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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인터뷰 - 작가 배명훈을 만나다

진행 : 진아
질문 : 자하, SeeReal, 진아
정리 : 자하


 6월 초, 평일이면 해가 쨍하다가 주말이면 비가 오는 새로운 기후 속에서 배명훈 님을 만났다.
 배명훈 님은 2005년 제 2회 과학기술창작문예에서 {스마트 D}로 단편 부문을 수상한 후 30호부터 거울과 함께하기 시작했으며, 왕성한 활동으로 거울의 활력소이자 중심이 되어준 작가이다. 거울 외에도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김보영 외, 창비, 2007년 11월)  , [누군가를 만났어](배명훈 외, 행복한책읽기, 2007년 1월) 등 공동 단편집을 출간하고 무크지 [Happy SF], 장르문학지 [판타스틱], 웹진 [크로스로드] 등에 단편을 싣는 등 활발한 활동으로 지평을 넓혀왔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에 홀로 연작단편집 [타워](배명훈, 오멜라스, 2009년 6월)를 선보이며 기성문단과 장르독자층 양쪽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것은 신문과 웹을 조금만 뒤지면 알 수 있는 평범한 사실들일 뿐, 작가 배명훈에 대해서 알려주는 사실은 많지 않다.
 인터뷰 전에는 배명훈 님이 이전에도 많은 인터뷰를 해왔고, [타워] 출간으로 이번에도 많은 인터뷰와 기사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를 걱정했다. 그러나 실제로 나눈 이야기는 우려와는 정반대였다. 배명훈 님은 본인의 작가관에 대해, 이제까지 써왔던 작품들과 [타워]에 대해, 지금 우리가 사는 땅의 사람들과 장르문학 시장에 대해 속 깊고 확고한 의견과, 어찌 보면 “영업 비밀”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까지 펼쳐 보였다. 거기에 더해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고 희망까지 주었다. 작가와 하는 인터뷰는 언제나 영감이 충만한 경험이고 무언가를 배우는 현장이지만, 이날만큼 그것을 체감한 날은 없었다.

 그러므로 감히 이름 붙이노니, 이것은 작가 배명훈의 “독점 인터뷰”이다.

 이 날은 인터뷰에 언제나 함께하는 콤비인 진아와 자하 외에, [타워]의 연재 리뷰와 출간 리뷰를 쓴 SeeReal 님이 함께했다. 작가에 대한 이해와 참신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질문들로 이 날의 “독점 인터뷰”를 이끈 최고 공신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SeeReal 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배명훈님과의 대담 (환상문학웹진 거울 33호)
배명훈님 자작 인터뷰 (환상문학웹진 거울 46호)
[누군가를 만났어] 출간 인터뷰 1 (환상문학웹진 거울 46호)
[누군가를 만났어] 출간 인터뷰 2 (환상문학웹진 거울 46호)
건물 하나에 압축된 욕망의 정치학: 배명훈 연작소설 '타워' 리뷰1 (SeeReal님 리뷰, 환상문학웹진 거울 71호)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배명훈 연작소설 '타워' 에피소드 2, 3 리뷰 (SeeReal님 리뷰, 환상문학웹진 거울 72호)



작가 배명훈

자하  이제까지 굉장히 많은 인터뷰를 하셨거든요. 라디오도 나가시고. 어떤 인터뷰가 제일 기억에 남으세요?

명훈  기억에 남는 거요? 라디오가 제일 재밌었어요. 분위기가요.

SeeReal  분위기는 좋았는지 몰라도 듣는 사람 입장에선 좀 뻔한 질문들이었어요.

명훈  뻔한 질문들이긴 했는데 재밌었어요. 그때 든 생각이, ‘내가 혼자 아무리 이런 데 나와 봐야, 혼자 나오면 내가 SF 작가 대표인 것처럼 질문을 받으니까 안 좋구나’ 라는 걸 절감했고요.

뻔한 질문들이란, 한국 SF의 역사는 해저 이만리를 번역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최초의 창작 SF를 쓴 건 김동인이라든지 하는 장르 일반에 대한 질문이라고 했다.

