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여느 때보다 많은 단편이 올라와서 게시판이 풍요로운 달이었습니다. 그러나 편수에 비해 분량미달이나 초과로 심사에서 제외된 경우가 많기도 했습니다. 이번 달에는 단편의 묘미를 살린 글보다 장편형식으로 쓰인 글이 많았습니다. 짧은 이야기가 주는 특유의 탄력성이나 단일한 정서, 응집력 등이 드러나지 않는 글이 대부분이어서 아쉬웠습니다. 많은 글에서 주목할 만한 독특한 소재가 등장하였지만 소재를 제대로 활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했습니다. 독특한 상상을 짧고도 응집력 있게 그려냈으나 분량 기준에 미치지 못해 제외된 글이 많아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1) 분량 미달  
        AVATAL(원고지21매) - 김몽,
        주선전(원고지29매), 어느 작가 지망생의 꿈(원고지7매), - 먼지비
        남자의 손목시계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원고지45매) - 하늘을울리는별의종
        901384596(원고지43매), 늑대인간 공주(원고지38매), 공원 벤치 옆자리(원고지18매) - roi
        도플갱어 주식회사(원고지29매)- 김 정
        버섯과 나방(원고지15매), 카레(원고지16매), 악마의 씨앗(원고지34매) - cocoon
        노병의 개선식(원고지43매) - 천공의 도너츠
        세수한 뒤 나는 자버렸다(원고지20매) - 카넨
        메란촌(원고지33매) - Mad Hatter
2) 그 외
          흑야 백일(黑夜 白日), 카슐라 - 언어유희 : 전자는 글의 서두에 1부라고 적혀 있으며 후자는 글 가장 마지막에 ‘1부 끝’ 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두 글 모두 이야기 전개로 보아도 단편 소설이 아니라 장편의 일부분인 듯 보입니다.


1. Scar - 카르온 (80호 심사 대상에서 이월)

A: 심각한 일본 번역투로 인해 번역물이 아닐까 의심했던 글입니다. 등장인물로 일본인을 사용한 타당성도 모르겠습니다. 정서된 문장이 많이 아쉬웠던 글이지요. 여동생의 죽음-후미야와의 목졸림 놀이-죄책감으로 인한 자살로 이어지는 흐름이지만 개연성이 적어서 각기 다른 사건이 따로 노는 느낌입니다. 여동생의 죽음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경위 없이 주인공의 죄책감만이 드러나서 어리둥절하기도 합니다. 또한 후미야라는 인물이 주인공의 죄책감을 이용해서 진짜 죽게 만드는 타당한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 생뚱맞게 느껴집니다. 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경위, 후미야가 주인공의 죄책감을 알고 이용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단서가 명확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유기적으로 사건을 연결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여동생의 죽음을 방조한 자신을 잔혹한 놀이로 심판하는 은유는 스스로를 직접 심판하는 결말까지 탄탄한 연결고리로 놓였습니다. 글 전체를 장악하는 ‘목졸림의 황홀경’도 죽음에 대한 그로데스크한 환상으로 잘 표현된 느낌입니다.


B: 청소년들이 목을 졸라 성적 쾌감을 추구한다는 설정은 미국드라마 Criminal Mind에서도 다룬 적이 있으므로 새롭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여동생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짓눌려 죽은 여동생의 환상을 보는 주인공의 설정과 어울려 기괴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목을 조르는 친구 ‘후미야’에게 여동생의 영혼이 빙의된 듯이 주인공을 압박해오는 장면의 긴장감도 생생하게 살아나 있습니다.
그러나 불안한 주인공의 심리는 잘 살아나 있는데 비하여 주인공이 ‘후미야’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가 설득력있게 나타나지 못한 점, 어머니의 대사가 실제 인물의 대화가 아니라 아마추어 연극 대사처럼 비사실적인 것 등이 글의 전체적인 매력을 반감시킵니다.
이 글이 번역물이 아닐까 하여 전편에서 심사 대상에서 일단 제외시켰던 것은 배경이 일본이라는 점이나 등장인물들이 일본이름을 쓴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글 전체의 문장이 일본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해 놓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악’ 과 같은 감탄사가 글에서 과도하게 사용되지 않도록 주의하시는 것도 필요하겠습니다.


