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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으로 끝나는 숫자를 보면 뭔가 한 단락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90호를 맞으면서 독자우수단편선정을 맡은 이후의 작품들에 대해서 곱씹어 보았습니다. 의욕적인 출발에 초기에 너무 많은 작품들이 올라와 읽기에 허덕였던 기억이나, 지난 호처럼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 수에 당황했던 기억을 되새겨 봅니다. 하지만 작품수의 적고 많음과 관계 없이, 좋은 글을 보고 설레어 자신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이 부분만 좀 고치면 좋겠는데 하고 아쉬워하거나 하면서 보내온 기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글쟁이로서, 여러 가지를 배우는 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도 역시 여러 가지 의미로 만감이 교차하면서 다양한 글들을 읽었습니다. 여태까지 많이 배워 왔듯이 앞으로도 많이 배우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투고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장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90호에서는 우수작으로 몬지 님의 ‘마지막 겨울’을, 가작으로 먼지비 님의 ‘오지맨디어스’를 선정하였습니다. 다음 달에도 작가분들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10월 16일부터 11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총 14편의 글 중 심사대상이 된 글은 11편이었습니다.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분량미달  
장군의 귀환 : 누(원고지 55매), 얼음마녀 이야기 : slowdin(원고지 4매), 전학생은 코가 좋다 : 등무(원고지 45매)


물속 세상은 없었다 : 타이거 아이 쿼츠

A: 불치병에 걸린 언니의 상황과 이를 바라보는 어린 여동생의 순진무구한 시선을 대비시켜 비애감을 증폭하는 의도를 담았습니다. 이상향을 상징하는 메타포를 사용하긴 하였지만, 지나치게 정형화된 어린아이의 시선과 설명이 생략된 결말은 이 글을 그저 비애감에 집착한 글로 남겨버렸습니다. 불치병, 상실, 이상향과 충돌하는 끔찍한 현실, 자살 등 비애가 담긴 소재를 전형적으로 엮은 글 이상이 되지 못한 점이 안타깝습니다.  


B: 죽음을 앞두고 있는 언니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이 천진합니다. 지나치게 천진해서, 이것이 과연 몇 살의 아이의 눈인 것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변의 어린 아이들을 생각해보면 의외로 빠른 시기에 어른이 놀랄 정도의 성숙한 생각을 하거나 합니다. 작가가 생각하는 ‘아이’의 이미지가 과연 현실적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장애, 불치병, 현실과의 사투 등 무겁고 심각한 주제를 아이의 천진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대비적 효과를 일으키려 한 것 같습니다만, 아이의 시선이 현실적이지 못해서 오히려 작가가 무거운 주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불치병이란 소설과 드라마에서 가장 흔한 병이라던가요. 하지만 불치병과 죽음은 가볍게 다뤄져서는 안 될 소재겠지요. 흔한 소재라고 해도 깊이 있는 고찰이 필요하겠습니다.
특히, 마지막 단락은 사족으로 보입니다. 아이가 죽음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이나 갈등이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작가만이 아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아이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이유도, 물 속 세상의 의미도 독자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소통하지 않는 소설은 독자들에게 당혹감만 줄 뿐이죠.


이타카의 사냥개 : 천공의 도너츠

A: 서술은 좋습니다만, 널리 알려진 신화를 차용하여 조연에 불과한 ‘개’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하고자 하였다면 기존의 이야기와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개의 삶은 그저 개의 삶으로 흘러갈 뿐이고 오딧세우스를 기다리는 집안사람들의 분위기와 감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개의 관점을 취함으로서 원전에서 부각되지 않은 틈새시장을 차지하긴 하였으나, 이 글이 무엇으로 기존의 신화와 차별되는지요? 서술은 좋습니다만, 널리 알려진 신화를 차용하여 조연에 불과한 ‘개’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하고자 하였다면 기존의 이야기와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개의 삶은 그저 개의 삶으로 흘러갈 뿐이고 오딧세우스를 기다리는 집안사람들의 분위기와 감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개의 관점을 취함으로서 원전에서 부각되지 않은 틈새시장을 차지하긴 하였으나, 이 글이 무엇으로 기존의 신화와 차별되는지요?


