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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박애진 인터뷰: 각인

2014.03.31 22:4803.31

박애진: 두 번째 작품집 <각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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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김지원(jxk160)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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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9일, 박애진님의 첫 번째 단편 작품집인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에 이어 <각인>이 출간되었다. 3월 중순, <각인>의 인터뷰를 위해, 다시 김지원(jxk160)과 박애진 작가가 태평양을 가운데 두고 한국과 독일에서 각각 카카오톡 창을 열었다 - 7시간의 시차를 넘어서 말이다. 다시금 각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을 모니터 앞에 두고, 반갑게 인사를 하고, 바로 인터뷰로 들어갔다.
 
 
1. 인터뷰를 시작하며 – 두 번째 작품집, 작품집 안의 작품들. 순서인가 테마인가?
 
김지원: 일단 역시 여는 질문으로. 지금 '두 번째' 작품집이 나온 건데요. 아, 출간 축하드려요!
 
박애진: 앙, 감사합니다. 
 
김지원 헤헤. 음, 저는 평소에 주로 다른 종류의 문건들, 즉 학술적인 문건들을 다루다보니 또 이렇게 문예 쪽 글을 보면 눈에 띄는 점이 있어요. 만약에 이쪽에서 이렇게 짧은 텍스트들을 모아 책을 낸다면 꼭 표시되어야 하는게 - 인덱스로든, 각주로든, 각 텍스트의 끝에든 - 개별 텍스트가 처음 출판된(반드시 어떤 정식 출판사의 종이책일 필요 없음, 첫 ‘공개‘에 가까운 개념일 듯) 년도예요. 그런데 단편 작품집엔 그게 없죠……. 
 
박애진: 전집에는 들어가요.
 
김지원 네 근데 전집쯤 되면, 이미 사료적 가치가 있는 거니까요. 이건 문예 담론 자체와는 또 다른 거 같아요. 문예학이 아니라 문예 자체에서는 그런 년도상의 순서라는 걸 그리 따지지 않는 거 같달까, 좀 더 극단적으로 나가자면, 순서라는 개념 자체가 좀 다르거나…… 중요하지 않은 거 같달까.
 
음 여튼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애진님의 작품도 지금 두 권이 순서로 나왔다지만, 이걸 꼭 '순서'로 봐야 하는 걸까요 아님 걍, 주제에 따라 자유롭게 골라잡아도 되는 걸까요? 특히 작가분 입장에서는, 독자가 그래도 순서대로 읽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상관없을까요? 단편집 내 단편들의 순서도 포함해서요.  
 
박애진: 문예 쪽은 사료 가치가 될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가가 아니면 첫 출판 년도를 일일이 적기 번거로워서 안 하는 걸까요. 저도 그걸 왜 안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여담이지만 거울에서 출간했던 B평에는, 비평 뒤에 해당 작가의 작품을, 미출간작까지 포함해 정리해서 넣었는데 진짜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저를 포함해 몇몇 작가를 정리했는데, 제 글도 제대로 기록해놓은 게 없어서 엄청 헤매며 했죠.
 
[각인] 순서는 출판사에서 거의 맡아서 결정했어요. [원초적 본능 feat.미소년]이나 [각인]이나 출판사에 맡겨버린 면이 많아요. 작품집 기획 들어갔을 때 제가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라서…….
 
김지원 음, 그러면 이어가는 질문으로……. 작품집들 두 권을 구상하실 때, 각 단편들의 집필 년도가 고려에 들어갔나요? 아니면 테마별로 모은 것에 가깝나요? 왜냐하면, 제가 알기로는 그래도 1권인 [원초적...] 쪽에 옛 글이 훨 더 많고, 2집 쪽이 상대적으로 거의 다 후기 쪽이라서요. 혹시 그런 집필 순서를 고려해서 모은 건지…….
 
박애진: 테마별로 나눴어요.  [원초적...]은 '성반전'과 사랑 이야기에 가까운 글로, [각인]은 소외자, 소수자, 이 쪽으로……. 집필 시기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어요.
 
김지원 아, 그럼 집필 순서로 (말하자면) 전기-후기로 나뉜 건 테마에 따른 우연이겠네요. 
 
박애진: 우연이라기보다……. 제가 글을 쓰는 방식이나 관심 있는 주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뀐 거죠. 그러다 보니 2권에 들어간 게 견주어서 더 신작이 된 거예요. 이를테면 작가가 소녀적인 감수성을 마침내(...) 벗어난 거죠.
 
김지원 아하…… 테마로 나누다 보니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시기도 같이 나뉘게 되었다는 거군요. 재밌네요. 
 
박애진: 그렇죠. [원초적...] 같은 경우에는 출판사에서 제안한 목차가 제 의견으로 좀 바뀐 게 있는데…. [원초적...]은 가장 예전 글과 최근 글에 길게는 10년 이상 차이가 나요. 상대적으로 최신 글 바로 뒤에 옛 글이 붙은 경우, 문장 밀도 차이가 화아아아아아아악 드러나서 도저히 못 봐주겠;;;; 어서 좀 바뀐 게 있어요.
 
2권은 목차 디자인도 고려해서, 제목이 두 글자로 간결한 글이 많다 보니 두 글자를 가운데에 몰고, 긴 제목을 앞뒤에 배치. 그리고 첫 글 '횡단보도'는 제목이 횡단보도라, 1집 [원초적...]에서 2집으로 넘어오는 건널목(?) 역할이라는 느낌으로 제일 앞에 배치했다고 들었어요.
 
