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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은 공모전 마감과 맞물려 있어서 탄생을 주제로 쓴 글이 많았습니다. 공모전이니만큼 일정수준 이상의 글이 많았지만 소재를 신선하게 풀어나간 글이 적은 점은 아쉬운 달이었습니다. 아기의 탄생이나 신세계의 탄생이 주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었지요. 또한 문장, 구성, 주제 세 가지의 균형이 적절한 글이 적은 점 역시 많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 흔히 사용되는 설정을 사용할 때는 작가의 재해석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떻게 해석하는 가에 따라 같은 이야기도 전혀 다른 느낌의 글로 재탄생하게 되지요. 마감의 압박에 시달리며 글을 마친 분들에게 축하를 드리며, 좋은 결과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07호에서는 우수작 없이 가작으로 장강명 님의 ‘되살아나는 섬’을 선정하였습니다. 가작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더욱 건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3월 16일부터 4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총 22편의 글 중 심사대상이 된 글은 12편이었습니다.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분량미달: [탄생] 가치의 탄생(징고, 원고지 55매), [탄생]세상, 의지(미소짓는 독사, 원고지 50매), 추월(천현주, 원고지 52매)
2) 분량초과: [탄생]봄맞이 (정하린, 원고지 159매), [탄생]신음 (민근, 원고지 195매), [탄생]자살하러 갈게 (유이립, 원고지 198매), 자객행(刺客行) (이니 군, 원고지 237매), [탄생]목소리 (틸레탕트, 원고지 155매), [탄생]신세계의 낡은 역에서 (레고, 원고지 190매)

3) 연작: 정상에서 .1 (천현주)

1. [탄생]마지막 항해 by 우주연
A: 금기라는 소재에는 필연적으로 금기가 상징하는 가치에 저항하는 의식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이 글에서의 등장하는 금기는 사자(死者)의 바다가 유지되는 기간에 출항이 금지된다는 것으로 미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바다가 위험한 시기에 출항을 금지하여 뱃사람들을 보호하는 이면도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금기를 어긴 노인에게 내려진 벌은 뱃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본보기로 타당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주인공이 굳이 금기를 어기고 바다로 나아가려는 행위에 대한 설득력이 약합니다. 더욱이 주인공이 성인식에서 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된 이유가 드러나지 않아서 더욱 그렇습니다. 공감할 수 없는 갈망들이 어리둥절하게 펼쳐지는 동안 끝내 여운과 분위기만 남기고 맺어진 점이 아쉽다 하겠습니다.

B: 항해가 금기시되는 세계에서 항해를 떠나고자 하는 노인과 ‘나’가 있습니다. 금기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러 이야기에서 다루고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소재이지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금기시 된 것을 행하고자 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떠한 금기든 간에 사회적 문화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금기의 이유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금기를 깨는 타당한 이유가 되어 주지요. 그런데 이 글에서는 금기의 근거가 없기 때문에 금기를 깨는 인물의 행위도 공감을 얻기 어려워졌습니다. 글을 읽고 나서 남는 것은 노인의 마지막 멋부린 대사와 ‘사막’의 모호한 의미뿐이군요.


2. 음모가 자란다 by dcdc
A: 동음이의어를 사용하면서 현실 곳곳에 숨어있는 어두운 음모와 미성숙한 소녀가 어른이 됨을 상징하는 음모를 교차하며 진행하는 서술이 인상적인 글입니다. 그러나 난해하다기보다는 너무나 명맥하게 쓰인 현실비판이지요. 음모가 없는 그곳, 미성숙한 소녀의 은밀한 곳에 머리를 처박고 구원을 바라는 주인공은 소아성애자와 같은 변태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한편, 음모가 자라지 않는 순수로 가득 찬 세상에 집착하기를 거듭하는 자괴적인 이상주의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명백한 은유를 작가 특유의 느낌으로 풀어내어 개성이 강합니다.

