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각 학교의 중간고사가 있는 달이어서인지 심사할 글이 적은 달이었습니다. 수고가 줄어서 내심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습니다. 편수는 적었지만 내용 면에서 알차고 풍성했던 지난달을 생각하면 작가들이 신중하고 조용한 열정으로 알찬 글을 준비하고 있으리라는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89호는 선정작 없음으로 하였습니다. 작가분들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9월 16일부터 10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총 6편의 글 중 심사대상이 된 글은 4편이었습니다.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연작  
꿈속의 현인들(쓸얘기)

2) 심사제외 명시
노래(마)



공주와 시간의 마녀 by 누

A : 프린세스메이커의 세계관 안에서 쓰신 소설이군요. 프린세스 메이커의 팬소설로서의 가치가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게임을 하지 않은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 와 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시작부분과 끝부분의 클리셰도 게임의 세계관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 소설에서 프린세스메이커의 모티브를 제외하면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요? 게임의 세계관을 발전시켜서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것도, 작가 고유의 것으로 느껴지는 독특함도 없습니다. 게임을 하지 않은 독자로서는 이 글만으로는 전체의 이야기 구조도 잘 파악되지 않네요. 게임의 팬소설로서 게임을 해 본 사람만을 독자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면 모르겠습니다만, 이 글 자체만으로 하나의 단편 소설로서 완결성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게임의 서술을 연상시키는 단락적인 서술 ‘한 피켓에 쓰인 조그마한 글자들.’ ‘폭!’ ‘뾱!’ 등이 글 전체를 단락적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조그만 모양새 때문에 개들에게 먹히지 않을까 피켓과 그가 걱정하게 만들었다.’ 와 같은 영어식 표현도 퇴고를 통해 고쳐 주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B : 일견 만화를 소설로 옮겨 놓은 듯한 글입니다. ‘―――――’ 기호가 주는 느낌 그대로, 단절되고 이어지는 구성보다는 자연스러운 전환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장면을 이어붙인 것 같은 구성은 일견 작가의 미숙함으로 보이기 쉬운 점이 있겠지요. 동화 같은 이야기 속에서 ‘피켓’의 등장이 귀엽긴 하지만, ‘프린세스 메이크’라는 게임과 오버랩 되면서 동화적인 속성이 다소 줄어든 느낌입니다. 반전을 노린 탓에 이야기가 다소 모호해져 버린 점과 반전이 식상한 점이 많이 아쉽습니다. 그러나 아기자기한 이야기의 풍미를 살리는 저력이 있으므로 앞으로 발전할 여지가 많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환견幻犬 by NANPA

A : 기묘한 사건이 글 전체를 지배하면서 독자를 몰아갑니다. ‘토끼’를 포함한 다양한 상징적 모티브가 글에 들어와 있고, 서술도 전반적으로 시를 연상시킬 정도로 상징적입니다. 직접적 서술이 없이 우회적이고 비유적인 문장들만이 있다 보니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유려하고 아름답지만 전체적인 이야기 내러티브는 독자가 파악하기 힘듭니다.
광견에게 물려 죽은 조모, 새끼를 밴 개의 죽음, 낫을 들어 개를 죽이는 아버지의 이미지, ‘나와 개새끼야!’ 같은 강렬한 문장의 반복 등, 독자에게 궁금증을 유발하는 이미지들은 글 전체에 과도할 정도로 담겨 있습니다만, 정작 이 글에서 말하는 스토리와 그 이야기로부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호하게 몇 겹으로 싸여 있는 느낌입니다.
공격받던 자신이 반격을 하는 상황인가 싶었더니 가해자와 피해자가 경찰차에 동승하는 역설적 상황 후, 경찰서에서는 상황이 역전되어 ‘나’가 가해자인 듯 다루어집니다. 공격받은 사람은 ‘나’인지 ‘사내’ 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강렬한 폭력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글 전체를 지배하고 있지만, 몇 겹으로 포장된 서술 때문에 사건이 불명확해지고, 독자는 길고 난해한 시를 읽은 것 같은 느낌에 빠져 버리네요.

