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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 코믹스와 나란히 미국 슈퍼 히어로 물 산업의 양대 거두 자리를 유지해 온 마블 코믹스가 라이벌인 DC 코믹스와 구별되는 특이점은, 슈퍼 히어로와 슈퍼 빌런들을 작품 속에서 다루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DC 코믹스가 슈퍼맨으로 대표되는 초월적인 영웅들의 심리와 그러한 영웅이 느낄 법한 고뇌(평범한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거대한 힘과 상이한 사고방식을 가진, 일종의 신에 가까운 존재로서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보다 좋게 바꿀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를 강조하는 것에 비해 마블 코믹스의 영웅들은 보다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결함과 단점들이 더 부각되며,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절대다수의 일반인들로 구성되는 사회 속에 속해 있는 존재로서 어떻게 하면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온당한 자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의식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마블 코믹스의 그러한 스타일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강조되는 일련의 작품군이 X-멘 시리즈다.

 

마블 코믹스의 세계관 속에는 X-멘 시리즈 속의 뮤턴트들 외에도 이미 온갖 종류의 초인과 외계인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 세계 속의 대중들로부터 X-멘들을 비롯한 뮤턴트들은 유달리 따돌림 당한다. 왜냐하면, 초인 병사 혈청으로 힘을 얻은 캡틴 아메리카나 신적인 힘과 초과학을 보유한 외계인인 토르, 유전자 조작이 된 거미에게 물려 힘을 얻은 스파이더맨 같은 경우와는 달리 뮤턴트들은 근본적으로는 인간이지만 현생 인류로부터 한 단계 더 진화해 있는 다음 세대의 인류이기 때문이다. 뮤턴트들이 갖고 있는 온갖 종류의 초능력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신인류임을 나타내는 상징 내지 도구에 불과하다. 만물의 영장이며 생태계 피라미드의 최정점이라는 기존의 위치를 이 신인류들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현생 인류의 유전자 정보 깊은 곳에 존재하는 종족적 단위의 위기감과 생존본능이 무의식 수준에서 뮤턴트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자극한다. 그러한 대중들의 차별과 편견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회의 일원으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할 것인가에 관한 주제의식이 X-멘 시리즈의 핵심이다. 그리고 자비에르 교수를 필두로 하는, 기존 인류와의 평화적인 공존을 주장하는 온건파인 X-멘들과 매그니토를 필두로 하는, 뮤턴트에 의한 세계 지배를 주장하는 과격파인 브라더후드 오브 뮤턴츠의 대립 구도는 이야기 내에서 그를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맡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시작은 처참하다. 뮤턴트에 대한 인류의 적개심은 극한에 이르러 결국 세계 전체가 뮤턴트 및 그에 호의적인 인간들을 포함하는 친 뮤턴트 파와 반 뮤턴트 파로 갈려 전쟁이 벌어졌고, 반 뮤턴트 파가 만들어낸 뮤턴트 색출 및 처단 전문 전투로봇인 센티넬의 대량 생산으로 인해 반 뮤턴트 파가 전쟁의 승기를 잡았으며 이런 절망적인 상황 하에서 자비에르 교수와 매그니토 역시도 과거의 대립은 잊고 서로 협력하지만 이미 전황은 완전히 기울어 있다. 이 상황은 한 가지 인상적인 시사점이 있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엑스멘1편과 2편에서 묘사된, 기존 인류의 뮤턴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분명히 도를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그에 반감을 품은 매그니토의 브라더후드 오브 뮤턴츠 역시 도가 지나친 암살 및 테러리즘으로 인류에게 반격을 가하고, 자비에르 교수의 X-멘들이 그를 수습함으로써 어떻게든 제 3의 길을 모색하려고 하고, 다시 브라더후드 오브 뮤턴츠의 활동으로 위협을 느낀 인류가 뮤턴트에 대한 사회적 탄압과 린치를 강화하는 과정을 드러낸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뮤턴트들에 대한 연민을 일으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뮤턴트들과 그를 옹호하는 인간들은 살해되거나 생체실험당하거나 아우슈비츠 또는 굴라그를 닮은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가축처럼 관리되게 되는 절망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이를 바꾸기 위해 자비에르 교수와 매그니토는 시간여행을 통해 울버린을 과거로 파견해, 센티넬 제작 및 본격적인 뮤턴트 탄압의 효시가 되는 미스틱의 트라스크 교수 암살을 저지하고자 한다.

 

이 영화가 특히 높게 평가될 만한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현실의 나쁜 상황을 바꾸기 위해, 그 상황의 시발점이 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해 역사를 고친다는 아이디어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터미네이터를 비롯해 이미 수많은 영화에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흐름이 일률적이고 직선적이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여서 자신이 태어나지 않게 만들면 지금존재하는 나는 있을 수 없게 된다는 할아버지의 모순이나 과거의 가난한 자신에게 돈을 줘서 부자로 만들면 지금의 내가 갖고 있는 돈은 내가 번 게 아니라 저절로 생긴 것이 된다는 공짜의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울버린을 매개로 과거의 찰스가 현재의 자비에르 교수를 만나고, 미래의 자신이 해준 조언을 통해 용기를 얻은 찰스의 활약으로 역사가 바뀌어 뮤턴트는 멸망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전통적인 해피엔딩을 제시하는 것과 동시에 이 시간여행이 육체는 현재에 남은 채 정신만이 과거로 이동해 과거의 자신 육체에 덧씌워진다는 설정을 통해 저러한 모순을 비껴갔다. , 이 세계의 현실은 최종적으로 뮤턴트와 친 뮤턴트 파가 패배해 멸망하는 절망적인 운명에서 벗어났고 원래는 죽었던 사람들도 모두 살아 돌아온 평화로운 미래라는 현실 A', ’미래에서 온 그의 정신이 이용하던 울버린의 육체가 남겨져 있는 과거라는 현실 B‘의 둘로 나뉜 것이다. 전통적인 시간여행 장르의 문법에 더해, 이론상으로는 그와 공존하기 어려운 평행세계라는 설정을 아주 절묘하게 병치시키는 이러한 독특한 구성이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영화 후반부, 과거의 에릭 렌셔가 백악관을 파괴하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위협하는 장면과 미래의 매그니토가 자비에르 교수의 손을 잡으며 그 동안 우리가 싸워 온 시간들이 아깝다고 탄식하는 장면이 이어지는 연출에서 이것은 절정에 달하며 이후 결말에 이르기까지 관객에게 슬픔과 안타까움, 희망과 긍정이 교차하는 온갖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이 영화는 매우 잘 만든 작품이다.

 

PS=센티넬의 제작자인 트라스크 박사가 난쟁이로 설정된 것에서 크게 감탄했다. 작중에서 트라스크 박사는 뮤턴트를 증오스러운 적이라기보다는 역사 상 한 번도 이뤄진 적 없는 모든 인류의 단결을 이끌어 내기 위한 희생양에 가깝게 여기는 걸로 묘사되는데(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phero&no=49226&page=9&search_pos=&s_type=search_all&s_keyword=%EC%97%91%EC%8A%A4%EB%A7%A8 ), 이것은 뮤턴트라는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로부터 온갖 차별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을 그 자신의 신체조건과 맞물려 관객으로 하여금 매우 독특한 페이소스를 느끼게끔 한다. 울버린을 과거로 보내는 캐릭터인, 키티 프라이드 배역의 엘렌 페이지가 실제로 레즈비언이라는 것도 X-멘 시리즈의 상징성과 잘 맞물린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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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 16.01.01 23:49 댓글

    실제로 감독인 브라이언 싱어도 게이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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