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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수가 적은 한 달이었습니다만, 글의 수준이 균형 잡혀 있고 흥미로운 글이 많아 읽으면서 즐거웠습니다. 분량이 작아 심사 대상에서 제외된 작품들도 짧은 분량 안에 내용이 잘 마무리되어 있는 좋은 글들이었으므로 독자 여러분들이 꼭 읽어 보시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88호는 가작을 두 편 선정하였습니다. Leia-Heron 님의 ‘브리타니아의 마녀’, 조나단 님의 ‘사고’ 두 편입니다. 그 외에도 좋은 작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조금씩 아쉬운 부분이 있어 안타까웠습니다. 보다 나은 작품으로 다시 뵙기를 기대합니다.  
8월 16일부터 9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글 중 작가분이 삭제하신 글들을 제외한 총 8편의 글 중 심사대상이 된 글은 5편이었습니다.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분량 미달  
변종모기 (암향, 원고지 45매), 스승의 그림자 (누, 원고지 50매)

2) 분량초과
검녀전(劍女傳) (이니 군, 원고지 225매)



푸르른 사냥터 by 노 새

A : 건조하고도 사실적인 묘사와 분위기가 매력적인 글입니다. 식탐이라는 인간의 쾌락 이면에 놓인 잔혹한 사냥과 죽음은 화려한 사회 이면에 감춰진 강요된 희생을 느끼게 합니다. 배경은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을 들여다보게 하는 파인더 같은 소설입니다. 무기력하고 방관자 같은 주인공이 모순되고 잔인한 현실을 소리 없는 무성영화를 보듯 바라보는 시선이 오히려 비극을 더욱 극대화합니다. 건조해 보이는 이면에 진득진득하게 따라붙는 불쾌함은 똑바로 바라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직시하도록 끌고 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흡입력과 매력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집착하는 수학 강의와 아버지의 식탐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없음으로 인해 독자는 일관성을 잃고 혼란스럽습니다. 요리와 식탐에 몰입되다가도 일관성이 결여된 소재와 부딪히는 바람에 혼란스러워서 방해를 받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B : 지구를 공격해 들어오는 외계인의 입장에서 서술된 글은 중반까지 이야기의 배경이 모호해 마치 지구의 미래를 보는 것 같습니다. 태양계의 네 번째, 곧 지구를 향해 미식 여행을 떠나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비로소 기묘한 이 세계가 외계라는 것이 명백해지지요. 작가분의 치밀한 설정이 충분하게 발휘된 글로 작가분이 글을 쓰시기 위해 많은 생각을 담아 만들어 낸 세계라는 실감이 나네요.
미식에 치중한 세계는 초반에 독자가 지구의 미래로 생각하게 할 만큼 지구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실제로 이 글은 요즘 점점 더 화제가 되고 있는 ‘맛있는 먹거리’의 붐에 대한 비판으로도 보여지지요. 하지만 짧은 글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하신 게 아닐까요. 미식 붐의 세계에서 느닷없이 등장하는 ‘수학 강의’는 글 전체의 균형을 무너뜨려 버립니다. 세계 모두가 음식에 관련된 것에 열광하는 세계, 지금 현실의 세계와 조금씩 비틀려 있는 이 세계에서 수학만이 비틀리지 않고 존재하다보니, 반대로 오히려 무척이나 비틀려 보이는 것이겠죠. 그러다보니 아버지의 위치를 핸드폰으로 파악해 아버지를 속인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모두 읽히고 있었다거나 하는 등의 잔재미가 글에서 묻혀 버려 아쉽습니다.
사족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러한 세계라면 학생들의 입시 역시 음식과 관련된 것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영양학이라든가, 미각에 대한 것 말입니다. 다음 작품도 기대하겠습니다.



채소를 훔치는 사람 by 김진영

A : 사회 풍자가 가미되어 있는 듯 보이는 글입니다. 로빈훗의 이야기처럼 권선징악의 결말과 자본주의와 권력에 대한 비판, 민중의 어리석음에 대한 연민 등을 담았습니다. 로빈훗과 유사한 이야기는 동서양에 많이 존재합니다. 인류사에 전승되는 이야기를 개인의 작품으로 다시 재창조하고자한 의도였다면 보다 더 많은 고민과 독창성이 있어야 했겠지요. 기 작가 특유의 환상성과 추상적인 은유도 이 작품에서는 그리 힘을 발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정적인 구성과 스토리텔링이 좋았습니다.

