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마지막 겨울 下

2010.11.26 23:5411.26

우리는 그 후로도 꽤 자주 산책을 나갔다. 비단 모듈의 오류 점검뿐만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었다. 모모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실제로 작문용 소프트웨어가 설치 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 점이 모모를 모모답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모모는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생각이 많았다. 무엇보다 메모리가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는 게 많았다. 우리들은 머리를 맞대고 끊임없이 상상을 했다. 모모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어마어마한 희생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모듈 관리에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모모와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문제는 불어났지만 손대기조차 점점 꺼려졌다.



“대체 왜 이렇게 큰 배인걸까.”



떠내려 온 빙하가 기어코 사고를 친 날, 골머리를 싸안고 있는 내게 모모가 물었다. 나는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전부터 그랬으니까, 라고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3만km나 되는 배를 운용할 필요가 없다. 우주 안에서 생존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집 한 채만 있어도 충분히 유지 할 수 있다. 진짜다. 모모가 사는 집은 그런 용도로 지어졌다. 이 우주선을 움직이는 엔진도 무한동력이 아니다. 매순간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한다. 규모를 줄인다면 우주가 끝장 날 때까지 버티는 것도 허튼소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붙잡고 버티는 것은 단지 그게 편해져있기 때문이었다. ‘전부터 그랬으니까’와 똑같은 대답이다. 그러면 왜 이 형태가 편해야만 했을까, 그렇게 물어야했다.

둘레 3만km의 배는 호선을 그리는 관들의 연결체다. 각각 관들은 모듈이라는 구역으로 나뉜다. 모듈별로 기능과 온도가 다르다. 어떤 모듈이건 상관없이 대기와 물, 토양을 공유한다. 수분 70%를 유지하며 각 모듈의 수면은 빙극관의 빙산들로 조절한다. 전통적인 방식의 이상적인 생존환경이다. 처음부터 이런 형태였던 것은 아니지만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정 중에 점점 이렇게 바뀌었다. 진화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모모는 배의 그런 구조를 요모조모 살펴보고는 말했다.



“혹시 너는 별일지도 몰라.”



누나가 만들어졌던 그런 별? 아니, 언젠가는 찾아올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기다리기 위해 준비하던 별인거야. 인간이 행성을 찾는 게 아니라 행성이 인간을 찾는다. 모모다운 발상이었다. 나는 여기서 살아줄 사람을 찾아서 먼 우주를 헤맨다. 나는 여기서 유일한 이브가 되겠군. 순서가 좀 바뀐 느낌인데, 하고 모모는 중얼거렸다. 단지 여기서 뿐만이 아니라 우주에서 나와 그녀 둘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하기로 했다.



“혹시 이 배는 구명정이 아닐까?”



구명정? 누나가 타고 온 것 같은? 그래. 이 배는 엄청나게 큰 구조물의 부속품이었던거야. 아니면 어떤 행성의 부속지였거나. 그런데 어느 날 예기치 못한 대재앙이 찾아오고 급하게 구명정을 발진 시킨거지. 덕분에 사람은 얼마 태우지도 못하고 이 배는 홀로 우주를 떠돌게 된 거야. 그러니까 제대로 된 역사에 대한 데이터 같은 건 없어. 문명의 흔적은 있을지 몰라도. 구명정이란건 기록이나 다른 임무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구명정치고는 지나치게 거창한 감이 있지만 실제로 우주에서 표류한다면 이정도 시설은 있어야 자손이나마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모두 떠나버린거야. 구명정에서 살고 싶진 않을테니까. 옛고향 별을 떠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간 거야. 넌 마지막 민들레 홀씨였을지도 몰라. 가뭇없이 날아오르는 마지막 결혼 비행의 주례사처럼 말야. 자, 봐. 노을이 지잖니.

모모가 가만히 감압창문에 손을 댔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하얀 성운의 잿더미들이 둥글게 둘러싼 가운데 하얀 빛이 보였다. 다른 별들은 보이지 않았다. 우주의 한 지점에서 뭔가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도도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선연하게 빛나는 성운의 단말마같기도 했고 살아남아 마지막 빛을 태우는 백색거성 같기도 했다.



"다른 세계에서 들어오는 빛 같아."



