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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이래로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미국 애니메이션의 태산북두로 군림해왔다. 애니메이션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디즈니야말로 미키 마우스와 도덜드 덕의 고향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며, 디즈니에서 만든 작품들 이름을 몇 개 정도는 댈 수 있다. 그러나 그 명성과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최근 10년 동안 디즈니는 2인자로 취급하던 드림웍스가 슈렉쿵푸 팬더라는 히트작을 내놓으며 위상이 추락했고, 심지어는 자회사인 픽사조차도 토이 스토리-E로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마땅히 이렇다 할 성공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1999년의 타잔을 마지막으로 10년 이상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디즈니는 팬들 사이에서 미국 애니메이션 장르의 첫 번째 개척자이자 첫 번째 본좌로서 경의를 바칠 만한 대상은 될 수는 있을망정 더 이상 젊은 소비자들의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는 없다고 여겨지는- 냉정하게 말하자면 애니메이션 장르에 있어서 역사적인 의미와 상징성 외에는 더 이상 기여할 게 없는 퇴물로 전락해 잊힐 위기에 처해 있었다. 디즈니가 이대로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창조집단으로서의 위치를 상실 내지 포기하고서 단지 우수한 마케팅과 매니지먼트 능력만을 지닌 기업이 될 것인가 아니면 지난 세월 동안 몇 차례나 위기를 극복하며 쌓아온 저력을 다시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는 팬덤 내에서 초유의 관심사가 되어 왔다. 2010년의 라푼젤2억 불 이상을 벌어들이며 흥행에 성공한 후에도 이것을 재기의 신호탄으로 봐야 할지 회광반조로 봐야 할지에 대해선 논란이 가시지 않았지만, 20141(현지 기준으로는 1311) 디즈니는 지금까지 없었던 아주 특별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작품, 겨울왕국이 미국 애니메이션 사에서 갖는 의의나 장면 연출, 음악, 두 주인공들인 엘사와 안나 자매 간의 유대감과 가족애 등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분석이 이뤄졌고 아직도 더 깊이 파헤쳐볼 여지가 남아 있으나 본 글에서는 아렌델의 여왕, 엘사에 대해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인권 의식이 신장되고 페미니즘의 싹이 트며,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의 공주 캐릭터들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초기에는 공주라는 우월한 사회적 위치에 더해 아름답고 선량하지만 단지 그 뿐이었던 공주 캐릭터들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왕자라는 존재로 상징되는, 이상화된 남성상을 체현하는 상대 캐릭터 못지않게 똑똑하거나 나름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등으로 묘사의 다양화가 이뤄졌고 개중에는 이야기 속에서 제법 적극적으로 그를 활용해 난국을 타개하거나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와는 반대로 위기에 처한 왕자를 자기 손으로 구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녀가 부여받는 역할은 어디까지나 왕자와 사랑에 빠지고 온갖 역경을 거친 끝에 그와 결혼하여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즉 좋은 남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 여자의 이상적 행복이라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세계관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왕국의 공주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준하는 높은 사회적 위치와 부, 무엇보다도 (그와 비슷한 물질적 조건을 갖춘) 멋진 남자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식의 박탈감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그러나 이 영화 속의 엘사는 그러한 공주 캐릭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완전히 진일보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위험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특별한 힘을 선천적으로 타고났다. 왕과 왕비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일부이기도 한 그 힘을 통제하고 관리하려고만 할 뿐이다. 자문을 위해 찾아간 트롤들의 수장인 패비 할아버지가 진정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조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과 왕비가 한 일이라고는 안나의 기억 중 엘사의 힘에 대한 부분을 지우고서 엘사를 고립시킨 것뿐이다(동생을 상처 입혔다는 엘사 본인의 죄책감도 한 몫 했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걱정해주긴 하지만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힘에 대해서는 불신과 두려움으로 일관하며 억누르려고만 하는- 즉 어떤 이해도 내비치지 않는 부모의 처우, 대관식 날이 되어 방 밖으로 나가게 되었지만 여전히 언제까지고 힘을 숨긴 채 이상적인 여왕을 원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만난 지 하루도 안 되어 결혼하겠다는 동생에 이르기까지 사방이 온통 그녀를 억압하는 요소들 뿐이다. 숨기려고 했던 힘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자신을 마녀라고 부르는 장면에서 그 억압성은 극대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세상에 대해 원한을 품는 대신 자신의 힘이 가진 위험성을 인정하고서 홀로 살아가는 쪽을 선택하고, 형언할 수 없는 고독과 동시에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세상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태도가 수동적이며 그 자유도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는 비판은 어느 정도 합당하지만 그 정도의 고립과 억압을 겪고서도 자신의 힘에 도취되거나 세상에 복수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내면에서나마 그러한 자존과 독립성을 일궈낸 캐릭터는 공주만이 아니라 역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거의 모든 캐릭터를 통틀어 엘사가 거의 유일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신분이나 특별한 힘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보편적인 정서에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

 

 

엘사의 그러한 독보적인 캐릭터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영화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게, 결국 악당의 음모는 밝혀지고 엘사와 안나는 자매애를 회복하며 왕국은 평화를 되찾는다. 개인적으로는 홀로 산 위에서 노래하며 한 없이 차디차 보이면서도 아름다운 얼음의 성을 지어 올리는 그 시점에서 그녀가 느낄, 그 한 없이 슬프고 고독하면서도 드높고 깨끗한 자유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보지만 인간적인 행복이라는 면에서 보면 이런 결말이 더 낫긴 하다. 그녀는 타자화된 공주’- Let it go의 가사를 빌어 표현하자면 착한 아이’-가 아닌,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왕권을 행사하는 여왕으로서 아렌델을 훌륭히 다스릴 것이다. 여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Long live the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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