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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공모 시기와 겹쳐지면서인지 글의 수가 많고 일정 수준 이상의 글도 많이 눈에 보이는 한 달이었습니다. 다만 [탄생]이라는 소재 탓인지 혹은 [종말] 이라는 화두 때문인지 글의 구성이나 소재가 독특한 글보다는 비슷한 전개를 보이는 글이 많아 아쉽기도 했습니다.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 둘이 아닙니다만, 지나치게 소재에 집착하기보다 작가가 그려내는 인물에 조금 더 중심을 주는 것은 어떨까요. 소설은 결국 인간들의 삶을 그려내는 것이니까요. 인물의 삶과 생각, 철학, 감정 등에 조금 더 깊이 있는 고찰이 보여지면 좋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106호에서는 우수작 없이 가작으로 솔리테어 님의 ‘12광년의 고독’을 선정하였습니다. 가작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더욱 건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월 16일부터 3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총 22편의 글 중 심사대상이 된 글은 15편이었습니다.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분량미달: 악과의 논쟁 (마뱀, 원고지43매), 무드셀라 증후군 (제퍼리 킴, 원고지 30매), 탄생탄생(이서백, 원고지 39매), 키보드 워리어(제퍼리 킴, 원고지 32매), 영희 찾았다(오버쿨, 원고지 49매)
2) 분량초과: en-human 1 (채이은, 원고지 153매), 무지개 (제퍼리 킴, 원고지 162매)



[탄생]언더그라운드 by 도토루
A: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에 인물들이 서로 구별되는 개성을 가지고 있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다만 독자가 글의 결말을 예측하기가 너무 쉽다는 문제가 있군요. 예상대로의 길을 따라가며 반전의 재미가 없어 아쉽습니다. 또한 인물들은 글 안에서 서로 구별되는 개성은 가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다른 글과 구별될 개성은 갖고 있지 않은 평면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군요.
지하세계의 흥미로운 설정을 조금 더 강화했으면 어땠을까요? 지하세계에 만연한 폐병이나 사회의 불평등 등을 보다 깊이 조명했다면 현실 비판의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었을 듯 합니다. 권력 독점의 문제, 진실을 은폐하는 권력의 속성 등 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소재를 보다 잘 살려낼 방법을 모색해 보아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B: 금기의 벽 너머에 있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호기심은 창세 신화를 모티브로 하여 다양한 이야기로 변주되는 소재입니다. 호기심을 품고 인류가 살고 있는 세상의 끝에 닿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 이 글 역시 그러한 변주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금기를 넘어갔던 선구자 콘스탄스, 호기심 많은 탐험가 비쉬키 삼촌 그리고 이들을 가로막는 시장 일당 등 필요한 인물들이 잘 배치되었지만 평범함을 뛰어넘는 개성이 적은 것이 흠입니다. 새로운 세상과 신인류의 탄생이라는 결론이 비록 전형적이라 할지라도 인물이나 독특한 소재의 삽입 등이 있었다면 보다 매력적인 글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살아있는 머리/ 집안의 괴물/ 작은 것  by Mad Hatter
A: 세 글이 상당히 비슷한 틀을 가지고 있어서 이례적이지만 같이 묶어서 평을 하기로 했습니다. 글들이 각각 독자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 독특한 면모를 보이기도 하지만 글의 기본적인 틀은 ‘침략자’와 ‘관찰자’와의 대비로 이루어집니다. 보통 글에서 ‘침략자’가 존재하면 이에 대항해서 싸우는 ‘영웅’이 등장하거나 혹은 ‘피해자’가 나타나 고통을 그려냅니다만, 이 글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그 어느 쪽도 아닌 단지 ‘관찰자’에 머무릅니다. 그들은 결국 침략자와 대결구도를 보입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으며, 주인공이 바라보는 주변의 인물들은 인간적인 느낌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동정심이나 연민, 그들을 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침략자에게 ‘먹히는’ 장면을 관찰할 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최후의 저항을 할 지라도 그 결과는 항상 주인공의 몰락에 머무르는군요. 무기력하게 강한 침략자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에서 공포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글을 읽고 난 느낌은 씁쓸하네요. 글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이기심에 사로잡혀 침략자의 편에 서거나 혹은 무기력하게 잡아먹힐 뿐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B: 세 글에는 모두 괴물이 등장합니다. <살아있는 머리>에는 방안에 기생하는 잉여적인 인간들(안경, 거지, 도둑)이, <집안의 괴물>과 <작은 것>에는 탐욕스러운 괴물이 나타납니다. 이 세 괴물은 공통적으로 친밀한 인간의 유대를 파괴하는 역할을 합니다. 친구를 죽여 버리거나, 가족이나 상대에게 중요한 인간의 희생을 강요하는 역할이지요. 전작들과 연관해 볼 때, 기 작가의 글에 등장하는 괴물들은 주로 가족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가족이나 인간의 유대를 끔찍할 정도로 부정합니다. 등장인물들은 괴물에게 희생당하는 사람을 동정하는 일이 결코 없으며, 갈가리 찢기는 사람간의 관계와 유대를 무감각하게 지켜볼 뿐입니다. 대개 괴물을 없애거나 극복해 나가는 일반적인 글들과는 달리, 기 작가의 글에서 괴물과 맞서려는 사람들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무기력할 뿐입니다. 그래서 항상 특유의 불쾌감을 남기는, 비슷한 구성의 호러를 넘지 못하는 점을 한계로 지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머리>에서 쓰인 분리된 머리와 몸, 도시괴담을 재구성한 듯 한 기생인간들이라는 소재는 인간에 대한 환멸을 잘 압축하고 있는 것 같아 인상이 깊었습니다.


