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요즘의 TV를 보면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말은 ‘경쟁’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더없이 와 닿곤 합니다. 공모전을 포함해서 글쓰기 역시 외형적으로 경쟁 상황을 만나게 되고는 합니다만 그래도 글쓰기는 결국 자신과의 경쟁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많이 읽고 자신의 글을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는 것은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글에서 좋았던 부분을 그대로 가져오더라도 자신의 것이 되지는 않겠지요.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 에피소드,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 인물들은 결국 어디선가 본 것 같지만 그만큼 강렬함은 없는 글로 남고 맙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합니다만, 어떠한 소재도 사건도 인물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자신이 읽어온 수많은 글들과 경쟁하는 방법이며 곧 자신과 경쟁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98호에서는 우수작으로 빈군 님의 ‘꿈꾸는 문들의 도시’를, 가작으로 K.kun 님의 ‘Flash'를 선정하였습니다. 더욱 건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6월 16일부터 7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총 12편의 글 중 심사대상이 된 글은 10편이었습니다.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분량미달 : 엄마가 들려주는 다정한 이야기(darkwell : 원고지 34매), 안심(위기백 : 원지 24매)


Siren (By Demonvein) + 이메일 by 최병찬

A: 인어를 만들고자 한 과학자, 이형異形의 생명체가 된 주인공 손월, 인어와 붉은 머리 바텐더 등 등장인물들은 SF나 판타지에서 등장하면 좋을 것 같은 멋진 설정들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들 중 누구도 자신만의 개성을 갖지 못하고, 그들의 감정은 제대로 묘사되지도 못하는군요. 멋있을 것 같은 사건을 폼 나게 쓰려한 것 외에 이 글에서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인물에 대한 고민 대신에 장편 일부를 옮겨 놓은 것 같은 과도한 설정만이 남았습니다. 글 초반에 ‘에볼버’ 등의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만, 단편에서는 이런 설정을 글과 별도로 제시할 필요가 없이 글 자체 안에서 녹여내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특히 ‘손월을 반강제로(?) 데몬베인으로 이끌었다’와 같이, 단편 안에서 특별히 의미도 없고 장편의 일부분이라는 느낌만 남겨놓는 설명들은 차라리 쓰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B: 주술 관계가 맞지 않는 부분이 군데군데 보입니다. 문장이 복잡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 정확하고 조금 더 간결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대사의 경우에는 어느 것이 누구의 대사인지 혼란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가 말했다’를 너무 남발하는 번역체가 바람직하진 않지만, 필요한 부분에서는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합니다. 스피디한 전개가 인상적이고, 하드보일드의 요소를 잘 갖춘 이야기입니다. 하드보일드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과장된 대사와 액션(일명 후까시)도 적절하게 잘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강조하고 싶어 하는 ‘술잔에 비친 인어’가 <나호 이야기> 1화를 연상시키는 바람에 나호와 주인공을 비교하게 되는군요. 캐릭터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나호 이야기>는 나호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만큼 캐릭터의 성격이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기에 술잔에 비친 인어가 그의 성격과 맞물려서 대단한 시너지 효과를 이끌어 내는 결말을 맞습니다. 그와 비교한다면 이 글에서는 캐릭터가 데몬화 하는 것 이상의 개성이 보이지 않아서 많이 아쉬운 것 같습니다.


