. 불타서 사라진 흔적도 없었죠. 시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어요. 구세주를 하늘이 구해간 거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렸어요. 당신이 돌아올 거라고 말이에요. 여왕의 아들은 가슴을 치면서 당신이 가엾다고 말했지만, 그는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여왕님은 당황했고, 옆 나라 왕들은 분노했고, 사람들은 당신을 기다렸지만, 난 다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먼 미래로 도망갔다는 걸.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걸. 오직 나만, 다 알고 있었어요.

어때요, 모든 사실을 알고 난 감상은. 아니, 이제 미래로 갔으니까 모든 걸 벌써 다 알았으려나요. 그래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게 조금은 재미있지 않아요? 당신은 그러면 이 녀석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고 있나요? 당신이 알고 있다면, 내게도 알려주면 좋을 텐데. 당신의 목소리가 나도 듣고 싶어요. 어째서 송신기는 남겨두고 수신기만 가져갔나요. 여기에선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여기, 당신을 잃어버린 녀석의 울음소리를 들려줄게요. 부우우, 파오오, 여전히 힘차게 우는 저 긴 코에 대해 얘기해 줄게요.


여덟.

오늘은 유리에 조금 금이 갔어요. 아침에 풀이 든 자루를 끌면서 지하실로 내려오자, 신이 난 녀석이 엄니로 유리를 긁었어요. 유리는 역시 약하더군요. 녀석의 엄니가 닿자마자 커다랗게 금이 갔어요. 유리가 깨지니까 녀석은 도리어 제가 놀라서 뿌와아앙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어요. 그 모습이 귀여워서 한참을 웃었네요.

녀석이 유리를 깰 만큼 힘이 생겨서 기뻐요.

당신이 떠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새벽이었어요. 누군가 내 방 창문을 두드리더군요. 카룰이었어요. 처음엔 카룰을 알아보지 못했어요. 해쓱해져서 그런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다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눈 때문이었어요. 카룰의 눈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어요. 얼굴은 마르고 해쓱해졌지만 눈은 그래서 더욱 형형하게 빛났어요. 카룰은 날 보고 환하게 웃었어요. 나는 우리 엄마가 귀한 손님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껴뒀던 고기를 꺼냈어요. 카룰은 무언가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고기를 보자마자 허겁지겁 집어먹기 시작했어요. 나는 등불을 조금 어둡게 했어요. 카룰이 여기 있다는 걸 누구라도 알아볼까봐 두려웠어요.

카룰은 입에 고기를 밀어 넣다가 내 행동을 보고는 웃더군요. 걱정하지 말라고, 여기에 카룰이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고. 성 안 사람들은 빼고서요. 카룰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어요. 봉기는 옆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고. 바로 옆 마을, 옆옆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숨 죽여서 모이고 있다고. 함께 가자는 카룰의 제안을, 나는, 아주 천천히 입을 열어서 거절했어요. 여왕의 아들은, 내 어깨를 끌어안고 늘 포근하게 속삭이고 있었거든요. 언젠가 함께, 저 왕궁에서 복사되는 찬란한 햇빛들을 보자고. 나는 그 햇빛들 위에서 눈부신 하늘을 보게 될 거라고.

카룰은 내 이야기를 다 듣고는 그 빛나는 눈을 들어서 날 보았어요. 카룰의 눈 속에 내가 그대로 보였어요. 그 글썽거리는 빛 속에 아주 작은 내가 있더군요.

“쿨리크 할머니가 항상 말했었지. 넌 왕궁 성문을 열 아이라고. 넌 우리가 아니었어.”

내가 무어라 변명하기도 전에, 카룰은 창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난 가만히 창문에 기대었죠. 웅성거리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같이 안 한 대? 죽여야 되는 거 아냐? 카룰은, 괜찮아, 말하지 않을 거야, 라고 대답하더군요. 어떻게 아느냐, 확실하게 해 둬야 한다는 웅성거림을 카룰은 걱정 말라고 단박에 무질러버렸어요.