B : 10대들이 흔히 쓸 법한 소재와 주제입니다. 사회의 부조리에 부딪혀 선의의 죄를 저지르는 사람의 이야기란, 서양의 로빈훗이나 우리 나라의 홍길동을 포함해 다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오랫동안 시대를 지나오면서도 사랑받는 작품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시대에 살지 않는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걸작에 미치지 않더라도 수많은 걸작들이 다루고 있는 소재를 쓸 때에는 자신만의 것을 담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 자신의 주변의 인물들에게 시선을 보내 보시면 어떨까요. 사람은 자신이 익숙한 것을 가장 잘 서술할 수 있습니다. 작가분의 글에서는 대사가 특히 현실성이 떨어지는 면이 두드러집니다만,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세계의 인물들의 대사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은 작가분이 세계 안에 발을 디디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구세주 by 라퓨탄

A :  장점과 단점이 극단적인 글입니다. 흡혈귀라는 소재는 자칫하면 줄거리나 주인공만 살짝 바꾼 글처럼 보이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을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도 매우 참신한 설정을 끌어내었습니다. 흡혈귀가 늘어날수록 인간이 줄어들고, 그러면 흡혈귀는 수혈을 위해 인간을 흡혈귀로 만들거나 죽이는 대신 사육하고 지켜야 한다는 논리지요. 그러나 흡혈귀 집단의 대립이라는 반전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이 글의 가장 장점인 참신한 설정이 빛을 잃습니다. 이 때부터 이야기는 흡혈귀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겉멋 들린 대사나 식상한 표현으로 초점이 이동합니다. 그래서 참신한 설정이 인상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결말의 논리가 꽤 그럴싸하고 영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강하게 부각시킨 겉멋 들린 흡혈귀의 대사와 설정, 그리고 철학이 이야기의 전부처럼 느껴지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대사나 철학이 늘 흡혈귀가 소재인 소설에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초보 작가들이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천정부지로 솟구치는 것만큼 초보 독자들이 압도당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그러나 구성, 안정적인 스토리텔링 등으로 인해 매력적인 글인 것은 분명하겠지요.

B : 수많은 뱀파이어 관련 글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그래도 여전히 뱀파이어에 관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다거나 하는 것은 흡혈귀라는 설정 자체가 매력적이라는 증거겠지요. 사람이었으나 사람이 아니게 된 존재로, 흡혈한다는 설정 정도가 공통적일 뿐 흡혈귀에 대한 설정도 시대에 따라 변할 뿐 아니라 작가들의 개성이 포함되어 모두 달라집니다.
이 글에서는 흡혈귀 자체의 설정은 그렇게 개성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흡혈귀의 행동이 독특한 것이 주목할 만합니다. 흡혈귀가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을 사육하는 설정은 타당한 이유가 덧붙여져서 더욱 그럴싸하지요. 다만 힘이 너무 들어가신 것은 아닐까요. 흡혈귀의 설정에 몰입한 나머지, 흡혈귀 사이의 관계를 꼭 설정해야겠다고 집착해 버린 것은 아닌지요. 구원자로 등장하는 흡혈귀는 기존의 소설에서 나타난 흡혈귀 그대로입니다만, 이 글에서 등장하는 흡혈귀와 무리해서 연결고리를 만든 것이 오히려 어색합니다. 처음 등장했던 대로 연구의 부작용으로 생겨난 존재들로 보아도 별로 문제가 없을 것이, 결정적인 순간에 ‘영생이 눈먼 인간들이 약을 만들기 위해 잠든 흡혈귀의 피를 훔친 것 뿐이야!’ 부터 시작해서 열심히 변명처럼 설명하는 흡혈귀라니요. 기독교 배경에 연연한 12사도의 모티브도 설정에 집착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브리타니아의 마녀 by Leia-Heron

A : 바람기 난 남편을 잡으려는 마녀의 실수라는 소재가 재미있습니다. 드루수스가 여자가 된 사건부터 결말까지 기승전결 배치가 잘 되었고, 차분히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 때문인지 매우 안정적인 느낌입니다. 매우 극적인 소재는 아니나 아기자기한 유머와 아이러니한 사건의 본질 등을 양념처럼 가미하여 맛깔스럽게 만들고자한 노력이 엿보입니다. 클라이막스나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의 긴장이 약한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자칫 전투묘사가 난무하는 글이 되기 쉬운 설정을 사건과 주제를 담아 잘 풀어낸 것 같습니다.