[탄생]화석 by 밤조심
A: 종말을 맞은 한 남자의 처절한 생존기군요. 종말의 상황은 길고 상세한데 남자의 마지막 행동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시도로 끝나 미완의 느낌이 강하게 남습니다. 혼자 살아남은 인간의 철저한 고독과 슬픔보다는 살아남으려는 의욕만이 살아나 있어서 감정의 깊이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자급자족을 해서 살아남는 과정까지가 길고 상세하지만 글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었는지 의문이네요. 또한 그 과정에서 주인공의 감정이 잘 나타나지 않아서 더욱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글의 제목은 ‘화석’인데 ‘화석’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길지 않은지요? 또한 통조림을 냉동시킨다는 발상이나 그 외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진행이 글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생선통조림의 경우 5년 이상 7년까지도 보관이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해 봤을 때, 발전기를 돌릴 수 있다면 오히려 육류나 야채류를 그대로 냉동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B: 최근에 유행하는 대재앙으로 인한 인류 멸망을 소재로 선택하였지만, 인류 종말의 과정보다는 그 과정에 휘말린 한 사람의 이야기로 차별화를 꾀한 글입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 타인을 해치는 상황이나 아내의 죽음조차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계산적으로 치밀하게 통조림을 준비하는 모습은 그를 둘러싼 상황과 정서적으로 소통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이로 인해 후반에 고독을 거치며 인간적인 감상을 풀어내는 진욱의 모습은 전반부와 동떨어진 느낌이 강합니다. 그 전의 상황에서부터 내면적인 흐름이 이어졌다면 보다 자연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또한, 화석이 중심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화석의 상징이 거의 드러나지 않은 점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진욱의 고독을 승화하는 도구로 사용된 만큼, 사건 전개 속에 화석의 상징성이 드러났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작에서 보이던 기 작가의 재기발랄함이 세계의 종말을 초래한 우주입자라는 발상에 여전히 살아있어서 좋았습니다.


[탄생]성녀 카타리나의 살 by xx
A: 쌍둥이로 태어난 카타리나와 안젤라의 두 삶을 대조하면서 버려진 아이와 성스러울 것이라 예견된 두 아이의 삶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삶은 일견 대조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지막의 카타리나의 죽음을 보면 결국 두 사람 다 대중들에게 이용당하고 마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것으로 보여지기도 하는군요.
아무리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대중들이 성녀의 살을 요구한다는 것이 실제 역사에 근거한 것인지요? 임종 즈음에 오상 성흔이 선명하게 나타난 시에나의 카타리나의 일화를 보면 시체를 붕대로 싸놓아야 할 정도로 신체 훼손이 심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구원을 원한 카타리나가 원한 구원을 준 것이, 버림받은 안젤라라는 이야기는 인상적인데 비해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 속의 대중들은 참 시리고 차갑군요.