김지원 허, 그건 전혀 생각 못 했던 요인인데……. 목차 디자인이 어떤 효과를 주기도 하나요? 좀 멀리가는 질문이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요.
 
박애진: 어……. 제가 디자이너가 아니라서……. 거기까지는 잘……. (웃음) 그냥 그랬다는 설명을 듣고, 아, 그럼 예쁘겠네, 라고 생각하고 그냥 수용했어요.
 
김지원 그렇군요. 음, 그럼 지금까지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두 단편 작품집들을 1-2로, 그리고 또 작품집 속 단편들도, 아무래도 독자도 그 정해진 순서대로 읽어주는 게 더 좋겠……다는 게 될까요? 작가 입장에서는요.
 
박애진: 네. 의도가 있는 배치니까 그렇게 읽어주면 고맙죠.
 
김지원 ……반성하겠습니다(먼 산) 
 
박애진: 흐흐흐흐흐흐;;
 
심연, 선물, 무대는 제가 나름 연장선상에 있는 글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을 듣고 출판사에서 붙여서 넣었다고 들었어요. 부연하자면 심연부터 밀도 있는 문장을 써야겠다는 걸 의식했고, 그게 선물, 무대까지 가게 된 건데……. 근데 문장 밀도는 사실 기본 중의 기본이라, 크게 내놓고 할 말은 아닌데 (웃음)
 
김지원 아, 그럼 그 얘기에 이어서 이제 작품으로 들어가죠.
 
 
2.  문장의 밀도와 내용의 투명한 사건성 – 둘은 상치될 수 밖에 없는가?
 
사실 나중에 하려고 적어둔 질문이었지만, 위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바로 생각이 나서, 지금 이용하기로 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미리 정해둔 질문 순서를 거의 지키지 못했다 – 신기하게도, 한 질문에 대한 애진님의 답변이, 그 다음 질문이 뭐가 되어야 할 지를 결정해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식으로 답변에서 바로 다음 질문으로 이어지곤 했다. 때문에 미리 적어둔 순서와 달리 질문 종이를 뒤지느라 바빴다. 
 
김지원 문장의 밀도 혹은 텍스트의 질감 말인데요. 확실히, 특히 [원초적...]의 몇몇 단편과 비교하면 그쪽 비중이 더 늘어난 감이 있어요. 그런데 이게 (문장이 밀도가 높다는 것이) 꼭 그렇지는 않지만 양날의 칼로 작용할 수도 있죠. 예컨데 <횡단보도>는 후기에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는 얘길 쓰셨죠? <심연>같은 경우도, 소위 말해서 딱딱 보이는, '이렇게 이해해라'하고 주어지는 듯한 사건은 없어요. 그대신 문장들이 있고, 아주 세밀한 단서 - 랄까? 감각들이 있는 거예요. 상징이 펼쳐지는 방식이라든가. 아무래도 내용적으로는 접근 난이도가 높아진다고 해야 할까요, 또 한편 바로 그게 묘미라고 해야 할까요.
 
작품집 두 권 사이의 이런 변화는, 그러니까 그냥 문장 밀도를 더 강하게 변화시킨다는, 문장 자체라는 한 차원에서의 강약의 문제가 아니라, 글쓰기 자체의 스타일이 좀 변하는 거라고 볼 수도 있는데요. 거칠게 말하자면 사건 위주에서 문장 위주로……. 양자가 꼭 상치된다는 건 아니지만, 무게 중심이 변하는 거지요. 작가로서 혹시 이 양극 사이에서 고민하신 적이 있으신 건 아닌지…….
 
박애진: 네,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걸 느낀 적이 있어요. 그걸 극복하는 과정에서 글쓰기 방식이 변하기도 했어요. 좀 더 초기작이 많이 모인 [원초적...] 수록작은 명확한 스토리가 있는 글들이 많죠. 그러다 심연을 쓰면서 명확한 이야기구조보다 문장과 상징으로 서술하는 방식으로 넘어가게 되었달까요. 명확한 스토리에 밀도 있는 문장과 상징을 추가하는 게 아니라, 앞에 것에 무심해지고, 뒤에 것에 방점이 찍혔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운데……. 음……, 잠깐 생각을 좀 정리해볼게요.
 
김지원 무심해졌다기보다…… 아마 보편적으로 봐도, 양자를 다 살리는 건 어려운 걸 거예요. 그게 양쪽이 다 잘 되는 글은 실제로 거의 못 봤고, 음……. 이론적으로 말해도, 극단으로 가면 결국 전자(내용) 떄문에 후자(텍스트 자체)는 투명해져버리는 것, 반면 후자가 강해지면 그 자체가 불투명해지면서 전자를 압도하는 걸로 여겨지기도 하죠. 
 
박애진: 어, 그거 맞는 말이다. 둘 다 잘하기, 특히 한 글에서 둘 다 하기 엄청 어렵죠. 
 
