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이번 독자우수단편 선정을 맡은 앤윈, pena입니다. 2014년 6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 독자단편란에 올라온 단편을 대상으로 선정을 진행하였습니다.이번에는 유난히 분량과 이야기의 전개 면에서 아쉬운 작품이 많았습니다. 소설은 생각한 것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서스펜스와 재미를 주며 끝까지 읽게 만드는 예술형식입니다. 또한 현실에 가까운 세계를 독자가 상상력으로 구축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만 성공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아이디어를 소설로서 충분히 펼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구태의연하지만 기승전결 등의 구조와 플롯입니다. 실험적인 소설 전에 글로서 독자에게 다른 현실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길 바랍니다.


이번 달에는 수상작이 없습니다.




일시적이며 충동적인 함구증 - 소군


A : 비행기에서 잠시 스튜어디스가 착각한 것을 계기로 잠시 다른 사람처럼 되어본 경험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잔잔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소재이며 필력이었습니다. 다만 소재와 전개 모두 단상에 가깝고, 장애가 생김으로 인해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찰나의 순간이 주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한 듯합니다.


B : 소설에서 무언가의 세부사항을 묘사한다는 것은 그 세부사항이 이후의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앤지라는 스튜어디스의 삶에 대해 묘사한 이유를 전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앤지가 ‘적당히 매력적’이라느니, ‘수작을 걸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등으로 주인공의 심리가 서술되는 이유도 없네요. 주인공의 ‘언어장애가 있는 멋진 친구’라는 짐작이 착각인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고, 그 경험이 주인공의 삶에 있어서 어떻게 남았다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밤바다 ; 생각의 차이 - 휘


A : 뺑소니와 시체 은닉으로 괴로워하던 연인이 전화를 걸고, ‘나’는 말리러 나가지만 어느 순간 연인과 내가 그때 공범이었고 나는 그 이후로 어둠에 눈을 떴다는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독자에게 처음에 혼동을 주기 위해서 1인칭으로 쓸 이유가 분명한 글이었지만, 진짜 이야기를 알게 된 다음에도 모호할 정도로 앞에서 단서를 숨긴 느낌입니다. 독자에게 혼동을 주는 것은 서스펜스를 가중시켜서 재미를 주지만, 항상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글은 독자 입장에서는 혼동한다고 해서 재미가 가중되지 않는 듯합니다. 섬뜩한 한 순간의 마무리를 위해서는 평범하고 견실한 앞부분이 필요합니다. 이 작품이 필요한 부분만, 또는 작가가 편한 부분만 쓴 건 아닐지 되돌아봐주세요.


B : 시체를 은닉하고 나서 ‘흑화’한 주인공이 자신의 연인을 죽이면서 본격적인 살인의 세계로 첫 발을 디디는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같은 심사위원끼리도 읽은 서사가 다를 정도면 서사의 라인이 너무 뭉뚱그려져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을 것 같네요.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이 매력적입니다. 독자에게 조금만 더 친절하면 좋을 것 같네요.



어느 가족 이야기 - 케이민


A : 가족이 모두 죽고 단 하나의 생존자이자 목격자로 자폐아이며 학대아동이었던 아이와 경찰이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얼개는 모두 마련되어 있지만, 전개를 다르게 하거나 이야기를 확장시켰으면 좋았을 법한 글이었습니다. 이대로는 어느 드라마의 한 장면 정도로만 보입니다. 가족이 죽은 경위가 중요했다면 샌디의 이야기가 시작될 즈음에 디테일을 추가해서 과거를 그대로 보여주었어야 했고, 그게 아니라면 이 이야기가 반전이나 더 큰 이야기의 도입부여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미스테리나 스릴러의 경우 전통이 유구하고 여러 매체를 통해 많은 이야기가 이미 선보여졌기 때문에 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B : 전형적인 권선징악적 이야기입니다. 샌디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는 과정도 ‘전형성의 즐거움’이 있네요. 이 에피소드를 도입부로 삼아서 샌디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 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결론을 맺기는 매우 허전하다는 이야기예요.) 참, 제목도 많이 아쉽습니다. 소설에 대해서 그야말로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는 제목이군요.