B: 순수한 세계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동경과, 현실에 대한 비판을 소녀에 대한 성적 환상으로 풀어내었습니다. 음모陰謀가 없는 세상은 순수하고 믿을 수 있는 세계이지만 그것을 음모陰毛가 자라지 않은 여자아이의 몸으로 빗대어 서술하는 것은 독자에 따라서는 평이 갈릴 수 있겠죠. 소녀가 성숙하는 것, 음모가 자라는 것을 세계 전체가 무너지는 위험으로 인지하는 ‘나’의 환상은 자칫하면 소아성애에 대한 집착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3. [탄생]New Order by 潭燐
A: 고대로부터 내려와 세상을 장악하고자 한 비밀결사가 등장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정치판으로 뛰어든 이들의 정체성이 모호합니다. 현실의 정당과 이들이 차별화되기 위해서는 그 신념이나 목적이 달라야 하는데, 그들만이 외치는 비밀스러운 구호 외에는 큰 차이가 보이지 않아서 신비감이 적은 것이 흠입니다. 더욱이 주인공 출생의 비밀이 갑자기 등장하지만, 그 비중에 비해 의아할 정도로 역할이 적은 점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오히려 이것으로 인해 이야기가 산만해져 버린 느낌입니다. 글의 재미를 어떤 부분에 두고 싶었는지 재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B: 신종족이 집권여당이 되면서 지배계층이 뒤바뀌기까지의 상황을 새로운 세계의 ‘탄생’에 빗대었군요. 신종족의 설정은 물론이고 그들이 집권여당이 되려고 한다는 상황도 흥미롭습니다. 다만 이런 흥미로운 설정을 풀어낸 이야기가 설정에 비해서는 너무 빈약한 것이 아쉽군요. 특히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의 등장 이후 이야기가 종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리며, 주인공인 제희가 신종족이 되는 결말 이후의 상황은 더 뜬금없이 느껴지는군요. 그들이 과연 이런 방법으로 여당이 될 수 있을지 의문도 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무엇 때문에 집권여당이 되려고 하는지가 잘 이해가 가지 않네요.


4. [탄생] 은총의 날 by 천공의 도너츠
A: 긴 이야기지만 핵심은 우리가 예언자나 신으로 신봉하는 존재가 사실은 우연이나 우주적 섭리에 의해 탄생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언자가 도래한 과정이나 그 실체를 뒤쫓는 필자의 모습은 흥미롭지만, 특정종교를 연상시키는 시공복음, 강림, 열 네 시종, 부흥사역 등을 굳이 사용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글 속에 드러나는 예언자의 여정이 다양한 종교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백히 특정종교를 연상시키는 소재를 차용한 것은 작가의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특정종교를 조롱하는 것으로 비춰지기 쉽겠지요. 그러나 우주에서 우연히 발생한 사고가 만들어낸 허상과 그것을 신봉하는 인간의 헛된 믿음이 자라나는 과정이 재미있게 구성된 글입니다.

B: 예언자와 종교의 탄생을 그려낸 글입니다. 14명의 사도, 예언자, 시공복음 등 기독교의 형식에서 새 종교의 형식을 많이 따 왔기 때문에 자칫하면 기독교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연히 발생한 사고와 그 결과로 인한 사건들이 사람들의 종교적인 신념과 맞물리면서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과정이 상세하게 그려진 점은 작가가 이 글을 쓰면서 오래 공을 들였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군요. 기적의 진실을 실제로 목도한 화자가 기적의 실체를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부분이 독특합니다.


5.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by 천공의 도너츠
A: 사내와 헤라나는 켄타우리인과 사파이인으로서 아주 오랫동안 묵혀진 원한이 놓이는 관계입니다. 이야기는 그 원한으로 인한 결투입니다만, 사내의 원한이 아내와 관련되는 암시만 있을 뿐 명확하지 않아 공감을 이끌어 내기 쉽지 않습니다. 또한 이 글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설정은 로저 젤라즈니 풍의 글과 닮았는데, 이 경우에는 주인공들의 개성과 그들이 주고받는 허세 담긴 대사, 유려한 문장으로 묘사되는 전투장면이 핵심이겠지요. 이는 글이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에서 느끼는 감각을 묘사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작가 역시 이를 고려하여 명백히 감각적인 문장을 시도하지만, 이를 시도한 후반부와 전반부의 분위기가 적절한 균형을 맞추지 못한 점이 아쉽다 하겠습니다.