모모가 중얼거렸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그럴듯했다. 성운의 이동경로나 축소 방향을 보면 저곳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열은 없지만 시리도록 밝다. 같은 흰색이지만 노인의 백발보다 어린아이의 하얀 치아 같다.

혹시 저기가 우주가 시작된 곳이라면 저기에 신이 있지 않을까? 나는 무심코 생각했다. 그만큼이나 아름다운 별이었다. 모모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크고 둥근 눈이 나와 마주쳤다. 모모는 나보다 키가 작아 올려다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덩치에도 안 맞는 옷을 입어 더 작아보였다.



"신을 믿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일단 부정의 뜻을 내보였다. 모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얘기가 통하겠네. 보라구. 신은 뭔가 책임을 져야해. 이렇게 엄청나게 큰 공간을 멋대로 만들어놓고 무의미하게 살다간 해삼이나 소라게 같은 걸 생각해봐. 나는 잠시 어두운 바다 속에 던져진 소라게를 생각했다. 그것은 소름 끼치도록 적막한 풍경이었다. 어디로 가도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대를 가까이 기어온 소라게가 돌아온 장소가 처음 시작한 장소라면 어떨까. 어둡고 깊숙한 바다 속에는 빛조차도 들어오지 않았다.

별은 오래 보이지 않았다. 다른 별에 가려진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모모와의 이 한때도 언젠가는 시들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세계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에필로그 없이 끝날 세계였기 때문에 나는 이 세계를 더 사랑할 수 있다.

모모와 나는 하얀 별에 대해 조사했다. 그 별은 반짝이고 있었다. 일련의 규칙성을 띈 별은 뭔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관찰을 할수록 그게 착각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소통, 사람들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것이 있었다. 그건 사람의 흔적이었다. 사람이 있었다. 저 아득한 눈보라 너머에 누군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직 사람이 있느냐고. 나는 그 별과 거리측정을 해보았다. 1만 2천 광년. 터무니없는 거리다. 전성기의 인류라면 모를까, 고작 유산에 불과한 이 배로는 1만년이 흘러도 그 거리의 반의 반도 좁히기 힘들다. 그것도 모듈 유지를 거의 포기하고 추진에만 전념해야한다. 접속을 종료했다. 메시지 해독도 포기했다. 포기 하는 게 힘들지는 않았다. 우주는 저물어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모모는 오래도록 스크린 앞에 앉아 있었다.


기후 시스템이 좌절스러운 결과를 내놓던 날, 나는 매우 우울했다. 막대한 재난수치가 표기된 붉은 그래프가 혼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지난 분기보다 소비효율이 11%는 급락할 수 밖에 없었다. 급락한 수치는 다시 되찾을 수 없다. 최악의 경우 일부 모듈을 분해해야할지도 모른다.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실망스러웠다.

제기랄, 이럴수가. 모모를 만나면서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때마침 온도를 상승시키기 위한 강우 장치가 작동하고 있어 비까지 내렸다. 이번에는 문제조차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모는 계단 아래서 앉아있었다.



“아직 예측 통계일 뿐이잖아. 뭘 그래.”



책임지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가 나는 결과다. 모모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이봐, 너는 화가 나면 어떻게 풀어? 하고 모모가 말했다.



“나는 좋아하는 걸 엄청나게 많이 가져와서 '아, 더 이상 못 먹겠다!'라고 할 때까지 계속 먹는거야. 나라면 우유를 2L쯤 사와서 먹을거야. 합성탈지분유 같은게 아니라 진짜 우유. 매콤한 걸 좋아한다면 고춧가루를 잔뜩 타서 먹어도 되겠지. 그걸 날씨가 좋으면 바깥이 나가서 돌아다니면서 마시고, 비 오는 날에는 집안에 앉아서 밥을 말아 먹어도 되겠지. 엉엉 울면서 말이야. 어쨌든 그걸 다 먹는다니, 굉장하잖아? '이걸 다 먹다니, 대단하군.'하면서 분명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워질거라고."



다른 것도 아니고 우유를 2L라니, 인간이라면 죽을지도 모른다.

해본 적 있어? 모모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화를 잘 안내게 되지. 우유를 2L라니, 그게 가능한 일이야? 엄청나게 화를 내고 싶은 일이 생겨도 '그깟 일에 목숨 걸고 우유를 2L나 먹는다니, 아까운 일이지.'하고 넘겨 버리는거야."