2. 타인의 섬 - 카르온

A: 유쾌한 추리소설이지만, 추리소설의 묘미를 많이 살리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너무 많은 단서와 치밀하지 않은 구성이 본격적인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엔 미흡합니다. 주인공들의 매력을 내세운 글이라고 하기에는 인물들의 개성이 부족해 보입니다. 시종일관 유쾌하게 흘러간 분위기 덕분에 반전 역시 반전이라기보다 뜻밖의 소동처럼 묻힌 느낌입니다. 분위기를 어둡고 음산하게 이끌면서 유쾌한 결말을 반전으로 이끌어 냈다면 추리소설의 묘미는 살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반전의 묘미를 경쾌하게 살리지 않았을까 합니다.


B: ‘Scar’를 쓰신 분의 글이라는 걸 전혀 연상하지 못했다가, “이기주 작가님이시군요. 얼마 전 스릴러물 [Scar-상흔]을 발표하신.” 이라는 극중 대사를 보고 작가 이름을 확인했습니다. 본인의 작품을 다른 글에서 인용하는 건 자칫 잘못하면 독자들에게 반감을 살 수 있습니다. 작가분의 팬이라면 물론 유쾌하게 받아들이시겠지만요.
전체적으로 글의 분위기가 가볍고 유쾌하며, 글의 전개가 상당 부분 인물들의 대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추리 동호회의 인물들이 게임으로 시작했던 추리 쇼 가운데 돌연 괴이한 사건이 일어나고, 인물들은 공포와 긴장에 시달렸다가 결국은 유쾌한 결말로 마무리됩니다. 시작과 결론이 유쾌한만큼 중반부의 ‘사건’은 글 전체에서 가장 클라이막스를 차지하며 최대한의 긴장을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덧붙여 결론을 반전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독자를 다른 추리로 이끌거나 혹은 아무런 추리도 불가능한 혼란 상태로 만들어야겠지요. 그렇지만 아쉽게도 이 글에서는 초반부부터 마지막 부분의 결론, 즉 진범인의 정체가 너무나 쉽게 드러나 있습니다. 추리소설의 애독자까지 가지 않더라도 만화 김전일이나 명탐정 코난 정도라도 관심 있게 본 사람이면 글의 마지막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3. 아멘(Amen) - 제시안

A: 인물들의 활약에 중점을 둔 글입니다. 활극과 같은 분위기가 특징이지만 별다른 사건도 없고 특별한 정서도 담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문장이 안정감 있고 속도감이 있어서 스피디한 전개와 함께 뛰어난 가독성을 자랑합니다. 이점에서 많은 발전 가능성이 보이지만, 정교한 플롯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장점이 제대로 발휘되기 힘들 것 같습니다.


B: 환타지 세계에서 살던 기사가 공간 이동으로 현대에 나타나, 동네 깡패들과 싸움판을 벌입니다. 손을 ‘데다’처럼 맞춤법에 맞지 않는 표기가 눈에 뜨이는 데도 전체적으로 글이 속도감이 있어서 독자가 술술 읽을 수 있는 것이 이 글의 큰 장점입니다. 하지만 중세의 인물이 현대에 나타나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일화란 영화와 만화에서도 반복해서 다루어지는 소재인 만큼, 이 글에서만 볼 수 있는 재미와 개성이 필요하겠지요. 전체적으로 장편의 호흡을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장편의 일부분을 옮겨 놓으신 건지도 모르겠네요.


4. 오늘도 마법을 담아 - 황성환

A: 오늘도 마법을 담는 근로 마법사를 그려보고자 한 의도는 읽히나 의도대로 쓰이지 못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별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근로자와 마법사를 접목시킬 때에는 응당 독자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독특한 상황이 전개되는 재미가 있어야 했지 않을까요? 이 글에서는 그런 독특한 재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첫 장 이후로는 주인공이 마법사인 것을 주지시키는 대화를 제외하면, 일반 근로자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불필요한 대화가 너무 많습니다. 일상적 대화와 달리 소설 속에서는 극적 효과나 전개에 따라 대화를 절제하고 배치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수한 마법 처리가 된 마법병 안에 마법을 담아 누구라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마법을 대중화 시킨다”는 아이디어는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설정으로만 두기보다 오히려 이 아이디어를 더욱 파고들어서 응집력 있는 이야기를 구성했다면 훨씬 더 재미있고 독특한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장면전환마다 삽입된 의성어는 영화의 장면전환을 연상시킵니다만, 불필요한 부분 같습니다.


