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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를 쓰려면 무슨 공부를 해야 하나요

▲ 이런 걸 먼저 공부해야 하나요? (ⓒgettyimages)

 아직 맹아의 단계에 있는 한국의 창작 SF계에는 미처 조명되지 못한 작은 미스터리가 있는데, 구성원들을 다 꼽아봐야 수십 명이 넘기 힘들 이 판에서, 같은 학교 같은 과 출신의 작가가 무려 세 명이나 있다는 것이다. 확률적으로 보면 이것은 마치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서 같은 기획사 소속 아이돌이 셋이나 배출된 것과 비슷할 정도의 우연이다. 해당 학과는 학년당 오십 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과이며, 졸업생들은 대부분 유학을 가거나 행정관료가 되거나 언론계에 진출하거나 대기업에 입사한다. 예외라고 해봤자 승려가 되거나 하는 정도다. 여타의 예술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경우 또한 거의 없다.

 나는 이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나머지 두 사람이 대학원 때 같은 지도교수 밑에서 수학을 했다는 점을 감안할 지라도 유달리 공부 안 하기로 유명해 학부졸업을 못할 뻔했던 나까지 포섭하는 무언가의 공통점이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사회과학 계열에서는 그래도 비교적 역사와 철학과 문화를 강조하는 과이므로 그 분야가 ‘글쓰기’였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대체 왜, 장르인가? 왜 SF이고 판타지인가?

 그러다가 나는 얼마전에 예전 강의노트에서 적어두었던 문구를 발견하고는 뭔가 어렴풋한 느낌을 잡았다. 그 문구는 이것이었다.

 내가 죽었다 깨나도 책 써서 700만권 팔겠어? 그러면 동막골은 그거보다 좀 더 가야 되지 않냐. 충무로에선 굉장한 상상력의 해방이라고 하는데 그거야 오인의 해병 수준에서는 그렇죠. 동막골은 그 동안의 지적 상상력이나 흥미를 재밌게 보여주는 게 있는데 유토피아를 희망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트라우마의 극복은 힘들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내가 감독이었다면 어떻게 찍었냐. 만약 그 미친 소녀의 눈으로 봤으면 어땠을까. 전쟁이란 건 어떤 의미로 미친 짓이니까. 사실은 전쟁의 속에서는 미친년이 제일 정상인일 거예요.
――― 하영선, 외교학과 전공수업 '한국외교사' 20050913

 이 말의 기저에는 국제정치학이 던지는 핵심적인 의문이 깔려 있다. 모든 학문에는 학문적 열정을 추동하는 핵심적 의문이 있는데, 이를테면 사회학은 ‘사회문제는 사회의 책임인가 개인의 책임인가’를 탐구한다. 사학은 ‘역사는 객관적 사실인가 주관적 해석인가’에 대해 탐구한다. 인류학은 ‘인간은 왜 다르고 어떻게 다르며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탐구한다. 국제정치학의 1차적 의문은 이것이다. ‘왜 전쟁이 나는가?’ 그리고 거기서 더욱 발전한 의문은 이것이다.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주체들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 대부분은 이런 일이 벌어진답니다. “광선총 발사!” (ⓒgettyimages)

 그리고 공교롭게도, SF 혹은 판타지로 대변되는 장르소설들이 추구하는 의문 또한 이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SF를 규정하는 것이 미래사회 내지는 신기술의 개발같은 문제라고 여긴다. 판타지란 신비한 세계에서 상상속의 종족이 이상한 마법을 쓰는 거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두 장르의 핵심은 소재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세계관에 대한 상상이다.