명훈  근데 제가 그걸 사실은 대답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혼자 이런 데 나오면 계속 이런 질문 받는구나, 이건 혼자 하면 내 이야기는 결국 못하게 되는 거구나, 나 혼자 나오면. 그래서 내가 내 이야기가 부각되고 싶으면은 작가군으로 같이 가야 된다는 거를 절감하게 만들어준 현장이었는데, 저는 현장이란 느낌이 좋았어요.
저는 정말로 장르 문학 전체를 대변해주고 싶지 않은데, 혼자 나가면 대변을 해야 되는 거예요.

SeeReal  순수문학의 대안인 것처럼.

명훈  역설이에요, 역설. 나는 혼자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나갔는데, 혼자 나가니까 결국 전체 이야기를 해야 되는 거예요. 전체에서 나가면 난 내 이야기만 하면 돼요. 난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데……

그래서 일단 배명훈 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시작하니 나중에는 작가군이 함께 나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전략적인 작가 배명훈

평소에 배명훈 님에 대해서 갖고 있던 인상부터 이야기를 풀어보았다.

자하  정치적이라든가 외교적이라든가 그런 마인드가 굉장히 강하신 것 같아요.

진아  다른 작가들에 비해서는. 그런데 굳이 말하자면 사실 다른 거울 작가들에 비해서라고 얘기를 해야 되는 것 같고. 직업으로서의 작가가 되는 길에 대해서 전략적으로 짜가는 게 달라보이는 거라고 봐요.

배명훈 님은 정치적이고 외교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부연설명을 해달라고 했다.

SeeReal  저는 그 느낌을 받았어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누가 유재석과 강호동의 차이를 말하는 걸 봤거든요. 아, (배명훈 님은) 유재석 스타일이구나, 혼자 튀고 그런 것보다는, 글뿐만 아니라 외부적인 면에서도 사전 조율을 잘하고, 빠지는 곳을 채우는 감각이 있어서, 그런 과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자하  정치적이라는 말보다는 전략적이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긴 해요.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 이상적인 정치란 원하는 상을 만들고 보여주고 그걸 만들 수 있다고 믿게 만들고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정치적이라고 한 거예요.

명훈  전 딴 데 가면 안 정치적인데 거울에 오면 정치적이 되는 것 같아요.

SeeReal  거울이 극단적으로 비정치적인 집단이라서일까요.

명훈  그런 면도 있어요, 분명히.

제가 생각하고 있는 건 이래요. 수이라는 글에 서술하는 사람, 서술자가 나오는데, 그 사람이 이렇다고 서술하면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저는 그게 정치적인 행보라기보다는 그 서술자가 이렇게 서술하도록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라는 걸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세상이 나를 어떻게 서술해야 될까에 대해서도 신경 쓰고 있고, 그 다음에 거울은 또 어떻게 서술이 되면 좋을까, 이렇게.

저도 정치적이라는 용어를 싫어하지도 않고, 타워에 보면 아시겠지만 권력이라는 용어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부정적으로 생각 안 하거든요. 그냥 도구라고 생각해요. 잘못 쓰면 죽이는 도구고, 잘 쓰면 꼭 필요한 도구고. 전공이 그쪽이라서 그런가 봐요.

자하  외교학과셨죠.

명훈  네. 권력에 대해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죠.

배명훈 님은 외교학과 대학원을 졸업했고,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이름이 매우 긴 직장을 다녔다.

명훈  정말 제목만 들으면 이건 정말 SF에 판타지까지 하는 데구나 싶은 곳이에요. 미래학을 하는 데였는데, 미래학이란 게 시작된 지가 오래되지 않아서, 방법론 같은 게 아직 발전하지는 못했죠. 취지는 굉장히 괜찮았는데. 미래학을 제대로 했으면 계속 다니면서 뭔가 건졌을 텐데. 그래도 건진 건 많았어요.
거기 방법론이, 다른 체계적인 방법론도 있는데 아직 거기까진 못 가고, 최신 현상까지를  분석해서 가까운 미래까지 보는 일을 했거든요. 그래서 최신에는 굉장히 밝았어요, 학계답지 않게. 예비군 로봇에 나오는 RFID 이야기라든가 초록 연필 같은 것도 결국 그렇게 연결이 되는 부분이죠.