자살 클럽 by 황금나무

A: 자살하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든 산장에서 그들을 살해하는 살인마가 등장합니다. 인물 묘사는 탄탄하고 서술도 안정적이지만 영화를 포함해서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휘말리는 사건의 이야기는 영화를 포함해서 이미 많이 나와 있지요.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작가만의 것이 없어 아쉽습니다.
‘삶의 소중함을 모르는 너희들은 언젠가 다시 죽으려 할 거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고통스럽게 죽어. 그래야만 삶이 소중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야.’ 살인마가 숙희를 죽이기 직전에 하는 대사가 아마도 작가가 하고자 하는 주제이겠습니다만,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할 살인마가 이 글의 인물 가운데 가장 묘사가 부족하다 보니 그저 미친 살인마의 헛소리로 그쳐 버리네요. 살인마의 거창한 대사 대신에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필요하겠습니다. 살인마를 보다 철저하게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묘사하는 게 어떨까요? 마지막 부분에서 살인마가 자살클럽 회원들의 장기를 싣고 산을 내려가는 장면이 나오는 만큼, 차라리 단순히 돈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살인마의 철학적 대사보다는 설득력이 있어 보이네요.


B: 자살하고 싶어 모인 남녀들이 그들 속에 섞인 살인마를 만나고, 죽고 싶었던 이들은 이제 살아남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순된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이지요. 게다가 그 순간에 살해된 인간의 장기를 팔아넘기려는 인간의 탐욕까지 더해져서 이야기는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뒤섞이는 진흙탕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역설적이고도 끔찍한 상황을 희화적으로 표현하는 재주가 있는 작가입니다.


수능 보는 날 by 황금나무

A: 평소에 잘 하던 과목을 다 밀려 쓰면 어쩌지, 시험 치다가 갑자기 졸아버리면 어쩌지, 시험 칠 때 이상한 녀석이 뒤에 앉으면 어쩌지, 고3 수험생의 시험 압박을 최대한으로 살려낸 글이라 한참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정말로 고3스러운 철없는 마음이기도 해서 웃음도 짓게 되네요. 자신이 좋은 성적을 얻는가의 여부보다도 잘 아는 친구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더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수험생의 심리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죽은 영석은 왜 시험에 집착할까요? 진수의 질투심이나 불안감, 그러면서도 영석이 빙의해서 시험을 치면 성적이 잘 나올 거라는 심리 등은 무척이나 생생한 반면, 영석이 그렇게까지 시험에 집착하는 심리는 잘 잡히지 않습니다. 또한 진수가 죽은 영석의 영혼을 보면서 느낄 죄책감이나 불안감이 다른 심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가볍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쉽군요. 제2외국어를 칠 수 없는 상황에서 영석이 진수의 몸을 이끌고 자살을 다시 택하는 결말은, 그럼 왜 처음부터 진수의 몸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았을까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점심시간 이후의 시험 순서가 잘못되어 있습니다만, 작가분이 쓰시면서 확인 절차를 거치시면 충분히 수정될 수 있는 부분이었겠지요. 거기다 조금 더 바라자면,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수능시험을 무언가의 상징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 글이 수능시험장의 생생한 풍경을 묘사한 것에 그치지 않고 한 차원 나은 글이 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B: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토록 끔찍한 호러가 이처럼 위트 넘치는 희극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즐기면서도 작가의 의도를 잘못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해 보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수능 보는 날은 불안과 공포가 뒤범벅되는 날입니다. 답지를 밀려 쓰지는 않을지, 시험 도중에 갑자기 배가 아프지는 않을지 불안하고, 경쟁자에 대한 질투와 부러움이 극대화되기도 하지요. 때때로 수험생들이 한 번쯤 상상해 보았을, 경쟁자를 없애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면서 수험생들의 공포를 군데군데 섞어서 허를 찌르는 웃음을 유발하는 글입니다.


악몽 by 황금나무

A: 악몽 속에서 괴한에게 쫓기는 여자가 찾아간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살해할 범인이 있는 곳입니다. 반복되는 악몽을 견디지 못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면술사를 찾아가게 되기까지의 심리가 생생합니다. 단지 절박한 마음이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쫓기는 악몽에 공포를 느끼고 있는 주인공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최면술사에게 혼자서 찾아가 최면을 받는다는 것은 고개를 갸웃하게 하네요. 옆방에 사는 친한 ‘현미’등,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도 혼자 낯선 장소에서, 그것도 이상한 느낌을 주기까지 하는 공간에서 최면에 빠진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지겠지요. 계속해서 쫓기는 꿈을 꾸면서 공포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보다 자신을 방어하는 태도가 강해질 텐데요.
마지막 장면은 지연의 혼령이 꿈에서처럼 복수를 달성하지 않을까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결말입니다.