 신기술의 도입이나 외계인의 등장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의 세계관에 미묘하거나 혹은 전격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가 전혀 다른 종류의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곳을 상정함으로써 전혀 다른 세계관을 구축할 수도 있다. SF와 판타지는 그런 세계관 하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다루는 장르이며, 그 기저에는 한 개인이 독립적 개체이기 이전에 자신이 속한 세계의 법칙과 불문율에 종속된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래서 나는 (공부는 잘 안했지만 아무튼 주워는 들었던) 나의 전공수업들을 떠올려봤을 때, 우리가 조명했던 대부분의 순간은 그런 상이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조우하는 그런 때임을 깨달았다. 처음 서구 열강과 맞닥뜨린 구한말의 조선인들, 이미 정글의 법칙을 일찌감치 체득한 일본에게 잠식당하던 그들, 이데올로기를 통해 가상의 국경을 만들어버린 어제의 동족들, 한 가족의 신발장 안에 짚신과 고무신과 구두가 동거하는 기이한 풍경들……

 그리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내가 왜 그 과에 갔는지도 새삼스럽게 떠올려보았다. 입학원서를 쓸 때, 나는 단순히 외국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인지하는 자신의 의도가 간단하다고 해서 그 기저에 깔린 원인마저 단순한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모르는 외국어를 들을 때의 낯선 느낌이 좋았다. 처음 가본 길에서 느끼는 막막함이 편안했다. 전혀 다른 문화적 관습을 익혀야 하는 것은 고역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 그렇지 않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나는 그랬다.

 그리고 이것은 졸업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그 낯설음에 대한 감각이 꼭 외국에 가야만 충족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중파 TV조차 닿지 않는 심심산골의 문화적 관습과 생경한 사투리도 좋았다. 기존의 사회적 관습과는 전혀 다른 공동체나 교육적 체제를 실험하는 것도 좋았다. 아주 낯선 예술작품이나 공연을 접하는 것도 괜찮았다. 말하자면 나는 외국에 가고 싶었던 것 이전에, '다른 종류의 세계'에 진입하는 그 경계적 감각을 선호했던 것이다. 여태까지 익숙하게 느꼈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지며 발을 딛고 있는 땅이 홀연히 사라지는 듯한 그 느낌.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새롭고 신비하며 한 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그러한 정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잊어버린, 태어나 몸을 일으켜 걷고 말을 배우며 느꼈던 그 경이로움을 나는 다시금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창작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신춘문예 일정이나 문학상 수상작을 뒤적거리지 않았던 이유 또한 명약관화하다. 왜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세계에서까지 지겹고 익숙한 세계의 박제를 다시 보아야 한단 말인가? 진지한 주제의식과 경직된 세계관이 곧 동의어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어찌보면 필연적으로 장르문학의 세계에 참을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 아니 골방에 처박혀서도 이런 낯설음을 맛볼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돈 버는 길이군!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과제가 있었다. 대체 그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 자체는 어디에서 왔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그런데 얼마전, 엄마에게 소소한 수다를 건네던 나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모로코 식당에 가서 처음보는 콩 튀김을 먹고 왔다는 나의 말에 엄마는 이렇게 답했다.

 “거기 어디니? 모로코 식당? 아~ 나는 모로코나 알제리에 가서 살고 싶어. 지중해에서! 난 거기 음식들 너무 좋아, 음악도!”

 그날 나는 낯선 것에 대한 선호를 물려주신 어머님께 감사하며 나중에 책써서 대박을 내면 꼭 엄마를 마라케쉬나 알제에 보내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니 그전에, 다음주에라도 모로코 식당에 가서 양고기 스튜 정도는 사드려야겠다.


댓글 2
  • No Profile
    마귀할멈 09.11.28 23:29 댓글 수정 삭제
    이런 거 댓글로 달아도 됩니까;;;;;

    줏어서 들었던 -> 주워서 들었던
  • No Profile
    mirror 09.11.28 23:47 댓글 수정 삭제
    안녕하세요, 마귀할멈님. ‘그래서 나는 (공부는 잘 안했지만 아무튼 주워는 들었던) 나의 전공수업들을 떠올려봤을 때’ 이 부분 말씀이시죠?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수정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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