진아  명훈님의 영향을 받은, 받은 게 글에 드러나는 작가들이 이제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아요.

명훈  근데 아마 오해하시는 면도 있을 텐데요, 전공이 같거든요. 물론 전공이 같아도 각자 배운 건 다르긴 하지만요. 특히 SF나 판타지 쓰는 분들은 인문계 쪽으로 가 있거나 공대 쪽으로 가 있는데, 사회과학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감성으로 쓰면 비슷하게 보일 거예요, 그런 면이 꽤 있을 텐데.
그리고 우리 과 분위기도 좀 희한한 게 있거든요. 이번에 크로스로드에 글 실으신 설인효 씨라고, 그분도 우리 과 선배인데, 쪼끄만 과에서 장르 소설 쓰는 사람이 지금 세 명이나 나오고 있는데, 뭔가 희한한 분위기가 있는데 그래서 오해받을지도 모르겠어요. SeeReal 님 글 보면 제 글이랑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 순서가 바뀌었으면 분명히 반대로 오해받을 수 있는 게 있어요.


   ▲  이미 많은 인터뷰에서 얼굴이 팔리셨지만 거울식으로 배명훈 님을 찍었다.

배명훈의 전략 #1 - 작가 이력서

배명훈 님은 장르 작가 중에서 드물게도 (유일하다고도 할 수 있다) 문학상 수상 - 단편 발표 - 공동 작품집 참여 - 잡지에 발표 - 자기 작품집 출간으로 이어지는, 작가가 거쳐야 할 일반적인 과정을 모두 거쳤다. 모르는 사람은 실력이 통했다고도,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도 있을 테지만, 사실 상당한 부분이 배명훈 님의 자기 관리와 전략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이번에 알 수 있었다.

명훈  저는 이력서 써서 관리하잖아요. 그거는 딴 데 내밀 때는 굉장히 도움이 되거든요. 이력서 써서 관리하세요 라고 가끔 말을 해주긴 하는데 잘 안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말해봐야 (웃음) 그거 꽤 도움이 되는데. 왜냐하면 딱 보이니까.

자하  자기 이력서를 쓰는 거예요?

명훈  자기한테도 도움이 되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쭉 썼을 때 아, 내가 뭘 해야 할 시점이야 라는 게 보여요.

자하  시각적으로.

명훈  예. 저는 장편을 쓰거나 내 책을 내야 될 시점이었으니까. 그전에는 판타스틱 같은 데에 글을 싣는 숫자를 늘려야 될 타이밍에는 열심히 열심히 늘렸고, 그 다음에는 이게 너무 쌓이면 내 책이 필요한 타이밍이 되잖아요. 이력서를 보면 여기가 비어 있어요. 더해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전략이 바뀌는 거죠. 근데 취업 시장에서 이직을 잘하는 사람들은 그걸 항상 관리를 하고 있는 거거든요.

자하  보통 이쪽에 글 쓰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배명훈님이 좀 특이해 보여요.

명훈  본인한테 꽤 도움이 된다는 거죠. 저는 내가 작가야? 하고 묻는 데서 시작해서 그럼 작가로 서술되려면 어떻게 가야 되냐, 내 경력이 어떻게 돼야 내가 누가 봐도 작가가 되는 거냐, 이런 거였어요. 썼던 거, 인터넷 활동했던 거, 인터뷰했던 거를 적어놨던 거예요. 처음에 딱 작성해서 보는 순간, 제가 써놓고 제가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된달까 그런 느낌이었어요. 한 번 만들어놓으면 업데이트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자하  저는 편집자로서 이력서는 써봤지만, 작가로는 이력이랄 게 없기도 해서.

