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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
  김보영 듀나 박성환 배명훈 송경아 이지문 이현 정소연 지음, 창비

  대략 2006, 2007년경부터 국내 청소년문학 시장이 부쩍 커지기 시작했다. 학부형이 된 386세대들이 이전 세대보다 10대 자녀들에게 책 읽기를 더 많이 권해서 그렇다는 얘기도 나오고, 아동문학 시장의 성장이 멈추면서 출판사들이 새로운 마켓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청소년 소설은 한번 뜨면 꾸준히 팔리는 경향이 있는 데다, 내용이 괜찮으면 아동 독자와 성인 독자 양쪽을 모두 공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 와중에 《완득이》의 대성공이 머뭇거리던 출판 기획자들에게 불을 질렀다.

 ● ‘국내 최초’ 시도와 배경
  2007년 11월에 초판 1쇄가 나온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도 이 같은 트렌드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 창비가 2007년부터 시작한 창비청소년문학의 5번째 책인 이 단편선에는 ‘10대를 위한 SF 단편집’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뒤의 해설에 따르면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한 창작 SF 단편집은 이 책이 국내 최초라고 한다.
  청소년문학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실제 출판사 기획회의에서는 “10대들이 라이트노벨 좋아하니까 비슷한 거 하나 만들어보죠”라는 식으로 일이 시작됐을지도 모르겠으나, 시도 자체를 두고 시류에 영합했다거나 어울리지 않는 이종교배라고 비난할 수는 없겠다. SF와 청소년문학은 전통적으로 끈끈한 사이였다. 훌륭한 청소년용 SF가 많이 있고, 로버트 A. 하인라인처럼 성인 문학과 청소년문학 양쪽에서 성공을 거둔 작가도 있다.
  문제는 성과다. 이 책은 청소년문학으로서, SF라는 도구를 차용해 청소년 독자들에게 더 큰 재미와 공감을 주거나 더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주제를 선사하는가? 또는 SF로서, 청소년 독자층을 우선적으로 겨냥하며 써 가는 가운데 기존 요리법으로는 만들지 못했던 새로운 풍미와 분위기를 내는 데 성공했는가? 아쉽게도, 《잃어버린…》을 앞에 놓고 그 두 질문에 모두 “그렇다!”라고 답하기는 다소 머뭇거려진다.

 ● 교훈적이라서 안타까운…
  두 질문 중 후자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자면, SF적인 측면에서는 사실 설정이나 이야기 전개가 대단히 새롭지는 않은 작품들이 대다수다. 외계인과의 만남, 인간 정신에 기생하는 외계 생명체,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장치, 다른 종족의 애완동물이 된 인류. 흔한 설정이고, 이야기도 이런 설정에서 기대할 만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작품 수준이 낮다는 얘기는 아님).
  전자의 질문에 대해서 답하자면……, 서글픈 지적을 하나 해야 하는데, 이 책이 꽤 교훈적이다. 대놓고 왕따는 나쁘다고 훈계하는가 하면, ‘너희들 기분이 이렇지? 내가 다 알아’라는 글도 좀 꼰대스럽다. 솔직히 말하면, 저자들 스스로가 자신이 10대 시절 품었던 감수성을 잊은 게 아닌가 의심된다.
  10대들 대부분이 이 책을 어머니가 집에서 해준, 심심한 맛의 궁중떡볶이로 여길 것 같다. 고추장과 설탕으로 만든 불량식품 같은 ‘이고깽’ 물을 SF의 전형이라고 오해할 청소년 독자들에게 제대로 된 식재료와 조리법으로 짜릿한 자극과 통쾌함까지 줬더라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너무 영양에 신경을 쓴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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