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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발이 다섯 개 달린 괴물이었지만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비열하고, 야비했고, 거칠고, 그 이상 모두였다.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너를 사랑했다!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 눈치챌 때가 있었고, 그럴 때면 지옥이었다, 내 귀여운 연인. 소녀 롤리타, 용감한 돌리 실러. ―――[롤리타] 中

   이 글은 최근 저의 예술관에 대한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서 작성된 글입니다. 여기에 대한 제 응답은, 저는 딱히 어떤 ‘예술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만 제가 갖고 있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일련의 생각들과, 그에 기초한 근대예술의 형식에 대한 ‘비판’적 아이디어들입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들에게 이 점을 해명하고자 합니다. “취향은 존중되어야 하는가?”라는 저 오래된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공동생활전선’을 같이하는, 네오풀이라는 무지막지한 시네필과 레드퀼이라는 문학청년을 조우하고 나서, 저 스스로의 관점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실제로 저는 취향의 영역과 진리의 영역을 ‘구분’하는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분이 가능했기에 제가 과거에 미연시와 미소녀가 등장하는 아니메를 향유하는 오타쿠일 수 있었고요. 그런데 저 두 명의 주체와 조우하고 나서 저는 관건은 취향으로 표상되는 저 자립적인 영역이 사실은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인식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취향은 불가피하게라도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진리효과는 그 사람의 취향이 변화되는 것에 의해 식별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이것은 취향일 뿐’이라면서, 저의 오타쿠 취향을 정당화하기를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후부터 미연시를 전혀 즐기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차라리 F군처럼 소녀 아이돌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합리화하려는 도착적인 전략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어떤 위기감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제 오타쿠 취향은 무언가 외설적인 게 되어버렸습니다.



▲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할 이미지.

   하지면 보다 결정적인 것은 진리와 취향의 범주가 아니라, 미의 범주와 취향의 범주의 구분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정말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취향의 범주를 바로 미의 범주로 착각하는 저 관행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앞서 본 취향과 진리의 절대적 구분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아름다움과 진리를 동일한 것으로 규정하는 플라톤의 텍스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F군은 소녀시대의 어떤 멤버가 ‘미’의 범주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겠지만, 플라톤의 관점을 따르자면 그것은 전혀 미의 범주가 아닙니다. 오늘날 근대인들은 자신이 취향 속에서 발견한 대상이 아름답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사실 아름다움에 대한 이성적인 질문(레드퀼은 이것을 비평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속에서 발견된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한 한에서 소녀시대에 대한 한 젊은이의 취향은 아름다움에 대한 범주와 전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아이돌 산업이 불합리한 고용관행에 의해 유지되는 한 그것은 외설성의 범주에 더 가까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오늘날 미의 범주로 이해된 것은 외설성의 범주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근대문학과 근대예술 일반에 대해서도 일반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문학작품들은, 굳이 데카당스나 유미주의의 사조를 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개 외설적입니다. 이는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품이 아름답다는 평가에는 하나의 단서가 덧붙여져야 합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울만치 외설적이다.” 이러한 사태를 깨닫는 데 레드퀼의 개인적인 기여는 매우 컸습니다. 

   저는 최근에 로카드님으로부터 플라톤이 미를 어떻게 사유하는지에 대한 소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플라톤에게 있어 무언가가 ‘선하다’는 것이 합리적으로 논증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그것을 또한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그러한 논증을 실로 수용했다고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 정반대로 아이돌 산업의 고용관행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납득한 사람들이 여전히 그 산업에서 생산된 문화상품들이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그는 그 논증을 전혀 수용한 것이라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플라톤이 논증의 형식논리 뿐만 아니라 논증의 수행적 차원마저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튼지 간에 진리의 진리효과는 아름다움 속에서 식별될 수 있다는 저 플라톤의 주장은 최근에 제 생각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전적으로 제 사유의 벗인 레드퀼과 네오풀에 의해 가능해졋습니다. 이는 아름다움의 범주에 대한 저 고집스러운 충실성을 유지해왔던 (각각 영화의 영역과 문학의 영역에서 그 충실성을 유지해왔던) 두 플라톤주의자들 덕분입니다.


   ▲ 가장 최근의 외설적인 예.