명훈  그게 전에 제가 유학 준비를 해야 했었는데 그때 이력서를 써야 되거든요. 괴롭게 썼는데 접고, 거절편지도 이만큼 받고 그런 다음에 쓴 거예요.
근데 유학가려고 이력서 쓰면서 든 생각이 그거예요. 이력서는 글의 목적이 딱 보이잖아요. 이거 한 페이지를 딱 보여줘서 이 사람이 내가 뭐 했는지를 알게 만드는. 그래서 나는 작가로서도 이력서를 써 보자 하고 시작했던 거죠.

자하  지금은 일이 있을 때마다 이력서를 업데이트하세요? 아니면 정기적으로?

명훈  낼 일이 있을 때마다? (웃음)

자하  책 나올 때라든가?

명훈  네, 그럴 때도 있고, 원고 보낼 때 앞에 보내면 되게 좋아요. 그냥 출판사에 보내보는 원고에도 앞에 그걸 붙이면 되게 달라보일걸요. 지금은 물론 출판 경력이 적으면 이력 부분도 적을 수밖에 없으니까 부각시킬 필요는 없는 단곈데, 웬만큼 경력이 붙으면 그걸 붙이는 자체가 플러스가 돼요.

진아  근데 쌓였든 쌓이지 않았든 보면 투고를 좀 해본 사람이랑 아닌 사람이랑 딱 차이가 나요. 안 해본 사람은 이를테면 투고합니다 라고 메일을 보낸 다음에 원고를 파일로 보내는 게 아니라 자기가 글을 써서 올린 인터넷 게시판을 링크한 담에 여기서 읽으시면 돼요 이래요.
아니면 그냥 원고 딸랑 보내는 거예요. 메일이야 답장 버튼을 누르면 되지만, 원고를 저장할 때 메일주소까지 저장 안 할 수도 있잖아요. 앞에 기본적인 연락처, 이름, 그리고 나이도 필요하긴 하고요. 그리고 직업.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림도 그려야 하고 그 사람이 직장이 있는지 백수인지 즉 글을 쓸 시간을 얼마나 낼 수 있는지. 되게 사소한 이력이라도, 너무 부풀리지 말고 객관적으로 딱 있는 사실만이라도, 필요한 것 같아요.

명훈  그러니까 이력서라는 게, 우리나라 이력서는 양식이 있어서 사진 올라가고 학교 올라가고 똑같잖아요. 근데 미국 애들 이력서 쓰라고 하면 양식이 없고 자기가 부각시키고 싶은 걸 앞에다가 두는 거예요. 형식을 자기 마음대로 해서 하는 거니까.

자하  우리나라에선 보통 자기소개서라고 뒤에 붙이잖아요.

명훈  그러니까 글로 줄줄 쓰는 거 말고 이력서 형식으로 만드는데 그게 정해진 양식이 없는 거예요. 자기 맘대로 자기가 부각시키고 싶은 대로 쓰는 거예요.

SeeReal  부, 모, 이런 거 없고…

명훈  없어요. 나이, 이런 거 안 쓰고 안 묻고, 성별 안 묻고. 그러니까 출판 경력이 적다고 그러면 다른 경력 있잖아요. 딴 사람이 봤을 때 관심이 가겠다 싶은 거를 일단 채워놔야 되는 거죠. 딴 사람에게 보일 용도라면. 근데 딴 사람에게 보일 용도가 아니라도, 자기 이력 관리 용도로도 만들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진아  직업이나 지금까지 해온 일도 필요한 게, 뭔가 이것저것 경험이 많은 사람이 글이 재미있을 수가 있어요. (명훈  맞아요) 내 인생이 파란만장하다 싶으면 그런 거 써도 되는 거고 (명훈  맞아요) 안 파란만장하면 안 파란만장한 대로 뭐, 학교 선생님이다 그러면 되게 심심한 직업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십대 애들을 많이 접하는 거니까.


배명훈의 전략 #2 - 시놉시스


명훈  그리고 긴 원고 보낼 땐 시놉시스도 써서 보내는 게 더 좋아요.

