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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만 광년의 고독
  김보영 김창규 박성환 배명훈 유광수 정소연 고드 셀라 지음, 오멜라스

  2009년 2월 소백산천문대에서 SF 작가 8명과 천문학자 세 사람이 워크숍을 열었다. ‘세계 천문의 해’를 맞아 천문학을 소재로 SF를 써 보자, 는 기특한 취지였다. SF 작가들에게서 참가비를 받지는 않았을 테고, 박해 받는 취향 내지 전공을 가진 사람들끼리 공기 좋고 경치 좋은 데서 만났으니 2박 3일의 워크숍 분위기는 몹시 훈훈했을 것 같다(그러나 3박 4일짜리 워크숍이었다면 3일째 밤에는 심각한 언쟁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 기획 단편선, 전통이 되기까지
  그 훈훈한 분위기를 이어 행사에 참여했던 작가 8명 중 7명이 SF 단편을 한 편씩 썼고, 그렇게 만들어진 앤솔러지가 이 책 《백만 광년의 고독》이다.
  하나의 테마를 놓고 여러 작가들이 자유로이 단편을 쓰는 기획이 꼭 SF 장르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이런 기획을 가장 활발히 벌이는 문학 장르는 SF 아닐까 한다. 일종의 장르 전통이 됐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하이텔 과소동 시절 ‘공동 창작’ 행사부터 현재 웹진 거울이 부정기적으로 출간하는 ‘소재별 단편선’까지 이 같은 기획들은 팬덤 작가들에게 자극을 주는 은근한 경쟁의 장인 동시에 신인 작가들의 공모전이었으며, 독자들에게는 선물 꾸러미와 같은 작은 축제였다. 방송 오디션 프로그램과 비슷한 역할이었다고나 할까.
  여기에는 SF라는 장르 특성과 척박한 한국 SF 현실이 모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한다. 아이디어가 중요한 이 장르에서 적절한 소재 제한은 오히려 더 작가적 상상력을 자극시키고 ‘누구 작품이 제일 멋지구리한가’와 같은 흥미와 경쟁심을 독자와 작가들에게 유발한다. 한편으로는 창작자들의 역량 때문이건 시장 상황 탓이건 장편이나 개인 단편집 위주로는 읽을거리가 꾸준히 나오지 않고, 종종 창작 게시판조차 극심한 가뭄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작가 집단의 활동을 독려하려는 팬덤의 자구책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딱히 그 앞에서 예의를 차려야 할 거장도 없고, 문단 선후배 어쩌고 하는 복잡한 사정보다는 ‘동지적 연대감’이 충만한 동네이니 기획도 비교적 어렵지 않다.

 ● 이벤트 책의 즐거움과 한계
  이 책의 참여 작가 면면을 보면 PC통신 1세대부터 현재 가장 활동이 활발한 ‘대표 작가’들, 비교적 국내 팬덤 집단과는 거리를 두어 온 공모전 출신, 캐나다 국적 소설가까지 다양하다. 다양한 저자 약력들 자체가 한국 SF계가 그간 악조건 속에서도 양적으로는 이 정도 작가군을 보유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어떤 면에서는 이 점이 이 작품집의 내용보다 더 의미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질적인 면에서도 특별히 꿀리는 글 없이, 수록작들이 어느 이상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이벤트 책의 한계를 넘어 이거다 싶을 정도의 작품성이나 파격을 보여주는 글도 없긴 하다.  SF 단편선에서 흔히 보는 ‘알고 보니 화자가 인간이 아니었지롱’ 류의 착상으로 쓴 글이 두 편, ‘외로운 인공지능이 어찌어찌하다 인간성을 획득했다’의 변주가 또 두 편이다. 이걸 큰 흠결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작품집 전반을 도전적이라거나 참신하다고 평가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수록작 8편 중 6편이 천문대나 천문학자를 배경이나 인물로 활용했는데 그 활용 정도와 작품의 성취 수준과는 거의 상관관계가 없고, 천문학자들과의 조우에서 영감을 얻은 참신한 설정이나 아이디어가 보이는 글도 딱히 없다. 두 분야의 만남이 적어도 SF 작가들 쪽에서는 큰 시너지를 내지는 못한 셈이다. SF 팬들이 딱히 그 점에 대해 불만을 터뜨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기대했던 수준의 완성도나 작가들의 개성은 충분히 보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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