   그러한 점에서 실로 ‘아름다운’ 것은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영화나 문학의 영역에서 ‘아름다움’은 극히 드물다고 예외적으로만 식별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는 저 두 시네필과 문학청년이 저에게 가르쳐준 것입니다. 레드퀼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저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근대문학은 미의 영역이라기보다는, (테리 이글턴의 표현을 따르면) ‘이데올로기’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근대문학은 여하간 저 자립적인 취향의 영역을 가능하게 했던 제도적-역사적 실천으로서 성립되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점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제안하듯이 “취향이란 존중되어야 하는가?”라는 오늘날의 저 일반화된 질문이 하나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가정에 기초해 있기 때문입니다. ‘취향’의 자립적 영역을 성립시킨 근대문학의 영역 속에서 우리가 아름다운 것으로 발견한 대상은 실은 (지젝의 저 탁월한 표현을 빌리자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한에서, 외설적인 향유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취향의 영역에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질문이 반성적으로 배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마르크스주의적 ‘비평’이 가능하다면,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습니다. 진리와 선에 대한 질문을 자의식적으로 사상하고 남은 저 취향의 영역은, 칸트가 말한 것과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주관적 판단의 영역이 결코 아니라고 말입니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여하간 부적절한 등록소(register)에 놓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그 나름의 자율적 판단이라고 보았던 곳에서, 우리는 외설적인-이데올로기적인 향유를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진리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것과도 전혀 무관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맑스주의의 문법을 따라, 저 플라톤주의적 정식을 보충하자면 우리는 취향의 원리를 따라 ‘자립화된’ 이 영역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취향은 존중되어야 하는가?”라는 홈(Home) 이후의 저 근대미학적인 질문은 이렇게 대답되어야 합니다. 칸트가 정당하게 지적하듯이 우리는 저것을 도덕주의적이거나 인식론적 입장에서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칸트가 보지 못했던 것은, 취향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내세우는 저 주관적 아름다움이라는 내재적 기준을 통해 비판되어야 하는 점입니다. 예컨대 오타쿠들(이러한 오타쿠의 기원은 일본 아니메에 있는 게 아니라 근대문학에 있습니다)이 자신이 주관적으로 발견했다는 아름다움은 실은 아름다움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비판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에 비평의 역할이 있습니다. 결국 취향은 아름다움이라는 취향의 내적 기준에 비춰 ‘비판’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비평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취향 속에서 발견된 대상은 아름답지 않다”라고 말입니다. 아름다움은 진선미의 일치에 의해 지도되는 엄격한 사유 속에서 발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움의 범주는 저 초월론적 통각으로부터 ‘빼내어’진 채로 정초되어야 합니다. 레드퀼이 저에게 가르쳐 주려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점입니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더욱더 그녀가 주장하는 바, 비평가의 임무란 훌륭한 작품과 탁월한 작품을 식별하는 것이라는 저 말은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 작품이 출현한 근대문학의 지평은 ‘취향의 원리(principle of taste)’ 위에서 정초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저는 어떤 탁월한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의 구분을 제안하는 여하간 근대비평가들이 여전히 어떤 비평적 원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들의 원리란 바로 근대문학을 성립시킨 ‘취향의 원리’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취향이 고상하냐, 그렇지 않느냐를 가르는 어떤 비평의 기준 역시, 그 자체로 아름다움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오히려 저 위의 플라톤-맑스적 정식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그 자체로 자립화된 취향의 영역을 형성한 근대문학(내지는 영화)은 어떠한 경우에서든 그 미적 기준의 충족 여부를 의심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항구적인 ‘의심의 장소’에서 바로 비평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비평이 위기에 처했고, 또한 비평이 그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라면, 바로 이 근대적 예술의 형태(취향의 원리에 의해 자립화된 미적 영역 위에 정초된 예술)대한 ‘의심’에서부터 출발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러한 점에서 저는 오히려 더 나은 작품과 더 형편없는 작품을 가르고자 하는 저 비평적 의욕이, 여전히 근대적인 취향의 지평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는 그들에 비해 예술에 관한 문외한임에도 불구하고 이 점에서 네오풀과 레드퀼에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가 보았을 때 그들이 지닌 충실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작품의 단위를 통해 어떤 아름다움이 식별될 수 있다고 믿을 때, 저는 정확히 그 제스처 속에서 그들이 은연중에 고상한 취향과 저열한 취향에 대한 구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레드퀼이 말하듯이, 근대문학이란 이를테면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이라고 믿는다고 한다면, 저는 저 언표를 모든 문학작품과 영화들에 대해 예외 없이 적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근대문학의 장에서 아름다움은 오직 이데올로기적 형태로만 나타납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이란 ‘작품’의 단위를 통해 식별될 수 없다는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녀가 작품을 통해서 취향의 지평을 넘어선 ‘아름다움’을 일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압니다. 네오풀 역시 영화에 관해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것에 대해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알겠지만) 저는 근대예술의 형식 속에서, 그러한 아름다움이 모종의 ‘징후’를 통해서만 일별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헤겔의 표현대로라면 그것은 소외된 형태로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맑스가 여하간 어떠한 진리가 있다면 이는 이데올로기가 지닌 징후적 차원(내적 비일관성)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과 정확히 등가적입니다. 예컨대 저는 어떠한 계기로 최근에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라는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한 예술가가 자신의 말년에 아름다운 소년과 조우하게 됩니다. 그는 거기서 그가 자신이 찾고자 했던 절대적 미를 구현한 존재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낯선’ 존재였다는 것을 깨닫고 커다란 위기를 겪게 됩니다. 이러한 설정 자체는 저에게 있어서 지극히 ‘외설적’입니다. 사실 저는 이러한 외설성이 근대문학의 취향을 구성하는 어떤 근본요소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 뿐만은 아닌데, 동시에 이 영화(원작이 소설이기에)는 근대문학 전체에 대해 어떤 자기폭로를 수행하는 하나의 알레고리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그 장면은 주관적인 취향의 원리 속에서 발견된 ‘아름다움’이 실은 그러한 원리 바깥에서 조우하게 된 아름다움 앞에서 지극히 무력하고 헛되다는 바로 인식을, 근대문학의 지평 내에서 ‘자기폭로’의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이 영화 자체에서, 심지어 그 영화에서 등장한 소년에게서, 전혀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년은 절대적 아름다움의 구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러한 아름다움에 대한 알레고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소년이 아름다움에 대한 알레고리인 한에서, 그는 아름다움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이 경험을 좀 더 과감하게 일반화하고 싶습니다. 여하간 우리가 근대문학이나 영화에서 어떤 미적 경험을 향유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오로지 징후적이고 역설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작품에서 아름다움을 일별하는 것은, 아름다움 자체와는 전혀 무관한 징후적인 차원에서뿐이라고 말입니다. 맑스 역시 같은 것을 말했을 것입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서 진리를 일별할 수 있는 것은, 그 진리 자체는 전혀 무관한 징후적 차원에서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녀가 자신이 ‘맑스주의자’라고 말했던 것을 저는 그렇게 되돌려주고 싶습니다.



