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여름이 바짝 다가온 것 같더니 어느 새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바깥을 다니기는 힘든 날씨지만 내리는 비를 바라보노라니 잠시 잊었던 일들을 돌아보는 여유가 생겨나기도 하는군요. 이번 달은 유독 사람의 ‘관계’에 대한 주제가 많았습니다. 지난달 인상적이었던 가작의 소재가 마침 ‘관계’였던터라 그 영향이 아닌가 심사평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그들과 관계할 것인가는 살아가는 동안 끝나지 않을 고민이 아닌가 합니다. 작가분들이 함께 삶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자 하는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도 한 번 되돌아보게 됩니다.
최인호씨는 언젠가 작가란 어딘가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쓰는 거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작으로 채우고자 하는 욕망은 어쩌면 우리의 결핍 혹은 외로움과 맞닿아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상가의 ‘공(空)’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결핍의 각인이 아닐런지요. 모두가 창작활동을 통해 찰나의 충만함을 만끽하시기를 빌어봅니다.
97호에서는 가작으로 엄길윤 님의 ‘자동차’를 선정하였습니다. 더욱 건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5월 16일부터 6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총 18편의 글 중 심사대상이 된 글은 11편이었습니다.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번역 : 못 하나가 모자라서(메리 로베넷 코월), 아마릴리스호(캐리 본)
2) 분량초과 : 벚꽃이 피었습니다(김진영 : 원고지 240매)
3) 분량미달 : 월세가 저렴한 방(헤르만 : 원고지 45매), 삶의 이유(공간 : 원고지 17매), 택시(조원우 : 원고지 59매)
4) 타 사이트 수상작 : 2845곰돌이(빛옥)


중년z by persona

A: 문장이 탄력적이어서 수월하게 읽히는 느낌입니다. 매끄러운 전개와 함께 결말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익숙한 그리움을 맛있는 음식 냄새로 이어가면서 섬뜩한 결말을 암시하는 부분이 이 글의 백미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브루노와 힐튼 부부 사이의 사건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아서 결말이 느닷없어 보입니다. 브루노가 힐튼 부부에게 가지는 적개심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만큼 그들의 사연이 명확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B: 좀비화의 배경 설정도 탄탄하고 전반적인 서술도 안정적이어서 전체적으로 글을 읽기가 편안한 느낌입니다. 총기사용을 하기 위해서 배경을 미국으로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 외에 미국의 특징이 잘 살아났다고는 볼 수 없겠군요. 주인공이 가족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오히려 동양적인 정서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일인칭 시점에서 흔들림 없이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좋아, 독자로서 즐거운 글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안타까운 부분은 ‘부르노 영감’과 ‘힐튼 씨’와의 관계가 제대로 설명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부르노 영감이 어쩌다가 힐튼 씨의 망나니 아들을 감염시키게 되었는지, 얌전하고 조용한 사람들인 힐튼 씨 부부가 어째서 부르노 영감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는지, 브루노 영감은 왜 ‘나’가 감염시켜야 할 대상으로 힐튼 씨 부부를 지목했는지, 풀리지 않는 의문 때문에 마지막의 매력적인 결말이 제대로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 느낌이네요. 바이러스의 영향을 받아 인간이 아닌 무언가의 존재로 변해, 늘 그리워했던 아내의 팬케익, ‘그것보다 맛있는 것’을 향해 붉어지는 시야로 공격하는 주인공의 엔딩은 압권입니다.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by NC YUN

A: 이야기를 연결하는 핵심적인 세 가지 고리는 사회적 성공이 금지되는 아내 가문의 저주, 남편인 나, 저주의 원인인 신단수입니다. 주인공인 ‘나’는 결혼을 하면서 타자의 입장에서 저주를 받은 주체로 신분이 변한 상태이지요. 그렇다면 저주를 받은 주인공이 ‘어떤’ 절박한 이유로 저주를 해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삼십대 미시족으로서 공인중개사로서 잘 나가기까지 하는’ 아내는 저주에서 비껴간 것처럼 보이고, 그로 인해 ‘나’마저 가게와 잘 나가는 아내까지 가진 신세 좋은 남편으로 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저주를 굳이 깨려고 하는 이유를 독자가 납득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더욱이 타자처럼 머물던 주인공이 목숨까지 바쳐서 저주를 깨려는 행동은 공감을 얻기 힘들어 보입니다.