B: 넓은 의미의 신화를 재해석한 작품이 두 편 올라왔습니다만, 두 편 다 공통의 약점이 있어 안타까웠습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전반적으로 서술과 묘사가 장편의 템포를 따르고 있어, 단편 특유의 긴장감이나 박진감이 부족합니다. 또한 신화속의 동물을 화자로 선택했다는 특이점에도 불구하고 신화의 서술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은 이야기를 따라 가면서 독자들의 흥미가 떨어지고 맙니다. 개의 눈으로 바라볼 때만이 알 수 있는 특이한 부분들이 분명 있을 텐데도 이 글에서는 주인이 사라진 집을 바라보는 개의 시선이 오히려 인간들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젖유리를 통해 보는 듯이 흐릿해진 것 뿐, 이점은 보이지 않네요.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특이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독자들은 원작을 읽어보면 될 일입니다. 인물이나 동물들의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흐름만이 존재하는 이 글에서, 문장의 탄탄함 외에 독자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멸종 : 엄길윤

A: 가장 끔찍한 공포는 일상적인 것이 위협적으로 돌변한 상황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먹는 음식이 인간을 먹는다는 소재는 공포감을 잘 살릴만한 소재입니다. 소재 선택이 매력적이었고, 뒤집힌 일상이 공포로 다가오는 상황과 인간들의 모습이 매우 생생하게 잘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큰 맥락 없이 상황묘사만을 주로 다룬 점과 뜬금없는 장면전환처럼 갑자기 사건이 시작된 날로 돌아가는 결말이 단점으로 작용합니다. 특히, 결말은 이야기의 맥락과 뚝 떨어져서 서투른 구성을 그대로 드러내지요.


B: 이번 달에 게재되었던 작품들 가운데 가장 박진감이 있던 글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전작에서 보여줬던 탄탄한 묘사와 서술을 바탕으로 인간이 음식들에게 먹힌다는 역설적 상황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거식증 여자가 자신의 토사물 속 음식에게 쫓긴다거나, 음식물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버스를 타려는 장면이 압권입니다. 작가가 이 장면 하나하나를 영화(또는 애니메이션)을 생각하고 묘사한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생생하죠. 자판기에서 과자를 샀더니 과자 봉지는 비어있고 자판기에서 비닐을 탈출한 과자들이 일제히 공격해 온다거나 음식물에 기생당해서 자신의 사지를 뜯어먹는 인간의 장면은 영화에서 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 끝에 독자가 만나는 것은 마치 이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되돌이표입니다. 식탁 위의 음식들은 소설의 전 부분에 있었던 사건(특히 모형 음식을 먹는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사건까지)을 기억하고 있어 의아한 마음만 더합니다. 전작의 작품에서도 구성 면에서 다소 아쉬움은 있었지만 이번 글에서는 묘사만이 남아서 아쉽네요.


크리스마스이브날밤, 변기를 옮겼던 한 남자 : 심동현

A: 이야기의 흐름이 매우 즉흥적인 글입니다. 계획성 없이 생각나는 대로 구성해 나갔다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이야기는 경쾌하고 명랑하지만,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상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날 것으로 옮긴 수필에 가깝다는 인상입니다. 라디오 디제이들이 극화해서 읽어주는 독자의 사연과 소설이 어떤 점에서 달라야 하는지 한 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B: 전작 ‘사번타자 최고의 날’을 떠올리면 같은 분이 쓰신 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구성이 엉성합니다. 글의 서술 전체를 구성하고 쓴 글이라기보다는 손 가는 대로 글을 써간 것 같은 느낌이 강합니다. 작가가 변기를 붙들고 있는 인물의 행보를 구상해서 그저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를 덧붙여 간 것만 같습니다. 복선도 암시도 없이 글이 흐르면서 새로운 인물들과 설정이 등장해, 결말까지도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마치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즉흥적으로 보이는 글을 읽고 나니, 전작의 흥미진진한 입심이 그리워지네요.


드래곤의 인간우리 : Leia-Heron

A: 서술을 극도로 제한하면서 계속 이어지는 대화는 생생해서 흥미롭지만, 그뿐입니다. 대화로만 이야기를 구성할 때는 대화 속에 기승전결의 모든 요소들이 담겨야하겠지요. 대화를 통해 독자들이 이야기를 짚어가는 형식은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이 글의 대화는 제목 그대로 드래곤의 인간우리에 갇힌 인간들이 나눌 법한 대화 이상을 넘지 못합니다. 대화가 생생하다 한들, 예측할 수 있는 대화들만 오가는 글이 매력적이긴 힘들겠지요. 그런 면에서 텍스트적인 매력이 거의 없어서 아쉽습니다.