▲ 미(美)를 의미하는 기호에 가까운 이미지.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한 장면.

   오히려 저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문학작품이나, 영화에서가 아니라, 다른 경험을 통해 더 잘 경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네오풀이 영화를 통해 ‘직접적인’ 미적체험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비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문학과 영화에서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는 저 질문을 놓지 않는다고 한다면, 저는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같은 어떤 척도에 의존하는 것은 여전히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히려 레드퀼에게서 동의하는 것은, 앞으로의 예술이 진리를 아름다움 그 자체로서 전달하는 ‘프로파간다’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아름다운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이 그 자체의 진리효과 속에서 식별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근대예술의 지평이 현실적으로 변혁된 이후에만 가능하다고 생각고,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더 일관된다고 봅니다. 레드퀼 역시 동의하듯이 저는 대중이 자신의 일상적 삶을 재창안하는 실천을 형상화한 저 사회주의의 선전예술을, 실패했지만 적어도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던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저는 런던의 화랑에 걸려 있는 저 현대미술의 작품보다는, 북한의 거리에 널려 있는 사회주의 선전 예술들이―――비록 화석화된 형태이긴 하지만―――본연의 ‘아름다움’에 ‘조금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의 선전예술들은 실패한 어떤 영웅적인 시도의 흔적들, 즉 대중들이 자신의 삶을 재창안해내고자 하는 집단적 실천들을 ‘사유’하고자 하는 시도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 역시 러시아 혁명을 그 자체의 예술적 형식 내에서 ‘사유’했기 때문에 ‘아름다운’에 가장 가까이 간 영화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영화는 실로 러시아 혁명이라는 진리사건에 대한 사유를 강제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강제’에 요점이 놓여 있는데, 플라톤이 말했듯이 아름다움은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가 아름답다고 설득되지 않을 수 없는 바로 그러한 ‘강제’ 속에서 비로소 도래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 작품들은 이것이 아름다움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냐는, 우리의 (탈)근대적 취향에 반하는 저 ‘강압’적인 질문을 전달하는 한에서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대한 예술작품들조차 여전히 질문인 한에서 아직 아름다움의 흔적만을 일별하게 할 뿐입니다.  

