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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의 비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은이) | 김아영 (옮긴이) | 황금가지 | 2013-06-14 | 원제 K.Nの悲劇 (2003년)




"임신 상태보다 장중한 상태가 있을까?" - 니체




 다카노 가즈아키의 『K·N의 비극』은 필연적으로 어두울 수밖에 없는 소재를 다루었다. 임신 중절이라는 소재를 다룬 작품인 것이다. 법으로 규정한 특별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계획적이지 않은 임신은 경제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중절을 고민하게 만든다. 소설이 단지 법적인 문제나 윤리적인 문제를 토론식으로 지루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오컬트적인 요소와 추리 스릴러적인 요소가 혼합되어서 독특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며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흡인력을 보여준다. 가독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다카노 가즈아키는 이미 『13계단』(다카노 가즈아키 , 전새롬 옮김, 황금가지, 2005년 12월,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제노사이드』(다카노 가즈아키, 김수영 옮김, 황금가지, 2012년 6월,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등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사회적 문제를 가볍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긴장과 흥미를 유지하며 소설로 형상화 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번 『K·N의 비극』은 상대적으로 얇으면서도 이와 같은 장점은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쾌적하게 사는 법]으로 갑작스럽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슈헤이는 맨션을 구입하고 아내 가나미와 행복한 신혼 생활을 꿈꾼다. 그런데 단 한 번 콘돔을 쓰지 않고 잠자리를 한 날 임신을 하게 된 가나미. 가나미는 기뻐하면서 소식을 전하지만, 슈헤이는 냉정하게 맨션 구입으로 탕진하게 된 재산을 따져본다. 대출금 상환도 빠듯한 실정에서 뚜렷한 수입원이 없는 현실. 아기를 낳는다면 맨션을 도로 팔아야 되는 상황. 결국 슈헤이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중절을 제안한다. 우리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이 중절 제안이 논리적이면서도 가슴 아프다. 있을 법한 현실을 제시하고 작가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런 삶을, 이런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물론 제3자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유치하며 이기적인 결정으로 보이지만, 자기가 책임질 것도 아니면 남에게 어떤 결정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소설 속 정신과 의사인 이소가이 역시 함부로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순종적이고 착한 아내인 가나미가 이상 행동을 보인다.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이때부터 이야기는 서스펜스를 가져온다. 그리고 미스터리를 제시한다. 가나미는 귀신이 씌인 것일까. 중절을 거부하는 마음이 다른 인격을 만들어낸 것일까. 이 두 가지 가설에 대한 줄타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이 소설의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중반까지 이끌어가는 바로 이 오컬트와 과학의 대립적 요소이다. 아내가 빙의 현상을 일으키고, 남편은 이것이 영적인 사건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는 끊임없이 과학적인 가설을 제시하며 반박한다. 여기서 두 가지 관점의 재미가 생겨난다. 오컬트적인 재미와 이를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재미. 또한, 과학적으로 제시된 가설들은 후반부에 갈 수록 다시 오컬트 영역으로 넘어가는 듯한 현상을 보여주는데, 이와 같이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점이 특히 재미있고 인상깊은 작품이다. 임신 중절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흥미롭게 구성할 수 있는 작가가 또 있을까. 오컬트를 넣으면서도 그저 공포소설처럼 처리하지도 않았다. 공포소설의 요소를 가져오면서도 다카노 가즈아키의 장점인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해 현실감을 부여한다. 다양한 정신의학 지식을 늘어놓아 소설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막연히 오컬트 소설로 읽히는 것을 경계하며 중반까지 두 가지 해석을 동시에 가져갈 수 있도록 균형을 잘 잡고 있다. 이전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방대한 자료조사가 소설에서 백과사전식으로 그냥 주입되는 게 아니라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서 거부감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관련 전공자가 쓴 것처럼 신뢰감을 가지고 읽게 만든다. 여기서 오컬트적인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어떻게 정신 의학에서 진단하고 분석할 수 있는지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데, 이런 점은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장점이자 재미이다. 지식형 소설들 중 상당수가 그냥 지식을 늘어놓는데 반해, 이 소설은 이야기 속에 잘 녹여놓았기 때문에 스토리 전개에 필요한 내용들만 적절히 제시되고,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 즉, 작가가 자료를 체화하고 잘 가공해서 독자에게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해주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여러 지식들이 이야기 전개에 걸림돌이나 군더더기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원동력으로 여겨진다. 오컬트적인 요소를 제하면 정말로 정신 이상이 발생한 여자를 치유하는 정신의학 소설로 갈 수도 있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단순한 방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한 가지 소설로 규정할 수 없게 중후반까지 오컬트와 과학이 쉴새없이 뒤바뀌는데, 이 전환이 독자에게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수차례의 전환 자체가 또다른 소설의 매력이자 재미로 작용하는 것이다.
