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여전히 신문과 방송에는 세기말을 느끼게 할 정도의 믿기 어려운 현실들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봄소식의 전조라지만 꽃샘추위 소식도 유난히 몸을 시리게 하는 3월입니다. 하지만 글 쓰는 이들의 마음이 스산해서야 글도 그렇게 되고 말겠지요. 조금 더 맘을 추스르고 다양한 것들을 보고 느끼며 마음을 윤택하게 하는 봄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94호에서는 우수작 없이 가작으로 장피엘 님의 ‘식물의 집’을 선정하였습니다. 더욱 건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월 16일부터 3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총 13편의 글 중 심사대상이 된 글은 9편이었습니다.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 타사이트 수상작 : J라는 사람이 활을 든 자와 싸웠다는 이야기 (장우석 : 문장주간우수작)
2) 분량미달 : so many blood (기면식; 원고지 25매), 그림자 너머 (호워프; 원고지 45매), 일탈 (sylvir;원고지 18매)
3) 연작 : 산 자에게는 산 자의 일이 있다 (DOSKHARAAS)


마녀의 밤 : 브리그리

A: 천재 두 사람의 격돌이 역동적으로 흘러가면서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것이 매력적입니다. 다만 전체적으로 글의 구성면이나 설정 면에서 즉흥적인 면모가 강해, 인물들의 행동의 근거가 약하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한 천재의 시점으로 다른 천재를 바라보고 그 천재와 격돌,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는 소설은 작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쓴 글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네요. 두 사람이 서로 교감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도 없이 마리엔이 유이가 보호하는 악마를 거두게 된다는 결과는 독자에겐 유이가 느끼는 것보다도 더 의아한 느낌만을 남겨둡니다. ‘마법’과 ‘마술’의 차이점 등은 작가가 전환을 위해 숨겨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갑작스럽게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를 말하는 부분이나 출신지에 따른 마술 마법의 차이점 등은 작가가 뒤늦게 설정을 덧댄 느낌이 들어서 어색합니다.


B: 마녀 아카데미, 악마의 인류침공 등 흥미로운 소재가 등장하지만 설정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 점이 아쉬운 글입니다. 죄책감으로 인해 다람쥐처럼 생긴 악마를 보호하려는 어린 마녀 유이는 특출한 마녀 마리엔이 자신의 과거를 투사하는 대상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마리엔이 유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이유는 단순히 유이가 자신처럼 비범해 보이기 때문이지요. 유이를 자신처럼 여기게 되는 심리적인 과정이 이토록 단순하게 그려지는 바람에 다소나마 인간적인 감동이 느껴져야 할 마리엔의 자비로운 행동은 나르시시즘을 나타내는 것에 머무르고 맙니다. 설정을 활용한 특별한 사건보다 한 인물의 심리변화로 인한 사건해결을 구성하고 싶었다면 심리적인 흐름을 맛깔나게 구성을 해야 바람직했겠지요. 그러나 글의 분위기에 담긴 아기자기함이나 생동감 있는 인물들은 장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기억의 숲에 머물다 : 브리그리

A: 유쾌한 글투의 전작과는 다르게 감상적인 글투의 소설이, 같은 작가의 작품일지 의아하게 만듭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과거의 상처투성이 추억으로 되돌아가 그 때의 실수를 고치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기본 심리는 대부분의 독자들과도 같겠지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한 번쯤 생각해 본 미련인 만큼 글이 독자들이 예상하는 선에서 벗어나질 못하네요. 다만 과거의 아픔을 하나씩 고치고 싶어하고, 그러나 결코 근본적인 해결은 할 수 없다는 이 내용이 작가분이 스스로의 과거를 정리하는 개인적인 의미를 가진다면야 이 글의 가치는 따로 있는 것이겠지요.


B: 주인공이 헤매는 기억의 숲은 상처로 가득한 유년기의 숲입니다. 굳이 정신분석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유년기의 기억은 인간의 정신 혹은 영혼이 출발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당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과거의 사건이나 그곳을 여행하는 주인공의 심리가 섬세하게 그려져야 했겠지요. 그러나 산만한 구성으로 인해 신비주의와 감상주의만이 떠돌다가 사라져버리는 느낌입니다.


오늘 밤의 여인들 : 이니 군

A: 이 글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생생한 인물들입니다. 서술로 설명하지 않아도 대사들이 각자 누구의 대화인지 명확하고, 인물들의 성격도 개성적입니다. 거기다 ‘오늘 밤의 여인들’이라는 가게의 분위기나 등장인물들의 분위기가 하나하나 생생하면서도 잘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군요.
다만 다른 글에서 흔히 등장할 법한 기억을 잃은 방랑자와, 그들을 맞이하는 여자들이라는 구성이 전형적인 선에 머물러 아쉽습니다. 방랑자가 가지는 갈등이 깊이가 없이 얕아서 글 전체에 무게를 싣지 못하다 보니 작가의 의도를 잘 살리지는 못한 듯합니다. ‘여인’이라는 이름이 원래 주인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인데 주인이 바뀌면서 이름의 의미도 바뀌었다는 부분은 글의 말미에 등장한 에피소드로서는 적합하지 않네요. 작가가 의미를 싣고 싶었다면 글의 중반부 정도에 제대로 언급해 두는 편이 좋았겠습니다. 어떠한 글이든 머릿속 아이디어를 현실화해서 소설을 쓸 때는 깊이 고민한 후에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편이 더 좋겠지요.