B: 성녀와 악마의 상징으로 살아가는 쌍둥이의 대조적인 삶이 흥미롭지만, 대비에 그친 글입니다. 사람들이 추앙을 받는 카타리나나 은밀한 곳에서 살아가는 데빌라의 삶이 대조적으로 묘사되는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쌍둥이지만 선악으로 대립되는 두 사람은 같은 인간 속에 존재하는 선과 악으로도 상징됩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철학적인 주제가 풀어졌다면 무게가 있는 글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이 글은 그러한 철학적 주제보다는 두 사람의 대립된 운명과 갈등에 조금 더 초점을 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방향을 잡았다면, 두 사람 인생의 대비보다 서로의 그림자인 선과 악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내적 갈등과 그 해결에 보다 비중을 두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랬다면 카타리나의 죽음에 선 검은 천사가 보다 강렬하게 다가왔겠지요.


알고 싶어서 물었어 by xx
A: 인간 혐오에 찌든 흡혈귀와 삶과 수험에 찌든 20대의 동거가 흥미롭습니다. 삶이 녹록치 않은 현실에서 각종 가산점 때문에 합격에서 밀려난다고 생각하는 화자와 단지 알고 싶어서 물었다고 말하는 흡혈귀 노민구의 관계는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낼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노민구에게 충분히 동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노민구를 강하게 거부하지도 않는 애매한 위치를 지키는 화자가 현실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글이 끝나면서 작가의 의도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는 느낌이네요. 남자의 비명소리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은 노민구가 여전히 흡혈귀로 살고 있고 주변에 있다는 암시로 보이지만, 마지막까지 화자는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군요.

B: 흡혈귀로 나타난 친구 노민구와의 기묘한 동거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 흡혈귀라는 상징적인 존재는 경쟁에 밀린 낙오자로 살아가는 쓰라린 나의 삶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공을 초월해 살아가는 존재인 흡혈귀를 통해 삶의 의문에 대한 답을 풀어내고자 한 의도는 엿보이지만, ‘관계’에 대해 말하는 흡혈귀와 경쟁과 부조리한 현실에 울분을 가지는 나 사이에 연관성이 적어서 주제가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글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눈(目)속의 정원 by Mauve
A: 종말을 앞둔 생명유지환자와 완전한 간병인 [지미]의 이야기가 따뜻하고 정감있습니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지만 여러 가지로 잘 풀리지 못하고 결국은 생명유지환자가 되어버린 젊은이의 인생은 삶에 지쳐 있음에도 원망 대신에 슬픔만이 있군요. 부유한 노인과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젊은이가 세계 모두의 종말을 동시에 맞이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인생 전체가 아픔으로 가득했던 주인공의 기억만이 영원히 남으리라는 것은 패자로 끝난 것 같던 나의 삶의 또 다른 부활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고통 속에서 오래 전의 풍경과 햇살을 그리워하는 실낱같은 희망과 삶의 욕구가 뭉클한 감동을 줍니다. 어쩌면 그러한 실낱같은 삶의 욕구가 영원한 기억으로 다른 의미의 삶을 얻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B: 종말, 그리고 병으로 인한 죽음을 목전에 앞둔 인간과 인공 생명체의 관계가 따스하게 그려진 글입니다. 글의 주제는 결말에 나오는 지미의 장구한 기억인 것 같습니다. 유한한 생명체인 내가 사라진 후에도 인공 생명체는 장구한 기억으로 나의 존재를 영원으로 이어가 준다는 주제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주제를 위해 굳이 종말까지 배경으로 설정한 것은 조금 욕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인류를 기억해 준다는 결론을 위한 선택이 아닐까 합니다만, 종말과 나의 ‘죽음’이 동일한 상징을 가지기 때문에 오히려 글을 산만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 않나 합니다. 그러나 따뜻하고 풍부한 정서가 매력적인 글입니다.


