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활짝 피었던 꽃들이 무심히 지고 다시 연두색 빛깔이 세상을 뒤덮어 갑니다. 모두 건강히 지내고 계신지요? 이번 달 글들은 모두 문장이나 구성이 탄탄해서 즐거웠습니다. 흥에 겨워 날리는 습작보다 한 문장, 한 문장 써내려간 진지함을 엿볼 수 있는 글이 많았습니다. 바로 그 중심에 창작의 즐거움이 있는 것이 아닐런지요. 이 달에 심사평이 독자단편란 작가들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각기 어떤 의미를 가지시든 간에 심사평에서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을 분명해 해 두면 훨씬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글에 대한 중심을 확고히 잡는다면,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분명히 구분하게 되리라 여겨집니다. 심사평은 그저 던져질 뿐입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글에 대해 무엇을 해 나갈지는 작가의 몫입니다. 부디 자신의 글에 대한 평가를 자기자신에 대한 평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건강함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경험상 역시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만(웃음).

벌써 몇 년째 글로만 여러분을 만나 뵙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 같은 애정을 가집니다. 혹평과는 전혀 별개로, 그달에 올라온 글의 주제나 정서에 담긴 여러분들의 개인사를 심사모임에서 염려하거나 궁금해 하곤 합니다. 특히, 자주 개재하시는 분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안 보이시면 꽤 보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다음 달을 또 기다리렵니다. 나른한 봄철에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일들이 많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95호에서는 우수작으로 조원우 님의 ‘늙은 소녀’를, 가작으로 고래 님의 ‘온기’를 선정하였습니다. 더욱 건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3월 16일부터 4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총 12편의 글 중 심사대상이 된 글은 9편이었습니다.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번역 : 브라이드시클-윌 메킨토시
2) 분량초과 : 암브와트-영혼의 상자 (도토루 : 원고지 171매)
3) 분량미달 : 좁은 방 (랭: 원고지 24매)




무너뜨리리라 : 김진영

A: 비유가 노골적인 글입니다. 지금까지 개재된 작가의 글을 살펴보면 상징을 통한 추상적인 세계관을 그리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스스로가 목표하는 수준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노골적인 비유를 넘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글에서 핵심소재는 ‘축복의 땅’입니다. 비유가 노골적인 탓에 독자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현실만을 떠올리게 되지요. 만약 ‘시험’ 대신에 다른 상징적인 소재를 사용했다면 글이 훨씬 더 융통성이 있어졌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글에서는 ‘벽’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요. 단순히 벽을 넘어야만 축복의 땅에 닿을 것이라는 흐름이 아니라, 벽을 마주한 사람들이 느끼는 좌절, 욕망, 분노 등이 관련되는 사건을 치밀하게 파고들어가서 표현한다면 이야기는 단순히 시험이 존재하는 현실을 치환하는 이상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 작가에게 가장 권하고 싶은 것은 세계를 전체적으로 보는 관점을 내려놓고 자신의 내면에 치중해 보는 연습입니다. 시간이 나신다면 이 글의 세계관에서 황소를 타고 벽을 부수고 싶어 하는 소년의 입장에서 1인칭 단편을 한 번 써보시길 권합니다. 단, 세계가 이렇다, 시험이 이렇다 하는 외부 이야기나 자세한 상황은 모두 생략하고 오로지 벽에 부딪히고 마주한 소년의 느낌, 욕망, 바램만을 서술하여 구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코 ‘이럴 것이다’라는 가정으로 쓰지 말고, 자신이 어떤 느낌을 느끼고 생각하게 될지 심사숙고하면서 내면과 만나시게 되면 앞으로 글을 쓰는데 좋은 연습이 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보았을 때에 비해 작가의 문장이 많이 나아진 점을 보면서 작가의 노력을 짐작하게 됩니다.