B: 꽤 잘나가는 아내와 무력한 남편이 있습니다. 남편은 결혼 전에 아내가 저주를 받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 가문의 사람은 결코 대성할 수 없다는 저주랍니다. 남편은 그 때문에 자신도 아내도 크게 성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편안한 저주입니다. 실상 이 세상에서 대성한 사람은 극히 일부이고, 성공을 추구했다가 좌절한 사람들은 실망과 푸념으로 세상을 살아갈 텐데 이들 주인공들은 숙명이려니 생각하니, 오히려 저주가 아니라 축복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주인공 ‘나’의 심리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던 남편이 돌연 가문의 저주를 풀기 위해 신단수에 참회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선택은, 갑작스러울 뿐만 아니라 설득력이 없습니다. 아내의 거듭된 실패, 혹은 자신의 노력의 좌절, 그 모든 것이 저주의 탓이라는 걸 알고 나 하나 희생하면 아내만이라도 성공할까 하고 대속을 택하는 것이 아닌 때문에 마지막 결말의 ‘나의 숭고한 정신’이라는 표현은 공허한 울림으로만 남네요.


그녀의 초록색 우산 by 윌랴얄리

A: 비약이 많은 구성으로 인해 작가가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점이 흠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감추다가 본질마저 흐릿하게 만들어 버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요. 숨겨진 이야기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서 여러 가지 추측을 낳는 글입니다. 열쇠는 홍순옥 여사가 사육하듯이 키우는 ‘열음’의 정체입니다. 열음이 무당인 홍순옥 여사가 모시는 ‘신’임이 여러 군데서 암시되고, 시한이 홍여사의 반지를 끼게 되는 결말로 보아 ‘신’이 시한에게로 옮아가는 과정이 살인으로 이어졌다고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야기는 혼란스럽고 산만합니다.


B: 감금당한 채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어린 소녀는 오직 거울 속의 자신과만 대화합니다. 소녀의 생활에는 무당을 폐한 전 무당이 있습니다. 소녀의 세상은 오직 그 전 무당 홍순옥 여사를 통해서만 일어나지요. 홍순옥여사는 소녀 열음에게 ‘엄마’라고 자신을 칭하지만, 모든 것으로부터 열음을 격리시키고 사육할 뿐입니다. 왜 여사가 열음을 그렇게 대하는지는 무당을 폐한 사건, 남편의 죽음 등 여러 가지 사건의 회상과 뒤섞이면서 불분명해집니다.
이야기는 2층의 창을 통해 열음이 소통하게 된 시한이 나타나면서 더욱 흐려집니다. 시한의 과거의 상처, 시한과 홍순옥과의 대화 모두 사건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결말은 시한 또는 열음이 홍순옥 여사를 살해하고 두 사람이 만나는 것 같은 암시를 줍니다만, 범인이 타인에게서 받은 칼로 홍여사를 공격한 열음인지, 혹은 시한이 절규하듯 시한 자신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열음의 정체도 모호합니다. 열음은 홍순옥여사가 섬기는 신으로도 보이며, 혹은 홍순옥여사가 자신과 동일시해 데려온 업둥이일 지도 모르며, 실제로 홍순옥 여사가 무당을 폐하게 된 원인으로 홍순옥 여사의 딸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무당의 업을 딸이 이어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감금시켰고, 결국 딸의 몸에서 신내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징조 앞에서 걱정스럽게 고민하다가 결국 열음 (혹은 시한)에게 살해당한 것일 수도 있죠. 실제로 이 사건이 어떤 형태였냐에 따라 글의 의미와 상징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만, 작가가 모든 것을 흐리게 모호하게 만들어 둔 탓에 독자가 혼란스러워지고 해석의 여지만이 남았습니다.
안정적인 3인칭 시점과 탄탄한 묘사력이 돋보이는 글에서 작가의 의도가 잘 살아나 플롯이 명료해질 수 있다면 더 좋은 글이 되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냉장고 폐기법 by 문애지

