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여름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기에 쉽지 않은 날씨이긴 하지만 학생은 방학, 직장인은 휴가로 한 숨 돌릴 수 있는 설레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꾸준히 글을 쓰시는 분들보다는 새로운 분들이 많이 보이는 요즘입니다. 그 때문인지 단편에 넣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이는 긴 글이나 연작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네요. 독자 단편 게시판의 심사 대상은 200자 원고지 기준 70매에서 150매 사이의 일반적 기준의 단편이며, 지나치게 길거나 짧은 글은 심사 대상에서 제외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게시판 이용 방법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꾸준히 글을 올리는 분들이 상당히 줄었습니다만, 단점을 고쳐 나가면서 계속 조금씩 나아지는 글을 보여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독자로서 기쁜 일입니다.
86호도 독자 우수단편 우수작이 없이 가작을 한 편 선정했습니다. liberte 님의 ‘별길’입니다. 축하드립니다.
6월 16일부터 7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글 중 작가분이 삭제하신 글들을 제외한 총 19편의 글 중 심사대상이 된 글은 11편이었습니다.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분량 초과
충(蟲) (고래, 원고지 180매), 사람고기 요리법 소개(piantia, 원고지 190매)
2) 분량 미달  
악녀 탄생하다(회색물감, 원고지 13매), 주인공과 나(회색물감, 원고지 52매), 최종 결과물 제거기 엔젤 클리너(네모선장, 원고지 35매), 우리의 행복을 신에게 과시할거야(새인간, 원고지 39매) 신(神)(칠색조, 원고지 8매)
3) 연작
꿈속의 연인들(Story will be written)




굴레 The Fate of accursed god : 인생 뭐있나

A: 신화를 차용하고, 현재와 과거를 전생으로 매개하면서 신적존재였던 주인공이 현대에서도 화려하게 부활하는 것을 꿈꾸는, 매우 흔한 설정과 구조를 가진, 특징이 없는 것이 아쉬운 글입니다.


B: 중세의 전쟁터에서 시작한 글은 돌연 천상 세계로 옮겨갑니다.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신인 ‘나’가 인간으로서 끊임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는 그렇게 새로운 소재가 아니죠. 소재가 새롭지 않을 경우 동일한 소재를 다룬 다른 글과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을 연상시키는 신의 이름, 윤회, 반복되는 역사 상황과 전쟁 장면도 다른 글에서 본 듯한 장면인데 이 글에서만 느껴지는 새로움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군요. 문장이 안정되어 있고 글을 오래 써 온 분인 듯 묘사도 탄탄한 편입니다만 마지막까지 특징이나 개성이 느껴지지 않아 안타깝네요.


마이클 잭슨 고마워요 사랑해요 : dcdc

A: 마이클 잭슨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글입니다. 언제나 살짝 비틀린 냉소와 불안정한 에너지로 날카롭게 난화를 그리는 듯한 작가의 평소 글과는 사뭇 다르게 안정되고 솔직해서 인상이 깊었습니다. 작가가 감정을 왜곡하거나 비껴가지 않고 표현한 글은 이번이 처음인 듯합니다.


B: 서술이 솔직하고 따뜻하며 글 전체의 분위기가 인간적이어서 작가분의 지금까지의 작품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주는 글이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기일을 전후해서 마이클 잭슨의 팬으로서 쓴 글이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만, 글의 소재로 다루어진 연예인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마이클 잭슨’ 이라는 것이 이 글의 매력을 더했다는 걸 짚어 두겠습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은 연예인이 자살, 병사, 사고사 등 다양한 이유로 갑작스럽게 팬의 곁을 떠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입니다. 그 많은 연예인 중에 마이클 잭슨은, 전 세계적으로 폭넓은 팬이 있었다는 것 이상으로 극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여러 가지 스캔들에 시달리기도 했으며, 자신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포함해서 다양한 내적 상처를 가지고 있는, 안타까울 정도로 약한 사람이기도 하죠.
그의 노래는 스릴러처럼 자극적인 것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사랑을 노래하기도 하고, 유아낫얼론, 이라고 다정하게 속삭이기도 합니다. 그 자신이 들었어야 했을 다정한 위로의 말을 속삭이듯 노래하는 상처 입은 영혼이죠. 그래서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처입고 일그러진 그의 형상을 친근하게 이름을 붙여 옆에 두고 사랑했던 것이겠죠. 아이들만이 마이클잭슨을 괴롭힐 수 있고 어른들의 마이클잭슨의 사냥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마이클잭슨을 ‘기르는’ 행위는 이 글에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말하듯 일그러진 팬심이나 일시적인 유행인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으로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 상처받은 영혼들의 서글픈 자기 위안입니다. 수많은 마이클 잭슨 가운데에서 은동만이 마돌이를 찾을 수 있었던 것처럼, 촉순에게 마순이가 다른 마이클 잭슨과 달랐던 것처럼. 그리고 마이클 잭슨들이 마지막 한 일은 그들을 보살펴 온 인물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얼론이 아니라고 속삭이며, 상처를 안고 살아온 인물들이 서로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많은 생각이 드는 글입니다만, 작가분이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앞서 넘칠 것 같던 전의 글과 이 글의 차이점을 작가분이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앞으로의 글쓰기에 무언가 실마리를 줄지도 모르겠네요. 사족입니다만, 감동적인 장면에서 ‘껴앉아 주었다’ 같은 오표기가 있으면 글 자체의 격이 떨어집니다.