B : 새롭지 않은 설정과 평이한 스토리 전개에도 불구하고 글 전체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글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전반적으로 글이 매끄럽고 마무리가 능숙해 글을 읽고 난 후 남은 아쉬움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다만 이 글에서 클라이맥스라 볼 수 있는 것은 마녀의 정체가 밝혀지고 부족마다 애인을 만든 것이 밝혀지는 상황이라고 할 텐데, 그 부분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강세 없이 흘러가 버리는 것이 가장 아쉽군요. 여자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사령관이 어린 아내의 앞에서 수많은 애인의 이름을 꼽으며 당황하는 모습은 단연 압권이라고 할 정도입니다만, 글의 매끄러움 안에 강세가 없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88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사고 by 조나단

A : 심리역사학. 오래된 SF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고전적인 소재가 오랜만에 등장했군요. 상상의 여지가 많은, 탐나는 소재여서 그런지 심리역사학은 많은 사람들이 SF의 소재로 창작을 하기도 하였지요. 이 작품의 시도 역시 그러한 시도의 연장선에 놓였지만, 깔끔한 구성과 고전적인 SF 창작 형식에 충실한 점은 높이 살만합니다. 심리역사학 이론 위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순을 사용하여 맛깔스럽게 반전을 일궈냈지요. 다만, 반전에 집중을 하느라 반전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충분히 던져주지 않은 점이 흠이라면 흠입니다. 앞부분에서 인구관리 시스템에 대한 언급이 불충분해서 김교수가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결말에서도 반전의 경위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B : 전체적으로 안정된 글 분위기 안에서 SF 팬들이 향수를 느낄 만한 설정이 깔려 있는 글이 즐겁습니다. 돌연 우주선 탑승이 거절된 젊은 학자의 좌절 상황이 관료와의 1:1 대화로 이어지더니, 예상외의 사고와 생환으로 이어지네요. 사건의 전말을 모호하게 처리하고 여운을 남기고 글은 끝납니다. 글의 전반적인 속도는 안정되어 있는 것이 보이지만 실상 사건의 진행은 꽤 급작스럽습니다. 글이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해서 사건의 설명이 불친절한데도,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연상시킬 정도로 주인공 진명에 밀착해 서술되고 있는 감정의 흐름 때문에 글의 전개가 침착하고 완만하게 느껴지는 것이죠.
어느 정도 현실과 비슷하면서도 현실에서 충분히 추정 가능한 미래의 상황을 묘사한 글은 무척 안정적이고 사실적으로 보입니다. 그 안에 녹여내고 있는 설정 자체도 새롭지는 않죠. ‘심리역사학의 두 번째 전제는 사람들이 심리역사학의 작동원리와 그 결과에 대해 몰라야 한다는 것’ 이라는 코번의 대사, 그리고 마지막의 진명의 독백 외에는 글의 힌트가 겉으로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 글의 매력이기도 합니다만, 독자가 추측하기에 지나치게 숨어 있는 것이 단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성있는 설정과 탄탄한 서술, 인물들의 개성이 분명하게 잡혀 있는 점은 작가분의 장점이 충분히 살아난 결과로 보이네요.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88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단편으로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euseoha @ gmail. com 으로 우편물을 수령하실 주소, 성함, 전화번호(택배로 책을 보내드릴 때 필요합니다)를 보내주세요.
댓글 4
  • No Profile
    조나단 10.09.30 11:10 댓글 수정 삭제
    아... 고맙습니다. 심리역사학이란 Old한 소재가 여전히 유효한지 궁금했었는데(쓰면서는 즐거웠지만), 여전히 유효함을, 그것을 확인한 것이 가장 기쁩니다. 보여줄 곳 없이 혼자만 고민하다 보니 간과한 부분이 있네요.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사실 그런 모니터를, 꼬옥, 듣고 싶었습니다^^!)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한번 고맙습니다.
  • No Profile
    노 새 10.09.30 22:51 댓글 수정 삭제
    역시 수학은 골고루 속썩이네요.~^^
    계속 힘내어 도전하렵니다.
  • No Profile
    Leia-Heron 10.10.01 13:25 댓글 수정 삭제
    아.... 정말 예상 외의 호평이네요 ㅇㅅㅇ;;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은 글인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No Profile
    라퓨탄 10.10.02 16:46 댓글 수정 삭제
    평 감사합니다. _(__)_
분류 제목 날짜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5.06.0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5.06.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 2015.04.3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5.04.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5.02.28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5.02.28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5.01.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12.3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4.12.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5 2014.12.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11.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10.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5 2014.09.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 2014.07.3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4.07.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07.0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4.06.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06.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4.04.3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7 201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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