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연일 이어지던 가뭄이 끝난 뒤에 물난리를 겪고 나니 무더위가 찾아오는군요. 모두 건강하신지요? 이번 달과 다음 달은 심사단의 사정으로 인해 저 혼자서 심사평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심사평이 하나로 줄어서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관점을 드리지 못하게 되어서 유감입니다. 이번 달에는 무난한 소재들이 사용된 글이 많았고, 세심한 서술, 표현, 묘사에서 아쉬운 글이 많았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감각과 경험만을 바탕으로 삼지 않고, 글에 등장하는 배경, 인물, 사건들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하고 자료를 찾아보면 보다 글의 완성도가 높아지지 않을까 합니다.

110호에서는 우수작으로 빈군님의 ‘아랫집 남자가 매일 저녁 같은 시간에 담배를 피운다.’를 선정하였습니다. 다음 달에도 작가분들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6월 16일부터 7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총 15편의 글 중 심사대상이 된 글은 10편이었습니다.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분량미달:
        예언 - 민근 (원고지 35매)
              번제 - karol (원고지 19매)
              달이와 태괴 - 마뱀 (원고지 23매)
              찬가 - 먼지비 (원고지 6매)
              지금은 수업 중 - 사이클론 (원고지 13매)


나체 피부관리 - 전투적 메시아
지구를 침범한 외계의 괴생물체가 인간을 사육하며 가축 취급하는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인간을 가축처럼 도살하고 학대하는 상황은 이와 같은 초현실적 상상이 없다하더라도 전쟁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자주 벌어졌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축처럼 취급당하는 참혹한 현실을 다룬 소설도 제법 많은 편입니다. 이 글은 SF적인 소재를 택하고 있지만, 그 주제나 핵심소재가 그러한 소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설들이 인류애나 인간의 놀라운 인내를 보여주는 반면, 이 소설은 가축 수준으로 떨어진 인간들의 모습을 냉소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자가 사건 속에 서 있는 하나의 인격체라기보다 소설가의 서술을 전달하는 매체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소설의 인물은 어떤 장면에 서든지 하나의 인격체로(설령 그것이 가공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 나름의 성격, 감정, 가치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화자에게 그것을 부여하지 않은 것 같군요. 그래서 이야기가 기계적인 서술 이상을 독자에게 던져주지 못하는 점이 아쉽습니다. 불필요하게 많이 사용된 ‘다만’, 지나친 번역체, 어색한 문장 등도 개선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종말이 온다! - 사랑
개인이 묵시록적인 체험을 한다면, 그것이 꼭 사회의 묵시적 체험으로 가버려야 할까요? 주인공이 환청처럼 들은 ‘종말이 온다!’는 소리는 점차 사회적인 현상과 관련되면서 주인공의 삶과는 다소 동떨어져 버립니다.(심지어 주인공이 그 현상을 겪고 있는데도 그렇지요.) 이는 작가의 초점이 주인공보다는 사회에, 혹은 사회 비판에 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식상한 공식을 따라가 버린 느낌이 들어서 아쉽습니다. 오히려 진행되는 사회현상을 배경에 두고, 주인공이 겪는 ‘개인적인’ 종말을 보여줬더라면 사회적 종말과 개인적 종말이 대비되어서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요? 이 글에서 주인공의 개인적인 종말은 꽤 평범합니다. ‘아르바이트는 잘렸고, 공모전은 떨어졌고, 엄마는 낙상해 다리에 수술을 받고, 설상가상으로 여자친구에게 차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일상의 위기감이 사회적인 위기감과 대비해서 잘 풀어졌다면 보다 개성 있는 글이 나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종말이 온다!’는 소리를 환청처럼 들었고, 이 현상이 조금씩 다른 사람에게로 확대되어 가는 상상이 재미있습니다. 너무 많은 이들이 듣기 시작한 탓에 나중에는 이 현상에 무심해져 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무감각해져 가는 현대인을 빗댄 것도 의미심장하지요.


hero - k.kun
작가의 감상은 넘쳐나는데, 이야기의 구성이 매끄럽지 못한 것이 흠입니다. ‘딸에게 영웅이 되고 싶은 아버지’라는 주제는 앞과 뒤에서 맞아떨어지지만, 딸의 임신, S사에게 느끼는 아버지의 적의, 딸의 불치병 등 굵직굵직한 소재들이 서로 맞물리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는 느낌입니다. 이 소재들은 감정을 자극한다는 공통점을 같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각각의 소재를 만날 때마다 그에 대한 감정을 현란한 묘사로 쏟아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재들이 유기적으로 엮어지지 않은 만큼이나 감정들 역시 분절되고, 주인공의 감정이 비유법을 사용한 지적인 설명과 묘사로 표현되어서 주인공의 감정에 공감되기보다는 혼자 신명이 난 무당을 멀거니 지켜보는 기분마저 듭니다. 그래서 마치 “민주야. 넌 죽는 게 아니야. 지워지고 있는 거란다.”라는 마지막 문장만을 위해 작가가 달려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좀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만) 주인공의 정서나 감정을 잘 표현하고, 또 독자들을 매혹시키는 장점을 지닌 작가입니다.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잘 표현하고 전달하는 장점은 이 글에서도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소 - 사랑
문 앞에는 괴물이 기다리고 있고, 방에는 구멍이 넓어져 가는 상황에 주인공은 철저하게 고립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피해의식과 흔히 인터넷에서 찌질하다고 불리는 행위가 나열되죠. 보통 이런 글에서 그렇듯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을 몰고 간 부모와 학교에 대한 이야기 역시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의 감정은 격리된 것처럼 서술되어서 공감을 하기도, 동정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본 게시판에서 기 작가와 비슷한 풍의 글로는 니그라토님의 글이 있습니다. 최근 글들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잭오랜턴 - 사이클론
큰 사건 없어서 주인공과 잭오랜턴의 만남 그리고 그것을 써내려가는 주인공이 예감하는 잭오랜턴의 등장 두 부분으로 나뉘어 단순히 끝나버린 것이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경쾌하고 유쾌하게 서술된 것이 장점인 글입니다.