나무 : Story will be written

A: 타임머신을 소재로 한 SF입니다만, 감상주의에 젖은 결말 외에는 시간여행에 대한 어떤 새로운 고찰을 찾을 수 없는 점이 흠입니다. 글에서 사용된 시간여행의 모순은 너무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이고, 이야기 자체도 참신함이 떨어집니다.


B: ‘시간여행 걸작선’ 이라는 SF 단편선이 나온 것이 1980년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간여행을 다룬 SF단편이 이미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다는 것, 그리고 그 중에서 ‘걸작’이라는 이름에 어울릴 작품들도 상당 수 된다는 뜻입니다. 영화와 게임같은 분야를 포함하면 시간여행의 이야기는 더욱 더 많습니다. 카오스 이론을 연상시키는, 시간여행자의 사소한 실수가 세계를 뒤엉키게 만든다는 이 글과 같은 글도 상당 수 있겠네요. 흔한 소재와 전개의 이 글에는 ‘지포라이터를 떨어뜨리고 왔다’는 수긍하기 어려운 실수로 역사의 흐름이 바뀌고 맙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변함이 없다는 기묘한 설정이 드러나면서 이 글이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기대가 부풀어 오릅니다만, 글은 타임머신 자체가 타임머신의 발견을 촉진하고 인간의 변화를 종잡을 수 없도록 치닫게 만든다는 의외의 전개로 방향을 선회합니다. 그리고는 이 모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주인공을 죽이려는 암살자가 파견됩니다. 누구보다 구하고 싶었던 연인의 죽음을 해결하려고 만든 타임머신이지만 그 타임머신 때문에 연인은 바로 자신의 손으로 죽임을 당하고 말죠. 카오스 이론을 따르는 듯 보이던 이 글은 돌연 시간 패러독스의 일화처럼 보이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작가가 타임머신이라는 소재를 통해 다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호해지는 것은 이 글 안에서 작가가 몇 번이나 관심을 바꾸고 있기 때문으로도 보여집니다.
게다가 이 글의 중심 설정 중의 하나, 어떠한 변화가 있더라도 결국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자체는 그대로라고 하는 관점은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인류의 학살, 전쟁, 범죄 등에 희생된 사람들은 결국 그 시대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되니까요.


다이어트 환상곡 : liberte

A: 루키즘이 만연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을 옥죄는 비만이라는 문제가 학교장면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입시를 풍자하는 글로 변모한 글입니다. 비유와 표현이 지나치게 ‘날 것’인 점과 다소 구태의연한 점이 흠입니다. 그러나 글에 담기는 뚜렷한 문제의식과 작가의 내공에서 나아온 분위기 형성 등이 매력적입니다.


B: 다이어트를 향해 매진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입시 현장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개인차가 있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둘은 어느 정도 닮은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러나 다이어트 역시 비판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이 꼭 이런 형식을 취해야 했는지 아쉬움이 듭니다. 이 글에서 다이어트는 입시공부를 비유한 소재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자체가 사회비판의 소재로서는 사용되지 않는군요. 학벌주의의 사회에서 입시 공부가 학생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게 된다는 면이나, 외모 지상주의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그 사람의 본질보다도 외모만을 판단한다는 면이나, 양자 모두 비판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다이어트 그 자체보다는 그 비유 대상인 입시에만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건강을 위한 다이어트가 다이어트 자체를 위한 다이어트로 전락해버린 것의 문제점, 사회 전반의 의식 개선의 필요성 등 보다 은은한 비유를 통해서 이 글은 더욱 매력적인 글이 될 수 있었을 것 같네요.