 임신 중절이라는 소재는 어떻게 보면 다루기 어려운 주제이다. 단순히 임신 중절을 나쁘다는 윤리적 문제만으로 소설을 교훈적으로 이끌기 쉽기 때문이다. 소설이 교훈적이 된다는 것은 고리타분하고 긴장감이 형성되지 않으며 직설적이고 단조로우며 지루함을 유발할 가능성이 커진다. 우리는 논설문을 읽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미는 물론 교훈의 유무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주제를 가지더라도 작가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소설의 긴장과 재미를 부여할 수 있다. 작가는 오컬트라는 요소와 추리 스릴러적인 면모를 섞어서 임신 중절을 놀라운 스토리텔링으로 풀었다. 이것은 이야기를 제대로 가지고 놀줄 아는 작가만이 가능한 경지일 것이다. 음울한 주제이지만 계속 스토리텔링의 힘에 이끌려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소설에 긴장과 재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소설을 여러층으로 쌓아올리면 된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복잡성을 통해서 완성도 높은 이야기 구조를 만들었다. 아내가 빙의 현상을 보인다. 이것은 정신 이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정신 이상이 일어난 배경을 좇아야 한다. 이것은 그럼 의학소설인가? 또한, 빙의된 영혼의 정체를 찾는 추리 스릴러적인 면모를 띈다. 이것은 그럼 추리소설인가? 임신 중절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다룬 사회 소설이기도 하고, 영혼이 등장하는 공포 소설이기도 하면서, 사건을 파헤치는 스릴러 소설이기도 하면서, 정신 이상이 발생한 아내를 치료하는 정신 의학 소설이기도 하다. 이런 여러 겹의 이야기들 때문에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싶어서 페이지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결국 밤을 새서 읽게되는 책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책 역시 그렇다. 한 번 읽기 시작하자 중도에 그만둘 수 없었고 결국 새벽까지 다 읽게 된 책이었다.
 사건의 진상을 따라가면 제목에 나오는 대로 KN의 비극을 마주하게 된다.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고, 그 뒤에 나오는 것은 가슴 아픈 사연이다. 임신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소설을 아우르면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처연하고도 일그러진 진상. 그러면서도 눈을 뗄 수 없다. 직시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허구이면서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이라면, 그 정의에 가장 걸맞는 근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심인성 정신병이니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그건 단순한 해석일 뿐이지 증거가 없는 게 아닌가요? 사령에 빙의됐다는 얘기와 똑같은 차원의 얘기이지 않습니까?”
 “뭐, 그렇군요.”
 이소가이는 당장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부드럽게 말했다.
 “정신 의학은 과학성을 유지하려는 탓에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억지로 설명을 붙이려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현대 정신과 의사를 타임머신에 태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면 눈앞의 청년이 망상 장애라고 진단하겠지요. 예수의 기적을 목도했다고 증언하는 사도들은 망상을 공유한 감응 정신병자가 되겠고요.”
 “그럼 그 의사가 직접 기적을 목격하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때엔 자기 자신이 감응 정신병에 걸렸다고 주장하겠지요.”
 ――― 다카노 가즈아키, 김아영 옮김, 『KN의 비극』, 황금가지, 2013년 6월, 289~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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