그날은 여왕의 아들이 초콜릿 밀피유를 가져왔어요. 그의 생일이었죠. 그걸 축하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행진했어요. 여왕의 아들은 인자하게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지만, 해가 저물자 시종 두 명에게 밀피유를 들려서 날 찾아왔어요. 나는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초콜릿을 한 입 물었어요. 달콤하고 보드랍게 초콜릿이 혀에 스며들었어요. 눈이 저절로 감기더군요. 그가 초콜릿이 묻은 내 입술을 핥았어요. 그의 혀도 달콤하게 내 입술에 감겼어요. 그때 당신이 떠올랐어요. 설탕만 먹고 힘없이 늘어져 있던 녀석도 떠올랐죠.

당신을 구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나도 당신을 구하진 못했어요. 녀석이 설탕을 입에 넣었을 때, 그건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저절로 눈이 감기지만 몸을 움직일 수는 없는 이 달콤함. 점점 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알면서도, 저항할 수 없을만큼 짜릿하죠. 난 팔을 뻗어서 여왕의 아들을 끌어안았어요. 초콜릿처럼 달콤하게 그가 내 속으로 밀려들어올 때, 나는 생각했어요. 풀을 베어야겠다고.

카룰이 날 찾아왔다가 간 그 다음 날부터, 어떤 마을 사람들도 내게 인사를 하지 않아요. 시청에선 원래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요. 왜 녀석을 사살하지 않느냐고, 어떤 사람은 담당관에게 청원을 넣기도 했대요. 녀석이 일어나서 발로 한 번 차면 벌벌 기면서 오줌이나 갈길 거면서, 라고 전 속으로만 생각해요. 아무도 녀석을 죽이지 못할 거에요. 당신을 지키진 못했지만, 녀석은 지킬 거예요.


아홉.

시청 앞을 가로질러서 군인들이 국경으로 행진하고 있어요. 어차피 국경으로 갈 때는 레일을 타고 갈 거면서, 용맹한 모습을 실컷 자랑하는군요. 옆 나라에서는 당신의 도주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고 하더군요.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여왕의 아들은 나라를 위해서 함께 싸우자고 모든 마을에 홀로그램을 띄웠어요. 시청은 어느 때보다도 바빠졌어요. 입대를 하지 않으면, 강제로 입대를 시켜야만 했으니까요. 수많은 장정들의 기록들이 시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들락날락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고요해요.

녀석을 아무래도 사살해야 할 것 같다고 어제 여왕의 아들이 말했어요. 나는 흐느끼면서 매달렸지만, 여왕의 아들은 안타까운 얼굴로 내 손을 붙잡기만 했어요. 그러더니,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더군요. 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소용없는 일이란 걸 난 금방 알았어요. 그는 그런 사람이잖아요.

미레의 집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있어요. 카룰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미레는 내게 찾아오지 않아요. 나도 미레를 찾아갈 수 없어요. 미레의 집을 나오는 사람들은 날 경멸하는 눈으로 보곤 하죠. 나도 알아요. 내가 머릿속까지 설탕물에 찌들어있다는 걸. 어릴 때부터 그랬던 걸요. 사람들은 내 앞에선 아무런 말도 안 하려고 해요. 혹시나 생각하는 걸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표정이죠. 대장간에서 뭘 만드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이 사람들은 풀을 먹어 온 사람들이에요. 미레의 집에 들어갔다 온 사람들은, 풀 냄새가 향긋하다는 걸 깨달은 표정이에요. 다들 빛나는 눈으로 걸어 나오죠.

그리고 나는 녀석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녀석의 눈 속에도 빛들이 글썽거려요. 녀석의 눈에 반짝이는 게, 몇 천 년 전의 그 빛이라는 걸 바로 지금 알았어요. 당신과 녀석이 함께 왔던 그 시간들의 빛이었어요. 그 깊고 선한 눈. 척, 척, 척, 군화발 소리와 사람들의 환호가 들려요. 저 환호성은 멀기만 해요. 들리지 않죠?

방금 녀석이 약한 소리로 울었어요. 하지만 자신이 약하지 않다는 걸 녀석도 알고 있을 거예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대초원에서 이 녀석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무서운 육식동물들도 한 번 밟으면 끝장내 버릴 수 있는 녀석이었다고. 이번엔 군가를 부르기 시작한 모양이에요. 세상이 살짝 떴다가 내려오는 것 같은 환호성이 같이 들려요. 나는 녀석을 지켜야만 해요.


열.