B: 전작 ‘브리타니아의 마녀’에서 느꼈던 대사의 생생함은 여전히 건재합니다만, 서술과 묘사가 없이 대사만으로 서술되면서 생생한 대사가 빛을 잃었습니다. 단순히 인물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쓴 것 같은 대사의 색깔 구분은, 대사만으로 독자가 인물을 파악할 수 없을까봐 염려한 때문일까요, 아니면 단지 편하게 지정해두기 위해서일까요. 대사만으로 진행하는 글들은 여러 작가들이 시도하고 있습니다만, 서술이나 묘사가 없이 글을 마무리하려면 대사에 가해지는 부담이 더 커진다는 것을 생각해 주십시오. 이미 많은 사람이 시도한 방법이라면 시도만으로 독자의 관심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Ergo Sum [ ... 고로, 존재한다 ] : 문애지

A: 사건의 인과관계를 찾기 힘듭니다. 뜬금없이 나타난 팅커벨(?)이 전능하신 그분의 첫 번째 종으로 노숙자를 시험하는 내용은 작가가 구성보다 주제의식에 집착하는 것을 드러내지요. 그래서 작가는 노숙자의 옷을 입고 나타나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주제를 내뿜습니다. 노숙자가 된 원인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서 생존이 절절한 상황에서도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우아한 노숙자의 모습에 의아해집니다. 때때로 소설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에 대해서 다루게 됩니다만, 그 때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바탕이 되어야겠지요. 생존이 절박한 노숙자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다루고자 하였다면 주소재가 되는 ‘노숙자’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절박할 노숙자의 입장이 현학적인 사고를 즐기는 배고픈 부르조아처럼 느껴지는 점이 그래서 아쉽습니다.


B: 보은설화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은혜를 베푼 사람이 선량하지도, 은혜 갚음이 타당하지도 않은 게 현대적인 것인지 모르겠네요. 지브리 애니메이션 ‘고양이의 보은’에서는 보은의 대상자를 생각하지 않은 일방적인 은혜갚음이 주는 희화적인 상황이 재미있게 다루어지기도 했습니다만, 이 글에 있는 것은 욕망과 지적 허영에 찌든 노숙자의 시니컬한 냉소 뿐입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알바생에 대한 적의나, 세상에 대한 적의 모두 독자의 공감을 얻기 힘든 것은 주인공인 화자의 비일상적이고 근거 없는, 과도한 추상적 어휘들 때문은 아닐까요. 힘들어하는 노숙자의 삶은 겉핥기에 지나지 않아 사실성을 잃고, 노숙자가 세상을 향해 내뱉는 적의는 근거 없이 날카롭기만 합니다.
‘매일매일 충실히 욕망하고, 소비하고, 또 그런 욕망을 통해 존재의 재확인을 반복’ 한다고 화자는 말합니다만, 그의 행동 어디에서 충실한 욕망과 소비가 존재하는 것일까요. 보은의 결과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인물의 모습을 보면 결국 작가는 노숙자로서의 주인공도, 풍족한 물질을 얻게 된 주인공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디모데의 서 : 이니 군

A: 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이야기를 SF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런 방식을 곧잘, 그리고 탁월하게 사용한 작가로는 로저 젤라즈니를 들 수 있겠지요. 로저 젤라즈니를 알고 시도한 구성이라면 무모하였고, 모르고 시도했다면 용감했다고 생각됩니다. 작가는 원전에서 등장하는 스테판의 이야기는 ‘죄가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그리스도의 일화와 대비시키면서, 이 사건을 개인의 뜻이 전체를 대표하여 벌하고 죽이는 부조리한 일이라고 규정합니다. 원전에서 이미 던져지는 교훈을 주제로 부각시키기 위해 SF적인 구성을 취할 이유가 있었을 지가 의문입니다. 관점이나 주제가 원전과 다를 바가 없어서 상황이 SF적으로 대체되는 재미만 남는 것이 아쉽기 그지없군요.