[탄생] 6시간 21분 32초 by 헤르만
A: 세계 종말을 앞둔 마지막 연애 이야기군요. 그리고 모두가 두려워하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을 맞는다는 이야기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종말 앞에서 자포자기로 모든 것을 던져 버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일상에 충실하던 두 사람이 새 탄생의 선물을 얻는다는 이야기 같기도 하네요.
다만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낳는 연애가 책 속 혹은 만화 속의 장면처럼 현실성 없이 그려진 것은 아닌지요. 종말을 앞둔 연인의 대화가 이렇게 그려놓은 듯이 전형적인 풋풋함을 낳을 수 있는 것인지요. 화자 중 남자가 처녀작을 출판한 작가로 그려집니다만, 그 때문인지 이 연애담은 현실성 없는 꿈처럼 예쁘기만 하네요.
또, 중간 부분의 “65억년 후 혹은 찰나의 순간 후” 라는 문장은 이들의 삶이 반복된 우주의 에피소드라는 것인지, 뜬금없이 나타나 의아합니다.

B: 아름다운 연애의 행복한 결말은 결혼과 아이의 탄생이라는 가치관이 뚜렷한 글입니다. 현실을 소재로 한 글이니만큼, 로맨스 소설로 가는 것이 정공법이겠지요. 그러나 로맨스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두 남녀 사이의 극적인 감정이 없는 것과 아이의 탄생에서 독자들이 회한을 느낄만한 고난도 없다는 점이 아쉬운 글입니다. 연애와 결혼이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강력한 소재로 살아남은 것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남녀 간의 사건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겠지요. 이 글은 일상적인 연애를 잘 그려내었지만, 독자가 소설에서 바라는 연애는 일상적인 연애에서 겪은 설렘과 환상을 담되,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극적인 연애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지 않나 합니다.


거울숲 by 미소짓는 독사
A: 전설이 깃들인 거울숲에 대한 동화같은 이야기입니다. 거울 숲에 상징을 녹여내려 한 의도는 보이지만 성공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삶과 죽음, 두걸음이와 남자의 관계 등은 주체와 거울 속에 비친 상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만, 작가가 그 상징을 효과적으로 글에 녹여내지는 못했군요. 이 글에서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한 번 죽었던 자신’이라는 문장이 어떤 뜻인지 제대로 독자에게 닿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한 번 죽었으나 스스로에게도 숨긴다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남자는 거울 숲에서 ‘죽었’으나 돌아온 것일까요. 거울 숲의 ‘죽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요.

B: 상징적인 소재를 쓸 때는, 그 소재의 특성에 대한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특히, 거울과 같이 매우 다양한 상징을 가지는 소재는 더욱 그러하겠지요. 거울 숲이나 두 걸음이라는 소재에서 그러한 고민을 많이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울과 두 걸음의 관계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점이 아쉬운 점입니다. 이미 죽은 나, 두 걸음이 된 나, 임종 시에 이미 한 번 죽었음을 떠올리는 것. 이 세 가지가 이 글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만, 거울 숲에서 내가 두 걸음이 되는 과정에 거울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기존에 존재했던 두 걸음의 의미는 무엇인지 보다 명확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특히, 거울의 숲에서 나, 거울 속의 나, 두 걸음, 세 가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무엇이 무엇으로 치환되고 변환되었는지 설명이 조금 더 자세했다면 좋았을 것 같군요. 독특하고 신선한 소재나 아기자기한 동화적 형식의 구성은 인상적인 글입니다.


드래곤 설계론 by 미소짓는 독사
A: ‘교단’의 학자들의 움직임이 흥미롭습니다. 줄곧 글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게 만들면서, 등장인물들의 개성적이면서도 살아 있는 대화가 글의 속도감을 더합니다. 판타지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음모론에 흥미를 느껴 본 적이 있지 않을까요. 세계의 실체를 찾으려는 교단의 학자들에게 시선을 모으고 싶어지지요. 그런데 글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드래곤의 정체가 반전이 되어야 함에도, 반전에 대한 복선이 지나치게 미미해서 아쉽군요. 반전을 맞고 나서도 그래서 뭐? 라고 묻고 싶어지면서 그 뒤의 진행을 더 알고 싶어집니다. 흥미로운 설정을 바탕으로 보다 탄탄한 스토리를 짜 보시면 더욱 재미있는 글이 되지 않을까요.

B: 드래곤이 세상을 설계했음을 믿는 교단을 지탱하는 과학자 사제의 무리가 알게 되어버린 비밀, 드래곤의 정체(?)가 유쾌한 반전을 가져오는 글입니다. 주인공들 사이의 대화가 문어체로 생동감 있게 그려져서 속도감이나 흡입력이 있는 것도 장점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에피소드를 넘지 못한 점과 소재의 반전이 반전이라고 하기엔 약한 것이 아쉽습니다.