B: 이번 달의 글 중에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글이 유난히 많았습니다만, 이 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마법을 쓸 수 있도록 태어난 마법사들이 설 자리를 잃고 마법 공장에서 비정규직 근로자로서 살아가는 상황 설정도 독특합니다만, 무엇보다도 마법을 특수한 병에 담아 누구나 쓸 수 있게 한다는 설정이 개성적이고 흥미진진합니다. 두 가지의 개성적 설정에서 작가분은 전자에 치중한 듯, 비정규직 근로자로서 현실에 안주해서 살아가던 주인공이 용을 잡으러 떠나겠다고 결심하며 취직 제안을 거절하는 것으로 현실에 찌들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꿈을 찾아 떠나는 용기를 빗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체적으로 장편의 흐름을 따라가는 서술 속에서 개성적인 두 번째의 설정이 살아나지 못하고 단순히 다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영상매체의 화면 전환을 의식한 듯 장면 변환마다 의성어나 짧은 설명어를 붙입니다만, 너무 안이한 방식이네요. 쓰지 않아도 충분히 단락 구분으로 전달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찰을 빚다.’를 ‘마찰을 빗다’ 로 쓰는 등의 맞춤법 오류가 간간히 눈에 들어옵니다. 특히 ‘~까’로 써야 할 부분을 거듭해서 ‘~깐’으로 쓰고 계시네요. 구어체적인 표현이므로 대화 안에서 나타나는 것은 용인될 수 있겠습니다만, 서술 부분에서는 맞춤법에 따른 표현을 써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표기법이 반복되어 잘못된 경우에는 글 자체의 격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5. 로렐라이 - 브리그리

A: 기승전결의 구성이 잘 되어 이야기의 리듬감이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내용전환이나 사건 연결 등 미숙함이 눈에 띕니다. 모든 사람에게 흉측하고 끔찍한 마녀로 여겨지는 여자를 유일하게 아름답게 바라보았던 남자의 애틋한 사랑을 그렸지만, 작위적인 것이 흠입니다. 다시 말해서 머릿속으로 그려본 피상적인 사랑의 이미지에 불과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애틋하고 애절하지만, 사랑 그 자체에 대한 깊은 몰입이 느껴지지 않고 겉도는 느낌입니다. 깊은 정서를 담은 분위기를 잘 그려내는 편이므로 보다 호소력을 갖춘다면 더 좋은 글이 나올 것 같습니다.


B: 감수성 풍부한 청소년기를 떠올리게 하는 글입니다. 자신만이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는, 모두에게 마녀로 핍박받는 여인과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주변의 반대에 부딪히고 여인의 희생을 통해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납니다. 주인공에게는 애틋한 사랑의 추억과 마지막 한마디를 남깁니다. 소년이 꿈꾸는 로맨틱한 연애물입니다. 주인공의 배경 설정에 나타나는 어머니는 자신이 아름답지 않아서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저 그려놓은 인형처럼 평면적이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아들을 피상적인 말로 설득하지만 권위도 없고 설득력도 없습니다. 친구의 대사도 아버지의 대사도 작가가 그렇게 써야 하기 때문에 쓰는 듯 비현실적이네요.
전작과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말줄임표가 블로그의 일상 이야기를 쓰는 듯 글 전체를 가볍게 만듭니다. ‘~었다’ 로 써야 하는 부분을 ‘~였다’로 반복해서 쓰는 등 맞춤법 오기도 상당히 많이 보이네요. 문서 작성 프로그램에서 요즘은 맞춤법 오류가 의심스러운 단어에 붉은 줄 표시도 상당히 잘 해 주는 편입니다만(물론 맞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자신의 표기에 너무 자신에 차 있으신 건 아닌지요.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 추상적 연애담은 블로그 포스팅으로 가볍게 보면 즐거울 수 있겠습니다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 이야기는 인간성에 대해 깊이 고찰하지 않고 가볍게 다루어도 좋을 만한 주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6. 불나방 - 츄다