모모와 나는 한참동안 키득거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붉은 그래프가 쉼없이 그려졌다. 모모는 웃다가 바닥에 누운 채 나를 올려다봤다. 천장에는 인공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구름 낀 하늘이 소화불량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모모가 거기서 무슨 뜻을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모모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기분이 안 나아지나?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 번도 안 해본 걸 해보면 어떨까? 계속 시스템에만 매달려 있었잖아."



형언할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한 번도 안 해본 것은 드물었다. 갑작스럽거나 의외, 예기치 못한 같은 형용사들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불길한 점괘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모모는 이상한 걸 하자는게 아니었다. 과거 사람들의 보편적인 방식을 따라한 기분풀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오늘 담배 가르쳐줄게. 할 말을 잃었다. 담배라니.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확실히 담배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앞으로의 일에 지장을 줄 정도의 변수도 아니다. 모모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봐, 까다롭게 굴지마. 오늘 딱 한 대만 주고 다시는 안 줄 거야. 담배는 마약이 아냐. 하나의 의식이지.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 얼굴에 뭔가 잔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모모가 담배라면서 들고 온 것은 그냥 말린 낙엽을 종이에 감싼 것이었다. 의식을 위한 제기 치고는 지나치게 초라해보였다. 종이도 오래된 백과사전을 뜯어낸 것이다. 보면서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가 끝장 난지도 나이만큼이나 오래됐다. 모모가 들고 있을리도 만무하다. 그냥 기억에 남아있는 추억을 투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담배를 피우면 기분이 좋아진다'같은 어린아이 같은 추론으로. 한참을 살구나무 아래에서 속닥거리다가 처음으로 담배를 피워보았다.

모모가 먼저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라이터는 없지만 만들고 휴대하기에는 인으로 이루어진 성냥이 편했다. 그녀는 우산 아래 있었다. 그녀는 낙엽 담배를 물고 깊게 빨아들였다. 모모는 숨이라도 참는 듯 오래 연기를 담아두고 있다가 내뱉었다. 연기를 죽 뱉은 그녀는 어떻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모모도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모모가 뱉은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지만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보통 이런 장면에는 기침을 한다고 했다. 연기는 빗속으로 기묘한 무늬를 만들며 사라져갔다.

날씨는 축축하고 서늘했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빗소리를 들으며 '담배 놀이'를 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멋진 것은 담배가 아니었다. 눈도 아니었다. 비 오는 날 살구나무 아래, 그녀, 희미한 연기, 그런 것들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떨려 올 만큼 비밀스런 매력을 갖고 있었다. 머리가 좀 멍한 거 같은데. 처음이라 그런가? 모모가 중얼거렸다. 역시 생각대로 처음이었다. 머리가 멍하다면 내가 알고 있는 니코틴의 역할에 충실한 편이다. 다만 모모가 일산화탄소를 들이 마신다고 해서 어떻게 될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니, 원래 그런걸거야. 다들 그러니까. 내가 대답하자 모모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네. 모모는 그렇게 말하면서 살구나무에 딱 한번 빨아들인 담배를 올려 놓았다. 담배연기가 피어오르며 내 코끝을 간지럽혔다.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물방울을 흩뿌리던 모모가 나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추워. 시선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더 먼 곳. 모듈의 천장보다 더 먼 곳. 모모는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바닥의 물을 찰박 튀겼다. 땅은 눈 위로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진창이 되어 있었다. 모모는 우산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듣다가 우산 마저도 내던졌다. 빗소리가 더욱 정교하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좋은데. 모모는 혀를 낼름거리며 빗물을 받아마셨다. 그녀가 춥다고 한 것이 생각이 나 수온을 조금 더 올렸다. 다른 곳의 열이 빼앗길테지만, 그때만큼은 시스템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귀여워, 누나. 강아지 같아. 모모는 실눈을 뜨고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웃음을 참았다. 그때 그녀의 표정은 명백히 동요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따뜻해서 기분 좋아. 하지만. 나는 그때 모모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꾸만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우주 어딘가 한 구석은 차갑게 남아있어야 하는거야. 그래야 이야기를 만들 수 있어.”



모모는 가만히 서있다가 우산을 쥐어 들고 걷기 시작했다. 나 오늘 바빠서 이만. 정말 즐거웠어. 안녕. 모모는 성큼성큼 걸아가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돌아와서 우산을 나뭇가지에 걸었다. 그리고 다시 집을 향해 뛰어갔다. 나는 모모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모모는 집까지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뎠다.