창귀 - xx
기승전결을 충실히 따라 쓴 이야기입니다. 방학동안 시골 외갓집에 갔다가 뒷산에서 무서운 일을 당하고 그것을 숙제처럼 끝내고 돌아가는 결말이 어린 주인공의 성장을 연상시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이야기가 뒷산에서 만난 귀신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어린 주인공이 은밀히 가진 유아적인 공포와 맞물린 귀신을 만나고 극복하는 흐름으로 흘러갔다면 성장담까지 포괄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15. 시원한 그 향기가 났다 - 정하린
기억을 먹는 판타지적 요소와 두 사람의 로맨스가 주축을 이루는 글입니다. 이런 경우, 판타지적인 요소, 이 글에서는 기억을 먹는 주인공의 능력이 로맨스와 엮어지면서 현실적 로맨스와는 차별되는 독특함을 지니는 방향이 되어야겠지요. 하지만 이 글에서는 판타지적인 요소와 두 사람의 로맨스가 따로 노는 느낌이 듭니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없어도 두 사람의 로맨스는 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주인공의 능력은 단지 두 사람이 만나고 관계를 맺는 매개 역할 이상을 하지 않는데, 이런 역할을 위해 기억을 먹는 주인공의 능력이 꼭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나시감의 꽃을 꺾은 후에 병에 걸린 그녀를 구하기 위해 주인공의 특별한 능력이 요구됩니다만, 판타지적인 요소를 살리기보다 로맨스를 평범하지 않게 만들기 위한 장식 정도로 사용된 점이 아쉽습니다.


세 개의 오마주 - 우리
누군가의 부재 혹은 죽음이 다가온 일상을 담담히 써 내려간 글입니다. 일상을 써 내려가되 나의 일상이 아닌 타인의 일상을 독자에게 체험시키는 글은 쓰기가 쉽진 않습니다. 타인의 일상이 독자인 내게 낯선 일상이 되려면 소재는 일상적이되, 인물들의 느낌, 감정, 생각, 행동 그리고 그들이 지나가는 풍경이 모두 실제 누군가의 삶처럼 느껴져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글의 인물들의 말, 행동, 감정, 생각, 느낌 들이 보다 풍부하게 표현되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serioludere
이 글에는 죽여도 죽지 않는 남자, 지전수가 등장합니다. 우연히 지전수를 손에 넣게(?) 된 박사장은 그를 돈벌이에 이용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싶은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유흥거리로 전락하는 것이죠. 이후에 병원과 관련된 음모나 김순정의 등장 등은 자극적인 소재에 걸맞는 장르적 재미를 쫓아가는 듯 보입니다만, 결말에 이르러서 느닷없이 철학적인 주제로 전환해 버립니다. 사랑했던 남자를 닮게 성형을 한 지전수를 죽이려고 혹은 죽인 김순정의 ‘어떤 목적도, 희열도, 심지어 증오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고는 갑자기 삶에 대한 희망을 찾는 결말이지요. 이 때, 결말까지 오기 위해 존재했던 모든 과정이 삽시간에 불필요한 것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스토리텔링에 몰입했던 전반부에는 죽어도 죽지 않는 지전수의 모습이 마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건조한 그의 삶을 상징하는 부분이 적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어떤 주제를 목적으로 글을 써 내려갈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구성이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아랫집 남자가 매일 같은 시간에 담배를 피운다 - 빈군
가족이라는 인연을 아주 재미있게 풀어낸 글입니다. 윗집 남자는 매일 같은 시간에 담배를 피우는 아랫집 남자와 전처인 경희를 매개로 이어지고, 다시 전처인 경희는 처남과 이어지면서 세 사람의 인연이 가족임이 흥미로운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 짐작한 독자의 짐작은 윗집 남자에서 아랫집 남자로 시점이 바뀐 순간 뒤집힙니다. 이로 인해 독자가 놀라움과 함께 호기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끝까지 쫓아갈 동력이 만들어지지요. 또한 경희가 전남편이었던 두 남자에게 보인, 담배에 대한 상이한 태도에 얽힌 사연이 가족인 아버지와 엮이면서 글 전체의 주제인 가족에 자연스럽게 녹아듭니다. 시점의 배치, 독자를 위한 반전, 낯선 인연으로 시작해서 가족으로 귀결하는 전개방식까지 구성이 매우 탄탄한 훌륭한 글입니다. 또한 가족의 본질에 대한 질문까지 더해지면서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완성도 높은 글이 되었습니다.


110호 독자 우수단편 우수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euseoha @ gmail. com 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 (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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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군 12.07.31 12:19 댓글 수정 삭제
    아이코, 과분한 평가 감사드립니다 _ _
    이래저래 나름대로는 실험적인(?) 시도를 했던 글이었는데 호평을 해 주시니 용기가 납니다. 흐흐.
분류 제목 날짜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후보작 심사평 2017.01.31
선정작 안내 2016년 4분기 우수작 및 2016년 최우수작 2017.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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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후보작 심사평2 201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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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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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 2015.12.0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5.12.01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15.10.31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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