스무 살 초반에 환상문학에 빠졌어요. 십대에 쓴 글들도, 딱히 환상문학, 장르소설을 의식한 게 아닌데도 환상성이 있었지만……. 암튼 환상문학에 빠지면서, 하늘아래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던데, 환상문학이라면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환상문학에 매력을 느꼈고, 독특한 소재에 집착했죠. 제목도 튀게, 재미있게 지으려 했고요. 그 때 
쓴 글들은 제목도 다 길어요. <왜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지?>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 등등…….
그런데 또 그 시기 글들이 비슷한 면들도 있어요. 절영님이 [신체의 조합] 리뷰에 썼던 말처럼, 무언가를 잃으며 끝난다거나 [원초적...] 리뷰를 쓰신 정도경님 표현을 빌리면 소녀적인 감수성과 소유욕을 담은 글로 읽힐 수 있다거나……. 어떻게 읽든 결과적으로 비슷한 주제를 변주하다 보니 우물이 마른 거죠. 이도 저도 아닌 되게 재미없는 글들 나오기 시작하면서, 저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벽을 만났다고 생각해요.
 
20대 초중반까지 쓴 글들은, 착상이 떠오르면 며칠 만에 바로 썼어요. 즉, 노력해서 만든 글이 아닌 거죠. 떨어진 거 그냥 주워먹은 거. 그런데 더 이상 공짜로 열매가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이런 식으로는 더 성장할 수 없는 지점이 왔달까, 그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다 해봤다고 해야할까……. 몇 년 간 글을 못 쓰고 방황하는 시기가 있었고……. 왜 못 쓰지? 왜 안 오지? 더 이상 못 쓰나? 괴로웠던 시기가 있었고……. 뭔가 새로운 걸 찾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 전에 쓰던 글, 소재, 방식은 이제 다 버리고,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왔었고요.
 
그 때 심연을 쓰면서 새 활로를 찾았달까, 한 단계를 지나갔달까, 그런 것 같아요. 그러면서 뭔가 소재에 집착하거나 특이하고 남다른 걸 찾아 헤매는 게 아니라 간결하면서 밀도 있는, 대놓고 극적인 사건을 그리지 않아도, 이야기가 서술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제목도 최대한 간결하게 하다 보니 한 동안 모두 두 글자;;; 제목만 나왔고……. 
 
김지원 어 그렇네 , 그 때가 두 글자 제목들의 시절이구나……!
 
박애진: 글이 계속 자연스럽게(?) 나와줬다면, 이미 하던 스토리성에 밀도를 추가할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근데 그 쪽이 아예 막혀버리니까, 반대 편에서 길을 찾았고 그러다 보니 명확한 스토리가 없어서, 읽기에 따라 이해하기 어려운 글들이 나온 것 같아요.      
 
이런 답을 듣고 나자, 그렇다면 저런 전환점에 영향을 준 다른 작가나 문학 혹은 예술 작품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김지원 음……. 그리 말씀하시니, 걍 또 문득 떠오른 궁금증……. 혹 그때 그럼 그런 전환점의 영향? 혹은 계기? 가 된 문학 작품이나 다른 글…… 매체가 있었을까요?
 
박애진: 명확하게 어떤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지금 생각나는 작품은 최인훈의 화두네요. 굉장히 두꺼운 두 권짜리 책이었는데 정말 천천히 한 단어, 한 단어, 느리게 읽어야 맛을 느낄 수 있는 글이었고……. 인상적이었어요. 그렇다고……. 꼭 그 책의 영향을 받아서, 라고 말하기는 또 좀 수줍고……. 그 책을 읽으며 막연하게나마, 진짜 거대한 산맥같은 작가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 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영화는 [8월의 크리스마스]. 학교 다닐 때 교양과목으로 영화 수업을 들었어요. 조별 과제로 영화를 한 편씩 맡아 분석해 와야 했는데, 제가 있던 조가 [8월의 크리스마스]가 된 거예요. 전에 이미 본 영화였는데, 분석하려고 다시 보면서 완전 감탄했어요. 버릴 장면이 하나도 없었어요. 일상적인, 평범한 장면으로 보이는데 굉장히 많은 의미가 담겼더라고요. 마지막으로 본지 오래되어, 수줍은 기억과 제 해석;;으로 말하자면 설거지 하는 장면이 두 번 나와요. 첫 번째 장면은 죽을 병에 걸렸든, 어쨌든 밥을 먹었으면 설거지를 해야 하는, 일상을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담겼고, 두 번째 설거지 장면은, 삶을 정리하는 느낌이었어요. 이렇게 사소한 장면에 많은/다른/다양한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죠.
 
그리고 블레이드 러너. 역시 여러 번 봤는데, 그 중 한 번이 친구가 그 영화 분석해야 하는 과제를 맡아서 옆에서 같이 보며 연구(?)했을 때예요. 새삼 버릴 장면이 하나도 없는, 아름다운 영화라는 걸 느꼈죠. 
 
지금 언급한 작품들을 보며, 나도 저런 식으로 써야겠다, 고 꼭 의식했다는 말은 아니예요. 하지만 어딘가 제 마음속에 남지 않았나 싶네요.
 
 
3. 사후적 수정 – 나중에 고친 걸까, 나무 속에 처음부터 있었던 부처를 여전히 깎아 파내고 있는 걸까
 
김지원 히히, 과거로 거슬러가서 전환점 얘기를 하고 나니, 이번엔 '지금'으로부터 과거에 손을 대는 얘기를 하고 싶네요. 그런 식으로, 앞의 얘기랑 어울리는 질문이니까 그럼 여기다 붙일게요. 이것도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흑흑…….
 
