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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독자우수단편선정단 앤윈, pena입니다.

이번달에는 발랄하고 참신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였으나 읽는 이의 마음을 같이 움직이게 하는 이야기까지 다듬는 데에 모자람이 있었던 작품이 보였습니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참신한 발상 하나를 듣고자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재도 독자가 따라가며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펼쳐주지 않는다면 가공 전의 원석보다 뿌연 존재가 되고 맙니다. 좋은 소재는 시작일 뿐이라는 점을 생각하며 더 멋진 글 써주시길 기원합니다.



이번달에는 혜음 님의 {너 자신을 알라}와 엄길윤 님의 {배설}을 가작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장자의 일기 - 이령

A: 양생의 비법(!)을 터득하여 현재까지 살아남은 장자가 역사를 관통하면서 현재까지 살아남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과거의 성인들을 현실에 다시 재위치시키는 이야기들은 그 나름대로 상당히 매력이 있습니다. 허나 이 소설은 그 매력을 찾기에는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지나치게 많은 듯 합니다. 장자 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철학자들이 총출동하고, 그 철학들에 대해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분량에 비해 소설 내부의 이야기는 거의 구성되어있지 않다시피 합니다. 소설은 칼럼이 아니라 이야기입니다. 어느 쪽으로 이야기를 정할지 분명히 했으면 합니다.

B: 장자란 이름은 이제 너무나 비유나 메타포나 여러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실제 장자가 쓴 일기라는 점을 알고서, 또한 동방박사라든가 예수에 대한 일화를 보고서 참으로 발랄한 상상력이라고 무릎을 쳤습니다. 다만 일기라는 방식을 차용한 소설의 단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일상적인 글이라기엔 설명이 많고,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 느슨하고 뜬금없으며 몰입력이 떨어지는 것이죠. 이 소설에 꼭 일기라는 방식이 필요했을까, 필요했다면 차라리 더 간결하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또한 장자의 고뇌까지 보여준 것은 서론이고 정작 중요한 인물이 등장만 하고 이야기가 끝난 느낌이라는 점이 아쉽습니다. 장자가 고뇌를 품은 채로 오랫동안 살아남아 왔으면서 새로운 이정표가 될 만한 인물을 만났다면, 그 인물의 이야기가 주되고 장자는 화자로 물러나거나, 그 인물로 인해 장자가 변하는 모습이 나오거나 하리라고 기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전혀 나오지 않았지요. 이것이 작가 의도인지 아니면 분량이나 다른 문제로 맺으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읽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런 기대를 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독자의 기대는 기대보다 더한 것으로 배신해야지, 없는 것으로 배신하면 안 됩니다. 


좀비탑 - 매그레반장

A: 좀비를 혐오해 왔던 ‘현수’의 내부에 있던 좀비성, 그리고 좀비와 인간의 중간 단계에 있는 ‘마리아’. 두 주인공이 보여주는 상징성은 매우 뚜렷합니다. 좀비를 혐오했던 그 자신이 좀비였을 수 있고, 우리가 혐오하는 대상은 바로 우리 내부에 있을지도 모르죠. 흥미로운 주제의식을 적절한 테마로 풀어냈음에도 소설이 그다지 재미가 없다는 점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이 이야기를 잘 끌어나가기 위해선 현수의 내면이 매우 섬세하고도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묘사되어야 할텐데, 현수의 내면이 그려지는 방식은 매우 표피적이고 제대로 설명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등장에서 현수는 당연히 충격을 받았겠지만 그게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는 않네요.

B: 좀비이야기는 좀비가 등장한다는 것 외에 포커스가 글마다 다를 수 있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좀비가 되는 원인이나 그들의 존재를 통해 그려내고자 하는 인간성 고찰 등, 어느 면으로 시작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좀비탑}은 노역에 이용당하고 있는 좀비들을 풀어주기 위해 좀비탑으로 가는 반좀비 마리아, 그 노역을 10년간 조종해왔던 현수를 축으로, 인간과 좀비의 경계가 아주 얇은 것일 수 있음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전개방식은 미스터리나 호러 장편소설, 그것도 번역된 장편소설의 방식을 따른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인물의 주위를 묘사하고, 이 인물이 가고 있는 곳에 대한 정보와 인물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설명부터 늘어놓은 후 또다른 인물에게로 온전히 포커스를 옮기는 이 방식은 인물과 세계에 대한 몰입이 중요한 장편소설에서도 너무 느긋해 보입니다. 기본적인 인물과 구도, 주제가 결정된 이후에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더 긴박하고 읽는 사람에게 재미있도록 구성할지 여러 방면에서 고민해보셨으면 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 혜음

