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이번 주인공은 은림 작가님입니다. 거울에서는 초기부터 종이책과 오프라인 작업에 큰 도움을 주는 찬란한 디자이너이자 믿음직한 동료이고, 무엇보다도 독보적인 세계를 매 작품마다 드러내며 묵묵히 걸어온, 멋진 작가님입니다. 겸손하고 소탈하지만, 한 자 한 자 손으로 써내려 간 듯 묵직하고 진심 어린 답변을 통해 이분을 다시 한 번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의 사심이 듬뿍 들어간 소개글이지만, 다 읽고 나면 동의하실 거예요.)

1. 처음 보는 독자분들에게 간략하게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2000년 밀레니엄(!)에 여자들이 나무가 되는 집안의 이야기로 글쓰기를 시작한 은림(은으로 된 숲)입니다.
제 이름은 글을 쓰기 전에 정말 그냥 지은 것인데 이렇게 꾸준히 그 이름에 닮은 이야기를 쓰게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여러분, 이름을 잘 짓고 소중히 씁시다 ^^.
대표작은 「할머니 나무」, 『노래하는 숲』, 『나무대륙기』 입니다. 식물과 여성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적은 수지만 꾸준히 작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림작업도 합니다. 여러 가지 책 표지 일러스트 굿즈, 개성있는 일러스트 타로 카드들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습니다.

2. 처음으로 독자를 상정한 지면에서 글을 발표한 것은 언제인가요? 어떤 곳에서 어떤 글을 쓰셨는지 알려주세요.

1997년쯤? 나우누리 판타지아입니다 (처음 컴퓨터와 이어진 전화선으로 텍스트 커뮤니티가 발달한 것입니다) 동호인들끼리 서로 캐릭터 화 한 뒷담화(?)를 쓰고... 동호회 성향 답게 판타지를 주로 썼습니다.
좋아하는건 정통서사의 에픽/하이 판타지였는데 정말로 잘 쓰는 건 환상을 일상화 하거나 일상을 환상화 하는 구성이라는 걸 살금 알게되었습니다. 독자들도 그게 더 이해하기 쉽고 공감도 많이 표시해 주셨어요.
그다음 드림워커라는 글쓰기 공간과 거울을 만나 1년에 1~2편 정도씩 꾸준히 중단편을 발표했습니다.
작가라고 불리기엔 너무 적은 량인데 시간이 꾸준히 쌓이고 제가 포기하거나 멈추지 않아서 지금 작가로서 이 인터뷰지를 받았습니다. 너무 뜻깊고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 자신이 작가라고 확실히 느낀 계기가 있는지,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2000년에 황금 드래곤 문학상을 받았을 때는 아, 내가 글이란 걸 써도 되는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2001년에 같은 상의 다른 부분으로 연속 수상했을때 작가가 될 수도 있겠구나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최근까지도 제가 작가라는 느낌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냥 작업이 힘들고 즐겁고 고통스럽지만 계속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거 같았어요. 삶이라는 물속에 헤엄치면서 열심히 살다가도 가끔 작업이라는 숨을 쉬러 수면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죽는 고래 같았어요.
진짜 작가라고 생각할 때는 누군가 내게 돈을 주겠으니 글을 달라고 했을 때, 책상에 서서 (저는 서서 일해요^^)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아파지는 것도 마다 않고 마감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나머지는 그냥 간신히 먹고사는 1인입니다.

4. 인생의 책, 영화, 연극 등, 지금의 나를 이루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것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1970~2000년까지의 여성 만화들이요. 오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기억나고 말하고 싶은 작품이 많이 떠오르데 질문지를 보면 잘 생각이 안나요.
인상깊거나 반했던 작품은 정말 아주 많고..... 이야기를 만드는 데 원형 같은 것을 생각한다면 계몽사의 어린이 동화책들인 거 같아요.
그리고 읽어도 진짜 무슨 내용인진 잘 모르겠지만(...) 행간 사이에 무시무시하고 멋진 상상이 떠오르게 한 신화, 역사, 식물학, 인문학, 동물학 책들이요. 읽을 당시는 모르는데 거기서 받은 인상들이 마구 돌아다니다가 걸러져서 똑똑 고이면 단편이 되곤 했어요.

5. 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 또는 이때를 틈타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책이 아닌 다른 매체여도 좋아요!)

호프 자런의 『랩걸』이요. 여성이고 식물학자고, 엘리트이고, 엄마이고, 처한 상황에 분노하고, 집중하고, 어딘가 아픈 사람이지만 멈추지 않은 한 여성의 이야기요. 곧 발표될 러브크래프트 다시쓰기 연작(가제)에 제가 담당한 분량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6. 글을 쓸 때 어떤 것을 가장 신경 쓰시나요?

누군가를 상처입히는 거요.

7. 작가로서 지키려고 하는 습관, 피하려고 하는 습관이 있나요? 또는 징크스처럼 느끼는 것이 있나요?

오랫동안 다른 작가들의 본받을 만한 이야기들을 읽고 따라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전 잘 되지도 않고 그만큼의 분량을 써내 수도 없었어요.
그냥 이야기를 시작할 때 제가 끝까지 갈 수 있기만 기도할 뿐이에요.
정말로 글을 쓰면서 걷는 내내 밥먹으면서 운동하면서 돈을 벌면서 자기 직전에 모든 숨쉬는 순간에 기도만 할 뿐이에요(딱히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닌데요) 제가 이글을 제대로 마칠수 있기만요.