B: 입시지옥, 평등하게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기회가 사실은 돈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 등 작가가 생각하는 현실의 시험제도의 문제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험을 마주하고 있는 수험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학을 가기 위해서, 또는 취업을 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시험은 불합리하게 굳게 닫힌 문과 절대 부서지지 않는 벽처럼 느껴지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현실의 좌절에서 시험=벽 이라는 것은 치환하고서 정작 벽을 지나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서술 때문에 글은 상징성보다 노골적인 면이 더 드러나 버리고 말았지요.
예전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번역어투의 문장도 줄었고 문장 자체도 상당히 매끄러워진 것을 보면 작가분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자신이 쓰려고 하는 것을 직면하고 효과적인 상징 방법을 고민해보는 노력도 필요하겠습니다.
  

유니크 이야기 : 김진영

A: 앞서 ‘무너뜨리라’에서 이야기한 내용과 비슷합니다. 구성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글의 단점은 그 무엇보다 작가가 인물이나 이야기 속에 몰입하지 못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너무 뻣뻣하지요. 문장이나 구성이 엉망이어도 작가가 인물이나 이야기에 몰입한 글은 그 자체로 반향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가 자신의 내면을 잘 표현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감정과 느낌, 생각을 ‘주관적으로’, ‘솔직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소설에서 표현하기가 힘들다면 일기를 사용하여 연습하면서 스스로가 평가해 나가는 방법도 괜찮을 것입니다.

B: 상징성이 이 정도로 노골적이면 오히려 감탄하게 되는군요. 다만 작가분이 정말로 유니크나 인물들의 감정을 얼마나 이해하고 글을 쓰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럴 거라고 생각하는 막연한 생각만으로는 인물이 살아나기 힘듭니다. 최근의 작품에서는 많이 나아지기는 했습니다만 번역투의 문장이나 퇴고를 거치지 않은 날 것인 문장들이 글 자체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것도 문제겠지요. 글을 쓰고 연습하는 것만큼 글을 읽고 좋은 문장을 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현재 유명한 대작가 한분은 대학교 시절에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백 번 베껴 쓸 정도의 노력이 없으면 그 문장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없다’는 한 마디에 정말로 장편 소설 하나를 백 번 원고지에 베껴 썼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결과 그 작가분의 문장이 원래 베낀 문장과 같아졌냐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만의 문장을 찾아내게 되었다고 하지요. 무작정 쓰는 연습보다도 무엇을 고치고 싶은지 생각하고, 좋은 작가들의 글을 숙독하실 것을 권해 봅니다.
  

Deep Sleep : 시뮨

A: 전개부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요약해 놓은 것이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전개부의 압축된 요약 때문인지 후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하나의 ‘답’을 내기 위한 과정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군요. 전개부 서술이 이야기 속으로 녹아들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B: 이상적인 무언가를 희망한다는 ‘꿈꾸다’와 잠이 들어서 무의식에서 무언가를 보는 ‘꿈꾸다’의 의미가 뒤섞여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결말의 비약은 원래 작가가 하고자 하는 ‘꿈꾸다’가 어떤 것인지 그 자체가 모호하도록 만들어 버렸군요.
이 글에서 가장 탁월한 부분은 잠드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잠들게 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깨어난다는 부분입니다. 바이러스에 쫓기는 사람들의 긴장감, 몽유병 환자를 보았을 때의 당혹감 등이 생생하네요. 글에서 중심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마무리를 다시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유토피아를 위하여 : bastet

A: ‘인간은 행위를 함으로써 인간다워지고 행위 하는데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벌기 위해 누군가 내 대신 잠을 자고, 나는 시간을 번다는 발상이 재미있는 글입니다. 그렇다면 행위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런 주제 의식이 매우 뚜렷합니다. 그러나 시간을 사서 바쁘게 살아가는 아빠와 사이버 아빠를 가진 딸의 입장이 대등하게 놓이면서 충돌합니다. 글 전체로 보아서는 진짜 아빠를 잃어버린 딸의 사건은 아빠의 사건에 종속되어야 자연스러운데, 사이버 아빠와 함께 딸의 입장이 부각이 되면서 사건이 극도로 양분되어 일관성을 해친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대비되는 두 입장에 담긴 각기 다른 주제의 무게가 서로 만만치 않기 때문이겠지요. 어느 한 쪽에 더 비중을 두고, 한쪽은 종속시키는 구성이 더 낫지 않을까 합니다.