B: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코미디가 섞인 호러입니다. 반복되는 악몽, 예지몽, 기이한 최면술사 등의 소재로 어두운 분위기를 이끌어가다가 반전으로 웃음을 이끌어내는 점이 특징입니다. 흔히 괴물처럼 느껴질 살인마들이 궁상맞은 생활인으로 묘사되는 것은 ‘자살 클럽’과 맥이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산사태 by 황금나무

A: 학교를 세울 때 무덤을 없앴다거나 하는 전설은 학교마다 빠지지 않는 도시전설이지요. 게다가 무덤이 가득한 언덕이 보이는 학교라니. 기괴한 배경에서 반복되는 꿈속의 상황은 비현실적이면서도 공포감을 유발합니다. 꿈의 반복이라는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구성에서도 꿈마다 긴장감을 부여하면서 독자에게 흥미를 일으키는 솜씨가 상당하네요. 쫓기는 느낌, 현실인 듯 현실이 아닌 공포감이 생생합니다. 인간이 가장 공포를 일으키는 것은 100% 초현실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현실에 기반을 두면서도 비틀려 있는 공포감이라는 점에서 이 글은 모두가 경험했을 학교의 도시전설을 배경으로 독자를 긴박감으로 몰고 갑니다.
학생부장이 젊은 교사에게 주먹을 휘두른다는 등 다소 고증에서 벗어난 부분이 글의 흥미를 떨어뜨릴 우려가 있지만 김진석이 반복해서 겪는 사건이 점차 수렴해서 비극을 막아내기까지의 과정은 흥미진진하네요. 다만 이 모든 사건이 ‘할아버님’이 후손을 구하기 위해 끝없이 꿈을 꾸게 만든 것이라는 결말은 다소 흥미가 떨어지네요. 할아버님이 S고를 구하려는 이유를 부여해 보시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B: 괴기하고 공포적인 서두와 전개 그리고 반전이라는 구조는 전작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이번 달에 올린 다른 글들에 비해서 다소 맥이 빠지는 결말이라는 느낌입니다. 작가가 자주 구사하는 해학도 비교적 적은 편이고, 할아버지가 미리 재난을 피하게 해주었다는 결말은 신선함이 적어서 아쉽습니다.


신림역 살인마 by 니그라토

A: 최근의 노르웨이 비극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 개인이 자신의 불행을 사회적 책임으로 돌리며 잘못된 가치관에 몰입할 때 학살과 테러가 일어나는 예는 흔합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범인의 정치적인 문제 외에도 지극히 소시민적인, 그래서 안쓰럽기까지 한 인물의 사고에 집중해서 이야기가 사실성을 더하게 되었네요. ‘나’의 범죄는 결국은 자신의 모든 불행의 원인을 외부로 돌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왕따를 당한 것은 왕따 대신 가해자 학생의 편만 드는 (것처럼 보이는) 시스템 때문이며 어머니의 죽음은 24시간 간병인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자영업이 망하고 아버지가 자살한 것은 IMF 체제 때문이고, 자신이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인간관계에 서툰 것은 정신의료와 사회복지가 허술해서 자신의 어린 시절에 적절한 자극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는 자신의 의견에 사람들이 귀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 묻지마 살인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IMF 체제 때 부자들을 살해하지 않고 소심하게 멈춰 있었던 사람들이므로 죽여도 된다고 자신을 정당화하면서요. 그러나 그 자신이 택한 길 역시, 부자들과 동귀어진 하는 길은 아닙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자들에게 약탈당한 소시민들, 누군가의 가족들을 피해자로 삼았을 뿐, 그가 모든 악의 원인으로 지목한 권력층에게는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못하지요.
이 글에서는 전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무차별 살인마의 시점이 생생합니다. 다만 무차별 살인마인 ‘나’ 외의 인물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인 점, 그들이 서로 구별되지 않고 거의 같은 맥락의 대사만을 늘어놓는다는 점은 여전히 약점으로 남는군요. 작가가 의도적으로 주인공 외의 타인들을 단순화시킨 것인지, 아니면 ‘나’ 외의 인물에 대해서 작가가 깊이 고민하지 않아서인지는 생각해 볼 부분이겠습니다. 특히 국선변호인이 마지막에 ‘나’에게 술주정으로 늘어놓는 부분은 설득력이 떨어지는군요. 국선변호인의 대사 속의 에피소드가 현실성이 없기도 하지만 그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요.