녀석에게 약물을 주사할 거래요. 울면서 담당관을 붙잡았는데, 안 된대요. 그래도 자비로운 방식으로 죽이는 거래요. 녀석에게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요. 녀석은 풀을 코로 돌돌 말아서 입으로 가져가요. 녀석의 둥그런 눈이 천천히 구르고, 아,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당신이 말해줬던 대초원을 녀석은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요. 파란 하늘과 숨이 막히도록 펼쳐진 끝없는 벌판. 녀석만큼 커다란 동물들과, 깊은 동굴, 깊은 물, 밤이 되면 날아다니는 박쥐들, 녀석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구름만큼 커다란 새들,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벌판.

당신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땅 어딘가에도 그 벌판이 있다고 했죠. 녀석은 그 곳이 그립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들어왔어요. 아주 작은 주사기 하나를 들고 왔어요. 녀석은 이렇게 거대한데, 저 작은 주사기 안에 저 작은 물이 들어가면 바닥에 쓰러지겠죠. 녀석의 등에서 손을 뗄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나오라고 말하는데, 난 도무지 나갈 수가 없어요. 단단한 이 몸에 저 주삿바늘이 들어가기나 할까요. 녀석은 풀을 먹었는데. 나처럼 설탕에 절어버린 몸도 아닌데. 녀석의 눈에 빛이 일렁거려요. 카룰의 눈에서 보았던, 바로 그 빛이. 나는…… 녀석이 풀을 먹는다면, 나도 설탕을 먹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녀석의 눈을 보고 있으니, 저 빛은 내 눈에도 비치겠죠. 이대로 녀석이 쓰러지게 둘 순 없는데. 난 녀석을 지키겠다고 당신한테 몇 번씩이나 말했잖아요.

들었어요? 유리 깨지는 소리? 녀석의 엄니 때문에 금이 갔던 유리가 녀석이 코로 한 번 치니까 무너져버렸어요. 유리조각에 사람들이 넘어진 사이에, 녀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바깥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요. 회색 기사를 죽이지 말라고 누군가 외쳤어요. 카룰, 카룰의 목소리에요. 난 녀석의 등을 짚고 올라탔어요. 녀석은 강해요. 틀림없이 풀 냄새를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지하실 계단을 녀석이 올라갈 때마다, 계단이 무너질 것 같은 소리가 들려요. 사람들이 시청 앞에 몰려와 있어요. 녀석이 코를 높이 들어서 뱃고동소리를 냈어요. 사람들이 소리 높여 환호해요. 들었어요? 회색 기사를 연호하고 있어요.

비상경보를 알리는 홀로그램들이 여기저기서 깨져가요. 사람들은 공중에 떠다니는 환상 따위에는 신경도 안 쓰고 왕궁을 향해 나아가요. 대장간에서 만든 건, 곧게 뻗은 창이에요. 일자로 올곧게, 왕궁으로 밀려들어가고 있어요. 녀석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사처럼 걷고 있어요. 천천히, 하지만 힘차게.

갑자기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어요. 이번엔 뒤로 밀려나기 시작해요. 분명히 근위대는 얼마 되지 않을 거고, 군인들은 전쟁 때문에 이미 이곳에 없을텐데. 아, 녀석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네요. 녀석은 소리를 높이 지르면서 발걸음을 더 옮겨요. 왕궁이 보이네요. 커다랗게…… 해자가 있어요. 적군이 왔을 때만 가동되게 되어 있다는 그 해자에요. 바닥이 열렸고, 물이 깊숙하게 깔렸어요. 데이터베이스에는 사람의 피부로 스며들어서 사람을 마비시키는 물이라고 되어 있어요. 아무도 건너가질 못해요. 몇몇 사람들이 힘차게 물속으로 뛰어들었나 봐요. 다시 나오지 않아요. 바로 눈앞에 커다란 성문이 있는데, 열리질 않아요.

누군가가 슬프게 울부짖으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어요. 나는 녀석의 귀를 쓰다듬어요. 성문이 바로 저기 있는데. 여왕의 아들은 아마 저 안에서 와들와들 떨고 있겠죠. 전쟁에 그가 나갔을 리가 없잖아요.