B: 몽환적인 세계 안에서 오래된 원한이 마지막 싸움으로 마무리되기까지의 과정이 신화적인 서술에 힘입어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군요. 배경의 세계가 독특하게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고 인물들의 대사는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게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 속의 푸른 빗방울은 영원히 소멸하는 그 날까지 남을 것이었다.’와 같이 시적인 서술도 글의 분위기에 한몫을 하고 있군요. 다만 이런 문장들은 말 그대로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겠습니다. 글의 몽환적인 세계를 만들어주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이야기 자체를 독자에게 곧바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와 세계 사이의 벽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로 모두 시적으로 서술된 문장들 안에서 두 사람의 원한의 실체와 두 사람의 과거가 제대로 독자에게 잘 와닿지 않는다는 점이 이 글에서는 단점이 되었네요.


6. [탄생] ‘어머니’에게로 by 방문자
A: 어떤 재앙으로 인해 고립된 인간들이 밖으로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통해 신세계의 탄생을 그려낸 글입니다. 구원을 가져오는 소년은 돔 밖으로 나가 어머니를 만나는 사명을 지닙니다. 결국엔 성공을 하지만, 어머니가 무엇인지, 왜 어머니를 만나야만 하는지 모든 것이 불분명합니다. 그래서 주어진 설정 안에서 글을 이해하기보다 비슷한 구성을 지닌 다른 글들을 연상하면서 글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성과 결말 외에 보다 치밀하고 명확하게 과정을 풀어나갔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B: 안전하게 유지되고 있는, 그러나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확신을 가질 수는 없는 불완전한 안전의 세계와, 그 틀을 깨고 밖으로 나오려는 아버지와 소년이 등장합니다. 우주 세계의 콜로니를 포함해서 이런 한정된 안정의 세계에서 탈출하려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드물지 않지요. 그들이 무엇을 목표로 하여 탈출하였고 그들은 결국 무엇을 얻게 (혹은 무엇을 잃게) 되는가가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이 글에서는 아쉽게도 제목에까지 등장한 ‘어머니’의 실체가 독자에게 잘 와 닿지 않으며, 탈출한 이들이 맞이한 결말도 모호하기만 하군요.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모두 다 읽어낼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묘사와 서술이 있어야 독자들에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겠지요.


7. [탄생] 달과 이름 by 단식광대
A: 딘 알 쿤츠의 원작을 소재로 한 고전 SF영화 ‘Demon Seed'가 연상되는 글이었습니다. 'Demon Seed'는 슈퍼컴퓨터가 여자를 통해 자신의 아기를 낳는 영화인데,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가 인간을 통해 생명을 낳는다는 점이 비슷하지요. 그러나 이 글은 인간이 아닌 존재의 인간적인 욕망보다 인간의 이기심에서 탄생한 인공존재가 바라는 구원에 갈망을 맞추고 있습니다. 소재가 그리 신선하지 않은 점이 흠이긴 합니다만, 탄생이라는 소재의 테두리를 감안하면 방향성과 명확한 주제를 가지고 비약 없이 성실하게 잘 풀어간 것이 장점인 글입니다.