A: 그림과 손을 소재로 사용하여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하고자한 노력이 읽힙니다. 왼손과 오른손에 상징을 부여하기도 하였고, 그로데스크하고도 잔혹한 묘사, 이상의 시를 연상시키는 표현 등 다양한 시도를 담았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시도는 치밀한 구성을 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즉흥적으로 글에 끼어들어 오히려 작가의 무계획적인 구성을 드러내지요. 이는 주제상실에서도 드러납니다. 정작 표현하고 싶은 주제는 변두리로 밀려나고 잔혹한 묘사에 훨씬 집중한 느낌입니다. 말미에서 손으로 말하고자 했던 주제를 급히 설명하면서 수습하는 흔적이 보이나 결말마저 주제에 분명하게 부합되지 않아서 아쉬움이 큽니다.


B: 습작 시절에 비슷한 글을 썼던 적이 있어서 상당히 놀라며 읽었습니다. 그림에 대해서 한 번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생각해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일인칭 주인공의 감정에 밀착하여 쓴 글로, 전개가 극단에 치달으면서 괴기스러운 묘사까지 생생하게 그려진 잘 된 글이었습니다. 다만 이것이 작가가 전체적으로 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서 구성을 거듭하여 나타난 묘사라기보다는 전체적으로 글을 많이 써 보신 분의 숙련된 솜씨처럼 보이는 것은, 그런 묘사에 비해서 글 전체의 구성은 상당히 허술하기 때문이겠습니다.
천재로 칭송받던 주인공이 발전하지 않는 자신의 능력 때문에 좌절에 부딪히고, 오른손을 실수로 잃고,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는 전개까지는 상당히 가독성 있게 읽힙니다만, 마지막의 결말 부분은 갑작스럽습니다. 결말 직전에 나타나는 오른손과 왼손의 의미에 대한 장황한 설명은 독자의 의문을 풀어주기보다는 작가의 사변을 풀어놓는 것에 그쳐 버리고, 왼손의 광기에 시달린 주인공이 돌연 러시안 룰렛을 시도하는 결말은 맥이 빠집니다. 다시 손을 붙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말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왼손이 그려낸 걸작이 자신의 의도와 달라 오히려 절망하는 주인공이 선택하기에 타당한 귀결이라고 보이지는 않네요.


7. 푸른 종이의 아이 - 귓도리

A: 갑신정변과 임오군란 직후부터 동학농민운동 봉기 직전까지 혼란했던 시대 속에 세종대왕이 그려진 만 원짜리 지폐를 든 아이가 나타난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을 펼친 글입니다. 안정감 있고 무난한 전개이지만, 독특한 상상에 비해 사건이 평범해서 아쉽습니다. 만 원짜리 지폐를 세종대왕의 영정으로 보고 반응하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모습은 재미있지만, 소년을 반란에 이용하려는 소동 정도에 그쳐서 아쉽습니다. 아무래도 실제역사이기 때문에 제약이 많은 탓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접목시켜 소재를 부각시킨 점은 인상 깊었습니다.


B: 1894년에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으니 이 글의 결말은 바로 그 직전 시대를 의미하네요. 조선 말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민중들의 봉기라는 상황 속에 만원짜리 지폐가 관련 되어 있었다는 독특한 상상이 이 글의 출발입니다. 글의 시작부분은 1885년. 일본의 후쿠자와 유이치가 ‘탈아론’에서 조선과 중국은 아직도 국제사회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으니 일본이 그들과 동일시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던 그 시대입니다. 지방 수령들의 부정부패, 관료 등용의 부정 등 여러 가지 사회적인 부패가 퍼져 있던 시대에 민중들이 일어나기까지의 이야기는 쓰기에 따라서는 현대 사회에 대한 멋진 비판 소설로서 완성될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민중의 의거를 소년이 들고 있는 만원짜리를 이용하려고 하는 세력으로 묘사하면서 이 이야기는 자칫하면 부정부패에 항거하는 당시의 민중의 의거를 허황된 이야기에 휘말려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휩쓸리는 것으로 보이게 할 우려가 있습니다. 하물며 소년을 세종대왕의 환생으로 보고 소년을 중심에 두겠다는 발상은 민중의 의거를 복고주의적 발상으로 만들 우려도 있네요.
또한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 글에서 중심 소재로 작용하는 ‘만원짜리 지폐’가 어째서 그 시점에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소년이 주워서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은 분명 남자용 가죽 반지갑인 것 같은데, 지갑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는 아무런 설명도 없네요. 타임머신이든 무엇이든, 간단한 설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지 않을지요.