SeeReal  배작가님 예전에 장편 원고를 한번 메일로 보내줬어요. 이거 한번 읽어봐 이러고. 근데 그 원고도 물론 재밌게 읽었지만 그 앞부분에 형식을 유심히 봐서 항상 원고를 쓸 때 그걸 따라 썼어요. (명훈님 웃기 시작) 거의 갖다 붙여서. 시놉시스가 요약이 아냐, 시놉시스도 재밌게 써야 되는구나 하는 것도 느꼈어요.

명훈  그니까 그거예요. 시놉시스를 줄거리 요약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홍보, 한페이지짜리 홍보라고 생각을 하고.

SeeReal  그러니까 시놉시스를 읽은 사람이 다음 걸 읽도록 끌어들이는 낚시질을 해야 하는구나 하고 중요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자료였어요.

명훈  근데 저는 과학기술창작문예 낼 때 단편에도 앞에 한 페이지짜리 시놉시스 붙여서 냈어요. 단편 다섯 개를 냈는데, 그중에서 제가 미는 거 두 개에는 시놉시스를 끼워서 냈어요. 근데 물론 받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 낸 건 줄 모르고 따로 보잖아요.

배명훈 님이 말한 두 가지는 어찌 보면 아주 기본적인 것이다. 이것을 실제로 실천하면서 자기의 현재 위치를 분석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설정하는 태도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일이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프로의 태도.


거울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 - 작가와 함께 걷기

SeeReal  제가 창작을 시작한 뒤로 굉장히 벽에 부딪쳐 있었는데, 배명훈 님의 글을 보면서 아, 이렇게 하고 싶다기보다는 이런 게 있구나 하고 많은 걸 느꼈어요.
거울에는 단편들이 좍 있으니까 그 사람의 궤적을 좍 볼 수가 있잖아요. 정말 참을 수 없는 매력인 것 같아요.


   ▲  이날의 초특급 게스트 SeeReal님

자하  그게 참 재밌죠,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면서 댓글 달고.

명훈  맞아요.

자하  배명훈 님은 또 되게 재밌는 게, 나중에 뒤늦게 자기 게시판에 자기가 덧글 달아서 설명 풀어놓고 그러시잖아요.

명훈  옛날엔 달았는데 요즘엔 달면, 시간의 잔상 클릭하면 최근 덧글이 나오잖아요. 그걸 못하겠어요. 몰래 달아야 되는데.

SeeReal  잘 안 보이는데, 그건. 잘 안 봐요.

명훈  보이는데. 전 봐요. 좋다고 생각은 하는데 몰래 리플 다는 짓은 못하는 거죠.

자하  그거 보면서 되게 감탄했었어요. 이거는 ‘일상 속의 판타지는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쓴 소설이다, 라든가. 그래서 보면서 우와, 정말 성실하게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글로 승화시키시는구나 했죠.

SeeReal  의도를 드러내는 데에 물론 약간의 전술적인 부분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거리낌 없이 하시는 것 같아요. 이런 의도로 글을 썼다는 이야기를.

명훈  저는 스타일이, 완성작을 계속 내보내는 게 아니니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인, 실험 단계인 글을 계속 축적시켜서 올라가는 방식이니까요. 그걸 내놔야 되고, 내놓은 글에 대해서 집착을 크게 안 하는 스타일이죠.

SeeReal  그게 인디 뮤지션들이랑 닮았다고 느꼈어요. 일단 자기가 할 이야기가 있으면 자기가 실력이 어떻든 간에 나는 공연을 한다 하는 느낌. 나가서 관객을 만난다, 지금 할 수 있는 걸로. 그게 되게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명훈  그러니까 합평회에서 누가 이게 부족하다, 이점이 필요하다 그러면 다음 글에서 다시 쓰죠 뭐, 그렇게 돼요.

자하  그게 사실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을 하는데, 저는 그게 안 되거든요. 소심하고.

명훈  처음에는 제가 하는 것처럼 쓰는 걸, 쓸 수 있다고 다들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을 하고 말을 해준 적이 있어요.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이렇게 하세요 라고 한 적이 있는데 보니까 완전 다른 스타일이 하나가 뚝 있고 저처럼 쓰는 스타일이 있는 거죠. 다르더라고요. 이다님 보면 맨날 그런 생각 드는데, 정말 달라요.