B: 인형이라는 이름으로 인공생명체들을 이용하는 미래 세계의 설정은 완전히 새롭지는 않지만 그 밖의 주변 설정과 도시, 세계 설정이 더해지면서 설정이 탄탄해졌습니다. 인공생명체 혹은 로봇 등 인간이 이용하려고 만든 존재들이 인간의 지배권을 벗어나 인간의 지위를 넘보게 되는 이야기 역시 흔합니다만, 이 글에서는 인간의 관점이 아닌 인형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살고자 하는 욕구, 구원을 다루면서 개성을 만들어 냈군요. 처음 등장한 청년이 인형이라는 복선을 적절히 배치하면서 그들이 번식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후반부까지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좋습니다. 소재면에서 보다 개성이 더해진다면 이야기가 더욱 매력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8. [탄생] 엘리키 by 메이
A: 용, 늑대인간, 구미호 그리고 현대의 뱀파이어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 변용하여 여자와 사랑을 나눈 이야기는 신화적인 모티브를 차용한 글입니다. 처녀 엘리키와 늑대인 쿠라, 그들과 삼각관계를 이루게 되는 렘피넴의 이야기를 신화적 분위기를 살리며 잘 이끌어 나간 것이 장점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이야기 이상의 개성이 없는 점이 단점이지요. 작가도 이를 염두에 두었는지, 이 이야기를 우리가 알고 있는 ‘눈의 여왕’에 얽힌 뒷이야기로 이어나가려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야기 전반에 눈의 여왕과 연관 지을 수 있는 단서가 너무 적은 탓에 결말이 마치 사족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보다 계획적인 구성을 토대로 진행되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

B: [탄생] 공모의 글 중에는 상대적으로 소재의 독특함이 돋보이는 글이었습니다만 종족간의 사랑과 삼각관계는 최근의 베스트셀러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조금 진부하게 느껴져서 아쉽군요. 설화 혹은 신화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동화적으로 전개하였지만 글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대부분의 독자들이 글의 결말을 예측할 수 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주술이나 주술을 중도에 방해받았을 때의 설정이 독특한데 그 부분을 더 살려냈으면 어땠을까요. 사랑을 잃고 상실감만이 남은, 살아있지도 죽은 것도 아닌 존재 엘리키=눈의 여왕이 결코 얻지 못할 탄생의 이야기는 슬프고 아련한데, 그 뒷이야기를 조금 더 이었다면 글에 독특한 개성이 더해졌을 것 같습니다.


9. [탄생] 무성세계 by 이상엽
A: 하늘에서 흰 빛이 내려온 일을 기점으로 성별의 구분이 사라진 사건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만, 구성이 산만한 점이 단점입니다. 더욱이 스테이와 화자의 관점이 모두 일인칭으로 서술되고 있어서 혼란스럽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없는 것도 지적할 점입니다. 작가는 무성세계의 특징을 연애와 성행위, 가족을 대체하는 애완동물이 사라지고 새로운 가족관계와 새로운 방식의 탄생으로 보여주고자 노력하지만, 이러한 무성세계의 특징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여 산만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또한 단 십 개월 기간 동안 사회가 이토록 빨리 변화해 버린 점이나 성욕이 사라진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스테이의 성행위를 감상하는 성적 욕구가 살아있다는 점도 의아한 부분입니다. 갑자기 삽입되는 리뉴얼 오목, 정신적 번식 등 비약 또한 심한 편입니다. 글의 구성을 충분히 계획하였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B: 무성의 인간이 생겨나면서 예전처럼 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이들, ‘스테이’가 무성인간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그들 사이에 의사소통까지 불가능해졌다는 설정이 흥미롭군요. 인간에게서 성이 사라지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하는 질문에 대해 작가는 무척이나 낙관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개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새로운 가족체계, 경쟁이 아닌 조화의 세계는 이상향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테이와 무성인간의 대결상황이 무성인간의 이상향적인 세계와 괴리를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요. 작가가 그려내고자 한 것이 유전적 단일성과 무성성으로 상징되는 생존경쟁이 제거된 사회의 이상적인 모습인지, 아니면 오히려 스테이의 고립된상황을 통해 인간의 소외를 그리고자 했는지 의문이 듭니다.