B : 안정된 문장과 노련한 서술이 강점인 글입니다. 대단히 모호하고 비약적입니다. 핵심적인 사건은 있으나 과거와 현재가 혼동되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머릿속을 흘러가는 이미지를 여과 없이 늘어놓고 독자에게 읽어내기를 요구하는 가혹한 글입니다. 과연 그러한 초대에 끝까지 응할 독자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존재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강한 의지는 보이나 독자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보다 구조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개새끼, 토끼, 훌라우프 등 글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상징은 보편적 상징이 아닌 개인적인 상징입니다. 독자와 소통을 염두에 두었다면 개인적인 상징의 의미를 독자가 추론할 수 있는 단서를 충분히 던져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불충분한 단서가 의도적이었다면 ‘한 번 나만의 상징을 읽어내 보아라.’는 자만심과 우월함이 될 것이고, 의도적이 아니었다면 자신만을 위한 습작이 아닐까 합니다.



SF 노스텔지어 by NANPA

A : 전작과 이어지는 사건의 서술로, 같은 작가분의 글인데도 상대적으로 이야기 서술이 명확해졌습니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게 만들어 주는 청소부 Dr. 알고스, 기묘한 동거인 노스토스 등 ‘나’의 분신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상징적인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전작의 사건은 이 글 안에서도 재차 언급되는데, 언급되는 방식은 전혀 다른 형식입니다. 광견에게 물린 조모의 아래에서 그 피를 받아 마신다거나 무의식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찾는 행위는 비현실적이어서 여전히 사실성이 결여되어 있으나 전작보다는 서술이 명확해진 때문인지 독자는 글을 보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교회의 공사현장에서 일어난 범죄와 ‘나’가 관련되어 있을 것 같은 복선이 글에서 끊임없이 대두되면서, 전작에서 일어난 사건은 이 글에서는 ‘나’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주일이 됩니다. 잊었으나 계속 무의식 저편에서는 존재하는 불안과 공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실체로서 침대 밑을 채우는 이미지는, 압박감을 느끼는 주인공의 심리를 극단적인 형태로 형상화합니다. 그러나 훌라우프와 소녀 등,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여러 모티브들이 산재하고, 글의 후반부는 전작과 같이 상징적이고 비틀린 시적이고 모호한 서술로 마무리되어 버립니다. 전작과 연작으로 보더라도 글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심리의 서술이나 시적 독백으로 그치는 글이 소설로서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B : 전작인 ‘환견’과 소재가 유사하나 같은 소재로 다른 이야기를 썼다고 판단하여 연작이 아니라고 여겨 심사대상에 넣었습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매우 분열적인 글입니다. ‘환견’에 비해 의식을 지우는 Dr. 알고스라는 조금 구체적인 이야기가 등장하나 모호하고 비약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에 독자가 일체화 하여 혼란함과 불안을 고스란히 느끼기 바라는 숨은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산만하고 상징으로 가득 차 있는 꿈처럼 이야기는 흩어지기만 합니다. 차라리 주제를 시로 형상화했더라면 더 명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목 그대로 SF에 대한 향수가 일어서 SF적인 요소를 집어넣어 글 가는대로 쓴 글이라고 느꼈다고 고백한다면 실례일까요. 그저 분열적인 습작에 낭비하기엔 정돈된 문장과 저력을 가진 표현력이 아깝다는 기분입니다.