B: 신화의 재해석이라는 면에서 다른 분이 쓰신 글과 비슷한 단점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신화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기존의 글을 재해석할 때에는 원전과 다른 것이 무언가 있어야 하겠죠. 그게 단순히 SF라는 양념이라면, 차라리 원전을 보는 것이 나을 겁니다. SF여야 하는 당위성은 제쳐 두고서라도, 주제도 인물의 해석도 사건도 거의 원전 그대로인 이 글을 새로 쓰신 이유를 잘 모르겠군요. 성서의 이야기를 독자에 알려 주고 싶다는 사명감이셨다면, 현학적인 서술과 한자어들로 도배된 서술은 오히려 독자의 몰입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셨다면 좋았겠습니다.
또한 절대적인 신인 ‘야나-롬’의 작명은 혹 disk-rom을 의식하신 것인지요? 신의 이름으로 만드신 명사라면 상징적인 면도 중요하리라 여겨집니다만, 그 의도가 명확하지 않아 아쉽네요.


가면현실 - Persona Reality : 김진영

A: 심사평에 휘둘리지 말고, 차분히 자신의 길을 가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심사평을 읽고 더 나은 글을 쓰려는 욕심은 매우 반갑습니다만, 그것에 휘둘려서 본질을 잃으면 안 되겠지요. ‘나의 글이 어떻게 읽히는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쓰고 표현하고 싶은가’에 더욱 주력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번 글이 경험적이고, 기존의 글에 비해 사실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기 작가가 가진 매력을 몽땅 잃었다면 혹평이 되려는지요. 어린 학생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그림자를 형상화하여 드러내려고 한 주제는 분명하지만, 일면 유치함 면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 작가가 몽환적이고 비현실이며 추상적인 소재를 선호하고 또한 잘 사용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실을 세세하게 드러내려는 대극적인 노력에서 참패하는 것은 자연스러울지 모르겠습니다. 기 작가의 글이 가진 강점은 무엇입니까? 뭘 가장 잘 쓰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 다음 글을 기다리겠습니다.


B: 주인공은 중학교 1학년 때 청소년문예공모전에서 대상을 받고, 입시 문제로 글을 쓰지 않았다가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나간 대회에선 표절 혐의를 받습니다. 거기서 등장한 라이벌은 자신은 유명한 분에게 글 과외를 받고 있다고 조소하지요. 주인공은 결국 글을 쓰지 않기로 결심하고, 글을 쓰지 않는 자신이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자신 안의 자신, 자신으로 살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자신에게 공격당하는 처지에 처합니다.
현실에서 문학을 지향하는 고등학생이 글 과외를 받는 것은 흔한 일일까요? 기자가 되고 싶어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학생이, 대회에 나간 건 담임선생님이 하도 권해서였다라고 말할까요? 주인공의 태도에서 보이는 건,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고등학생이라기 보단 그저 칭찬받고 싶고 혼나기 싫어하는 어린애의 모습뿐입니다. 표절 혐의의 결과 대회에서 실패, 자신을 이긴 건 재능이나 노력이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과외를 받은 사람. 그런 나약한 모습의 주인공 안의 ‘나이고자 하는 나’가 주인공을 공격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공격하는 그림자의 대사는 조야하고, 그들의 협박은 겉멋만 들려 있을 뿐, 진실한 나이고 싶어 하는 의지의 존재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현실에 발을 디디고 글을 쓴다는 것은 글 속의 현실을 직면한다는 뜻입니다. 배경이 현대이고 인물이 현대라고 해도 그 인물들의 사고와 심리, 사회에 마주하지 않는다면 글은 현실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 울음 : Mad Hatter