B: 시간도둑이 등장하는 ‘모모’를 떠올렸습니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성과를 얻어 100세 이후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잠을 줄여가고, 결국은 자신 대신 다른 사람이 잠을 자게 만드는 설정이 흥미롭습니다. 100세 이후의 행복을 위해서 100세 이전의 행복은 희생한다는 것이 현실에서 젊은이들에게 ‘나중에 행복하려면 지금 고생하는 것’이라고 강요하는 것을 비꼰 것 같기도 하네요.
다만 100살 이후의 노후의 삶을 좀 더 부각시키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아이도 가족도 없이 저 너머의 유토피아에서 살아가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정말 모든 사람들은 100세 이후의 행복을 위해 지금을 희생하는 길만을 택하는 것일까. 아이의 수입이 자신의 수입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자녀를 낳고, 시간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사이버 아빠를 구입해 주는 주인공의 행로는 현실의 비틀기로 보기에는 너무 극적이지 않은지요. 그 모든 것을 희생하고 얻는 ‘유토피아’가 좀 더 무게감을 가지고 묘사되었다면 이런 행동들이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을 지도 모르겠네요.


친애하는 대니얼에게 : NC YUN

A: 거문도에 전해져 내려오는 영국 수병의 이야기를 발굴해서 각색한 점이 이채롭습니다. 비록 문화적인 한계로 인해 영국 수병의 정서가 영국인이 아닌 한국인의 정서로 서술되긴 하였지만, 우리 고유의 이야기를 발굴한 것은 반갑군요. 짧은 분량 속에서 사건을 서신 형식으로 재구성하다보니 스토리의 전달력이 떨어지는 것이 흠입니다. 줄거리의 특성상 사건 전달보다 뱀파이어인 수병의 심리적인 부분에 초점이 더 맞춰졌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듭니다. 구전되는 이야기의 애절함이 담겼더라면 좀 더 선명하고 호소력이 짙은 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개인적인 아쉬움으로 남깁니다.

B: 거문도항을 배경으로 한 조선, 일본, 영국의 문화가 섞이는 상황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 배경 자체로도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지요. 영국과 일본의 문화가 섞이는 상황은 일본의 만화나 소설 등에서 자주 다루어졌지만 거문도항의 이야기는 그다지 다루어 진 것이 없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러한 배경을 잡았다는 것으로도 이 소설은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1인칭의 서간문이 가지는 한계로, 이러한 배경이 생생하게 잡히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주인공 자신의 벰파이어로서의 정체성, 야수였다가 인간이 된 유키와의 애틋함, 그 사이에 있는 조선인 당골래들의 갈등이 서간문의 막을 지나면서 대체적으로 뭉그러뜨려져 흐려져 버렸지요. 상황 자체만으로도 생겨날 수 있는 이문화간의 충돌이나 갈등이 가볍게 다루어지고 연애 이야기만이 중심이 되면서 매력적일 수 있는 배경이 흐려진 것이 아쉽습니다.


머릿 속에 족쇄 : LSD

A: 시대가 바뀌어도 피 끓는 십대가 갇혀 있는 학교가 감옥처럼 상징되는 것은 여전히 이어질 모양입니다. 시대의 발달과 함께 학교는 어떤 방식으로 학생들의 자유를 규제할 것인가를 고민한 흔적이 엿보입니다. 머릿속에서 규제하는 SCC가 등장하는 미래든, 현재든 십대 주인공들의 소원도, 고민도 일탈을 향한 몸부림도 여전하군요. 현재와 SCC가 등장하는 미래의 차이를 무난한 구성으로 이끌어갔지만, SCC의 상징성보다는 독특한 특성을 살린 사건이 중심사건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B: 10대의 피 끓는 혈기를 붓 가는 대로 묘사해 보신 것 같습니다. ‘말달리자’라는 곡을 생각하면서 충동적으로 달리는 고등학생 커플의 로드 무비를 떠올렸습니다. 미래에 머리에 칩을 심는다는 설정은 ‘키노의 여행’의 ‘싫은 것도 웃으며 할 수 있게 되는 어른이 되기 위한 수술’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사람들이 10대의 통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어느 나라에서든 통하는 면이 있나봅니다.
다만 많은 글에서 다루는 이야기이다보니 SCC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는 글의 독창성을 만들어 내지 못하네요. SCC 자체보다는 SCC가 가져오는 상황을 좀 더 고민해 보시면 어떨까요. 언급했던 ‘키노의 여행’에서는 어머니가 수술을 거부하는 딸이 ‘실패작’이라고 판단하고 웃으면서 딸을 죽이려고 하는 사건을 가져왔습니다. SCC로 유발되는 모순적인 상황은 무엇이 있을까요? 어떤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보다 큰 충격과 감동을 가져올 수 있을지 고민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주인공이 꼭 ‘글을 쓰는 사람’이어야 했는지요. 초반 중반까지 전혀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아버지가 가수지망생이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등장하는데, 글과 아무 연관이 없어 갑작스럽네요.