A: ‘디자인 베이비’인 한 인간이 자신이 매우 특이한 디자인 베이비로서, 타자를 배제(혹은 복수, 살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숨기고 면접을 보러 가는 이야기입니다. 저 모든 정황이 여러 가지 철학적 탐구 끝에 마지막에 드러난다는 점이 정말 매력적입니다. 진지하게 작가가 유전과학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탐구한 것이 느껴지는 소설입니다. 마지막에 그 고민에서 끝내 벗어나서 ‘올바른’ 대답을 제시하지 못한 주인공이 세계에서 배제당하는 대신에 이 세계에 받아들여진다는 결말도 매우 좋네요. 그 결말이 마지막까지도 윤리적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다는 것도요.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주인공이 어떻게 태어났고 그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지금껏 어떤 고민을 했는지가 상세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좀 더 복선이 많이 깔려있었더라면 마지막의 경이감이 더 컸을 것 같아요. 여하간에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었습니다.

B: 우주 건너편에 있는 행성에 가는 면접을 통해 진행되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새로운 인간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시대의 이야기인 동시에, 태초부터 되풀이되어온 복수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참신한과 고전미를 동시에 지닌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전반적으로 너무 일방적인 전개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몇 군데에서 주인공이 숨기고 있는 점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주기는 하지만 독자는 절대로 알아낼 수가 없는 부분에서 일어났던 일을 중심으로 대화가 진행되니까요. 이 면접관과 면접당사자는 숨기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나 거대한데 단 한 번의 면접만을 가지고 그 모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연극 각본 같은 느낌도 드는데요, 단서와 복선을 좀 더 치밀하게 숨겨두거나, 이 면접 하나로 국한된 전개방식을 버리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독자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빈칸 - 유광석

A: 엔진이 멈춰버린 우주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아주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이 상황을 절망적이지 않게 그려내는 작가의 센스가 뛰어납니다. 상황 자체를 끊임없이 재미있게 끌고 나가 보려는 노력이 돋보이네요. 화자의 말투 - 아마 작가 자신의 독특한 문장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가 상당히 만연한 것이 매우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건 서사의 진행에 집중하기 어렵게 만드는 부분도 있네요. 이런 문장이 이 소설의 매력이면서도 단점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좀 더 직관적으로 이런 문장을 사용하는 연습을 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단, 결말이 제대로 지어지지 않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아주 중요한 것처럼 언급되는 ‘신념’이라는 것에 대해서 앞에서 너무 보여주지 않았어요.

B: 치명적인 엔진 결함과 연료 부족으로 우주에서 조난된 함선 안에서 흘러간 며칠을 그린 작품입니다. 잔잔하고 과하지 않도록 유머를 섞어가며 풀어나간 필력이 돋보입니다. 단편이 열린 결말로 끝난다는 것은 작가가 결론을 포기하거나 얼버무리는 치명적인 회피와 실패일 때가 많습니다만, 그래도 이 작품은 끝에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보다는 이들이 그동안에 어떻게 보냈는가가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 만큼은 이야기를 구현했다고 봅니다. 다만 이야기 속에 묘사된 상황이 이토록 담담하게 지나갈 법한 상황인가가 의심이 듭니다. 외곬수처럼 미친 한 명 빼고는 참으로 정상적인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놀랍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는 뜻입니다. 화자의 어조가 담담한 것과 상황 자체가 담담하다고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점을 생각해봐주시기 바랍니다