B: 기 작가의 글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언제나 편향된 사고를 지닙니다. 사회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윤리에 대해서 언제나 ‘-해야만 한다.’는 당위적 사고가 그를 지배하지요. 심리학자인 앨리스는 이를 비합리적인 사고로 개념화하면서 이것이 개인의 심리적 부적응을 이끌어 낸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은 심리적인 부적응에서 비롯된 사회적 부적응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하지만 오히려 지나치게 편향된 그의 사고와 그것의 원인이 된 딱한 처지를 진솔하게 서술하는 주인공을 보다보면 혐오감에 동반되는 딱한 마음을 어쩔 수가 없게 되는군요. 주인공은 엘리트나 부자 등 사회 지도층 계급에 분노와 원망을 던집니다. 그들로 인한 구조적 모순이 내 불행의 원인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주인공은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여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 위한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러면서도 감옥에 가면 맞지 않을까, 독방은 살기 편하겠지 등 끝까지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걱정을 놓지 않는 양면성을 너무나 진솔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양면성은 주인공이 공적 의식과 사적 감정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주인공의 분노가 사회적 일탈로 소소하게 끝난 이유도 어쩌면 투철한 공적 의식으로 일어난 거룩한 분노가 아니라 사적 감정에서 비롯된 개인적 범죄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인의 행복이 사회 구조적 질서에 달려 있는 것인지, 자신의 주체적인 결정과 적응에 달려 있는 것인지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하지만 주인공은 전자를 굳게 믿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구조적인 질서에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내맡기고 질질 끌려가면서 미래를 기다릴 뿐입니다. 사회 속 개인의 주체성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드는 글이었습니다.


빌딩 마리아주 by 조원우

A: 고층 아파트로 상징화된 ‘사회’와 자본, ‘버그’등 상징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버그의 실체도 인물간의 갈등, 상징도 수박 겉핥기식에 지나지 않는군요. D층, 150층 등으로 상징되는 계급사회의 면모는 흥미롭지만, 주인공의 추락과 관련한 사건이 뒤섞이면서 사건까지 불명확해졌습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단편 분량에 비해서 많은 편인데 인물들의 개성은 제대로 살아나지 않아서 그들이 왜 등장한 것인지도 알 수 없어지네요. 원고지 75매 정도의 그리 길지 않은 글인데도 글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락적인 사건들이 전체적으로 아우러지지 못하고 단절적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간절한 염원이 자리를 바꾸었습니다.” “심지어 당신의 의미마저도.” “알고 있잖아, 저 빛이 무엇인지.” “많은 의미가 있지만 저 위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 등 잔뜩 멋을 부린 거창한 대사가 작가가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흐리고 맙니다.
82번, 주인공 등의 개성이 확실하게 잡히고 사건들 사이의 유기적인 구조가 독자에게 명료해진다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겠지요. 승한과 L, 82번, 버그 등의 이름으로 글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의미도 말입니다.