봉화 - 칭소마라


A : 괴물이 오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봉화를 지키는 여인, 괴물에게 먹힌 여인을 죽여야 하는 소년, 그리고 소년의 선택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분위기상 동양적인 이름을 써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분위기에서 오히려 서양식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세상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한다는 것은 상당히 보편적인 테마입니다. 보편적인 테마를 얼마나 신선한 설정과 개연성 있는 이야기, 공감 가는 인물 속에 녹여내는가가 소설의 승부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의 경우에는 분량에 비해 설정이 많고, 이입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아 보입니다. 또한 1인칭으로 진행이 되는데 작가는 독자가 어떤 정보를 어디서 얻어야 할지를 계산해서 1인칭이라 해도 여기저기에서 정보를 주어야 하는데, 너무나 충실하게 주인공이 보는 시각 그대로의 1인칭이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좀 닭살이 돋더라도 더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처리하는 게 나았을 듯합니다. 이런 점들을 손보면 좀 더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선명한 재미를 줄 수 있는 작품이 나올 거라 기대합니다.


B : 동양적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 봉화를 지키는 처녀의 운명적 처연함, 소년의 사랑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다만 배경설명이 너무 일거에 처리된 느낌이 있습니다. 귀족이 처음부터 소년에게 무엇을 바랐던 것인지, 소년이 처녀를 사랑하게 된 과정과 뒷 사정 등, 좀 더 상세하게 설명되어야 했을 부분들이 중간에 내던지듯이 표현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분량을 확보해서 그 부분들을 좀 더 섬세하게 써 주면 좋겠습니다. ‘누님’의 캐릭터는 참 좋네요. 앞에서 말한 단점에도 누님의 캐릭터가 아주 단단하고 아름답게 서 있어서 서사적 균형이 잡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듭니다



어둠 속으로 - 깨진유리잔


A : 꺼진 가로등을 고치면서, 그리고 전철을 기다리면서 느낀 어둠에 한 남자의 고단한 인생을 투영한 작품입니다. 짧은 분량과 적은 장면으로 효율적인 감정이입을 불러온 필력이 좋습니다. 다만 세 파트로 나누기 위해서인지 문단을 거의 사용하지 않아 실제 글 내용 이상으로 글이 난잡하고 초보적으로 보이는 단점이 있습니다. 또한 어둠 속으로라는 제목과 달리 마무리가 단상에 그쳐 아쉽습니다. 시대의 표상이나 단상을 글로서 표현하고자 했다면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를 아름답고 참신하게 다듬는 쪽으로 갔어야 한다고 봅니다. 장르적인 사족을 붙이자면, 어둠이 나왔다면 무언가 실제로 사건사고가 터지길 바라는 장르독자의 기대가 있었는데 나오지 않아 약간 서운했습니다.


B : 아내가 주인공에게 왜 그렇게 커다란 의미였던 것일까요. 주인공은 아내가 자신을 맥락없이 떠난 것으로 삶의 가장 근원적인 우울까지 느끼고 있는 모양인데, 아내가 ‘왜 그랬는지’는 제대로 등장하지도 않으며 주인공이 무엇을 겪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우울에 공감하기는 꽤 어렵습니다. 좀 더 개연을 만들어주면 좋겠군요. 심지어 ‘상징’이라는 건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주인공의 손떨림이 ‘무슨’ 상징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굳이 이런 종류의 줄글로 다룰만한 사건이라는 게 이 소설 속에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느 새벽에 - 은하