A: 이야기의 주제는 두 개입니다. #18에 등장하는 ‘내 안의 보존’과 결말에서 내보이는 ‘존재감 없는 인간’이 그것입니다. 작가는 두 주제를 통해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하고 싶어한 것 같아 보입니다. 새로 생긴 여자친구는 내가 보존해야 할 대상이고, 보존할 대상이 생긴 순간 비로소 나는 존재감을 얻게 되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연결이 억지스럽고, 상념만을 이어가며 감각으로 치장한 이야기는 구성면에서 보았을 때 완성도가 상당히 낮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B: 단락적이고 사변적인 서술 속에서 이야기의 플롯은 흐리고 선명하지 못합니다. 자살사건에 이르기까지의 서술이 진행되지만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하려고 하면 곧바로 단락이 바뀌어 버리는군요. 작가로서는 손쉽게 장면전환을 할 수 있는 편리한 기법입니다만 독자에게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고, 실제로 이 글에서도 산만함을 낳고 말았습니다. 소설은 상념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셔야 하겠습니다.


여동생이 준 연필 by 류대식

A: 자극적인 근친상간을 소재로 다룬 글입니다. 흡입력 있는 문장과 전개는 무난하지만 근친상간이라는 금기를 주인공들이 너무 쉽게 넘어 버리는 것 같아서 슬쩍 웃게 되는군요. 게다가 작가의 시선은 남성의 욕망과 에로틱하고도 포르노적인 환상을 훑어갑니다. 죽음을 앞둔 사춘기 소녀가 그 무엇보다 성애경험과 임신을 통해 아이를 남기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리는 점이 그렇습니다. 이 글에서는 죽음조차 금기를 파괴하는 남매를 위한 변명이자 맛깔스러운 양념으로 쓰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흥미위주로 쓰인 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애묘사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플라토닉한 성애소설(?)에 속한다고 봐야할 같군요.


B: 불치병에 걸린 친남매와의 애틋한 사랑. 드라마에서 선호할 만한 이야기이며 자칫하면 뻔하게 느껴지는 소재이기도 하지요. 이 글은 흔한 소재에다가 흔한 에피소드에서 벗어나지 않아, 단순한 느낌만이 남았습니다. 대사는 많지만 의미있는 깊은 대화는 적고, 서술은 그보다 더 적습니다. 사회적 금기를 깨는데 주인공의 고민은 그리 깊어 보이지도 않는군요. 죽어가는 여자아이가 죽기 전에 꼭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건 글쎄요, 실제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들으면 웃어버릴 이야기 아닐까요.


지구를 보다 by 성창훈

A: 멸망하는 지구, 떠나는 사람들, 최후의 인류. SF에 수없이 반복되는 모티브입니다. 이런 모티브를 사용하는 SF는 대개 감상적인 최후로 결말을 짓기 일쑤입니다. 그것이 이 모티브의 운명이라면 당연히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치밀하고 신선해야 하겠지요. 작가는 멸망하는 지구에 대한 대안으로 지구를 태양계 밖으로 끌어내는 계획을 제시합니다. 지구에는 감상적인 최후를 임무로 부여받은 주인공이 유일한 인류로 존재합니다. 기술적인 설정이 양념처럼 수없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많이 남습니다. 공전반경을 변경하며 지구를 태양계 밖으로 끌어낸다면, 궤도 변경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환경변화는 어떻게 해결하는 것인지요? 이미 지구가 아닌 환경을 가진 행성을 인류가 남기려는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는군요. 또한 천 년도 아니고, 만년도 아닌 10억년 동안 막대한 시스템을 단 한 사람이 유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도 의문이 남습니다. 영구적인 기관이 아닌 이상 시스템이 10억년 동안 작동할지 모르겠군요. 설정이 논리적으로 타당함을 보여줄 수 있는 구체적인 설명들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첨단기술이 들어간 설정을 여러 가지 산만하게 사용하기 보다는 양파에 담고자 한 의미를 확대해서 단순하게 구성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B: 지구를 지킬 마지막의 인류가 필요할 때, 주인공은 영웅심리로 남는 길을 택합니다. 그리고 10억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남자는 홀로 지구에서 생활하지요. 마지막으로 그가 택할 수 있는 결말은 무엇이 있을까요? 후손과의 감동적인 조우, 혹은 최후를 영웅적으로 마무리하기. 독자가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작가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갈 것인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양파의 에피소드, 후손과의 만남, 행성과의 충돌 위험 상황과 삶에 대한 회의 등 작가는 여러 가지 양념을 준비해 놓습니다만, 안정적인 문장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에피소드는 보이지 않고, 비슷한 강도를 가진 에피소드만 연속되고 있습니다. 문장에서 지나치게 많이 등장하는 ‘나는’ 이라는 표현 때문에 독자가 완전히 글 속에 녹아들기 힘들기도 하고요. 원고지 140매를 넘어가는, 단편으로서는 긴 분량 안에 이야기가 산만하게 흩어지게 배열하기 보다는 핵심이 되는 장면과 에피소드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작가의 주제를 드러내기에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지요.