8. 글을 쓰면서 독자층을 생각하고 쓰시나요? 어떤 사람들인가요?

저는 굉장히 부족한 작가여서 (작가도 여러 종류가 있죠 ㅋㅋ) 독자나 목적을 생각하고 쓰기가 어려웠어요. 그냥 작품 안의 이야기를 거슬리지 않고 빠트린 거 없이 너무 과한 것도 없이 엮어내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거였어요.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그저 감사할뿐입니다.

9. 본인의 글 중 본인이 좋아한 글과, 남들이 좋아한(반응이 좋거나 많았던) 글을 소개해 주세요.

저는 「낙오자」를 좋아했어요. 여자와 남자가 서로 다른 마을에 살면서 가끔 번식을 위해서만 만나고 그 세계 안의 여성의 성공과 실패와 소통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가끔 그 세계관을 확장해 보고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요.
저는 제가 뭘 쓰는지 잘 모를 때도 많아요. 이렇게 해야겠다. 바라는 것은 있지만 이걸 노리자! 이런 것도 없어요. 그냥 그렇게 되어야 했고 최선을 다해서 흥미롭고 자연스럽게 만드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거예요.

10. 글을 쓰고 나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원고료를 받을 때요. 원고료는 제 글이 다른 사람들이 읽을 만하다고 인정해주시는 거기도 하고 그 돈으로 먹고살고 다음 작품을 하는 데 무지무지 도움이 되어요.
글쓰기 과정에서 가장 기뻤을 때는 제가 모르고 써둔 조각이 다음 조각들과 달탁달칵 맞아서 갑자기 퍼즐의 전체가 드러날 때가 있어요. 그럴 때의 희열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만큼 상쾌합니다.

11. 조용한 거울에서도 가장 조용한 편인, 신비에 싸인 작가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의도적인 건가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렇게 하시는지, 아니라면 앞으로 달라지고 싶은 모습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판타지 동물들도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신비로워졌나 봐요. 부족한 능력으로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는 게 벅차서 온라인은 많이 활동하지 못했어요. 오프라인 일들은 꾸준히 해왔는데 온라인까지는 조금 벅차더라구요. 그리고 음, 개인적으로 저는 생각이 느리고 짧아서 아주 오래 천천히 생각하고 배워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말은 날아가지만 글은 남아요. 그걸 책임지기가 벅찼어요. 그 간극에 서 있다가 남들이 다 말하고 일할 때 같이 박자를 못 맞춘 것뿐이에요. 저도 너무 아쉽습니다.
앞으로 달라지는 모습은 저도 알고 싶어요. 저는 매일 변한다고 생각하는데 매일 어제랑 똑같기도 합니다. 그저 꾸준히 멈추지 않고 버틸 수 있기만을 바래요. 호쾌하고 장대하게 말하고 저도 거기에 맞춰 변하고 싶은데 못 하면 실망의 간극이 너무 커서 그냥 현실적인 것들을 매일 조금씩 주워담고 있습니다.

12. 앞으로 계획하신 작업 또는 도전 중인 과제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미로냥님의 질문: 원시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정서적인(말하자면, 흔히 말하는 여성적인 이미지를 쓰는데 그게 능숙하기 때문에 혹은 매우 근원으로 가져가 쓰기 때문에 스케일이 크게 느껴진다고 할지, 세계가 단단한 그런 이미지예요) 세계를 잘 다루는 분이라는 인상이 남아 있는데요, 혹시 새로운 단편소설집이나 연작소설집을 준비하고 계신 게 없으신지…… 제가 보고 싶어서요……)

저를 기억해 주시는 것만도 진심으로 너무 감사드려요.
세계가 단단해 보이는 건 세계를 구축하고 사건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고 그걸 설득력 있게 받쳐주는 세계를 재구성하기 때문인 거 같아요. 그래서 매 이야기마다 다른 세계를 가져오는 수밖에 없었어요. 멋진 사건이 떠올라도 거기에 걸맞는 세계를 다 짜지 못해서 쓰지 못한 이야기도 아주 많아요.
단편소설집이나 연작소설집을 낼 기획력과 실행할 체력을 위해 열심히 살겠습니다.
결론. 아직 전혀 없어요. 그림 작품 쪽은 엔틱크리쳐 마이너 카드를 2020년 발표를 준비중입니다.

13. 거울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거울 100주년 기념호. 원합니다.

14. 이 작가가 궁금하다! 다음 릴레이 인터뷰 바톤을 받을 작가분을 지명해 주세요. 왜 알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싶은지도 살짝 덧붙여서요.

정소연 작가님.
정말 무시무시하게 많은 일의 양을 소화하고 계심에도 현실의 피로와 귀찮음, 혹은 사소한 이득에 연연하지 않고 한결같이 상냥하고 세심하고 정의로운 방향으로 굳건히 나아가세요. 그 힘을 유지하시는 비결이 정말정말정말 궁금합니다.

댓글 2
  • 아이 19.12.22 11:27 댓글

    허.. 이런 게 정말 글에서도 묻어나는군요. 신기해요.

    착한 분이신 듯.;; 저랑은 좀 과가 많이 다른..;;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른..;

    그리고 조금 느리신 거 같고.;; 이건 저랑 좀 비슷하신데.. 대신 전 요즘 들어 조금 빨라져볼까 그러고는 있어요,;;

    거울에서라도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아이님께
    No Profile
    글쓴이 pena 19.12.22 22:42 댓글

    정말 글에서 묻어나는 게 신기하죠.

     

    자주 오래 볼 수 있기를 저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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