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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로보캅을 관람하기 전, 다시 한 번 먼지 쌓인 DVD 박스를 뒤져서 폴 버호벤 감독의 오리지널 <로보캅>을 다시 꺼내봤다. 전작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 새로 나온 후속편을 보기 전이나, 오리지널이 따로 있는 영화의 리메이크 작을 보기 전마다 필자는 거의 반드시 이러한 과정을 거치곤 한다.

 

198712월 한국에서 개봉한 이 영화의 배경은 근미래의 미국 디트로이트 시로, 디트로이트는 산업혁명 시기에 자동차 산업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한 대도시였다. 여기서 우선 방점을 찍고 살펴봐야 할 부분은, 미국 문화에서 자동차라는 물건이 갖는 상징성이다.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바이킹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동서로부터 얼어붙은 베링 해협과 아이슬란드를 거쳐 이 땅에 도착했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 땅을 신대륙으로 선포했으며 그 후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으로 대표되는 유럽 열강들이 앞 다투어 이 땅으로 건너와 인디언들과 교역을 하고 식민지를 설립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던 공통된 믿음이 있었으니, 이미 오랜 세월 전부터 그 땅에 터를 잡아 살아오며 -그 문명의 성격이 백인들의 그것과 달랐을 뿐- 이미 고유한 문명을 확립하고 있던 인디언들은 야만인들에 불과하며 자신들은 개화된 인간으로서 이 신천지를 자유로이 탐험하고 개척할 권리가 있다는 신념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땅은 끝도 없이 넓어 보였고, 백인들은 말을 몰고 그 광활한 땅을 돌아다니며 발길이 닿는 모든 땅의 주인이 될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다른 열강들과의 식민지 다툼에서 승리하고 미국을 건국한 이후에도 미국인의 시조들은 그러한 모험심과 개척의지, 프론티어 정신이야말로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임을 천명했다.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경우에 따라선 피붙이만큼이나 가까운 관계로 맺어진 짐승이 바로 말이었고, 세월과 함께 말은 자동차로 모습을 바꿨다. 지금도 미국인들에게 있어 자동차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주인의 사회적 지위와 부, 품위의 상징이며 아낌없는 애정의 대상이다. 미국에서는 부유층은 물론 어느 정도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중산층만 되도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면 새 자동차를 선물해 주는 것이 흔한 풍습이며, 아들은 차에 별명을 지어주고 주말마다 세차를 해주고 교외로 그를 몰고 나가 데이트 상대를 찾는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자동차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는 마이클 베이 감독의 2007년 영화 <트랜스포머>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총기와 더불어 미국 문화의 양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 산업에 있어서,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의 디트로이트는 일본에 선두 자리를 내주고서 이미 쇠락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를 반영해서인지, <로보캅>의 디트로이트는 온갖 범죄와 부패가 횡행하는, 현대 자본주의에 지배되는 대도시의 타락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도시다.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은 민영화되어 있고, 민선 시장은 실권이 없으며, 뒷골목에서는 폭력 조직들이 난립하고 빈민들은 비참하게 죽어간다. 하지만 도시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대기업 OCP는 그에 신경 쓰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기업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건 더럽고 무질서한빈민가를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 세련된 첨단 고층건물들을 지으려고 한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폭력 조직과 싸우던 중 순직한 경찰 알렉스 머피는 OCP에 의해 유해가 회수되어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대로 절반 기계, 절반 인간, 완전한 경찰인 로보캅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OCP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시민들에게 봉사하고 공공질서를 위해 헌신하는 경찰이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보호하고 불순분자들을 법질서 집행이라는 명목으로 처단하는 사냥개다. 로보캅이 된 알렉스 머피는 여러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을 갖고, 점차 기억을 회복해가며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결말 부분에서 자신을 죽였던 폭력조직의 보스에게 복수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사적인 복수라기보다는 경찰로서의 의무에 더 가깝게 묘사되며, 영화는 내내 알렉스 머피의 자아 찾기에 결코 작지 않은 비중을 둔다. 이러한 주제는 2편에서 머피와 주변 인물들 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로 발전하고, 시리즈 중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가장 수준 낮다고 평가되는 3편에까지 이어져서는 3편 마지막 부분에서 머피가 OCP 회장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그 목소리의 울림이 가볍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알렉스 머피라는 인간이라는 선언인 동시에 여전히 로보캅이라는 기능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현실에 대한 긍정을 모두 포괄한다는 점에 있다. 즉 그것은 기계의 육체 속에 갇혀 경찰로서의 의무에 매인다는 명확한 현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여전히 인간으로서 자유로이 사고하고 판단한다는 선포다.

 

이번 리메이크 <로보캅>의 감독인 호세 파딜라는 브라질 출신이다. 미국의 앞마당이나 다름 없는 중남미 출신 영화감독으로서, 그가 오리지널의 주제의식을 어떻게 변주해 보일지 기대하며 나는 영화관으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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