SeeReal  그분은 영혼을 짜내서 글을 쓰시는…

자하  다르죠. 굉장히 다른 것 같아요.

명훈  저처럼 베타 버전을 내버리면 나왔던 글에 대한 집착도 굉장히 적게 돼요.

자하  근데 스토킹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배명훈님 게시판을 쭉 보면 아, 이게 변해가는구나 하는 게 보이니까. 완성도랑 상관없이 되게 절절한 글도 있었고. 그 회전초밥집 이야기라든가…  (41호에 실렸던 혁명이 끝났다고?) 그건 회전초밥집 갈 때마다 생각나요. 게다가 첫사랑이랑 결합시켜서… 정말 빵 터졌어요.

SeeReal  맞다, 그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여성을 참 잘 그려요. 아니, 성별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는 아닌데.

자하  남자 작가들은 종이인형처럼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명훈  성별 구분할 필요가 없으면 나는 웬만하면 여자로 해버리거든요.

SeeReal  그게 어색하지가 않은가 봐요, 썼을 때.

명훈  연습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그게 [매뉴얼]을 썼을 때 어, 여자 화자로 써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거든요.

자하  아, 그때 되게 놀랐어요. 여자 화자로도 굉장히 자연스럽게 쓰시네 하고.

명훈  그때 그 생각을 했었어요, 쓰면서. 그러니까 여성들만이 쓸 수 있는 걸 쓸 수 있다까지는 아닌데, 여자 화자로 써도 써지네? 그런. 저는 웬만하면 성별 구분이 남녀 상관없이 그냥 사람이면 일단 여자로 써요.

자하  전 그런 면을 기대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앞에 다이어트나 이웃집 신화 같은 것들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예언자 시리즈나 수이 같은 걸 더 좋아해서. 취향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한데, 취향의 문제를 넘어서 명훈님이 이런 것도 쓰네 하는 놀라움도 컸었고, 그때는. 이런 글도 쓸 수 있는 작가구나.

SeeReal  전 수이란 작품을 제일 좋아하진 않지만, 그런 걸 쓰는 작가라는 점이 좋아요. 뭐랄까 보이는 것보다 더 영역이 크다는 느낌이 있어서 기대를 품게 만들잖아요.

명훈  그것도 알아주는 덴 사실 거울밖에 없어요. 거울에 와서 해야 스펙트럼이 넓다는 얘기가 나오지, 딴 데 가면 자기가 읽은 거 가지고 전형화시키는 작업에 들어가니까.

자하  다음 작품이 나오면 달라지긴 하겠죠, 그래도. 타워까지는 그 얘기에서 못 벗어날 것 같지만, 그 뒤에 건.

SeeReal  독자든 편집자든 길들이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 저는 제 자체가 작가로서뿐 아니라 독자로서도 길들여지고 있는 단계기 때문에 그 길들여지는 과정에 따라 새로 보이는 것들의 쾌감이 분명히 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걸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그런 때가 올 거거든요. 이미 오고 있고.

명훈  계속 오래 잡고 있는 주제 중에 하나가, 서술자를 어떻게 믿어? 예요. 지금 말하는 서술자라는 게 누군가가 100년 전에 뚱당뚱당 만든 서술자를 다 가져다 쓰는 걸 텐데, 되게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정답을 말하는 사람인 것처럼 해서 그러는 걸 텐데 그걸 어떻게 믿어? 얘를 무너뜨리고 글을 써보면 어떻게 되나 하는 라인이에요. 그 라인을 꽤 오래 쓰고 있는데 수이가 제일 마지막에 나왔고 완성형이라고 생각을 하는 게, 나는 수이를 쓰면서, 그전에는, {고양이 플롯}(소재 앤솔러지 [달과 아홉 냥] 수록작) 때까지만 해도 단편까지는 이 서술방식을 할 수 있는데 장편은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수이를 쓰면서 장편도 가능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그걸 완성시키기까지가, 수이까지 갔을 때 그게 가능해진 거죠. 아, 이대로면 장편으로 가도 되겠다. 그전에 {스윙바이}([Happy SF] 2호 수록작) 같은 거는 일단 서술의 구조 자체가 그 분량에서 딱 끝나야 되는 게 제약이 되어 있는 거고 단편에선 되게 잘 어울렸었지만, 이걸 족쇄를 풀기까지는 연습을 많이 해야 됐던 거죠.