아틀라스의 유언장 : 임재영

A: 컴퓨터의 관점에서 인류를 관찰하고 나름의 윤리적인 잣대로 판단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룹니다. 컴퓨터가 초세포신경연산장치를 가졌다는 설정에서 신적 능력이 드러나지만, 실제로는 인류를 딱하게 여겨서 그들을 구제할 신적 능력을 지니고 싶은 작가의 욕망이 가득한 글입니다. 협소한 지식과 피상적인 관찰결과로 인류의 본질에 접근하려고 시도한 점이 아쉽습니다. 특히 작가가 본인의 윤리적인 잣대로 인류를 판단하는 내용은 자칫 오만해 보일 우려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또한 초세포신경연산장치를 가진 컴퓨터가 다층적인 사고를 위해 다른 존재를 만들어 낼 필요성은 무엇인지요? 계속해서 컴퓨터가 “예측하지 못했다”는 표현 역시 의아합니다. 방대한 자료가 입력된, 심지어 초세포신경연산장치를 가진 컴퓨터가 한 사건에 대해 발생될 다양한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 의문입니다. 특히 대부분의 내용은 이미 인류의 역사 등의 데이터 입력을 통해 산출할 수 있는 결과들입니다. 경험적 지식으로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결과라면, 훨씬 더 많은 경험적 데이터를 입력받았을 컴퓨터는 더욱 정밀하게 다차원적으로 결과를 예측해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세상은 똑똑한 인간이 살만한 곳이 아니다”라는 컴퓨터의 결론 역시 컴퓨터의 결론이 될 수 없습니다. “똑똑함”은 컴퓨터의 연산으로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 어떤 수치를 기준으로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이며, 컴퓨터가 말하는 지능은 다양한 지능 중 어떤 영역을 가리키는 것인지요? SF팬이라면 한 번쯤 떠올리게 될 이러한 의문은, 컴퓨터의 탈을 쓴 인간의 관점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인류에 대한 안타까움은 짙게 느껴지지만, SF인만큼 설정이 보다 치밀했으면 좋겠습니다.


B: 컴퓨터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는 글입니다만, 컴퓨터의 관점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관점에 가깝네요. 여러 부분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겠습니다만 한 가지만 짚어 보겠습니다. 인간의 실패에 실망한 나머지 인류의 지능을 높이려는 시도를 한 컴퓨터는, 지능이 높아진 인간들이 자살한다는 ‘예상 외의’ 결과에 부딪힙니다. 그리고 그것이 약의 부작용이 아니라 세상이 똑똑한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서라는 결론을 내리지요. 이 컴퓨터는 ‘사랑한다’는 감정적인 단어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똑똑하다’ ‘지능이 높다’는 말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이미 다차원 지능이라는 말도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EQ라는 표현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천재가 사회의 벽에 부딪힌 예가 있는가 하면 천재가 학계의 중심인물로서 수많은 성과를 이룬 예도 있습니다. 그러한 실제 예에도 불구하고 ‘똑똑하게 만든’ 인간들이 100% 자살하고 말았다는 부분에서는 실소할 수밖에 없죠. 지능을 낮춘 인간들이 더욱 행복해진다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당신들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 라는 최후의 독백에서는 이미 컴퓨터는 없고 한숨짓고 있는 작가의 얼굴이 떠오를 것만 같습니다.
작가는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는 묘사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자신의 사고 범주를 넘어서는 존재를 생생하게 살려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하물며 인류 전체의 지혜를 넘어서는 컴퓨터라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독자들은 자신이 예측 가능한 것조차 예측할 수 없는 존재를 인류 전체의 지혜를 넘어서는 컴퓨터로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방백 : 촐삭

