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을이라고 하기 무색하리만치 쌀쌀해진 날씨입니다. 모두 건강에는 이상이 없으신지요? 시월에는 유독 새로운 분이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시험작으로 여겨지는 글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재미있는 이야기는 상상해 낼 수 있고, 남에게 이야기하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글로 표현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지요. 아마도 그것은 뱉고 나면 사라지는 말과 달리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 흔적을 보고 걸어가는 것이 독자입니다. 호기심을 갖고 끝까지 쫓아가고 싶은 흔적, 현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흥미진진한 풍경을 지나가도록 이끄는 흔적을 만드는 것이 작가의 의무겠지요. 그 의무에 충실한 글이 조금 아쉬운 달이었던 것 같습니다.
101호에서는 우수작 없이 가작으로 모베 님의 ‘거미에게 나비를’을 선정하였습니다. 더욱 건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9월 16일부터 10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총 16편의 글 중 심사대상이 된 글은 13편이었습니다.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분량미달: 분량미달 : 리무버 (gozaus, 원고지 48매), 피리 명인(먼지비, 원고지 9매), 시간 죽이기 (밤조심, 원고지60매)



스마트 좀비 by 밤조심

A:  스마트톤은 요즘 유행인 클라우드를 연상시키는군요. 이야기 속에 벌여놓는 상상이 이채롭고 재미있는 글입니다. 흥미롭게 흘러가던 글은 스마트톤을 유지하는 방식이 드러나면서 살짝 그 성질이 바뀝니다. 대단히 SF적이던 상상이 느닷없이 기담으로 전환한다고나 할까요.  과학적 상상 vs. 미신적 상상. 이렇게 놓아보면 그 대조가 이질적이면서도 묘한 개성을 지니게 됩니다만, 물과 기름처럼 잘 섞이지 않은 점이 많이 아쉽습니다. 전반부와 글 전체를 관통하는 비인간적이고 물신적인 상상이 인간의 영혼이 등장하면서 지나치게 방해를 받은 느낌입니다. 통일되지 못하고 SF는 설정으로, 미신적 상상은 에피소드로 각자 따로 노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군요.


B: 문명에 의존하고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 커뮤니케이션을 상실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은 옆자리에 앉아서 나란히 사이버 월드에 접속해 이야기를 나누는 현대인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리 불가능한 미래로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두 대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단두대’와 인간의 생명-영혼을 앗아가는 ‘단두대’의 이름과 오버랩되는 센스도 멋집니다.
다만 이 흥미로운 이야기가 지나치게 수동적이기만 한 ‘나’의 일인칭으로 전개되면서 ‘진실’의 폭로가 효과를 떨어뜨리고 만 것이 아쉽습니다.
스마트톤 거부자에게 무상으로 보내지는 택배의 실체, 스마트톤을 사용한 사람들의 실제 외형 등 반전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네요. 너무나 편리한 생활을 가능하게 한 스마트톤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대에 귀농을 택하는 도시 사람들을 연상시키더니, 글의 후반부에서 인간의 영혼으로 충전되는 소울홀의 충전을 거부하고 개인정보가 삭제된 사람들일 거라는 실체가 드러납니다. 어쩌면 충격적인 반전일 수 있는 이 사실이 긴장감 있게 흘러가지 못하고 독자에게 툭 던져지는 듯이 나타나는 것이 아쉽군요.


초콜렛 퇴마사 by 밤조심

A: 본격적인 퇴마사의 이야기라기보다 퇴마사를 소재로 한 가벼운 기담 정도로 보아야 할 글인 듯합니다. 퇴마에 어울리는 긴박감보다는 그 사연에 집중한 이야기여서, 서툴지만 따뜻한 시선이 인상적입니다.