   ▲  배명훈 님의 손. 이 손에서 독자를 웃기고 가슴을 파기도 하고 찡하게도 하는 글이 나온다.

작가로 살기 - “길게 봐요”

SeeReal  글은 근데 뭐랄까 글 쓰는 게 어렵지 않은 작가랑 대단히 어려운 작가가 따로 있나요?

자하  그거 사람마다 좀 있더라고요. 비교적 쉽게 나와서 그 다음에 많이 고치는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되게 어렵게 나와서 고칠 거 별로 없는 사람이 있고.

명훈  저 최근에 깨달은 건데 사람이 이렇게 (바이오리듬 곡선을 손짓으로 만들며) 사이클이 있잖아요. 많은 작가들이 사이클이 내려갈 때 착상을 하거나 깊이 들어가 있는 뭔가를, 내면의 깊이를 내는 것 같은데 전 내려갈 때 안 쓰거든요. 올라갈 때 쓰지 내려갈 때 안 쓰는데, 그 차이일 수도 있어요. 전 글 쓰는 게 즐겁다고 생각하고 쓰는 거고, 뭔가 내면의 고통을 담아야 돼 라고는 절대 생각을 안 하고, 담긴 담지만 그걸 정말 바닥에 내려가 있을 때 담아야 된다고는 생각을 안 해요.

SeeReal  고통을 고통스럽게 담을 필욘 없다는 거예요? (웃음)

명훈  고통스러운 기억을 꼭 고통스러운 그 순간에 담아야 하나? 그래야 할 때도 물론 있지만. 정말 안 좋은 기간에 나온 글 저도 있거든요. 그 글이 다시 정상적인 상태로 끌어올려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거 아니면 요새는, 좋을 때 쓰지 나쁠 때 쓰고 있진 않아요. 재밌어서 쓰는 거라서 그런 것 같아요. 취미 생활 측면의 글쓰기.

자하  예전 글을 보니까 취미하고 특기에 글쓰기 얘기가 있던데 그럼 요새는 취미에다 쓰세요? 글 쓰기라고?

33호에 실린 배명훈 님과의 대담 말미에 나온 말이었다.

SeeReal  직업에다 쓰지 않나요.

명훈  구분이, 내가 더 재미있으면 취미에 써야 되고, 남들이 더 재미있어 한다고 생각되면 특기에 써야 되는데, 저는 취미 부분도 분명히 남겨놔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리 사람들이 인정을 해줘서 특기 칸에 넣어야 될 것 같더라도 내가 재밌어서 쓰는 부분이 없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는 거죠. 근데 지금은…. 아마 그걸로 돈이 되면 직업이죠, 사실.

자하  지금은 그렇잖아요.

명훈  현재는 그런데 언제까지 그럴지는 모르겠어요. 우리나라에서 작가라는 게 그렇게 탄탄한 기반을 제공해주는 직업은 아니니까.

자하  근데 보통 글을 써서 그걸로 돈을 받은 ‘적이’ 있으면 다 작가인 것 같던데.

명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문단에서 등단한 사람들은 그렇게 말들 한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도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제 경우는 공모전 당선되고 나서 “내가 작가 맞아?”하고 누군가에게 물어보고팠어요. 그런데 그거는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협회가 있는 게 아니니까. 그 이야기를 하니까 ida님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그러더라고요. (웃음) 나 작가 맞아? 하고.

SeeReal  그때부터 해서 명함에 작가라고 박는 이 순간까지 온 거군요.