귀신대면 by 목이긴기린그림

A: 유려한 문장 대신 간결한 구어체를 담백하게 사용한 것이 오히려 괴담과 잘 어우러지는 느낌입니다. 구체적으로 서술되는 정황들은 독자를 몰입하게 하는 미덕을 발휘하지요. 특히나 물속으로 들어가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은 생생하고 사실적이어서 작가가 시체를 처리한 경험이 있지 않나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웃음) 그러나 인물들을 성(姓)만으로 지칭함으로 인해 오독할 여지를 많이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전작들에 비해 이야기가 명확하게 정리가 되지 않는 것도 약점이라 하겠습니다.


B: 경상도 남학생들의 말투가 그대로 살아나서 종종 웃으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글로 적으면 느낌은 잘 살아나지 않지만 경상도 억양으로 소리를 내어 읽는 순간 생기가 살아나는 대사들이 좋군요. 생각나는 대로 바로 입 밖으로 내는 중학교 남학생들의 특징이 잘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인물들의 대사가 전체적으로 비슷한 느낌을 주다 보니 한, 이, 박, 신 등의 인물들이 구별이 잘 되지 않고, 따라서 사건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점이 됩니다. ‘이 녀석’이라는 지시어는 ‘성이 이인 녀석’ 으로도 단순히 ‘이 사람’의 구어체로도 보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혼동을 낳기도 합니다.
그리고 학생이 기절해 교실에 쓰러져 있는 상황(실상은 죽은 시체지만)에서 교사나 학생들의 의문이 학생들의 말 한마디에 풀리고 아무도 그 학생에게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은 수긍하기 힘듭니다. 이후 ‘이’의 행동이 상세하게 서술되면서 행동 하나하나는 감탄할 정도로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만 인물들의 성격을 단순화 하면서 중요한 사건, 이 이야기의 큰 줄기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아 글의 장점이 잘 살아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여왕의 기사단 by That.end

A: 시대를 관통해 가는 역사적 상황 속에 담긴 판타지적인 로망을 맛깔나게 서술한 글입니다. 안정되고 흡입력 있는 문장이 매력적입니다. 단편이라고 하기엔 함축성이 적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로 가치가 있겠지요. 장편의 한 장면을 엿보는 기분이어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제 시작이라는 여운이 남습니다.


B: 전형적이 남성의 판타지 기사물에 정치비판의 양념이 더해졌군요. 적당히 무게감을 가지는 남성적인 대사와 거기 어울리는 남성적인 문장이 글을 맛깔스럽게 만들어서, 남성 독자들에게는 상당한 매력이 느껴지는 글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다만 주인공이나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왕녀의 성격이 잘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 집단을 이끌 정도의 리더십을 가지고, 그래서 주인공을 기사로 임명하는 무게감을 가지는 소녀로서의 캐릭터성은 강할 수 있으나 ‘소녀’로서의 개성은 살아나지 못한 것 같군요. 객체화된 대상으로서의 인물만 남아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가 단편으로서가 아니라 장편 소설의 서장 부분으로서 두 인물의 첫 만남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부분은 앞으로 장편의 뒷 부분에서 해소될 수 있겠지요.