B: 인종차별문제, 왕따 문제 등 소외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전반적인 서술이 [스마트 좀비]에 비해 가볍고 허술합니다. 작가의 예전 작품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군요. 마약 딜러였던 앨런 힐이 한국에 귀화하게 된 사건은 이야기에서 큰 전제가 되는데 간단히 언급밖에 되지 않았고, 유영이 영혼이 되어서도 앨런 힐-최칠흑에게 붙어 있을 정도로 깊을 두 사람의 연대도 이유를 알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 귀화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인정한 특별귀화나 입양귀화를 제외하면 최소 5년 이상의 거주가 필요하고, 필기시험에도 통과해야 합니다. 귀화한지 2년째라고 하니 칠흑은 최소 7년간 한국에 체류한 것이 되는데, 칠흑은 몇 살에 한국에 왔을까요? 20대 후반의 외국인 남자에게 고등학생들이 ‘형’이라고 부르지 못할 것은 없겠습니다만, 아무리 노는 학생이라고 해도 그런 남자에게 ‘밤 되니까 안 보이네?’하고 놀리는 말을 던지기엔 쉽지 않겠지요. 만약 그렇다면 칠흑과 학생들과의 연대감이 더 그려져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글 전체에서 사람과 사람의 따뜻한 감정은 그려지고 있지만 정작 핵심이 되는 유영과 칠흑의 연대의 근거가 잡혀 있지 않다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군요. 오히려 이런 흐름으로 라이트노벨 류의 장편을 에피소드 위주로 써 보시면 글의 재미를 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황금빛 추억 by 김진

A: 기묘한 구성이 돋보이는 글입니다만, 주제가 무엇인지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글 전체의 주제가 모호해서 여기저기 등장하는 은유들이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마치 관련 없는 소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진열장을 보는 느낌입니다.


B: ‘오직 헤비메탈뿐이라고’ 라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나열됩니다. 동일한 문장을 반복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장면을 전환시키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달의 가작 작품의 경우는 그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 글에서는 독자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기만 하네요.
‘11월 하늘에서 검은 비를 타고 내려온 악한 11명’이 ‘빼빼로데이의 기원’이라거나 ‘게리 무어 형님이 지상에 잠시 다녀오실 때’ 와 같은 자잘한 재미가 글의 재미를 주고, 간간히 등장하는 음악가의 이름, 곡명이 취향이 맞는 독자에게는 즐거울 수 있는 글이겠습니다만, 컬트적 대사가 반복되는 글 안에서 잭과 콩나무와 선녀와 나뭇꾼을 패러디해 섞어 놓은 것 같은 전개가 독자에게 의미 있게 닿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작가가 의미 있는 상징을 글에 배치했다면 독자가 알 수 있는 힌트와 개연성이 필요할 텐데, 이 글엔 아무 것도 잡아낼 수가 없군요.


질식 by 김진

A: 사경을 헤매는 주인공이 무의식 세계를 끝없이 더듬으면서 점차 삶으로 나아와 깨어나는 과정을 그린 글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절박함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점이 의아합니다. 계속해서 주인공을 붙잡는 감정은 ‘질식’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전반적으로 질식이라는 단어가 던져주는 지루함, 책임, 숨 막힘, 지긋지긋함이 깊이 있게 살아나지 못함이 아쉽다하겠습니다. 오히려 결말을 두고 본다면, 주인공은 질식보다 삶의 의지나 희망에 더 천착해야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B: 기묘한 서술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내 친구는 그림자뿐이다. 내 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더하지 않겠다.’ 는 문장은 그림자만 존재하는 자신 외의 누군가가 있다는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특히 뒷 문장 때문에 더욱 그렇지요. 사변적인 일인칭의 서술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만난 사람들은 초면에 아이에게 아빠가 없다는 말부터 해서 독자를 당혹스럽게 하더니, 그 여자의 대사도 행동도 사실적이지 못해 의아하기만 합니다. 글이 환상 속의 상황을 그렸기 때문에 인물 역시도 비현실적인 것이라면 ‘나’가 그 비현실성을 보다 실감할 필요가 있겠고,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인물을 보다 깊이 있게 설정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소이와 그녀의 대사는 비현실적이고 그 죽음 역시 갑작스럽습니다.
단락과 문장 하나하나는 탄탄하지만 독자에게 알려줄 정보와 베일에 가려둘 정보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건의 전개를 독자가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결말이 나타나다보니 반전으로서의 쾌감이 아닌 당혹감만 남네요. 작가가 헤비메탈 팬인 것은 전작으로도 알겠습니다만, 이 글에서 락밴드와 음악가의 이름, 곡명이 이렇게 나열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질식에서 깨어난 ‘나’는 환상에서 어떤 변화를 맞은 것인지요. 작가분은 이 글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는지요.