박애진: 히히
 
김지원 음, 수정하시면서 특히 엔딩을 좀 바꾸신 글들이 있죠. <집사>랑 <학교>, 맞나요? <학교>가 특히…… 음…… 작품집들 속 단편을 처음 쓰셨을 때랑, 지금이랑 아무래도 시간 간격이 좀 있으니, 수정을 할 여지도 상대적으로 컸을 거 같긴 해요. 작가 본인은 후기에 현재 고친 것이 더 어울리는 엔딩인 거 같다 하셨지만……. 맨 처음 이 글을 쓰셨을 때, 그때 당시에는 어땠어요? 그러니까, 그때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금의 엔딩이 아닌 그 엔딩으로 쓰셨는지, 기억이 나시나요? 그때는 혹시 또 나름 '이 엔딩이 최고임'하셨을 수도 있잖아요. 
 
박애진: 네. 둘 다 그 때는 그게 어울리는 결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집사의 경우 어떻든 어떤 의지를 보인다는 점에서, 그런 결말을 냈던 거고요.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글거리기 시작했어요. 왜 꼭 그래야 하지? 라는 생각도 들고. 진부하기도 하고. 그게 마음 한 켠에 남아있다가, 어느 날, 그래, (지금 모습으로) 바꾸자, 고 마음을 정했는데, 이미 앱솔루트 바디에 수록도 되었고 해서 그냥 놔두다가 기회가 되어서 바꾼 거죠.
 
김지원 아…… 오래 전부터 생각은 계속 해 오셨던 거군요.
 
박애진: 네. 학교도 마찬가지. 바꾸고 싶었어요. 역시 이미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에 수록되어서 놔두었는데, 지금 느낌으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꽤 오래 했거든요. 나중에 작품집을 내게 되면 꼭 바꾸리, 라고 생각했어요. 학교의 경우 큰 차이는 없어 보일지 몰라도 처음 버전은 포기, 라면 이번 버전은 패배, 라고 생각하거든요. 음……. 포기는 그 인물답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중에. 진 거지, 포기한 게 아닌 게 맞을 것 같았어요.
 
김지원  아하.  나 걔 (<학교>의 주인공) 쫌 귀여워요……. 친구면 못 견딜 거 같지만.
 
박애진:  꺅- 귀엽다니- 감사합니다.  (웃음)
 
 
4. 현실, 비현실, 낯설음 – 현실 개념의 문제와 장르 구별의 문제
 
A. 표면을 낯설게 하기, 혹은 더 깊은 곳까지 보여주기
 
김지원 ……다음 질문을…… 음 잠시만요……, 순서가 바뀌어서 흑흑…….
 
오랜만에(?) 꼬리 잇기가 끊어졌다. 그러니까, 답변으로부터 바로 이어져야 할 질문이 떠오르질 않아서, 그냥 미리 적어놓은 것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종이 쪽지들 순서가 뒤섞인 바람에 원래 질문들을 찾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김지원 아, 찾았다! 그럼 이거부터 가는 게 좋을 듯. <학교> 후기에 보면 '당선'이라는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 이렇게 낯설게 되는 걸 좋아한다는 얘기가 있거든요.
 
근데 그럼 단순히 네거티브하게 '~가 아니다'로 낯설게 되는 거 같지만……. 사실 전체 설정에 포지티브하게 딱 들어맞는 느낌이거든요. 그 단어가 '당선'인 게 <학교>의 그 세계에는 딱 맞아요. 그렇다는 건, 우리 세계에서도 사실은 그 단어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거죠, 저쪽 세계에서는 그게 공공연할 뿐.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방향의 낯설기 하기의 효과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 뭔가 이미 실증적으로 있는 것을 그저 끌어내어서, 표면으로 올려서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는…… 느낌이예요. 그래서 '낯설게 하다'라고만 하는 건 왠지…… 음……네거티브한 느낌만 좀 강하게 들려서…… 개인적으로는 쪼오끔 반감이 든단 말이죠! 그래서 무려 작가님 본인의 후기에 삐죽거려봅니다. 헤헤.
 
박애진: 후기에 '당선'이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을 넣은 게 편집자가 당선은 좋은 뜻이니까 바꿔야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전 어울린다고 해서, 그럼 후기에 왜 굳이 당선이라고 했는지 써달라고 한 건데……. 지금 위에 말씀하신 것처럼 '낯설게하기'만이 아니라 끌어내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던 것도 맞거든요. 당사자를 빼면 다 좋은 일이잖아요. 당선, 다른 말로 뽑히다, 인데 희생양으로 뽑힌 거고, 그럼 내가 아니니까 다들 좋죠.
 
김지원 엣, 그걸 바꾸라는 의견이 있었다고요? 저는 그 기준 잘 이해 못 하겠는데요……. 좋은 말이라는 이유라니…… .(훌쩍)
 
박애진: 전 계산하고 만들어내기보다 직관에 의지해 글을 써온 면이 강해서 가끔 작가의 말이나 후기 같은 거 쓰면서 이게 원래 이런 의도로 쓴 건지, 쓰고 나서 말을 만드는 건지, 가끔 헛갈리는데. <학교>를 쓸 때는 당선이 맞다고 느꼈어요.
 
김지원 에에, 꼭 나쁨/좋음의 구분일 필요는 없지만, 그런 하나의 기준을 두고 이루어지는 구분이 또 다른 차원의 동일성(실질적 투표 형식)의 발굴로 이어지고, 그에 의해서 해체되는 게 언어의 묘미 아닌감…….
 