8. 공 - 하늘깊은곳

A: 제법 그럴싸해 보이지만 깊은 성찰이 없는 겉멋 들린 대사는 조금 지양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드래곤이 번식하는 독특한 방법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결국 둘 사이의 미묘한 우정으로 끝나버려서 흔한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드래곤의 번식방법은 몹시 주목할 만한 발상이었습니다. 공을 배달하고 받으면서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갑니다. 자신만의 비밀이라고 여기고 숨기지만 사실은 모두가 같은 비밀을 가졌다는 상황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드래곤과 인간의 우정 같이 흔한 주제보다는 재미있고 독특한 소재를 충분히 활용해서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은 아쉬움이 “매우 많이” 남습니다.


B: 드래곤을 번식시키기 위해서 비밀 택배 회사를 차리고, 택배를 받은 사람들은 소원 하나를 이루는 대신에 비밀을 공유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의 압박감 때문에 비공개 카페를 개설하고 익명으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등의 소소한 설정이 즐겁습니다. 공을 받는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테니 어느 순간에는 택배를 받은 사람이 상당수를 넘어버릴 테고, 그럼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척을 하는 묘한 비밀들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등 여러 가지 상상을 해 보게 했습니다.
하지만 즐거운 소재가 여러 가지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길지 않은 (원고지 98매 정도) 이 글은 상당히 길게 느껴지네요. 현실적이지 않고 사변적인 대사가 주류를 이루는 것이 그 큰 원인이기도 하고, 결말 부분이 맥없이 마무리되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국 드래곤이 인간화되어 버린다는 결말에서는 주인공과 드래곤 사이의 묘한 연대감이 생겨나기도 합니다만, 글쎄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면 이 글의 소재가 오히려 아깝게 느껴집니다.


9. 칼과 십자가 - 먼지비

A: 서술, 구성에는 큰 흠이 없지만, 이야기에 강약이나 리듬감이 없어서 독자가 끝까지 읽기가 버거운 글입니다. 발단, 전개, 절정, 결말에 이르기까지 분위기는 시종일관 밋밋한 건조함을 유지합니다. 글 전체 흐름에 강약을 주고 리듬감을 만들면서 흡입력을 만들어 가는 것이 기 작가의 큰 숙제일 것 같습니다.


B: 소설의 발단 중의 하나로 구비문학을 꼽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가 소설의 시작이었다는 이야기죠. 그런 점에서 소설의 ‘가독성’ 이란 소설을 입으로 소리내었을 때 느껴지는 리듬감과도 상당히 유사성이 있습니다. 어려운 단어, 동음이의어가 많은 단어 등이 많이 나타났을 때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겠지요. 작가분은 많은 글을 발표하고 계십니다만, 글의 문체가 소설에 어울리는지 의문이네요. 중세의 이단심문관, 흑마술, 마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소재와 단조로운 플롯의 글인데도 독자에게 잘 와 닿지 않으니 말입니다. 어렵지 않은 내러티브에 어렵지 않은 구성을 취하고 있는 글인데도 글이 길어지면 독자가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글을 많이 쓰시는 건 알겠습니다만, 가독성이 높다는 평을 받는 소설가들의 글을 좀 더 읽어 보시는 건 어떨지요?


10. 살인충동 - 언어유희

A: 말 그대로 살인충동을 담은 글이며, 또한 살인충동이 글의 전부입니다. 특별한 주제가 보이지 않으며, 일관된 큰 사건 없이 살인충동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건을 소설형식으로 쓴 신문기사 같은 느낌입니다.