B: 버그 등의 용어 사용 때문에 가상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구성을 살펴보면 그것은 아닌 것 같군요. 두 가지의 주제가 발견됩니다. 첫째는 사회계층화와 사회 불평등에 대한 비판입니다. 둘째는 부유함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몰락과 인생무상입니다. 첫 번째 주제는 빌딩이나 버그 등 소재의 상징으로 표현되었고, 두 번째 주제는 주인공이 추락하는 것으로 끝나는 중심사건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소재와 사건이 끝까지 동시에 가기 때문에 두 주제의 계속되는 충돌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겠지요. 둘 중 하나의 주제에만 집중했다면 주제를 보다 더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빌딩이나 버그 같은 상징이 노골적인 것도 글의 매력을 줄이는 요소인 것 같습니다.


앨리스는 더 이상 여기 살지 않는다 by 김진영

A: 해츨링, 슬레이어, 시골 마을의 영웅의 탄생. 80년대 판타지부터 많이 다뤄진 익숙한 소재가 오히려 그리운 느낌까지 드는군요. 전작들에 비해서 대사는 다소 현실성을 획득하고 있지만 슬레이어와 마을과의 관계, ‘연’등 독자에게 미지인 채로 넘어간 설정이 많습니다. 슬레이어들이 엘리스가 자신들의 계략에 빠졌다는 말을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마지막까지 해결되지 않고, 주인공은 엘리스와 마찬가지로 선택을 합니다. 이는 사건이 일어날 암시가 되죠.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 남아 버리므로 단편으로서 완결성을 잃고 글 전체가 장편의 시작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하네요.
평범한 소년이 소녀와 헤어지고 드래곤과 함께 하게 되는 이야기는 성장소설의 예를 따르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성장이 무엇인지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전히 ‘그 아일 생각하는 것보다는 낳을 것 같거든요.’ 와 같은 맞춤법의 오류가 나타납니다. 퇴고를 통해 수정하시는 게 좋겠네요. 비교적 주인공과 가까운 나이이신 것으로 알고 있으니 작가가 주인공의 심리에 조금 더 집중해 보시면 더 좋은 글이 될 것 같습니다.


B: 지나치게 객관적이었던 감정 서술이 완화된 점이 반갑군요. 일인칭이라는 시점이 한 몫 하긴 했지만, 생생한 표현은 작가가 글 속에서 그 인물을 살아볼 때 나타나기 마련이 아닐까 합니다. 로버트 매캐먼의 <소년 시대>에 등장하는 귀부인은 작가를 꿈꾸는 소년에게 ‘작가는 수많은 세상에 방문하고, 수많은 사람의 삶을 살아볼 수 있다.’는 말을 들려줍니다. 이것은 소설작법에도 적용되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작가가 소설 속 인물을 살기 위해서는 인물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이 글은 구성이 평범한 편이기 때문에 인물의 개성으로 승부를 하면 매력이 더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주인공인 소년의 ‘순수함’을 부각시킨다거나 앨리스에게 가지는 ‘감정’을 부각시킨다거나…… 방법은 여러 가지겠지요.