그날 그 상태 그대로 쭉 이어졌으면 나는 조금 더 나아 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모모는 자주 사라졌다. 산책을 한다고, 음악을 들으러 간다고, 때로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아지랑이처럼 흐려지고 있었다. 나는 부품이 몇 개가 빈다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모를 찾아봐도 연락이 없었다. 나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보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그녀의 진짜 이름도 모른다. 모모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게 아니란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담배를 줄 때부터 마음을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모모를 찾아 헤매고 있었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모든 행동을 멈추고 시선을 돌려 아미를 찾았다. ‘나’는 자전을 멈췄다. 더 이상 비도 내리지 않았다. 바람이 고이고 식물들은 수태를 그만두었다. 바다는 연못이 되었다. 구름은 솟아오르던 형상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 안에 눈을 가진 모든 것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3만km 전역에 흩뿌려진 1억 개의 관측시스템이 움직였다. 어두운 곳은 인공 항성에서 나오는 빛들이 밤을 몰아냈다. 모든 문들이 열렸다. 관측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호흡조차도 하지 않았다.

시선이 모인 곳에 모모가 있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젖어 있는 우산을 쓰고 걷고 있었다. 만약 내가 그녀를 소홀하게 한 것이 문제였다면 그 문제는 수정될 수 있다.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을 것이다. 눈도 그렇다. 빙산이 뒤집어지고 바람이 좌초될지라도. 나는 모모를 불렀다.



「메인 프론트 데스크가 외항성계에서 오신 ‘모모’님을 찾습니다.」



모모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내가 거는 말을 무시하는 것은 처음이다. 서서히 조바심을 느끼며 재차 그녀를 불렀다. 마침내 모모는 창밖에 가까이 서고서야 멈춰 섰다. 그녀가 멈췄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모모의 입술이 열렸다.



"첫 눈이다."



눈? 창밖의 풍경은 새하얀 색이었다. 가까워진 별들의 재가 배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눈이 쏟아지는 모습과 같았다. 전 우주에서 나의 인력에 이끌려 사방으로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모모의 눈에는 경이와 감탄이 담겨있었다. 나는 그 눈을 보며 울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녀가 보는 우주는 전방 70°에만 비치는 함박눈이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다시 또 빛나기 시작하는 겨울의 별이 있었다. 내게는 몸 전체를 뒤덮는 폭설이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우산을 들고 눈을 바라보고 있는 모모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거리감이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참 후에서야 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눈은 쏟아지고 있었다. 식은 잿더미가 내게로 쏟아져 묶였지만 모모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를 속박하고 싶었다. 보이지도 않고 풀리지도 않는 끈으로 묶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모모는 나보다 보이지 않는 창백한 별에 더 강력하게 구속되어 있었다.

나는 인간이 로봇의 인공지능을 인간과 유사하게 만든 이유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감정 표현을 이 정도 밖에 못하는 녀석이다. 모든 질량을 가진 물체는 질량을 가진 물체를 부른다. 모두가 부르고 있는 것이다. 별들이 눈처럼 엉겨 붙듯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겨울이었다. 그들은 이름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좁아지고 있다고 느끼던 우주는 순식간에 커졌다. 우주만이 커진 게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커졌다. 다시금 우주가 팽창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그녀와 나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분해되는 것이 느껴졌다. 모모가 바라보는 그 방향의 별자리가 밝게 빛이 났다. 내가 그들을 보고 있듯 그들도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보고 있는 것이다.

기후 시스템은 본 기능을 되찾았다. 다른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거기에만 매달려서 기존에 오류 가능성을 내포하던 코드까지 전부 수정해버렸다. 날씨가 온화해지자 습기가 땅에 흥건해졌다. 배에는 이제 꽃들이 피고 있었다. 꽃들이 필 계절이었다. 그런데 창 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렸다. 눈부신 눈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대체 왜 꽃이 피는 것인지 모르겠다. 겨울이 녹지 않았는데, 왜 벌써 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세계는 천천히 무너져간다. 나는 끝도 없는 어둠 속을 계속해서 헤엄친다. 몇 백년을 바다 속에 잠겨있던 소라게처럼, 이번에 또 누군가 이 어항을 두드려주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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