카스트라토 by 제퍼리 킴
A: 타의에 의한 트랜스젠더의 이야기입니다. 학교폭력의 결과로 자신의 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성으로 살아야 하는 삶은 요즘의 화두인 학교폭력과 결부되면서 흥미를 더합니다. 이는 학교폭력 외에도 강자에 의한, 권력에 의한 폭력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지요. 하지만 유진의 삶은 정체성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결국 트랜스젠더의 삶을 선택한 이들과는 다르지요. 종교를 위해 성을 버린 카스트라토와 폭력 때문에 성을 잃어버린 유진을 동일시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려면 카스트라토들은 종교라는 권력에 자신의 성을 잃어버린 피해자가 되어야 하겠지요.
또 하나, 연민을 의도하면서 그려진 유진의 삶이 과연 그렇게 불행했는가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유진의 불행은 자신의 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 살게 된 성의 틀에 사로잡혀 여자로도 남자로도 살지 못한 유진의 닫힌 마음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B: 불운한 사고로 성을 전환하여 여성으로 살게 된 유진의 인생 역정이 드라마로 그려졌지만, 어디선가 많이 봄직한, 짐작 가능한 이야기로 엮어진 것이 아쉬운 글입니다. 주인공의 고통이 계속 회자되지만, 성공적으로 대학까지 마치는 유진의 삶이 담담하게 그려졌기 때문에 유진의 고통이 실제적으로 와 닿지 않는 느낌입니다. 이로 인해서 유진이 D를 죽이는 극적인 사건에 설득력이 적어진 것 같습니다. 이런 초월적인 느낌이 카스트라토라는 소재와 이어지긴 합니다만, 초월하기 이전의 실제적인 고통이나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조금 더 극적으로 그려졌더라면 울림이 있는 글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졸린 여자의 쇼크 by kuchiblue
A: 살인을 저지르고 났더니 갑자기 물건들이 커졌다가 줄어들었다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살인 때문인지, 뭐가 잘못된 것인지, 주인공은 당황스럽게 점차 확대되는 주변 사물의 변화를 지켜봅니다. 독자 역시도 이게 무엇 때문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결국 이것이 우주의 멸망의 징후라는 결말로 마무리되고 맙니다. 게다가 그것이 서른 번째 지구의 종말이라는 부연도 더해지지요. 독자를 한껏 궁금하게 만들었다가 해결이 아닌 파국을 결말로 던져 준 셈입니다.
주인공은 가방의 변화에 그럴싸한 설명을 붙였지만 그건 1회적인 해석에 불과했고, 결국 주인공의 살인이라는 행위는 이 상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지요. 동생의 비정상적인 반응으로 독자를 당황스럽게 하더니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나 주인공을 다시 공격합니다. 이런 낯선 상황을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않은 채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하고, 독자는 이 사건의 진짜 진실, 이것이 지구의 종말의 징후였다는 결말을 맞는군요. 매력적이고 신선한 소재와 전개에 이 결말이 정말로 작가가 의도한 글이었나요?

B: 사물들이 변칙적으로 변하는 것으로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내는 착상이 독특한 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착상이 굳이 살인과 연관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 남습니다. 살인이 지니는 강렬한 인상 때문에 주제가 부각되지 못하고 사건 위주로 흘러간 것은 아닌지요? 착상이 독특하고, 친절하게 직접 독자에게 설명을 할 정도로 작가가 애착을 가진 주제이니만큼 사건보다는 착상과 주제를 살리는 구성이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비현실적이고도 상징적이어서 매력적인 장면들이 살인이라는 사건에 묻혀서 많이 아쉽습니다.