A: 성모 마리아에 비해 적게 회자되는 목수 요셉의 입장에서 관찰한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강간범처럼 묘사된 성령, 늙고 추하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랍비로 상징된 하나님, 이기적인 모습의 그리스도 등에서는 기독교의 신성을 유린하는 작가의 쾌감과 카타르시스가 느껴집니다. 아버지로서 목수 요셉이 겪는 인간적 갈등이 드러나긴 하지만, 이 또한 종교적 신화를 부수기 위해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신성보다 매력적으로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자료와 빌려온 이야기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체화 했다기 보다 피상적으로 조사하고 이해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요.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작가가 감정에 압도당해서 차분히 사건을 전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B: 기독교의 기본 신화를 비틀어 신성성을 없애는 것만이 작가의 목적이었다고 하면 이 글은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을지도 모릅니다. 처녀수태, 남다른 어린 시절, 고행과 헌신이라는 예수의 일생 전체를 비틀기 위해 작가가 택한 것은 다름아닌 ‘피가 통하지 않는 아비’인 요셉입니다. 글은 처녀수태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으로 시작합니다. 마리아를 범한 것은 성령이 아니라 종교적, 학문적 지도자인 ‘늙은 랍비’입니다. 정혼자인 요셉에게 밤 안으로 의자를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고 늙은 랍비는 마리아를 강간합니다. 글의 행간에서는 작가가 의도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늙은 랍비가 요셉의 누이도 강간했을지 모른다는 뉘앙스까지 느껴지지요. 하나님의 아이를 낳게 되리라는 마리아의 감격의 발언은 믿었던 마을의 ‘어른’에게 강간당한 여인의 현실 도피로 전락하고 맙니다. 사람은 빵과 포도주만으로 살 수 없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자신의 직업에 성실한 ‘피 통하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의 대사로 전락하죠.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던 랍비의 죽음으로 아무 것도 받지 못합니다. ‘털이 숭숭 난 팔을 드러내고’ 다녔지만 그의 재산을 받은 것은 세리 일을 하던 랍비의 큰아들이며, 자신이 가장 즐겨 읽던 두루마리는 랍비의 자리를 이어받은 어린 랍비가 ‘유언장을 고쳐 늙은 랍비의 두루마리를 제 것으로 ’ 만들어 버립니다.
종교가 불가침의 존재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그 결과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신화를 부정함으로서 작가가 차원높은 주제 의식을 보여 준다면 이야기는 걸작이 되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기존의 권위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불만 표시밖에 되지 않겠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 는 번역에 따라서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로 번역되기도 합니다만,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라는 것을 알아 두시면 좋겠습니다. 그랬다면 이 마지막 대사에서 요셉이 등을 돌려 아들이 자신을 불렀다고 애절해 하지는 않아야 할 테니까요.


얼음주사위 : 해나

A: 대화에 따옴표를 쓰지 않은 것이 습관인지, 고의적인 누락인지 궁금하군요. 후자라면 그것을 통해 노린 효과가 무엇인지 의문입니다. 괴담 특유의 괴이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묘한 얼음 주사위가 등장하지만 여주인이 사건의 모든 인과관계를 설명하고 결말을 짓는 바람에 김이 새는군요. 덕분에 괴담 특유의 긴장감도, 호기심도 전혀 유발되지 못한 것이 흠입니다.


B: 전작과 마찬가지로 생생하지 않은 대사들이 가장 글의 흐름을 방해합니다. 대사를 인용부호없이 서술하는 방식 때문에 대사의 집중이 떨어지는데다가, 연극의 대사로 보아도 어색할 정도로 문어적인 표현이 많습니다.
글에서 가장 생생한 것은 ‘얼음주사위’라는 제목으로 사용되기까지 한 소재입니다만, 글의 중반까지 기괴한 분위기를 끌고 가던 소재는 마지막에 가선 정원으로 버려지고 말죠. 버리는 행위가 무언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도 아니었다는 듯이 처리되어 버립니다. ‘얼음 주사위라, 인생을 의미하는 말 같지 않아요?’ 라는 대사만이 이 소재를 가져온 이유처럼 느껴지네요. 얼음주사위를 배달한 방의 싸늘하고 추운 방, 창 밖으로 자목련이 보이는 방 안에서 술을 마시는 인물들을 보면서 느끼는 기묘한 공포 등, 무언가 있을 것 같던 소재들이 아무런 결론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사건의 실체는 여주인공의 입으로 모두 밝혀지죠. 추리물로도 공포물로도 제대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로 글은 마무리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구해준 사람들이 고마움을 모르고 살고 있어서 복수하고 싶었다, 라는 것은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들이 그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는 할 수 있어도 그들이 그 사람은 죽인 것은 아니죠. 이 복수가 처음부터 독자의 공감을 얻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기묘한 분위기만큼은 높이 살 수 있겠습니다만, 여주인공의 구구절절한 설명 외에 사건의 전체를 독자에게 전할 방법은 정말 없었을까요.  