   실제로 플라톤은 어떤 예술을 통해 아름다움을 조우할 수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미에 대한 특권적 경험의 지평으로 설정했던 것은, 시와 연극이 아니라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이로써 플라톤은 아름다움에 대한 특권적 경험이 가능한 장소는 전적으로 취향의 원리 외부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지요. 저는 이러한 강조를 맑스의 주장과도 겹쳐 읽을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정치적 진리에 대한 특권적 경험이 가능한 장소는 전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외부에 놓여 있다는 바로 저 주장 말입니다. 그럼에도 저 두 동일한 테제들이 결코 ‘이데올로기’의 영역을 형성하는 근대예술과 부르주아 정치에 대해 ‘전적으로’ 무관심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여하간 근대문학 내부의 비평과 제도정치 내에서의 정치적 개입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 [아바타]의 한 장면.

   그런 점에서 제가 [아바타]가 일전에 ‘흥미로웠던’ 영화라고 말한 것에 대해, 레드퀼이 비판한 것에 대해 풀리지 않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아바타가 흥미로웠던 것은 그것이 그 자체로 뛰어난 예술적 성취(저는 이것에 대한 존중감이 전혀 없지만 말입니다)나, 올바른 윤리적 교훈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호소하는 대중적 이데올로기들이 전도되는 역설적인 지점들 때문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그 영화는 집단적 창발성이라든지, 탈근대적 생태주의라든지, 근대인의 이기주의를 초월한 영성에 호소하는 뉴에이지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영화가 그 결말에서 자신의 전제와 모순되는 결말로 치닫는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편을 들지 않는다고’ 이야기되었던 생태적 지혜의 화신 에이와가, 전투의 와중에 실제로 ‘당파적인’ 모습을 보이는 지점이라든지, 에이와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결정으로 인간과의 전쟁에 나선 나비족의 모습이라든지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모순적인 지점들은 최종결말에서 재빨리 봉합되고 맙니다만, 그럼에도 저는 이 영화에 징후적인 차원이 있다고 보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 영화를 [아바타 인문학]이라는 책에서 비평의 대상으로 선택했습니다. 비록 제가 그 영화에 ‘징후적인 지점’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설득하는 데 실패했지만 말입니다.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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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아리 11.04.10 21:41 댓글 수정 삭제
    소아 성애와 동성애가 결합된 플라톤 시대의 소아 성애는 당시에는 "절대적 아름다움"이라고 인식되었지만 지금은 아니지요. 취향이 아름다움이라는 객관적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취향이 아닐까요? 글의 제목은 '아름다움은 취향의 영역인가'인데 이 글은 '아름다움의 영역과 취향의 영역은 구분되어 있다'는 전제를 처음부터 깔고 거기서부터 취향을 아름다움으로, 혹은 아름다움을 취향으로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근대 예술관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아쉬운 느낌입니다. 글에서 내내 사용하신 "아름다움은 이것이다", "이것은 아름답지 않다"는 형식의 논조도, "아름다움은 정말로 절대적인 가치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제시되면 주관적 성향이 지나친 글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긴 글이고 많은 예를 인용한 글이지만 그 주장과 논거가 모호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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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가분 11.04.11 01:02 댓글 수정 삭제
    실망스러운 댓글이군요. 저는 독자들이 이 글을 읽고 미와 취향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기를 바랬지, 이 글의 '근거'를 찾길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거울에는 어설픈 논술교사들이 많은 모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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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가분 11.04.11 01:09 댓글 수정 삭제
    당연히 아름다움과 취향의 영역은 구분되어 있다는 전제를 깐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예시를 몇 개 든 것 뿐입니다. 이를테면 걸그룹을 아름다움의 영역으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면서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이 앞서 든 사례들에서 '도전'을 분명히 느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뭘 좀 제대로 아시고 말씀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 시대에는 '소아성애'를 아름답다고 평가한 적은 없습니다. 성인과 15-17세 소년과의 연애를 아름답다고 평가한 적은 있어도 말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객관적 기준'에 의해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아름다움이 객관적 기준이 결여되어 있더라도 여전히 보편화될 수 있는 진리-경험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했을 뿐입니다. 눈을 좀 똑바로 뜨고 글을 읽기 바랍니다. 저는 아름다움을 주관적 취향의 원리만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상식'에 위배된다는 말씀을 드렸을 뿐입니다.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또한 선하고 올바르다는 논증을 해야만 실로 그것에 관한 아름다움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을 뿐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정당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라는, 질문을 모색하는 글에 대해 난데 없이 논증적 구성을 따지는 건, 독자로서 매우 멍청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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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가분 11.04.11 01:10 댓글 수정 삭제