Flash by K.kun

A: 암에서 기적적으로 회복한 아버지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던 아들은 아버지의 약을 찾아오는 심부름에서 저승차사와 마주칩니다. 사람들이 공포에 질리는 상황 속에서 저승차사와 ‘나’의 의외의 과거가 서서히 풀려나가는 전개가 흥미롭습니다. 작가 특유의 깔끔한 문장으로 서술되는 글 전체가 죽음과 삶, 저승차사, 오구신, 기적 등의 소재와 함께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 내는군요. 특히 ‘또 누군가가 아프다면 나는 견딜 수가 없다’는 어머니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 등은 독자의 어머니를 떠올릴 정도로 생생합니다.
다만 아들, ‘나’가 저승차사와 거래를 통해 아버지의 수명을 연장시켰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후 ‘유예’와 ‘나’가 겪게 되는 사건들이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처리된 점이 아쉽습니다. 일인칭 시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겠으나 독자가 사건의 실체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주인공이 감각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은 작가가 의도한 부분이라고 해도 ‘마지막 별이 올라가다’ 같은 시적인 서술과 결합되면서 독자가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어집니다. 그 결과 수많은 죽음의 장면을 접하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무기력함이 잘 살아나지 못하고, 마지막 장면이 긴장감을 잃어버리지요. 게다가 ‘2009년의 K선수’ 와 같이 작가는 알지만 독자는 모르는 부분들이 종종 등장하는 것도 글에 몰입하기 힘들게 만들어 버리죠.
자신의 수명과 교환해서 아버지의 수명을 연장시킨 아들의 효성은 결국은 아버지를 포함한 모두에게 비극으로 끝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지막 장면은 삶과 죽음, 생명, 가족 등 여러 가지의 생각을 하게 합니다. 작가의 관점이 아닌 독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보다 생생하게 다가오게 할 수 있다면 멋진 글로 다시 태어날 것 같습니다.


B: 간결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문장, 깔끔한 감정과 대사 처리가 인상적인 글입니다. 전작들에 비해 훨씬 더 정리된 느낌이 반갑습니다. 오구신이나 저승차사 등 한국적인 소재나 사람들이 가진 운(運)에 대한 해석 등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난 글입니다.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현상, 이를 테면 비타민을 옆에 놓은 어머니의 표정, 소독약 냄새 등 사소한 소재를 표현하는 세밀한 감각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승차사와 주인공의 대화에 은근한 해학을 얹어서 죽음이라는 중심소재가 지나치게 무거워지지 않은 것도 매력적입니다. 다만, 저승차사와 주인공의 성별이 뒤바뀐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사소한 점일지는 모르나 사건보다는 두 인물이 글을 이끌어가는 만큼 인물 표현에 조금 더 섬세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구성면에서는 독자들이 혼란스러울 요소가 군데군데 눈에 띕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수명 연장을 위해 오구신과 거래를 한 것은 분명하지만, 저승차사를 처음 만나는 아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고 이후 아버지의 죽음을 보는 지점까지 시간이 뒤섞여서 독자가 따라잡기 힘든 점이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치밀하게 구성을 하고 쓰는 경우 종종 작가들이 범하는 실수이기도 합니다. 작가 스스로가 이야기 구조를 너무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요. 특히 순차적으로 사건을 진행하는 대신 회상 등을 이용하여 시공간을 뒤섞는 구성에서는 독자들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재미있게 읽은 글이라서 그런지 잔소리가 길어지는군요.(웃음)