클레바력 13세기 by hallyeia

A: 과거와 미래라는 시대를 겉감과 안감처럼 맞붙여 놓은 것이 인상적입니다. 처음 읽을 때는 고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같지만, 읽어갈 수록 그것이 아님을 깨닫는 반전이 흥미롭지요. 그러나 판타지적인 배경으로 인해 사용할 수 있는 신, 영웅, 수호자 등의 소재가 멋내기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이색적인 설정의 묘미는 잘 살리고 있지만, 서두에서 강조한 영웅이 이 글에서 하는 역할은 무엇인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은 간호사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명확하게 줄거리로 이어졌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과 흡입력이 있습니다.


B: ‘라일라’와 ‘이너비스’의 심리를 자유롭게 오가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신선하군요. 1인칭의 홍수인 요즘에 전지적 작가 시점을 택한 글은 오랜만이라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을 택한 것이 과연 효과적이었는지는 의문이군요.
신전을 수호하는 기사 이너비스의 ‘진실’과, 문명화된 대학의 연구원인 라일라의 ‘진실’이 상반되는 가운데 두 사람의 진실은 갈등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파국을 맞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너비스의 ‘진실’에 밀착해서 라일라의 ‘진실’을 만전으로 준비했으면 어땠을까요? 수녀인 라일라의 이상한 행동에 의문을 가지다가 마지막으로 문명화된 대학의 존재를 깨닫는 결말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박진감 넘치는 글의 전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투장면, 흥미로운 설정 등 장점이 많은 글이므로 다양한 방법을 고려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뼈의 발견자 by Mothman

A: 설화를 살짝 비틀어 현실과 잇는 구성이 흥미롭습니다. 이전에 일본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에서 에도시대에 떨어진 핸드폰을 소재로한 에피소드가 연상이 되는군요. 이 이야기의 출발점도 그와 비슷합니다만, 결론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맺어지지요. 흥미진진했던 전반부의 상상력이 사랑이라는 소재에 함몰되어 버린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그리고 뼈 하나를 발견했는데 일약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어버린다던가 하는 부분은, 너무 손쉽게 비약해 버린 것은 아닌지요?


B: 조선시대의 설화 철면장군전과 첨단 갑옷 무기, 거기에 평행우주이론까지 섞어낸 솜씨가맛깔스럽군요. 다만 대학생이 과제를 하려다가 우연히 이무기의 뼈를 발견하게 되고 일약 학계의 주요 인물이 되어 부와 권력을 잡는다는 것은 고고학 전공 대학생들의 판타지일까요. 하지만 방사능 연대 추정이나 그 외의 절차 없이 어떤 나라에서 발견된 뼈 때문에 그가 학계 뿐 아니라 세계 전체의 주요 인물이 된다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지지 않는지요. 오랜만에 돌아온 작가의 글입니다만 전의 글에서 발견되었던 위트나 재미는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단락과 문장 나눔의 어색함이라든가 사건의 비약 같은 단점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전체적으로 짧은 문장이 많은 가운데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이야기를 선택했고 최종적으로는 현장 답사의 와중에 철면장군전이라는 옛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졌음을 강하게 암시하는 증거물인 뼈를 발견하게 되었다’ 같은 긴 문장이 글의 흐름을 방해합니다. 퇴고가 제대로 되지 않은 ‘일어졌음을’ 같은 오타도 눈에 들어오네요. 특히 글의 중반에는 ‘하령이 그녀에게 이야기해준 타임슬립현상’ 이라는 문장이 있습니다만, 하령이라는 인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퇴고하는 가운데 주인공이 타임슬립을 생각하게 되는 근거를 변경한 것 같은데 꼼꼼하게 수정하지 않으신 탓이겠지요.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어떻게 이야기로 만들어 낼 것인지 충분한 숙고가 필요합니다.


장미 행성 by Mothman

A: 여인국이라는 소재는 옛날 중국에서부터 현재까지 흥미로운 소재임이 틀림없습니다. 설화 속의 주인공이 길을 잃어 우연히 여인국으로 갔다면, 이 글의 주인공은 타임슬립 때문에 빠져들게 되지요. 설정은 흥미롭지만, 여인국이라는 소재에서 예측 가능한 이야기 외에 특이한 개성이 없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B: 다른 진화를 통해 여성만이 존재하는 세계로 떨어진 남자의 종말이 현실적이네요. 작가의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단락 구별이 의미없이 잦고 문장 퇴고가 안 된 긴 문장이 흐름을 거스릅니다. 여성만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약하다’라는 선입관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이야기 전개에다 아이디어 자체도 그리 신선하지는 않아서 아쉽습니다.
또한 ‘여성’만 있는 세계라면 그들은 ‘우리는 여성만 존재한다’는 말 대신에 ‘우리는 성별이 없다’ 또는 ‘우리에겐 하나의 성만이 존재한다’고 표현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요. 남성이라는 말을 전혀 낯선 단어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여성이라는 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동물은 암 수가 있지만 인간은 무성(혹은 단성)이다, 라는 표현이 이들 세계에서 더 타당하게 느껴지는군요.


