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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ularity님의 "무덤지기"는 시선 분산, 즉 제목이나 앞부분에 서술된 이야기는 일종의 속임수로 그와 다른 이야기를 하려 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읽기에는 본말이 전도되어 이야기 자체에 반전이 있기 보다는 그저 소재 전환인 데다가, 초반 두 캐릭터는 캐릭터 특징도 잡히고 이야기도 그럭저럭 갖춘 것에 비해, 뒷부분은 설명 일색이라 원하는 효과를 얻기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앞에 생각했던 것이나 제목을 보고 연상했던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해도 주요 주제에 초점이 가 있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이야기로 보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독자에게 이런, 당했다! 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이가 읽는 이보다 반 발 앞서가야 합니다. 독자는 작가가 보여 주는 하늘밖에 못 보는 우물 밑 시선인데, 뻔히 보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 독자에게 감탄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좀 더 이야기 구조를 만드는데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둑 이야기"는 무덤지기보다 나았습니다. 좀 헛갈리는 면이 있긴 했는데요. 새로 부임한 태수가 수해의 피해를 입는 마을을 구하기 위해 강의 용인 부인을 매장해버린 것으로 보이는데, 아귀가 잘 안 맞습니다. 태수는 새로 부임했다고 하니까요. 새로 부임한 다음에 강의 용과 결혼을 했다가 수해로 자꾸 피해가 나자 부인을 파묻어 버렸다는 건지, 결혼한 부인이 강의 용인지 모르고 결혼했다가 죽인 것인지 혼란스럽습니다. 부임한 다음에 결혼을 한 것이라면 왜 하필 강의 용과 결혼을 한 것인지, 모르고 결혼했다면 어떻게 모르고 결혼할 수 있었는지 등등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답을 명확히 알려 주지는 않더라도 한정할 수는 있는 단서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동화풍의 이야기라고 해서 인과관계가 허술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건필하세요.


twood님의 "검명"은 밑도 끝도 없이 한 장면을 묘사한 글이었습니다. 검싸움을 통해서 평온 속으로, 자신을 직시하게 되는 경지에 오르는 것을 묘사한 것은 좋았는데, 한 장면으로 제한해서 앞뒤 맥락이 없다 보니 그 묘사 자체도 아주 독창적인 것은 아닌 지라 보통 거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어 오면서 획득했을 몰입과 독창성과 캐릭터리티가 없어서 좋게 말하면 보편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흔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Inkholic 님의 "그레이브 키퍼"는 재밌었습니다. 다른 글들도 그러했듯이 이 글 역시 Inkholic님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노하우가 쌓여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아주 특징적이거나 개성이 엿보이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를 재미있게 따라가기에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글에서의 재미란 유령들의 캐릭터리티에 기댄 것이 커서 전체적으로는 허술한 면이 많이 보이는 게 아쉬웠는데요.
전반적으로 모두 약했습니다. 이 유령들이 주인공이 불러낸 거라는 단서도 약했고, 동기로 분류할 수 있는 것도 약했고, 그 중요한 사실을 꼬마의 대사로 끝내 버린 것도 아쉬웠습니다. 돌을 모으는 병에 대한 이야기, 등에 꽂힌 창 이야기 등등 단서 자체도, 단서를 끼워 넣는 타이밍도 이 단서를 통해 도출되는 전체상도 모두 아쉬운 점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 외에도 그레이브 키퍼란 수호령이 있어서 수호령과 함께 무덤을 보호해야 하는 존재라는데, 그럼 왜 수호령이 없는 몽크가 그레이브 키퍼가 되었는 지에 대한 설명이 약했습니다. 무덤에 묻힌 사람들이 너무 초라해서 별 다른 능력 없는 인물도 뽑았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인과와 개연성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합니다. 이야기를 쓸만한 아이디어를 얻은 후 글로 구성할 때 좀 더 많은 공과 시간을 들인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늬비님의 "그녀가 개가 되었다"는 가족들이 화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삼겹살 집에 가서 소주와 고기를 먹는 장면이나 그녀가 개가 되니 나랑 잘 지낸다는 장면 등등 재밌는 구석들이 보였습니다.
아쉬운 점은 주제 면에서 보자면 중심 주제는 진부하고, 진부한 걸 말로 다 풀어내서 더욱 진부해졌다는 점입니다. 주제는 보여져야지, 말로 풀어져서는 감흥을 주기 어렵습니다. 구성상으로는 꿈인 것처럼 처리를 했는데 초반 도입 부분에서 절대 꿈은 아닌 것처럼 서술했기 때문에 읽는 이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합니다. 배신감은 반전에서 오는 감탄과는 다른 말 그대로의 배신감입니다. 추리물이든 아니든 반전이란 건 단서를 뿌려 놓아서 독자로 하여금 좀 더 머리를 쓰면 알 수는 있는 정도에서 일어나야 하는 거지 정보를 한 손에 쥐고 있는 작가가 정보를 틀어쥐고 있다가 어느 시점에서 확 푸는 것은 정정당당한 승부가 아닙니다. 정정당당한 승부가 아니면 독자는 마음이 상합니다.
단서란 너무 일찍 많이 풀면 글이 싱거워지고 너무 늦게 우루루 풀어버리면 독자들이 배신감을 느끼게 합니다. 꾸준히 쓰면서 그 감을 익히시길 바랍니다.
차라리 도입부를 지우고, 고깃집에서 갑자기 목욕탕 씬으로 건너 뛴 것처럼, 꿈이 그러하듯 더 혼란스럽게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그 과정 자체가 꿈이라는 암시를 더 주면서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미련”은 “그녀가 개가 되었다”보다 훨씬 잘 쓴 글이었습니다. 처음엔 가족들이 다 죽은 줄 알았었습니다. 여자에 대한 걸 못 잊은 거라면 왜 가족까지 나와야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그렇게 유령처럼 내보내놓고, 다 살아있었다는 건 이 글 역시 정정당당한 승부로 보기 어렵게 합니다.  
이 글이 더 나은 글인 이유는 그나마 교훈적이지도 않고, 착각을 유도한 방식도 “그녀가...”처럼 치명적이지도 않고,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타파하기 가장 편한 방식인 꿈이었다는 결말을 택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늬비님은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나갈 수 있는 자질이 엿보입니다. 건필하세요. ^^


hybris님의 "푸른 고양이와 늑대소녀"는 푸른 고양이, 우리에 갇힌 늑대 소녀로 버림 받고 소외 받은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며 세상을 저주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이클 스완윅의 팬픽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원소 이름들을 썼을 때는 원소 이름에 부합하는 무언가가 있었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많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망설이기는 했지만 독자우수단편이 선정되지는 못했습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달을 기다리겠습니다. 모두 건필하세요.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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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kholic 07.07.27 23:32 댓글 수정 삭제
    조언 감사합니다. 역시나 작품을 쓰면서 내 자신이 취약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여지없이 드러나버리는군요. '나만의 재미와 감동'을 어떻게 타인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요새 고민 중입니다. 다음 작품은 좀 더 깊은 고민을 거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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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ybris 07.07.28 01:21 댓글 수정 삭제
    제 글은 '(캐릭터들이) 세상을 저주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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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ybris // 라고 하셔도 이미 늦은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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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ybris 07.07.28 18:07 댓글 수정 삭제
    미소짓는 독사/ 글쎄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필자는 자신의 글을 요약한 문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캐릭터들이 세상을 저주한다고 생각지 않았고, 그런 문장으로 요약될 것같이라고는 더더욱 생각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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