우주의 푸른색 by summer
A: 마치 먼 미래, 지구가 우주로 확장된 세계의 수필을 보는 느낌입니다. 인물들의 눈으로 그려내는 미래의 풍경이 글의 대부분을 차지하지요. 우주에 있다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와, 혼자만이 12년 후로 떨어져 버린 인물이, 주변과 교감할 수 없는 인물의 소외를 그려내는 것 같습니다만 인물의 감정이 너무나 담담해서 독자는 짐작할 수가 없네요. 설정과 설명이 계속되는 이야기 속에 중심인물인 소여와 치와의 감정은 지나치게 가려져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이기 때문이다’는 구절이 너무 반복되다 보니 글이 맥락이 끊어지는 만큼, 퇴고를 통해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시는 것이 글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 더욱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B: 먼 미래의 풍경을 담담하고도 담백한 어조로 풀어낸 점이 매력적인 글입니다. 관조적인 느낌의 묘사가 글을 매끄럽게 이끌어 가지만, 마치 사색을 써내려간 한 편의 수필처럼 끝나버린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먼 미래의 수필이라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독자들이 몰입할 수 있는 주제나 사건 혹은 심리적 요소나 정서 등이 없는 사색과 담담함이 다른 관점으로 보면 밋밋함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2광년의 고독 by 솔리테어
A: 12년마다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공격하는 주인공의 삶이 애잔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다른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사수로서의 삶이지만 모든 기억이 12년 단위로 이루어지게 될 정도로 주인공의 삶은 그 행동이 중심이 되어 버리지요. 지구의 모든 사람들과 제대로 교감하지 못한 외로운 인생 속에서 역설적으로 주인공은 12광년 뒤의 거리의 누군가와 절대적 교감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련한 감동을 줍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삶이었지만 12광년 너머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총구를 들이대는 삶은 오직 같은 삶을 살아온 이만이 공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마지막 장면에서 12광년 거리에 있는 지구의 별빛을 보는 주인공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가 바라보는 별빛은 12년 전의 것, 그는 여전히 과거 속에 매인 채, 과거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B: 여느 전쟁과 같이 불운한 오해로 전쟁을 시작한 지구와 외계 행성이라는 소재를 ‘소통’의 문제로 이어간 점이 매우 매력적인 글입니다. 지구와 12광년 떨어진 거리는 서로 포격으로 소통하는데 12년이 걸리는 것을 의미하고, 그토록 느릿느릿한 소통의 속도는 결국 긴 기다림과 함께 고독을 동반합니다. 이런 점에서 신카이 마코토의 SF 애니메니션 <별의 목소리>를 연상하게 되는군요. <별의 목소리>에 등장하는 두 연인이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며 엇갈리는 고독을 안았다면, 이 글은 처음부터 엇갈렸던 적으로 인해 쓰라린 고독의 위안을 얻게 됩니다. 12년을 거쳐 상대에게 닿는 살의는 오히려 고독을 지우면서 애틋한 동지애로 변해 버리고, 주인공은 결국 사멸해 버린 적이야 말로 자신을 가장 이해했던 자신의 일부임을 깨게 되는 거지요. 액션이 난무하는 우주전쟁으로 묘사되기 쉬운 소재에 ‘소통’이라는 주제를 담아 담백한 어조로 잘 풀어낸 점이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12광년의 거리라는 설정이 글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독자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전달이 되었으면 어떨까 합니다. 비록 제목에서 연상을 할 수 있지만,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나중에 설명되는데다 12광년이라는 설정을 뚜렷하게 부각시켜서 전달한 부분이 없어서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06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euseoha @ gmail. com 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 (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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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오래간만에 덜덜덜 떨면서 올렸는데, 기대 이상으로 평가를 좋게 해주셨네요. 감사드립니다 ㅜㅠ 못난 글 읽어주시느라 수고많이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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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토루 12.03.31 22:32 댓글 수정 삭제
    좋은 평가 감사합니다. ^^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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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조심 12.04.02 00:08 댓글 수정 삭제
    두 분의 말씀 잘 듣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운영자님 오류가 하나 있사옵니다. '성녀 카타리나의 살'은 제 것이 아니라 xx님의 작품입니다. 제 도끼는 오래되고 낡아빠진 '화석'도끼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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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리테어 12.04.02 01:53 댓글 수정 삭제
    으엇.. 혹평 기대하고 두근두근하면서 들어왔는데 이런 반전이......

    부족한 글에 좋은 평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최근에 고민거리가 많아 힘들었는데 힘이 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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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조심님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xx님께도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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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er 12.04.03 14:10 댓글 수정 삭제
    이렇게 글에 대해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고 감사합니다 ><....
    감정을 직접 묘사하지 않고 전달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나 보네요. 좀 생각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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