10. [탄생] blue by 카논
A: 봄이 오지 않는 도시에 봄을 불러오는 소녀의 등장, 그리고 봄을 불러오기 위해 필히 넘어야 하는 희생의 과정 등 모범적인 구성을 취한 글입니다. 그러나 소녀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불분명하고, 소녀와 소년 사이에 보이는 설익은 감정은 소녀의 결행을 뒷받침하기에 허약한 느낌입니다. 봄, 소년과 소년이 드러내는 불안, 희생을 전제한 결행 등이 보다 강하게 표현되거나 소녀의 결행을 이끌어 내는 극적인 사건(혹은 심리적 사건)이 존재하면 어땠을까 합니다.

B: 동화적인 상상을 동화적인 이야기로 풀어낸 글입니다만, 소녀와 소년이 함께하는 여행도 세계도 두 인물들의 성격도 다른 글과 구별되는 특징이 별반 보이지 않아 아쉽네요. 봄이 오게 하는 소녀, 울어야만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소녀의 설정은 풀어내기 따라서는 이 글만의 독자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원고지 140매에 육박하는 긴 이야기에서 이 글만의 개성을 찾아보기는 힘들군요. 소년과 소녀는 미성숙하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의 감정까지 미성숙하지는 않지요.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나 소녀의 운명에 대한 감정이 보다 깊이 있게 다루어졌다면 이야기는 조금 더 깊이가 생겼을텐데요.


11. [탄생] dedicate by 비익조
A: 물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고안해 낸 방법이 인간을 압축해서 쥐어짜 액체를 정수해서 물로 공급한다는 설정이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글입니다. 특히, 사냥 당하는 인간들이 중국인으로 그려진 것이 매우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잔악한 시스템을 만들어 낸 주인공은 공장으로 유도되어 자신이 고안한 기계에 죽임을 당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피와 살을 먹고 자라날 어린아이를 떠올리며 처음으로 충족감을 느끼죠. 주변의 찬사 속에서 자란, 생명에 대한 애착조차 없는 자기중심적인 인물이 저항조차 없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점이나 그것을 갑작스럽게 자신을 충족시키는 만족으로 여기는 것이 설득력이 적은 것이 단점입니다. 오로지 잔악한 주인공이 자기 환상을 실현시키는 극적 결말에 초점을 두는 설정이었다면, 주인공의 자기환상, 즉 자신의 위대함을 널리 펼치는 것에 대한 욕망을 글의 과정 속에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B: 설정부터가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논란을 가져올 수 있는 글이군요. 인류가 생존하기 위한 식인시스템의 존재, 그리고 그 시스템에 의한 인종 학살과 특정 계층의 말살이 너무나 태연하게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보여주는 인종차별주의와 혐중주의는 위험수위에 달해 있습니다.
도망친 중국인이 죽을 걸 알면서도 공장에 넘겨주는 주인공들이 공장의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만, 공장의 희생물이 될 사혁의 마지막 감상은 더욱 의아하기만 합니다. 자신의 죽음, 그것도 더 이상 잔인할 수 없을 죽음 앞에서 자신의 생명이 새로 태어나는 생명을 위해 사용될 거라는 사실만으로 메마른 가슴에 충족감이 생긴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네요. 또한 이 결말은 자칫하면 인종학살의 피해자인 중국인과 특정 계층의 죽음이 숭고한 것이고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 어떤 이유로든, 이러한 인종학살과 식인시스템을 미화할 수 있을까요.


12. 되살아나는 섬 by 장강명
A: 서울의 역사를 모르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글입니다. 덕분에 심사평 자리에서 다른 심사위원의 추측을 바탕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야만 했지요(웃음). 찾아보니, 밤섬은 1968년 여의도 윤중제(제방도로) 공사로 폭파되었다가 이후 모래톱이 다시 살아나면서 철새의 보금자리가 되고 한강 자연생태계의 보고가 되어 시민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되어 있군요. 이런 점에서 일반적인 독자에겐 매우 불친절한 글입니다. 밤섬의 역사에 대한 언급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을 제외한다면 밤섬을 수호하는 당주의 세대교체를 통해 밤섬의 운명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점이 인상적인 글입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밤섬 수호를 포기한 당주 새홀리기는 프랑스에서 상징적인 죽음을 맞으며 밤섬의 죽음을 드러내고, 무능력한 당주는 가라앉은 밤섬을, 잠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등장하는 예비 당주 공대생은 이제 막 부활하는 밤섬을 상징합니다. 자기파괴와 침잠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공대생이 가지게 될 알바트로스, 나그네새의 거대함은 밤섬에 대한 희망으로도 여겨집니다. 은유와 상징을 통해 한 섬의 운명 나아가 문명 속에서 파괴되고 부활하는 가치들에 대한 조망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한 글입니다. 그러나 어째서 그가 사회학도도, 문학도도 아닌 공대생인가에 의문이 남는군요.