라이카 by 11번째발가락

A: 인간이 아닌 관찰자의 시점을 가지는 구성은 당연히 인간을 동물적으로 느껴지리만큼 객관적으로 묘사합니다. SF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구성의 특징은 적나라한 묘사 대상이 인간임을 숨겼다가 마지막에 드러냄으로써 관점 전환으로 달라지는 편견의 변화를 강렬하게 체험하게 합니다. 이 글 역시 그러한 구조를 충실히 따른 글로서 그리 신선하다고 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전반에 녹아있는 동물학대에 대한 혐오감은 반려견을 비롯한 동물권리 보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를 반영한 것이겠지요. 글 속의 실험대상이 되는 인간은 실험대상이 되는 동물과 오버랩되기도 하지만, 이미 장구한 역사 속에서 실험체의 운명이 되었던 희생자들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것은 주제를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소재를 선택하는 대신, 독자들의 혐오감을 부추기는 목적으로 나열해갔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제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에 대한 혐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느낌이 사라지질 않는군요. 주제가 명확하고, 사건 나열보다는 함축성 있는 글이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B: 반려동물의 유기, 동물실험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비판성 짙은 글입니다만, 글의 시작부터가 우리는 이 이야기가 인간의 이야기일 거라는 걸 알고 말지요. 110매라는 분량이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인데도, 현실에 빗댄 이야기의 토막들이 이어지면서 글은 산만하고 긴 느낌을 낳습니다. 분량에 비해서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명료합니다. 현재 동물들이 처한 상황을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하면 얼마나 잔인해지는가, 그러니 동물실험도 반려동물의 유기도 멈추어야만 한다. 주제는 분명히 타당합니다만 그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기법은 동물과 인간의 역전이라는 상황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실험 당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실험체’, ‘실험체2’라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미 글의 중반에서 독자들은 라이카가 인간임을 알게 되는데 마지막 부분에 뜬금없이 ‘라이카가 인간’ 임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반전으로서 의미가 없지요. ‘연구원’의 단락에서 연구원들의 잔인한 실험 태도는 자칫 현재 동물실험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가해자로 몰아버리는 느낌도 드는군요.


정수기 by 룽게

A: 등장인물이 겉으로 드러내는 행동과 다른 속마음이 매우 솔직하게 서술되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사회상황 속에 드러내는 페르소나의 이면에 있는 타인의 민낯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재미가 매력적입니다.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벌어질 것을 기대하게 되지만, 호종과 영걸이 서로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 이야기는 비약합니다. 그래서 전후반부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아서 이야기가 이분되어 버리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자칫하면 생뚱맞게 느껴지기 쉽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기 작가가 전작들과는 다소 다른 색깔을 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자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확인하는 것에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B: 작가분의 전작과 달리 생동감 있고 스피드도 적절한 글을 읽고 반갑고 놀랐습니다. 이야기의 서두는 오히려 가벼운 로맨틱 코메디처럼 느껴집니다만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야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네요. 첩보물의 양념이 더해지면서 이야기는 맛깔스럽고 독특한 생명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인물의 속마음과 겉의 대사가 상반되면서 로맨틱 코메디로서의 매력도 여전히 살아있지요. 그렇지만 후반의 비약은 글을 양분하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선애가 처음 호종에게 느낀 좋은 감정과, 호종이 선애의 아버지를 첩보원으로서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관계라는 사실은 독자가 함께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폭이 넓어요. 선애가 보고 있는 현실과 호종이 선애를 보호하는 진실이 전혀 다른 이유라는 건 독자에게 큰 재미를 선사할 수도 있고 혹은 지나친 비약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요.
하지만 블랙베리 폰이 비밀무기로 등장한다거나, 주변의 인물들이 사실은 다 목적을 가지고 있는 첩보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은 마치 영화 ‘7급 공무원’처럼 두근거리는 느낌을 줍니다. 호종이 마지막에서 정수기를 판매하려고 하는 부분도 산뜻한 마무리와 여운을 남기네요. 선애와 호종의 뒷 이야기나, 선애가 호종과 아버지의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것도 이 이야기의 잔재미입니다.  