    독자님들, 제발 부탁입니다. 생각을 좀 하고 댓글을 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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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아리 11.04.11 21:48 댓글 수정 삭제
    덧글 하나에 글쓰신 분이 이렇게 죽자고 달려드시는 모습을 보니 당황스럽습니다. 자신의 생각만이 절대가치이며 이를 비판하는 것은 생각을 좀 안한 덧글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무척 오만한 태도이지요. 얼마 전에 인터넷 뉴스의 어떤 기자가 자신의 기사를 비판하는 독자들과 덧글란에서 키보드 배틀을 벌이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신문"이라는 공적인 공간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주장을 펼쳐놓고는 그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내 주장은 옳고 당신들의 주장은 내 글 하나 이해 못한 멍청이들이다'는 식으로 덧글란에서 싸움을 벌이는 기자를 보고 기사란을 자기 블로그인 줄 아는가보다, 했었는데, 지금이 딱 그 꼴이군요. 토론을 하고 싶으시다면 '나는 무조건 옳고 내 의견에 반대하면 독자로서 매우 멍청한 거다'는 식의 태도는 버리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개인적 생각을 모든 사람이 수용하길 바란다면 왜 칼럼을 쓰십니까? 만약 그런 태도로 쓰신 글이라면 블로그에 더 어울릴 듯 한데요.

    독자분들이 이 글을 통해 미와 취향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기를 바랐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독자들이 그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 논리적 구성이 글에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 그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 하나?" 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에 드러나야만 독자들이 글쓴이의 의도대로 미와 취향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근거를 찾은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신다면 글쓰기의 기본조차 이해하지 못하신 겁니다. 어설픈 논술 교사가 많은 것 같다고요? 일단 덧글을 단 것은 저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저런 식의 어조를 쓰셨다는 것은 "니 덧글때문에 내가 기분 나쁘니 너도 기분 나쁘게 해 주겠다" 는 의미의 비꼬기로밖에 생각이 안되는군요. 칼럼니스트의 덧글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야비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예시를 드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P군은 소녀시대의 어떤 멤버가 아름답다고 주장하겠지만" 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 말 자체에서 "아름다움은 취향의 영역이다"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P의 취향은 그 멤버이고 따라서 P는 그 멤버를 아름답다고 말한다, 가 저 문장이 내포한 논리니까요. 이를 깨신 것이 "P가 그렇게 말할 지라도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라는 뒤의 문장이지요? 여기에서 글쓴이가 어떤 논리적 연결을 찾으셨는지는 몰라도, 이 문장은 "P는 자기 취향을 아름답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지니지 못합니다. 글쓴이의 의도대로 "P가 소녀시대의 한 멤버를 아름답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따라서 아름다움과 취향은 구분되어있다" 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왜 그것이 아름다움이 아닌지"를 설명하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니라면 상식적으로 "소녀시대의 한 멤버가 P의 취향에 맞기 때문에 P는 그 멤버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가 "아름다움과 취향은 구분되어있다"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근거로 쓰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소녀시대의 멤버가 P의 취향에 맞기 때문에 P는 그 멤버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취향은 다르며 따라서 아름다움 역시 개개인의 취향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옳은 연결이지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덧글 쓰는 독자를 비하하지 마시고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를 글에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글쓴이가 본문에서 그것을 보여주지 못하신 것은 유감입니다만, 토론에서만큼은 그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덧글에 적은 두 번째 소아 성애를 소년 성애로 정정하겠습니다. 사실 소아 성애와 동성애가 결합한 플라톤 시대의 미학이라면 소년 성애를 떠올리는 것은 기본적인 소양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라 여겼습니다만 제가 기본을 너무 높이 잡은 것 같습니다. 예. 글쓴이가 말씀하신 대로 플라톤의 시대에는 소년 성애를 아름답다고 평가한 적이 있지요. 이제 제 논리에 동의하실 수 있겠군요.