이야기를 끝내다 by 김진영

A : 오래된 곳인지 새로운 곳인지도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의 도서관에서 끝나지 않는 소설을 쓰는 남자, 남자를 만나 그를 도우려고 하는 소녀가 있습니다. 소재도 진행도 전형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작가분 특유의 순수한 예민함도 이 글에서는 빛을 잃었네요. 전형적인 소재라고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글에서는 글의 소재나 모티브가 좀 더 나은 문장과 구성으로 다듬어졌다면 매력적인 글이 될 수도 있었겠다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입니다. 단락 안에서 대부분의 문장을 접속어로 연결한 초반의 두 단락을 읽고 나니 한숨이 나오네요. 그런데, ... 그러나, ... 하지만, ... 그리고, ... 그래서, ... 그런데, ... 그리고. 두 단락에서 두 문장을 빼고 모든 문장이 위와 같이 접속어로 이어져 있는데, 이 부분을 묘사하는 방법이 이것 뿐이었을까요.  
만년필을 만연필로 쓰는 것 같은 맞춤법 오류와 ‘대인배’같은 잘못된 표현은 작가분의 고질병으로도 보입니다. 이야기를 형상화하는 연습보다도 문장을 만들고 단락을 구성하는 연습이 작가분께는 더 필요한 게 아닐까요.
나란히 늘어선 서가가 주는 환상성, 책으로 경험하는 간접경험을 다른 세계의 통로로 상징화하는 매력적인 작업이 서술의 문제 때문에 빛이 바래고 말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매회 언급합니다만 ‘한반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인데도 인물들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네요. 행동방식, 대사, 모두 비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인물의 행동과 대사를 비현실적으로 만들어 글에 환상성을 더하는 방법도 있지만, 서술과 구성이 받쳐 주지 않기 때문에 글의 사실성만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고 있네요.

B : 기 작가의 전작들을 가득 채웠던 자아에 대한 고민이 옅어진 탓인지 다소나마 깊은 주제가 담겼던 전작들에 비해 껍질만 남은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자아에 대한 고민이 자아도취로 바뀌었다는 느낌과 함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과 여유가 읽히는군요. 작가 개인의 의식 흐름으로는 긍정적인 변화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글에서는 그것이 외려 주제를 겉돌게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현실과 새로운 세상을 잇는 통로와 도서관은 매력적인 소재입니다만 구태의연한 구성이 매우 아쉽습니다. 기 작가는 주인공에게 매우 밀착되는 편입니다. 작가라면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습니다만, 자신이 주인공에게 밀착하는 만큼 이야기의 구성과 흐름에는 다소 객관적이면 좋지 않을까하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밝혀 봅니다. 작가와 밀착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려고 이야기를 창작하는지, 창작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주인공과 밀착하는지 고민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 글들이 예전 글에 비해 균형을 잃어가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아쉽습니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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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영 10.10.30 01:02 댓글 수정 삭제
    최근 글을 쓰면서 서술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묘사를 잘해야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전에 이야기의 진행과 함께 서술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역시 어렵더군요. 책을 읽으면서 여러 작가들의 서술을 유심히 보면서 연습을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언제나 걱정어린 시선으로 평가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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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NPA 10.10.30 10:11 댓글 수정 삭제
    나는 소녀를 겁탈하고 지포로 그 땅에 불을 지른 방화범인 것이 핵인데 많이 미약했나 봅니다. 그리고 동거인은 노스토스가 아닌 검은 비닐인데 ㅜㅜ

    고견 많은 배움되었습니다.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소설 쓰기의 어려움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부끄러울 정도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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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이지 10.10.31 20:28 댓글 수정 삭제
    최근에 많은 고민을 했더랬습니다. 그다지 창작하는 감각이 없는 건지, 대체적으로 쓰는 것이 표절과 오마쥬의 경계선에 있다는 생각이 참 많이 들었습니다.
    확실히 그걸 쓰면서 한계를 느끼고, 잠시 쓰지 말아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갈등이 참 많았는데, 거기에 대한 시원한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좀 더 생각해볼 문제인것 같네요. 모티브에 잡아먹힐 것인가, 아니면 내가 잡아먹을것인가...;;;;;;;;;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에서 더 이상 모티브를 가져오지 않는게 아닐까 합니다만...;;;;;;;;;좀 더 찾아볼 문제인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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