98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꿈꾸는 문들의 도시 by 빈군

A: 1인칭 주체의 심리묘사가 담담하면서도 생생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연인의 죽음을 수용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심리와 ‘문의 세계’라는 환상적인 설정이 글 안에서 잘 어우러지면서 신비로우면서도 우리 모두의 이야기처럼 생생한 글로 태어났군요.
아프리카로 가려는 연인을 불안한 마음으로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한 아쉬움과 그 뒤에 반복되는 낯선 꿈속에서 주인공은 연인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연인의 유일한 가족인 동생이 주인공의 마음을 부채질하지요. 꿈속에서 연인은 자신이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자신의 시체를 찾아달라고 하기도 하면서 점점 이야기는 현실과 다른 국면을 향해 치닫습니다. 그런 꿈과 현실 사이에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냉장고’ 또는 ‘기계음’입니다. 이것은 작가가 꿈을 현실 속으로 가져 오는 장치인 동시에 꿈이 단순히 꿈이 아니라는 증거로 쓰이기도 합니다. 읽기 따라서는 주인공이 그만큼 현실 속에 꿈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지요.
꿈은 마침내 연인이 주장하던 ‘문의 세계’를 실체로서 인정하면서 주인공 자신도 현실 속의 인물이 아니라는 꿈으로 나타납니다. 현재가 꿈이며 꿈이 현실이라는 주제는 많은 작가들이 끝없이 다뤄 왔습니다만, 꿈과 현실을 이렇게 모호하게 뒤섞으면서도 독자가 생각하게 만드는 글은 오랜만이네요.
물론 현실이 꿈이고 이것이야말로 진짜 현실이라고 나타난 세계가 지나치게 갑작스럽게 마무리되면서 주인공이 되돌아와, 독자가 현실과 대등하게 바라보아야 할 꿈속 세계가 적절한 무게를 갖지 못한 느낌이 듭니다. 꿈과 현실이라는 주제, 인식의 문제를 다루는 이 글에서 작가가 꿈속 세계를 현실이라고 타당성을 보다 강하게 제시하기 위해서는 ‘차원 추방자’ ‘강제각성’ 등의 명사들을 보다 글 안으로 녹여내어 독자에게 와닿게 풀어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마지막에서 주인공인 세상이 붕괴하는 원인을 연인에게 잡습니다. 자신이 거부하기 때문에 무너져 내리는 수많은 꿈과 현실의 중앙에 연인이 있다고 말하지요. 주인공이 연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망설이고 있기 때문에 연인의 죽음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주인공의 독백은, 존재 자체도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감에서부터 존재와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까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솜씨는 작가가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겠지요. 깊이 있는 주제와 독특한 환상성이 멋지게 어우러진 좋은 글을 만나서 기뻤습니다.


B: 오랜만에 나타난 작가의 글이라 반갑군요. 여전히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묵직한 주제를 담은 글입니다. 감각적이고, 사변을 통해 내면으로 파고드는 감수성이 인상적입니다. 담담하게 이어지는 서술 아래에는 상실감과 슬픔이 느릿느릿하게 관조적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감정과 다소 거리를 두고 있는 관조적인 서술이 오히려 애틋함을 자아내지요.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이들은 죽은 자들이 내가 있는 지금-여기와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어 합니다. 이 글에서 그러한 공간은 어쩌면 실재하지 않는, 우리의 상상 속에 있는 세계일뿐이라는 슬픈 결론을 짐작합니다. 주인공이 관문의 도시에서 여행을 시작한 연구원임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슬픈 결론에 이르는 지점이지요. 하지만 다시 꿈으로 들어가면서 주인공은 현실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게 되고, 우리는 아주 오래된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나는 실재인가, 이 세상은 실재인가. 그 때, 작가는 이런 메시지를 전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아주 많은 문들 중 하나를 택하여 이 세상을 여행하고 있는 여행자일지도 모른다. 인도 신화에서 인간의 삶은 비슈누 신이 꾸는 꿈이라고 합니다. 그에 비해 문을 선택하여 스스로의 삶의 꿈을 꾸는 인간은 훨씬 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겠지요.


98호 독자 우수단편 우수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euseoha @ gmail. com 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 (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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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군 11.07.31 00:17 댓글 수정 삭제
    아이고, 우선 졸작에 과분한 평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헌데 제 소설이 이미 문장 주간작에 선정이 돼서...; 지난 주말에 본문 수정해서 심사 제외 해달라고 덧붙여 놨는데 제대로 전달이 안된 모양이네요. 우수작 선정에 본의 아니게 혼돈을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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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찬 11.08.01 18:14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지적사항에 대해 심도있게 파악하고 수정해서 더 나은 모습으로
    다시금 도전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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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rror 11.08.10 07:51 댓글 수정 삭제
    빈군님, 이미 심사를 시작한 후에 심사제외 수정 요청을 하셔서 생긴 혼선인 것 같습니다. 원래 수상작을 올리신 게 아니라 단지 기간 차이로 빚어진 현상이니, 이번에 우수작으로 선정되신 것은 명예상으로 놔두고, 상품은 보내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훌륭한 작품 올려주신 데 대해 감사드리고, 다시 또 좋은 작품으로 만나뵙길 기대합니다.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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