미술관 C 전시실 : 장피엘

A: 안정적으로 서술하고 전개하는 기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나는 글입니다. 우연히 발견한 카멜레온 한 마리를 발견한 사건에서 출발해서 미술관을 찾아가는 여정에 담긴 것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겠지요. 쓰레기로 가득 찬 장소가 거대한 미술실이라는 발상은 예기치 못한 결말과 함께 예술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후반부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미뤄보면 글의 주제가 예술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 ‘유학인가, 재능인가’에 있는 듯한 인상도 받게 됩니다. 이 주제는 예술 전반에 대해 ‘예술의 성공 비결은 정통 엘리트 코스인가, 재능인가’라고 묻는 것으로도 보이는군요. 오히려 대화를 생략하고 예기치 못한 미술관 C 전시실의 의미를 부각시켰더라면 낫지 않았을까 합니다.

B: 탄탄한 서술과 묘사가 글을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조금 식상한 주제인 글도 무난하게 흘러가게 되는군요. 예술과 현실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하고자 하는 글입니다만, 자칫 에술이란 다 이런 거라고 넋두리하는 허영으로도 읽힐 우려가 있습니다. 또한 유학을 마친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자칫 재능있는 인물들이 짜여진 코스를 따라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작가분이 어느 쪽에 중심을 두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중심이 되는 쪽에 보다 힘을 실어주시고 다른 부분은 과감히 축약하는 것도 좋겠지요.


온기 : 고래

A: 전반적인 분위기를 장악하는 감수성이 인상 깊은 글입니다. 세상을 뒤덮은 추위 속에서 마주하는 그는 추위와 대비되는 온기를 던지지요. 그를 잃는 과정은 온기를 잃어가는 과정입니다. 비록 세상에 온기가 돌아오더라도 내게 온기를 주던 사람이 주던 사람을 상실한 세상은 여전히 춥기 마련이겠지요. 글 전체를 관통하는 소재를 잘 다루었고,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 작가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장점입니다.

B: 무엇보다 문장이 매우 안정적입니다. 담담하게 흘러가는 서술 속에서 추위와 연인들의 온기를 묘사하는 솜씨가 탁월합니다. 연인을 잃는 것을 연인의 ‘온기’를 잃는 것으로 치환하면서 추위와 온기를 대비시키고, 사랑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상실의 현장이 곧 ‘추위’가 됩니다. 한 사람이 서서히 죽어가는 상황과 세계가 자신들을 위협해가는 상황 안에서 서로에게 애틋한 연인들의 감수성 묘사는 압권이군요. 작가 자신이 추위와 온기, 애정과 상실이라는 두 소재를 충분히 고민해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글입니다. 특히 상실의 상황에 공격해 들어오는 야수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을 더 극대화시켜 주네요.
다만 사건을 배치할 때 주인공의 연인이 죽기 전의 상황과 죽고 난 뒤의 상황을 역으로 배치하는 구성보다, 추위 속에서도 서로가 있어 따뜻했던 상황과 상실 이후의 추위, 그리고 죽음의 선택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보다 극적인 감정 고조를 다룰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정체불명의 멘트가 글의 흐름을 끊고 있는 것도 조금 아쉽군요.