B: <오늘 밤의 여인들>이라는 여관에는 호텔 캘리포니아의 가사를 연상시키는 따뜻한 인간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한 개체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기억을 잃은 테바이를 받아들인 노아와 느네는 인생에서 길을 잃은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고 ‘가장 피가 붉고 뜨겁게 흐를 때’를 살아가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서게 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합니다. 이야기 주제에는 작가가 생각하는 인생과 바램 등 진솔한 깊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제의 깊이에 비해 인물들의 행위나 정서가 얕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기억을 잃었다가 찾는 테바이의 사연도, 노아나 느네와의 대화도 전형적이어서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고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버린 것이지요. 인물에 매혹되어 겉돌지 말고, 무거운 의식의 지층을 힘 있게 뚫고 내려갔다면 어디선가 들은 듯한 이야기가 아닌, 인물들만의 감정을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한밤, 광대와의 술자리 : 이니 군

A: 전작과 마찬가지로 인물들의 대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설에서 대사만으로 캐릭터의 행동과 성격을 원만하게 만들어 낸 점이 돋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대화가 생생하다고 해도 꽤 긴 글이 전반적으로 대화로 지탱되다 보니 실연의 에피소드 각각이 오히려 독자에게 잘 와 닿지 않는 게 아닐까요. 오히려 광대 1인칭의 일반적인 서술과 ‘연’과의 대화를 적절히 배분하는 구성을 취했다면 각각의 실연 상황이 보다 생생하게 살아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에어컨을 부여잡고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하며 펑펑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대화 속에서가 아니라 주인공의 심리 묘사와 함께 서술 형식으로 제시되었다면 독자에게 더 절절한 동조를 이끌어 내었을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B: 주인공의 처지나 인연이라는 개념을 광대, 이름이 연(緣)인 인물로 형상화한 점이 재미있습니다. 만남에서 상처 받은 주인공이 연을 상대로 대화를 나누는 설정도 흥미롭지요. 그러나 만남과 헤어짐,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거부되어서 생긴 상처와 자신에 대한 부적절감 등으로 이루어진 구성은 소설이라기보다 작가의 자기고백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생생한 진솔함이 인상적입니다.


상처는 깊고 선명한데 잊어지지는 않고 : 김진영

A: 깊고 선명한 상처가 기억에서 사라지려면 ? 얕은 상처 쪽이 기억에서 사라지기 쉬을 테니까 깊고 선명함과 잊어짐은 동접이 아니라 역접이 되어야 합니다. 제목에서부터 연결어가 좋지 않죠. 게다가 글의 말미에는 아무 거나 적다보니 나온 글이라고 이실직고를 합니다. 작가의 그런 고백이 없다고 해도, 이 글은 사건의 전개가 갑작스럽고 인물의 행동에 필연성도 없어서 독자가 집중하기도 힘드네요. 제목 역시 글이 내용과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어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만 방향성이 없이 다만 습작만을 반복한다면 자신의 단점을 되풀이하는 결과를 낳기 쉽습니다. 많이 쓰기 보다도 많이 고민하고 많이 읽는 작업, 그리고 자신의 글을 숙고하여 되풀이하는 것이 작가분의 글을 성장시키는 효과적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B: 글은 활자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는 글을 쓰는 작가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작가가 글에 투입한 에너지의 양만큼 독자도 에너지를 소비하며 읽게 되는 것이 아닐 런지요? 작가 스스로 ‘아무거나 적다가 나온 글’이라고 천명한 글이 어떻게 읽히길 바라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잠자리 인간 : 목이긴기린그림

A:  ‘잠자리인간이’ 돌연 ‘나’에게 나타나지만 나 외의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누나와의 일도, 동생과의 대화도, 단락적으로 뜬금없다는 점에서는 화자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이긴 하네요. 화상으로 눈을 다치고 의안을 한 ‘나’의 주체로 서술되는 사건들은  낯설고 기묘합니다만 거기서 멈춰 버리죠. 동생의 팔다리가 사라지고 그 사건조차 누구도 알지 못하는 상황은 실제로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 독자에게 의문만 던져 놓습니다. 원고지 150매 가까운 분량의 글을 읽고 남는 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당혹감 뿐이네요.