B: 다른 작품과 구별되는 안정적인 서술과 탄탄한 문장력이 독자를 빨아들이는 글이었습니다. 많은 글을 써 오신 분으로 여겨지는군요. 밤섬의 비극적인 역사와 섬을 지키는 무녀의 이야기가 맞물리면서 이야기가 입체감을 만들어 냈습니다. 새홀리기와 마리아, 그리고 공대생으로 이어지는 당주의 이야기는 앞으로 새 당주 공대생의 역할을 기대하게 만들기도 하네요. 잔잔한 문장 가운데 알빈 네스칼 교수와 아네스 자매의 연애담이 이야기의 한 축을 지탱하고 있고, 자신의 능력을 아직 알지 못한 공대생이 본의아니게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들이 간간히 웃음을 주는 배치를 보니 이야기의 구성을 무척 고민해 쓰신 글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하지만 밤섬이 사라졌다가 20년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이 글의 제목에서도 말하듯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는 만큼, 글 안에 그 이야기를 보다 잘 녹아내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군요. 아쉽게도 심사위원단들이 모두 서울 외 거주자인지라 밤섬의 역사에 대해서 무지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인터넷 검색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작가분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 때로 독자가 잘 아는 사실과 구별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무랄 데 없는 구성력과 문장력, 인물 설정력을 가진 작가분이시니 충분히 고려해 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아울러 교수와 새홀리기의 연애담보다 독자로서는 공대생이 어떻게 당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지가 더 궁금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여 둡니다. 알바트로스가 한강으로 날아가는 장면의 강렬함 만큼이나 공대생의 당주로서의 활약도 강렬했을 것 같으니까요.


107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euseoha @ gmail. com 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 (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댓글 2
  • No Profile
    장강명 12.04.28 06:25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
  • No Profile
    비익조 12.04.28 16:55 댓글 수정 삭제
    비평감사합니다 데디케이트의 비익조입니다.
    부족한시간을 쥐어짜 쓴다고 마무리가 미흡하여 사혁의 심리묘사와 공장에서 왜죽는지가 없는거 후회하고있습니다.
    그런데 사혁의 인종차별주의와 혐중주의가 어디서 어떻게 보이는지요?
    저는 본문에서도 썻듯이 도망자로써 너무 안일한 태도를 비판했고 그렇게 받아들여지것이라고 생각했는데말이죠
    중국인이 사냥당하는것에 대해선 인구가 많기때문~ 이라고 적었는데도 무엇이 위험하다는것역시 저로썬 이해하기가 조금 힘듭니다.
    인종학살과 식인시스템이 미화할수도없고 용납도 되지않으나 생존을 위해, 생활을 위해 어쩔수없다는걸 사영이란 캐릭터를통해 나타냈으나 제 필력이 부족한지 전달이 되지않은모양입니다.
분류 제목 날짜
선정작 안내 2016년 4분기 우수작 및 2016년 최우수작 2017.01.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후보작 심사평1 2016.11.3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후보작 심사평2 2016.11.01
선정작 안내 2016년 3분기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6.09.30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6.08.31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6.07.31
선정작 안내 2016년 2분기 독자우수단편 선정 2016.06.30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6.06.0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1 2016.04.30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6.03.31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추천작1 2016.03.01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추천작1 2016.01.31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5.12.31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 2015.12.0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5.12.01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15.10.31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5.10.01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5 2015.08.31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5.08.01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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