    눈을 좀 똑바로 쓰고 글을 읽다보니 생각난 것이 "아름다움을 주관적 취향의 원리만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상식에 위배된다"는 글쓴이의 주장에 논쟁의 여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근거가 제시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의 덧글을 단 것이고, 위의 덧글은 글쓴이가 바라시는 대로 눈을 좀 똑바로 뜨고 읽은 뒤에 쓴 글입니다. 칼럼이 "그것은 무조건 상식에 위배된다. 내 말이 맞다. 상식에 위배된다니까?" 라는 식으로 작성되었는데 거기에 합당한 논리가 없으면 그건 그냥 세상의 상식이 자기 가치관에 의해 결정된다는 떼쓰기에 불과하지요. 글쓴이의 가치관만이 상식이라는 말씀은 "아름다움은 취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상식이 결여된 사람"으로 싸잡아 묶는 글이라는 뜻입니까? 미학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오랜 역사를 거치며 수많은 사람들이 완성한 학문입니다. 그런 노력을 송두리채 부정한 채 아무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서 "내 말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만이지요. 따라서 독자는 이 글을 읽으며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설픈 논술 교사가 많아서가 아니라요.

    우리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정당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칼럼의 내용이었다면, 칼럼은 화두를 던졌어야 하지 스스로 결론내려서는 안됩니다. 글쓴이는 이 글이 그런 '질문을 모색하는 글'이라고 하셨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이 글은 글쓴이의 주장이 첫 문장에서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가득 담겨있는, '주장하는 글'입니다. 그런데도 이게 그저 질문을 모색하는 글이라는 말로, 이 글이 주장을 담고 있음에도 글의 구성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약점을 가리려 하는 것은 말 그대로 핑계에 불과하지요. 이 글이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에, 글은 근거도 함께 담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논증적 구성을 갖추고 있어야만 하고요. 이는 의무 교육 과정에서부터 대학의 글쓰기 강의에서까지 가르치는 올바른 글쓰기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글을 읽을 때 이것을 따지지 못한다면 독자로서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본문보다는 덧글을 보며 확실히 느낀 건데 "어설픈 논술 교사" "뭘 좀 제대로 아시고 말씀을 하시기 바랍니다." "눈을 좀 똑바로 뜨고 글을 읽기 바랍니다." "독자로서 매우 멍청한 처사" "제발 부탁입니다. 생각을 좀 하고 댓글을 다세요" 등 토론에서 상대를 깎아내리는 하지하의 수법을 쓰시는 분이군요. "쇼펜하우어의 토론에서 이기는 방법"을 완벽히 이해하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칼럼니스트로서는 실격이지만요. 도대체 어떻게 이런 분이 거울에서 칼럼을 쓰게 된 것인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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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ute 11.04.13 01:37 댓글 수정 삭제
    컬럼 내용의 문제는 차치하고 이 글을 읽은 "독자들" 중 한사람으로써 컬럼니스트의 환멸적 뉘앙스가 다분한 말과 마주하니, 이 컬럼니스트와는 소통조차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 마저 듭니다. 티아리님의 제시가 박가분님께 저런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모욕적인 처사였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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