아, 그니까 제 질문은…… 그냥 낯설게하기만이 아니라 뭔가 상징 효과를 노린 건 아닌가 했는데……. 이 뭘 의도하신 건 아니란 말이지…….(침울)
 
박애진: 다 의도했어요! 제 의도를 다 읽어내시다니 과연 통찰력이 대단하십니다! 꺅- 
 
김지원 으하하.
 
박애진: 전 불균형이 좋아요. 얼핏 보면 멀쩡해 보이는데 사실은 일그러져있는 거. 좋은 단어인 거 같은데 아닌 거.
 
김지원 네, 그런 걸 잡아내는 게, 특히 장르 글 쓰는 사람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리. 음.
 
박애진: 얼핏 보면 정상인데, 어딘가 망가져있는 거, 그런 거. 그런 저런 게 제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되며 당선이라는 단어로 드러난 거겠죠.
 
김지원 (흐뭇) 응 애진님 속에서요. 삐뚤삐뚤 (쓰다듬 쓰다듬)
 
박애진: 현실만으로 현실을 그리는 건 한계가 있달까, 제 경우 재미가 없달까. 꺅- 나 삐뚤어졌다고 이쁨 받았어!
 
B. 현실/비현실의 구분의 애매함 – 장르 구별의 애매함
 
김지원 음, 그럼 또 얘기가 저절로 이어져버려서, 다음 질문으로 갈게요. (종이를 뒤적거린다) 현실만으로 현실을 그리는 건 한계가 있다, 라는 거 사실 되게 멋진 표현인데 말이죠…….
 
 그…… 우리 인터뷰때도 잠시 비슷한 이야기했지만, 그 소설의 현실감이라는 거, 혹은 애초에 '하나의' 현실이라는 거, 경계가 미묘하죠. 2권에서 보면 사실 <심연> <무대> <횡단보도>는 굳이 장르일 이유가 없어요. 한편 <클론> <집사>는 소위 우리의 현실일 수 있어요. 다만 시간축의 변화일 수 있죠. 기술 발달이라든가. 그러면 장르로 치면, 굳이 말하자면 SF가 될 수 있죠. 또 한편 <일상>이나 <학교>는 다른 '공간'이라고 볼 수도 있죠. 시간축 변화로는 이 정도 혹은 이런 종류의 차이가 나올 수 없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만한. 이런 공간적인 차이로 가면 보통 아무래도 '판타지'라고 분류할 만한 요소가 들어가는 거겠고.
 
그러나 써놓고보면 역시…… 경계가 참 애매해보이죠. 문학 장르로 구분하자면, 어디까지가 그냥 우리 세계를 다루는 순문학이고, 어디까지가 시간축, 그니까 소위 SF라고 말하는 거고, 그럼 어디까지가 꼭 판타지라는 거지? 하는 질문이 되겠고, 다시 이 장르 구분 문제를 '현실'이라는 개념 문제로 되돌리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이 현실이 어디까지 '확장' 가능한거지? 의 문제가 될 테죠.
 
이 두번째 작품집은 특히 거의 다 '한국', 혹은 우리 주변 상황이 무대예요. 첫번째 작품집인 [원초적...]에 비하면 특히 외국이라든가, 일부러 아예 대놓고 다른 시공간에서 시작하는 글은 없어요. 우리의 현실…… 이랄까, 그렇게 말해질 수 있는 시공간이 일단 늘 시작점이라는 느낌이죠. 그 현실의 변주랄까. 그래서 특히, 이런 '현실'이라는 것 개념 자체의 문제로부터 소급되는 장르 구분의 문제…… 라는 것이 막 읽는 사람(아님 최소한 나)의 머리에 들어오게 되어요. 
 
 음……. 그니까 줄여 말하자면, 저 소설 장르 구분의 문제, 즉 순문학/SF/판타지의 구별이라는 문제와 현실/비현실의 구분이라는 개념상의 문제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지, 작품집 만들면서 이쪽 관련 생각 해 보셨는지 여쭈고 싶었는데 말하다보니 왜 무슨 기말 과제 테마같지………… (한숨)
 
박애진: 으하하하하하 (웃음)
 
김지원 …… (울먹)
 
박애진: 뭐, 저도 그냥 마구잡이로 떠들떠들 식으로 대답(?)해보자면 [원초적...]에 있는 글들은 보색대비에 가깝달까요. <왜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지?>도 등장인물들 이름은 안 나오지만, 학교 풍경이나 그런 모습이 그냥 한국 중고등학교 같고, 네므와 완전한 결합은 이름을 바꾸며 더 대비를 주었고……. 분명 환상성을 주요하게 썼지만 전 환상문학/판타지 소설을 써야지, 하고 장르를 쓴 건 아니에요. 그냥 제 글이 환상문학이라는, 참으로 넓고 관대한 틀 안에 들어가는 글이었던 거죠. 그리고 제가 SF 작품집에 단편을 수록한 적이 있긴 해도 SF 작가라는 타이틀은 득하지 못했는데……. 우리나라에서 SF 작가라는 타이틀을 득하는 건 쉽지 않아서, 사실 탐나긴 했거든요. 뭔가 힘 주고 공들인 기획들은 SF 쪽에서 나오기도 하고……. 팬들 사이에서 고급 문학이라는 인식이 있기도 하고…….
 