A: 어쩐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괴담을 소설형식으로 구성한 글입니다. 기존의 괴담과 차별화되는 점이 없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사전지식 없이 이해하기 힘든 직유가 순간순간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작가의 지적 수준은 만족스럽게 드러낼지 모르나, 주인공의 성격이나 이야기의 소재, 흐름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독자와의 자연스러운 소통을 차단하는 부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자신의 재미나 만족보다 이야기 자체의 매력과 어울리는 구성에 더욱 주력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B: 스모그 같은 검은 난층운이 요사스럽게 온 하늘을 뒤덮으면 애드가 앨런 포나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떠오르는 모양입니다. 습기 찬 바람이 살갗에 불쾌한 느낌을 전달하면 교코쿠 나츠히코가 되는 모양입니다. 독자들이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을 정도의 서술이 뒷받침 된 상태에서 작가의 이름이 나온 것이 아니라, 단락적인 한 줄 서술에 곧바로 작가 이름이 둘씩 등장해 결국 세 줄에 걸쳐 네 명이나 등장하는데, 예민한 주인공을 묘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장치였는지 의문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듯 한 ‘나’가 이야기하는 사건은 A, B, C라는 알파벳으로 묘사되면서 개성을 잃어버린 인물들의 괴기담인데, 어째서 ‘나’는 이런 인물이어야만 했는지 의문이네요. 괴기담 속에서 잔재미를 느낄 수도 있었을 이야기가 화자의 과대 포장된 서술 때문에 오히려 빛이 바래고 화자의 목소리만이 남습니다. 작가가 이 인물이나 서술에 뭔가 의도를 담았다면 그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오지맨디어스 : 먼지비

A: 자신이 가진 강점을 잘 살리는 글을 찾아가는 면이 꽤 반갑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애굽(이집트)의 재앙을 과학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서술한 글은 일면 과거 역사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합니다. 설교자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유일신을 지우고 이집트 신화의 신들을 등장시켜 대비를 시킨 점도 인상 깊습니다. 건조한 글이라서 재미를 추구하는 독자들에게는 버거운 글이겠습니다만, 취향이 맞는 사람들에겐 즐거운 글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이글에 어울리는 형식의 재미를 삽입하는 고민은 계속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매우 지루하고 재미없는 지적인 소재를 설명하면서도 흡입력이 있는 본보기로는 BBC의 다큐멘터리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극적이진 않지만 감각 있고, 세련된 화면 구성은 다큐멘터리의 내용이 딱딱함에도 불구하고 일반 청취자들을 빨아들이지요. 기 작가의 글 역시 흥미본위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글에 걸맞은, 감각적이고 세련된 흡입력을 어떻게 갖출 것인가가 보다 완성도 있는 글을 향하는 열쇠가 될 듯 싶습니다. 글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그것은 흥미본위의 사건이나 서술보다는 지적인 방식이 어울리겠지요. 이번 글에서는 과학적인 설명이 뒷받침 될 것을 앞부분에서 암시를 하는 것도 괜찮은 구성이었을 것 같습니다.  


B: 오지맨디어스의 재앙의 원인이 그의 오만 때문이 아니라 그의 도시가 지나치게 완전하기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독특합니다. 작가분 특유의 지적이고 건조한 서술이 글 전체를 지배하면서 전작과 마찬가지로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개성보다도 서술과 묘사가 주도하는 글이 되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재앙의 묘사가 뒷부분에 가서야 과학적인 해석의 면이 추가된다는 것이 아쉽군요. 작가분의 건조한 서술과 미스터리한 재앙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 그렇게 잘 맞아떨어지지는 않습니다만, 이러한 서술에 매력을 느끼는 작가라면 긴 글을 지겨워하지 않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이 되겠습니다.
유일신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는 판타지들이 많은 데 비해서 이 글은 오지맨디어스 치세의 세계를 묘사하는 것 답게 다신주의를 근거에 두고 있습니다. 능청스럽게 신관이 신이라는 지칭으로 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은 매력적입니다. 지나친 번역체로 여겨질 수 있는 대사들도 신의 목소리를 빌렸다는 설정을 두면 오히려 그럴듯하게 보일 수 있네요. 다만, 수정 단계의 오류인지 종종 탈자가 눈에 띄는데, 퇴고를 꼼꼼히 해서 손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90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마지막 겨울 : 몬지