마법사가 우주비행사를 만드는 법 - Leia-Heron

A: 마법사가 달로 사람을 보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마법을 사용하고, 결국 그 인간이 체제의 희생자로 드러나면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 가지 전형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소재들이 포진해있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이 재미가 없는 이유는 설정이 서사를 잡아먹은 전형적인 사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주비행사로 만들기 위해서 어떤 마법을 써야 하는지 작가는 아주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굳이 그 고민을 죄다 소설에 쏟아부어야 할 이유는 없어요. 오히려 이 소설은 그렇게 보내진 주인공이 어떻게 삶을 살아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B: 이 세상의 과학상식을 마법만이 존재하는 다른 세상의 방식으로 고스란히 치환한 상상력이 발랄하고 귀엽습니다. 이러한 발랄함은 전제만이 아니라 전개하면서 일어나는 각종 일화에서도 나타납니다. 한데 이러한 상상력과 아이디어 외에 이 작품에 남는 게 없다는 점이 독립적인 단편으로서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의 경이를 보여주거나, 다른 세상이기에 더 도드라져 보이는 인간의 공통적인 지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이 모든 상상력의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한 일화를 다룬 역사책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님아 그 우주를 건너지 마오 - 알렉산더

A: 분신에 대한 단상이 재미있고, 그 단상을 진행해가는 과정이 깔끔합니다. 별다른 서사는 없지만 주인공의 사고에 독자가 함께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네요. 결론을 내기가 어려운 이야기다보니 이렇게 되었겠으나, 결론을 너무 포기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B: 공무도하가를 패러디한 제목과 순간이동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어우러진 작품입니다. 순간이동 기계를 통해 재구성된 내가 직전의 나와 같은 나인가, 하는 고민은 내가 발을 디딘 강물이 방금 전의 그 강물인가 아닌가를 고민하는 철학적 원제와도 비슷합니다만, 소설로 만들고자 하였다면 조금 더 아이디어를 발전시켰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바뀌었다면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일 거고, 바뀌었는데 바뀌지 않은 줄 알았다고 한다면 바뀐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 결말이 될 것입니다만, 이 작품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끝났군요. 그렇다고 해서 가벼운 엽편으로 즐기기에도 참신함이나 즐거움이 모자랍니다. 하나의 아이디어를 이야기로 빚어내기 위해 길을 확실히 정하고 빼거나 더하시길 바랍니다. 


배설 - 엄길윤

A: 배설의 쾌감은 정말 크죠. 모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아이가 점점 더 배설에 대한 쾌감을 추구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배설해 버리는 에스컬레이트적 구성이 훌륭한 소설입니다. 이런 종류의 에스컬레이트는 뒤에 가서 깜짝 놀라게 하고, 거기에서 오는 소름끼침이 가장 큰 매력이어야 할 것 같은데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전기톱을 사는 부분부터 이후의 전개가 너무 눈에 보인다는 점이네요. 친절하면서도 복선을 잘 감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B: 화장실에서 애를 낳는 일은 예부터 흔했고, 미혼모가 낳아놓고 도망간다는 것 또한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나쁜 뉴스 중 하나였죠. 결핍을 품은 인물이 자신의 탄생사와 배설을 연결시켜서 중독처럼 그것을 추구하다 못해 극한으로 치닫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더러우면서도 가장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배설이란 소재가 선정적이지만 그에 걸맞는 전개와 필력으로 소화했습니다. 다만 쳐낸 곁가지들로 인해 이 과격한 인물사에 입체감이 없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인물은 무력하게 끌려가다가 충동적으로 저지른 것일지 모르지만, 글은 너무나 계획적이고 매끄럽게 일직선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모순이 발생한 것이죠. 모자라게 형상화했다기보다는 소재 자체가 가진 한계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몰입해서 잘 읽었습니다.

독자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선정되신 분께는 거울에서 책을 보내드립니다.
가작에 선정되신 혜음 님과 엄길윤 님께서는 pena12 @ gmail.com 으로 택배를 받으실 수 있는 주소와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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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음 15.04.01 15:06 댓글

    감사합니다. 이제보니 마지막에 주인공의 성을 잘못 썼었네요 부끄럽습니다.. 소중한 의견 모두 감사드려요. 여러가지로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힘이 되었습니다.

  • No Profile
    유광석 15.04.01 18:52 댓글

    고견 감사드립니다. 빈칸은 연작시리즈로 나갈 개연이 있습니다. 추가로 작업하게 될 때는 심사관들께서 지적해주신 점들을 한번 되짚어 볼까 합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


  • No Profile
    엄길윤 15.04.02 03:12 댓글

    앤윈님, pena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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