거울 필게에서 제 글이 SF냐 아니냐 논란이 있었잖아요. 나중에 곱씹어 봤는데, 당시 제가 방어적으로 대응했던 이유가, 다른 분들 의도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얼핏, SF가 아니다, 다른 장르다, 라는 말보다는, SF가 되기엔 '부족하다'로 보였단 말이에요. 그게 묘하게 공격적인 방어를 하게 되더라고요.
거기에 더해서 아까도 말했다시피, 글이 안 나오던 시기에, 전에 쓰던 글들 방식은 다 버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못나간다는 강박관념도 잠깐 생겼었고……. 자꾸, 옛날엔 어떻게 썼지? 왜 지금 글이 더 별로지? 왜 아예 안 써지지? 이런 저런 것들이 있었고……. 이런저런 일을 겪고, 고민하고 그러다 제가 내리게 된 결론은, 나으 길을 가련다, 였던 것 같아요. 내 글, 나만 쓸 수 있는 글이면 되지, 어느 '장르'에 속하는가가 그렇게 중요한가. 어느 장르냐 하는 건 해당 장르를 좋아하는 팬들을 공략할 수 있는 상업적 판매 전략에 필요한데……. 이를테면 서점에서 어느 분야에 꽂히느냐, 같은……. 이게 애매하면, 분명 판매 전략을 만들기 힘들 순 있겠지만……. 이러나 저라나 초판 다 팔기도 힘든데……. *농반진반* 그거 따져서 뭐하랴, 무엇보다, 창작이란 자기 것이어야 하는 거잖아요. 어딘가에 속해야 한다거나 속하지 못해 신경 쓰는 건 이상한 거예요.
 
앞 이야기로 돌아가서 물론 보색대비, 즐겁고 재밌었는데……. 그런 글도 썼고……. 굳이 '장르'에 연연할 필요 있는가, 가 되면서 근미래처럼 보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고…… 랄까……. 지금 내가 쓰는 글에 필요한 장치라면, 특정 장르 팬들에게는 달갑지 않게 들릴 말일 수도 있지만, 하나의 장치/소재 중 하나로 쓴다고 해서 뭐가 문제가 될까……. 근미래면 꼭 이러저러한 사회제도나 과학기술이 실제 삶에 미치는 영향을 다뤄야 하나, 나는 그냥 그 기술 하나만 이 이야기에 필요할 뿐인데……. 환상성을 쓰려면 꼭 환상성이 돋보이도록, 현실적인 면을 부각시켜야 하나 꼭 그래야 하나, 이를테면 중간색을 쓰게 된 거죠. 팔레트에 물감을 짤 때 고민하게 되는 색이 있단 말이에요. 파란 계열에 짤까, 녹색 계열에 짤까, 노란 계열에 짤까, 그런 색들이어도 되지 않나. 지금 그 색이 마음에 들고, 그 색을 쓰고 싶다면 굳이 규정되지 않아도 되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에…… 충분하려나. 
 
 근데 지금 쓰는 장편은 진짜 장르 규칙에 잘 맞는 판타지예요. 나도 쓸 수 있다! 꺄----
 
C. 현실로부터 혹은 현실로. 여행이란?
 
김지원 우와, 길게 답하느라 고생하셨어요……. 고맙습니다. 아, 이건 그냥 앞 질문에 달린 꼬마 질문인데……. 
이번 작품집에서, <심연>만 여행을 가서 외국 배경이잖아요? 주요 등장인물 중 닐 요놈은 백인놈인 거 같고…….
아무래도 문예사적으로 보면 '여행' 테마나 '이국' 테마는 또 나름의 상징들이 있는지라……. 이런 여행 테마 자체가 갖는 상징들을 의식하고 쓰신 건지, 아님 걍 필리핀이 아무래도 다이빙하기 더 좋아서라는 다이빙 소재의 특성에 부차적으로 따라온 건지 궁금하네요.
 
박애진: 일단 태국이었고요. (아, 맞다! 하고 김지원이 모니터 너머에서 이마를 쳤다) 음……. 심연이 말씀하신 그런 요상시런 면이 있단 말이죠. 근데 일단 다이빙을 소재로 하다 보니 해외를 배경으로 하게 되더라고요. 우리나라 바다에서도 물론 다이빙하는데 수온이 낮아서 좀 힘들고. 그 글이 낯선 공간일 필요가 있다 보니 태국이 되었죠. 태국이 된 건, 거기 가봐서 공간적 배경을 서술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고른 거고요. 심연 쓰느라 한 번 더 갔다가 아는 건 다 우겨 넣고 싶은 마음에 글이 과해져서 퇴고하며 지우느라 애먹었죠.
 
김지원 아, 그러니까 사실 전 바다 속은 이미 낯선 공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우린 육지 놈들이니까요. <심연>이란 제목도 바다 자체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고. 그런데 거기(바다)에 또 '외국'이 겹쳐지니까……. 이건 과연 낯설기의 강화인가…… .(아직 질문 중)
 
박애진: 네, 그렇죠. 우리나라에서 강도를 당했을 때보다 여행가서 강도를 당했을 때가 더 무서울 거예요.
 
김지원 ……아님 육지/바다라는 강한 수직 상징에 한번 수평 방향으로 칼집을 더 넣어서, 이쪽 상징성은 오히려 약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좀 했었죠. 앗, 이미 답변을…….
 
박애진: 아........
 
온라인 메신저로 인터뷰를 진행하다보니 긴 질문과 긴 답변은 엔터를 쳐서 몇 번에 나누어서 하기도 하는데, 그렇기에 가끔 이렇게 질문과 답변이 서로 도중에 엇갈릴 때도 있다. 애진님 답변을 읽고 다시 생각을 정리하면서 인터뷰를 계속 진행했다.
 