95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늙은 소녀 : 조원우

A: 매우 추상적이어서 한 편의 시와 같은 느낌을 주는 글입니다. 양날의 검과 같은 현학적인 문체가 그리 거슬리지 않는 것은 화자가 과학자라는 설정과 부합하기 때문이겠지요. 소녀가 늙은 과학자의 과거인지, 늙은 과학자가 침대에 누워 살아가는 식물인간인지, 현실과 꿈, 사고가 뒤섞이면서 거대한 덩어리를 형성하여 이야기의 흐름이 선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먹한 무엇인가를 마음에 남기는 것은, 인간이되 인간답지 않음을 느끼는 삶의 절망을 치밀하게 잘 전달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이 글은 줄거리보다는 한 편의 시처럼 던지는 의미, 곧 작가의 사유에 가치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제와 먹먹한 울림에 반해 지나치게 뭉뚱그린 이야기의 전달력에는 물음표를 남겨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번역체를 다듬어서 문장이 좀 더 매끄럽게 했으면 어떨까 합니다. 문장의 리듬이 살면 훨씬 더 좋은 글이 될 것 같군요.

B: 글 전체가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문체로 가득합니다. 자칫 이런 문체는 작가와 인물과의 거리를 멀게 만들어 글 전체를 독자와 분리시킬 수 있습니다만, 이 글에서는 주인공이 과학자라서인지 오히려 현실감을 더해 주는군요. ‘먹는 행위’를 잃으면서 ‘소통’을 잃어버린 주인공의 설정도 탁월하며, 온 몸이 굳어버린 상황에서 ‘소녀’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이런 문체와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판타지에서 등장하는 좀비가 아니라 타인과의 소통을 잃고 살아 있으되 살아있지 않은 인물을 좀비로 지칭한 면도 탁월합니다.
김숙자, 소녀, 라는 두 인물이 과연 다른 인물인지, ‘기억의 틈 속에서 만난’ 소녀가 사실은 ‘나’의 과거의 모습인지 모호해지는 서술도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하는군요. 소녀가 ‘나’의 얼굴에 화장을 해주고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은, 과거로 돌아간다면 ‘먹는 행위’를 중지하지 않겠다는 ‘나’ 자신의 외침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면서 타인으로부터 공격받게 되고, 행동하기 위해서 알약 외의 영양분을 섭취하고자 했던 행동이 타인의 공포를 유발하는 역설적 상황은 오히려 ‘나’의 추상적 서술 때문에 덜 노골적으로 독자에게 닿습니다.
독자에 따라서 여러 해설이 가능한 글이며, 또한 인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기도 합니다. 번역체의 난무, 행동 주체의 모호함, 숫자 등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매개체 등 단점도 많이 있지만 깊이 있는 주제를 무게감 있게 다뤄낸 솜씨가 탁월한 글입니다.

95호 독자 우수단편 우수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 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euseoha @ gmail. com 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 (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댓글 6
  • No Profile
    시뮨 11.05.02 12:12 댓글 수정 삭제
    부족한 글에 소중한 심사평 감사드립니다 :D
    앞으로 더더욱 정진해야겠군요!
  • No Profile
    조원우 11.05.02 12:59 댓글 수정 삭제
    안녕하세요, 먼저 좋은 평가 해주신 평가단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바쁜 일상이라는 핑계로 이 글은 퇴고가 전혀 되지 않았는데 귀신같이 집어내주셔서 부끄럽습니다. 더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 No Profile
    LSD 11.05.02 14:22 댓글 수정 삭제
    모자란 글에도 진지하게 평가해주신 심사평에 감사드립니다.
  • No Profile
    김진영 11.05.02 23:11 댓글 수정 삭제
    항상 모자라는 글을 짜증을 내지 않고 읽어서 평가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No Profile
    bastet 11.05.02 23:13 댓글 수정 삭제
    비평 감사합니다. 여러가지 생각을 단편에 우겨넣는 건 역시 좀 위험했는 듯.
  • No Profile
    고래 11.05.03 01:24 댓글 수정 삭제
    부족한 글에 가작이란 명품옷을 입혀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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