자동차 by 엄길윤

A: 흔히 죽음의 문턱까지 간 사람들의 꿈속에는 살아남은 자들이 죽어가거나 다른 세상으로 떠날 것처럼 등장합니다. 이 글도 그런 설정의 연장이라고 보아야하겠지요. 독특하게도 자동차에 사람들과 가족이 갇히는 세상은 악몽이라기보다 세상에 닥쳐온 끔찍한 재앙처럼 보이고, 그 속에서 가족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장의 모습과 심리가 사실적으로 잘 그려졌습니다. 또한 자동차의 상징을 살려내면서 기이한 세상의 모습 속에 사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담아내었습니다. 그러나 상징을 사용한 효과가 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거대한 세상이 악몽에 불과했음을 알리는 교통사고의 현장이 결말에 등장하는 순간이 느닷없이 비약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가족애가 주제였다면 기이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을 묘사하기보다 가족들에게 일어나는 일에 더욱 초점을 두었다면 균형이 맞지 않았을까 합니다.


B: 어느 날 밤 잠에서 깨어났더니 가족들은 모두 사라져 있고, 연락을 취해 보지만 모든 연락은 차단되고 맙니다. 집안의 신발은 모두 사라졌고 밖으로 나가 보니 자동차가 건물 앞으로 몰려 있지요. 사건은 이런 식으로 점점 더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나’는 가족을 찾는다는 목적에서부터 이 현실이 뭔가 뒤틀려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런 긴장감은 작가 특유의 상세하고 탄탄한 서술 덕분입니다. 긴박감이 살아나는 서술이 비현실적인 사건에 생명력을 부여하면서 독자들을 이 사건 안으로 끌어들이지요. ‘나’ 외의 인물들은 모두 자동차에 갇혀 있고 또는 자동차에 삼켜지는 상황, 인물이 타인과 전혀 소통하지 못하는 상황은 절박감을 더하는데, 대사가 극도로 적은 소설에서 독자가 지겹지 않도록 상황을 끌어가는 솜씨는 단연 압권입니다.
다만 절박한 상황이 상승세를 타지 못하고 비슷하게 오래 이어지게 되면 독자가 글을 끝까지 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겠네요. 자동차 번호판에 가족들의 메시지가 나타날 때까지의 상황이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삼일 간의 기간동안 인물은 아파트 근처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삼일 간 인물이 하는 행동이 별로 없다면 조금 더 이야기를 압축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서 이 모든 것이 혼수상태에 빠진 인물의 환상이었고 가족들이 자신을 살려내려고 했었다는 것이 갑작스럽네요. 환상 속의 가족들은 수동적으로 보였는데, 그동안 가족들은 모든 노력을 다해서 자신을 구하려고 했었다는 것이 잘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상 속에서 인물과 가족과의 역동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냈으면 어땠을까요.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가족을 구하려 하고, 가족들도 그에 호응하려고 했다, 그리고 성공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성공한 것이 아니라 가족이 자신을 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쪽이 독자가 받아들이기에 더 타당한 귀결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97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 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euseoha @ gmail. com 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 (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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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길윤 11.06.25 02:31 댓글 수정 삭제
    평 감사합니다! 두분의 말씀이 맞아요! 쓰면서도 가족의 이야기를 더 해야 할지,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야 할지, 그 두 부분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고민이었죠. 이야기의 흐름대로라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어야 하는데, 그렇기에는 자동차에 대한 비판도 하고 싶었거든요. 욕심이죠^^;; 살짝 덮어버리고 모른척 했는데 두 분께서 예리하게 파헤치셨어요~ㅜ0ㅜ 좀 늘어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두 분의 평을 참고삼아 글을 다시 퇴고해야 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평안한 하루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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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라얄리 11.06.25 02:59 댓글 수정 삭제
    품평에 목마른 저에겐 단비와도 같은 심사평이네요. 부족한 글에 꼼꼼한 평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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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창훈 11.06.25 23:02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제 소설을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단편치고 길면서도 많이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시고 평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에는 더욱 좋은 소설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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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C YUN 11.06.27 11:24 댓글 수정 삭제
    제 단편 속 주인공은 백수가 아니라 직업이 있습니다. 수정 부탁 드립니다.
    부족한 글 심사해주시는 건 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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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A 11.06.27 18:20 댓글 수정 삭제
    화자의 권태로움에서 느낀 이미지가 백수를 연상시켜서 실수를 했나 봅니다.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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