방금 바닥이 심하게 흔들렸어요. 녀석이, 물속으로 뛰어들었어요. 물은, 녀석의 다리께밖에 오지 않아요. 녀석은 검은 물속을 걸어가고 있어요. 주삿바늘이 들어가지도 않을 것 같은, 두꺼운 피부엔 독물도 스며들지 못해요. 철수세미처럼 까칠거리는 녀석의 등이 엉덩이에 부대껴요. 사람들은 한꺼번에 조용해졌어요. 녀석이,

성문을,

코로 툭 쳤어요.

성문이, 내려왔어요.

유리가 깨지듯이 소리들이 깨져나가요. 사람들이 마구 소리를 지르면서 성 안으로 밀려들어가고 있어요. 녀석은 해자를 빠져나와선 총총히 성 안으로 걸어 나가요.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요. 회색 기사, 회색 기사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와요. 당신도 들리나요? 당신은 구세주잖아요. 들려요? 맨 앞에서 카룰이 외치고 있어요. 성 안으로 들어가라고 외치고 있어요. 녀석은 왕궁을 가로질러서 안쪽으로 들어가요. 성난 사람들을 뒤로하고, 혼비백산 도망가는 근위대들 사이를 지나서, 꼿꼿이 고개를 쳐들었어요. 기둥 뒤에, 여왕의 아들이 보여요. 기둥에 매달려서 넋을 놓고 있네요. 왕궁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요. 후원은 향기롭네요. 녀석은 코를 뻗어서 나무 이파리를 따다가 입으로 가져가면서, 천천히 걸어가요.

이제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요. 나는 담의 반대편 끝까지 걸어왔어요. 이 담을 넘으면, 아마 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나는 빛에 감싸여서 떠나가진 않더라도, 그 풀밭을 찾기로 했어요. 녀석은 자기 코로도 맛있는 풀들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소리가 점점 더 멀어져가요. 담 바로 옆에…… 미레가 있어요. 식칼을 든 동네 아주머니들이, 미레와 함께 담을 넘어왔어요. 녀석이, 앞발을 들어서 담벼락을 뭉개버렸어요. 그 바람에 땋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왔어요. 내 머리카락도 미레의 머리카락처럼 바람에 나부껴요. 미레가, 웃네요.

이제 이 송신기는 버릴 거예요. 회색 기사는 여기 있어도, 코끼리는 초원에 있어야 하잖아요. 내 말이 맞죠? 난 갈 거예요. 나도 이젠 설탕을 먹으면서 살지는 않을테니까. 안녕, 구세주. 당신이 잘 지내고 있길 바라요. 앞으로도 오래도록. 나도 마찬가지고요.



P-152 행성의 시청 공무원, 센이 보내온 연락은 여기에서 끝났다. P-152 행성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구세주와 회색 기사, 왕궁 성문을 열 여자>에 대한 예언과 혁명의 기록은 그녀의 증언에 기초해서 새로운 유물론적 뼈대를 갖추게 되었다. 그녀의 경험에 의거한 전언은 내 경험과 정확히 일치하며, 화형당하기 직전에 현 지구 통신 본부의 자비로운 통신으로 목숨을 구했음에 감사한다. 아무쪼록 가장 빠른 속도로 현 P-152 행성에 연락해서 이 통신기록을 전달하기를 바란다.

4138년 5월 28일
하워드 라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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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피씨방에서 아침을 맞게 되어서, 전에 써 두었던 소설을 슬쩍 올려봅니다. (…) 한 번도 제대로 평을 들어본 적이 없는 소설이라 촘 수줍네요. 흐흐.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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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마리 11.02.05 17:07 댓글 수정 삭제
    정말 멋지네요.. 거울에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이런 글이 절 반기니, 뜸하지만 거울에 발걸음을 끊을 수 없는 이유가 이런 작품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어느 모로 보나, 환상적인 이야기네요.. 좋은 뜻에서요. 휴우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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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윈 11.02.10 00:03 댓글 수정 삭제
    고맙습니다 :D
  • No Profile
    .. 11.04.11 07:56 댓글 수정 삭제
    기시감이 강하게 드는군요. 특히 결말 부분은요. 잘 짜인 글이라는 데 이견이 없지만 참 강렬한 기시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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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rlei 11.07.09 16:54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어요. 좋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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