별의 여인 by Mothman

A: 단편이라고 하기엔 설정이 매우 방대합니다. 타임슬립에 집착하는 작가의 성향답게 또 다시 조선시대가 우주시대와 조우합니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조선시대인지, 왜 과거시대가 등장해야만 하는지 타당함을 독자에게 납득시키지 못한 채 이야기는 끝나버리지요. 이색적이긴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설정이 아닌가 의심해 봅니다.


B: 우주 멸망의 순간을 그려낸 소설입니다. TS입자가 병기로 활용된 우주의 침략세력, ‘제국’은 스타워즈의 ‘제국’을 연상시키기도 할 만큼 이야기의 설정이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합니다. 작가 특유의 박진감 있는 서술과 긴박감이 돋보이지만, 지구가 외계인들의 힘싸움에 휘말려 멸망한다는 이야기로 작가가 무엇을 의도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과거인 조선시대, 지구인의 과오도 아닌 외계인들의 세력 다툼에 졸지에 사라져 버리는 지구의 이야기는 쓸쓸하군요. 외계인을 통해 인간의 폭력과 탐욕을 비판하려고 한 것이고 실상 ‘제국’은 지구의 미래라면 자신들의 탐욕으로 자신의 과거를 지워버린 아이러니가 생겨나겠지만, 이 글에선 그렇게 읽히진 않네요. 에르데, 티케-가헤스의 종족 페어차일드 설정은 매력적이긴 하지만 새로운 것은 그들이 촉수를 가지고 있다는 정도일까요. 장편소설로 자신만의 개성을 덧입히거나 혹은 글을 보다 압축성 있게 만들어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화장터 by 목이긴기린그림

A: 몇 년째 계속 대유행인 좀비가 소재입니다. 기 작가의 글의 강점인 담담한 리얼리티는 여전히 잘 살아있지만, 불필요한 부분이 너무 많은 점이 아쉬운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큰 역할을 하지 않는 전반부가 긴 편이지요. 그때그때 흥이 나는 대로 장면 서술이 길어졌다, 짧아졌다하는 느낌이 강합니다. 한 번쯤 전체를 돌아보고 퇴고를 하면 좋겠습니다.


B: 긴장감 있는 문장으로 글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원고지 120매를 넘는 긴 소설에서 긴장감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맙니다. 재미있는 발상에 현실적인 고등학생의 말투가 생생해 글의 재미를 만들고 있지만 작가가 독자에게 설명해야 할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구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책을 빌리는 순간과 같이 글에서 그렇게 비중을 두어야 할 이유가 없는 장면이 쓸데없이 장황하게 묘사되거나, 정작 설명해야 할 부분은 아무런 언급이 없이 지나갑니다. 문장은 불필요하게 늘어진 문장이나 설명투의 긴 서술이 짧은 문장과 불규칙적으로 섞여 흐름을 방해합니다. 단락 3.은 세 번 등장하는데 그 중 앞의 두 단락은 완전히 같군요. 단락의 번호를 순서대로 붙인 거라면 이 글은 11단락으로 끝나야 맞습니다. 이런 큰 실수는 작가가 글을 쓰고 나서 퇴고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겠지요. 특히 긴박하게 시작한 서두에 비해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엔딩은 독자에게 허탈감마저 느끼게 만듭니다. 마지막에 등장한 영필은 뭔가 비밀을 안고 있을 것 같더니 그 비밀마저 허무하게 한 문장으로 마무리되고, 좀비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 같더니 그걸로 글은 마무리 되어 버리네요. 조금 더 글을 읽어보시고 손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괴산 by 정광용