전영복전 : 먼지비

A: 소설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정신에 관련된 하나의 가설을 전개한 글로 보입니다. 이 글의 가장 큰 오류는 작가가 생리학 또는 생물학에서 가지는 인간관과 심리학적 인간관을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인간관은 그 기원과 근본적인 관점이 매우 다릅니다. 혼동으로 인해 빗어진 잘못된 표현이 많이 눈에 띄지만, 그런 것을 지적하기보다 이전 글들에 비해서 글이 보다 생동감이 있어서 반가웠다는 느낌을 전하고 싶습니다.


B: 세계만이 살아있던 작가분의 글에서 처음으로 ‘인물’을 본 느낌입니다. 서술에서도 다소 리듬감이 생겨나면서 글의 가독성이 높아진 것도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네요. 하지만 이 글의 기본 전제가 되는 부분을 아무래도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철학과 종교라는 형이상학적 분야는 인간을 생물학적 과학적으로 분석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은 서로 공존하는 두 가지 차원의 관점이지, 하나가 하나를 대체하거나 포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PAOL : paul

A: 질투, 소유욕, 사디즘 등 사랑에 담긴 인간의 뒤틀린 욕망을 반려동물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낸 글입니다. 주인공이 가진 사랑에 대한 경멸과 두려움, 그 이면에 그림자처럼 도사린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갈망이 공존합니다. 이는 사랑이 아니라 탐욕에 가까운 욕망이자 욕구겠지요. 그러므로 주인공이 뒤틀린 욕망을 방해하는 여자친구의 반려동물을 죽이고, 그러면서도 또한 둘의 소통을 부러워하는 모습은 역겨운 동시에 가련합니다. 그로데스크하면서도 에로틱한 분위기가 인상적입니다. 다만 반려동물과 인간과의 소통을 섹스로 상징하기 위해 인간과 닮은 반려동물을 설정한 것은 에로티즘에 과도하게 집착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니면 연인보다 반려동물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악의가 드러난 비유겠지요.


B: 인간끼리 서로 교류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인간과 반려동물이 완벽한 교류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반려동물과의 밀접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말입니다. ‘그렇게 물고 빨고 좀 하지 마라. 병균 옮아’ 라는 말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나’는 자신보다도 반려동물을 더 좋아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죽어 썩어가는 파올의 시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가 하면, 실제 파올이 태어나지도 않은 별에 파올의 시체를 묻어주러 가는 ‘역겨운’ 발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사랑하는 파올에게 마취제를 주사하고 키스하는가하면, 파올과 그녀가 떠난 빈 집에서 파올이 남긴 피고름 자국에 얼굴을 가져다 댈 정도로 파올에게 집착합니다. 그것은 그녀가 사랑한 대상인 파올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행위이며 동시에 파올에게 그녀가 느낀 절대적 공감대에 대한 동경의 결과이기도 하죠. 그래서 반려동물과 그녀의 관계 전체를 시니컬하게 비판하는 ‘나’의 모습은 그저 서글플 뿐입니다.  


놀이터 : 캥

A: 기이한 여자와 얽혀서 벌어진 실종사건 외에 납득이 될 만한 전개가 없는 점이 흠입니다. 자상이 있는 여자와 나는 어떤 관계인지, 여자가 죽은 사연은 무엇인지, 사라진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수수께끼들이 숙제로 남는 글입니다. 독자는 되살아난 주인공의 기억을 읽으면서 그가 귀신과 모의하여 강간범들을 실종시켰다는 점만 짐작할 뿐입니다.