B: 장편의 일부분인 듯 한 다른 두 글에 비해서 심사 대상인 이 글은 전체적으로 같은 작가가 쓴 글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가지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독성은 떨어지고 인물들은 개성이 부족하고, 인물들의 대사는 비현실적인데다가 인물들의 행동은 갑작스럽고 당위성이 부족합니다. ‘살인충동’이라는 글처럼 살인은 단지 충동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배경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으면 독자는 신문기사를 읽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죠. 주인공이 사이코패스라고 할 지라도 사이코패스로서의 특성은 나타나야 하겠지요. 하물며 이들 주인공은 평범하고 성실한 청년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특히 마지막에 감옥에서 만난 사람을 죽이는 장면에서, 그 자가 처음 죽인 사람과 관련이 있다는 대사는 갑작스럽군요. 그 전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살인을 결심할 원인에 관련이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만.


11. 변수 85.96% - cocoon

A: 인조인간, 냉동인간, 클론 등은 인간의 이면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SF를 쓰고자하는 작가들이 “매우 흔히” 선호하는 소재입니다. SF를 쓰는 연습단계에서 대부분 한 번쯤은 사용하는 소재이지요. 그래서 형식이나 소재, 풀어가는 방식이 새롭지 않고 수많은 전작들과 비슷하다고 여겨집니다. 연습으로 스쳐가는 모방단계의 글이 아니라면 흔한 소재에 어떤 “새로운 철학이나 해석”을 담을지가 문제일 것입니다.


B: 장면 전환에 ‘-약 일주일 뒤-’와 같은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십니다만, 다른 글에서도 종종 언급했듯이 장면 전환을 쉽게 하기 위한 안이한 방법이라는 걸 짚어 두겠습니다. 흔한 소재를 길지 않은 글에서 풀어내고 있습니다만, 작가의 개성이 부족한 것이 아쉽네요. 많은 글을 올려 주셨습니다만 심사 대상이 되지 않은 짧은 글들을 포함해서 작가분께서 글에서 담으시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체적으로 어떤 전개를 따라갈지 미리 구성을 해 보신 뒤에 써 보시기를 권합니다.


12. 지도불;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 균

A: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사건 전개나 구성이 잘 짜인 글입니다. 얼핏 개화기 소설을 연상시키는 익숙한 정서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관찰자인 주인공이 갑자기 사건의 중심으로 뛰어들어 버린 결말이 다소 비약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주인공의 심정이 변화하는 추이나 그렇게까지 몰고 간 상황 등 논리적인 연결고리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B: 시작부분부터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이 상당합니다. 시골 마을에 내려온 ‘나’가 글의 주인공인 김옹이를 만난 느낌부터 ‘저런 미친 놈이 있나. - 중략 - 웬 또라이가 소리를 지르면서 돌아다니고 있으니.’ 라고 직설적으로 제시해 버립니다. 그리고 글은 처음 김옹이를 만난 시점으로 돌아갑니다. 시간의 순서가 뒤바뀌지만 독자가 혼란스러워 할 정도는 아니며, 1인칭의 화자가 관찰자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독자 역시 거리를 두고 김옹이를 관찰합니다. 그러나 관찰자였던 나는 ‘혁’과 관련되면서 사건의 중심으로 한 걸음 가까이 가고, 소영이의 지도만을 의지하고 있던 미친 ‘김옹이’가 겪은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지도가 불타고 절망한 김옹이의 비극, 그리고 ‘현이 수퍼(혹은 혁이의 집)’ 쪽의 불길로 비극적으로 마무리됩니다.
글 안에서 상당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지만 ‘나’가 과거의 사건 전체에 대해서는 단지 제3자에 지나지 않다 보니, 이야기의 진상이 드러나도 사실 그게 진상일까 하는 의문이 남아 버립니다. 마지막의 불길이 김옹이가 지른 것인지 혹은 혁이 자신이 저지른 짓인지 하는 의문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더라도, 이야기의 파국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과거의 사건까지도 ‘나’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야기 전체의 근본적인 축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전개와 흥미로운 사건과 소재이니만큼 전체적으로 깊이 숙고하시고 주인공과 인물의 배치에 대해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13. 돼지좀비바이러스 - dcdc

A: 답답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고 욕구불만으로 외치는 글입니다. 기지가 번득이는 비유와 은유가 작가의 강점을 매우 잘 드러냅니다. 그러나 작가의 격앙된 어조, 넘쳐흐르는 감정이 주인공보다 더 부각되었습니다. 단락으로 구분된 구성 역시 이야기의 구성보다는 이야기를 통해 주장하고 보이고자 하는 논리에 훨씬 몰입한 결과로 보입니다. 작가의 목소리와 감정이 너무 강하여 독자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기지 않는 점이 가장 아쉽습니다.