A: 그리 짧지 않은 글을 쫓아가다보면 기이한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결말부분에 나오는 두 단락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 모든 엑기스가 단지 그 두 단락에 들어있지요. 반대로 그 두 단락을 제외한 나머지 이야기는 모두 무의미해져 버리지요. 이것은 이야기의 연결고리가 전반부에 전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말을 암시하는 부분이나 연결고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B: 글 전체에 맞춤법이 어긋난 표기법이 너무 많습니다. [줄 곳(줄곧), 기분을 앉고(기분을 안고), 조금 하게(조그맣게), 깊게 들은(깊게 든), 흉찍해(흉측해), 제(재), 끓어 않은(끌어안은), 멸치 때(멸치 떼), 평지에 닺을(평지에 닿을), 한번 보제(한 번 보재), 비취었다(비치었다), 받아드릴(받아들일), 낙엽을 덥고(낙엽을 덮고), 앞으로 솔리면서(앞으로 쏠리면서), 감긴 체(감긴 채), 어재(어제), 꽃밭에 누어서(꽃밭에 누워서), 해말게, 해말았다(해맑게, 해맑았다), 예뿐(예쁜), 오늘 싼(오늘 산), 빛(빚)] 맞춤법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소리 나는 대로 쓰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맞춤법은 글을 쓸 때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산에서 ‘나’가 그리워했던 령주와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장모와의 사이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글에서 중반까지 갈등을 만들었던 요소는 글의 결말에서는 이유 없이 사라지고, 복선도 암시도 없던 죽은 동생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글의 시작과 끝이 전혀 다른 글인 것 같습니다. ‘나’가 산을 헤매는 동안의 심리에 밀착해서 길게 글을 끌어내었는데 결말은 왜 이렇게 허무하게 내셨는지 아쉽네요. 결말의 내용이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라면 글의 중반 정도에서는 벌써 갈등의 복선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오덕후 김박사의 위업 by OMB-J2

A: 오타쿠 문화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글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사실 제가 그랬습니다만(웃음). 오타쿠 문화를 잘 아는 분들은 어떻게 읽을지 모르겠으나, 그쪽 방면으로 무지한 입장에서는 아이돌을 위한 어이없는 희망을 담은 자기만족적 상상이 핵심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끝까지 즐겁게 즐기고 있는 작가의 기분이 전해져서 다행입니다.


B: 오타쿠 문화에 대해 해박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오타쿠 문화의 지식을 바탕으로 속도감있게 이야기를 끌어 나가시는 힘이 상당하네요. 다만 작가가 김박사를 통해 오타쿠의 희화화를 의도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글투가 너무 무겁지 않은지요. 일본에 열광하는 일부 오타쿠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고 이해할 층은 그 오타쿠들이라는 것이 아이러니네요. 또한 이웃 나라의 비극을 이런 식으로 그려 내야 했었는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일본에서도 한류에 열광하는 이들을 희화화 하거나 비판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만, 그런 기사를 보면서 우리가 씁쓸한 느낌을 받는 것처럼, 한 나라의 국가적 비극이고 역사상 기록에 남을 대 참사를 꼭 이렇게 다루어야 했는지 개인적으로는 안타깝네요. 지진 사고 이후에 인터넷상에서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사고 피해자들이나 일본에 대해 조롱하는 글을 올려 일본에서 비판이 일어났던 것을 생각해 봅니다. 누구든 힘들 때 들은 날선 한마디가 더욱 아픈 법이고, 힘들 때 뻗은 손은 절대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유물 by 앤디리

A: 발상이 재미있고, 얼핏 보기에는 설정도 거대해 보이지만 사실은 한 아가씨의 굉장한 실수담인 것 같군요. 설정에서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150년 전, 그러니까 2000년의 유물을 유물이라 부를 수 있느냐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2000년은 모든 사료가 동영상, 사진 등으로 남겨져 있을 텐데, 기록이 완벽히 또한 생생히 남아있는 시절의 물건이 그만큼 가치가 있을까 고개가 살짝 갸웃거려집니다.


B: 현재를 기준으로 150년 전의 유물이라고 하면 1860년대, 19세기 후반의 물건입니다. 그 때 널리 쓰였던 물건이라고 하면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이라면 대개 알아볼 수 있지요. 그런데 고고학과를 입학했던 사람이 150년 전에 크게 유행한 장난감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네요. 게다가 ‘인디아나 존스’의 음악이라든가 ‘수능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는 수험생처럼’ 같은 말 때문에 이야기의 결말 부분까지 이 일이 150년 뒤의 이야기라는 것을 독자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작가분이 이 일이 사실은 150년 후의 일이라는 것을 반전으로 준비하신 것인지, 아니면 지금의 장난감을 미래에 누군가는 유물로 오해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반전으로 준비하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유려한 문장으로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이지만, 만약 후자를 반전으로 준비하셨다면 시대상황이 보다 미래답게 그려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TV프로그램명도, 영화 시리즈명도, ‘수능’도 여전히 있는 미래가 2150년이라니요.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아쉽습니다.