B: 구성에 일관성이 부족하고, 잠자리 인간이 무엇을 은유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메타포는 원관념이 명확하고, 주제와 동화되어야 바람직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메타포를 사용한 글은 묘한 신비주의로 포장되어 독자를 현혹하는 것에 그칠 뿐입니다. 만약 게슈탈트의 붕괴, 즉 정신분열로 나아가는 주인공의 정신과정을 그리고자 했다면 주인공의 정신을 붕괴까지 몰고 가는 상황이나 심리적 사건이 등장해야 했겠지요. 단순히 분열증상만을 보여준다면, 정신분열증 진행 사례 제시에 그칠 뿐입니다. 사례제시와 소설의 차이가 무엇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이베리어 윈터수프 : The Halo

A: 무엇보다 세계관이 독특하고 선명합니다. 이 글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이 세계에서 일어났을 거라는 기대감을 주네요. 사건을 모두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대화와 서술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하게 하는 솜씨가 독보적이어서, 모든 사건을 직설적으로 설명하기만 하는 여러 글들과 구별되는 차별성을 보입니다.
다만, 이 글의 이야기가 한 세계에서 일어난, 그 세계의 중요한 사건을 보여 준다기 보다는 긴 이야기의 서두 같은 느낌이 드네요. 코반과 노리아의 첫 만남, 그리고 그 둘이 서로 조금씩 가까워질 때까지의 과정을 긴 장편의 서두 혹은 긴 장편의 외전처럼 느껴집니다. 세계의 이야기를 좀 더 채워서 장편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정도로 매력적인 세계관이니만큼 조금 더 이야기를 키워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B: 윈터수프가 넘치는 장면을 읽고 있노라니 마르케스의 <빛은 물과 같아>라는 단편이 떠오르는군요. 이 글은 긴 장편의 외전처럼 느껴지는 글입니다. 그만큼 노반과 노리아 두 인물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에만 집중된 이야기입니다. 명확한 인물의 성격과 사건은 재기발랄하고, 안정적인 서술로 흡입력이 있는 이야기이지만 단편의 특징인 압축성이나 주제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점이 아쉽습니다.


식물의 집 : 장피엘

A: 은유와 상징으로 무장한 글이 탄탄하고 안정적입니다. 다른 집과는 다르게 무성하게 자라는 나무와, 나무가 있어야 한다고 심어놓고는 너무 잘 자란다고 가지치기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학부모’로 대변되는 부모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실하지도 않게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가 공무원이 되어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이나, 취직하면 차부터 사라는 여자친구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대변하자고 한 것일까요.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갑작스럽게 수입을 얻고 아버지의 유품인 명품 가방을 들고 스포츠카를 몰고 출근하는 ‘그’가 돌연 열쇠를 잃어버리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흘러버립니다. 초반부터 나무의 이미지를 공포스러운 대상으로 잡았다면 이야기가 일관성이 있었겠지요. 무성하게 자라던 나무와, 어느날 갑자기 실종된 아버지로 경제적인 부를 얻은 아들이 똑같이 나무에 삼켜진다는 진행이었다면 오히려 이야기가 매끄러워지지 않았을까요. 두 사람이 나무에 삼켜지고 그 집에 찾아오는 여자는 계장의 불륜 상대였는지 혹은 ‘그’의 여자친구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쪽이든 공포의 연장이라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네요.
단락적이고 때로 매끄럽지 않은 서술을 덮을 정도로 분위기 묘사에서 성공한 글인 만큼 글의 일관성을 지키면서 조금 더 글을 손질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B: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가작 후보에 올려놓고 뒷담이 한참동안 길어졌던 글입니다. 이 글의 강점은 무엇보다 은유를 잘 사용한 것이겠지요. 무성하게 자라나는 나무는 주인공을 상징하고, 가지가 자랄 때마다 가위치기를 하는 아버지는 주인공을 억압하는 부성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죽음 뒤에 갑자기 주인공의 몸에서 싹이 자라는 것은 억압의 상징이었던 아버지가 사라진 뒤에 혼란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자아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매끄럽게 이어지던 일관성은 직장상사에게 야단을 맞은 뒤에 어이없을 정도로 사라져버리고, 견고하던 주제는 ‘나쁜 말은 사람의 마음에 복수의 씨앗을 내린다’로 변질되어버립니다. 이로서 이야기의 품격이 떨어져버렸지요. 직장상사가 억압하던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과정을 삽입하면서 내면적인 갈등을 주제로 계속 이어갔다면 일관성과 깊이 있는 주제를 갖춘 글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주제에 대한 확고함과 일관성을 가지고 출발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짐작이 됩니다.


94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 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euseoha @ gmail. com 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 (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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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리그리 11.03.26 21:36 댓글 수정 삭제
    고평에 감사드립니다. .. 라고 딸랑 쓰려니까 뭔가 성의없어 보이고. 글에 대해서 몇 마디 적으려니까 괜히 변명하는 것 같고 그러네요. 아무튼 평가 하신 부분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하고 더 나은 글을 쓰는데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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