A: 몰락하는 혹은 멸망한 우주에 홀로 남은 존재라는 소재는 SF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소재입니다. 아마도 개체성을 넘을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특히 인간이 사라진 후에 남은 인간의 창조물의 관점은 인간의 유한성을 드러내면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무겁고도 쓸쓸한 고민을 던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소재를 사용한 수작으로는 로저 젤라즈니의 <프로스트와 베타>를 결코 빼놓을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이글에 담긴 감성은 오히려 신카이 마코토의 단편 애니 ‘별의 목소리’에 담긴 감성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이토록 많은 유사품(?)이 있고, 전형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색깔과 감성을 잘 입혔습니다. 작가는 현학적인 사유나 과학적인 설정에 몰입하는 대신 매우 진솔하고도 담담하게 점점 수축해가는 우주에 유일하게 남았을지 모를 시스템과 로봇의 만남을 그려냅니다. 글 속에서 광활한 우주에서 두 존재가 우연히 만나는 장면도, 그들이 나누는 대화도, 다가오고 멀어져가는 마음과 관계는 모두 인간의 것입니다. 인간이 부재한 공간에서 로봇과 시스템으로 재현되는 인간의 흔적에 아련한 그리움과 상실감을 잘 담아냈지요. 우주가 수축하는 것이 일상적인 어느 날에, 그저 창밖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은 결국 인간이든, 로봇이든 종말이 정해진 유한한 존재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애틋한 비유이며 따뜻한 애정입니다. 표현들이 세련되기보다 투박하고 서툴지만, 그래서 오히려 진솔함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또한 발전의 여지가 많기도 하지요. 현학적인 어구나 세련된 비유로 포장하려 들지 않고, 힘을 빼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성을 듬뿍, 제대로 살려낸 글에는 독자의 마음이 잠시 머물 공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글을 당선작으로 추천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B: 상하로 나누어 올리신 글이라 분량 제한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연결하고 보니 무척 간결하고 아름다운 글이었습니다. 사정이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길지 않은 글이니 한번에 올리시는 게 독자로서는 읽기 편하지 않을까요.
우주가 줄어들기 시작하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의 먼 미래에 배가 하나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배에 표류해 들어온 구조선 속에서 인간인지 혹은 로봇인지 알 수 없을 소녀가 나옵니다. 그건 강우장치를 얼린다는 물리적 현상으로 형상화 되는, 두 세계의 만남입니다. 오랫동안 냉동 상태로 표류해 있던 소녀를 ‘나’는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봇으로 보기에 소녀의 행동은 무척이나 생기있고, 돌발적입니다. 때로는 너무나 감정적이어서 그것이 인간답지 않아 보일 정도죠.
그러다가 독자는 문득, ‘나’가 배에 혼자 남아있는 인간이 맞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18년간 움직이는 존재는 아무도 없이 혼자 살아온 존재. 심지어 ‘나’가 직접적으로 소녀와 교류하는 부분도, 접촉하는 부분도 없습니다. ‘나’가 회의하듯 어쩌면 ‘나’는 인간이 아닐 지도, 어쩌면 단지 이 배 전체를 관장하는 시스템일 지도 모릅니다. 소녀 ‘모모’가 ‘나’에게 ‘너는 별일지도 몰라’ 라고 말했던 것을 보면요. ‘나’는 손을 맞잡지도 않으며 소녀를 만지기는커녕 소녀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사조차도 글에는 대사처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일한 대사는 [메인 프론트 데스크가 외항성계에서 오신 모모님을 찾습니다]라는, 대사 처리가 아닌 괄호 처리가 되어 있지요.
우주조차 줄어들고 모두가 고독하게 남은 세계에서, 혼자 외롭게 인간의 흔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아무도 즐기지 않는 기후를 만들며 떠돌고 있는 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너지는 세계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어항을 두드려 주기를 기대하면서 떠돌고 있는 이 종말의 세계란, 오히려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까지 들 정도로 매력적이네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기 애니메이션처럼요.
글 전체에 감수성이 넘칠 듯이 흘러 취향이 양분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특별한 설정이나 새로운 소재보다도 자신이 묘사하고자 하는 세계를 충실하게 그려낸 점이 무엇보다도 돋보입니다. 과다한 설정이나 미사여구로 치장된 묘사도 없이, 정형화된 인물과 갈등도 없이,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에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쓰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90호 독자 우수단편 우수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 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euseoha @ gmail. com 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 (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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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니 군 10.11.27 00:24 댓글 수정 삭제
    젤라즈니를 꼭 한번 읽어봐야겠군뇨. 사실 이번에 처음 이름을 들은 작가였습니다...^^;; 초본인 글임에도 불구하고 가평의 수고를 해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완본하여 다시 한번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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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길윤 10.11.27 05:03 댓글 수정 삭제
    두 분의 소중한 평 감사드립니다. 평을 참고삼아 다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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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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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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