B: 김장남과 김차남의 이야기가 거듭 등장합니다만 인물의 개성보다는 작가의 목소리만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현실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하며 많은 소재들도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작가 자신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글을 주도하다 보니 독자는 주체성을 잃은 느낌이네요. 이야기의 주제를 전달하는 데에는 때로 냉정한 거리감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걸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돼지 소비량이 줄면 군대 식단에는 돼지고기가 많이 올라온다는 등, 생각할 만한 소재는 많이 가지고 오셨습니다만 그걸 잘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해 보시면 좋겠네요. 작가분의 입담이나 글을 풀어내는 솜씨는 전작에서부터 익히 보았습니다만, 때로는 차가운 머리로 냉철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14. 호모 네티우스 - 노 새

A: 갑작스러운 신인류의 등장을 아기자기하고도 재미있게 풀어냈습니다. 큰 사건 없이도 하나의 소재에 침착하여 치밀하게 파고들면서 자칫하면 단순해지기 쉬운 이야기를 소박하고도 탄탄하게 구성하였습니다. 딸이 신인류임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 마주치는 상황이나 사건, 아버지의 심정이 딱 어울리는 소품처럼 배치되어서 글의 재미를 더합니다.


B: 인터넷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현대 사회에서 인류가 인터넷 기반으로 진화한다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신인류인 ‘딸’이 가진 특성을 알게 되기까지의 사건 전개도 흥미진진하네요. 사소한 힌트에서 시작해서 결정적인 해답이 나타나기까지의 사건 배치는 작가가 충분히 생각을 하고 여러 번 고민해서 쓰신 듯 독보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글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지만 있어서 글의 현실성을 더해주는 사소한 서술들입니다. 골든벨 녹화장에서 지은이의 태도, 그리고 어린 지은이를 안아올리고 (실제로는 모두 정답을 맞추었지만) “우리 지은이 어린이도 이담에 공부 열심히 하면 여기 언니처럼 훌륭하게 클 수 있어요 알았지요?” 라는 대사를 말하는 부분에서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독자도 웃음을 머금게 되네요. 딸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는 아버지의 심리적인 묘사도 탄탄합니다. 아울러 만약 인터넷이 마비가 된다면 ‘지은이’는 어떻게 될까라는 상상 등, 배경 안에서 다른 상상을 하게 만드는 점도 매력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지은이의 애인 역시 신인류의 하나라는 증거, 즉 딸이 돌연변이의 한 개체가 아니라 인류의 진화의 한 일부분이었다는 결말은 찬반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작가분의 의도는 잘 살아났다고 생각됩니다.



81호 독자 우수단편 우수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 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Itpimento @ paran.com (첫글자는 소문자 L입니다)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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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 새 10.02.27 01:35 댓글 수정 삭제
    허점 많은 작품을 예쁘게 봐주시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쓰는 작품들에게 큰 에너지로 남을 오늘입니다.
    손이 후들거립니다.
    제게 이런 날이 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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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말씀 잘 기억해두었다가 다음에는 좀 더 나은 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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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c 10.02.27 13:05 댓글 수정 삭제
    고친다고 고쳐도 잘 되지가 않는군요; 지적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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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2.27 14:53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복복복 받으세요^^ 복복복 복복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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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로 10.02.27 20:24 댓글 수정 삭제
    코드명 P는 분량 초과되서 심사 제외됐나요? 아니면 논평하신 독자 소설은 잘 쓴 것만 논평하신 건가요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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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赤魚 10.02.27 22:06 댓글 수정 삭제
    엘로/독자단편심사는 전월 16일부터 당월 15일까지 올라온 글을 대상으로 심사합니다. 즉, 이번달 심사대상은 1월 16일부터 2월 15일까지 게시된 단편입니다.(이상의 내용은 1호 "꼭지소개"에 안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2월 16일에 게시된 코드명 P는 분량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다음달 심사대상에 해당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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