김지원 하기사, 그리 생각하니 그렇네요. 여행가서 바다에 빠지면 더 무섭긴…… 할라나? (...) 오히려 어딜 가도 바다에 빠지면 똑같이 정말 무섭다면, 그게 육지에 대한 바다 자체의 낯섬은 더 강조가 되지 않을라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작가분은 글케 생각하고 쓰셨구나. 끄덕끄덕. 여행이 '바다'의 낯설음을 강화하는 쪽으로 작동한다고…
 
박애진: 네. 서울 살면서 남산 한 번도 안 가본 분들도 많을 거예요. 그러니까 분명 이 도시에도 낯선 곳들이 아주 많죠. 근데 '언제든 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주말에 잠깐 시간 내면 되니까, 아니면 일 마치고 저녁에……. 근데 배낭여행은 돌아온 후 여행이 '꿈처럼' 느껴지는 강도가 더 심하다고 생각해요. 다시 갈 수 있을까, 라는 느낌도 더 강하고…….  진짜 그런 일이 있었나, 라는 게 필요해서…….  그리고…… 음…… 외국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이 있달까요. 그러니까 유학은 안 해봐서 모르지만, 배낭여행자는 아예 이방인이기에 그 쪽 규칙에서 나는 벗어난 존재이기도 해요. 그런 게 좀 필요했죠.
 
김지원 아, '진짜 그런 일이 있었나'라는 느낌이라면, 그렇죠. 여행이 아무래도…….
 
<각인>은 상당히 밀도 높고 만만치 않은 글들이 많은 작품집이라, 할 얘기가 많았지만, 시간도 많이 흘렀고 메신저의 스크롤 바도 한없이 올라가서(!), 남은 질문을 하나만 더 하고 슬슬 끝을 맺기로 했다.
 
 
5. '글'은 설명하는 것이 아닌, '보여주기'를 하는 것 – 다양한 스크린들의 중층 
 
김지원 그럼 정해뒀던 질문들 중 하나만 더 하고, 이제 닫는 질문으로 갈게요. 음…… 좀 거칠게 선포하자면(!), <무대> <클론> <살아남은 아이들>은 유럽에서 출판하셨으면 (한국 사정은 잘 모름) 누군가 상호매체성 혹은 상호장르성으로 파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엄숙) 
 
박애진: 헤에…….
 
김지원 흐흐. 첫번째 작품집에서도 그림의 역할이 두드러졌지만…… 여기서는 특히, 예컨대 <무대>같은 경우에는 소설의 문자적 서술 방식이랑 연극의 상연 방식이 서로 맞물려있어요 그리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그림을 통한 공간적 복제 혹은 변주가, 소설의 시간적-사건적 이야기의 흐름과 맞물려있죠. 애진님 글에서는, 이런 매체 사이사이의 맞물림 부분이 많아요. 그림/글의 맞물리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전에도 얘기했지만. <무대>는 연극 연출이 그대로 서술이 된다거나. <집사>는 또 로봇 매뉴얼이 감정 서술이 된다거나. 글이라는 매체 혹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그저 뭔가를 바로 내용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매체나 장르와 맞물리면서, 한 겹 더 매체 자체의 중층을 오히려 더하는 거죠. 
의식하고 쓰셨든 아니든, 평소에 작가분 자신이 그런 식으로 다른 매체나 사물을 많이 인지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었어요. 어떤 것이 작동하거나, 또 뭔가 TV 등 다른 매체에서 상연되는 걸 보면, 이게 소설의 서술 방식과 대응되는구나, 하는 식으로? 소위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 자체…… 도 그렇고요. 독자 입장에서는, 작가가 그런 눈을 갖고 있는 걸로 보여서요.
 
박애진:  아…… 잠깐만요……. 어…… (두번째 작품집의) 권말 해설 텍스트를 수정하셨나요. 집사에 대해서…… 그러니까 '섬세하게 표현된 게 감정의 발현인지, 아니면……', 그 구절 찾는 중…… 엥. 왜 없지. (출간 전에 파일로 먼저 받았던 권말 해설 텍스트를 뒤적뒤적)
'그토록 섬세하게 발전해가는 창 밖 풍경에 대한 묘사는 로봇이 사람처럼 마음을 갖고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반대로 마음이란 결국 스크린의 도상 프로그램일 뿐이라는 것인지, 그 답은 굳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 이게…… 왜 책에는 없지.
 
아! 작가분이, 해설자가 나중에 수정해버렸던 부분을 찾고 계신다. 그 부분이 맘에 드셨었나보다. 괜히 고쳤나……. 본인도 저걸 수정해서 없애버렸던지 어땠던지 확실히 기억이 안 나서, 지난 파일들을 뒤지다가 결국 아무래도 그 부분은 출판본에서는 수정한 것 같다고 실토했다.
 
김지원 제가 삭제…… 했나봐요……? 으으……. pp 382-383에 대응하는 내용인 거 같은데, 정확히 그 문장은 없네요.
 