거미에게 나비를 by 모베

A: 일인칭으로 엄청난 사건들을 담담히 서술해 나가는 주인공의 시점이 흥미로운 글입니다. 안정적인 문장과 끝까지 유지되는 분위기가 강점이지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모습과 희생, 배신 그리고 애증이 교차하는 사랑과 인생을 정치판과 연계해서 잘 풀어낸 것 같습니다. 다만, 화자 외의 중요한 인물들이 선명하게 부각되지 못하고 흐릿한 점은 아쉽습니다. 특히 화자가 그토록 집착하는 미콜라이가 밋밋하고 평면적인 조연처럼 느껴지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차분하고 명확한 반전이 그런 아쉬움을 다소나마 날려버리는군요.


B: 서두의 문장부터 강렬해, 보통 글이 아니구나 싶더니 마지막까지 따옴표 하나 없이 글을 끌어가는 문장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글의 시작은 보좌관의 시점이지만 곧 ‘율리아’가 보좌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바뀝니다. 보좌관의 시점도 늘어지지 않고 탄력성 있는 문장의 묘사가 멋지더니, 악녀 율리아가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강렬함을 잃지 않는군요.
‘그러니까 내가 해줄게’ 라는 선언적 문장이 반복되면서 독자의 환기를 일깨우고, 그 전 장면의 갈등상황을 주인공 율리아가 해결하는 장면으로 연결하는 기법이 멋집니다. 문장의 반복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글의 국면 전환에 사용하는 효과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겠네요.
나비를 이해한 거미, 거미를 이해하고 거미의 방식을 택한 나비의 비유를 들어 혼란기의 정치쇼를 박진감있게 그려낸 이 글은 율리아의 시점이 멋내기나 장식 없이 사실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가능하겠지요. 글 안에서 한 시대의 전환을 마무리하는 방법이 결코 정의와 이상에 의한 방법이 아닌데도 독자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은, 율리아가 손을 더럽히면서도 이루고자 한 꿈이 본인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니콜라이에 대한 깊은 애정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일은 가리지 않고, 스스로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가면서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생동한 율리아의 행동에 숭고함까지 느끼게 되네요.
다만 니콜라이가, 비록 율리아의 시점으로밖에 그려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한 시대의 변화의 주역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을 만한 인물로 보기에는 다소 밋밋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니콜라이의 다양한 면모를 그려내지 못한 것이 이 글의 시점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액자로서 사용한 보좌관의 입을 빌어 니콜라이의 다른 면을 그려 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습니다. 강렬한 엔딩이 여운을 주면서 니콜라이의 또 다른 일면을 그려낸 것이 아쉬움을 조금 덜어 주네요.


101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euseoha @ gmail. com 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 (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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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조심 11.10.29 03:10 댓글 수정 삭제
    역시 치밀하지 못했던 부분은 여지없이 까발려지는군요. 뼈가 잘려나가는 듯한 비평입니다. 두 분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저는 한층 더 자라나기 위해 뼈에 철심 좀 박고 돌아오겠습니다. 휘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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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조심 11.10.29 03:11 댓글 수정 삭제
    ~착! 의사선생님 빨리 다리에 철심 좀 넣어주세요. 요즘 180 안되면 소설가 못한단 말이에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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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 11.10.29 11:22 댓글 수정 삭제
    너무너무 감사한 평입니다. 쫓겨나지 않고 여기에 글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제 글도 하나의 평가대상이 될 수 있다니 ㅠ 그리고 candy 님이 제게 해주신 (꽤)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씀이 저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족한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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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디리 11.10.29 23:46 댓글 수정 삭제
    평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더욱 매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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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광용 11.10.31 20:22 댓글 수정 삭제
    평 감사합니다. 원래 마지막 두단락은 없던 부분인데 넣은 것이 잘못이었군요. 무리한 설정이었습니다. 맞춤법에 신경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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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MB-J2 11.11.01 11:29 댓글 수정 삭제
    평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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