B: 독자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무엇을 알려주지 않을지는 항상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주면 독자는 지리함을 느낄 것이고, 지나치게 정보를 아끼면 글은 갑작스럽고 비약적으로 느껴지고 말죠. 이 글은 전형적으로 작가가 정보를 아낀 결과물입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이해한 논리적 구조를 독자가 당연히 알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독자에게 짐작해 보라고 하면서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은 인색함의 결과겠죠. 심야의 놀이터에 앉아 있는 여자를 강간하려고 하면서도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는 인물들에게서 거부감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이 글은 비밀에 싸여 있습니다. 독자는 작가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별길 : liberte

A: 외계인이 지구에 내려오는 흔한 소재를 사용했지만, 그것에서 성찰과 사변을 끌어내는 통찰력이 훌륭한 글입니다. 외계인을 따라 지구를 떠나거나 지구에 남는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그저 가벼운 갈등으로 전락할 수 있었지만 관계에 대한 성찰과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매개하는 순간 묵직한 무게로 변합니다. 남느냐, 떠나느냐. 글 속의 선택은 우리가 인생에서 맺는 인간관계의 종말까지 확장됩니다. 남든, 떠나든 그것은 이별이고, 관계의 분리이며, 상실입니다. 남은 채로, 어쩌면 버림 받은 기분으로 소중했던 친구 은지와 아버지를 떠올리는 주인공은 만나면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인생의 관계를 끝없이 애도하는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글이란 재미 외에도 자신과 주변 세계를 돌아보는 성찰을 제공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글이 몹시 매력적이었습니다.


B: 우주로 떠나는 인물들과 남는 인물들 중에 작가는 남는 인물의 관점에서 글을 전개합니다. 자칫 이런 글은 모두 떠나고 남은 ‘나’의 자기연민에 그치고 말 위험이 있죠. 그러나 이 글은 ‘나’의 관점에서 떠나는 이들의 이야기에 중심을 두고 있어서 가치가 있습니다. 남아 있게 되는 ‘나’는 복권을 뽑는 심정으로 지구를 떠나는 우주선에 몸을 싣게 되는 사람들을 담담하게 바라봅니다. 그들에게 기울어져 그들의 감정에 치우치지도 않고, 마치 세상을 떠난 사람을 애도하듯이 그들의 선택을 바라봅니다.
‘나’는 학교의 왕따인 은지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은지를 왕따시키는 사람들이나 학교를 원망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은지를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을 되새기면서도 아버지를 동정하지도 않고 아버지에 대해 분노하지도 않지요. 이러한 담담한 감정 흐름 안에서 인물들은 더욱 생생해지고 생명력을 얻습니다. ‘다른 세계에서 갓 넘어온 듯 연약한 짐승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빛’의 아버지와 함께 간 장례식장은 차라리 아버지의 장례식장인 듯합니다. 장례식의 직후의 상황과 우주선의 출발 장면이 이어지면서 작가는 우주선을 타고 떠나는 인물들을 장례를 마지막으로 떠나는 망자들과 동일 선상에 배치하지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아버지에겐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할아버지처럼,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아버지는 딸을 혼자 남겨 두고 떠납니다. 완벽한 고독의 상황입니다. 자칫 신파로 흐를 수 있는 결말을 작가는 절대적 고독을 동반자로 택하면서 마무리합니다. 혼자된 것을 괴로워하기보다는 떠난 이들을 애도하는 길을 택하죠.
아버지는 왜 딸을 혼자 두었을까. 왜 은지는 미안해하지도 않는 것일까. 그러한 의문에 휘둘리는 대신에 작가는 철저하게 고독해진 상황에서 고독을 받아들이고 싸우는 것을 해답 아닌 해답으로 내놓습니다. 대사 하나, 서술 하나 고민하고 써낸 글이며 독자가 자신의 고독에 대해서 되짚어 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글이었습니다. 다만 섬세한 감수성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자칫 감성적으로 흐를 수 있는 서술 안에서 중심 사건이 선명하지 못한 점이 아쉽군요. 다음 글을 기대하겠습니다.


86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 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euseoha @ gmail. com 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 (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댓글 2
  • No Profile
    dcdc 10.07.31 00:47 댓글 수정 삭제
    껴앉다는 고질병이군요...감사합니다. 앞으로의 작문에 큰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 No Profile
    liberte 10.08.03 08:36 댓글 수정 삭제
    liberto가 아니라 liberte인데...^^; 아무튼 감사합니다. 메일 보내드렸어요~
분류 제목 날짜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5.06.0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5.06.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 2015.04.3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5.04.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5.02.28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5.02.28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5.01.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12.3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4.12.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5 2014.12.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11.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10.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5 2014.09.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 2014.07.3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4.07.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07.0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4.06.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06.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4.04.3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7 2014.03.31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 1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