A : 제목 그대로, 혼자서 있는 방 안에 벌레가 들어왔던 어느 새벽의 일을 그린 작품입니다. 혼자 있는 새벽에는 작은 일도 크게 부풀려지고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기는 합니다만, 분위기만으로 끝나서 아쉽습니다. 문장을 여러 개 붙여서 문단을 좀 더 길게 쓰며 표현을 풍부하게 하는 연습을 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 글이 실제 있었던 일을 쓴 것이라면, 여기에서 좀 더 이야기를 풍성하게 할 수 있는 확장점을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때로 현실이 소설보다, 드라마보다 더 비현실적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픽션으로서 독자에게 재미를 주거나 반전을 선사할 만한 요소를 넣고 그 이야기가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도록 표현을 다듬고 구조를 짜야만 그 현실이 좋은 픽션으로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B : 그래서 이 소설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니, 이 소설은 왜 쓰여진 것입니까? 당연하게도 소설이 무슨 교훈을 반드시 제공해야 한다던가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중요한 서사의 골자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소설 속에 세계에 대해 어떤 통찰이 있을 수 있죠? 그리마에 대한 혐오? 소설이 될 만한 소재를 찾아내는 것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야기가 서사적 구조를 가질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시면 좋겠습니다.


헬로, 월드 - 룽게


A : 지구 멸망의 시기에 마지막 무기로서 태어난 인공지능이 오랜 세월을 혼자 살아남아 새로운 비전과 세계에 도달하는 이야기입니다. 인공지능이 인공을 넘어 하나의 새로운 존재로서 확정되는 과정, 알고 있던 세계의 멸망과 새로운 시작 등 SF에서 자주 다루지만 핵심적인 설정과 주제를 차분히 풀어냈습니다. 다만 초점을 더 명확히 해서 서술했다면 좋았을 듯합니다. 현재는 인공지능의 1인칭으로 풀어냈으면서도 순간순간 상황묘사를 하는데, 아예 인공지능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를 하거나, 조금 전지적 시점에서 기승전결 분배를 명확히 해서 흥미롭게 끌고 나가거나 한쪽을 아예 편중되게 택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헬로 월드라는 대사가 제목이며 인공지능이 태어났을 때 처음 들은 말이기 때문에 수미 쌍관으로 같은 대사가 나올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했던 점이 아주 조금 아쉬웠습니다.


B : SF소설에서 자주 다루는 주제입니다. 인공지능의 ‘자아 확립’, 인공지능으로서의 ‘또 다른 세계’. 베로니카라는 인공적 존재가 ‘나’로서 그녀의 세계가 되는 과정은 아름다우나 너무…… 짧네요. 그녀에게 좀 더 자기 자신에 대해 고찰해 보고, 세계의 멸망에 대해 지켜볼 시간을 줘도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분량 말이에요. 이 분량에서 한 존재가 확립되는 데에는 첫째, 너무 많이 다루어진 주제라 이 이야기만의 개별적 서사가 부족합니다. 둘째, 개별적 서사가 부족하다면 개별적이고 특수한 에피소드들로 이 소설만의 개성을 만들어주어야 할텐데 그러기에는 분량이 너무 적습니다. 늘려야 할 것 같아요.


추락 - 지음


A : 폐쇄적인 한 공간 – 엘리베이터가 떨어지는 와중에 남녀 한쌍이 격정을 경험하고 추락과 재상승, 그리고 폭발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건물에 애초에 없었던 13층을 눌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설명이 있으나 근본적으로 관념적인 이야기로 보입니다. 이 남녀는 서로에 대해 평소에도 인지했던 것으로 나오나 그것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절체절명의 마지막 순간에 같은 곳에 있었으며 추락의 와중에 섞임으로써 보편을 대표하는 한 쌍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추락과 상승, 폭발로 이어지는 직하강의 이미지와 남녀 사이에 오간 강렬한 감정에 대한 묘사 등이 힘있어 빨려들 듯 읽었습니다만, 그 이상의 감상을 말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B : 이미지 중심으로 이루어진 시 같은 작품이네요. 1층과 3층을 동시에 눌러서 13층으로 가게 된다는 설정은 차원을 넘나드는 판타지 같기도 합니다. 다만 ‘사내연애가 금지되어 있었다’에서부터 ‘예수와 마리아’ ‘아담과 이브’ 까지 가는 이미지의 향연이 너무 극적이어서 따라가는 게 버겁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뒀다고 고려해보려고도 했지만, 역시나 이 상황에서 이들이 보이는 독특한 사고양태를 따라가는 건 쉽지가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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