명훈  근데 답은 남들이 그렇게 불러줘야 내가 작가가 된다 랄까, 누가 그렇게 서술을 해줘야 그 순간에 내가 작가가 되는 거지, 뭔가 증명서를 발급받으려고 애써서는 절대… 발급해주는 데가 없으니까

자하  발급해주는 데를 만들죠, 거울에서. (농담)

명훈  그래서 저는 길게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데뷔 과정이 이제 없으니까, 이 바닥에는 전혀 없어졌으니까. 그런데 사실 그렇게 데뷔를 하더라도 누가 그 사람을 작가라고 서술하기까지의 과정은 똑같거든요. 그때까지 안 되면 본인이 스스로 자기를 작가라고 유지를 못해요. 나 작가 맞아 하고 고뇌를 하게 돼요. 어디 가서 직업란에 작가라고 못 쓰는 거죠. 보통 다른 직업들이 다 있으니까 그걸 쓰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웃었지만, 편한 웃음은 아니었다. 왜,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그 경지 있잖은가.

SeeReal  저 질문 있어요- 스타 작가가 되려는 걸 일부러 피하실 거예요~? (초롱초롱 버전…;) 제가 보기엔 곧 스타 작가가 되실 것 같은데, 피하시려는 의도가 있나요~?

명훈  옛날부터 하던 이야긴데, 전 50살쯤에 데뷔를 하려고 했고, 그때까진 연습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영향 안 받는 선까지만 따라가야겠죠. 저는 도움이 된다는 건 알고 있어요. 제 스스로 어떻게 서술되느냐도 굉장히 관심 많았던 사람이고 그렇긴 한데, 영향 안 받을 정도. 근데 뭐, 좋죠, 잘 되면. (웃음)

근데 스타 작가라는 타이틀이 제가 얻고 싶었던 타이틀은 아니에요. 제가 가는 길에. 제가 얻으려는 타이틀은 대가였는데, 그건 50살 이후에… 50살이라는 건 남들 다 정년퇴임할 때라는 얘기고, 저도 직장을 계속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거였죠. 지금은 먼저 돈 벌기 시작하는 사람이 옷도 더 잘 입고 더 잘 살고 그러는 것 같아도 사실 그 나이 되면 확 다르죠. 우리가 훨씬, 그때부터 계속 뽑고 그때부터 제대로 일하고, 쭉.

진아  그러네요. 오십대는 작가로서 인생 경험도 많고, 작가로서 깊어지는 단계고, 일반 사람들은 정년 퇴임을 할 때지만 오히려 날개를, 진짜 날개를 다는 때…

SeeReal  방에 혼자 틀어박혀서 혼자 글 쓸 수 있는 나이…

명훈  뭘 해도 있어 보이기도 하고… 뭐랄까, 우리 아버지만 해도 퇴임하시고 나서 별로 할 게 없어서 작아지시는데, 우린 안 그래요. 지금 제가, 지금 몇 년 더 빨리 가느냐 하는 거 신경 쓰지 말라는 게 그거예요. 결국 그때 되면, 그때부터 진짜죠. 진짜 삶이 펼쳐지겠죠.

스타가 되면 그게 좀 당겨지겠죠. 당겨지긴 할 텐데, 그래 봐야 길게 잡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어차피 지금 스타가 됐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나중에 50살이 됐을 때 더 실제로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니까. 실제로 도움이 되는 건 그게 아니라 결국 실력이고, 얼마나 다양한 글을 써봤느냐, 그런 거랄까. 그런데 과정들을 밟아봐야 되는데 그 과정에 스타란 말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물론 도움은 많이 되겠죠. 작가가 되는 과정이 편집자 만나보고, 책 만들어보고, 교정지 받아보고, 제가 안 해봐서 몰랐던 것들도 계속 하게 되는데, 마케팅 전략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도 해보게 되고, 그런 과정들이 결국 작가로 만들어가는 과정일 거예요. 쌓아야 될 게 굉장히 많은데, 뭐 어디서 큰 일간지에서 등단을 한다고 해서 그게 되지는 않아요, 절대로. 더 얻어야 될 게 훨씬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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