박애진: 그죠? 음…… 암튼…… 나는 님이 쓴 저 부분에 대해 늘 의문을 갖고 있어요. 일단 1차원적으로 말하자면 글은 말하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거라고들 하잖아요. 그래서 보여주기를 어떤 식으로 할지 계속 생각하는 거. 역시 1차원적인 답인데……. 사람들이 자기자신을 설명하는 말로는 그 사람이 어떤지 알 수가 없어요. 아주 1차원적으로 말해서 누가 "난 잘 삐치지 않아."라고 말했다 쳐요. 그 사람 입장에선 사실일 수도 있어요. 다섯 번 삐쳤는데 그 중 한 번만 드러내는 거니까. 근데 옆에서 보기엔 잘 삐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는 거?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 '보이는' 것…….
근데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평가가 천차만별이듯……. 그러니까 어떤 '기준'으로 볼 것인가, 라는 거.     어떤 '눈'으로, 혹은 '창'으로……. 그렇게 보면 뭐가 보일까, 같은 거. 근데 그게 진짜 제대로 본 걸까, 같은……. 나 자신의 몸을 포함해……. 70%가 물이라는데 내 몸은 그냥 보면 고체잖아.
그런 건 계속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집사' 류의 매뉴얼대로 하는 움직임이냐, 생각/감정이 있는 행동이냐, 는 다른 글로 더 다뤄보려고 대충 얼개만 구상해둔 게 있고. 물론 그냥 대입한 것일 수도 있지. 육체/감정/이성(나도 이거 없진 않다.)을 가진 존재로, 나 자신을 넘어서지 못해서, 원에 점 두 개 있으면 사람 얼굴 떠올리는 것일지 몰라도……. 그러니까 애초에 글쓰기라는 게, 아무런 '의도'도 없이 할 수 있는 건 아니니, 아무리 다른 시각을 통해 보려고 해도 나는 이미 뭘 볼지 정해놨다는, 그게 소설의 한계라면 한계인데.
아무튼 계속 생각은 해요. 벗어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하고,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 위에 썼다시피, 얼개 없이 글을 쓰지 않는 이상, 어차피 뭘 볼지 정해놨다는 한계가 있어서, 완전 헛소리라면 헛소리인데, 다른 창, 다른 눈, 다른 방식으로 살피기, 살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나 계속 생각하기, 이런 건 하는 것 같아요.
 
김지원 하하. 그쵸. 벗어날 수 없다면 달리하는 것 뿐……. (먼 산)
 
박애진: 히히
아쉽지만 이제 닫는 질문으로 가기로 했다.
 
 
6. 인터뷰를 닫으며 – 새로운 단편 작품집은?
 
김지원 닫는 질문으로…… 걍 가벼운 질문이예요. 헤헤.
 음……. 장편들 쓰시는 후로 단편들은 전처럼은 많이 안 쓰시는 걸로 알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쓰시는 거 같던데……. 기회가 되시면 또 다른 단편선도 낼 의향이 있으신지요. 새 글이나 미공개 글들로 하시든, 또 일부 출판했던 글들도 함께 새롭게 모아서 내시는 것이든…….
 
박애진: 있죠. 일단 '숏컷'처럼 이번 작품집 어디에도 테마가 안 맞아서 못 들어간 아해들도 있고. 장편 쓰다 보니 확실히 단편 쓰기 힘든데. 가끔 착상이 너무 세게 오면, 장편님께서 기다려주셔야 할 때가 있으니 그 때 짬짬이 쓰는 거. 숏컷처럼 못 끼어든 아해들은 묶이려면 기다려야 할 것 같고. 음…… 거울에 올렸던 <나 너와 함께>가 [원초적...]에 넣을 수도 있는데 빠졌어요. 그게 그 설정으로 연작을 구상중이거든요. 그거 한 권 분량 되면 묶고 싶고……. 
트라우마 킬러, 이것도 연작이라서, 구상해둔 이야기들이 있어서, 역시 묶을 분량 쓰면 내고 싶고…….  문신, 여행가, 이렇게 가는 여행가 연작도 구상해둔 이야기들이 있어서 여행가 연작으로 묶고 싶어요. 근데 이건 작품집이랑은 성격이 또 좀 다르긴 해요. 연작이라…….
그리고…… (음산한 웃음) 신체 절단물만 모아서 한 권을……. (그러나 곧 박애진은 '아무도 안 사겠지'하고 제풀에 침울해했다)
 
김지원 에, 절단물이라니 그건 뭐죠? 본 기억이 없는데…….
 
박애진: 신체의 조합이라거나……. 완전 엽편으로 이상한 글들 두어 편 있어요. 애가 막 본드에 붙어서 어쩌고 하는…….
 
김지원 아 그거요 (웃음) 
 
저렇게 설명하니 기억이 났다. 굉장히 무서운 글들이었던 게 그 느낌 그대로 바로 떠올라서, 그만 웃고 말았다. 
 
박애진: 요걸 묶겠다는 건 농담이고요……. (김지원이 또 메신저 창에서 ‚에휴 변태‘하면서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변태다. 암튼 그렇습니다! 
 
김지원 헤헤…… 네, 잘 알아요(먼 산). 여기서 접겠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박애진: 인터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번인가 무겁고 진지한 대화를 했던 거 같은데, 마지막엔 웃으면서 끝이 났다. 랩탑을 닫고 나서 둘은 또 각각 다른 나라에서 각자 갈 길을 갔지만, 언젠가 또 만나서 이런 식으로, 글에 대해 서로 진지하게 또 즐겁게 얘기할 날이 있을 것이다, 둘 다 계속 어떤 식으로든 글을 쓰는 일을 하는 한 말이다. 다시 그때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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